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통지표에 ‘의자에 앉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과 함께 나오던 단골 멘트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오류가 많다’였다. 필자는 그 시절 자그마한 걸상에 비스듬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보다는 마루 사이에 낀 지우개 가루를 쉽게 파내는 방법 따위를 생각하느라 골몰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 말씀이 맞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올 땐,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노량진의 오래된 동네라 구불구불 골목이 많았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경우의 수를 조합해보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헤매기도 했지만 나만의 지름길을 발견하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수학 문제를 풀 땐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풀려고 애를 썼다.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정답에 동의하기 어려워 국어 성적은 늘 형편없었다.
새로운 것을 찾는 성향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했다. 특히 운전할 때 도드라졌다. 길을 가다 막히면 망설임 없이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운이 좋게 지름길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길을 찾지 못해 되돌아 나와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엄마, 오늘도 또 길을 잘못 들었잖아. 제발 아는 길로 가” 하며 뒷좌석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왜 아는 길 편안한 길을 놔두고 굳이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걸 즐길까? 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이쪽 혹은 저쪽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일.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고 세탁소에 맡긴 세탁물을 찾으며 치킨 먹을래 피자 먹을래? 집으로 전화 거는 일. 이런 시시콜콜한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새로운 세상은 헤매지 않고는, 호기심 없이는 발견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필자에겐 낯선 것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요란한 소리와 불규칙한 진동, 간질간질함에서부터 설렘은 시작된다. 입국 허가 스탬프를 찍어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뚝뚝하지만 생김새는 저마다 다르다. 칭다오 버스 안에서 맡았던 퀴퀴하고 쿠린 냄새는 여행을 후회하게 만들고, 말간 얼굴에 순진한 미소로 다가와 빵 값을 사기치던 하노이 소녀에겐 버럭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이런 불쾌함이나 두려움도 낯섦이라는 필터를 통과하고 나면 행복한 경험이다.
“여행은 문과 같다. 우리는 이 문을 통해 현실에서 나와 꿈처럼 보이는 다른 현실,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다른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말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는 필자의 삶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