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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을 따라 걷다, 박완서 13주기 추모 공연
- 한국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가 구리시 아치울에서 투병 끝에 타계한 뒤 13번째 봄날이 찾아왔다. 구리시에서는 올해도 그를 추모하는 낭독 공연을 열었다. 박완서 작가를 기리고 그의 문학을 잊지 않기 위해, 구리아트홀이 생기기 전 시청 한편에서부터 시작한 공연이 어느덧 12회 차를 맞았다. 구리아트홀 코스모스 대극장 앞은 공연 30분 전부터 중장년 관객들로 북적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포스터 앞에서 다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관객들은 대극장 1층은 물론이고 2층까지 객석을 가득 채웠다. 공연은 영상, 노래, 연주, 연기, 낭독까지 다채롭게 구성됐다. 관객들은 웃기도 울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기도 하며 공연을 즐겼다. 한 관객은 무대가 끝나자 “낭독 공연은 처음 보는데 색다르네”라고 평하기도 했다. 설교하지 않는, 그러나 여운 주는 동화 자전거를 갖고 달리면서 맛본 공포와 함께 까닭 모를 쾌감을 회상한다. 마치 참았던 오줌을 내갈길 때처럼 무거운 억압이 갑자기 풀리면서 전신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그 상쾌한 해방감. 한번 맛보면 도저히 잊힐 것 같지 않은 그 짙은 쾌감. 아 나는 도둑질을 하면서 죄책감보다 쾌감을 더 짙게 느꼈던 것이다. -‘자전거 도둑’ 中 한국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의 동화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 수남의 독백이다. 토실하니 붉은 볼과 깨끗한 눈을 가진, 청계천 세운상가 뒷길 전기용품 도매상의 열여섯 살 꼬마 점원 수남이. 꼬마의 고백은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자전거 도둑’은 1979년 동화집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에 들어 있던 작품이다. 이 중 아이들이 읽을 만한 것을 모아 1999년 다시 펴낼 때 책의 표제가 됐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기에 한 번쯤 읽어봤을 내용이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 수필 등 여러 분야의 글을 썼지만, 동화에 특히 애정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이야기꾼 할머니로 남고 싶었기 때문에 동화를 집필할 때는 특히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어느 한 작품을 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화란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쓰기 마련인데, 그는 동화를 통해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지만, 어른들도 읽었으면 했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는 ‘자전거 도둑’을 오히려 어른을 위한 동화 같다고 했다. 이날 낭독 공연 사회를 맡은 최지애 소설가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걸 16세에 이미 깨달은 수남이가 2024년 우리 곁에 있다면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텐데, 분명 좋은 어른으로 반듯한 삶을 살았으리라 믿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책 ‘박완서의 말’을 인용해 “박완서 작가님은 문학을 통해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교훈을 주려 하지 않는 동화는 참 드물다. 작품을 읽고 오래도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박완서 문학의 힘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 따라 걷는 길 1년에 한 번 열리는 낭독 공연 외에도 언제든 박완서 작가를 추모할 방법이 있다. ‘박완서 자료실’에서 그의 문장을 음미해보는 것이다. 자료실은 구리시 인창도서관 2층에 있다. 구리시 아치울에서 생을 마감한 박완서 작가의 발자취를 담은 공간이다. 자료실 입구에는 박 작가의 작품을 필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돼 있다. ‘박완서 필사’ 코너를 지나 자료실로 가는 길 벽면에는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마치 그의 삶을 따라가듯 걸으며 자료실로 들어서면 그의 등단작 ‘나목’부터 소설, 수필, 동화, 문학상 수상 작품 등 분야별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자료실 운영 시간 10:00~16:00) 올해는 ‘리멤버, 박완서’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주 토·일요일 하루에 네 번(가족 대상 : 10시·14시, 일반 대상 : 11시·15시) 구리시 문화관광해설사가 박완서 작가의 주요 작품과 일생을 연결 지어 해설한다. 주제는 △소녀,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여자, 박완서 : 나목 △엄마, 박완서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노인, 박완서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 네 가지다. 해설 프로그램은 박완서 자료실에서 진행되며, 구리시 문화예술과(031-550-2565)로 전화 예약을 하거나 구리시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호원숙 작가 딱 알맞은 사랑 주신 어머니를 그리며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작가는 책 ‘박완서의 말’을 엮으면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리워지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책을 펼치면 살아 계실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와 생생한 목소리로 들릴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매년 열리는 박완서 작가 추모 낭독 공연에 참석하며 호 작가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번 13주기 추모 낭독 공연에도 참석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작품과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많이 보여주셨는데요. 13주기 추모 낭독 공연을 맞이하는 작가님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코로나19로 공연을 올리지 못했던 한 번을 제외하고 1주기부터 매년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구리시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번 공연은 작품 ‘자전거 도둑’이 동화라는 점에서 조금 특별합니다. 어머니가 첫 손주를 보았을 때 쓴 작품이죠. 그야말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자전거 도둑’에는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어른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머니를 보며 좋은 어른의 역할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머니는 어른으로서 상대에게 알맞은 사랑을 주신 분이에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죠.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이 사랑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북돋아주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거든요. 넘치도록 사랑을 붓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셨죠. 2023년 ‘어른의 부재’가 트렌드 키워드로 꼽혔어요. 그래서인지 박완서 작가님이 더 그립습니다. 그만큼 좋은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 쇼츠라는 게 유행이라면서요? 저도 어떤 짧은 메시지를 보면 ‘어머 진짜 옳은 소리다’ 싶은데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리더라고요. 휴대폰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누구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걸 배우면 좋겠어요. 가장 가까운 곳에 배울 게 많아요. 사실 70세가 다 된 제 나이에도 선택해야 할 때 무엇이 옳고 그른가 망설이거나 쉽게 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배웁니다. 용기 내어 사랑을 주고, 받은 사랑에 책임지며 살면 좋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그런 것들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도 어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짧은 영상과 달리 작품 속 인물을 보며 생각하고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누군가에게 작품을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요즘 고전을 봐요. 전에 읽었던 건데도 다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이런 게 있었구나!’ 싶어요. 그 시절 작가와 책을 통해 공감하고 교감하며 대화하는 거죠. 어머니 작품 중에서는 ‘미망’을 추천하고 싶어요. 구한말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로,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지만 미래 주역이 될 손녀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그냥 꿈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요. 딱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사랑이요.
