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는 하늘에 맞먹을 추앙을 받고, 죽어서도 존엄한 예우를 받는 게 왕이다. 그들의 묘역 역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여느 묘와 크게 다른 규모와 격식을 구현해 왕릉에 권위를 부여했다.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집어넣기도 했다. 한 점 흙으로 돌아가는 ‘주검의 처소’일 뿐이지만 왕릉에 쏟아부은 정성과 의도가 이렇게 각별하다. 유네스코는 조선 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대부분 경기도에 밀집해 있다.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 나오는 조항, 즉 ‘능역은 도성(한양)에서 10리 이상, 100리 이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을 따른 데에서 비롯됐다.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은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구리시의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봄이 절정에 달한 5월 한낮의 유혹에 이끌려 나온 사람들일까? 뭐가 달라도 특별히 다른 게 왕릉이지만 사자들의 거처라는 점에서 을씨년스러운 적막감이 감돌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는데, 웬걸 뜻밖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는 능역 일대에 펼쳐지는 자연경관이 빼어나기 때문일 테다. 알고 보니 고양시의 산책 명소라 한다. 왕릉도 보고, 삼림욕 산책도 만끽하고, 즐거울 이유가 겹친다. 왕릉은 원래부터 조정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었으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연생태가 망가지지 않았다. 왕릉이 식생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셈이다.
서오릉엔 왕과 왕후의 능 5기, 그리고 원 2기(園)와 묘(墓) 1기가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이내 명릉(明陵)이 보인다. 조선 왕릉은 범례에 따라 통상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명릉도 마찬가지다. 홍살문으로 진입하자 저만치에 있는 제향 공간 정자각까지 박석을 깐 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높이가 다른 두 개의 길이 병행한다.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이 들어가는 향로(香路)이며, 오른쪽 길은 왕만 사용하던 어로(御路)다. 왕릉의 핵심인 능침 공간은 경사지 상부에 조영했다. 홍살문에서 올려다보면 작아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큼직한 봉분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봉분의 유려한 곡선미로 보자면 우아하기 그지없다. 능 둘레에 도열한 석마,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등 석물들엔 노련한 세공이 가세돼 품격이 완연하다.
명릉은 조선 19대 왕 숙종이 잠든 왕릉이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대비전의 수렴청정을 물리치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펼쳤다. 냉혹한 다혈질 기질을 타고난 한편 총명함과 결단성이 있어 장장 46년에 걸친 치세 기간 내내 강력한 왕권을 지속했다. 탕평책을 실시하는 등 나라의 질서와 제도를 혁신했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바꾸었다. 명릉엔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숙종의 곁에 함께 묻혀 있다. 정자각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쌍릉이 바로 숙종과 인현왕후가 묻힌 능이다. 왼쪽 뒤편에 거리를 벌려 따로 조성한 봉분은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쌍릉과 단릉이 공존하는 명릉의 양식은 조선 왕릉 가운데 상당히 특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현왕후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위되었다가 복위되는 등 자주 파란을 겪었다. 하지만 덕망이 높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인가. 숙종은 일찍이 인현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자신의 능 자리를 그 곁에 잡아두어 마침내 쌍릉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러운 건 인원왕후였으리라. 숙종은 그녀에게 늘 무관심했다. 그럼에도 인원왕후는 숙종과 함께 묻히고 싶어 했으며, 의붓아들인 영조가 뜻을 받아들여 곁방살이 형국이나마 숙종의 쌍릉 저만치에 소박한 능을 만들어줬다. 숙종의 능 근처엔 고양이 한 마리가 묻혔다. 숙종이 애지중지했던 고양이로 밤마다 끌어안고 잤다고 한다. 이 녀석은 숙종이 승하하자 곡기를 끊고 덩달아 죽어 왕이 떠난 길을 뒤따랐다고 하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장희빈의 초라한 묘
명릉에서 좀 더 들어가면 익릉(翼陵)이 나온다. 서오릉 가운데 가장 고지대에 자리한 능으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묻힌 곳이다. 인경왕후는 숙종보다 40년이나 앞서 세상을 떴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했다. 익릉의 봉분은 웅장하다. 석물도 명릉에 비해 크고 정교하다. 정자각은 다른 능에는 없는 익랑까지 갖추었다. 꽃무늬를 새겨 넣은 장명등과 망주석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래저래 화려한 구석이 엿보인다. 숙종이 명한 왕릉제도 간소화가 실행된 이후의 왕릉들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이다.
이제 경릉(敬陵)을 보자. 이는 세조의 아들로 20세에 요절한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그의 아내 소혜왕후의 능이다. 원래 능을 쓸 때는 정자각을 기준으로 왼쪽에 왕을, 오른쪽에 왕비를 안장한다. 왼쪽을 상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경릉에선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소혜왕후의 능을 두었다. 이건 신분의 위계에 따른 배치 방법이다. 대왕대비로서 승하한 소혜왕후가 신분상 의경세자보다 상위에 해당했던 것이다. 의경세자의 능역에 문석인만 있는 반면 소혜왕후의 구역엔 무석인까지 갖추어진 이유도 마찬가지. 이렇게 서오릉의 능마다 개성이 실려 있다. 영조의 비 정성왕후가 잠든 홍릉(紅綾)은 본디 영조도 함께 안장하기 위한 쌍릉으로 조성했으나 능 자리 하나가 빈 상태로 남아 이채롭다. 애초 계획과 달리 영조의 능을 구리의 동구릉에 마련하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런데 왕릉들이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도굴꾼들의 타깃이 되진 않았을까? 2006년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원(園)인 순창원(順昌園)에서 도굴꾼이 도굴을 시도했다. 중장비를 동원해 수직으로 지하 2.7m까지 파내려 간 도굴 갱이 발견됐다. 그러나 도굴엔 실패했다. 당시 도굴 실패 원인이 화제가 됐다. 순창원은 회격묘다. 즉 관이 들어간 구덩이 틈을 석회로 채워 다진 묘다. 회격은 고강도의 차단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중장비로도 묘실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회격묘는 유독 미라가 많이 발굴되는 묘형이기도 하다. 회격 벽이 외부 환경의 간섭을 완벽하게 배제해 묘실 내부를 거의 진공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발길은 장희빈이 잠든 대빈묘(大嬪墓)로 이어진다. 장희빈은 숙종의 여자였다. 중인의 한계를 딛고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존재다. 생시에나 사후에나 극과 극으로 평가가 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한편에선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몰았다. 다른 편에선 정쟁에 억울하게 희생된 제물로 보았다. 이런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대빈묘는 초라하다. 묘역 자체가 매우 으슥한 구석에 있다. 규모도 작고 석물도 별로 없다. 웬만큼 번듯한 사대부가의 묘보다도 옹색하다. 권력 투쟁의 도가니에서 으스러진 사람의 신후가 이렇게 스산하다. 청명한 건 서오릉 일대에 범람하는 숲이며, 숲 사이 오솔길이다. 왕릉도 좋고 왕릉에 서린 역사도 재미있지만, 숲길을 걷는 즐거움 또한 크다.
김용규 고양문화원 원장
호수공원 산책자들을 문화원으로 끌어들여
경기도 고양시는 경기 북부의 최대 도시로 1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근래 들어 급성장한 도시다. 내륙 교통의 동맥인 한강을 끼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따라서 고양을 둘러싼 삼국의 쟁탈전이 잦았다. 김용규 고양문화원 원장은 행주대첩을 고양 역사의 백미로 꼽는다.
“행주대첩이야말로 고양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파상 공세를 펼친 왜군 3만여 명을 권율 장군이 총지휘한 관민의 힘으로 물리친 전투다. 성 주변의 부녀자들은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벌였다. 현재 고양시에선 행주산성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2023년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고양시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5대 도시’에 선정했다. 고양시의 문화 파워는 어느 수준에 있다고 보나?
“이미 문화도시로 부상했다. 공연 전문 예술센터인 고양아람누리의 활발한 운영상을 보라. 규모는 물론 내용에서도 전국 어느 문화공간에 뒤지지 않는다. 이는 고양시 문화현상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김 원장이 펼친 문화원의 중점 사업을 소개한다면?
