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에서 치러진 셀프 접골

기사입력 2018-12-12 08:45 기사수정 2018-12-12 08:45

[동년기자 페이지] 눈처럼 아득한 추억들이 흩어지네

산행은 봄·여름·가을·겨울 사철 쉼이 없다. 어린 시절 눈이 잘 오지 않는 따뜻한 남쪽에서 자랐던 터라,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산행을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러다 설상에서 손가락 탈골사고가 나고 말았다. 자기 손가락을 스스로 접골하는 희대의 사건전말은 이렇다.

2013년, 새해 초부터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그날은 학교 동문 전체 산악회에서 북한산 백운대를 등반했다. 아침에는 눈이 별로 오지 않았는데 도선사 입구 탐방지원센터에 이르자 폭설로 바꾸었다. 안내자가 “오늘은 입산통제다, 뒤돌아가라” 했다. 그 말을 듣고 회원들의 의견은 중구난방이었다. “기다려보자, 식당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기별 동창모임은 거의 또래이기 때문에 의견통일이 잘 안 되었다. 하지만 전체 동문모임은 달랐다. 기별, 나이가 뒤섞여 선후배가 따로 없었다.

일부는 하산하고 나는 20여 명과 함께 기다렸다. 소나기는 피하라고 했던가. 몇십 분이 지나자 눈발이 그치고 날이 환해졌다. 입산통제는 해제했지만 그동안 내린 눈이 발목을 덮었다. 하루재를 향해 걷고 있는데 또 시커먼 눈구름이 몰려왔다. 우리 일행 뒤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또 입산통제.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쌓인 눈을 헤치면서 산에 올랐다. 눈구름이 다른 날의 안개처럼 인수봉의 파도가 되었다. 인수봉은 파도에 묻혔다 솟아나기를 반복했다.

얼마 뒤 우리는 쇠줄에 매달려 백운산장을 거쳐 백운대에 올랐다. 백운대 상판에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나뭇가지의 상고대는 가끔 봤지만 돌 위에 핀 몇십 cm 두께의 상고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려올 때를 생각하지 않은 일행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산은 내려올 때 더 조심하라고 했던가.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눈이 쌓여 보호용 쇠말뚝 머리 외에는 길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조심! 조심!”을 외치면서 발로 길을 더듬는 방법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할 막다른 골목이었다. 모두 입을 꼭 다물고 거친 숨만 내쉬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큰 사고가 없기만을 바랄 뿐 두 눈의 살기마저 느낄 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는데 손가락 감각이 좀 이상했다. 장갑을 벗고 보니 오른손 약지 끝마디가 축 늘어져 덜렁거렸다. 손가락 탈골이었다. 그런데 아프지도 않았고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도통 짐작이 되질 않았다. 접골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나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산 후 병원에 간다면 손가락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왼손으로 셀프 접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손으로 한 접골은 성공했다. 곧 손가락에 온기가 돌아왔다. 병원에 한 번 안 가고 후유증도 없이 그날의 탈골은 셀프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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