- 2024-04-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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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락방’ 주인공서 그룹홈 설립자로, 논두렁밭두렁 윤설희
- ‘우리 집의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높푸른 하늘 품에 안겨져 있는 뾰족지붕 나의 다락방 나의 보금자리.’ 1970년대 활동했던 혼성 포크 듀오 ‘논두렁밭두렁’의 대표곡 ‘다락방’의 가사다. 이 노래를 알고 있다면 그들이 부부였다는 걸 기억할 테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으로 가꾼 보금자리에서 더 많은 인연을 보듬어 가족으로 맞았다. 남편 김은광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 윤설희는 여전히 그 보금자리에 남아 사랑의 온기를 더하고 있다. ‘다락방’을 비롯해 ‘외할머니댁’, ‘영상’ 등의 곡으로 사랑받았던 논두렁밭두렁. 종종 방송이나 무대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처럼 활발한 소식을 듣긴 어려웠던 그들이다. 가수로서의 행보는 그러하나, 사실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온 터였다. 쉼 없는 지난날을 한눈에 보여주는 건 아내 윤설희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의 SNS 프로필이다. 논두렁밭두렁 멤버로 시작해 다리The Bridge청소년사업가지원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땡큐 이사장, 별빛내리는마을과 봄채 아동 그룹홈 설립자, 사랑하는교회 목사 그리고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까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음악학원과 24시 어린이집도 운영했다. 그런데 음악학원을 제외하면 가수와 연계된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수였던 그들이 이렇듯 의외의(?) 근황을 알리게 된 데에는 아내 윤 관장의 뜻이 컸단다. “첫딸을 낳고 가수 활동은 그만뒀어요. 어려서부터 꿈이 현모양처나 교사였는데, 그 영향인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면 어떨까 싶더군요. 작은 기타 학원을 운영하다가 종합적으로 음악 교육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연 방송음악학원이 꽤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날 보니 엄마들 사이에서 ‘값비싼 학원’으로 알려져 있더라고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짜느라 스무 명 넘는 강사를 초빙한 데다 건물 임대료까지 냈으니, 교육 원가 대비 수업료가 높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내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어요. 차라리 어린이집을 운영하면 국가의 보조를 받아 더 부담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어린이집을 열게 됐습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보금자리를 내어주다 어린이집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가장들은 회사 밖으로 내몰렸고, 집집마다 재정난에 시달렸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당시 그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했던 윤 관장이다. “IMF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가는 걸 실감했어요. 낮뿐 아니라 밤에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났죠. 그러면서 24시 어린이집을 떠올렸는데, 막상 우리나라에 몇 곳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지방 공연을 다니면서 아이들 맡기는 문제로 고민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고충을 해결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24시 어린이집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벼룩시장에 ‘무료탁아상담’이라는 1단짜리 광고도 냈죠. 말 그대로 무료로 탁아 상담을 했는데, 그러면서 정말 많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한 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24시 어린이집에라도 오는 아이들은 다행이었다. 그곳마저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도망 나온 엄마와 아기, 생활고로 조부모에게 떠맡겨진 손주들, 호적도 없이 버려진 신생아까지. 저마다 딱한 사정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논두렁밭두렁 부부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2000년 6월이었어요. 미혼모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러면서 그게 바로 ‘그룹홈’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03년에 ‘별빛내리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아동 그룹홈을 설립했고, 10년 후인 2013년엔 여자 아동 그룹홈 ‘봄채’를 설립했습니다. 만든 두 개의 그룹홈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2000년 초만 해도 그룹홈이란 개념은 생소했다. 국내에 많지 않은 그룹홈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체로 종교인이었는데, 법적 근거가 부족해 이렇다 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이르러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발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통과, 아동복지법 개정 등을 통해 관련 지원책들이 속속 생겨났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하지만, 과거 불모지 같았던 때를 생각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아진 셈이다. 제 가정도 돌보기 어려웠던 시절, 숱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정말 먹고살기 힘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크게 어렵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행복했죠. 나만 헌신한다고 여겼으면 여태껏 오래 해올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은 나에게도 보탬이 되고 즐거운 일이었던 거죠. 요 며칠도 하루 세 시간 자고 밤을 꼴딱 새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기쁨이 더 컸어요. 막상 제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건 얼마 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걸 이뤘죠. 결국 그 원동력은 이타심보다는 자기실현에 가까웠다고 봐요.” 남편의 유작 ‘사랑해봤나’를 완성하며 여러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단한 상황에서도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남편인 가수 故 김은광이었다. 오래오래 그들의 보금자리에 함께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2010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단을 받고 1년 만에 이별을 겪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슬퍼할 새도 없이 아이들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던 윤 관장이다. 그러다 한 번씩 불현듯 찾아오는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부랴부랴 애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면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한바탕 울고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한번은 운전하고 가는데 길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당장 전화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럼 그이가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설명해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부부는 반쪽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이었구나, 적어도 3분의 2쯤은 되겠구나, 다 내가 해온 일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 몫이 참 컸구나, 부부가 함께한다는 건 되게 좋은 거였구나 깨달은 거죠. 요즘도 그렇게 불쑥불쑥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최근 윤 관장은 남편의 유작을 하나 발견했다. 연필로 적은 악보였다. 논두렁밭두렁의 노래는 남편이 작곡, 아내가 작사하곤 했는데, 남편이 생전 작곡해둔 노트를 찾은 것이다. 함께 노래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노래는 듣자마자 좋은 가사가 생각나곤 했다. 남편의 악보를 피아노로 치다 보니 순간 가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사가 지어졌고, ‘사랑해봤나’라는 제목의 곡이 완성됐다. “‘사랑해봤나’ 가사는 그런 내용이에요. 청춘이 빛났던 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더 사랑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곡을 지었고, 곧 음원으로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완성된 곡으로 남편을 위한 추모 공연을 열려고 해요. 근데 한번 불러보니까 음역대가 제가 소화하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동생(가수 윤설하)에게 부르라고 했더니 사랑 얘기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고사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제가 부르게 됐어요. 저도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지만, 남편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잘 불러보려 합니다.” 아이들아, 언제든 편히 찾아오렴 남편의 추모 공연은 그룹홈이 있는 건물 지하의 소리 소극장에서 열린다. 같은 건물에 더브릿지 작은도서관이 있는데,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건 그룹홈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우리 애들이 보면 친구가 없더라고요. 학교 가면 엄마 아빠에 대해 얘기할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못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마침 여기저기서 후원받은 책도 많겠다, 이걸 잘 모아서 지역사회와 공유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주민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교류하길 바랐죠.” 