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도시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공원이 많은 도시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 크거나 작거나 수목으로 푸른 공원을 다수 내장한 도시. 그게 진취적이고 이상적인 도시이지 싶다. 도시에 넘치는 건 재화, 그리고 재화를 축적할 기회만은 아니다. 소음과 풍문, 두통과 우울증이 덩달아 서식한다. 공원은 이 부정적인 증상을 씻어주는 갸륵한 공간이다. 숨 가쁜 일상에 지치고 짓눌린 사람들의 휴식처로 기능해 활기를 되찾게 한다. 회색빛 도회의 둔감한 얼굴에도 공원은 생기를 주입한다.
이처럼 예찬할 만한 일상의 공간을 부산에서 만날 수 있다. 부산진구 범전동에 있는 부산시민공원이다. 부산진구의 랜드마크다.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이자 시민들이 향유하는 ‘기댈 만한 어깨’다. ‘뉴욕엔 센트럴파크가 있고 부산엔 부산시민공원이 있다’는 단언으로 보면, 부산 사람들이 자랑거리로 꼽는 명소임을 알 수 있다. 이 공원은 자그마치 축구장 60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를 지녔다. 면적의 절반이 산지인 부산의 도심 노른자위 땅에 이처럼 거대한 평지 공원이 조성된 건 기적에 가깝다. 부산 시민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말, 과언은 아니다. 시민들의 공원 애호 양상도 도드라진다. 1일 평균 방문자가 무려 2만 5000여 명이라 하니 말 다했다.
공원 입구 방문자센터에서 안내도를 집어 들고 공원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8월 한낮의 거친 폭염이 빵을 굽듯이 공원을 후끈하게 달군다. 그럼에도 청신한 기분이 느껴지는 건 나무와 숲이 흔해서다. 나무들은 두 팔 벌려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볕에 환호한다. 싱싱한 초록을 활활 내뿜는다. 사방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성황리에 펼쳐지는 초록의 행진. 공원의 한여름은 이로 말미암아 생동한다. 각양각색의 독특한 건물과 조형물 역시 공원의 주역이긴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이 지독하게 뜨거운 한낮에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햇살을 뒤집어쓰고 낮잠에 빠진 양 잠잠하다. 그러나 낮잠이나 자라고 꾸며놓은 구조물들이 아니다. 제각각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으니 할 말 많은 사물들이다.
부산시민공원은 광활한 면적만큼이나 풍성한 콘셉트를 기반으로 조성한 매머드급 공원이다. 설계자는 뉴욕 맨해튼의 버려진 철도를 재생해 하이라인파크를 설계한 세계적인 조경 건축가 제임스 코너. 그는 부산시민공원에 다섯 가지 주제를 집어넣었다. 기억, 문화, 참여, 자연, 즐거움이라는 이슈를. 우리가 살면서 중시하는 가치 대부분을 망라한 셈이다. 주제에 따라 구성과 구조를 차별화하는 한편, 섬세한 균형미로 융합을 이룬 전체의 모습은 이 공원의 탐방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다.
공원도 역사책이다
그런데 부산시민공원의 정체성은 역사•문화공간이라는 데 있다. 부산의 근현대사 한 자락이 공원에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게 아닌가. 공원에 담긴 다섯 가지 주제 가운데 중심은 ‘기억’이다. 이것의 의미인즉 뼈아픈 근현대사를 잊지 말자는 데 있다. 세상에 난리가 터지면 국토도 난리 복판으로 끌려들어간다. 세상이 물구나무를 서면 국토도 물구나무를 선다. 이 공원의 부지가 원래 그랬다. 외세가 점유한 땅이었다.
지난 100여 년 세월 동안 한국인에겐 ‘금단의 땅’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엔 일제가 빼앗아 제멋대로 부지를 요리해 식탁에 올렸다. 원래 비옥한 농토였던 걸 토지조사사업 명목으로 강탈, 철저하게 그들의 논리에 맞추어 주물렀다. 마구잡이로 공장을 세웠고,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 중산층을 위한 오락 시설인 경마장을 설치했다. 중일전쟁 직후부터는 군사기지로 이용했다. 대륙 침략의 교두보였던 부산항의 배후 병참기지로 쓰였던 것. 경마장 자리는 기마부대가 들어오면서 군마 조련장으로 바뀌었다. 한국인 노무자를 모아 포로감시원 훈련을 시킨 뒤 해외 포로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전쟁에 빙의된 일제는 이렇게 남의 땅에서 활개를 쳤다.
광복 이후에도 상황이 얄궂긴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일제에 이어 이번엔 미군이 주둔했다. 일제가 경마장으로 썼던 터를 중심으로 조성된 미군기지(캠프 하야리아)가 부지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미군기지는 이후 65년간 유지되다가 부산시에 반환됐다.
물론 저절로 이루어진 반환은 아니었다. 시민사회와 부산시가 합세해 거둔 성과였다. 기지 이전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시내 한복판에 붙박이 장롱처럼 눌러앉은 ‘리틀 아메리카’가 야기하는 폐단이 커서였다. 1995년엔 시민대책기구를 꾸리고 본격적인 부지반환운동에 나섰다. 운동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이 수없이 빚어졌다. 부산시와 미군 사이에. 시민과 시민 사이에.
2004년 7월 미군은 마침내 부지 반환을 결정했다. 그러자 부산시는 즉각 부지를 근린공원으로 지정하는 담대한 포석을 두었다. 부지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식의 개발 논리 유입을 사전에 차단한 것. 이와 같은 부산시의 위엄에 찬 추진력은 시민대책기구가 주도한 시민공원추진운동의 동력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후 과정에서도 한미 간 협상이 지연되는 등 암초가 많았다. 부산시가 드디어 부지의 열쇠를 손에 쥔 건 2010년. 2011년엔 부산시민공원 조성 공사가 시작됐고, 2014년 개장에 이르렀다. 멀고 지루하고 험한 길 끝에서 마침내 역사문화공원을 건져 올린 셈이다. 찬연한 대장정이다.
이제 공원에 존재하는 옛일의 흔적을 볼까. 미군이 철수한 자리에 남은 건물은 338개였다. 부산시는 이 건물들의 역사성, 활용 가치, 경제성 등을 평가해 24개만 남기고 모두 뜯어냈다. 현존하는 건물 중 규모와 형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건 미군들의 사교장이었던 장교클럽. 이건 공원 내력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전시한 ‘공원역사관’으로 바뀌었다. 사령관 관사는 ‘숲속 북 카페’로 변했고, 하사관 숙소 12개 동은 ‘문화예술촌’으로 변신했다. 학교 건물은 ‘시민 사랑채’로, 사병들의 숙소였던 퀀셋 막사는 ‘뽀로로 도서관’으로, 장교 관사는 다목적 공간인 ‘다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말쑥하다. 적당히 디자인을 입혀 수수하다. 매우 실용적인 톤으로 개조했다. 그래도 과거사의 질곡을 핏물 밴 날고기처럼 생생하게 반추하기엔 다소 아쉽다. 그러나 망각으로 유령처럼 사라질 수 있는 부지의 역사를 붙들어놓은 공간이니 정말이지 의미가 깊다. 공원도 이쯤이면 역사책이다.
박수용 부산진문화원 원장
“시민들 문화 향유 욕구에 부응할 것”
부산시 부산진구는 부산의 지리적·문화적 중심지다. 부산 최대 상권인 서면이 부산진구 복판에 있다. 부산 경제의 뿌리 역할을 해온 신발산업의 요람이기도. 즉 부산진구는 상공업의 번성을 통해 성장을 거듭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인구의 집중 또는 유동 현상이 두드러지는 지역이다. 박수용 부산진문화원장은 이러한 지역 특색에 부합하는 문화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에 주력하고 있다.
“부산진구의 문화는 시대의 조류를 따라 변동과 생멸을 반복하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청년층의 놀이 문화가 발달했다. 그에 따른 문화시설도 많이 늘어났다. 우리 문화원은 이를 반영, 청년층을 위한 맞춤형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해 긍적적인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부산진구의 문화 명소를 꼽는다면?
“부산 근현대사는 물론 문화와 자연에 관한 많은 걸 만날 수 있는 ‘부산시민공원’을 꼽을 수 있다. 이 공원은 이미 세계적인 명소로 부상했다. 현재 공원 내에선 2025년 개관 예정인 클래식 음악 전문 대형 공연장인 ‘부산 콘서트홀’ 공사가 한창이다. ‘국립부산국악원’과 ‘백양문화예술회관’ 역시 부산진구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다.”
부산진구엔 희귀한 자연유산이 있다는데.
“황령산에 있는 구상반려암이다. 이는 마그마가 빚어낸 천연 공예품이다. 표면을 두른 양파 모양의 동심원으로 신비감을 자아내는 암석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자연유산으로 평가된다. 수령 800년으로 추정되는 ‘부산진 배롱나무’ 역시 특별하다.”
‘성지곡 수원지’ 역시 널리 알려졌다.
“1909년에 건립된 상수원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된 명물이다. 이 수원지를 통해 국내 상수도 역사의 출발지가 부산임을 알 수 있다. 울창한 주변 숲과 어우러진 호수의 경관이 아름다워 산책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문화원 사업의 지향점을 소개해달라.
“실질적인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데 필요한 건 국민소득 향상보다 문화 융성이다. 따라서 문화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접목, 문턱 낮은 문화원 만들기,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 발굴 등을 통해 시민들의 높아진 문화 향유 욕구에 부응하고자 한다.”
그간 추진한 중요 프로그램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16개 강좌를 설치한 문화교실을 운영해 지속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수한 강사를 초빙한 결과라 본다. 월평균 450여 명이 수강한다. 택견반, 도자기반 같은 프로그램은 타 문화원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것으로 이 역시 시민 참여도가 높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 펼치는 ‘국악한마당’과 가을에 개최되는 ‘시와 춤과 소리의 어울림’ 역시 호평을 받고 있다.”
향후 숙원 사업이 있다면?
“부산진구의 문화 역량과 지역 정체성을 제고할 수 있는 대규모 문화 행사를 창안하고 싶다. 부산진구의 역사와 전통에 따른 정신적 명맥을 축제로 승화하고 싶은 것이다. 47년 전에 지어진 낡은 원사를 새로 짓는 일도 화급히 필요하다. 강의실조차 협소해 강좌 참여 희망자를 다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기자가 많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보다 행복한 게 있을까? 그러나 쉽지 않다.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유한한 시간만 소비하기 십상이다. 무주 덕유산 자락에 사는 꽃차 소믈리에 황혜경(47, ‘하이디꽃차연구소’ 대표)은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만족도 높은 삶을 영위한다. 귀촌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일을, 원했던 삶을 찾았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막연했던 과거의 진부함을 털어내고 생기에 찬 나날을 누린다. 그에겐 꽃차가 마침내 도착한 기쁜 기차였다. 처음엔 꽃차를 그저 취미로 즐겼단다. 그러던 게 일이 커졌다.
황혜경이 전에 살던 곳은 서울. 직업은 중학교 특수교사. 그는 중증장애 학생들을 돌보았는데 보람이 컸다지. 그러나 ‘행복지수는 낮았다’고 한다. 복잡하고 아리송한 서울에 만연한 과속과 과욕의 행진에 질렸던 것 같다. 그 무엇보다 그는 자연 요소가 결여된 도회의 건조한 풍경에 식상했다. 마음은 늘 산으로, 바다로 달려갔던 거다. 그래 자신의 지친 영혼을 방목할 어딘가 시골을 찾아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덕유산 기슭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여동생을 찾아 무주를 드나들다가 아예 귀촌을 했다. 덕유산 일대의 싱싱한 자연경관에 반한 나머지 가족과 함께 무주 산골로 내려왔다. 무주에 자리 잡은 뒤 그는 다년간 펜션을 운영했다. 아버지가 지은 펜션의 운영을 맡아 사장으로 뛰었다. 사업은 잘됐을까?
