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정리한 후 노후를 준비하는 시니어 중에는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을 택한 이도 많다. 하지만 몸만 갈 수는 없는 법. 귀농과 귀촌이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주거 공간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시골에서 전원주택 건축 시 알아두면 좋은 맹지와 지목변경(地目變更)에 관해 알아보자.
은퇴를 앞둔 김토지 씨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농지를 상속받았다. 그 땅을 둘러보니 근처의 풍광도 괜찮고 무엇보다 땅 옆에 도로가 나 있어서 출입이 용이했다. 그곳에 전원주택을 짓기 전에 지적도를 살펴봤더니 도로가 없는 땅이었다.
위 사례에서 알아야 할 개념이 바로 맹지(盲地)와 현황도로다. 김 씨의 농지는 지적도에서 맹지로 본다. 맹지는 도로와 접하지 않은 토지를 말한다. 다만 위의 농지는 일반적인 맹지와 달리 현황도로와 접하고 있다. 현황도로는 지적도에는 도로로 표기되지 않지만, 주민이 오랫동안 통행로로 이용하고 있는 사실상의 도로를 뜻한다. 김 씨가 농지에서 본 길은 현황도로였다.
건축법에 따르면 건축 시 주의해야 하는 두 가지가 접도(接道)와 도로의 너비다. 건축법상 건축물은 대지의 2m 이상이 도로에 접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건축법상 ‘도로’는 보행과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고, 너비가 4m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예외 규정도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도로의 설치가 어렵다고 인정하여 그 위치를 지정 및 공고한 구간은 너비가 3m만 넘어도 괜찮다. 아울러 길이가 10m 미만인 막다른 도로는 너비가 2m 이상이면 된다.
그렇다면 위 사례와 같이 현황도로가 인접한 맹지에 건축 허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황도로를 일반 도로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 현황도로의 소유자로부터 토지 사용 승낙을 받아야 한다. 건축법 제45조에 따르면 허가권자(지자체장)는 이해관계인(토지 소유자)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만 도로의 지정 및 공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진입도로를 만들면 맹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종철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맹지에서 벗어나려면 현황도로의 소유자로부터 사용 승낙을 얻거나, 해당 토지를 매입하는 방법도 있다”라고 말했다.
대지로 지목변경
맹지에 진입도로를 설치했다고 가정했을 때 바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지목과 용도지역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목은 토지의 주된 용도에 따라 토지의 종류를 구분하여 지적공부에 등록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지목이 전·답인 곳에 건축물을 지으면 불법이며, 원상복구 조치를 하고 과태료 같은 벌금을 내야 한다. 용도지역에 관하여 전 교수는 “용도지역 중 농림지역은 주택 건축 시 농업인의 자격 요건이 필요하고, 자연환경보전지역은 주택 허가가 까다롭다. 상대적으로 관리지역은 허가가 수월한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농지를 대지로 바꿔서 집을 지으려면 토지 형질변경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개발행위허가를 받아야 한다. 농지의 경우 개발행위허가 시 농지 개량 외의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농지전용(轉用)허가를 받아야 하며, 공간정보관리법에 따르면 지목변경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지적소관청에 신청해야 한다. 토지 전문가는 “농지전용허가는 일반적으로 개발행위허가 신청 시 일괄 의제 처리된다. 이후 형질변경을 하고 건축 후 지목변경을 신청하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토지의 지목을 사실상 변경한 경우에는 그로 인해 증가한 가액을 과세표준으로 하여 취득세 등을 신고 및 납부한다. 토지의 지목변경으로 인해 증가한 가액은 토지의 지목이 사실상 변경된 때를 기준으로 하여 지목변경 전 시가표준액과 지목변경 후 시가표준액의 차액으로 한다. 아울러 농지전용허가를 받은 자는 농지보전부담금을 내야 한다.
지난해 추석 이후 두 번째 비대면 명절이 왔다. 즐거운 연휴지만, 온 가족이 시끌벅적하게 모이지 못해 적막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자식과 손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니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은 한바탕 큰 웃음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연휴를 조금 더 연휴답게 만들어주는 코미디 영화 세 편을 추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정직한 후보 (Honest Candidate, 2019)
손목에 차고 있던 고가의 시계를 풀고, 반짝반짝한 구두에서 허름한 단화로 갈아 신은 뒤 사람 좋은 웃음을 장착한 채 선거 유세를 나가는 여자. ‘정직한 후보’의 주인공 ‘손문숙’(라미란)이다. 3선 국회의원인 문숙은 4선을 노리며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욕먹기 딱 좋은 정치인의 표본이다. 초호화 주택에서 살지만 낡은 아파트에서 수더분한 모습으로 이웃을 만나고, 토론회 도중 민심에 호소하며 가짜 눈물을 흘릴 정도다. 그런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치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진실의 주둥이’ 병에 걸리게 된 것.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이 어느 날 진실만을 말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정직한 후보’는 오늘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정치인들의 위선을 통쾌하게 꼬집는다. 믿고 보는 라미란표 코믹 연기가 몰입도를 높인다.
2. 내안의 그놈 (Inside Me, 2018)
1997년도 드라마 ‘체인지’부터 2010년 ‘시크릿가든’까지 우연한 계기로 주인공 두 남녀의 몸이 바뀐다는 ‘영혼 체인지’ 설정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꽤 오래전부터 존재해오던 클리셰지만, 영화 ‘내안의 그놈’은 좀 다르다. 주인공의 영혼이 바뀌는데, 청춘 남녀가 아닌 아저씨와 남고생이다. 영화는 괴롭힘을 당하는 고등학생 ‘동현’(진영)이 옥상에서 떨어지다 괴팍한 엘리트 조폭 ‘판수’(박성웅)와 부딪혀 두 사람의 몸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본래 성격과 180도 다른 학생의 몸에 들어가 살게 된 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괴롭혔던 학생을 응징하고, 동현의 인생을 바꿔놓기 시작한다. 유쾌한 설정 속에 숨겨진 반전과 따뜻한 가족애까지 담겨있어 웃음과 감동을 모두 느낄 수 있다. 특히 느와르물의 대부 박성웅의 이미지를 포기한 듯한(?) 코믹 연기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세계’일 것이다.
