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을 달려 도착한 바다는 서서히 일출을 준비하는 중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 사이를 나는 무수한 갈매기 떼의 실루엣이 거친 파도 소리와 함께 성대한 아침 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짧은 봄이 사라지기 전에 온몸으로 바다를 받아들이는 새벽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어스름한 봄 바다 저편을 향해 크게 묵은 숨을 토해낸다.
경주가 들려주는 신성한 봄 바다 이야기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 했던 신라 30대 왕이다. “내가 죽으면 동해에 묻어다오. 나는 죽은 뒤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노라. 부처님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왜구를 막을 것이다.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한반도 동해 한가운데 수중왕릉을 만들었다. 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거리다. 잦은 왜군의 침입으로 죽어서도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동해에 묻히고자 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수중왕릉이다.
봄 바다의 새벽 공기가 쨍하게 시리다. 경주시 동해안 봉길리 해안 앞바다의 여명 시간대는 신비로움이 최고조다. 문무대왕이 잠든 왕릉의 신성함 때문일까. 대왕암을 둘러싼 옅은 해무와 파도 소리 위로 어우러지는 갈매기 떼의 군무는 새벽의 대왕암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마치 신라시대 왕에게 제를 올리듯, 안위를 보살피듯 일제히 날갯짓하며 비상한다. 감동적인 순간이다. 해수면 사이로 일출이 시작되고 하늘과 바다가 물들어간다. 금빛으로 빛나는 바다는 너른 모래밭과 구르던 돌도 빛나게 한다. 온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여버리는 자연 속에 서 있다.

파도 소리 품은 읍천항의 윤슬
경주 해안가를 떠나 읍천항으로 달린다. 길 옆으로 아침 햇살에 빛나는 바다를 쉴 틈 없이 보여준다. 잔잔한 파도를 품은 읍천항의 주상절리에서 멈춘다. 경주 양남면 읍천항과 하서항을 잇는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은 봄을 맞고 보내기도 한다. 눈길 닿는 곳마다 감성 넘치는 청정 동해의 절경이다.
양남면의 주상절리는 위로 솟고 기울어지거나 누워 있는 형상의 흔치 않은 지형이다. 주상절리로 가는 해안 길은 탁 트여 시원하고 평탄하다. 읍천항의 주상절리를 거쳐 하서항까지는 걷기에 따라 한 시간 정도 거리다. 봄볕 맞으며 걷기에 더없이 좋다. 우선 부채꼴 주상절리 위에서 멈춘다. 아득한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시간이 눈앞에 있다. 거기서 만난 신비로운 자연의 힘을 오롯이 느끼며 주상절리 위에 서본다. 거세게 달려오는 파도를 맞는 부채꼴 바위가 발아래 있다. 바닷가 가까이 내려가면 돌 구르는 소리가 음률을 이루고,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간지럽힌다. 봄볕으로 반짝이는 윤슬의 사랑스러움에 넋을 잃고 만다. 이미 봄이 충만하다.

이른 봄 홍매화가 짙게 피어나는 곳, 통도사
올해는 봄이 쉽게 와주지 않았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의 홍매화도 늦추위로 사람들의 애를 태우며 필 듯 말 듯하다 뒤늦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다. 절집 마당에 들어서면 고승의 초상을 모신 전각인 영각 오른쪽에 수령 350년으로 추정되는 홍매화가 붉다. 1650년 전후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통도사 스님들이 율사의 법호를 따서 부르기 시작한 자장매(慈藏梅)다.

홍매화는 고요한 사찰 기와지붕과 문살, 봄 하늘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봄이면 고고한 자태로 절 마당에 피어난다. 그 멋과 기품이 유난히 돋보여서 한국의 봄을 알리는 상징적인 꽃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피어나 강인한 지조의 상징이기도 하다. 몽글몽글한 대웅전 뜰의 빛망울이 분홍빛 진한 홍매화를 돋보이게 한다. 그러다 보니 통도사가 봄 마중의 명소가 되고, 예불보다는 탐매객들로 붐비는 절 마당이 되었다. 지나는 스님의 부드럽고 해맑은 미소가 봄볕처럼 따사롭다. 스님들의 장삼 자락이 봄바람에 날리고 홍매의 짙은 향기도 절 마당을 가득 채웠다.

