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1

봄 오기 직전 한 톨 씨앗이 하는 일을 보라, 가히 우주적인 거사를…

입력 2026-04-11 06:00

[민간정원 순례] 충남 태안군 안골동산정원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봄이 왔다. 꽃철이다. 저 아래 남도에선 이미 봄꽃이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꽃 소식이 파다해 상춘객을 불러 모은다. 겨우내 헐벗은 채 추위를 견디며 묵상 삼매경에 빠졌던 꽃나무들. 산수유, 매화나무, 동백 등 이제 제 세상을 만났다. 그러나 여기 충남 태안 산기슭에 있는 안골동산정원엔 아직 봄이 도착하지 않았다. 산간의 봄색은 더디 배달되게 마련이다. 도도한 연인이 뜸들여 써 보내는 편지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밤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산중의 3월이다. 철수 명령서를 받은 겨울 병력이 미적거리며 봄이라는 신규 사단과 대치한 형국이다.

안골동산정원은 이름 그대로 산골짝 안통에 있다. 널따란 부지에 자리 잡았다. 첫눈에 호연한 멋이 느껴지는 입지다. 정원 사위엔 야산들이 도열해 일제히 수묵 색조를 자아낸다. 그 웅장하고 유려한 화폭 위로 파란 하늘이 아스라이 펼쳐져 호쾌한 그림을 완성한다. 산과 하늘이 합작해 거둔 아트처럼 장엄한 게 흔하랴. 정원에서 바라보이는 광활한 풍치 한바탕에 뒤엉켰던 속이 다 씻겨 시원하다. 눈길에 담기는 저 먼 곳의 하늘 기슭. 거기까지가 정원의 변경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정원 내부의 짜임새와 구색 역시 활달하다. 입지의 개성을 돋우려는 의도가 있었을까. 디테일보다 스케일을 살린 정원이다. 식물을 오밀조밀 빽빽하게 채우기보다 여백을 크넓게 두어 공간감을 극대화했다. 눈요기용 치레를 위해 뭘 깨알처럼, 조미료처럼 뿌려 넣거나 하지도 않았다. 정원주의 대범한 너름새가 비친다. 그는 인위적인 세련미보다 자연미를 추구했다고 한다. 과욕을 자제해 정원을 만들었다. 있는 그대로 살다가 떠나는 식물의 천연한 기질을 훼방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애쓰지 않은 채 이루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자세로 정원을 가꾸었다. 이게 쉬운 일이겠는가.

자연을 향한 존중심과 겸손으로 길러진 식물 친화적 감수성이 내재하지 않고선 어렵다.

정원 곳곳으로 유도하는 산책로는 정갈하다. 푸근한 흙냄새가 올라와 산중의 냉기로 식은 코끝에 온기를 묻혀준다.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을 빼면,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 모두 여전히 나목 상태에 놓여 있다. 나무들 아래에선 겨울 풍상에 시달려 박제로 변한 수국꽃의 잔해들이 바람에 너울거린다. 그보다 더 애잔하게 바싹 마른 풀들이 곳곳에 지천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아주 드물지만 파랗게 올라온 풀도 보인다. 반가워라. 다가가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저 손톱처럼 납작하고 자그만 것이라 존재감 없이 외로운 풀이다. 그래도 봄의 전령이다. 그러나 메마른 풀들에 갇혀 있다. 봄은 저 산 너머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정원의 나무와 풀들은 아직도 겨울잠을 자나? 겨울 침상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느라 새 살림을 시작할 철이 박두한 걸 까먹었나? 그럴 리가. 식물들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그러나 내부에선 생명의 아우성이 들끓는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소리 없는 함성이라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봄의 농도가 짙어질 때를 기다리며, 고도의 센서를 가동하며 식물들은 지금 새싹을 빚는다. 새잎을 세상에 데뷔시킬 적기를 고른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봄이 오기 직전, 그러니까 겨울과 봄 사이 긴가민가한 철에 식물들이 발휘하는 실력은 가히 위력적이다. 일종의 역사(役事)를 펼친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조화옹(造化翁)이 명령을 내린, 거역하기 어려운 작업을 수행한다.

