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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공감]韓·美·日의 웃음코드...유재석-오브라이언-아리요시의 공통점
- 개그맨 유재석이 연일 화제다. 한동안 주춤하다 싶더니 종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호사가들을 분주하게 만든 데 이어 가요제라는 형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공중파 방송사들이 자료 영상을 종편 채널에 제공 또는 판매하지 않는 것은 유재석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라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유재석이 대단한 능력자임은 익히 알았지만 거대 방송사들이 치졸한 복수극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줄은 미처 몰랐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일본에서는 아리요시 히로이키(有吉弘行)라는 코미디언이 득세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연수입이 5억 엔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10억 엔이 넘는다고 할 만큼 채널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개그 스타일은 유재석과 정반대다. 독설이 거침없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수갑을 찰 만한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의 코미디언이며 방송 진행자인 코넌 오브라이언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높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 출신으로 현상을 비트는 지적 유머가 장기로 알려져 있다. 유재석과 아리요시 히로이키,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 코미디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첫 번째는, 세 명 모두 한때 코미디언으로서 몹시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역경을 너끈히 뛰어넘었다. 유재석은 10년 넘게 무명이었다. 이따금씩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잡았을 때는 선천적 방송 ‘울렁증’ 때문에 더듬거리기만 하다가 속절없이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라는 옛날 프로그램에서 에피소드들을 과장을 섞어가며 재미나게 풀어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리요시 히로이키는 데뷔와 거의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여느 일본 코미디언들이 으레 그렇듯 데뷔 초창기에는 고생이 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루간세키(猿岩石)’라는 이름으로 코믹 듀오를 이루고는 1996년부터 히치하이크로 세계 여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때의 이야기를 쓴 책이 250만 부, 음반이 120만 매 판매됐다. 나중에 아리요시는 방송에 출연해 “믿거나 말거나 경제 효과 1조 엔”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지독한 내리막길이었다. 인기가 한 번 추락한 이후 7년 가깝게 섭외가 없었다. 아리요시는 “사루간세키 시절에 번 돈을 모두 까먹은 시점이 되고서야 슬슬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아리요시라는 똑똑한 코미디언은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았다. 나라별 다른 코미디 스타일 코넌 오브라이언은 뒤늦게 위기를 맞이했다. 출발은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 과 인기 애니메이션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다가 소질을 인정받고 방송 진행자로 데뷔한 이후,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하면 으레 떠오르는 늦은 밤의 토크 프로그램( )을 잇따라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키워준 방송사 NBC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또 다른 코미디언인 제이 레노의 프로그램을 신설하며 의 방송 시간대를 맡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NBC가 의 방송시각을 60년 만에 변경한 까닭은 단 하나, 시청률 때문이었다. 쇼를 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 오브라이언은 방송 하차를 결심했다. 계약 조건 때문에 한동안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은 쇼를 그만두고 방송 대신 전국 투어를 선택했다. 성공적일 것 같지 않던 코미디 여행은 결국 대성공을 거뒀다. 트위터 같은 SNS가 홍보에 큰 몫을 담당해준 덕분이었다. 현재 오브라이언은 케이블 방송사 TBS에서 를 진행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를 각각 대표하는 코미디언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 번째는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의 코미디 스타일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진짜 주제는 바로 이 세 번째 공통점에 관한 짧은 생각이다. 유재석은 점잖다. 코미디언이라면 한 번쯤 겪을 법한 스캔들을 단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미담만 가득하다. 최근에만 해도, MBC의 에 방영돼 화제가 된 일본의 우토로 마을에 10년 전부터 몰래 기부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방송 진행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동료 선·후배 코미디언들은 그가 “게스트들을 놀랍도록 배려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랫 세월 동안 ‘질 안 좋은 친구’처럼 코미디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던 주먹질이나 성적 비하 발언은, 그의 프로그램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여타 코미디언과 다르게 유재석은 우격다짐이나 욕설 한마디 없이 우리들을 웃긴다. 