3. 탐정: 더 비기닝 (The Accidental Detective, 2015)
영국에 셜록 홈즈, 프랑스에 아르센 뤼팽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미제살인사건 카페 운영자 겸 만화 카페 주인 ‘강대만’(권상우)과 광역수사대 출신 형사 ‘노태수’(성동일)가 있다. 홈즈와 뤼팽이 그 반열에 끼워줄지 모르겠지만, ‘탐정: 더 비기닝’의 주인공 두 사람의 추리 실력도 꽤 수준급이다.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은 태수 친구 준수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자, 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두 사람이 비공식 합동추리작전을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형사 뺨치는 추리력을 가졌지만 어딘가 헐렁한 구석이 있는 대만과 그런 그가 성가신 태수의 티격태격한 ‘캐미’가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를 다 보았다면 2018년 개봉한 ‘탐정: 리턴즈’ 시리즈를 이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코믹 연기의 대가 배우 이광수가 합류하여 한층 더 색다른 재미와 스릴을 선사한다. 온라인에는 이미 1편보다 더 재미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코로나 19 시대에 발맞춰 탄생한 ‘언택트 돌봄’이 주목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고령자 돌봄에 공백이 생길 우려가 커졌다. 경로당, 복지관, 체육관이 문을 닫고, 장년들이 집에만 머물자 정신적 고립을 느끼며 무기력,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에 각 지자체와 기관들은 돌봄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언택트 돌봄’을 고안해 실행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1. 릴레이 안부 전화 주고받기
대한노인회 대구연합회와 대구경로당 광역지원센터에서 추진하는 운동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1,525곳에 이르는 대구의 전 경로당이 장기간 휴관하며 고독감을 호소하는 노인이 많아지자,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고안했다.
연합회장이 전화를 시작해 각 구의 지회장들로 이어지다 다시 역순으로 돌아온다. 또 지회장이 전화를 시작해 분회장, 선임 경로당 회장, 부회장, 총무로 이어지는 전화도 있다. 경로당 회원 간에도 순번을 정해 전화를 주고받는다. 경로센터 직원들이 각 경로당 회장에게 안부 전화를 하기도 한다.
통화에서는 안부 내용을 물을 뿐 아니라 연합회 소식, 지회 운영 내용을 주고받고, 겨울철 건강 관리나 방역 지침 준수도 당부한다.
2. 문화 예술 체험 꾸러미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청춘문화공방’이라는 비대면 문화 예술 체험 꾸러미를 제작해 전국의 60세 이상 장년들에게 배포했다. 총 604명이 신청했다. 언택트 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목적이다.
청춘문화공방 체험 꾸러미는 장년들에게 친숙한 전통 민화로 만들어졌다. 민화 컬러링북, 부채, 에코백 채색 등 세 가지 체험 팩이 있으며, 집에서 직접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민화 컬러링북에는 각 민화의 의미와 상징 설명도 있다.
한국문화원연합회는 SNS에서 꾸러미 체험 후기 인증 이벤트도 진행했다. 이에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에는 이용자들의 다양한 후기가 #청춘문화공방 해시태그를 달고 올라와 체험 경험담을 공유했다.
3. 스마트 홈 서비스
경남 김해시는 2019년부터 장년층 1인 가구 300세대를 대상으로 스마트 홈 시범 사업을 실시했다. 동작 감지 센서를 주택 내에 부착해 응급 상황에 대비하고, 정보 제공과 말벗 기능이 탑재된 인공지능(AI) 스피커를 보급했다. 사회복지관 내에는 ICT케어센터를 마련해 전담 사회복지사 3명이 늘 모니터링하며 위급 시 긴급출동도 지원했다.
ICT케어센터는 최근 AI스피커 기능을 활용한 비대면 프로그램을 돌봄 공백 대안으로 마련해 운영 중이다. 인지 능력 강화 훈련, 명상, 노래 교실, 홈 트레이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요일별, 시간대별로 송출하여 심신 건강관리를 돕고 있다.
김해시 관계자는 코로나 19 장기화로 지친 어르신들의 건강이 우려된다며, 향후 ICT 기능을 활용한 비대면 돌봄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당에 널어둔 육쪽마늘 씨알이 참 굵다. 주말 내내 마늘을 캤으니 온몸은 쑤시고, 흘린 땀으로 눈은 따가워도 수확의 기쁨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 이틀간 내 손같이 쓰던 ‘마늘 창’을 놓으니 가뿐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하다. ‘마늘 창’이란 모종삽보다 조금 큰 손잡이에 쇠스랑보다는 작은 창살이 두 개 혹은 세 개 달린 농기구다. 꼭 50년 전 이즈음, 마흔이 되기 전의 젊은 부모님과 마늘이며 감자를 캘 때에는 없던 녀석이다. 하얗고 통통한 마늘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시골 소년답지 않게 뽀얀 피부의 소년이 삽과 호미로 열심히 마늘을 캐고 있었다. 수업료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조례시간에 담임에게 호명이 되었다. 급우들 형편이야 다들 비슷한 처지였건만, 이번 분기에는 어찌 다들 납부하고 몇 명만 미납이었다. 마늘을 캐서 팔아야 수업료를 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소년은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에도 마늘 캐기에 열심이었다.
상고에 진학해서 농협 직원이 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맏이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평소 남편 의견에 무조건 순종하던 어머니는 맏이의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가 자기주장을 그토록 강하게 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자 두 번째는 여동생을 대학에 보낼 때였다. 인근 조선소에서 깡깡이(녹슨 배에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작업)를 하고,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으며 손톱이 빠지도록 일한 어머니의 교육열은 아버지도 말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과외 교사와 학원 강사를 병행해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는 다 비슷했으리라. 대학생활 내내 과외와 학원 강사를, 그리고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해서 월급을 받았지만 늘 지난한 삶이었다. 농사로는 가족 건사가 힘들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사고로 몸져누웠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와 7남매를 혼자서 건사할 수 없었다. 첫 월급은 23만 원,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들 학비를 위해 집으로 송금했다.