“2년 전 문화원장에 취임한 이래 줄곧 문화원 홍보에 주력했다. 문화원의 존재 자체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는 걸 알고 이를 시급히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문화원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일산호수공원을 끼고 있어 이점이 많다. 공원 산책자들의 발길이 문화원 방문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게 목표다. 그에 따른 프로그램의 강화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관습에서 벗어난 프로그램을 가동할 경우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 원장직을 맡은 뒤 기존 20여 개 프로그램 중 절반을 폐쇄했다. 그리고 새로운 걸 채워 현재 30여 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주 3일에 걸친 야간 강좌도 신설했다. 주간엔 일에 매일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의 하나다.”
여느 문화원에는 없는 ‘문화아카데미 최고위 과정’도 운영한다지?
“사회 각 분야의 유능한 인력을 문화원 활성화의 동력으로 삼기 위한 강좌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강좌와 체험 활동을 통해 역사 문화를 향유하는 한편 문화적 식견을 쌓게 된다. 나아가 지역의 문화 전령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원 회원 중에 청년층은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 있다면?
“전통문화의 보존과 발굴 중심의 문화 사업에 창의적인 콘셉트를 융합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통혼례 프로그램을 가지고 청년층에 접근한다. 기대보다 반응이 좋아 매우 고무적이다.”
공직 출신인 김 원장은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는 최근 전문가들이 공저자로 참여한 향토사 관련 책 ‘고양의 행주마을 누정과 별서’를 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내용의 깊이와 가치로 돋보이는 책이다. 그는 향후 이 책을 근거로 과거 고양에 있었던 누정과 별서를 복원하는 일에 나설 계획이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지난 27일 ‘5월 궁능 무료·특별 개방’ 안내문을 공개했다. 어린이날과 대통령 취임일, 궁중문화축전과 관련해 2022년 5월 궁능유적기관 특별 개방 및 관람객 무료입장이 시행된다.
어린이날인 5일에는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창경궁, 종묘, 조선왕릉, 세종유적을 무료로 개방한다. 당초 무료입장 대상은 만 12세 이하 어린이와 동반 보호자 2인이었으나, 외국 국적의 어린이를 제외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문화재청이 지적을 수용해 이번 어린이날엔 궁능을 국적과 연령에 따른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단, 창덕궁 후원은 특별 개방 및 무료입장에서 제외된다.
문화재청은 형평성 논란과 관련해 "현재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해 별도의 관람료 체계를 적용하고 있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 나가는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기 위해 관람료 규정체계 자체를 정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 20대 대통령 취임일인 5월 10일에도 창덕궁 후원을 제외한 궁능이 무료로 개방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그간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일부터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일까지 특별 무료입장을 시행한 바 있다. 또한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취임일(2017년 5월 10일)의 경우 대통령 선거 다음날에 바로 이루어진 관계로 별도의 유·무료 입장 여부가 검토되지 않았다.
10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지는 궁중문화축전 기간에는 궁능 특별 개방이 시행된다. 우선 휴무일이 월요일인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과 화요일이 휴무일인 경복궁, 종묘는 축전 기간 중 휴무일에 특별 개방된다. 또한 특별 개방의 일환으로 종묘 자유관람제가 실시된다. 조선왕릉과 세종유적의 경우 휴무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정상 운영된다.
궁중문화축전 기간 동안 경복궁은 무료 개방된다. 단, 경복궁 야간 관람은 경복궁 홈페이지에서 관련 공지를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경복궁 외의 궁능은 대통령 취임일을 제외한 기간 동안 정상 운영(유료 개방)된다.
※ 신한은행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공동 주최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심사는 6개 부문으로 나뉘어 공모된 작품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공정하게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위원장인 김주영 작가를 중심으로 윤정모 소설가, 장석주 시인, 안도현 시인, 부희령 작가, 신아연 작가 등 6명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분야에는 장르가 아주 많습니다. 시, 소설, 동화, 희곡, 평론, 수필, 수기 등. 그 밖에 보고문학, 기록문학 등도 있습니다. 이 다양한 장르는 각기 구성 형식이 다릅니다. 콩트는 결말을 뒤집어야 하는가 하면, 시는 압축의 정수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글로 표현되는 모든 구조의 바탕 원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삶과 인생의 관조입니다.
이번 ‘50+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출품된 글들도 대체로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사색의 깊이와 수사와 문장에서 갈고닦은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시 ‘부록’입니다. 이 작품은 인생 관조의 절창이었습니다.
다음 동화 ‘마음우체통’입니다. 우선 동화적 골격이 단단했고,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소중한 낡은 청바지를 실수로 버린 새엄마가 그 청바지를 기어이 되찾아주는 노력을 클라이맥스로 설정한 것이 참신했습니다.
단편소설 ‘부적 쓰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편을 전철 방화로 잃었고, 나중에 남편을 죽게 한 방화범의 부인이 찾아와 죽은 방화범을 위한 부적을 써준다는 줄거리입니다. 남편으로부터 맘껏 사랑을 받았던 자신과, 평생 애만 먹이다 죽은 방화범 아내의 사연을 씨줄 날줄로 엮었습니다. 도입부의 팽팽한 긴장은 대단한 흡인력이 있었고 얘기를 엮어가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만, 새로운 남자가 등장하면서부터 단편이라는 형식의 틀이 비좁게 느껴졌습니다. 새 남자를 얻었다는 것은 그렇게라도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의지임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나, 그에게 차를 사주었던 것, 아이들이 싫어해서 헤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서술이 필요했다면 이건 중편 형식을 취했어야 마땅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편소설은 한 가지 주제, 그것조차 압축이 필수입니다. 육성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고도의 객관화를 요구하는 것이 단편소설의 특성입니다. 새로운 남자의 등장 대신 남편의 빈자리와 삶의 함수관계,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상실감을 관찰하고 보완해줄 방법을 찾았다면, 방화범의 아내, 아이를 잃어버린 그 불행한 여인의 아픔이 더 진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좀 더 덜어냈다면 최고의 수작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대륙에 길을 묻다’는 미니 자서전입니다.
유럽 어느 철학자가 그랬던가요? 인생에는 난이도가 있고 성공한 사람은 난(難), 그러니까 어려움을 잘 극복한 사람이고 그 기간과 결과는 대체로 10, 20, 30년으로 본다던가요. 대륙에서 길을 물은 서술자는 한 번에 세 가지를 다 잃고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타향에서 10년을 살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곧장 새 일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해냅니다. 한 사람이 10년 동안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경탄에 이어 의심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저도 중국과 단동 취재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상황의 진실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밝힌 전망도 망상이 아닌 실제적 이론에 기반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북한의 경제 개방 문제입니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경제적 개방은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세계 여러 학자들도 이미 진단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남북이 정치적 통일까지 하게 되면 경제 대국을 향해 빠르게 독주할 것이다, 가능한 한 통일까지는 막아야 할 것이라는 농담 같은 기사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서전 서술자의 관심사는 개인 영달이 아닌 국가와 민족입니다. 그가 펼쳐둔 일들, 진행 중인 일들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대상을 결정했습니다.
부문별 우수상을 받은 6개의 작품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여정의 찬란함을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김영창 씨의 산문 ‘생각의 관성’은 은퇴로 인해 관성적인 일상이 멈춘 자리에서 방향을 전환, 생각의 관성을 달리하는 여유와 도전 정신이 돋보였습니다. 단편소설 부문 박상희 씨 ‘그녀의 이름은 김순자입니다’는 영화 장면과 상상이 오버랩되는 설정을 통해 노년의 사랑을 경쾌하고 따스하게 묘사한 점이 빛났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주저 없이 선택한 미니 자서전 부문 은정남 씨의 ‘마침내 무한 변신’은 퇴직 후 전방위적으로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후반 인생의 정체성을 새롭게 써내려가는 작품입니다.
배홍숙 씨의 동화 ‘왕릉의 전설’은 역사 속 인물에 호기심과 긴장으로 다가가는 쌍둥이 남매와 비밀의 열쇠를 쥔 할머니의 반전 묘미가 독특했기에 호평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인생의 여정을 바다의 거친 풍랑에 맞서 싸우는 항해사에 비유해 심도 있게 표현한 이석재 씨의 시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는 시적 언어의 능력과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김석철 씨의 동영상 ‘인생 2막에서 날아 오른 팔색조’는 8개의 직업을 갖기까지 인생 2막을 설계하는데 마중물이 된 요소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기획과 영상 편집이 탁월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모든 응모자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아울러 이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에 읽을거리를 선사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헉! 이거 뭐지? 혹시 그날 아람이가 얘기했던 게 이건가?’
