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움에 한 잔, 즐거워서 한 잔, 성탄절이라 한 잔, 사는 얘기에 취해서 또 한 잔, 이래저래 한 잔. 순식간에 소주 다섯 병을 비웠다. 음식점 창문 유리에는 TV에도 소개됐다는 집이라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북적였다. 어느새 취기가 가득 올라왔다. 모처럼 아내들도 홀짝홀짝 한 잔씩 들이키더니 얼굴에 홍조가 불그레하게 돈다. “그래, 오늘 같은 날 한잔 안 하면 언제 할까!” 성탄절 분위기에 모두들 부어라 마셔라 했다. 낮술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얼큰하게 취했을 때쯤 보쌈집을 나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종로 3가의 거리는 화려한 네온등이 점멸하기 시작하면서 북적이는 인파와 함께 한층 더 성탄절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잔 술에 취기가 발동한 한 친구가 천천히 걸어서 광장시장에 들러 녹두 빈대떡에 간단하게 한잔 더 하자고 한다. 모두들 헤어지기 아쉬워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깨동무를 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하면서 광장시장 쪽으로 걸었다. 성탄절이라 그런지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은 한층 밝아 보였다.
그런데 복잡한 거리를 부지런히 헤집으며 드디어 광장시장엘 도착했는데 아뿔싸!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시장 골목에는 각종 먹을거리들로 가득했고 왁자지껄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두툼한 녹두빈대떡이 기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포장마차와 노점상 등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앉을 자리 없이 빽빽하게 둘러앉아 있었다. 우리는 이 집 저 집에 기웃대며 일곱 명이라고 손가락을 펴 보였지만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금은 자리가 없단다. 그렇다고 그냥 발길을 돌릴 순 없었다! 한 친구가 부지런히 발품을 팔더니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2층 한 곳에 막 자리를 비운 일행이 있어 운 좋게 그 자리를 잡고 두툼한 녹두빈대떡에 소주와 막걸리를 시켰다. 금세 튀겨온 감칠맛 나는 녹두빈대떡에 시원한 막걸리를 들이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에 착착 감기는 막걸리 맛, 종로 3가에서 소주로 얼큰해진 상태에 찬 막걸리가 들어가니 알코올 기운이 전신으로 확 퍼지면서 더 흥겨운 기분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일행 중 한 친구가 흥얼흥얼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막걸리 한 잔에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이는 이 순간에 친구의 노래는 정말 분위기에 딱 맞는 노래였다. 젊은 시절 유행처럼 따라 부르던 노래이다 보니 슬며시 옛 추억이 생각나서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다가 나중에는 친구들이 모두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 미간을 찌푸리면서 질색을 하는 아내들 만류로 잠시 주춤했지만 한 번 터진 노래장단을 멈출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 한 친구가 흥에 겨운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우스꽝스러운 춤까지 추면서 노래를 불러대니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그 친구는 바로 옆 테이블 손님에게 다가가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들썩이는 어깨춤과 노래는 멈출 줄 몰랐다.
“사랑이 깊으면 얼마나 깊어, 여섯 자 이내 몸이 헤어나지 못하나 / 하루의 품삯은 열두 냥 금 우리 님 보는 데는 스무 냥이라. /엥헤이 엥헤야 엥헤이 엥헤야 에헤이 에헤이이 에헤이~”
그런데 우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옆 테이블의 손님들도 흥얼흥얼 장단을 맞추는가 싶더니 손님 왈, 자신들도 젊은 시절에 즐겨 불렀던 노래라면서 불그레 상기된 얼굴로 콧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는가? 순식간에 주점 안의 다른 손님들까지 손뼉을 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어눌한 춤을 덩실덩실 추는 친구를 보면서 손님들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다. 성탄절 분위기가 행복한 웃음을 전염시켰나보다.
어지간히 시간도 흐르고 취기도 올라 일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둠이 깔린 종로거리는 휘황한 네온이 점멸하고 있었다. 얼굴에 스치는 찬바람에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각자 헤어져 필자는 종로 3가 쪽으로 아내와 함께 걸었다. 술도 깰 겸해서 걸었는데, 걷다 보니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한다. 기름진 빈대떡에 찬 막걸리가 뱃속에 들어가니 탈이 생긴 듯하다. 간신히 종로 3가 전철역에서 일을 보고 나와 집으로 향하는 3호선 전철을 탔다. 그리곤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린 채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슬며시 배가 또다시 아파와 잠이 깨었다. 내리려면 두 정거장이 더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살살 아파오던 배가 금세라도 소나기처럼 쏟아질 듯 용틀임을 해대는데,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두 정거장이면 최소 4분 이상은 걸릴 터인데… 간신히 버티면서 집 근처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까지 용틀임을 해댔다. 온갖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참고 있는 와중에 옆에 있던 아내가 킥킥거린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뛰어가던 필자는 나중엔 바지춤을 부여잡고 오리궁둥이처럼 뒤뚱거리면서 화장실을 갔다. 아~
필자는 그날, 만년 팬티로 집에 돌아왔다. 바짓가랑이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가는데, 머릿속엔 아직도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 조금 전 광장시장에서의 음률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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