“1년 중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쉬는 게 펜션 사업이다. 비수기엔 참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 수시로 산야와 계곡에서 소풍을 즐길 수 있어 즐거웠다. 아이들에게 자연생태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해 조화로운 인격으로 키우고 싶다는 바람이 컸는데 그걸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성수기엔 밥 먹을 틈조차 없이 바빴다. 너무도 힘들었다.”
원했던 생활 방식이 아니었다는 뜻인건가?
“그렇다. 일이 굉장히 많았다. 청소부터 서비스까지 모든 걸 감당하느라 버거웠다. 내가 일벌레도 아닌데 이런 부자유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그런 회의를 느끼곤 했다. 외딴 섬에 갇힌 기분까지 들더라.(웃음) 한마디로 정신적인 여유를 갖기 힘들어 괴로웠다.”
그래 꽃차 사업으로 전향했나?
“사업적인 걸 구상하고 꽃차에 입문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산야에 피어나는 야생 꽃들을 채취해 꽃차를 만들어 마시는 재미를 즐기며 만족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꽃차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남들에게도 꽃차의 풍미를 경험하게 하고 싶어 펜션에 오는 손님들에게 꽃차를 웰컴티로 제공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함께 차를 마시며 소통하는 즐거움이 컸다. 예상치 못했던 건 꽃차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판매할 차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꽃차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펜션 내부에 다실을 만들어 ‘하이디 꽃다방’이라는 간판을 걸기에 이르렀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그 하이디? 의미가 있겠지?
“내 고향은 경남 밀양이다. ‘영남 알프스’로 통하는 가지산 자락에서 목장을 운영하던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젖소들, 밤하늘에 모이는 별들,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들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다방 이름에 ‘하이디’를 넣었다. 다도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차 사랑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담은 상호다. 어머니는 지금도 다도 선생님으로 활동한다.”
커피보다 나은 꽃차를 연구해
꽃차 다방 개업을 계기로 황혜경은 본격적으로 꽃차와 동행하는 삶을 꾸리기 시작했다. 차 공부를 하기 위해 국내 유일의 차 관련 학과인 원광대 차문화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아울러 꽃차 소믈리에 자격증도 땄다. 다방은 단순히 차 마시는 공간에 그치지 않았다. 꽃차 판매장과 체험교육장으로도 쓰였다. 블로그에 꽃차 이야기를 열심히 올려 마케팅 채널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기법은 지금도 동일하게 운용되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무척 버겁던 펜션 운영에서 손을 뗐다는 점이다. 꽃차를 보는 눈과 꽃차를 다루는 실력에도 그사이 한결 깊이가 생겼다. 매우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꽃차에 심취하면서 삶이 서서히 온전한 쪽으로 흘러가더라는 게 아닌가.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삶이야! 비로소 내 일을 찾은 거야!’ 내면에서 울려 퍼진 찬탄이 그랬다. 그는 ‘하이디꽃차연구소’를 따로 개설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자연 속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루고 있다는 실감으로 만족스러웠다. 자연의 선물인 꽃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게 기뻤다. 꽃도 꽃차도 사람과 비슷하다. 저마다 색깔과 향기와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 빠져들 수밖에….”
꽃차를 만드는 데엔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재배지에 꽃을 기르는 일부터 시작된다. 꽃 피는 철엔 꽃잎을 채취하는데, 자칫 제철을 놓치면 1년을 다시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을 포착해 신속하게 작업해야 한다. 이후 꽃을 덖는 과정을 거친다. 이건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매우 섬세한 작업이 요구된다. 맛과 향과 색상의 품질을 좌우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꽃의 수분 함유량과 생육 상태에 따라 덖는 온도와 시간이 각각 다르다. 적정한 열을 가하지 못할 경우 고운 빛깔을 잡아두기 어렵다. 햇꽃차보다 깊은 맛을 내는 차를 얻기 위해 서는 6개월에서 2년 정도 숙성하기도 한다.”
그는 다양한 꽃차를 만든다. 목련꽃차, 장미꽃차, 마리골드꽃차, 맨드라미꽃차 등 꽃차뿐 아니라 구절초차, 감국차 등 갖가지 잎차, 뿌리차, 한방차에도 조예가 깊다.
커피나 녹차에 비해 꽃차는 변방에 머문 느낌이다.
“꽃차는 아직 대중화되지 못했다. 민들레, 쑥, 우엉, 돼지감자처럼 약성으로 잘 알려진 식물로 만드는 야생차 역시 마찬가지다. 난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꽃차 만들기를 목표로 삼고 있다. 그래 끊임없이 차를 시험한다. 항상 찻잔을 손에 들고 지낸다. 맛이나 건강 측면에서 커피보다 나은 꽃차를 만들기 위해 연구한다.”
꽃차도 건강에 매우 이로운가? 형상과 향기로 감동을 주는 게 꽃인데.
“영양 성분이 풍부한 꽃이 많다. 예를 들어 브로콜리의 경우 꽃에 영양소가 가득 농축된 걸로 밝혀졌지 않은가. 마리골드꽃에는 항산화 성분인 루테인이 함유돼 눈 건강에 도움이 된다. 요즘은 약용으로 꽃차를 마시는 이들이 많다.”
꽃차 대중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나는 혼합차를 만들어 활로를 찾고 있다. 꽃차에 과일이나 허브를 블렌딩해 꽃 한 종으로는 부족한 향과 맛을 이끌어낸다. 꽃의 성질에 맞는 부재료를 혼합하기도 한다. 찬 성질의 꽃엔 생강이나 계피를 넣어 중화시키는 식으로. 청정 무주의 특산물도 차 재료로 활용한다. 무주 명산물 사과에 비트와 당근을 합성한 ‘ABC 해독차’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요즘은 무주 고산지대에서 나오는 겨우살이에 무주 특산품 천마를 블렌딩한 차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철학
황혜경의 ‘하이디꽃차연구소’는 사방으로 산이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뜰에도 나무들이 즐비하다. 어디를 보나 수목의 푸른 아우성이 가득하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 7월의 더위를 잊게 하고, 그는 무명천으로 손수 만든 가운을 입고 일한다. 꽃차를 담은 유리병들이 진열된 실내는 널찍하고 간소하다. 무명처럼 담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은은한 차향이 감돌아 감미로운 공간이다. 그는 이곳에서 꽃차를 만들고 시험하고 연구한다. 애호가들을 맞이해 다담을 즐기는 사교장이자, 체험자들에게 꽃차의 모든 걸 알려주고 보여주는 교육장이기도 하다. 하루에 두세 팀을 상대로 겹치기 수업을 할 때도 있단다. 요컨대 그는 꽤 인기 있는 꽃차 강사다. 체험자들은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할까?
“꽃차의 색과 향과 맛에 관한 모든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다종의 꽃차를 시음해 맛과 향을 비교하게 한다. 체험자들이 가장 크게 흥미를 느끼는 건 제다 실습이다. 미리 준비해둔 꽃잎을 덖어 직접 차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때로 재배지에 함께 가서 꽃을 따는 체험도 한다. 제다를 통해 다양한 꽃차가 만들어진다. 꽃차에 과일이나 약초 뿌리를 블렌딩한 차를 만드는 식으로. 이렇게 손수 만든 차를 티백으로 갈무리해 돌아가는 것으로 교육이 마무리된다.”
주로 어떤 이들이 체험하러 오나?
“학생층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하다. 꽃차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공부 목적으로 오는 이들도 있다. 출장 교육도 다닌다. 어느 경우든 강의 내용이 까다롭지 않아 참여자마다 체험을 즐긴다. 직접 꽃차를 만든다는 성취감을 맛보면서 말이다. 대상자에 따라 수행의 난이도를 조절하고 피드백을 유도하는 게 강사의 역할이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로 에너지가 딸린다.(웃음)”
수익성은 만족할 만한 수준인가?
“수입이 많지는 않다. 꽃차에 사로잡혀 산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제다 사업허가를 받고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2022년부터다. 사실 시작 단계에 있는 셈이다. 그간 주력한 건 체험교육인데 성과가 컸다. 앞으로 꽃 재배지와 생산 시설을 보완해 가공 분야를 강화할 계획이다. 특히 무주 특산 식물을 꽃차에 블렌딩한 로컬 티 생산에 관심이 많다. 꽃차 테라피 강좌도 마련할 생각이다.”
차는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매개체다. 꽃차로 두루 맺은 인적 자산이 시골 생활의 동력이 되진 않았나?
“그렇다. 그 점이 가장 소중한 대목이다. 사람들과 꽃차를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는 건 정말 즐겁다. 난 꽃차와 함께 살며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했다. 꽃차가 지닌 테라피 효과를 실감하며 살고 있다.”
당신은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귀촌을 했다. 자연에서 배운 게 있다면?
“자연에서 삶의 철학을 배운다. 가령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풀꽃이 나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세상의 중심이 사람에 있는 게 아니라 자연에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황혜경에겐 ‘사람 역시 하나의 꽃’이란다. 자연을 삶의 교사로 삼으면 귀촌이든 귀농이든 시골 생활을 즐겁게 누릴 수 있다는 지론도 갖고 있다.
황혜경이 주는 귀촌 Tip
•때로 귀농・귀촌 멘토 역할을 하는데 반드시 먼저 묻는 게 있다. “당신은 자연을 좋아하는가?” 좋아한다면 시골 생활의 낯섦과 불편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삶의 원동력을 자연에서 얻으며 살아온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하는 얘기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사안이라고 본다. 실제로 자연에서 정서적인 안정과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시골 생활 만족도가 높은 걸 볼 수 있다. 반면 자연에 별 관심 없이 사는 경우에는 고즈넉한 시골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나머지 심지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자연을 벗 삼을 의사 없이 오직 수익이 목적인 귀농일 경우엔 만만찮은 시련에 직면할 수 있다. 농사로 돈 벌기가 쉽지 않거니와 지친 심신을 다스릴 방편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농인도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버릇을 키워나가는 게 좋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힘과 위안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의 텃세를 미리 걱정하지 말자. 도시든 산골이든 사람 사이의 불화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색안경을 끼고 시골을 바라볼 일이 아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천천히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이웃이 생긴다.
고흥 가는 길은 무척 멀지만, 국토를 인체에 비할 때 오장육부 저 밑에 달린 맹장이 고흥이다. 고흥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가는 길이 즐겁다. 고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거의 산 절반, 바다 절반이다. 게다가 오염되지 않아 쌩쌩하다. 유독 순정한 땅이다. 과욕과 과속의 레이스에서 벗어나 순한 삶을 꾸릴 만한 산수가 여기에 흔전만전하다. 자연생태와 함께하는 삶을, 또는 디지털 문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삶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이주를 꿈꿀 만한 곳이다. 이런 생각을 잠꼬대로 간주하는 이도 많겠지만. 아무려나 모처럼 고흥을 찾은 오늘도 눈길과 발길은 번번이 산과 바다로 흘러간다. 이곳의 역사에도 관심이 쏠린다. 고흥의 옛일을 알면 고흥이 더 잘 보이리라.
