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때 크리스마스도 그렇게 흥청거리며 시작되었다. 당시 중등부 선생님은 “이제까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을 받기만 했는데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가 선물을 주기로 하자”고 제안하셨다. 딱히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것은 아니었고 교회의 새로운 행사였던 셈이다. 물론 선물은 교회에서 준비하고 우리는 포장만 했다.
그런데 선물은 평소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치약, 칫솔, 비누, 밀가루 등 생필품이었다. 마치 국군 아저씨한테 보내는 위문품 같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가 직접 전달한다니 국군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았다. 꽤 큰 보퉁이의 선물을 하나씩 든 우리는 선생님의 인솔 아래 교회 근처에 있는 인왕산으로 올랐다.
깜깜한 밤에 랜턴을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얼마쯤 올랐을까 선생님은 가마니 같은 것이 드리운 작은 굴 같은 곳을 가리키며 선물을 전달하라고 하셨다. ‘도대체 여기에 누가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깡마른 할아버지가 기침을 하시며 얼굴만 내밀었다.
깜짝 놀란 필자는 선물꾸러미를 말없이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 받으시고 고맙다고 인사를 여러 번 하셨다. 우리는 그날 난생처음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짓말같이 그곳에 다녀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마음은 오를 때처럼 신나지 않았고 모두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필자는 늘 하던 반찬 투정도 안 하고 고집도 덜 부리고 엄마 말을 제법 잘 들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버릇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날의 기억이 행복함으로 인식된 것은 한참 후였다.
몇 년 전 당시 인왕산에 같이 올랐던 친구가 45년 만에 전화를 했다. 그 친구도 그날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해 그동안 봉사하는 일에 많이 동참했는데 그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우리는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 12월이 오면 올해도 어김없이 인왕산 친구들이 모일 것이다. 열다섯 살 때 우리 맘속에 뿌려진 그 작은 행복을 키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