유재석은 보기 좋은 일만 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도 얼마든지 방송을 재미있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모범답안이다. 남자들에 관한 은밀한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낸 같은 프로그램이 실패한 것은, 유재석의 그런 이미지와 동떨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스튜디오 안에서의 얌전한 방송이 강호동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패널이나 방청객의 치부를 드러내는 방송은 유재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오랫 동안 인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마도 그가 만들어내는 ‘지저분하지 않은 웃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침없는 입담, 그러나 점잖다 일본인들은 딴판이다. 아리요시 히로이키가 그의 표현대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금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별명’이다. 동료 선·후배들에게 별명을 붙여주면서 인기가 급상승한 것이다. 코미디언이 지어낸 별명이 얌전해서야 인기를 끌기 어려울 터. 그의 입에서 작렬하는 별명은 상대의 얼굴이 벌게질 만큼 공격적이었고, 그래서 웃겼다. 심지어 아리요시는 일본 방송계의 원로 여성 진행자 구로야나기 데쓰코(黑柳徹子)에게 ‘똥할매’라는 놀라운 별명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40년 가까이 진행해온 전설적 진행자의 면전에서 원초적인 욕지거리를 퍼부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꼽을 잡는 가운데 80세가 넘는 할머니만 웃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송에서 대놓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 할머니는 다만 “별명이 아니라 그냥 욕일 뿐”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다시 스타덤에 오른 뒤 아리요시의 거침없는 입담은 더욱 불을 뿜었다. 함께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에게 통통하다는 이유로 “돼지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으며, 미모가 좀 떨어지는 아나운서에게 “얼굴은 못생겼는데 가슴은 크다”고 놀려댔다. 남자 연예들에게는 더 매서웠다. ‘쓰레기’ ‘똥’ ‘바보’ 같은 욕지거리가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 시청자들은 그를 사랑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코미디를 유심히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리요시는 무척 재미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폭언을 일삼지만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임무도 잊지 않는다. 폭언을 들은 상대는 그냥 웃고 만다. 스스로의 설명처럼 아리요시는 영리하게도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계와 우리의 그것은 판이하다. 아리요시가 일본에서의 잣대를 그대로 유지했다가는 우리나라 프로그램에서 입도 벙끗하지 못할 것이다. ‘구구이 비점이고 자자이 관주’라는 의 표현을 빌려 쓰면, 아리요시의 멘트는 ‘구구이 폭언이고 자자이 성희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웃긴다.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웃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본 시청자들은 ‘어쨌든 웃기면 된다’고, ‘웃기지 못하는 얌전한 코미디보다는 웃기는 욕지거리 코미디가 더 낫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를테면 웃음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랄까.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현상이 주제 코넌 오브라이언이 선사하는 웃음은 한국과 일본의 코미디와 성격이 좀 다르다. 그의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 현상이 주제다. 그것도 남녀 사이의 자잘한 연애나 동료 연예인들의 잡다한 경험담 따위가 아니라 제법 굵직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화제가 코미디의 소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의 코미디가 유재석이나 아리요시의 코미디보다 수준 높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지 않을까 싶다. 일상의 사소한 웃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코미디의 핵심인 풍자가 부족하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고, 신문 앞면에 날 법한 사회현상을 다룬다고 해서 풍자가 넘치리라 지레짐작하는 것도 성급하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와 관습으로 우리와 일본 사람들에게 풍자가 제법 부족하다는 것, 그에 비해 미국인들은 ‘지적인 피해의식이 있는지’ 의심될 만큼 풍자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이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트는 풍자에 재능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다트머스 대학 졸업식 연설은 그 진수라 할 만하다. 하버드 대학 출신인 오브라이언은 그 연설에서 자신의 지적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그러면서 웃음을 선사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유머의 최고봉이었다.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다. 그 웃음을 선물하는 작업은 대우받아 마땅하다. 유재석과 아리요시와 오브라이언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한미일의 웃음 코드는 세 코미디언의 차이점만큼 크게 벌어져 있지만, 모두가 웃음을 원한다는 사실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어떤 코미디가 더 수준 높은지 따지는 것은 나중 일이다.