대서면에 있는 재동서원으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산 아래 아늑한 터에 위치한다. 초록을 토하는 숲과 수목의 가지에 지펴진 꽃들로 서원 일대가 환하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재동서원의 본질을 웅변하는 충효비가 보인다. 이어 외삼문을 지나자 동재와 서재가 나오고, 내삼문을 통과하자 서재 송간, 매월당 김시습, 송대립, 송희립 등 충신들을 배향한 서동사가 보인다. 그 밖에 창효사, 경호재, 양호문, 강당, 유물관, 그리고 충신들의 행장을 기린 비석들이 경내에 산재한다. 다양한 구조물마다 완결성을 갖추었다. 하나하나 나누어 봐도 개성이 느껴진다.
이채로운 건 사당 서동사의 주벽(主壁, 사당에서 여러 위패 가운데 주장이 되는 위패)이 두 개라는 점이다. 왼편에 충강공 송간, 오른편에 청간공 김시습의 위패가 나란히 봉안되었다. 재동서원은 여산 송씨네 문중 사당을 연원으로 해 개설되었다. 즉 여산 송씨의 고흥 입향조이자 충신인 송간이 사당의 주인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객(客)에 불과한 김시습의 위패가 주벽의 자리에 올라가 있을까. 남의 집 사랑방이 아닌 안방을 공유한 형국이니 파격이다. 송간과 김시습. 둘 다 우뚝한 충렬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흡사했다. 드라마틱한 일생도 비슷했다. 그러나 삶의 양상은 서로 달랐다.
나이 겨우 3세 때 해학적인 시를 읊조린 꼬맹이가 있다. 맷돌에 보리 가는 모습을 보고 읊은 게 이랬다.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김시습의 작품이다. 그는 오나가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장차 거목으로 쓰일 걸 의심할 바 없는 ‘국민신동’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난세가 들이닥쳤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탈취하는 반역을 일으킨 것. 김시습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김시습이 보기에 그건 역성혁명보다 난잡한 패도(覇道)였다. 멀쩡하던 총신들마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세조의 하수인으로 쓰여 좁쌀만 한 희망조차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봤다.
이렇게 눈 뜨고는 못 볼 시대의 타락에 휩쓸릴 수 없었던 김시습은 과시 공부를 때려치우고 삭발한 채 끝없는 방랑길에 나섰다. 그의 길벗은 항상 고독과 시였다. 평생을 통해 체제에 안티를 걸었다. 타락한 권력의 건너편에서 시대를 조롱한 방외지사였으며, 곡학아세의 선수들을 대차게 깐 아웃사이더였다. 가렴주구를 특기로 삼은 벼슬아치들은 그에겐 고작 벼룩에 불과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 법. 김시습은 벼룩 소굴을 벗어나고자 늘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 시객이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 계룡산 동학사에선 단종 초혼제가 펼쳐졌다. 김시습이 제주를 맡았다. 그가 손수 쓴 초혼제문을 낭송하며 소낙비처럼 통곡했다던가. 조상치, 조여, 정지산 등 7인이 초혼제에 동참했다. 이들을 ‘단조초혼칠현신’이라 일컫는데, 여기에 송간도 포함된다. 즉 김시습과 송간이 초혼제에서 함께 단종을 애도했다. 조정이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시국에 감히 초혼제를? 필시 7인 모두 목숨을 걸다시피 한 위령제였을 테다. 이 초혼제는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동학사를 복원할 때 대들보에 감춘 기록물이 비로소 발견되었던 거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김시습과 송간의 인연을 헤아릴 수 있다. 재동서원 사당에 김시습의 위패를 주벽으로 모신 연유도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면 송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단종 사후 세조가 형조판서 벼슬을 내렸으나 물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세사를 오물 덩어리로 간주한 채 철저하게 외면, 고흥 산야에 광석처럼 묻혀 여생을 조용히 은거했다. 천하를 바람 따라 방랑하며 시로써 불의한 정치를 삿대질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한편, 광기에 가까운 좌충우돌을 했던 별난 자유인 김시습과 양상이 사뭇 달랐다. 김시습은 평생 수만 편의 시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시만 해도 무려 2000여 수. 반면 송간이 남긴 문장은 ‘일체 나의 시문을 남기지 말라’고 문중에 당부한 간찰 한 점이 있을 뿐이다. 이를 비교해 김시습에게서 한결 심층적인 정신을 느낄 수 있지만, 송간의 삶에 비치는 허무 아우라와 염세의 기미 역시 가슴을 친다. 시대의 탁류에 눈감거나 은근슬쩍 편승하는 대신, 의기(義氣)로 간절하게 밀어붙인 삶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둘 다 명민한 교사다.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열혈 영혼이다.
이순신의 대인 클래스
이제 쌍충사를 볼까? 도양읍 녹동항 인근 언덕배기에 있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남다른 행적을 남긴 장수 이대원과 정운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녹도 만호(萬戶, 종4품 무관) 이대원은 용맹했으나 불운한 장수였다. 그는 왜구와 수차례 해전을 치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겨우 22세 나이에 전사했다. 부조리한 죽음이었다. 승전을 거두고 적장을 포로로 잡아온 그의 전공을 가로채려다 실패한 상관 심암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사지에 몰아넣은 게 아닌가. 수군 100여 명으로 왜선 18척을 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강요했으니 말이다. 이대원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는 지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다 속적삼에 피로 쓴 절명시를 남겼다. 결국 적선의 돛대에 묶인 채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처절한 곡절이 아닐 수 없다. 저열한 갑질로 약자를 죽음으로까지 유도하는 비극이 일쑤 벌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난세는 이렇게 이어진다. 종지부를 찍을 길이 없다.
만호 정운은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종횡무진 전장을 누볐다. 그는 강직하기가 대꼬챙이와 같았다. 이런 성정이 오히려 출세의 발목을 잡아 49세가 되어서야 만호 벼슬을 얻었다. 그는 진취적인 머리로 주어진 책무 이상의 군무를 노련하게 해치웠다. 군기와 병선을 치밀하게 점검하고서야 전투 준비를 완료하는 식으로.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를 믿어 최측근으로 삼고 조력을 받았으며, 정운은 잦은 승전고로 보답했다. 그는 부산포 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순신은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제문을 쓰면서도 울었다. ‘슬프다, 슬프다’를 연발한 제문이 현존한다. 수하를 진심으로 아낄 줄 알았던 이순신. 대인의 클래스가 역시 다르다.
송시종 고흥문화원 원장
‘임란 극복 기념관’ 건립 필요해
‘전라도 고흥 땅엔 장사가 많다.’ 이는 ‘영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고흥에서 힘자랑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린다. ‘박치기 왕’으로 불린 레슬러 김일, 복서 유제두와 박종팔 모두 고흥 출신 스포츠맨이다. 장사가 많이 나온 고장이라는 실록의 전언이 현대에도 유효한 셈인가? 그런데 고흥의 매력은 어쩌면 생동하는 자연생태에 있다. 때 묻지 않은 산수를 근거로 고흥을 ‘살 만한 곳’으로 여기는 이들이 흔하다. 이에 대한 송시종 고흥문화원 원장의 생각은 어떨까?
“고흥은 한마디로 ‘신이 아껴놓은 땅’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영주(瀛州,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골로 불렸다. 그 정도로 산자수명한 고장이다. 너른 옥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청정 해역에서 나오는 어패류도 풍부해 먹고살기에 족했다. 전통처럼 이어진 순후한 인심 역시 고흥의 자랑거리다.”
고흥 역사의 특별한 대목을 소개한다면?
“고대 고분이 다수 산재해 고흥 땅에 일찍이 독자적 고대문명이 존재한 걸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엔 분청자기 주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이곳의 운대 도요지에서 생산된 분청자기가 해외로 수출되기도 했으니까. 현재 전국 유일의 ‘분청문화박물관’이 고흥에 있다. 전란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구국 활동에 나선 선조들의 행장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고흥은 전쟁의 한 중심지였다. 고흥 사람들이 대거 수군으로 참전해 구국의 전투를 치렀다.”
그간 고흥문화원을 이끌며 거둔 주요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중심에 두고 관련 사업과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성과도 컸다. 가령 한자 수업 수강생들과 함께 제16회 ‘전국서당문화한마당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선조들이 불렀던 ‘흥타령’을 직접 편곡해 ‘효행가’를 만들기도 했다. 이 노래 역시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고흥우주항공축제’ 때 서당 문화를 주제로 한 이벤트를 펼쳤더라.
“과학과 전통의 만남을 의도한 이벤트였다. 과학의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전통문화의 가치다. 이를테면 서당 문화를 통해 함양된 선비정신을 현대에 계승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한문 역시 마찬가지다. 한자 공부를 통해 인격 수양을 할 수 있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송 원장은 소싯적에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제도권 교육 대신 서당 공부를 했다. 일찍이 한자에 달통한 실력으로 향토의 한문 고적 다수를 번역한 바 있다. 그는 재동서원에 배향된 충신 송간 선생의 29대 손.
고흥은 고 천경자 화백의 고향이다. 생가도 남아 있다. 기념미술관 설립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끄러운 대목이다. 진작 천경자기념관이 만들어져야 했다. 만시지탄이지만 현 군수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머잖아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지역사회에 부각된 문화 이슈는?
“고흥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전사(戰史)가 서린 곳이다. 고흥인들도 대거 참전해서 싸웠다. 고흥 녹동 앞바다에서 벌어진 ‘절이도 전투’의 승전은 온전히 고흥 출신 수군의 전투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현창사업은 미미하다. ‘임란 극복 기념관’ 건립 요구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곤충농장을 운영하며 살아온 지 올해로 7년째. 이지현(54, 꿈트리곤충농장 대표)은 하루하루가 즐겁다. 아침이면 콧노래를 부르며 농장으로 나간다. 원하던 삶을, 원하던 곳에서, 원하던 방법으로 누린다. 행복이 별건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불만과 불편을 털어내고 자족하며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이지현이 그 본이다. 음대를 나온 그녀는 도시에서 오랫동안 피아노학원을 운영했다. 전공 따라 길을 걸었던 셈이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게 곤충농장을 꾸리면서 변했단다. 농장은 이지현에게 만족의 샘이다. 그녀의 눈빛과 태도에선 농장에서 길어 올린 기쁜 샘물이 찰랑거린다.
귀농 초기엔 시련이 유일한 길동무였다. 막다른 길로 몰리다시피 했다. 지금이야 곤충농장이 고맙기 짝이 없지만, 고초를 겪던 당시엔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아아, 내가 어쩌자고 이런 짓을?’ 아마도 후회와 자책으로 괴로웠으리라. 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
“당시 식용 곤충 산업이 농가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해 많은 이들이 뛰어들었다. 매스컴의 요란한 보도에 이끌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잠깐 반짝하고 그만이었다. 사육 농가가 별안간 늘어나면서 판로 확보가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굼벵이 가공식품을 생산하고도 판매하기가 실로 어려웠다.”
미리 판로 문제에 관한 공부나 모색을 하진 않았나?
“자신감 하나 가지고 일을 벌였다. 생산만 잘하면 판매는 저절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참 안일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다양한 작목 가운데 곤충 사육을 선택한 이유는?
“농사에 뜻을 세우고 한동안 고민했다. 세 가지 조건을 선택지로 삼았다. 첫째, 혼자 해낼 수 있는 작물일 것. 둘째, 미래 지향적인 농업일 것. 셋째, 리스크가 적은 일을 찾을 것. 이 셋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게 곤충농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을 착수했다.”