누리는 미술관의 다섯 번째 전시실 모퉁이에 걸린 그림을 보다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마침 까만색 유니폼을 입고 목에는 스태프 라고 쓰인 표를 달고 있는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5전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아저씨! 저 그림 좀 이상해요.”
“응? 뭐가?”
“그러니까 저게...”
하면서 누리가 다시 그림을 보니 그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갸름한 얼굴에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긴 채 마치 맞은편에 있는 남자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 조금 전 누리가 봤던 그 놀라운 모습이 아니었다.
“저- 그게 저 그림이... 아, 아니에요.”
직원은 누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 천천히 걸으며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전시실에 상태를 살피는 거 같았다.
누리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전시를 오픈하던 날, 아람이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자기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누리는 다시 그 여자그림 앞으로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무슨 괴기 영화나 환타지 영화에서 본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아람이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전시 개회식은 일주일전 목요일 오후 5시에 있었다.
할머니는 미술관을 놀이터 드나들 듯 좋아하는 누리 때문에 미술관에 자주 가시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부터 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 교육을 받으셨다. 도슨트는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전시에 대한 여러 정보와 전시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봉사자라고 한다. 그날 할머니가 누리에게 전시 오픈식에 참석해서 작가들을 만날 거라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누리는 미술관엔 자주 가서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작가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오픈식이 끝나면 맛있는 다과 파티도 있다는 할머니 말씀에 누리는 냉큼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지만 아람이는 시큰둥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아람이와 누리는 불과 32분 차이로 세상에 나왔다.
아람이는 12월 31일 밤 11시 49분, 누리는 다음 해 1월 1일 0시 21분.
부모님은 출생신고를 하면서 잠깐 같은 날로 올릴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병원에서 기록한 그대로 출생신고를 해서 아람이는 학교도 한해 먼저 들어갔다. 4학년이 된 아람이는 걸핏하면 3학년 보다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유세를 부렸다.
쌍둥이지만 둘은 비슷한 것보다 다른 면이 훨씬 많다.
아람이는 책을 좋아하고, 누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져서 누나답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누리는 활발하고 덜렁거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게임이나 그림 그리는 것, 만들기는 아람이보다 선수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는 ‘금손 누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픈식 때, 아람이가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미술관으로 왔다. 전시 담당 큐레이터가 인사를 하고 전시 기획의도를 알려주는 동안 할머니는 메모장을 들고 제일 앞쪽 자리로 가서 앉으셨고, 누리는 다과가 차려지는 쪽 가까이 앉았는데 아람이는 지루했는지 혼자 전시실로 들어갔다.
문화재단 대표이사가 활짝 웃으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오랫동안 얘기 했다. 그다음엔 그 왕릉 중 8기가 우리 시에 있으니 큰 자랑거리라고 시장이 더 길게 길게 얘기했다. 누리가 보니 가슴에 꽃을 달고 한쪽에 쭈-욱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작가들 같았다. 작가들도 지루한지 얘기하는 시장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자기 손을 맞잡았다가 했다. 그때 얼굴빛이 빨갛게 상기된 아람이가 누리 옆으로 오더니,
“누리야, ‘류원’이란 화가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행사 식이 끝나면 재빨리 좋아하는 케잌을 먼저 집으려고 음식물들이 있는 상을 보고 있던 누리는
“나도 몰라. 아직 작가들은 인사 안 했어. 저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을 거야.”
하며 작가들 쪽을 가리켰다.
그때, 드디어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또 누구에게 감사말씀을 전하는 바라고 말하던 시장님 얘기가 끝나고 작가들 인사 차례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인물과 관계된 것인지 어떤 방법과 의도로 제작한 것인지를 짧게 얘기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얘기가 다 끝났는데 ‘류원’이란 작가는 없었다.
사회를 보던 큐레이터가 말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1명인데 그중 세 분은 개인 사정과 해외 전시에 참여하느라 못 왔으니 양해바랍니다.”
아람이는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는데?”
누리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글쎄- 내가 잘 못 본 걸 수도 있어서......”
하다가 누리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너 다음에 또 올 거니?”
누리는 전시가 열리는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관람을 하곤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인데다가 시립 미술관이라서 입장료도 저렴하다.
또 미술관 간다고 하면 엄마는 늘 입장료에 1,000원을 더 얹어 준다.
그러니 누리에게 미술관 관람은 그야말로 1석 2조, 아니, 1석 3조도 넘는 거다.
“당연하지.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걸.”
“그럼 다음에 올 때 5 전시실에 있는 ‘류원’이란 화가 그림 좀 자세히 봐줘. 정말 이상했거든.”
“뭐가?”
“그건 네가 그림 보고난 다음에 얘기 할 게.”
‘그래. 아람이도 그날, 분명 나랑 같은 걸 봤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 누리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마지막 전시실도 그냥 지나쳐 집으로 내달렸다.
현관문 번호단추를 빠르게 눌렀다. 운동화는 벗겨져 날리듯 흩어졌지만 그건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아람아, 아람아 너 그거 봤지?”
급하게 자기를 찾는 누리를 보면서도 아람이는 소파에 앉아 동화책을 읽다가 느긋하게 한 마디 했다.
“저런~ 누나라고 불러야지. 3학년 꼬마야.”
“웃기지마. 너 그거 봤지, 맞지?”
“음- 너, 지금 미술관 갔다 온 거구나?”
“그래. 그 ‘류원’이란 화가가 그린 여자 그림 봤어.”
“어땠는데? 너도 이상했어?”
“있잖아. 꼭 ‘헤리포터’ 영화에서 본 그림들처럼 움직이고 나한테 말을 거는 같았어.”
“그래? 내가 볼 때도 그랬어. 근데 그거 너 혼자 봤어? 무슨 말을 했어?”
“몰라.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더니 원래대로 안 움직이는 그림이 됐어. 넌?”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같아 얼른 밖으로 도망쳤지.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나는 거기 직원 아저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림이 그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 들을까봐 그냥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너랑 얘기하려고 얼른 온 거야.”
“마법 그림인가? 그런 게 정말 있는가봐. 그치?”
아람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상해, 이상해. 우리 지금 가 보자.”
“안 돼. 지금 가도 소용없어. 미술관은 6시까지만 연단 말이야.”
아람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무슨 큰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 누리에게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을 풀어 보자.”
“무슨 비밀?”
“그림 속 여자는 왜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인지, 정말로 그림이 움직이는 게 우리 눈에만 보인 건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왜 있잖아, 동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거. 우리가 그 여자의 원한이나 비밀을 푸는 순수한 아이들로 선택된 걸지도 모르잖아.”
아람이는 야무지게 말했지만, 누리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리야, 우선 이번 전시의도를 알아야 하고 ‘류원’이란 화가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야 해.”
“그건 어렵지 않아. 전시가 설명된 리플릿도 있고 10시, 11시, 오후 2시, 3시엔 전시를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도 있거든. 아, 이번부터 할머니도 미술관에서 도슨트 하니까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간단하겠다.”
“아냐. 그럼 재미없지. 우리가 선택됐으니까 우리가 해결하는 거야. 어른들에겐 비밀로 하고.”
아람이는 다시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옴찔거리며 생각을 모으느라 애썼다.
“그래. 우선 전시 리플릿부터 보자. 너 갖고 있지?”
“물론이지. 난 여태껏 전시 리플릿은 다 모았다니까.”
누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뒷주머니에서 리플릿을 꺼내 놓았다.
아람이와 누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전시 설명이 담긴 네 면으로 된 리플릿을 읽었다.
앞면엔 전시 제목과 대표 작품 사진, 전시 날짜가 적혀있고, 안쪽 두 면에는 전시 내용과 사진 두 개가 있었다.
왕릉의 전설
-조선 왕족들의 미술관 행차-
은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권력과 명분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이들 왕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주인공으로 8인을 선정하고 각 존재들에 대한 시각적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 11명의 작품을 소감형식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전시의 소재가 된 왕족은 인수대비, 폐비 윤씨, 인종, 소현세자, 숙종, 희빈 장씨, 의빈 성씨, 그리고 철종이다.
왕릉이라는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이 마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온전하게 충족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은 후손인 우리의 심정을 흔들어 생각을 일으킨다.