작업 내용을 볼까. 봄기운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게 감지되면 뿌리는 즉각 행동에 나선다. 동사를 모면하기 위해 가을부터 미리 농축해두었던 수액의 성분을 조절한다. 녹말을 포도당으로 분해, 재활에 필요한 기초 에너지원을 만드는 거다. 뿌리는 대사 활동을 증진시켜 미세한 열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흙의 냉기를 녹여 수분을 얻고, 주변 미생물들을 자극해 증식시킴으로써 좀 더 많은 양분을 함유한 토질로 바꾸기 위한 작전이다. 이에 힘입어 잔뿌리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 토양의 온도 변화를 감지, 시토키닌이라는 호르몬을 통해 지상부에 기상할 시간임을 통보하는 것도 뿌리의 역할이다. 뿌리는 이렇게 갖가지 재주로 거둔 성과를 펌프질해 줄기로 올려 보낸다. 생기를 잃은 채 뼈대만으로 견딘 상부에 재생의 재료들을 공급하는 것. 이로 말미암아 나무에 비로소 수액이 돌기 시작하고, 마침내 갓난아이처럼 여린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난다. 드라마틱하다. 식물의 생태가 이렇게 흥미롭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지난 계절의 어느 날, 땅에 떨어져 흙속에 묻힌 씨앗들의 ‘마법’은 또 어떻고? 봄이 오면 씨앗은 흙속의 수분을 빨아들여 몸을 양껏 불린다. 이때 발생하는 강력한 팽창력으로 껍질을 터뜨린 뒤, 흙 입자 틈새로 살을 들이민다. 아울러 씨앗 속의 배젖을 통해 얻은 고성능 연료 포도당을 매개로 해 미친 듯이 격렬한 세포분열을 촉진한다. 이는 싹이 지하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한결 지능적인 전략도 구사한다. 옥신이라는 호르몬으로 하여금 중력을 감지케 해 씨앗에서 튀어나온 뿌리는 아래로, 싹은 위로 올라가게끔 방향을 잡아준다는 게 아닌가. 지상으로 나가는 싹의 연약한 살이 흙과의 마찰로 구겨지지 않게 갈고리 모양을 만들어내는 꾀도 묘하다. 종단엔 무겁고 딱딱한 땅거죽을 머리로 들이박아 뚫은 새순이 지상으로 올라온다. 천하장사 뺨칠 압도적 재능이다. 씨앗의 저력과 기상에 놀랄 수밖에 없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씨앗 한 톨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다. 우주의 신비한 항해술에 맞먹을 씨앗의 생태를 찬탄하는 얘기다. 시시해 보이는 씨 하나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동해 나무로 자라고 숲을 이루는 거사에서 우주의 뜻을 읽으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원을 거니는 행위는 우주를 느끼는 일에 속한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씨앗과 우주를 가만히 성찰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와 씨 한 톨과 우주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자각할 기회이기도 하고.

봄기운 미진해 썰렁한 산중 정원에서 외려 마음엔 훈김이 들이쳐 평온해진다. 그래도 봄꽃 하나 보지 못한 건 아쉽다. 그저 정원 뒤편 언덕바지에 있는 그윽한 솔숲에서 마음을 풀어놓고 일말의 허기를 달랜다. 한여름이면 수련이 만개해 술에 취한 듯 어지러울 연못가를 거닌다. 그렇게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서다. 캬! 용케 붉은 꽃을 만났다. 반쯤 피어 은근한 동백꽃을.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오면서 보다니, 횡재한 기분이다.

동백꽃을 좋아하는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적실한 표현은 찾지 못하겠고, 그저 푼수처럼 웃을 뿐이다. 추사는 귀양을 살 때 동백꽃을 보고 아내에게 연서를 써 보냈다. 그 심정을 공감한다. 실학자 이수광은 한술 더 떴다. 동백꽃의 붉음을 ‘봄날의 뺨’이라고 했다. 경악할 만치 순정한 은유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애모(愛慕)와 열락(悅樂)의 꽃, 동백! 저 잘난 꽃 피었으니 산중에도 봄이 오긴 왔나 보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최신 뉴스

  • 건축의 나라 스페인
    건축의 나라 스페인
  • 제주 곶자왈이 품은 테디밸리 골프&리조트
    제주 곶자왈이 품은 테디밸리 골프&리조트
  • [카드뉴스] 전국 벚꽃 축제 총정리, 4월 꼭 가야할 벚꽃 명소 9
    [카드뉴스] 전국 벚꽃 축제 총정리, 4월 꼭 가야할 벚꽃 명소 9
  • 시니어 여행의 조건, 단 하나의 불편함도 없어야 떠난다
    시니어 여행의 조건, 단 하나의 불편함도 없어야 떠난다
  • 말을 못 할 뿐, 나무도 사람과 같다 교감하라! 갈 길이 보인다
    말을 못 할 뿐, 나무도 사람과 같다 교감하라! 갈 길이 보인다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브라보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