소극장과 작은도서관, 교회와 그룹홈까지 모두 한 건물에 있다 보니 간혹 윤 관장을 건물주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지원금과 후원금이 있긴 하지만, 공간을 유지하고 식솔들을 챙기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또 다른 형태의 그룹홈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노인들을 위한 그룹홈이다. “제가 부모 역할을 하지만 많이 부족했죠. 아이들 하나하나 눈 맞추고 마음을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지원금이나 행정적인 업무들 처리하느라 서류 만지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든 생각이 외롭게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그룹홈을 만들고, 아이들과 교류하도록 하면 어떨까 한 거죠. 아이들 수만큼 어르신들이 있다면 저마다 충분히 사랑을 독차지할 테니까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마당 있는 넓은 집을 마련해 그런 꿈을 이뤄보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일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자’라는 포부로 지난 20여 년을 달려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이라 믿으며, 그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며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올해로 칠순, 윤 관장 개인만을 생각한 노후의 꿈은 없을지 궁금했다. “글쎄요. 지금처럼 계속 일하는 게 곧 노후의 꿈이자 준비 아닐까요. 요즘도 그룹홈 아이들을 대형 승합차에 태우고 여행도 다니고 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 친구들이 이제 힘들 텐데 일을 그만하라 하죠. 근데 저는 오히려 일을 취미로 한다는 기분이에요. 지금이야 여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말 늙어서 뭘 못 하겠다 싶은 때가 오더라도 작은도서관 관장은 하려 해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도서관 귀퉁이 어딘가에 앉아 책 읽고 있으려고요.(웃음) 한편으론 그룹홈을 떠난 아이들이 종종 찾아오길 바라죠. 이번 설날에도 혹시나 해서 세뱃돈 챙겨 기다렸는데 많이 오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찾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형편도 이해합니다. 다만 살면서 힘들고 외로운 순간, 늘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 2024-03-1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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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 분위기 느껴보자” 12월 문화소식
- ●Exhibition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일정 2023년 1월 8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 장 줄리앙(Jean Jullien)은 프랑스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다.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와 영국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독창적이면서도 위트 넘치는 작품 스타일은 세계적인 브랜드들과의 협업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면 거기’는 장 줄리앙의 첫 번째 회고전이다. 장 줄리앙의 초기 작품부터 그가 새롭게 탐구해온 최신 작품들까지 총망라된다. 일러스트와 회화, 조각, 오브제, 미디어 아트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1000여 점이 전시됐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장 줄리앙의 스케치북 100권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장 줄리앙은 항상 스케치북을 갖고 다니면서 인상적인 순간을 즉흥적인 드로잉으로 기록한다. 그 기록들은 하나의 완성작을 탄생시키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100권의 스케치북은 그중 일부다. 전시장은 ‘100권의 스케치북’, ‘드로잉’, ‘모형에서 영상으로’, ‘가족’, ‘소셜 미디어’ 등 총 12개 테마로 구성됐다. 전시장 입구에는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기록한 거대한 스케치북이 펼쳐져 관람객을 맞는다.첫 회고전을 연 장 줄리앙은 “창의적인 삶이란 항상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속에 있는 열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작품으로 표현돼왔는지 그 과정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기억 일정 2023년 1월 20일까지 장소 경운박물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생애를 돌아보며 황실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박물관에 있는 의친왕 관련 유물과 대한 황실 후손들이 소장하던 유물 및 개인 소장 유물을 총망라하는 국내 최초 의친왕 유물전이다. 전시는 의친왕의 왕자 시절부터 △의친왕 책봉 △미국 유학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전반적인 생애와 활동을 살펴본다. 특히 일제강점기 전후한 황실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의친왕과 함께한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친왕의 사진, 훈장, 기념장, 임명장, 의궤, 복식, 선언서, 의친왕 글씨 액자 및 족자, 사동궁 생활유물 등 120여 점이 공개됐다. ●Book ◇나이듦의 철학(제임스 힐먼·청미) 저자 제임스 힐먼은 저명한 융 심리학자다. 그는 책을 통해 나이 듦을 영예롭게 여기고, 그에 합당한 지성으로 창의적인 발상을 제시한다. 제임스 힐먼은 인생에서 가장 오해받는 두려운 시기, 즉 노년에 혁명적으로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인간 수명의 연장을 문명이 쓸데없이 빚어낸 과오로 보는 유전적 결정론과 정반대 주장을 펼친다. 노년의 고역스러운 일들을 지성으로 파악 가능한 통찰로 보고, 나이 듦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비틀었다. 제임스 힐먼은 나이 든 사람을 조상, 젊은이의 본보기, 사회의 문화적 기억 및 전통의 전달자로 본다. 저자는 “나이 듦은 ‘오래됨’의 문을 열고 노년은 그 문을 좀 더 활짝 열어젖힌다. 그게 나이 듦의 핵심일 것이다”라면서 “노인이 지혜를 짊어지고 있다는 말은 노인은 그 자신이 오래됐기 때문에 이 오래된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노인과 세계는 동일한 존재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노년에 접어들지만 노년의 변화에 당황하거나 절망하기 마련이다. 나이 듦에 대해 저자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며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노년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깊은 자기 이해를 하라고 말한다. ◇빅지니어스 : 천재들의 기상천외한 두뇌 대결(김은영·마음의숲)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 칼럼니스트가 썼다. 아인슈타인, 뉴턴 등 천재들은 라이벌과 경쟁하며 현대문명에 발전을 가져왔다. 천재들의 싸움을 읽다 보면 과학 이론과 역사 상식도 알게 된다. ◇애도 클럽(타일러 페더·문학동네) 암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지 10년. 저자는 마침내 지난날의 상실을 마주하고 회고록을 썼다. 암 진단과 투병 과정, 장례식과 추모식, 그 후의 일상을 모두 담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을 홀로 끌어안은 모든 이에게 위로를 전한다. ◇나는 단단하게 살기로 했다(브래드 스털버그·부키) 성과 전문가인 저자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부담과 스트레스로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는 동서양의 고대 철학, 과학과 심리학,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았고, 이를 소개한다. ●Stage ◇스위니토드 일정 12월 1일 ~ 2023년 3월 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에릭 셰퍼 출연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 전미도, 김지현, 린아 등 스릴러 걸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스위니토드’가 3년 만에 돌아온다. 1979년 초연된 후 토니 상, 드라마 데스크 상, 로렌스 올리비에 상 등 해외 유수의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극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발사 벤저민 바커가 15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후,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터핀 판사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치밀한 복수를 펼치는 내용이다. ‘스위니토드’는 파격적이고 독특한 스토리와 넘버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강필석, 신성록, 이규형, 전미도, 김지현, 린아 등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가 출연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 넘치는 무대가 기대된다. ◇미저리 일정 12월 24일 ~ 2023년 2월 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인뢰 출연 김상중, 서지석, 길해연, 이일화, 고인배, 김재만 연극 ‘미저리’는 미국 대표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90년 동명의 영화가 흥행해 국내에도 스토리가 잘 알려져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을 향한 열성 팬 애니 윌크스의 광적인 집착을 그린 스릴러다. 주인공 폴 셸던 역은 초연부터 출연한 김상중이 맡으며, 서지석이 새롭게 합류했다. 애니 윌크스 역에는 김상중과 초연부터 환상의 호흡을 펼친 길해연이 돌아오고, 이일화가 새롭게 나선다. 보안관 버스터는 초연부터 이 역을 맡은 베테랑 배우 고인배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김재만이 연기한다. ◇물랑루즈! 일정 12월 20일 ~ 2023년 3월 5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알렉스 팀버스 출연 홍광호, 이충주, 아이비, 김지우, 손준호, 이창용, 최호중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물랑루즈!’는 CJ ENM이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제74회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포함 10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1890년대 프랑스 파리의 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스타 사틴과 젊은 작곡가 크리스티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이번 공연은 아시아 초연으로 오리지널 창작진 및 제작진이 직접 참여한다. 165명의 작곡가와 31명의 퍼블리셔가 창작한 70곡 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홍광호, 아이비, 김지우, 손준호 등 유명한 뮤지컬 배우들도 대거 출연한다.