사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의의가 갖는 무게에 비해 현대인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가벼웠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 표현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치열한 꿈의 허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누리가 투덜거렸다.
“이게 뭔 말이야아~? 난 짜증나.”
“어른들한테 보여주는 거라 그래. 어쨌든 조선시대 왕족들 얘기를 그린 작품이란 말이지 뭐.”
“그럼, 류원이란 화가는 누구 얘길 그린 걸까?”
누리가 마음이 급해져서 뒷장으로 넘겼다.
뒷면에는 참여 작가 11명의 이름과 간단한 작품 내용이 있었다. 문경은, 태인주, 노장현, 박영훈, 류원, 신희경, 백승민, 최원범, 우정석, 김화준, 이민숙. 누리와 아람이는 류원 작가 옆에 있는 글만 소리 내어 읽었다.
“류원은 신비한 전설 속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작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는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동안 작가가 그려오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의빈 성씨 얘기라고?”
아람이는 의빈 성씨를 아는 거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누군데? 너 알아?”
“응.”
“어떤 사람인데?”
아람이가 좀 뻐기는 표정으로 누리에게 말했다.
“누나, 아니 '누님 알려 주시옵소서.'하면 가르쳐 주-지.”
“야! 겨우 32분 먼저 태어났다고 그 소릴 듣고 싶냐? 나 같으면 그냥 친구먹자고 하겠다.”
“싫음 말구.”
“어-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증이 풀릴 열쇠인 것만 같아서 누리는 ‘이번만’하는 맘으로 더 과장되게 아양을 떨었다.
“누님, 저는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매우, 매우, 매우 궁금하옵니다. 알려 주시옵소서.”
“좋다! 내 알려주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아람이는 누리에게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얘기는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왜? 가르쳐준다면서 왜 가?”
아람이는 책 한 권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내가 좀 똑똑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다 외우는 건 아니쥐이. 여기 봐-.”
아람이는 ‘조선왕조실록’이란 만화책권을 펴서 195쪽에 있는 ‘제 22대 정조 가계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거기엔 정조 밑으로 ‘효의왕후 김씨(1753~1821)- 후사 없음’ 이라 적혀 있고, 그 다음 줄엔 ‘의빈 성씨(1753~1786)-1남, 문효세자 일찍 죽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속 여자가 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거 봐. 의빈 성씨는 겨우 서른네 살에 죽었어. 그러니까 뭔가 사연이 더 있을 거야. 이 책에서 보면 화빈 윤씨가 미워한 거 같거든.”
아람이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더니 말했다.
“그래서 화빈이 의빈 성씨를 죽였대?”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원한이 있어서 우리한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내야지. 그림 속 여자가 우리한테 하려고 하는 말도 뭔지 알 수 있고, 영혼을 달래줄 수도 있겠지.”
“하~ 아람아! 내가 보기엔 넌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같아.”
“뭐라구? 너도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봤다며? 얼마나 억울하면 그림이 말을 다 하겠니?”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 보자. 아니 이따가 할머니한테 물어 보는 게 낫겠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재밌는 사건이 우리 평생에 얼마나 있겠어? 어쩌면 이건 우리 생애 최고로 짜릿한 비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란 말이야.”
“치~ 비밀 만들고 싶은 거야?”
“동화를 읽다보면 비밀이나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 주인공이 재미난 경험을 하는데, 우린 언제 그런 일이 생기겠어? 만날 똑같은 날이니... 그러니까 너랑 나, 둘이서만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내가 너한테 슬라임 전부 다 줄게.”
“진짜? 앗~싸~. 그러지 않아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려고 했는데... 좋아! 어떻게 하면 돼?”
“우선, 의빈 성씨에 대한 자료를 더 찾는 거야. 그리고 미술관에 가는 거야.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고? 5 전시실에서 사람들이 나가길 기다려야 하나?”
“그렇지! 자, 이제 자료를 어떻게 찾는다? 도서관에 가야 할까?”
“에이 바보!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게 빠르지.”
아람이는 민망한 듯,
“아하하... 그렇구나. 근데 조금 있으면 엄마랑 아빠 집에 올 시간이야. 그니까 일단 오늘은 숙제 하는 척 하면서 이 책을 보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찾아봐야지.”
“와~ 철저하네. 난 그냥 내일 학교 끝나고 곧장 미술관에 가서 의빈 성씨랑 단판을 내고 싶구만...”
다음 날 오후, 누리는 학교 운동장에 땀을 흘리며 친구와 축구공으로 놀고 있는데 아람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리야, 누리야아~~ 지금 미술관 가자~~”
“너네 누나도 미술관 좋아하냐? 이상한 남매야. 나도 이제 학원 가야겠다.”
하며 친구가 교문밖으로 나갔다.
“나 입장료도 없단 말이야.”
누리는 아람이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야! 내가 누구냐? 초대권을 할머니한테 두 장 받았어. 그리고 인터넷 검색은 아까 점심시간에 도서실에서 해놨고.”
“역시! 짱인데.”
“학습지 선생님 올 시간 맞추려면 빨리 갔다 와야 해. 뛰자~”
1 전시실에서 4 전시실까지는 건너뛰고 5 전시실로 들어간 아람이와 누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빈 성씨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그림은 그림인 채로 있었다. 그런데 그림 앞 1m 정도로 바짝 다가가자 그림이 움직이며 말을 걸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헉! 정말요? 왜요?”
누리가 깜짝 놀라 물었고, 아람이도 서둘러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거죠? 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셨나요?”
“아~ 글쎄... 왜 그렇게 생각지?”
“내가 다 찾아봤어요. 이름은 성덕임이고, 정조 임금님이 무척 사랑했고, 아들인 문효세자는 다섯 살에 죽고, 딸도 태어나서 첫돌도 안 돼서 죽었잖아요. 또 세 번째 아기를 낳기 두 달 전에 죽은 것도 알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어머나! 나에 대해서 많은 걸 공부했구나? 고맙다. 그렇지만- ”
그때, 세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5전시실로 들어 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아람이랑 누리네! 책가방도 메고 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 곧장 왔구나?”
“네, 할머니.”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그림을 돌아보니 그림은 다시 멈춰 있었다.
아람이와 누리는 눈을 맞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림이 다시 움직이며 말을 시작했다.
“정조 임금님과 나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요. 정조 임금님은 내가 죽은 후 저를 애도하는 글을 많이 써 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분이 그리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누리와 아람이와는 달리 할머니와 다른 두 분은 웃으며 그림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가 많아요. 박선생님!”
다시 또 놀란 누리가 물었다.
“할머니! 어떻게 된 거에요?”
“이런 작품은 누리도 처음 보지? 이런 작품을 ‘인터렉티브 아트’라고 하는 거야. 테크놀러지가 결합되어 관객을 만나야 완성되는 작품. 관객들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어.”
“그럼 그림 안에 AI라도 들어 있는 거예요?”
이번엔 아람이가 물었다.
할머니가 바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여기 이 지점에 사람이 서면 센서가 작동해서 관람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림 뒤에 숨어 있는 분이 말을 하는 거지. 그러면 디지털로 된 그림이 움직이는 거야.”
“그림 뒤에 있는 분은 우릴 볼 수 있어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보지는 못 해. 컴퓨터를 앞에 놓고 검색어를 치면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도 해야 하니까. 하하, 내가 비밀로 해도 될 걸 너무 많이 알려준 건가?”
그제야 아람이와 누리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누리는 디지털 그림이 너무나 감쪽같아 놀라웠고, 아람이는 신비한 경험을 놓친 거 같아 크게 서운했다.
나중에 아람이와 누리에게 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얘기 듣고, 할머니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아! 할머니는 너희들 덕분에 미술관에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우고 또 그걸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구나. 더구나 그림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렇게 배워나가는 아람이랑 누리를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수상소감 - 우수상 동화 배홍숙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 생각이 신기해 기분이 좋아져요”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동화를 몇 편 써 두고 공개는 안했는데,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처음 응모해서 이렇게 상을 받으니 많이 기쁩니다.