- 2015-10-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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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되기]아내의 헌신과 의료진의 노력이 빚어낸 사랑
-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내 신정아(申貞娥·44) 씨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얻은 이경훈(李敬薰·48) 씨와 그를 살린 분당서울대병원 한호성(韓虎聲·56), 최영록(崔榮綠·40) 교수가 그들만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서, 그리고 여기 좋은 교수님들과 함께해서 전 복 받았죠. 제가 새 삶을 얻은 것은 모두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경훈씨에게서는 남다른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씨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따뜻했고, 부부를 바라보는 교수들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내의 간을 이식받은 남편, 이 부부의 새로운 삶에 동행하는 의료진은 한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통증, 그리고… 이경훈씨는 2011년 11월 신정아씨와 화촉을 올렸다. 마흔 넘어 결혼했지만, 그렇기에 남들보다 즐겁고 소중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씨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든 다 해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과로가 쌓이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위가 쓰린 날이 많아졌다. 동네 병원에서 위궤양을 판정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이 불던 일요일로 기억됩니다. 말로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결국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위궤양은 약 처방을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평소 앓던 B형 간염 증세가 악화되면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생겼더라고요. 그때부터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병원을 오가는 동안 그는 점점 지쳐갔다. 지난해 7월에는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야 했다. 그 이후, 다니는 병원을 포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정밀검사결과는 간암이었다. 다행히 색전술은 받았으나 간기능 저하로 인해 간이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대학병원에서는 간이식 수술을 할 만한 의료진이 없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판정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서 간이식을 받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내의 간을 받을지는 몰랐었죠.” 이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간이식 명의로 알려진 한호성 교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한 교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생각하고 2014년 가을 한 교수를 처음 만난다. 지난 3월 드디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사랑과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현재 이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통상 간이식 환자들은 면역억제제를 장기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 등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극복하고 있다. 의료진의 말을 잠시 빌리면,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관리가 되고 있어 약도 줄이고 있고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검사결과도 없다. 아마도 아내와 의료진에게 받은 사랑 덕택이 아닐까? 다만,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는 과정동안 직장을 잃게 돼 경제적인 부분이 어려운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제를 뛰어넘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도, 가장으로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엄마에게 신장, 남편에게 간을 준 여자 신정아씨는 가족을 위해 두 번 장기 기증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신장을, 남편에게는 간을 떼어준 특별한 사람이다. 신씨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고혈압과 갑상선 질환을 앓다가 유행성출혈열의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부전이 생겨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하게 됐다. 신씨는 어머니를 위해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 이식 수술 후 어머니와 신씨 모두 건강하게 지냈다. 이씨와 결혼도 하고 행복이 무르익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께 신장을 떼어준 지 8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남들과 다른 건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간을 떼어주는 일, 그걸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신장이식을 했기 때문에 간이식도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결국 적합판정을 받게 됐고,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주는 일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신씨는 남편도, 의료진도 만류했지만 간을 떼어주고 싶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시 깨 볶는 소리가 들리는 가정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현재 신씨는 퇴원 후 건강관리를 받으며 음식 조절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두 번이나 장기기증을 했지만, 남편의 사랑에 기운을 내고 있다. 그녀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두 번의 장기 이식 수술을 경험하며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어요. 장기이식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참 따뜻하고 믿음직한 의료진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참 따뜻한 선생님들이에요. 친절하다는 부분이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진짜로 생각을 해주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이 선생님들은 ‘환자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우린 많은 병원을 다녀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웃음)” 특히 이씨는 수술 전후 상황이 아주 편했다고 회상한다.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잘 될 거라고, 아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수술 후에도 그냥 숙면한 것처럼 일어났죠. 중환자실에 있어도 되는 건지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수술도 수술이지만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두려움도 사라졌죠.” 전문의 3명의 긴박한 협동작전 2015년 3월, 부부의 간이식 수술은 분당서울대병원 암센터 간이식팀 한호성 교수(암·뇌신경진료부원장)와 조재영, 최영록 교수가 맡았다. 이들 3명은 팀을 이뤄 수술을 진행했다. 보다 신속하고 정교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자 수술팀, 수혜자 수술팀으로 나눠 각각 진행하고 다시 협력하는 방식이다.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최영록 교수에게 당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 남은 과제가 뭔지 물어봤다. “이식 수술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이미 신씨는 어머니께 신장이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죠. 부부는 우리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수월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부부 모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흔치 않은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술이었어요. 앞으로도 부부가 더욱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의사는 항상 환자 중심으로 산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6월 2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잠정 의심환자에 대한 간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사실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집도한 한호성 교수는 이른바 ‘노력하는 명의’로 통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한 교수의 삶은 환자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듣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항상 책보다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로서 살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 제시된 것처럼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옳다’라는 판단 대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환자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에게 좋은 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본인의 의사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외과의로서 말씀드리자면, 작은 수술이나 큰 수술이나 합병증을 조심하셔야 되는데요.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리가 더 수월해집니다.”