농사를 가볍게 보고 덜컥 귀농하는 이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다. 그게 실패를 예약하는 행위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로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웃음) ‘나도 농사나 지어볼까?’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곤충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농사처럼 어려운 게 없더라.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굼벵이를 잘 키워놓기만 하면 러시아로 고가에 수출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찾아온 이에게 금전적 손실을 봤으니까.(웃음) 이래저래 난항이 많았다. 그러나 극복했다. 방향 전환으로 위기를 넘어섰다.”
치유농장, 누구나 생기 회복하는 공간
뜻밖의 벽에 부닥친 이지현은 숙고 끝에 농장의 주제를 갱신했다. 단순한 상품 생산 체제에서 진일보한 곤충 체험농장을 띄워 활로를 찾기로 했다. 이쯤에서 그녀는 비로소 농업에 필요한 식견과 실력을 쌓기 위해 농업교육장을 드나들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뒤늦게 기초 쌓기에 나선 것. 앞서가는 곤충 체험농가들을 찾아 기법을 배우는 건 물론, 요건을 갖춰 영농후계자 자격을 얻었고, 갖가지 기술 자격증을 따 향후의 약진을 도모했다. 공예와 원예에 관한 교육까지 받은 건 그 역시 체험농장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체험농장으로 전환하고 난 뒤엔 참으로 부지런히 뛰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졌으니까. 기존 가공식품 생산은 그대로 지속했다. 거기에 체험 프로그램을 접목했으니 일의 양이 한결 늘어날 수밖에. 우선 체험 공간을 구비하는 게 필요했다.”
농장 구조를 보면 매우 기능적이다. 유기적인 동선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효율적인 구성을 한 농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키위를 재배했던 비닐하우스에 갖가지 유실수와 화초를 넣어 원예 체험을 할 수 있는 치유온실로 변경했다. 치유텃밭과 치유정원도 조성했다. 곤충 관찰을 비롯해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실내 체험장도 만들었다.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구성해 틀을 갖추었다. 이 모든 요소는 계속 보강됐으며, 그건 현재진행형이다.”
관건은 체험자들을 어디서 어떻게 하나라도 더 불러들이느냐에 있었겠지? 사람이 좀체 오지 않아 문을 닫는 체험농장도 있다.
“비교적 수월하게 체험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농업교육을 받은 기관들의 조력을 받은 덕분이었다. 부지런히 교육장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교류한 이들이 농장의 홍보사절 역할을 해준 효과가 컸다. 현재 아동, 초중등 학생, 청장년층, 경증 치매 노인, 독거 노인 등 다양한 신분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체험객으로 참여하고 있다.”
곤충 체험농장으로 전환하고 4년여가 지났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나?
“그간 점진적인 성장을 해 이젠 안심할 수 있는 궤도에 올라섰다. 가장 만족스러운 건 적성과 취향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이 즐겁다. 활동량은 많지만 피로감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다.”
아동들이 왔다고 치자.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활동을 하나?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체험을 한다. 이를테면 누에, 누에나방, 장수풍뎅이 등 곤충들을 관찰하고 돌보게 함으로써 곤충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키울 기회를 제공한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보기도 하고, 누에똥을 활용한 비누 만들기도 한다. 치유온실에 들어가 식물들의 생태 이벤트를 접하고, 온실에서 채취한 허브로 각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시간도 갖는다. 텃밭과 치유정원에서도 아동들은 평소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한다. 나무나 풀과 함께 소꿉놀이를 한다. 아이들은 이 모든 체험활동을 이색적인 놀이로 받아들이며 환호한다. 웃음꽃을 터뜨린다. 순식간에 몰입해 즐기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낀다.”
체험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낀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선한 영향력이라 할까, 난 농장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런 걸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뜻을 이루고 있다는 실감을 자주 하는 거다.”
바람에 날아다니는 비닐봉지 하나를 움켜쥐고도 신나게 노는 게 아동이다. 순진하고 즉흥적인 충동에 취해서. 마치 행위예술가처럼. 그토록 민감한 영혼을 품은 아이들을 어른들은 일상의 틀 속에 가둔다. 그녀는 그게 마땅치 않다. 딱딱한 일상의 틀을 흔들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감성 발육을 돕는 게 곤충 체험농장이라는 것.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정성 있는 공간이라는 것. 이지현은 그런 취지의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더 많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용케 나도 하고 있다는 자긍심도 비친다.
“체험농장을 통한 치유 효과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처음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발달장애인이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고 드디어 입을 연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치매 노인도, 고독한 독거 노인도 이곳에 와선 표정부터 부드럽게 변한다. 동네 어르신들도 마찬가지다. 생기를 회복한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자연을 품은 농업의 힘이 이렇게 크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아울러 귀농을, 아니면 귀촌을 적극 권유하고 싶다.”
농장으로 거두는 소득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치유농장으로 바꾼 후 수입이 해마다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남편이 벌어들이는 월급보다 많은 수익을 얻고 있다.”
시골을 오해하지 마라
이지현의 남편은 대기업 근무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골 생활을 통해 인생을 좀 더 좋은 쪽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시골에 내려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낙향을 했다. 연로한 부모님을 돕고, 부부애를 돋우며, 한결 쓸모 있는 활동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유한한 시간을 낭비 없이 살고자 했다. 물론 이지현도 남편의 뜻에 공감했다. 부부는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시골로 내려가는 게 현명한 판단이라고 봤다. 남편은 이곳에서 자신이 원했던 일을 찾아내 전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만의 직업을 가진 거다. 각자의 취향과 지향에 부합하는 일을 갖고 신뢰에 찬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남편은 틈틈이 아내의 농장 일을 거들어준다. 그러나 거의 전적으로 이지현이 농장을 주도한다. 이건 매우 공정하고 진취적인 귀농 스타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런데 주변 귀농인들은 다들 무탈할까? 이지현의 얘기는 이렇다.
“흔히 나만은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귀농한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문제는 세 가지 요인에서 발생한다. 무리한 초기 투자, 미진한 사전 준비, 경영 마인드 부재….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도시로 돌아가는 농가도 봤지만 그리 많진 않다. 다들 일단 어떻게든 버틴다.”
남편은 귀농을 원하지만 아내의 반대에 봉착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나?
“시골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문화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선입견 말이다. 사실은 도시 못지않게 풍성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게 요즘의 시골이다. 자연과 동행하는 게 농업이라는 걸 감안해도 귀농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다양한 보조금 지원 정책, 자연재해에 관한 보험제도 완비 등 예전보다 귀농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 육체노동에 대한 거부감, 권태, 텃세 등도 관점의 폭을 넓히면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다.”
요즘 고민이 있다면?
“프로그램 발굴 문제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강화하기 위해 여전히 고심한다.”
귀농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른가?
“도시에선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 촌에 내려와 농사를 하는 것인데, 어느덧 삶의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치유농장을 통해 나 자신을 치유한 결과다. 한때 경제상의 대형 사고가 발생해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태평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지현에겐 ‘암말도’라는 별명이 있었다. 도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 붙은 별명이다. 이마저 과거의 일이 됐다. 어느덧 할 말 딱 부러지게 하는 유형으로 진화했다. 게다가 속사포처럼 말이 빠르다. 요컨대 그녀는 무척 다른 사람이 됐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뀌었다.
이지현이 알려주는 귀농 Tip
•반드시 사전에 귀농교육부터 충분히 받고 귀농하자.
•귀농인들의 실태 파악을 위한 현지답사도 필수조건이다. 발품을 많이 팔수록 얻는 게 많다. 남의 농장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며 농사를 배우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가급적 지역 특산 작물을 선택해 농사를 시작하자. 기술 숙달과 유통 측면의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플랜을 수립하고 귀농하자. 목표를 뚜렷하게 설정하라는 얘기다.
•과학적인 농사를 하라. 진부한 관행 농업으로는 정착하기 어렵다.
•지역의 봉사단체에 가입해 공익적인 활동을 하라. 보람도 크지만 어디에나 있는 텃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을 경우 미리 치료하고 귀농하자. 쪼그려 앉아 일하는 시간이 많은 게 농사다.
절만 절이랴. 터로만 남은 폐사지도 절이다. 전각이며 석물 따위는 이미 스러져 휑하지만 오히려 절의 본질이 느껴진다. 삼라만상은 변하고 변해 마침내 무(無)로 돌아간다. 제행무상이다. 절은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 지은 수행 도량이다. 그렇다면 무위로 잠잠한 폐사지 역시 통째 경전이며 선방이다. 가장 적나라한 절집의 한 형태다. 흔히 폐허 이미지에서 야기되는 선입견을 가지고 폐사지를 보잘것없는 곳으로 오해한다. 빈 절터에선 마음을 덩달아 비울 수 있다. 깨끗이 비움으로써 되레 순수한 충만감을 맛볼 수 있는 역설적·철학적 공간이다. 문화유산 답사를 즐기는 이들 가운데 폐사지 답사를 최고로 치는 이들이 드물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주시 부론면 야산 아래에 있는 법천사지는 폐사지의 우뚝한 본이다. 터의 넓이는 무려 5만여 평으로 드넓다. 신라 말에 창건돼 고려 중기에 법상종의 본산으로 전성기를 누린 법천사의 옛터다. 이곳에선 2001년부터 2022년까지 12회에 걸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지 20여 곳과 우물지, 계단지, 담장 유구와 석축, 연화대석, 금동불입상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 유물들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법천사의 본색과 영화를 가늠해보라. 고려의 중견 사찰다운 위용이 저절로 눈앞에 떠오른다. 비록 폐사지로 주저앉았지만 흔적만으로도 여전히 웅장하다. 하늘을 지붕으로 하고 적막을 전각으로 삼은 특유의 폐사지 도량이라 할까.
법천사는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된 거찰이었다. 특히 왕사를 거쳐 국사에 올랐던 지광국사 해린(984~1070)의 위력에 힘입어 사격을 널리 떨쳤다. 고려의 왕들은 지광을 극진히 우대했다. 생불로 대접했다. 이는 불교 국가 고려의 왕들이 지닌 불심의 발로이기도 하겠지만, 불교의 장악력을 왕권 강화에 활용하고자 한 정치적 계산의 소산이기도 했으리라. 문종은 아예 지광을 어가(御駕)에 태우고 다니며 법화경과 유식학 강의를 듣기도 했단다. 지광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소한 언설조차 도(道)의 강물로 간주해 경청했다지. 지광의 위세가 어떠했을지 눈으로 똑똑히 본 듯 환히 비친다.
법천사지엔 화려한 탑비 한 점이 고스란히 현존해 사람을 매혹한다. 사지 뒤편 산비탈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가 바로 그것. 형상을 빚고 문양을 새겨 넣은 석공들의 우거진 솜씨가 완연한 탑비다. 특히 비신의 좌우 측면에 조각한 쌍룡문은 살아 꿈틀거리는 듯 극히 사실적이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에 무수히 새겨진 임금 왕(王)자, 그리고 비석에 얹은 왕관 모양의 머릿돌은 왕실 권력의 비호를 받은 지광국사의 존엄성을 추앙한 신호일 터다. 비석 상부엔 고려인들의 유토피아였던 미륵정토, 즉 용화세계를 표현한 문양들을 깨알처럼 세밀하게 흩뿌렸다. 이는 지광국사를 용화세계의 선도자로 보는 대중적 정서를 고려한 장식으로 보인다.