독서 동아리 회원이 공모전이 있다고 단톡방에 링크를 걸어주셨어요. 그 분도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응모 부문에 동화가 있어 용기를 내봤습니다. 어쩌면 50대 이상이 참가하는 거라면 동화 부문 응모자가 적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글쓰기 관련 책을 보기도 하고, 강의도 가끔 듣습니다. 함께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가족, 제가 하는 모든 활동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글쓰기엔 특별한 동기가 필요한 거 같아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이후에 다른 공모전이 있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요청이 온다면 글쓰기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네요.
내가 쓴 에세이는 항상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가 해낸 생각들이 신기해서 기분이 좋아지고요.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동화나 그림책 글을 계속 쓰면서, 감동을 주는 좋은 수필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공모전 정보를 주셨던 선생님, 잘못된 파일 경로를 수정하라고 알려주신 담당자에게 감사드리며, 독서동아리 친구들과 어린 시절에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던 엄마와 외할머니, 응원해 주는 식구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로하스 연천이라고도 불린다. DMZ가 인접한 청정지역답게 때묻지 않은 가을 햇살이 바삭하다. 그 햇살에 덮인 자연은 렌즈에 필터를 한 겹 더 씌운 듯 깊이 있다. 연천은 구석기부터 고구려시대까지의 성(城)을 비롯한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순수한 자연을 누리며 오랜 역사를 되짚어보는 시간이 가능하다. 경기 북부 연천의 가을 들녘, 마음이 풍성해지는 외출이다.
연천 지역에서 고구려 문화유산 흔적은 일상의 풍경이다. 자동차를 타고 연천의 들길을 달리다 보면 나지막한 민둥산처럼 보이는 성이 나타난다.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이다. 연천을 대표하는 고구려 문화유적이다. 임진강변의 높은 절벽 위에 흙을 쌓아 다지고 돌을 높이 올려 성벽을 이룬 천혜의 요새로서 지금도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주상절리, 적의 방어기지이자 물자 이동의 상업적 지역이었던 고랑포구, 한탄강과 장진천이 만나는 은대리성의 숲 등 연천은 민통선과 가까운 전방 도시이지만 역사도시이기도 하다.
해바라기가 함께하는 호로고루성
꽃철마다 붐비는 곳이 있듯이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면 물결을 이룬 해바라기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온다. 호로고루성은 독특한 이름만으로도 솔깃한데 언제부터인가 고구려 성벽 아래 펼쳐진 해바라기 밭으로 사람들이 찾아든다. 이제는 북새통의 절정기가 지나고 한가하다. 이미 노란 꽃잎을 떨구고 씨를 내민 해바라기 밭 건너편으로 우뚝 솟아오른 호로고루성, 그 주변으로 한가롭게 오가는 이들의 모습이 가을 풍경과 잘 어울린다.
성 위에 올라서 보면 낮게 흐르는 임진강과 연천의 산천이 따스한 가을볕에 덮여 있다. 흙과 돌을 이용해 토성과 석성의 이점을 결합한 축성술이 돋보이는 호로고루는 그 옛날 개성과 서울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연천과 개성 간의 거리는 30km 정도. 강 건너편의 개성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든든한 주상절리를 믿고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은 물이 깊지 않아서 예로부터 육상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전해진다. 그 강을 옆에 둔 호로고루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바라기 밭이 계절을 물씬 전한다. *사적 제467호
고랑포구의 추억
연천은 산을 돌아 들길과 강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호로고루성 들판을 건너 바로 근처의 고랑포구는 한국전쟁 이전엔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치던 곳이었다. 전쟁 이후 그 명성은 사라졌지만 지난해 '고랑포구 역사공원'을 개관하면서 다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역사관 실내엔 교역이 왕성했던 고랑포구의 옛 풍경을 재현해놓았고 체험실과 첨단의 콘텐츠를 설치 전시해서 찾아드는 여행객들을 맞고 있다. 특히 역사공원 앞마당에 들어서면 ‘레클리스’(Reckless)란 이름의 군마 동상이 눈길을 끈다. 그 앞으로 멀리 임진강변의 고랑포구를 바라보며 강물 따라 흘러간 역사를 그려본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무덤
고랑포구 역사관에 왔으니 바로 옆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신라 마지막 왕의 무덤 경순왕릉에 들르지 않을 수 없다. 경주나 개성 어디쯤에 있을 듯한 신라의 왕 무덤이 연천에? 하면서 의아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위탁하고 개성에서 여생을 마친 후 경주로 운구되는 중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軀)는 백 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여 이곳 고랑포리 언덕에 장례를 모셨다고 한다. 민란이 염려되어 임진강도 못 건너고 연천에 머물게 된 비운의 왕릉이다. 경순왕릉은 소박하고 석물의 배치나 종류도 간소하다. 조선시대의 여느 왕릉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병풍처럼 두른 산이 있어 제법 위엄 있다. 잠시 넓은 잔디밭과 숲 그늘을 거닐어본다. 역사 저편의 사연을 안고 연천 땅에 묻힌 경순왕의 고뇌를 경건하게 되새겨보는 시간이다. *입구에 문화해설사가 상주해 있다.
고려 왕조의 역사가 깃든 숭의전(崇義殿)을 아시나요
고려 왕조의 위패가 봉안된 숭의전, 입구의 태조 왕건이 마셨다는 약수터 어수정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홍살문을 지나 5분쯤 천천히 길을 오른다. 마치 오래된 옛 길을 걷는 듯하다. 그 숲길에 간간이 밤이나 도토리가 툭툭 떨어져 떼구루루 구른다.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고려의 부흥을 이끈 옛 고려 왕조를 향한 충절이 깃든 곳으로 태조 왕건의 위패와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입구의 담장과 기와에서 자라는 푸른 이끼가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고려 왕실을 지켜준 550년 수령의 느티나무 숲 절벽 아래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우거진 숲 사이로 캠핑하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역사 유적이 자리 잡고 있는 힐링 숲, 그 아래 고즈넉하게 흐르는 임진강, 온통 정적만 감도는 경내 한쪽에서는 보도자료 영상을 촬영하는 팀이 보이기도 한다. 고요한 태곳적 숲의 사적에 내려앉은 따사로운 가을볕에 마음이 여유롭다. *평화누리길 11코스가 시작되는 곳이다.
언덕 강벽 위의 옛 진루, 사적 제468호 당포성
숭의전을 내려와 5분쯤 달리면 삼각형 절벽의 땅 위에 쌓은 당포성이 가을바람 속에 있다. 마치 호로고루성과 쌍둥이 성인 듯 흡사하다. 성의 생김새나 임진강을 옆에 두고 있는 주변 지형도 비슷하다. 나루 위에는 동벽과 전망대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당개나루로 불렸다는 옛 포구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시대의 성(城)이 연천에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주상절리에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병풍처럼 이어진 주상절리라는 자연적 성벽 위로 흙과 돌로 쌓아 올려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것이다. 성 위로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오롯하게 서 있다. 역사의 한 장면인 듯 바라보았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아름다움, 주상절리
멀리서 바라만 봐도 주상절리를 품은 임진강의 잔잔한 물결이 평화롭기만 하다. 화산활동 후 용암대지가 강의 침식을 받아 생겨난 기하학적 형태의 현무암 주상절리, 그곳엔 긴 시간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미어 있을 것이다. 천년 요새였던 그 강가에 강태공 한 명 세월을 낚으며 앉아 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은 마냥 다디달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듯 잡초와 야생화가 가득 피어 있는 주상절리 둑방길도 한적하다.
휴전선과 가까운 민통선 북방지역답게 연천은 철원, 포천 등과 함께 흔히들 말하는 군 전방지역이다. 그 들길과 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삼엄한 전방 군부대를 군데군데 지나치게 된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은 철조망 철책 따라 줄지어 걷는 군부대 장병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이 땅 최북단의 군부대에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씩씩한 아들들을 한참 바라봤다. 고마운 청춘들.
DMZ와 인접해 있는 연천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임진강 생물권 보전지역이다. 풍부한 수자원과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서 멸종위기종이나 희귀한 생물 자원이 서식하는 등 생태적 가치가 높은 구역이다. 또한 구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석기인들의 생활 흔적이 발견된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세계 고고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는 지역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라도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질공원, 한탄강 하류에 위치한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을 품고 있는 재인폭포(才人瀑布)의 장관도 빠뜨릴 수 없다.
