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생 그들의 청춘사업

기사입력 2018-01-17 09:32 기사수정 2018-01-17 09:32

[커버스토리] PART5 우리 때는 말이야

필자는 58년생 개띠다. 당시 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미팅이었다. 미팅하러 대학에 들어간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시절 대학 1~2학년생들에게 미팅은 대단한 로망이었다. 내성적이어서 미팅을 기피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미팅을 수십 번이나 한 친구도 있었다. 한창 이성에 눈을 뜰 때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성과 교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들은 입학식 다음 날부터 미팅타령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맘에 드는 여자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성 사귀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두세 달마다 여친을 바꾸는 선수(?)들도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미팅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이성 교제 경험이 없어 서툴었기 때문이다. 또 데이트를 하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 그 시절엔 모두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다. 집이 가난해서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미팅은 주로 학과 대표가 여대 학과 대표들과 연락을 해서 이루어졌고, 발이 넓은 남학생들이 여자 친구들을 통해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미팅 인원은 세 커플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한두 커플이 오붓하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미팅 자리에 나오면 먼저 “00학과 0학년 000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뒤 각자 소지품을 꺼내어놓고 마음에 드는 사람의 물건을 선택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주선자가 눈치껏 파트너를 정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 남학생들끼리는 미리 점찍어둔 여학생을 서로 고백해 은근히 자기가 원하는 파트너에 다른 학생이 관심 갖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파트너가 된 여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서 커피만 마시고 바로 헤어졌다. 그러나 여학생이 마음에 들면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햄버그스테이크, 비프스테이크, 돈가스 등을 먹으며 늦게까지 데이트를 했다.

필자는 두 번의 미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대학 1학년 때 했던 미팅이었다. 늦은 가을날, 학과 사무실 옆을 지나는데 우편함에 단정한 글씨로 쓴 엽서가 얼핏 보였다. 필자에게 온 엽서였다. ‘누가 보냈지?’ 하며 엽서를 꺼내서 보니 하단에 주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주희가 누구지?’ 했다. 그러다 2주 전쯤 미팅에서 만난 한 여학생 얼굴이 떠올랐다.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마침 시험기간 중이어서 그 여학생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엽서엔 단정하게 써내려간 글자들이 빼곡했다. 그간의 일상과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이었다. 그녀의 감성적인 표현들이 필자 가슴에 와 닿았다.

글로 자기 마음과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녀는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글 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대학신문을 보내주면서 “엽서 보내줘서 고마워, 연락 못해서 미안해”라고 간단히 메모를 썼다. 그리고 1주일쯤 뒤 그녀에게서 또 엽서가 왔다. 이번에도 글이 빼곡했다. 엽서 하단에는 “깊어져 가는 가을 자꾸만 생각 키워지는 이에게 보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필자는 그녀가 엽서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저녁도 먹어야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쩌다 그 시절이 생각나면 그녀가 생각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접고 먼저 엽서를 보냈을 텐데 말이다.

기억이 나는 또 하나의 미팅은 대학교 2학년 초겨울 무렵에 있었다.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같은 학과 여학생들과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K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고 가는 방향이 같아 버스를 함께 탔다. 빈자리가 없어 손잡이만 잡고 나란히 서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필자에게 그녀가 넘어졌다. 필자는 얼떨결에 한 팔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팔로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꼭 안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필자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광화문의 한 커피숍으로 갔다. 그 시절은 커피숍에도 DJ가 있어 노래를 신청하면 틀어주곤 했다. 커피를 마시다가 그녀도 음악을 신청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필자가 좋아하던 노래여서 깜짝 놀랐다. 그 노래에 대해서는 얘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녀가 우연히 그 노래를 신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커피숍을 나온 뒤에는 세종로를 함께 걸었고, 쌀쌀한 날씨인데도 추운 줄도 몰랐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사이인데도 오래 만나온 사람처럼 편안했고 잘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필자는 지나가다 리어카에서 파는 햇귤을 두 개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상큼하고 싱싱한 귤 냄새가 좋았다. 그녀도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2시에 만나 커피를 마시고 좀 걸었을 뿐인데 시간은 벌써 오후 6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약간 출출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필자는 옛 한국일보사 옆에 있는, 기자들이 자주 다니는 식당으로 가서 냄비우동을 시켰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냄비우동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좋아하는 그녀랑 같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밤 10시가 지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필자가 버스를 타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녀는 집 근처에 이르자 좀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첫눈 펑펑 내리는 날, 우리가 갔던 광화문 ‘그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나자는 그녀의 말에 필자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10여 일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첫눈이 펑펑 내렸고 필자는 그녀가 말했던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혹시 그녀가 그새 맘이 변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약속 장소에 가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첫 만남 때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나눈 대화와 진한 커피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그녀는 필자에게 따뜻한 겨울장갑을 선물로 줬다. 눈 내리던 경복궁 옆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서울대 사대에 다녔던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필자는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젖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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