김해건설공고의 와룡매(臥龍梅)
통도사의 홍매가 필 무렵 김해의 와룡매도 꽃망울을 연다. 김해건설공고의 와룡매를 찾아간다. 김해 경전철 인제대역에서 10분 정도 걷는 거리다. 오랜 세월 학생들과 함께하며 봄을 알려주고 은은한 향기를 나누어온 와룡매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200m 정도 가로수처럼 길게 줄지어 있는 매화나무 옆을 거뭇하고 씩씩한 청춘들이 지나간다. 하필 학교 안에 매화나무가 있어 학생들에게 방해될까 조심스럽지만, 이제는 학생들도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와룡매는 학교가 문을 연 1927년 일본인 교사가 매화를 심고 가꾼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김해공고의 와룡매는 마치 누워 있는 듯한 독특한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어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강렬한 터치의 흐름과 곡선미의 동양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제는 고목이 되어 휘어지고 꺾임의 멋이 기이하다. 김해공고가 자리한 김해는 금관가야가 왕국을 이룬 역사의 땅이다. 부근에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한 왕릉공원과 박물관 등의 유물·유적도 둘러보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섬진강 줄기 따라 광양 매화와 구례 산수유
봄까지 이어진 한파로 광양의 매화가 언제 필지 관심사였다. 세상은 시시때때로 변해가고, 이상기후로 꽃 피울 시기는 예상을 빗나가곤 한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해마다 매화 반 사람 반이라 하던 광양의 매화도 늦도록 단단한 꽃망울을 달고 있었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봄은 역시 꽃으로 이야기한다.
섬진강변 산자락에 자리한 광양 매화마을은 10만 평 넘는 매화 군락지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봄이 오면 매화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눈부신 세상을 이룬다. 광양 매화마을이라 하면 먼저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 홍쌍리 여사를 떠올린다. 청매실농원을 운영하는 매실 명인이 주변을 모두 개방해서 봄맞이 방문객을 맞기 시작한 건 오래전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스물세 살에 전라도로 시집와 산비탈에서 일하다가, 외롭게 핀 백합처럼 살기 싫어 매화나무를 심었다던 홍쌍리 명인. 사람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심은 매화나무 덕분에 봄이면 세상 사람들이 매화 동산을 찾아 인산인해를 이룬다. 경사진 산자락을 오르면서 달콤한 매화 향에 취한다. 전통 옹기가 빽빽한 농원을 지나고 매화나무 사이로 보이는 정자가 운치 있다. 새벽이나 저녁 무렵이면 산자락 사이로 보여주는 환상적인 일출과 일몰의 멋도 만난다.

해마다 꽃 시즌이 되면 광양 매화와 한 세트로 찾아가는 봄꽃 명소가 구례 산수유다. 노래 가사처럼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이 모두 어우러지는 꽃철이다. 광양 매화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구례 산수유는 3월 중순 지나면서부터 지리산 자락을 노랗게 물들인다. 구례 산동면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다. 산수유는 신기하게도 세 번의 꽃을 피운다고 한다. 그래서 봄꽃 중 조금 더 오랫동안 볼 수 있다.
산수유마을로 접어들면 꽃담길이 이어진다. 마을 옆 계곡을 따라 산수유나무 밑을 걷는 분위기가 남다르다. 꽃담 계곡 아래로 내려가 징검다리도 건너고, 넓은 암반에 털썩 앉아 물소리 들으며 꽃바람 맞는 것만으로도 멋진 봄날이다. 노란 산수유나무 아래로 계곡물이 쏟아져 내린다. 긴 기다림 너머에서 따뜻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계절이다. 햇살 농도는 점점 더 짙어지고, 그렇게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