36개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재학 중 취업하고 1년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한 뒤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입학식에는 와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졸업식에는 모두 상경해 함께했다. 거리 사진사에게 2000원인가 2500원인가를 주고 찍었던 가족사진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참 환하게 웃으며 학사모를 쓰셨다. 어머니에겐 그게 고된 삶의 보상이었으리라.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게 삶의 우선순위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고를 당했던 아버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손으로 밤낮없이 바닷물에 녹슨 페인트 덩어리들을 쳐대는 노동으로 남자보다 거친 손을 한 어머니.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1986년, 동생 등록금을 납부해주면서 항상 어깨를 짓누르던 장남의 책임에서 조금 가벼워졌다. 동생들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고 어머니도 드디어 깡깡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장남 대신,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이 더 깊어졌다. 부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와 사내 커플로 만나서 결혼했다. 회사 비품 하나도 살뜰히 아끼고, 부서 살림을 맵짜게 운영하던 모습에 반했다. 연애는 짧았어도 이 여자가 내 일생의 반려자다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결혼 후에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억척스레 일했다.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1986년부터 1988년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아시안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참여했고, 참여 팀의 주요 팀원 중 하나였다. 건국 이래, 아니 단군 이래 가장 큰 행사가 내 손을 거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밤낮없이 일했고, 주말도 잊은 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일이었다. 또한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두 아이의 육아를 아내에게 맡긴 채 회사 일에만 몰두했으니, 그래서 지금은 항상 아내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회사 일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내의 희생 덕분이긴 했지만,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었고, 생애 처음으로 ‘내 집’, 아니 ‘우리 집’이 생겼다. 서울 외곽의 작은 주택이었지만 사글세도 전세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해도, 대문을 꽝 닫아도, 마당에 오줌을 싸도 한소리 듣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라면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며 아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침엔 영어학원, 저녁엔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는 없었다. 특히 외국과 일하는 것이 많은 업무 특성상 영어는 기본이고, 점점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수교국이지만 조만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회사에서는 중국 지사 설립과 중국 공장 설립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중국에 파견했다. 팀장이 되어서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장기출장 가방을 싸주며 근심이 가득하던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공산국가, 적대국의 이미지가 강했던 중국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사가 설립되고 3년 뒤에 중국에 온 아내는 생각과 달리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1997년까지 중국에서 발판을 다지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과에 맞는 승진 자리를 얻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모든 기대를 베어버리는 IMF 구제금융 시대가 닥쳤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 소식이 들렸다. 재무 쪽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달러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다들 혈안이었다. 달러 부족으로 흑자도산하는 기업들도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하고,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불편한 시기. 자칫 썰려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작두 위에서 위태롭던 시간이었다.
혹독한 시간, 책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자리는 지키지 못했다. 핵심 인력이라 생각했던 내가 자르다 남은 인력이 되어버렸다. IMF의 파고는 조금 작아졌지만 개인들에게는 정말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살얼음을 걷는 하루하루, 눈을 감으면 아내가, 눈을 뜨면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어머니, 7남매의 무탈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 하나를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엄혹한 시절이 지나고 조금씩 훈풍이 불었다. 훈풍을 따라 IT벤처 열풍이 불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부터 인터넷 기업, 닷컴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이내 한국에도 수많은 IT 기업들이 강남 테헤란로를 점령했다. 회사에서도 젊은 직원들을 모아 새롭게 도전해볼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그것도 IT 관련이나 기술 관련 전공자들이 젊은 혈기로 뛰어드는 사업이라는 이미지를 ‘벤처’ 기업은 갖고 있었다. 이미 십수 년간 조직에 몸담아 회사원으로 살아왔던 구태가 몸에 밴 사람들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IMF를 넘기고 새롭게 투자하는 사업인데 아직 혈기왕성한 젊음만 믿고 도전하는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회사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남는 인력이었고, 그대로 버티고 있는다고 다시 원하던 자리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되어가는데 더 늦기 전에 도전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린다고 어디 가서 밥이야 굶겠는가. 아직 초등학생, 중학생인 아이들이 걸렸지만 마지막 도전이다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결심이었다.
사내 벤처팀의 사업계획서를 보았지만 처음엔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십수 년간 해온 일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사업 계획이었고, IT 분야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판을 쓰고 수기로 장부와 기획안을 쓰던 시기에 입사해서 경리가 타자를 쳐주던 시기를 지나왔다. 독수리 타법은 벗어났고 워드프로세서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듯이 이제는 젊은 직원들에게 단어 하나하나, IT 관련 사업 하나하나를 배워가야 할 때였다.
많게는 스무 살, 적게는 띠동갑 정도 되는 직원들은 세대 차이를 넘어서 나에겐 아득한 존재들이었다. 오렌지족, X세대 등으로 불리던 그들은 나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여동생이 대학에 갈 때,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던 우리 어머니가 느끼던 그 감정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감정보다 더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꼰대짓’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기 흉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20대 때, 30대 때 열심히 일했던 나처럼, 벤처팀들도 자기 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것이 중요했다. 대신 적절한 예산과 범위 내에서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닷컴 버블과 시작된 사내 벤처는 의외로 성공을 거두었고 젊은 청년들이 성공담에 한 줄을 보탤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함께했던 청년들은 지금 여러 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분당에서, 강남에서 밤을 새던 때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된다.
사업 론칭이 성공하고 나서 다시 본사로 돌아왔고 중국 지사에 다시 갔다. 3년 후에 본사로 돌아오니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부속품처럼 25년 가까이 일하고 배터리처럼 방전되었다. 정년을 5년 남짓 남긴 그때, 회사 내 권력에서 밀려나 있어서 임원이나 사장단에 도전하기에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도전할 여력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에 어느새 훌쩍 커버린 두 아이는 스무 살을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제 앞가림을 할 터였다. 늦은 나이에 방통대에 입학한 아내는 그동안 하고 싶어 했던 상담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이제는 진짜로 잉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출근길도 퇴근길도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술과 폭식으로 인한 고혈압에 고지혈증, 당뇨까지. 쉰을 넘긴 몸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IMF 시절 이후 다시 백척간두에 선 느낌이었다.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지나가고 머지않아 환갑을 넘길 텐데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부모님 세대의 쉰과 우리 세대의 쉰은 다르다. 또 우리 뒷세대, 그리고 지금 20대가 쉰이 되었을 때의 그 ‘쉰’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나이와 직급에 얽매여 권위를 찾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벤처 일을 할 때 깨달았다.
이 나이쯤엔 이 정도 재산이나 이 정도 사회적 직위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사회적 관습에 의한 고정관념이었다. 20대에 대학을 가고, 30대에 결혼을 하고, 40대에 내 집을 갖고…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루어진 한국인들의 삶을 한 장면으로 나타내며 비판하는 카툰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60대에는 손주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참으로 평범하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50년이었다면 이제 남은 생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해서 다른 곳에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은퇴에 대해 처음으로 아내와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당신처럼 꽉 막힌 일벌레가 이런 생각도 하다니 대견하다면서.