- 2022-12-0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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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도록 뜨겁게 푸를, 팝페라 테너 임형주
-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 2022-08-0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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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해 49재 추모공연’ 후배 문화예술인과 함께 개최
- 27일 오후 1시 30분 방송인 고(故) 송해의 49재 추모공연이 서울 종로구 모두의극장(허리우드극장 5층)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은 이상벽, 조영남, 현숙, 심형래 등 생전 고인을 따랐던 후배 문화예술인 12인이 한마음으로 준비해 그 의미를 더했다. 지난달 8일 갑작스러운 비보에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고, 49재가 열리는 현재까지도 종로 송해길 주변 상인과 시민들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생전 고인은 KBS1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문화 1번지 종로’의 부활을 알리는 극장식 추억의 쇼를 기획 단계부터 직접 참여했고, 종로 거리에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 축제를 여는 등 평소 종로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19년 본지와의 만남에서도 “송해길에 자주 나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맛있는 것도 즐기면서 사는 재미를 느끼시라”며 종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건강한 모습으로 길거리 담소도 마다치 않으며 시민들과 유대해온 그이기에 빈자리는 더욱 컸다. 이에 이번 추모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공한 ㈜추억을파는극장 김은주 대표는 “송해 선생님은 생전 실버영화관 홍보대사로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양질의 무대를 위해 힘써오셨다”며 “그게 종로를 찾는 어르신은 물론 국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셨다. 하늘에서도 분명 후배 문화예술인들이 준비한 무대를 흐뭇하게 지켜보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이 더욱 뜻 깊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과거 고 이주일이 폐암으로 고통받던 본인의 모습을 공개하며 대한민국 흡연률 감소에 기여했듯, 고 송해의 죽음은 ‘어르신 낙상사고 예방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주최측은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매주 월요일 ‘모두의 극장’을 무료로 대관하는 한편, 수익금 일부로 어르신 관객에게 미끄럼방지매트를 제공한다. 아울러 독거노인이 화장실 낙상사고로 고독사하지 않도록 관련 캠페인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한편 송해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후 끝내 눈을 뜨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추모공연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늘 오전 11시 30분부터 선착순으로 현장 접수한다(300명까지). 평소 송해를 따랐던 후배 문화예술인 이상벽, 조영남, 전원주, 최주봉, 김성환, 박일준, 현숙, 배일호, 조항조, 이용식, 심형래, 김은주((주)추억을파는극장 대표)가 무대에 오른다. 공연 관람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금은 전액 기부 예정이다.
- 2022-07-2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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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채롭게 느끼자" 3월 문화 소식
- ●Exhibition ◇살바도르 달리 : Imagination and Reality 일정 4월 3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 전시관 20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스페인 초현실주의 대가인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국내 최초 대규모 회고전이 이달 20일까지 열린다. 달리의 유화 및 삽화, 대형 설치작품, 영화와 애니메이션, 사진 등의 걸작 140여 점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레플리카(복제품)가 아닌 ‘진짜 원화 작품’ 전시다. 전시는 아홉 개 섹션으로 나눴으며, 달리의 유년 시절부터 전 세계의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시기별 작품 특성을 조명했다. 또한 달리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인물과 개인적인 순간들도 함께 소개한다. ‘예술이 인생을 지배해야 한다’는 달리의 신념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달리의 부모는 그를 ‘죽은 형의 환생’으로 여겼다. 온전히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달리는 정신분열 증상을 겪었고 괴짜가 됐다. 진짜 그를 봐준 사람은 아내 갈라뿐이었다. 달리는 평생 그녀만을 사랑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 피카소, 심지어 돈보다도 갈라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 달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갈라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는 달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기억의 지속’은 없다. 그 아쉬움은 ‘다가오는 밤의 그림자’(1931), ‘시간의 속도’(1931), ‘무제 : 맑은 날씨의 지속’(1932) 등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 일정 3월 27일까지 장소 부산시립미술관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최근 관람해 화제를 모은 전시다. 프랑스 현대미술 거장 크리스티앙 볼탕스키(1944~2021)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Shoah)의 작가, 죽음의 작가라 불린다. 볼탕스키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사진과 설치미술, 사운드, 조명 등으로 집단의 역사와 기억, 애도와 추모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평생 ‘죽음’을 주제로 다뤄온 작가는 전시 제목 ‘4.4’도 직접 지었다. 그가 태어난 해인 ‘1944년’을 뜻하는 동시에 인생을 4단계로 나눌 때 ‘생의 마지막 단계’를 뜻하기도 한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들인 이 전시가 그의 예술 여정의 마침표가 됐다. ●Book ◇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온조 아야코·지호) 일본의 뇌과학자 온조 아야코의 어머니는 예순다섯의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는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온 딸에게는 더욱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죄책감마저 든다. 이에 저자는 치매로 고통받는 이들과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점점 모든 것을 잃어가는 엄마를 2년 반에 걸쳐 관찰했다. 매일의 사건, 기분, 감정 전부를 기록했다. 특히 ‘기억을 잃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 걸까’, ‘치매에 걸리면 사람다움을 잃는가’와 같은 의문에 두려움을 느끼며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저자는 치매란 어떤 뇌질환이고, 망상·배회·공격성 등 정신행동 증상은 왜 나타나는지 뇌과학과 심리학 등 다양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풀어냈다. 그리고 문제 예방법으로 ‘기억 메워주기’, ‘산책하기’와 같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다. 저자는 엄마가 요리할 때 기억을 상기시켜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도왔고, 아버지는 아내와 산책을 했다. 이는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진 못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되찾게 했다. 더불어 엄마는 소파에 앉아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기억은 잃어가지만 감정이 남아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치매에 걸렸어도 결국 감정이 건재한 이상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여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태리 아파트먼트(마시모 그라멜리니·시월이일) 현재로부터 60년 후인 2080년 12월이 배경인 소설이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들려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미래에서 보면 현 상황도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위로를 독자에게 건넨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박영서·들녘) 저자는 ‘조선은 복지 국가’였다고 주장하며 조선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 백성을 구휼하려는 통치자의 의지는 ‘단 한 명의 백성도 굶어 죽지 않게 하라’는 목표로 축약된다. 저자는 조선 복지 정책의 핵심을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 즉 인(仁)이라고 분석한다. ◇용감한 구르메의 미식 라이브러리(알렉상드르 스테른·윌북) 1978년생 파리지앵인 작가 알렉상드르 스테른은 미식가로서 세계를 돌며 희귀한 맛을 찾아 대중에게 알려왔다. 이 책은 세계 5대륙 155개국에서 골라 모은 700가지 맛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 음식은 김치·홍어·소주·번데기·호떡·팥빙수 등을 추천했다. ●Stage ◇또! 오해영 일정 3월 9일 ~ 5월 29일 장소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1관 연출한은결 출연 손호영, 장동우, 재윤, 레이나, 양서윤, 길하은, 허순미 등 2020년 초연된 뮤지컬 ‘또! 오해영’이 돌아온다. 이 뮤지컬은 2016년 방영된 에릭·서현진 주연 동명의 tvN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다. 오해영이라는 동명이인의 두 여자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도경의 오해에서 시작된 로맨스를 그린다. 특히 뮤지컬 ‘또! 오해영’은 두 오해영이 가진 결핍을 채워주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성장 스토리로 재구성, 응원이 필요했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힐링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또한 벤의 ‘꿈처럼’, 정승환의 ‘너였다면’ 등 기존 원작의 OST는 물론 신곡을 추가해 드라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 공연에서는 ‘박도경’ 역에 초연에 이어 손호영이 참여하며, 새롭게 장동우, 재윤(SF9)이 합류한다. 박도경은 외모도 능력도 완벽하지만 까칠한 성격에 예민함까지 가진 남자다. 마음이 가는 일은 절대 멈추지 않는 씩씩한 보통 여자 ‘오해영’ 역에는 레이나, 양서윤, 길하은이 함께한다. ◇잃어버린 얼굴 1895 일정 3월 5일 ~ 3월 20일 장소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차지연, 하은서, 김용한, 최인형, 이동규, 윤태호, 이혜수 등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은 명성황후의 미스터리한 삶에 픽션을 더해 재탄생한 작품이다. 기존 작품과 달리 명성황후가 여성으로서 느낀 아픔과 슬픔, 인간으로서 가진 고민과 욕망에 집중해 그의 삶을 그려낸다. 더불어 연극, 음악, 무용이 혼합된 서울예술단만의 독창적 장르인 창작가무극의 정수를 맛볼 수 있으며, 2013년 초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명성황후 역에 배우 차지연이 다시 돌아오며, 새로운 황후로 서울예술단 단원 하은서가 합류해 기대감을 높였다. ◇리지 일정 3월 24일 ~ 6월 12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김태형 출연 전성민, 유리아, 이소정, 김려원, 여은, 제이민, 김수연, 연정 등 여성 4인조 록 뮤지컬 ‘리지’가 초연 2년 만에 돌아온다. 미국의 미제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1892년 성공한 장의사 앤드류 보든과 그의 부인 에비가 집 안에서 잔인하게 도끼로 살해되면서 둘째 딸 리지가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재판을 통해 숨겨진 비밀과 진실이 드러난다. 초연 당시 지루할 틈 없는 전개와 6인조 라이브 밴드의 파워풀한 록 기반 넘버, 여성 캐릭터들 간의 연대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번에는 우주소녀 연정이 리지의 친구 앨리스 역을 맡아 뮤지컬에 첫 도전해 기대를 모은다.