- 2015-08-0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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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UR STORY] 도대체 제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 제주는 2009년까지 취업, 대학진학 등의 이유로 인구유출 현상이 심각했었다고. 그런데 2010년부터 인구 증가세로 전환되었다. 2010년에는 순유입자 수가 437명, 2011년 2342명, 2012년 4873명, 2013년 7824명 등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2014년에도 역시 제주 유입 인구는 고공행진 중이다. 일례로 서귀포시에서 주최하는 귀농 귀촌 교육의 경우 단 2시간 만에 마감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서귀포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주말반까지 만들었지만 수요에 비하면 부족한 반 편성이었다. 도대체 제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제주의 매력과 신비가 갑자기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벼락을 맞은 듯이 제주에 끌렸을까?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연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제주도 안에서도 이런 현상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시선 두 가지를 갖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2모작’을 꿈꾸는 이들이 제주로 몰려들면서 제주도에 귀농 귀촌 바람이 부는 것은 제주도의 1차 산업 부흥을 의미한다. 농어촌 사회에서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고 도시 이주자들이 몰고 오는 문화 이민의 바람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못 내리면서 일어나는 갈등도 있고 은퇴자금을 앞세워서 부동산을 사는 바람에 제주도 땅 값이 들썩이는 역효과도 일으키고 있다. #올레길 벤치에서 터져 나온 아내의 소원, “여보, 부탁이 있어.” ‘달파란’(게스트하우스 & 카페)은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에 있다. '파란달’보다 ‘달파란’이 느낌이 있지 않은가?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김태환(52)씨는 전직 국어 교사다. 지금은 교사직을 명예퇴직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는 2012년 12월에 오픈한 곳으로, 3층짜리 게스트하우스 과 별채 카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에게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특이한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위미리에 위치한 세천포구 바다를 봤을 때 그 느낌이 파란 달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고 설명한다. 게스트하우스 이름도 시적이고 제주 정착기 역시 운명처럼 시적으로 시작된다. “올레길 10코스를 걸으면서 송악산 중턱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참 좋다는 느낌을 갖고 한참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 -뭔데? -우리,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제주에 살고 싶어 “그 순간 제 입에서 너무 쉽게 그래. 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제가 살면서 몇 가지 잘한 일들이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잘한 일이에요.” 정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지 궁금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도 궁금했고. “처음엔 그저 먹고 사는 정도만 수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먹고 살면서 대학교 다니는 애들 등록금 댈 정도는 버는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앞으로의 꿈이요? 시간이 지나면 규모를 줄여서 제 개성에 맞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싶어요. 저만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선량하게 웃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보면 ‘제주의 마법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제주에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심지어는 대학생 자녀들을 서울에 두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그 것. 우리는 이것을 ‘제주홀릭’이라 부른다. “지금도 저처럼 중년 분들이 많이 여행하러 내려와요. 우리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분들 중에 진지하게 제주살이를 고민하는 분들도 많구요. 그분들에게 농담처럼 말해요. 올레길 자꾸 걷다 보면 저처럼 제주에 주저앉게 됩니다. 