그런데 법천사지가 보유한 걸작 성보가 더 있다.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이야말로 눈부신 석물이다. 이건 지광국사의 유골과 사리를 봉안한 부도다. 보통 부도탑은 원형이나 종형 형태, 그리고 전체적으로 단순한 구조를 보이지만 이 탑은 매우 다르다. 파격적인 사각형 구도를 근간으로 삼은 데다 탑의 모든 부위를 실로 미묘한 조각으로 채웠다. 조각 기법은 능란하기 그지없어 차라리 경악스럽다.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 역시 탑의 장엄함을 돋우어 드높은 품격을 구현했다. 고려 승탑의 백미로 꼽힌다. 전무후무한 부도탑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원래 지광국사현묘탑비 바로 앞쪽에 있었다. 그런데 수난이 잦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모리배들에 의해 서울로 빼돌려졌는가 하면, 오사카로 밀반출되기도 했다. 용케도 한국으로 돌아온 뒤엔 경회루에 설치되는 등 10여 차례 위치 변동이 잇달았다. 한국전쟁 와중엔 폭격으로 심각하게 파손되기도 했다. 2015년까지 국립고궁박물관 뜰에 전시되었던 이 부도탑은 이후 대대적인 보수와 보존처리 작업을 완료하고, 지난해 112년 만에 고향 법천사지로 귀환했다. 올해 하반기면 완전히 복원된 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니 반가운 소식이다.
오감이 열리는 폐사지 서정
법천사지에서 6km쯤 떨어진 산자락에는 거돈사지가 있다. 통일신라 때 창건돼 고려 초기에 이름을 드날린 거돈사의 옛터다. 1만여 평에 이르는 터의 규모도, 간신히 남아 옛일을 두런거리는 석조 유물들의 위용도 만만치 않지만, 법천사지에 비해서는 조촐하다. 군살과 치레가 없는 미모처럼 말쑥한 풍경이 수평으로 펼쳐진다. 법천사지의 뭔가 동적인 분위기에 반해 이곳엔 정적인 운치가 감돈다. 어쩌면 거돈사지는 별유천지다. 세상의 소음과 어지러움이 침범할 수 없는 고요가 깊어서.
거돈사가 침몰한 시기는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이 폐사지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쑥 들어오는 건 삼층석탑이다. 천년을 버틴 노구다. 그러나 훼손된 구석이 드물어 의외롭다. 삼층석탑 뒤편엔 장대한 규모의 금당지가 있다. 금당지 중앙부엔 화강암으로 큼직하게 만든 불좌대가 불상을 잃은 채 자못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거돈사에 족적을 남긴 걸승은 단연 원공국사(930~1018)로, 사지의 외진 자리에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다. 크고 당차고 수려한 탑비다. 세련된 문양의 행진도 볼 만하다. 다만 비석 크기에 비해 머릿돌이 너무 커 안정감은 다소 떨어진다. 탑비의 비문은 ‘해동공자’로 통한 대학자 최충이 지었다.
탑비 부근엔 원공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 있었다. 탑비와 짝을 이루는 승탑이다. 현재는 복제품이 놓여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 고적조사 약보고’엔 이런 구절이 있다. ‘원주에는 철불, 석불, 석탑이 흔해 빠지게 널려 있어 경주도 놀라 맨발로 도망갈 정도다.’ 일본인들이 원주 지역의 불교유산에 침을 흘렸던 걸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물론 도굴꾼까지 원주를 노다지가 묻힌 곳으로 지목하고 여러 사찰의 석물 약탈에 나섰다. 그들은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을 빼돌렸듯이 이곳의 원공국사승묘탑을 훔쳐 서울로 가져갔다. 해방 뒤에야 회수된 원공국사승묘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리저리 거돈사지를 거닌다. 폐사지의 서정을 오감으로 느낀다. 발길에 밟히는 풀과 흙이 융단처럼 푸근하다. 여기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엔 숲이 절반이고, 구름을 매단 하늘이 절반이다. 절반의 적막감과 절반의 먹먹함이 칵테일처럼 뒤섞여 문득 몽유하는 기분을 자아내기도. 옛 스님들의 독경 소리도 문득 허공을 떠돌다 흩어지는 것 같고. 천년 전 스님들은 지금 어디에 머무나? 무명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나? 알 바 없다. 분명한 건 폐사지에 겨우 남은 유적들마저 종내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일 따름이다.
이상현 원주문화원 원장
‘대중가요 박물관’ 건립 추진중
“원주 사람들은 배타성이 없다. 사람들끼리 잘 어울려 지내는 풍토가 정착됐다. 여느 도시보다 살기 좋은 곳이다.”
이상현 원주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원주엔 이른바 ‘텃세’도 없단다. 이건 어디서 유래한 경향일까?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 성장한 도시라는 데 그 배경이 있다고 한다. 원주는 일찍부터 중앙선 원주역을 통해 드나드는 외지인들로 무척 북적인 지역이었다. 따라서 한껏 개방적인 풍조가 지역 구석구석에 만연했다. 현대 문화는 물론 전통문화의 파워도 만만치 않은 지역이다.
“원주의 문화자산은 매우 풍성하다. 강원도에서 ‘문화의 도시’로 약진한 첫 도시가 원주다. 이를테면 1971년 군사도시라는 특수성을 살려 민·관·군 3자가 어우러져 펼친 ‘군도제’(軍都祭)는 도내 최초의 종합문화축제였다. 원주문화원이 주도한 행사다.”
원주시의 동의어는 치악산이 아닐까? 치악산이 원주 문화에 미친 영향은?
“치악산은 구룡사와 상원사로 대변되는 불교 문화의 발흥지다.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치악산 남쪽 신림면의 신림 성황림(천연기념물)에선 예부터 이어진 성황제가 펼쳐진다. 원주의 빼어난 지성이었던 고 장일순(호 무위당) 선생은 치악산을 일컬어 ‘모든 생명을 품어주는 산’이라는 뜻을 담은 모월산(母月山)이라 했다. 이러한 치악산의 힘과 포용력이 원주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나아가 문화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근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부도탑의 걸작 지광국사현묘탑이 112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원주시 법천사지로 돌아왔다. 원주문화원의 역할이 컸다지?
“지광국사현묘탑 환수는 국가 귀속 석조 문화재가 원래 있었던 지역으로 이관된 첫 사례로 굉장한 평가를 받았다. 많은 지자체의 관심을 모은 사안이었다. 원주문화원은 지광국사현묘탑 환수 운동 초기부터 시민 서명에 나서는 등 갖가지 역할을 도맡아 했다. 문화재 환수 기법을 배우기 위한 타 지자체 관계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이 원장이 현재 추진하는 문화 프로그램 중 특별한 게 있으면 소개해달라.
“원주시에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들어서면서 이주해온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에게 원주 문화를 알림으로써 유대감과 애향심을 갖게 하는 가족형 역사 문화 캠프인 ‘원주역사문화사랑캠프’를 운영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원주문화원이 처음 시작한 ‘부부의 날’ 기념 축제인 ‘원주부부축제’에 대한 반응도 매우 좋다.”
원주문화원 특유의 운영 방식이 있다면?
“문화원에 있는 공연장, 전시실, 강의실 등을 문화원 회원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개방했다. 문화원에 소속된 문화 동아리들과 지역의 모든 문화 동아리들이 동참해 실력을 겨루는 ‘생활 동아리 감성축제’도 펼친다.”
‘대중가요 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어떤 목표를 설정했는지?
“대중가요계의 가수, 작곡가, 작사자에 관한 다양한 소재, 또는 소장가치 높은 자료를 모아 박물관을 만들 참이다. 독특한 문화 콘텐츠와 관광 콘텐츠를 운영해 원주 문화의 폭을 확장하자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미 지난해에 사업설명회를 마쳤다. 지금은 유관기관, 한국가요작가협회와 함께 논의 중이다.”
올해로 환갑에 이른 귀농인 진용기(은현농장 대표)에겐 좌우명이 하나 있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워도 뛰어드는 데 있다’는 것이란다. 자신의 이름을 위트 있게 풀어낸 기치를 삶의 돛대에 매단 셈이다. 그가 충주시 신니면으로 귀농한 건 5년 전이다. 남다른 용기를 쏟아부어 거둔 성과일까? 진용기는 험악한 암초 한 번 만난 일 없이 순항을 거듭했다. 전공으로 삼은 수박 농사로 귀농 첫해부터 7000여만 원에 달하는 순소득을 올렸다는 게 아닌가. 바야흐로 그는 귀농인의 본으로 떠오르고 있다.
귀농 이전에 진용기는 전국 각지의 농촌을 돌아다녔다. 귀농 또는 농업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농부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이랬다. 농사란 믿을 수 없는 직업이라는 것. 마지못해 매달려 하는 행위라는 것. 그건 귀농에 뜻을 둔 사람의 기를 꺾어놓을 수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진용기의 관점은 달랐다. 농업을 첨단 산업으로 바라봤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읽었다. 이렇게 그는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농사에 입문했다. 신선한 시각으로 농업을 읽은 다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식의 신중한 태도로 사전 준비부터 철저히 했다. 그러곤 농사에 투신, 첫해부터 기세를 돋우었다. “서울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귀농을? 진짜 네가 농사를 짓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렇게 힐난했던 지인들 사이에서 그는 이제 ‘농사로 성공에 이른 대단한 친구’로 회자되고 있다.
진용기는 대기업 임원 출신이다. 회사원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중에 모두 내려놓고 방향을 급선회해 농부로 변신했다. 무슨 이유로? 직장 생활의 만족도가 낮아서였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속박 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을 찾아 삶을 바꾸고 싶었다. 요식업을 할까, 해외여행을 할까, 갖가지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오래전부터 관심 가졌던 귀농을 하자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귀농귀촌박람회에 구경 간 게 귀농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박람회에서 지자체들이 귀농 홍보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농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해 귀농 선진지 견학을 할 수 있었다. 유익한 탐방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귀농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귀농을 통해 삶을 좋은 쪽으로 이동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품었던 거다. 그래 우선은 농업 현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공부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2~3년간 틈틈이 특산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촌 곳곳을 견학했다.”
견학을 통해 어떤 느낌을 받았나?
“농부들은 흔히 농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 농사에 뛰어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직업이라는 얘기였다. 서울에서 그냥 직장 생활을 하는 게 낫다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선진 농업을 한다는 귀농인들의 형편도 겉으로 보기와 달리 여의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열심히 일하지만 그 대가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녹록지 않은 농업 현장을 목도하고 귀농의 뜻을 접을 생각을 하진 않았나?
“오히려 귀농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농업의 문외한에서 벗어나 귀농에 관한 어느 정도 이해와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철한 사업 마인드를 가지고 농사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를테면 적당히 전원생활도 즐기며 적당히 농사짓자는 식의 적당주의는 아예 배제하는 게 옳다는 걸 확인한 기회였다. 귀농을 하나의 창업으로 간주하고 심도 있는 준비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지게 됐다.”
귀농인마다 나름 단단한 각오와 준비를 하고 농사에 뛰어든다.