정년은 금방이었다. 30년 넘게 일했으니 미련이 없을 만도 한데 사원증을 반납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술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취한 날이기도 했다. 시원함 반, 아쉬움 반, 거기에 임원에 대한 미련 한 꼬집. 눈물이 핑 돌던 밤이었다.
퇴직 후에 딱 1년만 쉬자고 했지만 달리던 자전거는 그리 오래 멈춰서 쉴 수 없었다.
딱 가족이 먹을 것만 소일거리로 농사지으며 1년을 보내던 중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생활은 거리가 멀었다. 몸을 쓰고 현장에서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맥도날드 시니어 알바도 해보고, 편의점 알바도 해봤다. POS를 익히는 것이 제일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때 IT 벤처에서 일했던 가닥에 그 뒤로도 꾸준히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온갖 할인이나 쿠폰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아직은 청춘!’ 이런 마인드가 아니었다.
40년 전, 내가 스무 살 때는 없었던 일들을 해보며 우리 아이들과 주변의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패스트푸드점 복장과 편의점 조끼를 입은 나를 보며 아내와 아들들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족과 다시 하나가 되는 느낌, 참 오랜만에 받는 느낌이었고 이때부터 다시 나의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퇴사한 동기와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다 잊어버린 중국어를 떠듬거리며 중국전자제품을 수입했다. 거창한 사업도 아니고 동기와 나 두 사람 소소한 용돈벌이로 시작했다. 그래도 저가 저품질 제품을 다량으로 떼다가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적정 가격의 적정한 품질의 제품을 파는 게 목적이었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몇 년 새 규모가 커져갔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자. 시작할 때의 다짐은 잊지 않고 지켜가고 있다. 주말 농장과 아내, 손주들과 함께할 시간은 빼두고 일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지금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다. 할아버지가 아닌 ‘노땅’이나 ‘꼰대’가 되는 것이 문제 아닐까? 푸근하게 가족과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웃으며 시작한다.
이제 마늘을 엮어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둘 때가 되었다. 장마철을 무사히 보낸 마늘은 농막 처마 밑에서 더욱 단단하게 맵고 달달하고 향긋한 마늘로 익어갈 것이다. 그처럼 내 안의 할아버지가 더 할아버지다워졌으면 좋겠다.
원영섭 변호사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중앙대학교에서 건설경영학과 석사와 건축시공 및 건설관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군 시절에는 카투사로 복무하다가 자원해 미 2사단 공중강습부대에 배치되었고, 제대 후에는 ‘공대생’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건설 부동산 분야의 법적 분쟁 해결을 위한 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계에도 뛰어든 그에게 변호사 이후에 꿈꾸는 제2의 인생은 무엇일지 들어봤다.
집주인은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
그렇다면 건축 전문 변호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시니어들은 스스로 만드는 집을 어떤 의미로 봐야 하는 걸까?
“집짓기를 스스로 하겠다는 분들은 자신이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스스로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건축 행위는 분양을 받거나 매수하는 것에 비해 이익률이 훨씬 높습니다. 이익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한 자본을 고위험 사업에 투자한 것입니다. 고위험 사업에서 ‘무엇을 몰랐다’는 것은 전혀 변명이 안 됩니다. 소비자는 약자지만 사업자는 강자입니다. 법원 소송과정에서도 땅과 자본을 가진 건축주는 시공업자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가진 자로 간주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사업을 행할 준비를 철저히 하셔야 합니다.”
사업자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원변호사의 충고는 스스로 만드는 집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는 관점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에서 시니어들을 위한 주택의 방향성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이 들면 공기 맑은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농사나 지으며 편하게 살겠다는 분이 많지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령자를 위한 가장 좋은 주택은?
“어르신들은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병원과 가까워야 하고, 자식들과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기에 도심에 있어야 합니다. 각종 편의시설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분들도 고령자입니다. 결국 고령자를 위해 가장 좋은 주택 유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상복합 아파트입니다. 신축 아파트를 많이 공급하고, 오래된 아파트를 쉽게 재건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최고의 고령자 주택 정책입니다.”
아파트 공급량을 늘리고 쉽게 재건축하게 법을 바꿔야 한다는 원 변호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재개발과 재건축 정비 사업에서 유독 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인 그가 봤을 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송과 최근 추이는 어떤 양상일까?
“재개발 및 재건축 정비 사업은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조합이라는 단체를 구성해서 의사를 통일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조합장 선임 등 여러 안건에 대한 총회의 결의가 가장 중요한데, 이 과정에서 총회 결의의 효력을 다투는 소송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정족수와 통지, 동의 방식 등이 문제가 됩니다. 판례의 방향은 과거에 비해 결의의 절차적인 부분을 점점 엄격하게 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IMF 시절부터 정치를 꿈꾸다
원 변호사의 이력에는 변호사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경력들도 있다. 그는 꾸준한 총선 도전 기록을 갖고 있으며 지난 총선에서는 자유한국당의 비례정당 TF팀장으로서 자매정당인 미래한국당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처음 정치에 눈을 뜬 것은 IMF 시절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IMF를 겪고 나라의 의사를 결정하는 정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는 법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법시험을 본 것도 비록 건축학도지만 법을 알아야 정치를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단순히 정치 낭인이 아니라 확실히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 후 정치를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서초동 변호사 시장에서 제가 일해온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전문 서적을 여러 권 내고 10년 이상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앞으로 건설 부동산 정책 및 입법 분야에서 제 능력을 발휘해보고자 합니다.”
인생 2막을 정치인으로 열겠다는 그의 포부는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그는 국민의힘 중앙당 윤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 상태다. 그의 입장에선 고향인 부산에서 치러지는 오는 4월 7일 부산시장 보궐 선거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임 부산시장의 불미스러운 일로 갑자기 치르게 된 보궐선거입니다. 여당은 자기들의 당헌 당규에 따라 보궐선거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야당은 1년 정도 짧은 기간의 임기임을 감안해, 부산 시정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그동안의 업무 공백을 신속히 안정화할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합니다.”
부동산 시장은 2021년에도 불안정할 것
2020년 부동산 시장은 다사다난했다.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 사실상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를 보완하기 위해 24번째의 추가 대책을 내놓으면서 응급 대응을 양산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원 변호사에게 올해 부동산 상황은 어떨지 물어봤다.