하구요.” #가수 장필순이 추천한 그 곳의 그 남자,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요리하는 남자’는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작은 요리 주점이다. 멋진 미소의 이영태(52) 씨는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생전 요리할 것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지만 의외로 요리하는 모습이 편안하게 잘 어울린다. 평소에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현재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평촌에 살다가 제주에 온 것은 2011년 2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부장 직까지 하고 나면 그 이후엔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숨막히는 일상생활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귀농을 꿈 꿨고 그렇게 귀농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단다. “꼭 그렇게 깡촌으로 가야 해? 촌도 있고 도시 같은 분위기도 있는 제주는 어때?” 친구가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제주에 집을 구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늦둥이 딸이 중학교 입학할 때, 서둘러 떠나왔고 시내권 중학교보다는 시골지역에 위치한 학교로 보냈다. 딸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했고 순박한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행복한 중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딸은 올해 제주외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온 가족이 제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래는 농사일을 해보려고 땅을 알아봤지만 희한하게도 지금의 가게 자리가 나왔을 때, 끌리듯이 그 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5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 속에 요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작은 가게잖아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죠. 만약에 돈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 딱 지금이 좋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요.” 그러면서 그는 어떤 요리를 파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초임 직장 시절에 일본에 파견근무를 나가서 5년 정도 있었는데, 그때 먹었었던 일본요리들을 제 손으로 만들어서 판매하곤 해요. 제가 맛있게 먹은 음식들은 흉내 내려고 노력하면 비슷한 맛이 나오더라구요.” 메뉴판에 있는 ‘간장새우’도 얼마 전 강남에 갔다가 맛있게 먹은 메뉴인데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바 로 만들어 봤단다. 반응이 썩 괜찮다며 씩 웃는 모습이 참 해맑게 느껴졌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가수 장필순씨가 자신이 자주 다니는 명소들을 하나씩 나열하면서 소개했는데 그곳에 요리하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물었더니 장필순씨가 처음 가게에 왔을 때는 장필순씨인지 몰랐다고 한다. 여러 명이 와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갔는데 얼마 뒤에 한사람이 찾아와서 -장필순씨, 안 왔어요? 하고 물었단다. -장필순씨가 여길 왜 와요?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난번에 같이 왔잖아요. 했다는 거다. 그때부터 장필순씨는 후배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고 4,5개월 전부터는 이효리씨 부부도 데리고 왔단다. 아마도 행복한 주인장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술이 잘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달파란’의 주인장 김태환씨,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장 이영태씨 모두 공통점은 예전 직장보다 지금 제주에서 하는 일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충고 또한 같다. 여행지에서 봤던 제주는 잊으라고. 바다를 감상하고 잔디를 다듬고 하는 로망은 일상생활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삶이 된다고. 조선시대 윤선도의 는 실제 어부들의 삶과 비교하면 얼마나 황당한가? 실제 어부의 삶은 관념 속 어부의 삶과는 다르다. 한없이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제주의 삶도 그렇다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 2014-11-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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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소비자 특성으로 알아본 대박집 황금레시피