연천의 하루, 심신이 편안하다. 그 옛날 우리의 오천년 시간 속에서 고구려가 써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어낸 시간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에 연천의 시골 인심 한 보따리를 차에 실었다. 민통선 청정지역답게 맑은 물, 비옥한 토지에서 자란 각종 채소와 과일 등 다양한 농산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그 들녘엔 지금 가을이 풍성하다.
◇영화처럼 맛보기
기왕 연천에 갔으면 북쪽으로 조금 더 달려 군부대 앞의 망향비빔국수를 맛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이 국숫집은 연천에서 군생활을 했던 병사들이라면 거의가 다녀간 집이다. 그런 추억 때문에 일부러 먼 길 달려가 먹는 국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화 '강철비'에서 대한민국 외교안보수석과 북한 최정예 요원으로 분한 배우 곽도원과 정우성이 국수를 후루룩 맛있게 먹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국수 위에 올린 상추 한 잎은 '망향의 시그니처'로 불린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패자의 역사는 폐허 더미에 묻히거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일까? 기를 쓰고 남을 짓밟아 승자로 남고 싶어 하는 이들은 유독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탑을 쌓고 더 큰 영토에 집착하며 영역 표시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역사는 승자를 주로 기록하지만 패자에게도 눈길을 준다. 아니 후세의 이야기꾼들은 승자보다 패자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며 가슴 절절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태생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이야기꾼들의 귀는 승자보다 드라마틱한 패자의 삶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했던 부여 유적지, 미륵사지 복원으로 옛 영광 되찾아
옛 부여가 지배했던 지역을 여행할 때면 어쩐지 쓸쓸하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역사 현장들은 남루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웅진백제 시대의 도성이었던 공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가 1990년 가을. 공주에 가면 으레 그곳에 가야 한다는 일행을 따라 방문한 무령왕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사적인 유적지, 옛 부여의 왕이 묻혀 있는 지하 무덤방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관람객을 차단하는 유리벽이 있었지만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론 왕의 무덤을 봤다는 두근거림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역사적 유물 현장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 결국 1997년경 유리벽에 곰팡이가 생기고 물이 새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의 석실 관람이 전면 금지됐다. 현재는 모형전시관에서만 그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근 26년 만에 다시 공주 송산리 고분을 방문했을 때 무덤방 개방이 전면 금지된 것을 알고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꾼보다도 더 졸속으로 17시간 만에 유물들을 꺼내 옮겼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두고두고 한국 고고학계의 수치이자 치욕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 발굴 단장이었던 서울대 고고학과 故 김원룡 박사의 회고록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고구려 유적지는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비교 대상이 신라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백제의 유물들만 유독(?) 수난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도 든다. 사실 경주를 방문할 때 느끼는 깔끔하고 웅장한 박물관이며 유물 단장 상태를 보면 이런 의혹이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의혹을 한순간에 없애주는 곳을 다녀왔다. 익산의 미륵사지 터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조선총독부가 무너지기 전의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무너져 내린 석탑 뒷면을 콘크리트로 땜질해 세워놓았다.
지난해 4월 말, 몰락한 왕조의 찬란한 유산이 마침내 20년간의 해체와 복원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준공식을 한다는 기사를 본 후,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익산 여행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전남 지역을 한 번 훑고 전북을 돌아다녀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러던 차에 지난 7월, 전남 장성 필암서원을 취재차 가야 할 일이 생겨, 벼르고 벼르던 익산 여행을 코스에 넣고 일정을 짰다.
미륵사지 동석탑, 일본의 호류지 목탑과 유사해 깜짝 놀라
마침내 익산 미륵사지 터를 방문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끝자락 주중이라 그런지 찾는 이도 없었다. 고즈넉한 미륵사지 터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복원해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을 보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석탑이 자꾸 떠올랐다.
2016년 일본 교토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교토 여행 마지막 날, 나라 현의 호류지를 찾아가기 위해 일본 시골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샘솟았다. 호류지에서 봤던 5층 목탑과 그 위의 풍탁까지… 복원해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의 모습이 호류지에서 봤던 목탑과 형태가 정말 똑같았다.
당시 교토를 건너가기 전 한국에서 경주 여행을 마치고 다음 날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해의 여행은 마치 천년의 시간과 공간이 건너뛴 듯 아주 특별하고 소중했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미륵사지 터에 복원된 동석탑을 보는 순간 4년 전 뜨거웠던 그해 여름, 찾는 이 없이 적막했던 호류지 사찰 경내의 그 목탑이 불현듯 떠올랐다.
백제와 고구려 장인들이 건너가 전수한 일본 아스카 문명의 꽃 ‘호류지’
일본의 아스카 문명을 꽃피웠던 쇼토쿠 태자에 의해 창건된 호류지(법륭사)는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계적 불교문화의 보고다. 호류지 본당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호류지의 박물관인 대보장원에는 백제에서 선물했다는 설과 백제의 후예가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대형 목불상 ‘백제관음상’이 보존돼 있다. ‘일본관음상’이 아닌 ‘백제관음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면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가 일본에까지 건너가 꽃을 피웠던 건 분명해 보인다.
호류지의 금당 내 벽화는 고구려 승려 화가인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1945년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아쉬운 대로 소실되기 전 촬영해놓은 사진을 근거로 디지털화된 3D금당벽화를 인터넷에서 감상할 수 있다.
동양 최대 미륵사지 석탑, 해체와 복원 20년 걸려
미륵사지 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감상해야 할 석탑은 당시 모습을 유추해 복원한 동석탑이 아니라 머리 부분과 위의 두세 층이 사선 모양으로 비스듬히 허물어진 서석탑이다. 국보 제11호, 동양의 최대 석탑이다. 20년 동안 일본이 뒷면에 발라놓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본래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치아 스케일링 기계까지 동원해 콘크리트의 흔적을 말끔하게 벗겨내, 마침내 1910년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문화자원을 조사하면서 유독 백제 문화 유적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빽빽하게 조사 보고서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미륵사지 터를 발견하고 조사할 당시 동석탑은 이미 무너져 내려 흔적만 남아 있었고 힘겹게 남아 있던 서석탑도 무너져가는 상태였다고 한다.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된 사리장엄구 등 볼거리 풍성해
일본이 미륵사지 서석탑 뒤에 콘크리트를 발라 세워놓은 것은 자신들의 본류를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였을까? 국립 익산박물관에는 뒷면이 콘크리트에 쌓인 채 흉물스럽게 숨 쉬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해 복원하기까지 걸린 20년간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서석탑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출토된 유물들도 전시돼 있다.
또한 익산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다큐멘터리(문화유산 채널 K-HERITAGE TV 제작)를 통해,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 등을 촬영한 사진을 보며 백제 문화와 유적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몰락한 왕조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권력과 무상함 깨우치는 곳
7세기 백제의 무왕이 왕비의 청으로 불사를 일으켰다는 미륵사지.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 나타나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대규모 사찰 미륵사지는 왕조의 몰락과 함께 오랜 시간 몰락과 소멸의 길을 걷다가 기적적으로 환생했다. 물론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곳을 거닐며 고증에 입각해 해체와 복원을 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되살리기 위해 쏟았을 문화재 보존 관련자들의 정성을 느껴본다. 몰락한 왕조의 유물이 이제야 온전히 평가받고 그에 걸맞게 대접받고 있다는 안도감도 든다.
넓이가 5만 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 절터였다는 미륵사지. 양쪽의 석탑과 가운데 목탑, 가람도 3개나 있었다고 한다. 3탑 3금당의 구조로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했다는 미륵사지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절터 뒤편을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는 안개 머금은 미륵산 자락과 주춧돌로 옛 영광을 유추해보며 광활한 절터를 걸어봤다.
흔적 없이 사라진 화려한 유물 대신, 세월의 이끼 낀 주춧돌만이 시간의 영겁과 헛되고 헛된 화려함을 누르고 2020년 후손들을 만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단종이 마지막을 보냈던 영월로 여행을 떠난다. 겨울날, 더욱 가슴이 시리도록 다가오는 청령포와 관풍헌, 장릉으로 이어진 단종의 자취를 따라가는 영월여행은 단순히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 채 피어나지 못한 젊음과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은 백성을 만나는 여정에 마음은 더욱 단단해진다.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을 모르겠다. 특히 다 자란 어른의 권력욕은 치명적이다. 12세에 왕위에 올라 17세에 숨을 거둔 단종(端宗 1441~1457)의 짧은 생애,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은 지 1년 반 만에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그를 모시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으로 내몰렸다. 어린 소년 왕은 스스로 왕위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456년(세조 2) 수백 명이 죽어 나갔던 사육신 사건이 후 얼마 후에 어린 소년은 제 삼촌인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는다. 1457년 10월의 일이다.
