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가 되어주신 중·고등학교 담임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를 윤정모 소설가님께서 써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정선우 선생님, 새해입니다. 새 수첩에 지인들의 연락처를 옮겨 적다가 어느 이름 앞에서 손길을 멈춥니다. 선생님 성함과 흡사한 이름입니다. 단지 흡사할 뿐인데도 선생님에 대한 생각들이 가슴속에서 회오리칩니다. 그리움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겨두지 못했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은혜도 몰랐던 제 양심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중학교 때 담임으로였습니다. 비오는 날 장화가 없어서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께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때 저는 눈 똑바로 뜨고 대들었지요.
“돈 없어서 장화를 못 사는 것도 죕니꺼?”
선생님께서는 “중학생은 학교 규칙을 지켜야 한다. 다음부터는 그냥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교원노조로 잡혀가셨습니다. 그때 수감된 선생님들이 낮에는 극장 앞 철조망 안에서 운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점심시간마다 가보았습니다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두어 달 만인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지만 제가 철조망으로 갔던 일은 선생님께서 아실 리가 없고, 또 담임도 아니어서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한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해 학기말 시험 때였습니다. 생물 시험지를 받아 보니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대충 끝내고 남은 시간은 시험지 뒷장에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때 저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시험지를 본 생물선생님께서 저를 정신병원에 보내 정신 감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때 선생님께서는 “단지 만화를 그렸을 뿐인데 정신적 문제로 몰고 가는 건 옳지 않다”고, 이제는 담임도 아닌데 극구 반대했다는 사실을 반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저는 고맙다는 생각을 전혀 새겨두지 못했습니다.
제 미음의 켜와 층, 의식구조는 그처럼 얕고 좁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기억을 흡수해두는 기능이 없었던 것일까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께서 또다시 제 담임이 되셨습니다. 큰 말썽 없이 잘 지나갔는데 늦가을 어느 날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온 사촌오빠의 팔짱을 끼고 남포동을 걸었던 것이지요. 대학생 오빠라 뽐내고 싶었던 것인데, 그때 맞은편에서 훈육주임 선생님께서 오고 계셨습니다.
전 팔짱을 낀 채 고개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갔지요. 그러지 않아도 저를 수상쩍게 보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제가 남자 팔짱을 끼고 유유히 지나갔으니 곱게 봤을 리가 없었겠지요. 이튿날 학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들이 의견을 모아 저에게 근신처분을 결정할 때, 정선우 선생님, 선생님께서 학부형의 확인을 요청하셨다지요? 그런 사실도 저는 엄마한테 전해 듣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고3 때, 제가 정말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자살소동, 그때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지요? 발단은 제 친구였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 아이가 연탄가스로 가족을 다 잃은 후 혼자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소식을 몰라 궁금해하던 차에 초량 텍사스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양공주가 되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공납금과 시계를 팔아서 방을 얻었지요. 쌀과 연탄도 들이고 그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여긴 지옥이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 어서 나가자….”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간 식당 청소, 가정부로 전전했다. 가는 곳마다 주인 남자가 나를 겁탈했다. 그런 일을 겪느니 자의로 몸을 파는 이곳이 백배는 낫다….”
저는 친구를 설득하지 못한 채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님. 우리 학교 어느 선생님께서 제가 거기에 있는 것을 목격하신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훈육주임이 불러서 그런 요상한 곳엔 왜 갔느냐, 화장을 진하게 한 그 여자는 누구이며 언제부터 그런데 출입을 했느냐, 해명을 요구하더군요. 저는 변명도,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징계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솔직히 고백할까요? 저는 학교 벌칙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로 걱정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마다 저를 문제아로 본다는 것도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살소동은 뭐냐고요? 갑자기 살기가 싫어지더군요. 예쁘고 착한 내 친구가 양공주라는 것도 끔찍했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제 존재도 혐오스러웠습니다. 제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 사라져주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약국을 돌면서 수면제를 샀습니다. 그리고 해운대로 갔지요. 동백섬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이다와 함께 수면제를 삼켰습니다.
제 기억은 거기까지입니다. 누군가가 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 위세척 후 학교로 연락했다는 것, 하필이면 그날이 또 선생님이 당직이었다는 것, 담임도 아니면서 선생님께서 달려와 저희 집까지 업고 가셨다는 것. 그러한 전말을 어렴풋이 전해 들은 것 같은데 어찌 깡그리 잊었다가 이제야 기억이 나는 것일까요?
선생님, 그때 저는 사흘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곧장 등교를 했습니다. 정학당한 일을 제가 잊었는지 아니면 제 소동으로 학교에서 징계를 풀어준 것인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수면제를 먹고 자는 사이 많은 기억들이 무의식으로 숨어버렸다가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그냥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저를 구해주셨던 제 인생의 구원투수였습니다. 한데도 저는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선생님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갚을 길조차 없는데 지금 이 생생한 기억들의 부활은 또 어쩌란 말입니까.
어느 동화에서처럼 하늘나라로 편지를 보내주는 우체통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착한 제자로 돌아가서 선생님의 거룩한 은혜를, 가슴 터질 것 같은 고마움을, 절절한 그리움까지 낱낱이 다 적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쭤볼 것입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주실 거지요?”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