“누군가 도시에서 치킨집을 차린다고 치자. 그는 치밀하게 상권을 분석해 위치 선정을 하는 등 주도면밀한 사전 작업부터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귀농인들의 준비 수준은 대체로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스크를 끌어안고 귀농하는 셈인데, 난 그런 폐단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6개월 일하고, 6개월 쉬자는 목표
사실 농사를 은근히 만만하게 보고 귀농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시골에 들어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이끌린 듯 곧장 과감하게 농사를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괴이한 방식은 필패의 첩경이라는 게 진용기의 지론이다. 성공한 귀농인 대열에 올라선 그가 보기에 실패 확률이 매우 낮은 게 귀농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 냉정한 사업 마인드를 장착하고, 물샐 틈 없는 사전 준비를 하는 게 필수 조건이라는 것. 그는 귀농 준비에 무려 7년여의 기간을 투여했다. 기이할 지경으로 오래 뜸을 들였다.
“최소 2~3년에 걸친 충실한 준비와 연구를 할 경우 성과가 주어지는 게 귀농이다. 난 다각도로 준비 작업을 했다. 잦은 귀농 투어로 농사 물정을 익힘과 동시에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갖가지 공부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비로소 귀농 창업을 결심했다. 아울러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이 담긴 밑그림이었나?
“우선 가족은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가기로 했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희생을 강요할 순 없는 일이었다. 아내에겐 좋은 직장이 있기도 했다. 철수해야 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서울에 있는 자산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원칙도 정했다. 따라서 농토나 집은 임대해 사용하기로 했다. 귀농 첫해부터 수익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기본 지표로 삼기도 했다. 중요하게 여긴 게 더 있다. 노동에 매몰되는 귀농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생각해,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6개월은 일하고, 6개월은 쉴 수 있는 농장 조성을 목표로 삼았던 거다. 이러한 청사진을 만든 뒤 다시 현장 투어에 나섰다.”
햐! 또다시 견학을? 이번엔 무엇을 얻었나?
“작목 선정을 위한 견학이었다. 숙고 끝에 수박 농사가 유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비교적 수월한 재배 기술, 상당히 안정적인 수익성, 낮은 진입장벽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잘 하기만 하면 1년 중 6개월만 일해도 지속 가능한 작목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수박 주산지인 충주시 신니면을 재배지로 정했다. 이쯤에서 남은 문제는 수박 재배 기술을 어떻게 익히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기술을 숙달했나?
“신니면 수박 농가를 통해 6개월 동안 빡세게 기술을 배웠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면서. 일당 같은 건 받지 않았다. 밥만 얻어먹는 조건으로 일을 도우며 수박 농사의 메커니즘을 두루 익혔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가 완료됐으며, 비로소 농지와 집을 빌려 2019년에 귀농했다.”
귀농 이후 진용기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자비로운 힘의 보호와 감독을 받은 양 순탄하게 탕탕 질주했다. 사실 그 힘이라는 건 오직 진용기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서 발원했을 뿐이다. 그의 비결인즉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 데 있었다. 어떤 리더십 연구자는 이런 말을 했다. ‘준비에 실패하는 건 실패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지닌 재능 중 위대한 건 준비 능력? 딱히 그런 건 아니겠지만 진용기가 노련하게 연출한 귀농 드라마에 박힌 키워드는 ‘준비의 파워’ 바로 그것이다.
40대 때 귀농이 바람직해
그는 3500평의 농지를 빌려 지은 비닐하우스 20개 동에 수박을 재배한다. 시설과 임대에 들어간 투자비 총액은 1억 5000여만 원. 지난 5년간의 연평균 순수익은 7000여만 원.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는 게 무척 많은 실적이다. 회사 생활을 할 때 그가 받은 연봉은 1억 원 수준이었단다. 수박으로 거둔 연 소득은 거기에 미치진 못한다. 그러나 지출 항목이 즐비한 도시에서보다 한결 여유로운 경제효과를 누리고 있다지. 게다가 그는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다. 농장 저편 마을에 얻어둔 셋집 대신 거의 모든 나날을 농장에 설치한 농막에서 숙식하는 그가 지닌 전자제품은 대부분 주변 지인들을 통해 구한 중고품이다. 집을 놔두고 굳이 불편한 농막에서 거주하는 건 왜일까?
“수박과 함께 24시간을 동행하다시피 해야 건강한 생육을 거들 수 있다. 가령 밤중에 돌풍이 몰아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하우스로 달려가 단속한다. 농막의 활용도는 굉장히 크다.”
충실한 사전 준비를 한 귀농인도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수박 농가들도 예외는 아닐 것 같은데?
“농가 대다수가 안정적인 운영을 한다. 아이고, 좀 더 빨리 귀농할걸! 그렇게 아쉬워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두어 농가는 실패해 철수하기도 했다. 성패를 가르는 건 수박의 품질이다. 제대로 잘 기를 경우 수집상들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밭떼기로 통째 가져간다. 유통 문제로 신경 쓸 게 없다는 얘기다. 재배 시기엔 푼돈이 연달아 나가지만 수확기엔 일거에 목돈을 거둘 수 있다는 게 수박 농사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직은 진입장벽도 낮다. 향후 시장성도 밝다. 그래서 내가 귀농인들에게 수박 농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예전엔 드물었던 청년 귀농이 요즘엔 흔해졌다. 귀농 시점은 언제가 적합하다고 보나?
“농사에 뜻을 두었다면 가급적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귀농하는 게 좋다. 농사는 기본적으로 체력 싸움이다. 따라서 60대 이후의 귀농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귀농 정책자금도 주로 청년층에게 지원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이래저래 인생의 단맛 쓴맛을 아는 40대쯤에 귀농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본다.”
귀농할 뜻은 있지만 실패가 두려워 망설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초기에 이미 궤도에 오른 당신의 사례는 상당히 독특하다.
“실패의 불씨는 준비 부족에 있다.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한다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40대에 준비를 잘하고 귀농할 경우, 초기엔 좀 고생을 하겠지만 신속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농업도 즐거운 직업일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도시에서보다 스트레스 덜 받고 돈을 벌 수 있는 게 농촌이라는 걸 널리 알리고 싶다.”
애초 진용기의 목표는 6개월간 일하고 6개월간 노는 데에 있었다. 이건 아직 미완이다. 하지만 머잖아 완성될 조짐이 완연하다. 이미 8개월은 일로, 4개월은 휴식으로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니까. 이쯤의 귀농이면 발군(拔群)이다.
진용기가 주는 귀농 Tip
•철저한 사전 준비와 치열한 사업 마인드. 이 두 가지에 귀농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걸 유념하자.
•일단 귀농 현장 경험부터 충분히 쌓아라. 그러면 안목이 생긴다. 과연 내가 농업의 현실에 어울리는 능력과 소양을 지녔는지 객관적인 눈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땅이나 집은 서둘러 사지 말고 우선 임대해 귀농하자. 나중에 철수할 경우 팔리지 않아 곤욕을 치를 수 있다.
•귀농을 반대하는 가족을 억지로 설득해 동반 귀농하지 마라. 심각한 갈등이 빚어져 정착에 실패할 수 있다. 단독 귀농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남편만의 ‘나 홀로’ 귀농, 이게 요즘의 귀농 트렌드다.
•대부분의 텃세는 귀농인의 오만한 태도에서 발생한다. 자세를 낮추라. 그러면 융화되기 쉽다. 약간 어수룩한 처신을 하면서 합리적인 거리를 두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초기엔 농사 수입이 전무할 수 있다. 최소한 1년 정도는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비축하고 내려가자.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산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 죽음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더욱 소중해진다.
안 죽을 것처럼 사는 인생처럼 무모한 것이 어디 있을까?
- 유재철, 장례 명장 1호 장례지도사
(시니어 매거진 2020년 6월호 인터뷰 중)
에디터 조형애 취재 박원식 디자인 유영현
살아서는 하늘에 맞먹을 추앙을 받고, 죽어서도 존엄한 예우를 받는 게 왕이다. 그들의 묘역 역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여느 묘와 크게 다른 규모와 격식을 구현해 왕릉에 권위를 부여했다.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집어넣기도 했다. 한 점 흙으로 돌아가는 ‘주검의 처소’일 뿐이지만 왕릉에 쏟아부은 정성과 의도가 이렇게 각별하다. 유네스코는 조선 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대부분 경기도에 밀집해 있다.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 나오는 조항, 즉 ‘능역은 도성(한양)에서 10리 이상, 100리 이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을 따른 데에서 비롯됐다.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은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구리시의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봄이 절정에 달한 5월 한낮의 유혹에 이끌려 나온 사람들일까? 뭐가 달라도 특별히 다른 게 왕릉이지만 사자들의 거처라는 점에서 을씨년스러운 적막감이 감돌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는데, 웬걸 뜻밖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는 능역 일대에 펼쳐지는 자연경관이 빼어나기 때문일 테다. 알고 보니 고양시의 산책 명소라 한다. 왕릉도 보고, 삼림욕 산책도 만끽하고, 즐거울 이유가 겹친다. 왕릉은 원래부터 조정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었으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연생태가 망가지지 않았다. 왕릉이 식생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셈이다.
서오릉엔 왕과 왕후의 능 5기, 그리고 원 2기(園)와 묘(墓) 1기가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이내 명릉(明陵)이 보인다. 조선 왕릉은 범례에 따라 통상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명릉도 마찬가지다. 홍살문으로 진입하자 저만치에 있는 제향 공간 정자각까지 박석을 깐 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높이가 다른 두 개의 길이 병행한다.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이 들어가는 향로(香路)이며, 오른쪽 길은 왕만 사용하던 어로(御路)다. 왕릉의 핵심인 능침 공간은 경사지 상부에 조영했다. 홍살문에서 올려다보면 작아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큼직한 봉분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봉분의 유려한 곡선미로 보자면 우아하기 그지없다. 능 둘레에 도열한 석마,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등 석물들엔 노련한 세공이 가세돼 품격이 완연하다.
명릉은 조선 19대 왕 숙종이 잠든 왕릉이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물리치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펼쳤다. 냉혹한 다혈질 기질을 타고난 한편 총명함과 결단성이 있어 장장 46년에 걸친 치세 기간 내내 강력한 왕권을 지속했다. 탕평책을 실시하는 등 나라의 질서와 제도를 혁신했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바꾸었다. 명릉엔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숙종의 곁에 함께 묻혀 있다. 정자각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쌍릉이 바로 숙종과 인현왕후가 묻힌 능이다. 왼쪽 뒤편에 거리를 벌려 따로 조성한 봉분은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쌍릉과 단릉이 공존하는 명릉의 양식은 조선 왕릉 가운데 상당히 특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현왕후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위되었다가 복위되는 등 자주 파란을 겪었다. 하지만 덕망이 높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인가. 숙종은 일찍이 인현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자신의 능 자리를 그 곁에 잡아두어 마침내 쌍릉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러운 건 인원왕후였으리라. 숙종은 그녀에게 늘 무관심했다. 그럼에도 인원왕후는 숙종과 함께 묻히고 싶어 했으며, 의붓아들인 영조가 뜻을 받아들여 곁방살이 형국이나마 숙종의 쌍릉 저만치에 소박한 능을 만들어줬다. 숙종의 능 근처엔 고양이 한 마리가 묻혔다. 숙종이 애지중지했던 고양이로 밤마다 끌어안고 잤다고 한다. 이 녀석은 숙종이 승하하자 곡기를 끊고 덩달아 죽어 왕이 떠난 길을 뒤따랐다고 하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장희빈의 초라한 묘
명릉에서 좀 더 들어가면 익릉(翼陵)이 나온다. 서오릉 가운데 가장 고지대에 자리한 능으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묻힌 곳이다. 인경왕후는 숙종보다 40년이나 앞서 세상을 떴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했다. 익릉의 봉분은 웅장하다. 석물도 명릉에 비해 크고 정교하다. 정자각은 다른 능에는 없는 익랑까지 갖추었다. 꽃무늬를 새겨 넣은 장명등과 망주석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래저래 화려한 구석이 엿보인다. 숙종이 명한 왕릉제도 간소화가 실행된 이후의 왕릉들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이다.