영월 첫 여행지는 이른 아침의 청령포다. 눈은 오지 않으나 스산한 겨울바람이 부는 청령포를 따라 회색빛 옅은 안개가 외진 땅을 감싸고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단종이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가 그의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600년 된 관음송(觀音松)만이 그때를 기억하는 듯 처연하다. 어린 노산군이 이 소나무에 앉아 한을 토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한다. 그것을 보고 듣고 하였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관음송과 소나무, 참나무가 어우러진 숲은 흘러간 세월의 풍상에 아픔을 차곡차곡 갈무리한 듯 무게감이 느껴진다. 뒤로는 넘을 수 없는 절벽 산이, 양옆과 앞으로는 시퍼런 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이곳에서 눈물지었을 어린 임금의 심정은 얼마나 막막하였을까.
단종이 죽음을 맞이한 곳은 영월의 관아인 관풍헌이다. 홍수가 나 청룡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 뒤 두 달여 만에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한다. 관풍헌 앞에 있는 누각 자규루에 그가 읊었던 시가 그의 피눈물 나는 애통함을 대변하고 있다.
...자규새 소리 멎고 조각달이 밝은데
피눈물 흐르고 꽃송이 떨어져 붉었구나...
자규새는 신하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한 두우가 죽어 새가 되어 촉나라 땅을 돌아다니며 피를 토하며 울었다는 전설 속 소쩍새를 말한다. 단종의 원혼이 이 땅 어딘가를 날며 울고 있지나 않은지.
현재 관풍헌과 자구류는 공사 중이다. 왕방언이 가져온 사약을 마셔야 했을 소년 왕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의 시신이 묻힌 장릉으로 향한다.
단종은 죽음 뒤에도 편치 않았다.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명을 내렸고 후환이 두려운 사람들은 시체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죽음을 배웅해준 단 한 사람은 엄흥도였다. 향리의 우두머리였던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들쳐 메고 산으로 올라가서 그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한때나마 왕이었던 이의 죽음이 이리도 초라할 수 있을까. 80여 년 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던 그의 묘는 중종 33년(1538) 영월 부사로 부임한 박충헌이 꿈에서 단종을 만난 뒤 노산 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묘호가 단종으로, 능호가 장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숙종 24년(1698)에 이르러서다.
능은 보통의 왕릉과 달리 가파른 능선 위에 있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산중에 묻어야만 했던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능하다. 능으로 가는 길에 서있는 소나무는 능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듯하다. 무인석, 병풍석, 난간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는 단출한 느낌에 생을 다하지 못한 왕의 모습을 보는 듯 쓸쓸함이 감돈다. 능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홍살문을 지나 90도로 완전히 꺾인 우측 끝에 정자각이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종친․시종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가 보이고 그 곁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이 그나마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제사 때 썼던 우물인 ‘영천’을 지나 정자각에 서면 겨우 봉분 위만 슬쩍 보이는 능이 애달프다. 능 주변의 드넓게 자리한 소나무 숲은 호젓하여 걸을 만하다. 장릉을 돌아 나오는 길에 단종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던 엄흥도를 기린 엄홍도정려각을 유심히 바라본다. 싸라기눈이 가볍게 뿌리는 길을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 새로운 미래를 펼쳐갈 아이를 꼭 잡아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른을 그려본다.
△가볼 만한 식당
*장릉 보리밥집
장릉 주변 맛집으로 말린 옥수수와 소품을 아기자기하게 놓아두었고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 갖는 정겨움이 있다. 방에 앉아 보리밥을 주문하면 얄팍하게 부친 메밀부침이 먼저 나오는데 함께 나오는 열무김치와 잘 어울린다. 큼지막한 감자가 들어간 감자밥과 짜지 않은 갖가지 반찬의 조화가 꽤 많은 양의 밥을 싹싹 비우게 한다. 반은 비벼먹고, 반은 반찬을 맛보며 깔끔하게 먹는 것도 좋다. 보리밥 8000원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01-1
*메밀전병과 배추전
메밀전병은 메밀가루를 아주 묽게 반죽해 얇게 펴서 무, 배추, 고기 등을 넣고 말아서 지진 음식이다. 예전에는 좁은 골목길에 이곳저곳 자리했던 전병 집이 영월 중앙시장 건물 안에 쪼르르 모여 있다. 메밀전병이라도 강원도 지역마다 그 맛이 조금씩 다른데 영월은 매콤한 맛이 강하다. 그중에서 미소네맛집을 추천한다. 주인 할머니께서 인터넷을 못해 인터넷 주문은 불가하고 전화 주문 시에는 한 개에 1500원, 직접 가서 사면 한 개에 1000원이다. 살짝 절여 지진 배추전과 함께 먹으면 매콤과 심심함이 어우러져 별미다.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제방안길 16-1
조선왕릉은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능은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한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히 보존된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다. 2019년도 저물어가는 12월 가까이 있는 서오릉을 찾았다. 삶과 죽음, 역사 이야기를 통해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봤다.
홍릉을 통해 본 영조의 삶은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천한 신분인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열등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한계를 지우는 원인이 되었다. 배다른 형을 세자로 둔 왕자였지만 금수저가 아니라 차라리 흙수저에 가까웠다. 성장기도 궐 밖의 사가(私家)에서 지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의 21대 왕이 된 이가 영조다.
그는 어려서 궐 밖에서 지낸 경험으로 인해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많이 알려진 탕평책(비록 실패했지만)과 균역법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그 밖에도 쌀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고, 가혹한 형벌을 없애기도 했다.
영민한 군주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로 인해 개인적으로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먼저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오로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만 집중한 외골수였다. 일례로 경연을 자주 열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역대 최고인 3458회를 기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 실력을 자랑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밖으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조선의 왕이라는 신분에 얽매였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왕이라는 신분이 고난을 견디게 하는 자부심이 아니라 권력을 소유하는 기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비인 정성왕후에 대해서도 첫날밤에 소박을 놓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어이없다. 첫날 밤 연잉군(왕이 되기 전 영조의 호칭)이 말하길 “그대는 손이 참으로 곱소”하였다. 이에 대해 정성왕후는 “소첩이 궂은일을 하지 않아 그런 듯하옵니다.” 딱 한 마디 대답했다. 이 말에 그는 궂은일을 많이 했던 자기 어머니 손을 떠올리며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죽는 날까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병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국의 왕비로서 끝까지 체통을 잃지 않았다. 남편에게 평생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비와 자식 간의 관계로 인해 마음의 병까지 얻은 그녀가 죽은 후 자리를 잡은 곳이 서오릉에 있는 ‘홍릉’이다. 홍릉은 조선의 능 중 유일하게 한쪽이 비어있다. 원래 영조는 자신이 사망하면 비워둔 오른쪽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길 원했다. 하지만 정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조는 왜 영조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오렌지빛 주황색을 띤 겨울 햇살이 능과 마주 보고 있는 산 정상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영조의 콤플렉스와 열등의식은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3살 때 글을 쓰고 읽을 정도로 영특한 이 선(사도세자의 이름)은 태어난 다음 해 세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영조는 아들이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이 선은 무예에 관심이 많고 능통했다. 영조는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는 아들에게 점점 더 심하게 압박을 가했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신병까지 생겼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참변에까지 이른다. 사도세자는 홍역을 앓으면서도 사흘 동안 눈 위에 엎드려 영조에게 잘못을 빈 적도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조의 이런 혹독함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그는 자식과 공감, 소통한 것이 아니라 소외, 단절한 것은 아니었나.
홍릉 주변을 걸으며 영조를 생각하니 가까이 있는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와 공감에 대해 반성하며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바라보며 또 다른 나를 통해 지나온 삶에 대해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끊임없이 더 좋은 삶, 더 따뜻한 삶을 향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걷고 싶다.
서오릉은 치유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
서오릉에는 5개의 능과 2개의 원, 1개의 묘가 있다. 서울의 서쪽인 이곳에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추 존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가 있는 경릉이다. 세조는 그가 지은 죄 때문인지 아들이 두 명이나 20세 때 죽었다.