- 2022-03-1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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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 요양‧성묘 시설 “사전예약해야”
-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오늘 새로운 사회적 거리두기 조정방안과 설 특별방역 대책 등을 발표했다. 정부는 오미크론의 확산을 최대한 늦추면서 오미크론에 의한 유행규모 폭증이 일어나지 않도록 거리두기 조정속도를 조절하기로 결정했다. 접종여부 관계없이 4인까지 가능한 사적모임 인원기준을 6인으로 소폭 완화하고, 다중이용시설 운영시간, 행사·집회 및 종교시설 등 나머지 조치는 종전 기준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번 거리두기 대책은 오는 17일부터 2월 6일까지 3주간 시행된다. 이와 함께 설 특별방역 대책도 발표됐다. 설 특별방역 대책은 이달 20일부터 오는 2일까지 2주간 적용된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철도 승차권은 거리두기를 위해 창측 좌석만 판매된다. 연안여객선도 승선인원의 50% 제한 운영을 권고한다는 계획이다. 철도 승차권의 경우 100% 비대면으로만 구입 가능해 고령자들의 불편이 예상된다. 고속도로 통행료는 정상적으로 징수하고, 휴게소 실내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묘·봉안시설의 경우 제례실이 폐쇄된다. 실내 봉안시설이나 유가족 휴게실은 사전예약을 통해서만 방문할 수 있다. 요양병원‧시설 역시 예약이 필요하다. 설 연휴기간(1.24.∼2.6, 2주간)에는 접촉면회가 금지되고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 다만 임종 등과 같이 긴박한 경우에는 기관 운영자 판단하에 접촉 면회가 허용된다. 국공립 시설이나 박물관과 같은 문화예술시설 역시 사전 예약을 해야 방문할 수 있고, 요금은 정상적으로 징수된다. 물론 방역패스가 적용된다. 공연장과 영화관 역시 방역패스를 적용된다. 정부는 고향 방문이나 여행을 자제시키기 위해, 온라인 추모‧성묘서비스 등을 지원하고, 가정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온라인 문화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22-01-1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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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렌 굴드의 끝나지 않는 변주곡
-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 음악 속 숨겨진 사연이나 명사의 말을 통해서 클래식에 쉽게 접근해보자. 아래의 인터뷰는 가상으로 진행했다. 그곳은 여름이었다. 따사로움을 넘어 뜨거운 날씨였다. 이런 날씨와 달리 앞에 펼쳐진 호수는 잔잔했다. 잔잔함은 고드름이 손끝에 닿는 것처럼 차가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호수는 바다처럼 넓었고, 호수를 배경 삼아서 한 사내가 피아노 앞 낡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의자에는 회색빛이 감도는 두꺼운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가까이서 본 사내는 갸름한 턱선과 헝클어진 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소년이었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그는 악보로 보이는 종이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장갑을 손에 낀 채로. Q. 안녕하세요, 혹시 좀 전까지 무엇을 적고 계셨나요? 낙서 중이야. 내면에 흩어져 있던 언어들을 옮기고 있어. Q. 음악을 쓰고 있나요? 아니. 굳이 장르를 말하라고 한다면 시에 가까워. Q.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난 음을 외우는 건 자신 있지만, 시구를 외우는 데 도통 재능이 없어. 하지만 그 시구들은 내게 영감을 많이 줬어. 고전문학이나 철학서도 그렇고. 하지만 뉴스 따위에는 관심 없어. 온갖 소식을 접하면 괜히 근심만 늘거든.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토마스 만과 니체. “음악이 없다는 인생은 하나의 오류다.” 니체가 남긴 저 말을 늘 마음에 새겼지. 토마스 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베토벤 곡을 연주했어. Q. 초면에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이곳의 분들과 다르게 굉장히 젊어 보이세요. 알아. 내가 의도한 거야. 원래는 마지막 모습의 상태로 이곳에 들어와. 하지만 난 원치 않았어. 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육체로 이곳에서 살고 싶었어. 주는 밥도 안 먹고 관리자를 괴롭혔어. 젊을 때의 모습으로 바꿔 달라고. 내 고집을 못 이긴 관리자가 건의한 덕택에 이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Q. 브람스 선생님이 인터뷰이로 당신을 추천하셨어요. 브람스 선생님과는 어떤 사이예요? 생전에는 뵐 수 없었지. 다만 그의 노래를 좋아했어. 특히 인터메조를 즐겨 들었거든. 내가 온전히 듣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 레코딩을 한 것도 그런 이유야. 레코딩이 아닌 채로 하는 건 늘 힘들지만, 선생님은 내가 치는 연주를 좋아하셔. 꼭 그런 이유로 연주하는 건 아니야. 그냥 가끔 그 곡을 듣고 싶을 때가 있어. 선생님 댁에 가서 곡을 치면, 선생님은 조용히 곁에 앉아 계셔. 선생님 집은 외진 곳이라 조용해서 좋아. Q.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셨나요? 세 살 때부터 악보를 읽고, 다섯 살쯤부터 작곡했어. 부모님 둘 다 아마추어였지만, 한 분은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다른 분은 피아노를 치셨어. 어머니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만 이루지 못하셨지. 내게 기대가 많으셨지. 외할머니도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분이셨어. 첩첩산중 시골에 사셨는데, 파데레프스키 곡을 듣기 위해서 장거리 여행도 마다하지 않으셨어. Q. 누구에게 음악을 배우셨나요? 칠레 출신 피아니스트 게레로에게 정식으로 배웠는데, 그와 나는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지. 그는 곡을 가슴으로 느꼈지만, 난 머리로 이해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점을 일부러 꺾지 않았어. 그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제자도 있었겠지만, 별로 따르고 싶지 않았지. 연습은 늘 토론의 현장이었어. 그는 내게 자신의 방식을 주입하지 않았고, 난 토론을 통해 좋은 음악에 대한 나름의 철학과 관점이 생겼어. Q. 첫 리사이틀을 본 건 언제인가요? 여섯 살 때 본 요제프 호프만의 리사이틀. 그가 토론토에 온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지. 확실히 기억나는 건 매우 졸렸어.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있는 상태라고 할까? 그때 리사이틀에서 들었던 온갖 음이 막 생각나는 거야. 막 호프만처럼 신나게 연주했어. 소위 말하는 절대음감이었지. 끝도 시작도 없는 변주곡 Q.32세 이후 콘서트 연주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23살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유명해졌어. 호불호가 심했지. 미친놈의 연주라는 소리도 들었고, 하지만 닥치는 대로 콘서트 연주에 나섰지. 애초에 10년만 하고 그만두고 싶었어. 솔직히 먹고 살려고 했거든. 그것만큼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없잖아. 사실 콘서트 연주를 안 좋아해. 음악은 청중이나 연주자를 명상으로 인도하는 거야. 하지만 2999명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그것이 가능할까? 불가능에 가까워. 콘서트 연주는 고통에 찬 속임수야. 기본적으로 청중을 신뢰하지 않아. 특히 연주자의 불협화음을 찾아다니는 사냥꾼 같은 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차라리 고요한 상태에서 녹음하는 것이 훨씬 낫지. Q. 당신에게 바흐란? 개인적으로 그의 곡을 좋아하고 많이 연주했어.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원한 동반자라고 할까?(웃음) Q. 음악가로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어떤 의미였나요? 시작과 끝. 세간에 나의 이름을 알린 첫 곡이자, 나와 마지막을 함께한 곡이지. 덧붙여 답습하는 곡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나만의 독창성을 곡에 불어 넣고 싶었지. Q. 원래 재녹음을 안 하잖아요. 하지만 이 곡은 두 번이나 녹음했어요. 어떤 이유인가요? 처음 말하는 건데, 딱 두 가지야. 하나는 일종의 메타포야. 그 곡은 첫 부분의 아리아가 30개의 변주를 통과한 뒤 또다시 반복돼. 끝도 시작도 없는 음악이라고 할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지. 진정한 해결도, 진정한 긴장도 없는 그런 음악이야. 시작을 알린 곡과 함께 내 끝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줄곧 생각했어. 내가 사라져도, 나의 곡은 영원히 세상에 남기를 바랐어. 그 곡처럼 끝이 또 다른 시작이기를 바랐어. 하나의 시처럼 말이지. 다른 하나는 실험이었어. 26년 전보다 발달한 녹음 기술을 활용하고 싶었어. 한편으론 기술을 넘어, 나란 인간의 발전도 보고 싶었어. 청중이 반응도 궁금했고. 첫 번째 녹음과 다르게 마지막 부분에서 변주를 시도하고, 장식음도 빼버렸지. 삶이란 늘 변하고, 영원한 삶은 없잖아. 그걸 마지막에 말하고 싶었어. Q. 음악가로서의 장점은? 피아노에 밀착한 내 자세가 꼽추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테크닉적으로 음을 분명히 연주할 수 있어. 리스트의 포르티시모처럼 강렬한 음은 치기 어렵지만 말이지. 이외에도 고도의 집중력, 음악적 기억력, 절대음감, 이 세 가지 덕분에 음악을 할 수 있었어. 피아노 칠 때 악보 보는 걸 안 좋아해서, 늘 통째로 머릿속에 외우고 다녔어. 어디에 있든 늘 손으로 지휘를 하거나 허밍을 입 밖으로 내면서 연주를 했지. 온 세상이 콘서트장이야. Q. 당신에게 장갑과 의자란? 생명이야. 장갑을 끼고 콘서트에 의자를 들고 다니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 하지만 장갑을 끼는 건 혈액순환이 안돼 손발이 늘 차가워서 그래. 뜨거운 물에 오래 손을 담그고 연주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야. 의자는 공연장마다 의자의 높이가 달라서, 매번 조정하는 게 불편했어. 앉기 편하고 피아노를 치기에 좋은 높이의 의자를 구한 거야.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 이런 변명도 귀찮아. 