“여전히 국토교통부 장관 내정자는 공급 확대를 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경기 침체로 내수는 줄고 산업 투자는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유동성은 많고, 그 유동성이 빠져나갈 부동산의 공급이 없기에, 부동산 시장이 쉽게 안정화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또한 최근 정국의 화제인 검찰 개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 개혁의 본질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입니다.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검찰을 조종하여 검찰권을 행사해왔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검찰 개혁의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추미애의 갈등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이 아닌 권력에 굴종하는 검찰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청와대와 법무부 장관의 폭주를 보면 검찰 개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자명합니다. 우선 검찰총장의 임기를 보장해야 하고, 검사징계위원회의 자의적인 구성을 막아야 하며, 검찰총장의 인사권도 보장해야 합니다.”
이제 40대 중반. 인생으로 보면 중년이지만 정치인으로선 아직 젊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변호사는 과거와 지금의 자신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본다.
“옛날에는 뭐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지금 무엇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능력과 적성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경험까지 녹아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고생과 경험을 인정하기에 반대로 ‘잘함’에 대한 선망이 없어졌고, 제 자신이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만들고, 그 의견을 설파할 때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과정 등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현실과 이상의 조화는 끊임없이 지혜와 용기를 요구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낙선과 공천 실패는 말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인지도를 만들기 위한 쉬운 길의 유혹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한 정치인의 뜻이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그 무게감을 인식한다면, 이런 힘든 과정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정치는 수학의 미적분과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 경험하고 배운 모든 것들이 정치를 하기 위해 준비해온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제2의 인생,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길고 먼 길까지 각오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인생 2막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자신이 일평생 해온 업무 범위 내에서 가장 새로운 일을 찾아 사회적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라 과거보다 발전된 미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부단히 노력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2020년 한 해 ‘오팔세대’(활기찬 인생을 사는 노년층)가 주목받았다. 이들은 탄탄한 경제력과 안정적인 삶을 기반으로 은퇴 후에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여가생활을 즐기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액티브시니어로 활기찬 노후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오팔(OPAL) 노후자산관리 전략’에 대해 알아보자.
자료 출처 및 도움말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김은혜 책임연구원)
먼저 자신의 노후자산 준비 현황을 점검해보자. 노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탈 및 금융회사에서 제공하는 노후준비진단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쉽게 확인 가능하다. 점검 결과 노후준비가 부족하다면 대응방안을 찾아 노후준비수준을 높여가야 한다.
O: Old paradigm must be changed, 노후자산의 패러다임을 바꾸자
기대수명의 증가로 은퇴 생활 기간이 늘어나면서 ‘은퇴까지 얼마를 모아야 한다’가 아니라 ‘은퇴 후 매달 얼마만큼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고령화·저금리 시대 노후자산은 ‘자산규모’ 대신 ‘소득목표’를 세워야 한다. 또, 은퇴 기간 생활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 꾸준하게 발생하는 소득(현금흐름)을 마련해야 한다. 투자하는 방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저성장저금리 투자환경이 고착화하면서 안전자산만으로는 자산증대가 쉽지 않다. 가격변동 위험은 있지만 투자자산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추구해야 자산증대를 꾀할 수 있다. 연금 등 노후자산이 너무 안전자산에 치우쳐 있다면 투자자산 비중을 높여 기대수익을 높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P: Pension is basic, 연금이 기본이다
가장 좋은 노후준비 방법은 연금으로 노후소득을 만드는 것이다. 계획한 노후생활비를 연금으로 충당할 수 있다면 은퇴 기간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노후자산에서 연금 비중이 작다면 지금부터라도 수정해 가면 된다. 가장 먼저 국민연금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50대라도 반환일시금반납, 보험료 추후납부, 임의계속가입, 연기연금제도를 활용하면 국민연금 수령액을 늘릴 수 있다. 은퇴 전 소득이 있을 때 연금계좌 납입금액을 최대한 늘리는 방법도 있다. 특히 50대 이상은 2020년부터 3년 동안 연금저축 세액공제한도가 200만 원이 추가 적용되므로, 연금저축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노후자산의 일부를 즉시연금 등 연금상품으로 옮기거나, 주택연금 및 농지연금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A: Add up income asset, 인컴형 자산을 더하자
인컴형 자산이란 이자나 배당, 부동산 임대료 등 정기적인 ‘소득이나 수입(income)’, 즉 현금흐름이 창출되는 자산을 말한다. 각종 채권과 고배당주, 리츠(부동산투자신탁) 등이 인컴형 자산에 해당한다. 인컴형 자산은 일반적으로 은행금리보다 조금 더 높은 연 3~5% 수익률을 추구하는 중위험중수익 금융상품이다. 물론 금융투자상품이므로 가격변동에 따른 손실위험이 존재하지만, 노후자산을 안전자산으로만 구성하면 자산증식이 어려워 노후자산의 수명을 늘리기 어렵다. 다양한 인컴형 자산을 조합하면 은퇴 후에도 일정수준 현금흐름을 월급처럼 만들 수 있다. 투자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면 인컴형 자산에 분산투자하는 ‘인컴펀드’ 또는 ‘인컴 ETF’에 간접 투자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L: Let’s cut down debt, 부채를 줄이자
은퇴 이후 소득이 없거나 대폭 줄어들 상태를 감안하면 부채는 적을수록 좋은 자산관리 대상이다. 부채로 인한 대출이자는 매월 고정비용으로 은퇴 후 현금흐름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대출조건도 우호적이지 않다. 직업이 없는 은퇴자는 신용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인상된 금리를 적용하거나, 대출한도를 줄이거나 대출상환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은퇴 전 본인의 자산과 부채 규모, 대출 금리, 상환 기간 등을 점검하고 은퇴 전까지 부채를 어떻게 갚아 나갈지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출금리보다 높은 수익의 투자처가 있다면 일정부분 대출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출이자가 노후생활에 부담된다면, 투자보다 부채를 줄이는 게 우선임을 기억하자.
가을은 하늘에서 먼저 온다더니 며칠 전부터 부쩍 높고 푸르다. 바람도 제법 서늘하고 창밖 숲에 내리는 볕도 달라졌다. 어디든 내달리고 싶은 날씨다. 오후에 잠깐 인천에 다녀왔다. 오래전 살았던 곳이다. 인천을 갈 때는 늘 아는 이들이 살고 있는 이웃 마을 마실가는 듯한 기분이다. 내게 인천은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늘 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은 편안한 이웃 동네다.
이곳에 살았을 때만 해도 나는 한창 젊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빨빨거리며' 쏘다니던 때였다. 그렇게 인천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 한때를 보냈던 내 아이들도 마치 고향인 듯 생각한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로 떠나와서도 틈이 날 때마다 잠깐 다녀와야겠다 하면서 핸들을 돌리게 한 곳이다.