- 한정식 주방장으로 수십년간 일하다가 퇴직한 나경제(가명·60)씨. 그는 최근 갈비탕을 주메뉴로 하는한식당을 창업하기로 마음 먹었다. 왕갈비탕 끓이는기술과 맛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씨. 호기로운 그의 음식점 생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창업 전문가들에 따르면 통계수치상 그의 3년간 생존 확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유가 더 의미심장하다. 갈비탕 맛은 뛰어날지 몰라도 마케팅 등 점포 경영은 젬병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그게 현실이란다. 하지만 지피지기면 100전 100승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면 시니어 창업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브라보 마이라이프가 발로 뛰었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 윤기식캔들 프랜차이즈 캔들나무 상무 등 실전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소비자 7대 특성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성공대처법을 제시한다. 1. 단골의식이 강하다 “적립금 아끼지 말고, 경품도 확실히 챙겨줘라” 한국 사람은 유난히 가던 곳만 가는 성향이 강하다. 먹는 식당부터 미용실까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정한 생활패턴을 선호한다는 의미다. 이런 단골의식을 파고 들어야 성공한다는 얘기다. 단골이 되면 다녀가는 횟수가 크게 늘어난다. 더욱이 친한 지인들에게 “내가 이 집 단골이야”라며 자랑삼아 얘기하기도 하고 손님을 끌어오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경품이벤트나 회원제(멤버십), 적립식 상품권 등이단골고객을 늘리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창업자들이 이를 아깝다(비용)고 생각한다는 것. 이렇다보니 혜택이 터무니없이 빈약하거나 적립률을 지나치게 낮게 책정해 효과를 반감시킨다는 얘기다. 심지어 고객을 위한 경품을 걸어 놓고도 편법을 통해 직원이나 지인들이 선물을 챙기도록 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테면, 직원이나 지인들의 응모권을 응모함에 대거 투입하는방식으로 당첨확률을 크게 높여 그들만의 이벤트가 되도록 한다는 것. 이른바 ‘기만 마케팅’이다. 실제 경기 남양주 퇴계원면의 한 대형 마트개점 이벤트에서 1등 당첨자가 서울 송파권에서 나오는 기이한 현상이나타난 것으로 전해졌다. 윤기식 상무는 “이벤트에 당첨된 고객의 이름을 매장에 공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2. 한번 삐치면 3년 간다 “불량 고객은 버려야… 3·4·3 법칙 필수” 주변 미용실에서도 이런 사례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원장과 안면도 있고 집도 가까워 A미용실만 고집하던 유숙경(가명·63)씨. 보통 퍼머나 커트만 하던 그녀가 큰맘 먹고 최근 염색을 했지만 원하는 컬러가 나오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됐다. 유씨가 원장에게 서비스 재염색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것.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느낀 그녀는 그 뒤로 동네방네에 이 사연을 떠들고 다녔다고. 고소득층인 VVIP들에선 이런 현상이 더 뚜렷하다. 시중은행PB(프라이빗 뱅커)들에 따르면 일부 VVIP들은 자신의 부나 성공을 과시하기 좋아한다. 특히 은행 PB센터에 들어서면 PB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의전은 물론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를 강요(?)하기도 한다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몰라보거나 취향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경우 역정을 낸다. 이럴 경우 자신의 자산 전부를 빼내 경쟁 PB센터로 옮겨버리는 등 복수(?)를 하기도 한다고. 소비자 불만은 모두 해결해줘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가 답이다. 3·4·3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고객도 A·B·C등급으로 등급별로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악성고객으로 분류되는 C등급(30%) 고객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실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들은 원래 대체적으로 까다롭다. ‘테이블이 지저분하다’, ‘김치가 중국산이다’, ‘술잔이 깨졌다’, ‘옆 테이블부터 주문을 받았다’ 등 갖가지 불만을 수시로 표출한다. 이를 모두 받아주기엔 한계가 있다. 이런 불만을 모두 들어주다보면 이런 손님들만 쫓아다니다 점포 콘셉트마저 흐려지고, 창업자 스스로 고객과 마음의 벽을 쌓게 되는 나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3. 시스템에 약하다 “나만의 영업전략에 고객 끌어들여야” 다른 말로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본다는 얘기도 된다. 예컨대 한국 사람들은 위반 시간대(카메라 단속)가 아닌데도 버스 전용차로에 잘 들어서지 않는다. 이유는 혹시나 단속에 걸릴까봐 선뜻 차로 변경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특성도 창업자는 눈여겨봐야 한다. 창업자가 손님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확고한 매장 콘셉트와 마인드로 승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서울 중랑구에서 고깃집(제주도 흑돼지 오겹살)을 창업한 박대출(가명·55)씨가 그런 예다. 