이제 경릉(敬陵)을 보자. 이는 세조의 아들로 20세에 요절한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그의 아내 소혜왕후의 능이다. 원래 능을 쓸 때는 정자각을 기준으로 왼쪽에 왕을, 오른쪽에 왕비를 안장한다. 왼쪽을 상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경릉에선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소혜왕후의 능을 두었다. 이건 신분의 위계에 따른 배치 방법이다. 대왕대비로서 승하한 소혜왕후가 신분상 의경세자보다 상위에 해당했던 것이다. 의경세자의 능역에 문석인만 있는 반면 소혜왕후의 구역엔 무석인까지 갖추어진 이유도 마찬가지. 이렇게 서오릉의 능마다 개성이 실려 있다. 영조의 비 정성왕후가 잠든 홍릉(紅綾)은 본디 영조도 함께 안장하기 위한 쌍릉으로 조성했으나 능 자리 하나가 빈 상태로 남아 이채롭다. 애초 계획과 달리 영조의 능을 구리의 동구릉에 마련하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런데 왕릉들이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도굴꾼들의 타깃이 되진 않았을까? 2006년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원(園)인 순창원(順昌園)에서 도굴꾼이 도굴을 시도했다. 중장비를 동원해 수직으로 지하 2.7m까지 파내려 간 도굴 갱이 발견됐다. 그러나 도굴엔 실패했다. 당시 도굴 실패 원인이 화제가 됐다. 순창원은 회격묘다. 즉 관이 들어간 구덩이 틈을 석회로 채워 다진 묘다. 회격은 고강도의 차단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중장비로도 묘실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회격묘는 유독 미라가 많이 발굴되는 묘형이기도 하다. 회격 벽이 외부 환경의 간섭을 완벽하게 배제해 묘실 내부를 거의 진공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발길은 장희빈이 잠든 대빈묘(大嬪墓)로 이어진다. 장희빈은 숙종의 여자였다. 중인의 한계를 딛고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존재다. 생시에나 사후에나 극과 극으로 평가가 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한편에선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다른 편에선 정쟁에 억울하게 희생된 제물로 보았다. 이런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대빈묘는 초라하다. 묘역 자체가 매우 으슥한 구석에 있다. 규모도 작고 석물도 별로 없다. 웬만큼 번듯한 사대부가의 묘보다도 옹색하다. 권력 투쟁의 도가니에서 으스러진 사람의 신후가 이렇게 스산하다. 청명한 건 서오릉 일대에 범람하는 숲이며, 숲 사이 오솔길이다. 왕릉도 좋고 왕릉에 서린 역사도 재미있지만, 숲길을 걷는 즐거움 또한 크다.
김용규 고양문화원 원장
호수공원 산책자들을 문화원으로 끌어들여
경기도 고양시는 경기 북부의 최대 도시로 1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근래 들어 급성장한 도시다. 내륙 교통의 동맥인 한강을 끼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고양을 둘러싼 삼국의 쟁탈전이 잦았다. 김용규 고양문화원 원장은 행주대첩을 고양 역사의 백미로 꼽는다.
“행주대첩이야말로 고양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파상 공세를 펼친 왜군 3만여 명을 권율 장군이 총지휘한 관민의 힘으로 물리친 전투다. 성 주변의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벌였다. 현재 고양시에선 행주산성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2023년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고양시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5대 도시’에 선정했다. 고양시의 문화 파워는 어느 수준에 있다고 보나?
“이미 문화도시로 부상했다. 공연 전문 예술센터인 고양아람누리의 활발한 운영상을 보라. 규모는 물론 내용에서도 전국 어느 문화공간에 뒤지지 않는다. 이는 고양시 문화현상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김 원장이 펼친 문화원의 중점 사업을 소개한다면?
“2년 전 문화원장에 취임한 이래 줄곧 문화원 홍보에 주력했다. 문화원의 존재 자체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는 걸 알고 이를 시급히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문화원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산호수공원을 끼고 있어 이점이 많다. 공원 산책자들의 발길이 문화원 방문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게 목표다. 그에 따른 프로그램의 강화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관습에서 벗어난 프로그램을 가동할 경우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 원장직을 맡은 뒤 기존 20여 개 프로그램 중 절반을 폐쇄했다. 그리고 새로운 걸 채워 현재 30여 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주 3일에 걸친 야간 강좌도 신설했다. 주간엔 일에 매일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의 하나다.”
여느 문화원에는 없는 ‘문화아카데미 최고위 과정’도 운영한다지?
“사회 각 분야의 유능한 인력을 문화원 활성화의 동력으로 삼기 위한 강좌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강좌와 체험 활동을 통해 역사 문화를 향유하는 한편 문화적 식견을 쌓게 된다. 나아가 지역의 문화 전령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원 회원 중에 청년층은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 있다면?
“전통문화의 보존과 발굴 중심의 문화 사업에 창의적인 콘셉트를 융합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통혼례 프로그램을 가지고 청년층에 접근한다. 기대보다 반응이 좋아 매우 고무적이다.”
공직 출신인 김 원장은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는 최근 전문가들이 공저자로 참여한 향토사 관련 책 ‘고양의 행주마을 누정과 별서’를 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내용의 깊이와 가치로 돋보이는 책이다. 그는 향후 이 책을 근거로 과거 고양에 있었던 누정과 별서를 복원하는 일에 나설 계획이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이어지는 소태정 고개 국도변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외벽에 진분홍색을 입혀 로맨틱한 멋을 풍기는 가게다. 과하지 않게 잔잔한 인테리어로 개성을 돋운 내부는 봄 햇살 내려앉은 듯 상쾌하다. 통유리창 너머에선 연둣빛 숲이 서성거린다. 이 카페는 귀촌인 임진이(48, 카페 ‘비꽃’ 대표)가 폐허처럼 방치됐던 건물을 임대받아 재생했다. 셀프 리모델링으로 되살렸다. 미술을 전공한 그에겐 결혼 전 미술학원을 운영한 이력이 있다. 카페 한쪽 벽면에 흑백 모노톤으로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의 작품이다. 카페를 차린 건 4년 전이었다.
전주시에서 살았던 임진이는 2014년 이곳 산 많은 고원지구 진안군으로 귀촌했다. 그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초등학생이던 딸 둘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시골 생활에 입문했다. 아토피는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통과 불편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난치성 질환이다. 그러니 엄마로서 심정이 오죽했으랴. 해볼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러다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르는 게 유력한 대안이라고 여겨 시골에 들어왔다.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내세워 귀촌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이는 밀어붙여 뜻을 이루었다. 남편은 전주에 머물러 하던 사업을 차질 없이 계속하고, 나머지 가족은 귀촌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은 것.
이렇게 주말부부가 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설고 고즈넉한 시골로 삶을 이동한다는 게,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시골살이에 쏟아붓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만큼 딸들의 아토피 치유에 대한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서인가, 지성이면 감천인가, 마침내 아이들이 피부 건강을 회복했다.
“시골의 좋은 자연환경과 깨끗한 먹거리가 가져다준 성과였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이들은 바람직하게 성장했다. 매우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자랐으니까.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의젓하게 성숙한 셈이다. 과외를 받지 않고도 학교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했으나 그마저 기우에 불과했다. 딸들이 자랑스럽다.”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계기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우리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잘 정착했다. 초기 한때 힘에 부쳐 돌아갈 궁리도 했지만 아이들을 고려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오히려 나 자신이 한결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귀농·귀촌인 대상으로 멘토 역할도 한다지?
“그렇다. 서서히 일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성과가 주어졌고, 자연스럽게 시골살이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어려운 게 많았다. 전주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할 정도였다. ‘그것 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난 시골에 가지 않는 거야!’ 그랬던 친구들의 말이 언제부턴가 바뀌었다. ‘어! 나도 촌에서 살아볼까?’로.”(웃음)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
“귀촌 직후 집을 지으려다 실패한 경험을 꼽아야겠다. 주민과 진입로를 놓고 분쟁이 빚어져 결국 건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곤 주택을 임대해 사는 것으로 귀촌 생활을 시작했다. 집의 상태가 허술해 여름엔 몹시 더웠고,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렇게 초기 4년을 이모저모 불편하게 살다 마을과 좀 떨어진 산 아래에 비로소 집을 지어 이사했다.”
진입로를 둘러싼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의 마찰은 하나의 풍속처럼 흔해졌다. 역귀농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해법은 무엇이라 보나?
“희한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두 번째 집 역시 진입로 문제가 있어 아직까지 고충을 겪고 있다. 사전에 법적인 문제를 충분히 점검했지만, 저 멀찍이 있는 진입로 일부의 소유권을 가진 주민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진입로가 폭우에 망가져도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귀농·귀촌을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시골의 토지를 살 때 법적인 문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마을에 믿을 만한 지인 하나쯤 미리 만들어 해당 토지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불운을 예방하라는 걸.”
원주민의 텃세가 두려워 귀농·귀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일까?
“텃세로 곤욕을 치른 사례가 있을망정 그걸로 마을 인심 전체를 측정할 일은 아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불상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난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을 실감하며 살았다. 서로 돕고 나누는 관계를 추구할 때 정착이 수월해진다.”
임진이는 아침 일찍 카페로 출근해 문을 연다. 카페 앞 국도를 통해 전주로 출근하는 직장인 중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 같은 아침 간편식이나 차를 주문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서다. 운영은 순조로울까?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들이닥쳐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주변 일대에 카페들이 급속히 늘어 경쟁도 심화됐다. 진안에서 생산되는 청정 농산물로 만든 음료와 간편식을 팔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다. 식재료의 원가 대비 마진도 기대치 이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나?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다시 뛰고 있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 공간의 구색을 바꾸었다. 진안 홍삼이나 벨기에 와플이 들어가는 브런치 메뉴도 개발했다. 국도를 오가는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메뉴도 만들었다. 으쌰으쌰, 이제 새로 출발한다!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거다.(웃음) 좋은 반향이 있을 거라 예상한다.”
뜻밖에 얻은 벽화 그리기 직업
삶이 원래 그렇듯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질주를 했으나 돌아보면 우습게도 원래 자리 그대로다. 그렇다고 무슨 악마의 계략이 거기에 개입됐을 리 있으랴.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시련도 강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다. 임진이는 부진했던 카페의 상황을 그렇게 긍정의 눈으로 읽어낸다. 사실 귀촌의 날들 속에서 그에게 닥쳐온 고통과 불편의 가짓수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단다. 그러나 그걸 위기가 아닌 충전의 기회로 간주해 허들을 넘어서길 거듭한 것 같다. 고생이 오히려 정신을 단련시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해준다는 걸 깨달으며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래 결과적으로 그의 귀촌 생활은 순항을 위주로 펼쳐졌다. 바야흐로 이젠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럴 수 있게끔 부지런히 뛰었다.
“카페 일만 본업은 아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일감을 갖는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가장 보람차고 즐거운 일은 마을 벽화 그리기다. 이건 재능기부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커졌다.”
마을 벽화를 그려 수익을 얻는가?