신포동 쪽에서 인성여고를 지나 전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홍예문이 있다. 이 터널을 지나 제물포고등학교 쪽으로 자동차가 빠져나갈 때마다 어린 두 아들은 굴속을 지나가는 기분이 드는지 “와, 터널이다” 하며 좋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아이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시절에 만들어진 홍예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다. 그래서 한자 무지개 ‘홍’ 자와 무지개 ‘예’ 자를 써서 홍예문, 또는 무지개 문이라 불렀다. 사실 일본인들은 구멍 ‘혈’ 자에 문 ‘문’ 자를 써 '혈문‘(穴門)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산허리를 잘라 구멍을 뚫었지만 인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 무지개문이라고 했고 지금껏 홍예문은 무지개문으로도 불린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이곳에 지름길을 만들기 위해 응봉산 마루턱이 무지막지하게 폭파당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했고, 중국의 유명 석수장이들까지 불렀다. 부족한 시공비용과 힘든 노동은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결국 우리 국민들의 피땀으로 3년 만에 홍예문이 만들어졌다. 화강암 석축으로 쌓은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석문(石門)은 112년 전 일본인들이 물자 소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광복 후엔 우리 시민들에게 유용한 공간이 되었다. 양옆으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젊은 연인들에게는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홍예문 석문 위로는 늘 영화 광고판이나 표어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학생들이 졸업 앨범 사진을 찍던 인기 포인트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낡아 오랜 시간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래도 인기는 여전해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활용되기도 하고 외부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홍예문 양옆으로 난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봤다. 담쟁이덩굴이 늘어진 화강암 석축에 세월의 더께가 묻어 있었다. 고즈넉한 언덕길을 걸어 석문 위로 올라서면 탁 트인 풍광이 펼쳐지고 멀리로는 인천항까지 보인다. 옆길은 자유공원과 송월동 벽화마을로 이어진다.
맞은편 계단을 이용해 내려오는데 몇 군데 예쁜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구조가 독특한 적산 가옥의 공정무역 찻집과 브런치 카페, 그리고 전통찻집의 독특한 외관이 멋지다. 그래서 이 부근이 홍예문 카페길이라 불리나보다. 담쟁이덩굴 담장 따라 이어지는 사계절의 운치 덕분에 제법 핫한 곳이다.
도심에서 이렇게 고풍스러운 멋과 함께 수수함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게 좋다. 고갯마루에는 비록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지만 각자의 추억을 안고 홍예문을 찾는 발걸음은 의미 있다. 이날은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온 동네가 숨죽인 듯 고요하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석문만은 그 자리에서 여전하다. 이럴 때 부쩍 조용해진 옛길을 호젓하게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누려본다.
◇홍예문(虹霓門):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20번지 외 4필지 / 인천 유형문화재 제49호
전원생활을 하면서 아파트와 같은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주거 단지. 심지어 다양한 생활편의시설과 인접해 있고, 서울로의 접근성까지 뛰어난 데다 가격까지 합리적이라면? 이 모든 걸 만족시키는 타운하우스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경기도 ‘용인 위드포레’를 방문했다.
그동안 부담스러운 금액 때문에 전원생활의 로망을 포기했던 시니어에게는 단연 희소식이 될 것이다. 경기도 용인 위드포레는 총 4만 ㎡ 대지의 4개 단지에 120세대가 주거하는 타운하우스다. 실사용 면적 109~125㎡의 8개 타입 주택이 있으며 분양가는 3억7000만~6억 원 수준이다.
용인 위드포레는 경전철 에버라인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시로의 접근성이 뛰어나다. 경전철 연장계획으로 신분당선, GTX, 인덕원선, 분당선 등 다양한 노선으로의 환승이 용이해질 전망이라, 앞으로 훨씬 더 편리하고 빠른 교통망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 자가용 이용 시에는 서울 양재까지 30분 정도 소요된다.
생활편의시설들은 대부분 차량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5분 거리에 에버랜드가 있어 손주들이 왔을 때 함께 놀러 갈 수 있다. 10분 거리에는 용인시청과 이마트, CGV 등이 있다. 또 인근에 까치봉 산책길이 있고, 경안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자전거도로와 운동시설도 마련돼 있다.
이제부터 엄선된 자재와 노하우가 집약된 타운하우스 ‘용인 위드포레’로 들어가 보자.
◇위드포레 견본주택 둘러보니
2~3층 구조인 용인 위드포레에는 집집마다 잔디마당이 있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서는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근처에서 텃밭을 가꿀 수도 있다. 은퇴 후 아늑한 자연 속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향긋한 나무 냄새가 기자를 맞이했다. 용인 위드포레는 목조주택이다. 이날 동행한 이민우 위드포레 팀장은 “일반 목재보다 강도와 내구성이 높은 굵은 편백나무를 버팀대로 사용했다”며 “외벽에는 항상 공기가 흐르는 환기층을 설치해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바닥재는 강마루 대신 강화마루를 사용했다. 새집증후군을 없애기 위해서다. 강마루를 깔려면 본드를 사용해야 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는 예민한 사람들은 건강 문제를 겪기도 한다는 것. 때문에 위드포레는 끼워 맞출 수 있는 강화마루를 선택했다. 먼저 기초 바닥 위에 콘크리트 독을 막아주는 비닐을 깔고, 접착제 없이 강화마루를 끼워 맞추는 식이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이 있다. 거실에서는 한쪽 벽면 전체가 커다란 창문으로 돼 있어 바깥 풍광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반대쪽은 주방이 보이는 구조다. 주방에서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싱크대가 눈길을 끈다. 시중에서 원목 싱크대를 구입하려면 가격이 상당할 텐데, 위드포레는 자체적으로 만들어 비용을 절감했다. 싱크대뿐만 아니라 수납장도 모두 원목으로 만들었다.
