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그동안 강녕하신지요? 무엇 하나 순조로울 것 없는 세상에 날씨마저 이러하니 주위의 장삼이사의 삶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언젠가 읽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우상을 침묵케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어려울 때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며 저는 정치가 통계수치로 제시하는 장밋빛 희망 같은 건 결코 믿지 않고 스스로를 살아왔습니다.
이건 선생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신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1985년인가 그때 서신에 선생님께선 “삶의 분한(憤恨)을 다 터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하나라도 해결되는 것이 있던가요? 때론 침묵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의 ‘침묵’을 카뮈의 ‘자기의 고통을 주시하는 것’으로 재해석해서 힘들 때도 가능한 한 비명을 지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데 두서없이 무슨 서신 이야기냐 하실 것 같아서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연한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올 초 ‘문학사상’에 발표한 ‘내 가난의 고귀한 목록엔 장미의 열정도 있다’는 시에서 “전교 일등 아들을 차마 공장으로 보낸 한과/그 탓에 평생을 룸펜이 되어버린 분노가 있었다!”는 구절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이 60에 돌아본 지난 59년이 잘못이었다’는 뜻의 오십구비(五十九非)라는 말이 장자 ‘잡편’에 나오던데, 환갑이 되어서 돌아보니 어쩌면 위의 졸시 두 구절에 제 인생의 코가 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너무 힘든 시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 등단작품 중 하나인 ‘동구밖집 열두 식구’는 저의 가족사로 땅 한 뙈기 없이 죽세공 일로만 호구지책을 삼던 그때에, 삼부자가 임란 의병으로 전사한 제봉 고경명의 12세손이 당신이라는 것을 되뇌던 아버지의 주사(酒邪)가 지금의 폭염처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에서 중동무이당한 채 세상과 삶에 대한 분노로 10여 일간 서울, 부산 등지로 고단(孤單)의 행로에 몸을 맡겼었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놓지 않았던 소설가의 꿈 때문에 손엔 늘 책이 잡혀 있었던 그 즈음, 방위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양장점 수선가게를 하던 여동생 집에서 잠시 기거하던 1984년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 서면의 ‘영광도서’에 들락거리던 중 우연히 시집 두 권을 보게 되어, 이를 계기로 일주일 만에 20여 편의 시를 써서 무모하게 ‘실천문학’에 보냈습니다. 한데 그중 7편이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실려 소위 등단이라는 것을 하였는데, 저를 포함한 14명의 농민, 노동자, 운동권 사람 등의 투박한 시들을 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 발표를 등단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다시 소설을 쓰고 있던 차, 당시 ‘창작과비평’의 주간이었던 선생님께서 창비 앤솔로지에 게재할 시 5편을 청탁해주셔서 본격적으로 시를 독학하기 시작했으나 청탁에 응한 시는 게재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시적 재능을 보았기에 선생님께서 청탁하신 걸로 스스로 해석해서 저는 1985년부터 한 번에 20~30편의 시를 대학노트에 써서 선생님께 무턱대고 보냈습니다.
아무 물정도 모르던 저는 오로지 공부에 대한 일념 하나로 원고노트를 보냈었는데 선생님께선 이를 무시하지 않고 원고지 한두 장에 꼭 독후감을 써서 보내주셨습니다. 그중 서두에 밝힌 평생 저의 삶의 철학이 된 말씀을 백석의 ‘주막(酒幕)’이라는 시와 함께 써서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제 시가 분노와 한풀이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시는 긴장과 절제의 미학이다”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 이는 제 시가 쓸데없이 무슨 뱀의 다리처럼 길어졌기 때문이었겠지요. 읽으신 시에 ○표나 ×표 혹은 Δ표 등으로 표를 해주고 그중 ○표의 시들은 몇몇 잡지에 발표도 해주시길 2년 여, 저는 마침내 농촌·농민 얘기를 쓴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라는 첫 시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객지를 떠돌다 선생님께 시를 배우며 마음을 잡고 고향에 내려와 소작(小作) 일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과의 인연을 몇 군데 약간씩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데 이렇게 정식으로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저는 ‘독학자’이기에 그 어떤 스승도 없으나 그래도 제가 오늘날까지 나름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의 근거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시집 8권, 산문집 3권 그리고 문학상도 네댓 번 탔으니 이는 시인으로서의 덤이지요.
만약 그때 선생님께서 제 원고노트를 외면하셨다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해봅니다. 사람들은 이런 가정이 부질없다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그만큼 삶의 허기와 동시에 삶의 과잉으로 모든 신(神)들과도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기에, 그때 선생님의 짤막한 서신들은 저에겐 시원지(始原地)의 단물 같은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있어 가난과 병고며 불우는 여전히 개선될 여지가 없어 이런 것들에는 이제 무심하기도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외아들의 난치병 때문에 크게 실망한 저는 10여 년 전부터 다시 고향 집에 처박혀버렸습니다. 고향집에 우거하며 텃밭에 상추며 고추를 심고 불교도 배우고 좌선도 해보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뇨망막증 때문에 예전처럼 책을 많이 못 읽는다는 것과 ‘대표시’ 한 편은 남겨야겠다는 욕심이 날로 커져간다는 사실입니다. 요새만큼 저의 ‘천학비재(淺學菲才)’를 절감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중앙일보 아침 시란에 “고재종의 시는 때론 수일하고 때론 속악하다. 속악하다 함은 명품주의(名品主義) 탓이다”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데 그 명품주의는 저의 무학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시집 자서에 밝힌 대로 오월 바람에 잎새가 한 번 발랑 뒤집히는 순간만큼을 포착한, 그야말로 신운(神韻)이 스치는 시를 받아 적어야할 텐데 말입니다.
한데 인간사는 여전히 고단합니다. 시골에 있으니 생사가 너무 분명해 보이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가 아니라 실제 등이 활처럼 휘어버린 호호백발들이 유모차로 고샅길을 밀고 다니는 모습을 매일 보며 저는 여전히 ‘민중파’임을 절감합니다. 그 노인들의 이름이라도 시로 불러주는 것으로, 지금껏 선생님께 약주 한잔 대접해드리지 못한 저의 미급과 부덕을 대신하려 합니다. 하루하루 행복하시길 빕니다.
고재종(高在鍾) 시인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과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시론집으로 ‘주옥시편’과 산문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