두 번째 능 역시 세조의 둘째 아들인 제8대 예종과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의 능이다. 세 번째 능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네 번째 능은 제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이야기한 홍릉이 있다.
이번에 돌아본 서오릉은 단순하게 역사적 가치만을 지닌 공간이 아니었다. 51만여 평에 이르는 서어나무 길과 소나무 길이 있는 녹지대는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었다. 소나무 향이 흐르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삶과 죽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찰나에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임을 깨닫게 되고, 살아있음의 황홀함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서오릉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또 그곳의 자연에서는 봄을 위해 동토에 새싹을 피우는 자연을 만날 수도 있었다. 티 없이 화사한 자연의 미소가 거기에 있었다.
△교통
지하철: 3호선 녹번역 4번 출구 은평구청 방향에서 광역버스(9701),일반 버스(702A,B)
3호선 원당역 3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구산역 1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응암역 2번 출구에서 일반버스 (701A, 702B)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2019년 9월 서오릉 앞길이 정비를 끝내고 6차선 대로로 새롭게 길을 열었다. 전 보다 접근성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서오릉이 서울 근교의 새롭게 떠오르는 먹방의 성지가 되고 있다.
△가볼 만한 식당
⁕ 대가왕 쭈꾸미
대한민국 요리 명장이 요리하는 곳으로 소문난 이곳의 요리와 메뉴는 퓨전이다. 불 주꾸미의 경우 불맛의 향을 살리면서도 숙주의 아삭함과 파향으로 느끼함을 잡아준 별미다. 식사 후 정원에서 커피도 가능하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07-8
⁕경성빵공장
주인이 말하는 비법은 신선한 재료와 당일 생산, 당일 판매뿐이다. 그런데도 빵 마니아들에게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TEL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406-20
△TIP 정보
⁕ 탕평책: 당쟁(영조 때는 노론과 소론)을 막기 위해 정치 세력 간에 균형을 꾀하려 한 정책.
⁕ 균역법: 백성들의 3가지 세금(토지, 특산물, 노동력)중 노동력에 해당하는 군역(군복무) 은 당시 베 2필로 대신할 수 있었는데, 이를 베 1필로 줄이는 대신 지주나 왕족에게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게 한 제도.
⁕ 경연: 왕과 신하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추구하는 장으로서, 왕이 학문에 애쓰는 것을 드러내는 자리.
아버지를 도와 99년 만에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청년 장수 이성계는 30년 남짓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승승장구한다.
그동안 고려는 저물어가는 원나라의 국내 사정을 잘 아는 공민왕이 즉위해 반원(反元)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부인 노국공주의 죽음 후 정신병적 모습을 보이며 남색(男色)과 관음(觀婬) 등 변태적인 행동까지 일삼다가, 신돈에게 맡긴 개혁정치가 실패하고 공민왕까지 시해당한 후 신돈의 여종 반야의 소생인 우왕(禑王)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는 등 혼란스러웠다.
이때 중국은 원나라를 대신해 명나라가 들어섰는데 일방적으로 공민왕이 되찾은 쌍성총관부 지역, 즉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니 당연히 자기들이 차지해야 한다며 군사와 벼슬아치를 파견해 철령위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에 고려 조정은 대책회의를 거듭해 문하시중 최영 장군의 주장을 채택,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수문하시중 이성계에게도 의견을 물어오니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역설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성계는 지나친 반대에 따른 불이익이 걱정되어 그러면 요동정벌의 시기를 식량이 풍부한 가을로 늦추자고 수정 건의했지만 최영의 주장으로 출병이 강행되어 1388년 5월, 5만 대군의 요동정벌군이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정벌군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장인은 내 곁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서경(평양)에 남아 전쟁을 독려하는 가운데 정벌군은 압록강의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강물이 불어나 진군을 못하고 이런저런 질병에 병사들이 시달리게 되자 다시 한 번 군사를 돌려달라는 회군을 건의한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속히 요동으로 진군하기만을 재촉하니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과 숙의 끝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한 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1388년 5월 22일의 일이다.
정벌군이 회군해 남하한다는 소식을 접한 우왕과 최영은 급히 진압군을 수습해 막아내고자 했으나 역부족으로 패배한다. 이후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했으며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그해 말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된다. 뿐만 아니라 창왕도 1년 반 만에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과 창왕 모두 살해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온건 개혁파로 상징되는 정몽주를 살해하고 공양왕을 폐위시켜 유배 보내 죽인 후 이성계가 새로운 고려 국왕에 오른다(1392년 7월 17일). 이듬해 2월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역성혁명을 완성한다.
이렇듯 고려 말 혼란기에 변방 세력인 이성계는 중앙 훈구세력인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후 온건 개혁을 주장하는 정몽주마저 살해하고 우왕과 창왕은 가짜이니 진짜를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入眞) 명분으로 옹립한 공양왕마저 퇴위시킨 뒤 조선을 개국한다.
개국 후 이성계 일파는 왕 씨들을 한곳에 모아 섬을 하나 내주어 편히 살게 해주겠다고 한 뒤 모조리 수장(水葬)해버린다. 살아남은 왕 씨들은 성을 옥(玉) 씨, 전(田, 全) 씨 등으로 바꾸거나 모친의 성으로 바꿔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즉위 후에는 왕건을 위한 사당을 지어주는 등 고려 유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최영 장군에게는 무민(武愍) 시호를 내려주고 정몽주는 천하제일의 충신으로 받들어 올렸고, 공양왕은 군(君)에서 왕(王)으로 추봉하고 왕릉을 조성하는 등 민심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젊은 청년 장수 이성계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은 큰 형이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조카 대신 형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때마침 반원(反元) 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을 만나 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한 전투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를 성사시킴으로써 고려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가 1356년(공민왕 5)으로 무려 99년 만에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것이다. 이자춘은 그 공로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고 저택을 하사 받아 개경(開京)에 머물렀다. 이후 동북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영흥(永興)으로 돌아갔으나 4년 뒤 병사(病死)한다.
이성계는 1335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춘이 고려에 협력하여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공을 세울 때에 약관 20세의 청년 장수로 함께 참전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려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을 물려받은 이성계는 동북면 지역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1361년 10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의 침략에 공민왕이 개경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수하의 사병을 동원,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선두로 입성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나라에서 여진족 나하추에게 수만의 군사를 주어 이를 되찾게 하였는다. 이들과 맞선 고려군이 패배하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하였다. 이성계는 나하추 주력부대를 격멸, 격퇴시킴으로써 저물어가는 고려국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30여 년 넘게 전쟁터를 누비며 승승장구하는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364년 반원 정책을 밀어붙이며 기황후의 오빠 기철 등 부원(附元) 세력을 제거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새 왕으로 임명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온 원나라 군사들을 최영 장군과 합동으로 물리친 이성계를 이제 고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고려말 당시 경상도, 전라도 등 남쪽으로는 왜구가 공공연히 침략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었다. 북으로는 여진족들이 심심찮게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성계는 남으로 달려가 왜구를 물리치고 북으로 올라가 여진을 격퇴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특히 1380년 5월에 침략한 왜구들은 500척이 넘는 대선단으로 쳐들어왔으니 결코 도적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포(鎭浦:지금의 군산) 부근에 배를 묶어놓고 상륙한 왜구들은 근처의 전라, 충청은 물론 멀리 경상도 내륙까지 약탈, 방화, 살육을 일삼았다. 정부에서는 진압군을 내려보내니 이때 최무선의 화약과 화통을 이용하여 적의 배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조정에서 보낸 진압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9월에 이르러 남원 운봉과 인월 지역에 주둔하면서 곧 북상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격파한 것이 이성계이다. 이키섬 출신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한 왜구들은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니 이 전투를 황산(荒山) 대첩이라 부른다. 이 황산대첩을 기념하여 1577년(선조 10)에 황산대첩비를 운봉에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후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일제는 강점기간 중 조선 팔도에 세워진 일본 관련 승전비나 석물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 관련 비석과 김시민 장군 관련 비석 등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등 역사를 숨기려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곳 황산대첩비 파괴도 그 일환으로 저질러진 만행이다.
이렇게 고려말 크게 이름을 떨친 청년장수 이성계는 나하추를 물리친 136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가 밀직부사에 제수되었다.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화찬성사가 되었다.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오르게 되며 마침내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