2층은 침실과 서재, 드레스룸, 화장실로 꾸며져 있다. 먼저 침실을 둘러봤다. 방에는 합지로 된 벽지를 사용했다. 보통 실크벽지를 바르는데, 목조주택에선 나무가 숨을 쉴 수 없어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2층 화장실은 가족용이라 1층과 달리 욕조가 설치됐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문이 두 개다. 한 곳은 드레스룸과 연결됐고, 다른 문은 서재 쪽을 향해 있다. 화장실로 가는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다. 서재는 필요에 따라 다른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3층에는 침실과 홈시어터룸, 화장실이 있다. 침실 구조는 2층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홈시어터룸은 임의로 꾸민 것이라고 했다. 침실이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집 안에 작은 영화관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은 1층과 같은 개인용이다. 1층에서 3층까지 오르는 계단에는 나무로 된 핸드레일이 설치돼 있다. 덕분에 고령자도 힘들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민우 팀장은 “그동안 도심 속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층간소음이나 협소한 주차공간 때문에 이웃 간 크고 작은 언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면 용인 위드포레는 이런 문제를 말끔히 해소해준다”고 말했다.
◇위드포레가 목조건물인 까닭
용인 위드포레가 목조주택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목조건물은 불과 바람에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화기에 강한 두꺼운 목재를 사용해 불이 내부로 미치는 것을 막아주고, 강풍으로 지붕이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서까래를 쿠라철물로 보강했다.
목조주택은 실내온도도 적절하게 맞춰준다. 습도가 높아지면 수분을 흡수하고 건조하면 수분을 방출하는 기능도 한다. 산림욕에서 얻을 수 있는 피톤치드 효과도 선물한다. 나무가 방출하는 특유 성분인 피톤치드는 심신을 정화하며 체내 면역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줘 숙면에도 좋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안심구조 시스템도 특징이다. 굵은 편백나무 버팀대를 사용해 내진성을 높였고, 중목구조로 건물을 지어 원목 인테리어 효과를 냈다. 중목구조는 두꺼운 원목을 사용하는 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데, 용인 위드포레는 대규모 단지라 대량 발주를 통해 단가를 낮췄다.
용인 위드포레는 도심 속 생활과 확연하게 다른, 전원생활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생활을 선물한다. 이와 함께 100년, 200년이 지나도, 그 이상 주택을 존속시킬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만드는 게 용인 위드포레가 추구하는 타운하우스의 가치다.
[Mini Interview] 조재원 위드포레 총괄분양본부장
◇중소형 평형대로 조성된 이유는
타운하우스는 원래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급 빌라로 공급됐다. 당시 여유 있는 은퇴자들이 선호하다 보니 대형 평형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합리적인 가격의 중소형 평형대가 인기를 끌고 있다. 환금성 부분에서도 긍정적이다. 중소형 평형대는 상대적으로 대형 평형대보다 매매가 쉽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단지 내에 관리실을 따로 뒀다는데
직접 마당의 잔디를 깎고, 수도 배관을 고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가장 큰 단점은 보안이다. 하지만 타운하우스가 업그레이드됐다. 관리실을 두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적지 않은 관리비가 문제였지만, 용인 위드포레 같은 대규모 단지는 세대당 내는 비용 부담을 덜 수 있다. 이곳 관리비는 한 달에 8만 원 정도다.
◇타운하우스는 보안에 취약하다는데
일반 타운하우스는 밤이 되면 모든 빛이 사라진다. 길에 가로등을 설치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용인 위드포레는 곳곳에 가로등과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입주자의 안전을 챙겼다. 이 역시 대규모 단지라 가능한 일. 이외에 외부인의 출입을 단속할 수 있는 차단기 시스템도 조만간 구축할 예정이다.
◇어르신들을 위한 시설이 있는지
용인 위드포레에 입주한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당도 운영할 계획이다. 단지가 넓기 때문에 경로당까지 걸어가기 어려운 어르신이 계실 것이다. 직접 자가용을 몰고 경로당에 가는 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셔틀버스는 경로당뿐만 아니라 인근 생활편의시설까지 운행한다.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책 산업에 종사했던 전문가들이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을 설계하며 자연스럽게 “책방이나 내볼까?” 했던 말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말이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우리 동네 책방들을 찾아 소개한다.
조은희.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해왔다. 출판사에서만 일해온 지 올해로 37년째. 그림책 독자는 오직 유아뿐이던 시절부터 그림책 전문 출판사에서 책을 펴냈다.
2000년대 초반이 되자 국내 그림책 시장은 크게 도약했다. 특히 어른을 위한 그림책 시장까지 성장하면서 그녀는 우리나라 대표 그림책 전문 출판사인 한솔수북 대표가 됐다.
그렇게 출판인으로서 전문성과 경력을 인정받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출판인의 삶을 살아오던 어느 날이었다. 말을 타고 전장에서 싸움을 지휘하는 장군처럼 쉴 틈 없이 달리며 바쁘게 지냈던 그녀는 불현듯 이 매력덩어리 책들과 씨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몰아치는 걸 느꼈다.
‘은퇴하면 직업인으로서는 더 이상 책을 접하지 못하는 건가?’ 조은희 씨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출판인으로서의 경력 최대 임계점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고민의 산물이 바로 조은이책이다. 은퇴를 하더라도 여전히 책과 함께하고 싶었던 그녀는 책방 주인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2017년 2년의 준비 끝에 마포구 성산동 다가구 주택 1층에 책방을 열었다.
마을 골목 입구 1층에 있는 책방을 찾아가봤다. 실내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전면 유리창이 먼저 눈에 띄었다.
개방감을 강조한 공간에는 알록달록한 그림책들과 캐릭터 인형들이 전시돼 있었다. 서점이 아니라 마치 예쁜 문구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책이 대형 쇼핑몰의 장식품이 되고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기 위한 핫 플레이스 장소가 되고 있지만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꿈을 길러주고 미적 감각을 키워주는 훌륭한 촉매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습니다. 1~2년 후 출판사 일을 그만둘 생각이에요. 은퇴 후 책방 운영에 전념하며 인생 2막을 펼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공간은 전시 코너
조은이책은 크게 2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다른 서점과 차별화되는 조은이책만의 섹션은 바로 그림책과 캐릭터 전시 공간이다. 작가와의 대화, 출간기념 사인회도 이 공간에서 열린다. 그림책 보러 왔다가 캐릭터 전시 공간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이 캐릭터들은 조은희 씨가 20년간 모은 그림책 주인공들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웅장한 캐슬이 되기도, 광활한 마을이 되기도 하는 다양한 입체 책들은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아동 교육용으로 많이 제작되고 있다. 제작기술이 얼마나 정교한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인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책과 캐릭터가 전시된 공간은 그림책 전문 편집을 수십 년 넘게 해온 책방지기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조은희 대표가 일본, 유럽, 미국 등 유명 그림책 북 페어에 갈 때마다 하나둘씩 구입해 모아온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개인 컬렉션 공간은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아가들’의 방인 셈이다.
