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만들지 말자

기사입력 2017-08-09 11:05 기사수정 2017-08-09 11:05

“아니! 이 xx가 너 상병이 일병한테 맞아도 싸! 이런 개xx를 봤나!"

군 시절 일등병인 필자가 순간적으로 화가 나 상급자인 상등병의 귀싸대기를 때렸다. 주위에는 내무반장급인 하사도 있었고 병장 등 고참병사가 수두룩했다. 저녁식사 후 내부반 자유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던 필자의 하극상 전말은 이러했다.

당시 일등병인 필자는 대대급 부대의 보급품을 다루는 보급사병이었다. 그날따라 상급 부대에서 군화가 몇 켤레 내려왔는데 이를 갖고 산하 중대에 가서 제일 낡은 군화부터 바꿔주라는 임무를 선임하사로부터 받았다.

새것이고 공짜였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병사들이 필자 주위를 감싸더니 자기 것도 바꿔달라며 떼를 썼다. 하나하나 검증하면서 교체해주던 중 상병 한 명이 슬쩍 자기 신발을 두고 군화를 집어 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묵인하면 질서가 금방 무너질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뛰어가 상급자인 상병의 따귀를 때리고 군화를 뺏었다. 김 상병과 조 일병 사이에 일어난 물건 도둑질과 하극상 사건이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김 상병은 자기가 한 잘못이 있어 대항하지 못했고 상황을 알아차린 내무반장이나 상급 병사들도 모른 척 딴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 수습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부정한 행위에 화를 참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로 저지른 행동이었다. 계급절대사회인 군대에서 그것도 여러 병사가 보고 있는 내무반에서 하급자에게 따귀를 맞은 김 상병의 자존심은 그날 엄청나게 구겨졌을 것이다. 서둘러 보급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싸늘한 병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젠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생겼다. 두려움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김 상병이 유격훈련장 조교로 전출을 갔다.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훈련이 유격훈련이라는 것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안다.  

몇 달 뒤 우리 중대도 매년 실시하는 유격훈련을 받게 되었다. 틀림없이 김 상병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렇다 해서 유격 훈련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필자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운 좋게 직접 대면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함만이 절실했다.

유격훈련장 두세 코스를 돌고 가장 난이도가 높은 훈련코스가 시작됐을 때 눈앞에 빨간 모자를 쓴 유격 조교가 서 있었다. 김 상병이었다. 순간 그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웠다. 그는 필자에게 앞으로 나오라며 까닥까닥 손짓을 했다. 음성은 낮았지만 분노로 가볍게 떨리고 있음이 감지됐다.  

“내가 너 오면 죽여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복수심과 증오로 이글이글 타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유격 조교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무지막지한 신체적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은 이내 풀어졌다. “막상 너를 보니 내 마음이 풀어지는구나! 훈련 잘 받고 가라. 나는 다른 코스로 갈란다”하며 필자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가버렸다. 그는 후임 유격 조교에게 자신이 있던 부대의 후배들이 왔으니 잘 봐주라며 부탁까지 했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던 필자는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김 상병이 복수심으로 화풀이를 했다면 필자의 마음속에는 하극상을 일으켰다는 뉘우침보다는 보급품을 제대로 나누어주기 위한 정상적인 행동이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에 급급했을 것이다. 김 상병의 용서로 필자는 상황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잘못은 하지 말자고 뉘우쳤다.

자신의 잘못으로 감옥살이를 하고도 범죄 사실을 신고한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 찾아가 보복을 했다는 섬뜩한 뉴스도 많다. 내 잘못은 덮어두고 남의 잘못만 지적하지 말자.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역지사지를 해보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들여다보면 이해되고 참을 수 있는 일이 많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원수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 원수는 반드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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