어떤 곳은 실내 스튜디오가 추워서 딱 한 번 머플러와 두꺼운 외투를 입고 갔는데, 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렇게 입고 다닌다는 거야. 물론 밖에서는 위생상 그렇게 입고 다녀. 하지만 나도 실내에서는 그렇게 입지 않아. 어이가 없더라. 뉴스는 정말 믿지 못하겠어. Q. ‘기인’ ‘천재’ ‘고독한 예술가’, 이 셋 중에 맘에 드는 별명이 있다면? 난 정말 뉴스가 싫어. 가십거리는 온통 과장이야. 천재나 기인, 그런 단어 너무 우스워. 차라리 고독한 예술가가 낫겠어.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지는 마. 모두 내가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인 줄 알아. 일정 부분 그런 점도 있지. 내가 집 근처의 브라스 밴드 참여 소식을 지인에게 말했더니 놀라는 사람이 적지 않았어. 하지만 예술가라면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해.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 시간 속에서 자기 수련이 필요해. 상상을 마음껏 펼쳐보기도 하고. 고독은 창조를 위한 수단이야.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건 기계에 불과해. Q.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글 쓰는 작가. 지금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곳에서 틈틈이 써. 그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생전에 여러 가지 기행을 보여줬다. 손 관리를 위해서 악수를 거부하거나, 격려 차원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에게 막대한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서 007 가방에 영양제, 비타민, 수면제와 같은 알약을 가득 채워서 들고 다녔다. 그의 삶은 변주곡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다. 능력이 뛰어난 예술가는 맞지만, 성실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독특함은 독창적인 곡을 남기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삶은 끝났지만, 그의 곡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회자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독한 피아니스트의 예술은 아직도 끝없이 멈추지 않고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변주곡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2020-11-2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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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와 현대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불의 도시 ‘바쿠’
- 신과 신화, 인간들의 이야기가 풍성한 코카서스 3국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첫 여행지가 됐다. 먼저 한국엔 코카서스 3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다. 모스크바, 이스탄불, 카타르 혹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국제공항을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둘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이기 때문에 두 나라 간 국경 통과가 불가능하다. 셋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운행한 침대열차 1등 칸에 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몇 곳 없는 동서양 문화의 완충지대에서 출발해 유럽 문화의 변방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쿠’라는 도시를 제대로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흐린 하늘 옅은 구름 아래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황갈색 사각형 빌딩들, 민트색 둥근 아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풍스런 정취의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동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희미한 푸른 잉크로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솟아 있는 바쿠의 상징, 플레임 타워(Flame Tower)도 눈에 들어왔다. 바쿠는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의 고건축과 현대 건축물들(플레임 타워,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 12세기에 지어진 벽이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이체리 셰헤르’(Icheri Sheher)는 바쿠의 구도시다. 커다란 성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밟히고 마모되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서유럽의 도시처럼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광장은 아니다. 사람과 시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들이 성 안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골목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이 도시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큰길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물탄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 카라반세라이’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이토록 먼 길을 어떻게 이동해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곳곳에 실크로드의 흔적들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그 카라반세라이는 기념품 판매점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바쿠의 중세를 만나다 바쿠의 구도시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처녀의 망루’라는 뜻을 지녔다.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성벽이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탑은 직경 16.5m, 높이 29.5m 규모의 원통형.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탑 꼭대기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탑 위에 올라서니 구시가지와 카스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스피해를 넘어온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다음 일정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시르반샤 궁전’. 15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로 불린다. 왕궁과 건물들이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어디선가, 신을 부르는 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아잔’(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따라가 보니 이슬람 사원 ‘무하마드 모스크’(Muhammad Mosque)가 나타났다. 성의 바깥 서쪽에는 성곽길을 따라 바쿠에서 첫 번째로 조성된 ‘필라모니야 공원’(Filarmoniya Park)이 있다. 주변에는 노란색 건물의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예술 박물관’, ‘음악 재단’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은 100년 전 유럽풍 스타일로 지어진 극장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숲을 안고 있는 공원은 언제든 지친 여행자의 등을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곳곳에서 공연을 하고, 한 레스토랑에서는 탱고 파티가 한창이다. 사랑에 취해, 춤에 취해 있던 커플이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다. 계획에 없었던 장면들. 여행하면서 만나는 득템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경험이다. 예술을 존중하는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코카서스인과 튀르크족이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족에 동화돼 완전히 튀르크화됐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언어의 80%는 터키어다. 그래서 터키와는 ‘한 민족 두 나라’로 불리고,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튀르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은 언어와 문자, 문학작품을 매우 존중한다. 도시 곳곳에 시인의 동상이 있다. 특히 성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다섯 편의 서사시 ‘하므사’(Khamsa)를 발표하면서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기념 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는 이 박물관 앞에서 시작된다.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나와 밤을 즐긴다. 이곳에서는 인종, 국적, 나이, 언어가 달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다른 영혼의 결을 안아줄 줄 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소매치기, 강도, 도둑질 같은 경직된 단어도 없었다. 바쿠의 속살들 구 소련 치하에 있었던 영향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는 많았다. 영어를 하든 못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친절’이다. ‘28 May 광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한 아가씨가 도와줄 일 없냐고 먼저 물어왔다.