“그렇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그려준 마을 벽화가 맘에 든다며 행정 쪽에서 아예 사업을 위탁해주더라. 그래 주민들과 협업해 본격적으로 벽화 작업에 나섰다. 지금까지 진안군 관내 20여 개 마을에 100여 점의 벽화를 그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휘해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신선한 얘기다.
“내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누가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할 경우엔 뜯어말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 시골에 살면서 미술 관련 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발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직업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주어졌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돈보다 값진 보람이 크다. 마을 벽화 역시 일종의 창작 행위이기 때문에 작품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벽화를 완성한 뒤 밝고 깨끗하게 변한 마을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지역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시골에서 잘 살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가 있다.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대접받기보다 먼저 대접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가령 고령층이 다수인 시골에선 꼭 필요한 민원조차 넣지 않는 걸 알고 내가 나섰다. 가로등이나 과속방지턱 설치에 관한 민원 신청을 해 해결하는 식으로.”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임진이에겐 동네 주민들이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다. ‘민다리’라 불리는데 ‘민원의 다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심 갖고 찾아보면 나에겐 물론 남에게도 좋은 일은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진안군 정책자문위원을 맡아 주민 편익에 관련한 의견 제시도 한다. 이렇게 생활상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러자 도시에 살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열리지 않던 안목이 열리더란다. 아울러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능동적으로 변했고.
“내가 참여하는 공공활동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소소한 일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익에 관심 갖고 움직이다 보면 얻는 게 많다. 우선 인적 자산이 형성된다. 나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선한 사람이 아니건만 남들이 선한 사람이라고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땐 정말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곤 한다. 이런 감정은 도시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시골도 자본주의의 흐름을 타고 돌아간다.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귀촌 이후 남편의 사업 부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부를 누린 적도 있지만 졸지에 정반대 상황과 직면한 셈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 아닌가? 낙심하진 않았다. 다만 귀촌 10년 중 절반 이상은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시골이라는 한정된 조건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경제적인 면의 성공? 글쎄, 돈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선한 삶에 더 큰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귀촌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진정성 있는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산다는 건 복잡한 퍼즐 맞추기와 닮았지만 희로애락을 거쳐 마침내 완성으로 가는 드라마인가? 솔깃한 이야기에 즐거웠다.
임진이가 주는 귀촌·귀농 Tip
•땅을 사거나 집을 짓는 일을 서두르지 말자. 적어도 2년 정도 집을 임대해 살면서 마을의 물정을 익히고 풍토를 파악, 과연 나의 성향과 어울리는 동네인지 판단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을 구입할 때는 진입로에 따른 원주민과의 분쟁 소지가 없는지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하자.
•시골에 가면 관의 많은 지원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산이다. 자립 의지를 가지고 뛰어들어야 한다.
•시골의 제도권 교육 환경은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측면이 있다. 승마, 골프, 사격까지 거의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차질이 생길까봐 우려해 시골 생활을 꺼려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한결 듬직하게 성숙한다.
•재력에 의지한 과시적 처신은 금물이다. 원주민과 갈등을 빚고 외로운 처지에 몰리기 십상이니까.
이럴 줄 몰랐다. 인천시 부평구에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 병창 시설이 생생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걸. 1941년에 완공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각종 무기를 생산했던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 유적이다. 조병창의 터는 광활했다. 2023년 인천시에 반환된 미군기지(캠프마켓)와 부영공원 일대의 부지 115만여 평에 갖가지 시설물을 지었다.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한 건물 30여 동이 현존한다. 허공으로 높이 치솟은 굴뚝과 대형 건물들의 규모에서 일제가 조병창에 쏟아부은 공력과 품은 야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부평에 거대한 무기 생산 공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촉발했다. 이렇게 전쟁의 규모가 확산되면서 무기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병창에서 생산한 병기는 다양했다. 소총과 탄환을 주로 만들었지만 자동차, 잠항정, 항공기 부품까지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무기는 부평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통해 인천항으로 운송됐다.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놋그릇, 제기, 엽전 등 무기 제작의 재료도 철길을 통해 날랐다. 이 철길은 풀덤불에 묻혀 현존한다.
일제의 수탈 정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알 수 있는 국내 유적은 오늘날 대부분 철거돼 사라졌다. 부평 조병창은 다르다. 다수의 건물이 원래대로 남아 참혹했던 옛일을 웅변하는 게 아닌가. 침탈의 역사 한 자락이 이렇듯 증거물과 함께 숨을 쉰다. 이는 일본이 패전 뒤 달아나면서 버린 조병창을 미군이 접수해 80여 년 동안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개발 바람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병창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극비문서까지 발견됐다. 경향신문은 2021년 8월 7일자 보도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 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썼다. 조건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연구위원이 일본 방위성 문서철 속에서 찾아낸 조병창 관련 극비문서에 관한 기사였다. 극비문서의 제목은 ‘1945년 3월 예하 부대장 회동 시 상황 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다. 120쪽에 달하는 이 비밀문서를 분석한 경향신문은 두 가지 사안에 주목했다. 하나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조병창을 지하화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일본 도쿄 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긴다’는 것.
일본엔 여러 개의 조병창이 있었다. 극비문서는 그중 도쿄의 조병창을 부평으로 이전하고 지하화함으로써 거둘 수 있는 전략상의 이점에 착안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도쿄가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던 것이다. 즉 전쟁은 이어가되 위험은 한반도에 전가하려 했다. 조병창이 운영되면서 부평은 사실상 전쟁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갔다. 만약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면? 거대한 병참기지였던 부평은 미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을지도 모른다.
극비문서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명시한 대목도 참담한 감정을 야기한다.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도쿄의 조병창을 수용하는 데에는 방대한 공사와 노동력 투입이 필연적이었다. 일제는 이를 강제동원한 조선 노동자들을 통해 해결해나갔다. 극비문서는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된 노동자 중 9000명이 조선인’이라고 기록했다. 이후 1만 5000명을 추가로 동원할 계획도 수립했다. 강제동원은 전방위적으로 감행되었다. 인천과 경성은 물론, 경상도와 전라도 등 각지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주목할 것은 학도 동원이 많았는데 초등학생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더 있다. 조병창에서 있었던 독립투사의 행적이 그것이다. 조병창에서 무기 조작 기술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고자 잠입했다가 붙잡힌 오순환, 조병창에서 고려재건당을 만들고 무기를 입수해 임시정부에 넘기려다 체포된 황장연 등이 조병창의 어두운 역사에 한줄기 빛을 뿌렸다.
어린 학생들까지 강제동원돼
발길은 이제 부평구 산곡동 함봉산 자락에 닿는다. 이곳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인공동굴들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동굴만 27개로 통틀어 부평 지하호라 부른다. 이 지하호들은 일제가 획책한 조병창의 지하화 작업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나머지 남의 나라 지하까지 마구잡이로 파고들어 무기 생산을 도모한 만행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또렷한 증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동굴들이 조병창에 딸린 군사시설인 걸 알지 못했다. 독립군들이 판 굴이라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흔히 새우젓 저장 창고로 알았을 뿐이다. 비로소 굴의 정체를 확인해낸 사람은 김규혁 부평문화원 과장이다. 굴의 정확한 내력을 알고 싶어 조사활동에 나선 그는 2016년, 이곳에 강제동원돼 굴 파기 노역을 했던 증언자들을 찾아내 실체를 규명했다. 이후 조병창 지하화를 계획한 극비문서가 발견되었고, 이로써 굴의 실체가 확연하게 밝혀졌다. 그는 중학생 신분으로 굴착 작업에 강제동원됐던 이로부터 노무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었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다.
부평동에 있는 ‘미쓰비시 줄사택’도 희귀한 역사 현장이다. 줄사택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 무기를 제작, 이를 조병창에 납품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한 노무자 합숙소였다. 애초 143개 동에 1000여 명의 노무자들이 살았으나 광복 이후 점진적으로 줄어 현재는 4개 동만 남아 있다. 상처의 전시장이라 할까. 줄사택의 형상은 낡고 찌들어 간신히 버티어 선 고목등걸처럼 처연하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내장한 유적이다. 인근 주민들은 줄사택을 도시 경관을 해치는 흉물로 간주했다. 동네 집값을 떨어뜨리는 애물단지로 여겼다. 철거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모두 뜯어내고 공영주차장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사회단체들의 보존 요구에 떠밀려 추진을 중단했다. 문화재청 역시 줄사택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2021년 지역사회 각계 인사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한 ‘미쓰비시 줄사택 민관협의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아직 문화재 등록도 되지 않았으며, 보존과 활용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조병창, 지하호, 줄사택, 이 모두 일제가 획책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유적이다.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수구세력,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장단을 맞춰주는 일부 국내 세력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세계인에게 알려야 할 가치와 당위가 충분한 역사 현장이다. 그럼에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골방에 방치된 형국이니 아쉽다. 기억만으로 간직한 역사는 연약하다. 오독되고 편집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생생한 단서로 존재하는 역사는 강철처럼 굳건하다.
신동욱 부평문화원 원장
조병창 유적, 어떻게든 보존해야
인천시 부평구는 예로부터 곡창지대였다. ‘수확이 많은 넓은 들’이라는 뜻을 지닌 부평(富平)의 지명을 통해 전통적인 농업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산업지구로, 베드타운으로 급속히 전환됐다. 외지인 유입도 매우 활발하다. 신동욱 원장은 이러한 부평의 특색을 문화에 접목하고자 한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도시들과 달리 부평엔 토박이가 드물다. 겨우 8%에 불과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주민들이 혼재됐다는 특색을 지닌 것인데, 이와 같은 다양성을 문화로 융합해 조화로운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부평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어떤 것일까?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회상에 큰 변동이 있었다.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공장이 미친 영향, 광복 후 설치된 미군기지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조성된 부평산업단지가 불러들인 경제 효과 등도 부평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부평엔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의 수탈사를 볼 수 있는 조병창 유적이 있다. 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선 배경은?
“육로나 해양 수송로가 발달한 한편, 전시에 식량 조달이 용이한 곡창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 같다. 공습 차단을 위한 지형이나 기후 여건도 고려한 걸로 본다. 일본인들은 부평을 숫제 경성시로 만들 장기적인 플랜도 구상했다.”
신 원장은 조병창을 비롯한 강제동원 관련 유적들의 보존과 활용 필요성을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제기했다. 현재의 진척 상황은 어떤가?
“보존 가치를 인식한 이들이 많지만 아직 진척된 게 없다. 보존 쪽으로 가자는 결정조차 완전하게 나지 않은 상황이니까. 이는 주도권을 가진 인천시장의 의지에 달린 문제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원형이 훼손된 부분이 있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는 일이다. 이는 어렵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 여의치 않다며 보존사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지자체의 태도다. 그들은 역사유적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해 거둘 수 있는 경제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줄사택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보다 나은 역사 교육장이 드물겠다.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 너무 퇴락해 보존이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단견이다. 현대의 기술로 재생하지 못할 리가 있겠나.”
반환된 미군기지의 활용 방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형 식물원이 있는 공원을 만든다고 하지만 안일한 방향이다. 조병창 재생과 고품격 공연장 건립을 첨가한다면 유수의 관광지구로 부상할 수 있다. 특히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조병창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살린다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문화원의 역점 사업 하나를 소개한다면?
“부평에선 매년 풍물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를 주민 화합의 매개로 삼고 싶다. 주민들 각자 출신 고향의 고유한 풍물을 축제에서 자랑 삼아 경합할 수 있는 공연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