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1. 배움의 즐거움을 찾아

기사입력 2016-03-08 08:06 기사수정 2016-03-08 08:06

(일러스트 국형원)
(일러스트 국형원)

<글>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어느 선배 교수가 정년을 마치고 10년을 되돌아보며 이런 충고를 한 적이 있다.

“정년 시한은 생각보다 빨리 오고, 정년 이후 세월은 더 빨리 가네. 그런데 정년을 대비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네!”

하지만 필자의 나이 50대 때 들었던 그 선배 교수의 조언은 당시 내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선배 교수의 조언이 ‘삶의 지혜’로 가득 찬 백자 그릇처럼 다가온다.

필자는 그날그날 일상 업무에 쫓기며 정년이라는 ‘행정 조치’를 피동적으로 맞이했고, 정년 후 어느덧 13년이라는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정년을 대비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네!”라던 선배 교수의 충고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문득 내게도 ‘계획’을 세울 계기가 생겼다.

하루는 필자가 국내 미술사학계의 저명한 석학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를 했다. “지난 40년간 모아온 자료, 특히 서양과 동양, 그중에서도 조선 시대의 초상화 관련 자료를 어떻게 정리해 학술 자료로 남길 수 있을지 생각 중입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미술사학자 유홍준(兪弘濬, 명지대) 교수가 대뜸 “그 자료를 가지고 우리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세요”라고 말했다. 유 교수의 제안에 동석한 도자(陶瓷) 미술사학자 윤용일(尹龍一, 명지대) 교수와 조선 회화(繪畵) 사학자 이태호(李泰浩, 명지대) 교수가 좋은 생각이라며 동조했다.

필자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그 제안에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다. 나와는 거리가 먼 현실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반세기라는 세월을 보낸 내가 인문학에 새로 진입, 도전하는 것이 왠지 과욕인 것만 같았다. 그것도 한참 뒤늦은 나이에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애써 수집한 학술 자료가 ‘패지(敗紙)’화되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만 흔히 볼 수 있는 피부 병변이 갖는 미술사적 의미가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늘 답답하던 터였다. 마치 그것이 내가 해내야만 할 과업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숙고 끝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나이 칠순에 명지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정년을 대비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던 그 선배 교수의 가르침이 큰 몫을 한 것은 물론이다.

사실 신입생이 되어 대학원 강의실을 찾아 들어갈 때는 쑥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동급생’들과 연령 차이가 두 배 또는 그 이상이 넘는 데다 내 전직까지 노출된 상황이라 행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강의를 하는 교수들도 ‘늙은 학생’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동급생끼리의 학우애(學友愛)도 차차 생겨 가벼운 마음으로 등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어려움도 있었다. 대학원의 특성상 야간 수업에다 많은 경우 3시간 단위로 강의를 진행해 요통(腰痛) 같은 육체적인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배움의 즐거움이 훨씬 컸기에 다른 불편 사항을 견딜 수 있었다. 그 즐거움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그간 다양한 전문 서적이나 전시회를 통해 얻은 지식이 담당 교수의 강의와 더불어 서서히 체계가 잡히면서 한 차원 높은 지식의 결정체를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배움의 즐거움과 보람을 대학원 과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교양 수준의 동·서양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학위 과정을 통해 깊이와 폭을 달리하는 전혀 예기치 않은 즐거움 또한 만끽할 수 있었다. 폭 넓은 역사 공부와 깊이 있는 동·서양 미술사를 섭렵(涉獵)하는 기쁨은 모든 물리적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작성을 위해 다양한 문헌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공학문 분야를 바라보는 시야 또한 서서히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지는 성취감도 얻을 수 있었다.

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전에는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이런저런 피부 병변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하며 신기해하기만 했는데, 519점의 조선 초상화를 심도 있게 연구하며 약 80% 넘는 초상화에서 피부 병변을 볼 수 있다는 수치화된 사실을 밝히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기쁨이었다. 조선 초상화에 나타난 이와 같은 특징은 동양 문화권인 중국 초상화에서는 훨씬 드물게, 그리고 일본 초상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세계 미술사적 차원에서 밝혀낼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조선 초상화가 가진 유일성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선 초상화에 나타난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정신이 올곧음을 추구한 조선의 선비 정신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은 필자가 젊은 시절에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배움의 즐거움은 연령과 크게 반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에게 활력 넘치는 지식(Knowledge)이 있다면 나이 든 이에게는 조용한 지혜(Wisdom)가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단점보다는 장점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고령화사회에서 나이 든 이는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어야 한다. 더불어 남은 생을 살찌울 배움의 즐거움을 찾아 나서길 권한다.


△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평소 예술, 특히 미술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각별했던 이성낙 명예총장은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전공 박사과정에 입학해 피부과 의사답게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로 독특한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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