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만난 할아버지는 200m 정도를 걸어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의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은 3.0AZN(약 2100원), 슈퍼에서 파는 와인은 4.0AZN(약 2800원)쯤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0.2AZN, 약 140원) 등 대중교통비는 놀랄 정도로 싸다. 전철은 2개 노선에 정류장도 많지 않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바쿠의 속살을 보려면 전철역에서 파는 충전식 바쿠 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한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 끝으로 지나가는 큰 대로를 건너면 카스피해를 끼고 바쿠만을 따라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 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 관람차인 ‘바쿠 아이’, 대규모 고급 호텔 등 새 시설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첫눈에도 공원 조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바로 앞 바다에서 원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 보석으로 카스피 해변과 근해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시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이 매장돼 있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가 있다. 바로 노벨상으로 유명한 스웨덴 사람 ‘노벨’의 형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 송유관, 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바쿠의 경제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쿠 시는 188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의 복지시설 건물을 ‘노벨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바쿠에서 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보내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진다. ‘Baku’, ‘Tbilisi’, ‘Ceyhan’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 부른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불바르 공원의 중심인 ‘무감 센터’(Mugam Center) 건너편에는 ‘업랜드 공원’ 정상까지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쿠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플레임 타워가 보인다. 3개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공했다. LED조명을 설치한 건물 외곽은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며 화려한 쇼를 한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불의 도시’가 되었다. 그 랜드마크가 플레임 타워다. 타워 옆 바쿠만과 카스피해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에 ‘순교자의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처럼 전쟁 때(주로 소련이 붕괴할 때 일어난 독립운동)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탑’도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 옆에 추모 공간을 마련한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카스피해와 바쿠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 여행이 끝나면 바쿠는 어떤 도시로 기억될까? 아름답거나 시각적인 즐거움만 제공한 도시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을 향해 인간이 엎드리는 곳, 자그마한 모스크가 있다. 바쿠의 현재를 상징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다. 우리나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녀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친숙한 느낌이다. 건물의 경이로운 비정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각형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바람에 흐르듯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물결도 연상됐다. 멀리서 비탈진 광장의 초록과 물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는 연체동물의 패각이 떠올랐다. 그 껍데기 집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 2020-01-2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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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식이가 그리운 11월에는 방황하기 싫어 공연해요”
-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 블루스계의 전설 같은 남자.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이런 표현을 싫어할 아티스트. 바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가 그 주인공이다. 김현식, 한영애, 이광조, 이정선 등 대가의 경지에 도달한 뮤지션들과 함께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의 영원한 리더인 그는 여전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 어느새 40년에 도달한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드러나는 걸 싫어하는 천성 때문일까. 여전히 은자(隱者)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찾아 공연 전 술자리에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만났다. 한국 가요사를 말할 때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밴드가 있다. 바로 신촌블루스. 이름 그대로 신촌 지역에 거점을 잡고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는 가요와 블루스의 결합이라는 실험을 통해 다수의 명반을 만들었다. 김현식, 이정선, 한영애, 이광조, 강허달림, 이은미 등 한국 가요사에 묵직하게 새겨진 이름들이 한 번씩 거친 밴드이기도 하다. 신촌블루스에는 ‘아쉬움’, ‘골목길’, ‘그대 없는 거리’, ‘이별의 종착역’ 등 들으면 잊히지 않는 노래를 부른 네임드 멤버들이 있다. 엄인호는 바로 그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신촌블루스가 갖는 음악적 무게감과 밴드를 거쳐간 솔로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면면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중심을 지킨 엄인호는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데뷔한 지 올해로 40년이지만 아직도 숨겨진 인물이며 야인으로서 존재한다. 자칭 타칭 히피로서의 삶과 언더그라운드라는 포지션, 그리고 쇼비즈니스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그의 천성 때문일 것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그리고 40년 엄인호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 3일. 서울 청파동 코리아블루스씨어터 공연을 앞둔 시간이었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그가 씩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공연 전에는 물과 술 외에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그는 술을 마셔서 그런가….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얼마 전에 백내장 수술을 해서 시력이 좋아졌는데, 안경을 벗으면 내 이미지가 아니라 안경을 쓰는 거지. 수술 덕에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노안이라 가까이 있는 건 잘 안 보여요.” 그에게서 백내장 수술 얘기가 나오다니 세월이 참 많이 흐르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청춘처럼 보였던 그도 나이를 먹긴 먹었다. 물론 동료들도 함께.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요. 각자 세컨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한 친구는 지방에서, 한 친구는 서울에서 가게를 합니다. 기타리스트 노병기는 자기 블루스 밴드가 있는데 이번 라이브 녹음을 위해 세션으로 초대했죠.” ‘장발 전과 27범’이 만든 새로운 음악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 등이 포진해 있던 명동의 쎄시봉이 포크로 1970년대 가요계를 휘어잡는 동안 신촌은 변방이었다. 그리고 변방인 만큼 마이너리티들이 모이는 지역이 됐다. 그들은 OX, 츄바스코, 하렘 등 몇몇 음악감상실에 모여 술과 음악에 빠져 살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엄인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KBS 합창단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던 추억도 있었다. 사춘기에 염세주의에 빠진 적도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중현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4년에는 부산에 내려가 DJ 생활을 하다 그 후 전국을 유랑하며 한국형 히피로 살았다. 장발단속령이 떨어졌던 그 시절, 히피족 같았던 장발은 그를 ‘장발 전과 27범’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는 “거의 유치장에서 살았다”며 웃으며 추억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와 같은 장발이다. 