그는 5년전 창업한 이후 우직스럽게 제주 오겹살만 팔고 있다. 고깃집에 흔한 냉면조차도 없다. 하지만 맛 하나는 기가 막혀 입소문을 타고 멀리 인천에서도 찾아올 정도다. 박씨는 오겹살만 팔아도 수익이 나는데 귀찮게 냉면까지 팔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말한다. 버릴 손님(냉면 손님)은 버려야 한다는 3·4·3법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는 부동산 중개업 창업자도 마찬가지다. 은행 지점장을 은퇴하고 3년 전 서울 송파구에서 K공인 중개소를 개업한 안민석(가명·65)씨가 그렇다. 법정 부동산 중개 수수료율은 0.2~0.9%. 하지만 안씨는 상품별로 중개하기 전 거래 고객과 수수료율을 미리 정해놓는다. 자신만의 영업전략과 콘셉트를 확실히 세워놓고 영업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4. 귀차니즘이 심하다 “일사천리서비스 제공 필수” 한마디로 매장에 제품 구색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팬시나 문구 등 판매업종에 해당한다. 한국 소비자들은 한곳에서 모든 서비스를 일사천리로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적지 않다. 편의점이나 택배 같은 원스톱 서비스가 인기를 끄는 게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귀차니즘 해소는 곧 돈(수익)으로 직결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우량 고객을 발굴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고객들의 불편을 없애주고 제품 구색력을 높여주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3·4·3법칙도 그대로 적용된다. 악성 고객인 C등급 손님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반대로 매장에서 수익을 올려주는 A(30%), B(40%)등급 고객들에게 마케팅이나 서비스 등을 집중 제공해야 한다는 얘기다. 5. 공짜를 좋아한다 “오픈빨을 유지하라” 누구나 알고 있는 소비자 특성이기도 하다. 다른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창업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제 막 개점해 오픈행사가 한창인 점포의 기(氣)가 가장 세다. 공짜나 무료 서비스 행사를 많이 진행하다보니 예비 고객들로부터 관심을 한몸에 받는 때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런 좋은 기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적절한 타깃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꽝 없는 복권 당첨 이벤트 등의 적극적이면서도 다양한 프로모션 마케팅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김봉팔(가명·50)씨가 여기에 가장 가깝다. 주당들이 모이는 홍대 인근에서 곱창집(주점)을 운영하는 그는 오후 6시 영업 개시 이후 가장 먼저 내방한 고객(선착순 3개 팀)에 대해 1인당 소주 1병을 무료로 준다. 계산시 술값에서 빼주는 것이다. 김씨는 “매일 개점할 무렵부터 손님들이 밀려든다. 소주값 무료 이벤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며 싱글벙글 했다. 6. 손님은 왕이다? “손님은 돈이다” 손님이 왕이 되면 창업자는 신하가 되는 셈이다. 상하관계가 생기는 것. 문제는 우리나라는 서비스를 비용으로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팁 문화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더욱이 대개 창업자는 손님을 왕으로 극진히 모셔도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렵다. 한국 소비자들은 불만표출이 강하고 항의도 잦기 때문. 이렇게 되면 창업자는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나름 열심히 서비스했으나 칭찬은커녕 제대로 인정조차 못받는 꼴이 되는 까닭이다. 이때부터 창업자는 고객들과 마음의 벽을 쌓게 되고 불만을 피하는 정도의 서비스만 제공하려는 못된(?)버릇이 생기게 된다는 분석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손님을 ‘왕’이 아닌 ‘돈’으로 보라고 권한다. 막말로 손님에게 칭찬 받자고 창업한 게 아니라 돈을벌기 위해 제2의 인생(창업)을 시작한 것 아닌가. 7. 나는 특별하다 “멤버십 적극활용” 한국 사람들이 명품에 목매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인의 특성을 파고든 마케팅 전략이 바로 멤버십 제도다. 이런 제도는 특히 VVIP마케팅에 많이 적용된다. 돈많은 슈퍼리치들이 자신들의 일상이나 주변 얘기를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나만을 위하거나 차별화된 서비스를 원한다. 실제로 서울 시내 한 특급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려면 1억원 이상의 거액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입한 이후엔 커뮤니티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멤버들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기회가 마련되고 그들만의 특화 서비스에 감동한다. 자신들의 일상을 다룬 사진전으로 나는 특별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유명 축구 선수 개인 축구 교실을 통해 차별화된 서비스를 누린다.
