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이야기

기사입력 2019-02-15 09:49 기사수정 2019-02-15 09:49

문방구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맘에 드는 오색 볼펜을 한 자루 샀다. 책이나 신문을 볼 때, 언제든 좋은 구절을 발견할 때 밑줄을 치기 위해서다. 한 번 읽고 치우기에는 아까운 글이나 문장에 오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으면 시각적 효과도 있고,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흑백을 컬러로 살려낼 문장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설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루 만에 그 볼펜들이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참 난감했다. 생각해보니 볼펜은 내가 사용하고 있을 때만 내 것인 것 같다.

볼펜은 내 옷 주머니마다 들어 있다. 아랫바지 주머니에도 하나, 윗도리 주머니에도 하나, 그리고 속주머니엔 몇 개가 한꺼번에 들어 있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든 출동 준비를 할 수 있는 전투부대 같다. 이렇게 넣고 다녀야 마음이 편안하다. 메모를 자주 하는 습관이 있어서다. 신문을 읽을 때, 괜찮은 문장을 발견할 때 밑줄을 긋는 건 이제 일상화되어 있다. 쏟아져 나오는 많은 정보를 또다시 읽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주머니에 볼펜이 없으면 항상 불안하다.

그런데 볼펜은 한꺼번에 몰려 있다가도 어느 날엔 모조리 수해지구 출장 나간 주민센터 직원들처럼 한 개도 없을 때가 있다. 아무리 주머니 위아래를 뒤져봐도 그 많던 볼펜이 한 개도 없다. 이럴 때는 몽당연필이라도 줍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애를 태우다가도 어느 때가 되면 다시 둥지로 돌아오는 물새 떼처럼 가득 들어차 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산 볼펜이 며칠 안 가 없어지기도 하지만 처음 보는 볼펜도 내 주머니에 들어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구매할 때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을 골라도 그때뿐, 사용하다 보면 디자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잉크가 고루 잘 나오기만 하면 그만이다. 한때 가격이 저렴해서 뭉텅이로 사놨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잉크가 부드럽게 나오지 않아 동그라미 하나 긋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중국에서 수입해온 물건들은 불량품이 많았다. 그래서 볼펜은 사용하던 제품을 또 쓰게 된다.

볼펜은 소유와 집착에서 자유로운 물건 같다. 볼펜이 없어져도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다.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도구가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아마도 볼펜은 공동의 물건이요, 나눔을 실천하는 표징인지도 모른다. 내 주머니에서 들락날락 자유롭다. 쉽게 빌려주기도 하고 빌려 쓰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임에 틀림없다. 자주 들락거리는 자유가 있는 볼펜, 소유했으나 구속되지 않는 모습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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