문화의 새로운 시대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개척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79년, 엄인호는 신촌에서 만난 이광조, 이정선과 함께 ‘풍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활동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서 박동률, 라원주, 양영수 등 신촌 멤버들과 함께 ‘장끼들’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3년여의 활동 후에 해체됐다. 그리고 1986년, 신촌블루스가 탄생한다.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함께 신촌의 레드 제플린이라는 카페에서 활동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 집결하다 “(레드 제플린은) 원래 선배가 운영하던 카페였는데 장사에 신경 안 썼지. 그래서 망해가던 곳이었는데 나한테 운영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나는 돈이 없어서 운영권 대신 출연해서 가게를 유지해가면 되겠다 싶어 오케이했죠. 그래서 다 살려놨는데 손님이 많아지니 가게를 다른 주인한테 넘겨버리더라고요. 섭섭했지. 그래도 그렇게 인기가 있어서 관객이 점점 많아졌고 ‘공연을 뭐 이 따위로 하냐 극장이라도 빌려서 해라’는 주위 지인들의 권유로 동숭동 파랑새 소극장을 빌렸어요. 당시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고 그럴 정도였죠. ‘역시 인호 형이 끼니까 뭔가 다르네’ 하는 말도 듣고요. 거기서 시작된 거예요 신촌블루스는.” 그렇게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시작됐다. 1집을 성공시킨 뒤 2집은 개그맨 전유성의 소개로 알고 지냈던 김현식이 참여해 또 명반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신촌블루스는 엄격하게 조직된 밴드가 아니어서 다소 느슨한 공동체처럼 운영됐다. 그래서 멤버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보컬과 여러 명의 객원 보컬들도 동원됐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질적인 성향의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단적인 예로 신촌블루스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멤버인 엄인호와 이정선만 비교해도 그렇다. 일렉트릭 기타 블루스와 포크의 조화,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며 음악적 자장을 넓혔다. “신촌블루스 멤버 중 저를 성장하게 한 사람은 이정선 씨죠. 악보에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으니까요. 원래 악보 보는 법을 몰랐거든. 그런데 작곡하는 사람이 악보도 못 그린다는 게 웃기잖아요. 그래서 이정선 씨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쓰는 법도 알게 됐죠. 여러모로 내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냐?” “전에 발표했던 ‘이별의 종착역’을 블루스로 꼭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촌블루스 3집에 싣기 위해 김현식에게 죽기 얼마 전에 불러 달라고 부탁하니까 현식이가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네?’ 하더라고.(웃음) 그런데 흔쾌히 허락했어요. 단칼에. 가사 기억이 잘 안 나니까 가사만 알려 달라고 하고 스튜디오에 아들과 함께 와서 한 번에 불렀죠. 김현식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어.” 엄인호는 아련한 듯 김현식을 추억했다. 생각해보면 그를 거쳐간 가수가 참 많았다. “현식이, 한영애, 정경화, 이은미 등등 정말 준비된 가수들이었죠. 오랫동안 그 고집으로 쭉 버텨왔고. 나는 오버하는 가수는 싫어해요. 너무 멋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멋 부리지 않고 자기 색깔대로 부르는 가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산된 창법은 안 좋아해요. 연주도 그렇죠.” 자연스럽고 절제된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그의 신조는 그의 음악적 애티튜드였다. 없는 듯 있으면서, 시간과 사연의 흐름을 타고 살아온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올해로 40년째 음악인으로서 살아왔다. 10년 전 그는 거의 은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갑자기 다 싫은 거야. 내가 쉴 때가 됐나보다 하고는 미국에 가서 거의 일 년을 놀다 왔지. 한편으로는 그대로 거기서 눌러살까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러려면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과연 내가 정착할 수 있을까 싶었지. 그러다가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가 안 나가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할 것도 많았고.” 뮤지션에 대한 관객들의 예의 그의 아들 엄승현 씨도 현재 세션 기타리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런데 나하곤 일을 안 하려고 해. 야단맞으니까.(웃음)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가끔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거절하더라고.(웃음) 뭐 음악이라는 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는 자신처럼 라이브 공연으로 살아가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이나 해외 어디든 가서 공연하면 관객이 너무 부러워요. 뮤지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거든. 특히 예의를 지킬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관객들은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이 없고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러 있어요. ‘너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니까요. 관객이 밴드를 최대한 응원하고 자극하면 더 즐거운 공연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몰라요.” 얼마 전 클럽에서 연주를 하는데, 관객 중 한 명이 갑자기 무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골목길’은 내가 더 잘 불러” 하면서. 또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공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드는 관객도 있단다. 우리나라 공연 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임을 알게 해주는 상황들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결국 뮤지션들은 그런 무대를 기피하게 돼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어휴,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해.” 신촌블루스 원년 멤버 공연 그렇다면 그는 요즘 가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소위 아이돌 위주로 재편되는 가요계 현실에 대해 그는 덤덤해했지만, 한 가지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어차피 대중음악은 유행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에 큰 불만은 없어요. 단지 우리가 예전에 갖고 있던 감성이 없다 보니까, 마치 아이들 일기에 쓸 법한 가사들만 나오니까… 물론 작사가들이 제대로 쓴 건 다르겠죠. 그런데 요즘 작사하는 친구들 보면 포커스를 모두 중학교 아이들에게 맞추는 거 같아요. 아무리 작곡을 잘해도 가사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유치하면 불만스러워요. 안타까운 거라면 그거예요.” 현역으로서, 그는 데뷔 40주년을 맞이해 오는 11월 23일에 그의 음악적 고향 신촌에서 한발 떨어진 홍대 하나투어 브이홀에서 신촌블루스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번 무대가 특별한 이유는 원년 멤버인 이정선과 한영애가 함께 자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신촌블루스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11월에 제 생일이 있기도 하고…. 김현식이 떠난 달이기도 한데, 그때가 되면 기분이 가라앉고 방황하게 되니까, 올해가 마침 데뷔 40주년이니 공연이나 해야겠다 싶었어요. 김현식과 함께 불렀던 노래 ‘바람인가 빗속에서’, ‘이별의 종착역’을 불러볼까 해요. 한영애, 이정선 씨도 함께하기로 했는데, 사실 귀찮아요. 그 친구들 나오면 연습도 따로 해야 해서요.(웃음) 그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까 현식이를 추모하며 그간 서운한 감정 있으면 다 없애고 가끔 이렇게 뭉치자고 하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살다 가고 싶다 덤덤하게 사는 그는 딱 하나,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못해본 게 있는 거 같아요. 또 음악이지. 히트곡? 그런 건 아니고. 뭔가 엄인호다운 것.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그런 스타일이 있거든요. 음악적으로 세련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데 그게 내 생각대로 쉽게 되는 건 아니거든.” 그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꿈이란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모호하고 바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좇고자 하는 음악의 경지였다. 그렇듯 엄인호라는 사람은 끝까지 음악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아티스트다. 엄인호는 신촌블루스 안에서 더욱 빛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주도한 그는 우리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누구에게 날 기억해 달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가자. 그거면 돼요.” 가슴에서 훅 뜨거움이 쳐 올라와 냉큼 막걸리 잔을 비웠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의 술잔은 다시 못다 한 이야기와 함께 넘쳐흘렀다.
- 2019-10-30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