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간암과 사투를 벌인 바닷가 사내와 암 잡는 방사선종양학 전문의의 라뽀

기사입력 2017-01-02 17:26 기사수정 2017-01-02 17:26

"나는 운 좋은 암 환자입니다"

▲환자 임재성씨와 국립암센터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 교수. (브라보마이라이프)
▲환자 임재성씨와 국립암센터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 교수. (브라보마이라이프)

거친 바다 마을 출신의 사내라 해도 이 우주선 같은 치료기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폭풍우 속 배 위가 더 속 편하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기계 위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낮은 목소리의 소음은 조용했지만 시끄러웠다. 임재성(林在聲·56)씨는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계가 큰 병을 낫게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암(癌)이라는 큰 병을 말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보통 암이라고 하면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던 어떤 사람이 느닷없는 선고에 당황하게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많다. 그런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임재성씨는 그에 반해 억울한 구석이 많은 경우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주유소 사업을 하던 그는 교직에 있는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평탄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사업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유지됐고, 그의 활달한 성격에 주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자녀도 1남 1녀다. 마치 동사무소 입구에 꽂혀 있는 홍보물 표지 사진 속 가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 반짝이는 가족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강검진에서 B형 간염에 감염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년 빠짐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김태현 교수. (브라보마이라이프)
▲김태현 교수. (브라보마이라이프)
“원래 건강에 자신이 있었어요. 실제로 간염 환자가 겪는다는 식욕부진이나 피로감 같은 것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어요. B형 간염도 어머니를 통해 받은 것이니 크게 동요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정기적인 검사만 제때 받으면 되겠지 하고 평소처럼 생활했어요. 주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主)님이 아닌 주(酒)님을 모실 때였죠(웃음).”

그 시절부터 그는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B형 간염은 까딱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들어왔기 때문에 건강검진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은 조금씩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말, 광주에서의 건강검진 결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암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정기검사 때마다 만났던 의사의 태도였다.

“간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아직 B형 간염 약을 먹을 단계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랬던 그 의사에게서 느닷없이 암 진단을받았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그 상황에서 요즘 의술이 좋아져 초기 간암은 치료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위로가 위로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암 선고는 그에겐 충격이었다. 여느 암 환자처럼 그 역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정과 분노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쳤다. 죽기 전에 손주는 볼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고통은 어느 정도나 될까, 더 괴로워지기 전에 차라리 생을 끝내는 것이 나을까. 말도 안 되는 걱정과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검게 변해 죽어 있는 물고기들이 바닷가로 잔뜩 밀려오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렇게 암 선고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처가 쪽 친척으로부터 일산으로 올라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일산에 국립암센터가 있으니 진단이든 치료든 그곳이 가장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곳 아니겠냐는 조언이었다. ‘약사님’ 친척의 조언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 길로 바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는 국립암센터의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金泰現·46) 교수를 만났다.

비장의 카드 ‘양성자치료기’

김태현 교수는 “임재성씨는 간암 환자 중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환자예요”라고 설명했다 .

“B형 간염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한국과 중국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이에 반해 일본과 서양인들은 C형 간염 보균자가 많죠. 최근에는 간염 예방 백신의 보급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 수가 줄고 있지만, 그래도 B형 간염 보균자는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이 간염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염증이 일어났다 나았다를 반복하는데, 이러다 암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아요.”

임씨의 경우 간암 초기였기 때문에 경동맥 화학색전술로 치료를 했는데, 원하는 만큼 예후가 나오지 않아 간암고주파열치료술까지 시도했다. 경동맥 화학색전술은 간 전체에 여러 암세포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약을 뿌리는 방식이고, 간암고주파열치료술은 특정 암세포에 고주파를 쬐어 높은 마찰열을 발생시켜 괴사시키는 치료법이다.

“문제는 임재성씨의 증세가 다발성(多發性)이라는 것이었죠. 암세포가 또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그 위치가 애매했어요. 접근이 무척 어려운 부위라 수술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양성자치료였어요.”

▲양성자치료기에 누워 진료 중인 임재성씨.(브라보마이라이프)
▲양성자치료기에 누워 진료 중인 임재성씨.(브라보마이라이프)

400억원 넘는 꿈의 치료기

양성자치료기는 CT나 방사선치료기와 같은 ‘의료기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료시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도 장비가 먼저 자리 잡은 뒤에 그 위로 건물이 지어졌다. 지어진 건물 안으로 장비를 넣는 것이 불가능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양성자치료 장비는 가속기 반경이 4km 정도였다. 우주의 기원을 좇는 입자가속기와 유사한 가속기를 통해 수소 원자의 핵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튕겨져 나오는 방사선을 받아 암세포에 쏘이는 방식이다.

의사들에게 이 장비가 꿈의 장비로 불리는 이유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 장비와 달리 주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일반 방사선 장비는 방사선을 투과할 때 암세포 앞뒤의 정상 조직이나 장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방사선 조사각을 이리저리 돌려 쪼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양성자치료기는 정확히 암세포에만 조준사격이 가능하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훨씬 미미하다. 암세포를 죽인 뒤 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은 셈이다. 일반적인 방사선치료가 식욕부진이나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는 2007년부터 본격 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에 한 대가 더 도입돼 국내에 2대가 운용 중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약 480억원이었고, 삼성서울병원이 밝힌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1000억원 선이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치료 시설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60대가 안 되는 귀한 장비다.

치료비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예전의 10분의 1 수준이 됐다. 암종, 치료기간, 치료횟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만~800만원 수준이다.

김 교수는 “최대한 건강한 간 조직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주의를 기울였어요. 임씨와 같이 만성 간변병증이 있는 경우는 낮은 백혈구·혈소판 수치 때문에 출혈이 잘 멈추지 않아 수술을 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치료가 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어요. 다행이죠.”

암 환자 더욱 위험하게 하는 건 ‘얇은 귀’

임씨가 양성자치료기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것은 2016년 2월부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사들은 가능성과 확률을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B형 간염 보균자는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B형 간염 보균자가 많은데, 그에 비해 경각심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와 함께 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곳이 있어요. 바로 언론이에요. 요즘 종편에서 의학 관련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믿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암 환자는 기본적으로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다급하니까요. 이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부 엉터리 프로그램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는 주변의 다른 암 환자들과 등산을 하거나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해왔는데, 불필요하게 효과도 없는 건강식품에 돈을 쏟아 붓는 사람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효과가 좋다고 암 환자들을 유혹하는 각종 식품들에 대해 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말한다.

“흔히 암에 좋다는 음식 중 상당수는 몸에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되레 간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간암은 간을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데 간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예후가 좋을 리 없죠.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간 수치가 나빠져서 오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원인은 음식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

임재성씨는 그래도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간암이라는 장벽을 만났지만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교적 일찍 암을 발견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덕분에 초기에 치료를 받았잖아요. 또 간암에 효과적이라는 양성자치료기를 알게 되어 혜택을 받았는데, 치료를 받기 직전에 건강보험 적용이 돼서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치료 과정에서 임상시험 대상자로 뽑혀 치료비 부담도 줄였고요.”

양성자치료는 아직 모든 암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일부 암종을 대상으로 2015년 9월부터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됐다.

“워낙에 가무에 능했는데, 이제는 술과 이별을 해서 대신할 만한 것이 필요했죠. 그래서 드럼연주를 시작했어요. 절로 흥이 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더라고요. 보통 큰 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왜 신경 안 써주냐, 왜 이건 안 해주냐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병은 자신이 챙겨야 해요.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바라면 그게 이뤄지겠어요? 또 이런저런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의료진의 진료에 따르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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