“20년 넘게 모아온 캐릭터와 입체 책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집에서 저 혼자 감상하기에는 너무 아깝더라고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기고 감동을 받으면 기쁨이 두 배, 세 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컬렉션 전시 공간 겸 그림책 코너를 가장 넓게 배치했습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서점이 아닌 동네 책방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이곳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을까? 운영자의 취향과 감성이 듬뿍 담긴 사랑스런 공간이다.
뻔한 책 소개는 싫다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 꾸려지는 기획도 색다르다. 신예 작가들의 신간을 묶어 소개하는 코너 ‘우리 시대의 빛 젊은 작가들’과 코로나19로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독서 여행을 권하는 코너 ‘책방보다 더 재미있는 여행지는 없다’는 최근 기획했다. 조은희 씨는 책방지기의 안목과 아이디어에 따라 고객들의 눈길이 머무르는 시간이 다르다는 노하우를 슬쩍 귀띔해준다.
바깥쪽으로는 에세이와 문학서,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책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 코너 외에도 ‘두근두근 국내 소설’, ‘고양이, 그 매력의 끝은 없다’ 등의 카피 아래 국내 소설과 고양이와 관련한 단행본 및 그림책을 소개해 냥이 집사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동화 속 주인공이 나무 덩굴을 타고 지하세계로 떨어지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온갖 모험을 하게 되는 것처럼 조은이책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예기치 못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잠시 정신줄을 놓게 된다.
동네 책방 감성 살린 기획
출판사 일을 오래 해온 대표가 운영하는 책방이라서 그런지 작가와의 인연을 활용한 다양한 이벤트가 풍성한 것도 매력이다. 작가와의 대화는 물론 출간기념 북토크와 사인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있다. 전국 동네서점연합과 독립영화 창작자들을 잇는 독립영화 상영회도 개최한다.
얼마 전 상영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지난해 작고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작품이다. 동네서점연합과 함께한 이 이벤트는 고객들이 영화도 보고 대화도 나누면서 색다른 경험을 공유하도록 해 큰 호응을 얻었다.
조은희 대표가 꾸준히 운영하고 있는 글쓰기 클래스는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잘 녹여낸 프로그램이다. 그녀가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는 이유를 들어봤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오랫동안 책을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작은 공동체를 통해 공유와 나눔을 실천하고 싶었어요. 클래스 참가자들이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았다는 얘기를 하면 정말 기쁘더라고요.”
은퇴 후에도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노년층을 의미하는 액티브 시니어가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다.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액티브 시니어를 우리말로 바꿔 ‘활동적 장년’으로 선정했다. 런던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과정 수업 도중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100년 산다고 가정할 때, 소득의 약 10%를 저금하고, 최종 연봉의 50%를 가지고 은퇴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학생들은 곧바로 계산을 했다. 답은 80대였다. 일순간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80대까지 지금과 같은 업무 강도로 일해야 한다니….
런던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이 함께 쓴 ‘100세 인생- 저주가 아닌 선물’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수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교육-일-퇴직으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3단계 삶의 모습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앞으로는 은퇴와 정년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70세 혹은 80세까지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의 나이가 몇 살이든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시대를 선도적으로 살아가고 제2의 청춘을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처럼 다가오는 노년의 꿈을 계획하고, 노후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누구인가?
은퇴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100세 시대, 아무 준비 없이 은퇴하기엔 여생이 너무 길다. 은퇴 후 노후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면,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를 롤 모델로 추천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버니스 뉴가튼이 “오늘의 노인은 어제의 노인과 다르다”고 말하며 만들어낸 신조어다. 뉴가튼 교수는 55세 정년을 기점으로 75세까지를 젊은 노인(young old)으로 구분했다. 액티브 시니어들은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세대로 가족 중심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개발과 여가활동, 사회적 관계 맺기 등을 적극적으로 한다. 기존의 시니어가 노년을 인생의 황혼기로 인식했다면, 액티브 시니어는 노년기를 새로운 인생의 시작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5~10년 젊다고 생각하고, 진취적으로 삶을 사는 세대다.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액티브 시니어의 공통점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한지 알고 노년의 삶을 준비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삶에 대한 자기 기준이 명확하게 정립돼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길거리 화가가 된 60세 여성, 의상 공부가 하고 싶어 다시 대학을 간 80세 여성, 40세에 사진을 취미로 배워 10년 후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연 50세 남성, 자식을 다 키우고 60세에 요식업을 시작한 남성 등, 이들은 은퇴를 제2의 인생 시작점으로 설정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자녀 세대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통해 스스로 노후를 대비했다. 이들은 못다 이룬 꿈을 성취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꿈이 반드시 거창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면서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는 이들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액티브 시니어라 부른다.
시니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액티브 시니어들처럼 노후를 잘 준비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노후를 아직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지난 5월 ‘하나금융그룹 100년 행복연구센터’에서 발간한 보고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에 따르면, 퇴직자의 평균 생활비는 월 252만 원이다. 또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경제활동을 못하면 1년 내 형편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했다. 이분들께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현금 흐름을 유지할 것을 권유한다. 재취업이나 소자본 창업, 주택연금 등을 통해 소득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법도 있다. 아직 퇴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노후 준비를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다가오는 미래는 먹고만 사는 시대가 아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노후를 위해서는 소득, 취미, 일자리, 관계, 건강 등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 골고루 갖추어질수록 좋다. 자신만의 삶의 기준들을 정하고 장기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행복만큼이나 미래의 행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후 준비 Early Design, Self Planning!
고령화가 심각해질수록 사회적으로 노인 문제도 점점 커질 것이다. ‘100세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로 보면 주인공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작가이자 감독인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시니어 당신에게 무엇을 준비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한다면, 장수는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고 축복이다. 주체적으로 제2, 제3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노후 준비를 위한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 후원으로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주최하고 ㈜드림업컨설팅이 주관하는 ‘2020 해피에이징 교육캠페인’도 그중 하나다. 노후준비문화 확산을 위해 액티브 시니어를 주제로 진행 중인 ‘해피에이징 교육캠페인’은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올해로 6년째 진행하는 무상교육 프로그램이다. 사회공헌적 취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고령사회에 대비할 수 있도록 노후 준비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고령 사회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 스스로 노후를 대비해 ‘Early Design, Self Planning’하는 것이다. 노후 준비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당장 준비해야 늦지 않다. 당신도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