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둔야학은 매년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소풍을 갔다.
가까운 칠보산이나 반월저수지 혹은 화산목장 등으로 걸어서 갔다.
소풍날이 오면 비가 오면 어쩌나 싶어 밤잠을 설쳤는데 막상 날이 밝아서 보면 온누리에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곤 했다. 소풍날 아침의 햇님은 왜 그렇게도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일까?
부모님들도 소풍날이면 신경을 쓰셨던 것인지 아이들은 후줄근한 평상시 옷이 아닌 산뜻한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 소풍날이면 입은 블라우스가 유난히도 하얗게 보였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눈이 커다랗고 피부가 까만 2학년 후배였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뛰어다녔고, 그런 아이들 곁에는 늘 선생님들의 부드러운 미소가 있었다. 선생님들과 같이 걸어서 가는 소풍길은 마냥 즐거웠다. 대화를 무척 좋아했던 필자는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논둑길을 재잘거리며 걷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같이 따라 부르기도 했다. 들판에는 온통 생기가 넘쳐흘렀다. 실바람은 초록빛 벼 위를 사뿐히 날았고 길섶에는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귀엽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이렇게 바람과 꽃들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처음에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황톳길은 어느새 끝이 나고, 목적지인 화산목장이 펼쳐져 있기도 했고 칠보산이 우뚝 서 있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마음이 들떠 아침을 못 먹은 데다가 먼 길을 걸어왔기에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기 마련이어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애란아, 애란아~~”
어느 해 소풍날 점심시간이었다.
선생님들과 야학생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필자 이름을 불렀다.
필자는 못 들은 척하고 더 깊은 숲속으로 자꾸 들어갔다.
그들에게 들킬까봐 가슴은 연신 두근두근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될 것 같아 얼른 그 자리를 피했던 거였다.
두부를 굉장히 좋아했던 필자는 그날 아침 엄마에게 고집을 부렸다.
“밥하고 같이 싸가야지 두부만 어떻게 먹니?”
“괜찮아요, 두부만 먹어도 되니까 두부만 싸갈래요.”
결국 밥은 안 싸고 커다랗고 네모난 양은도시락에 두부부침만 잔뜩 쌌다.
그런데 막상 점심시간이 되자 ‘아차’ 싶었고 ‘엄마 말을 들을걸’ 후회가 됐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두부만 들은 도시락 뚜껑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숲속으로 슬금슬금 도망을 갔던 것이다.
소나무 밑 그늘에서 호젓하게, 커다란 양은도시락 뚜껑을 열고 보니 아침에 싼 두부부침들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두부만 먹으려니까 목이 메어서 3분의 1가량만 억지로 먹고는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난 무렵에야 어슬렁어슬렁 내려가니 선생님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아까는 어디 갔었니? 너를 얼마나 찾았는 줄 아니? 점심은 먹었어?”
“일이 좀 있어서요. 네, 먹었어요.”
선생님께 걱정을 끼쳐드린 것이 죄송했으나 사정을 말할 수 없었던 필자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사실 필자가 숲으로 도망갔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소풍 때마다 도시락을 여유 있게 준비해오셔서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마음을 써주시던 선생님들 때문이었다.
어디에 단체로 주문해서 가지고 온 것 같은 그 도시락은 김밥은 아니었다. 얇은 나무도시락에는 고슬고슬해 보이는 흰 쌀밥이 담겨 있었고 한쪽 귀퉁이에 콩장과 함께 까만 통깨가 뿌려진 단무지가 있었다.
아마 필자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도시락을 주시려는 선생님과 죽어도 받지 않으려는 필자가 또 한바탕 힘겨운 실랑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계속-
*서둔야학은 2000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이 건물 입구에 세운 ‘서둔야학 유적지’ 안내판에 역사가 요약돼 있다. 이 안내판에는 “이곳은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 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1965년 당시 학생이던 황건식 등의 야학 교사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이곳 부지를 구입해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야학교사와 졸업생들은 현재 서둔야학회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원희복의 인물탐구] 내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