은교는 좀 화려한 마인드였던 데 비해 그 옥이는 어린 나이부터 가장 역할을 해온 처지라 더더욱 마음이 갔다.
이 친구도 노래하는 가수였지만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 차도 없이 서울 명동에서 천호동으로, 다시 영등포까지 이른 저녁부터 오밤중까지 이동하면서 노래하는 친구였다. 필자는 낮에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옥이가 노래하는 곳마다 가방과 구두를 들고 따라다녔다. 지금 말하자면 로드매니저 역할이었다.
무명가수였던 옥이가 방송을 타도록 필자는 엽서를 하루 수십 통씩 써서 보내고 옥이의 언니가 레코드샵을 낸다고 하여 필자 오빠를 동원하여 매장 매대 설계와 설치까지 도와줬다.
그러던 어느 날 옥이는 사소한 일로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매일 헌신해준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필자는 ‘나를 친구로 여겼다면 저런 태도는 안 보일 텐데’하는 맘으로 95번 버스를 타고 명동에서 집인 신림동까지 오는 내내 창피한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다.
우리 둘을 다 잘 아는 작곡가는 임종수 선생(옥경이, 고향역 작곡)은 황금당빵집에서 가방과 구두를 들고 우는 필자에게 위로의 말을 하였지만 옥이가 연락할까, 아니 필자가 맘약해 연락할것같아서 전화번호도 수첩에서 지웠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필자에겐 전화위복이 됐다. 갑자기 시간이 나게 된 시간을 체력장과 학력고사 공부하여 4년제 대학에 다시 입학한 것이었다.
그리고 4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옥이가 먼저 전화했다. 대뜸 숫자 욕이 들어간 욕이지만 결국 무너졌다.
본인도 가슴이 멍들었지만 갑자기 매일 보던 친구가 몇 년간 연락 없으니 옥이도 힘들었던가 보다. 옥이와 필자는 이제 새로운 영화가 나와도 함께 가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불쑥 다시 만나는 사이가 이어지고 있다. 옛날 이야기할 때 옥이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야!! 너 나랑 다녔으면 행정학과 다시 갔겠니. 나 때문에 더 발전적으로 산 거야.”
이대목에서 웃어야 할지 아니라고 소리 질러야 할지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