- 2014-11-1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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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찬의 골프이야기⑥] 즐겁게 플레이 하는 방법 "과감히 실수해라, 화내지 마라, 마구 웃어라"
- “언니, 어떻게 칠까?” 알면서 물어보는 장난기(氣) 많은 김농담 씨의 말이다. 캐디가 걸작이다. “아~네, 티 꽂고 치세요.” 캐디의 농담에 골퍼가 질 리가 없다. 한 두 번 장사한 것도 아니고. 바로 나가는 질문. “어디보고 치지?” 착한 캐디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냥 볼보고 치세요”한다. 동반자들이 난리다. “언니가 이해해 줘라. ‘100돌이’라서 그래.” 김 씨는 훤칠한 키에 힘이 장사다. 티샷을 했는데 ㅎㅎ 쪼로. 뒤땅을 쳐서 파인 잔디가 더 날아갔다. 동반자들은 웃음바다. 캐디가 더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걱정이 태산이다. “오늘은 이 손님을 어떻게 모시나?”하고. 두 번째 등장한 최장타 씨의 멘트가 신사다. "언니, 나는 캐디를 위해 골프를 하는 거야. 결코 나를 위해 골프를 하지 않지. 절대로” 어떤 의미일까. 캐디가 이 말을 들으면 그날 캐디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특히 첫 홀에서 티샷을 하기 전에 ‘이런 주문(呪文) 같은’ 말을 건네 보라. 아마도 그날 캐디는 기분이 짱이고 아군이 될 터. 이 친구는 ‘립싱크’를 제대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이버를 맛깔나게 갈겼다. “허걱~”. 300야드는 날아간 것 같다. 그것도 똑바로. 캐디가 ‘좋아라’ 하고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세 번째 등장한 이단타 씨는 말이 없다. 그런데 티샷 전에 ‘루틴’이 길다. 티를 꽂고 연습스윙을 다섯 번. 뒤로 가서 방향을 보고 나서 다시 연습스윙. 그리고 어드레스. 클럽 헤드를 볼 뒤의 잔디에 놓은 뒤 3분간 기도를 한다. 캐디는 “헐~”소리가 저절로 난다. 티샷은 그런대로 잘 갔다. 마지막 골퍼는 안조커 씨다. 동반자들에게 “언니 앞에서는 ‘질러’라는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캐디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질러는 노래방 기기 같은데. 다행이다. 캐디는 속뜻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는 것을. 그리고는 캐디에게 따귀를 맞은 이야기를 한다. 클럽마다 번호가 있다. 이 때문에 캐디는 골퍼에게 “몇 번 드릴까요?”하고 물어본다. 귀에 대고 “한번만 주지”했다가 캐디에게 혼났다. 자기를 뭘로 보냐며. 어라, 돌아온 답이 신기하다. “여러 번 달라면 몰라도.” 그냥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자 한 조크니 혹시 이글을 캐디가 본다면 오해가 없기를. 이렇게 해서 티샷을 마치고 4명의 전사들과 캐디는 라운드를 시작했다. 즐거운 일은 코스에서 늘 일어나게 마련. 결론부터 짓고 가자. 4명은 스코어가 고만 고만하다. 100타 안팎이다. 그래서 내기가 붙으면 재미가 있다. 티샷만 보면 최장타 씨가 유리하다. 그래서 티샷을 하고 나서 나머지 3명은 같은 생각을 한다. ‘핸디캡’을 받을 걸 그랬나. 여기서 핸디캡이란 조그만 내기를 할 때 타수 차이만큼 쩐(錢)을 줬다는 의미다. 하지만 세컨드 샷에 들어가면 핸디캡을 받지 않은 것 대해 전혀 후회가 없다. 속으로 “얼레, 핸디캡을 더 줄 걸 그랬나?” 하고 각자 속으로 낄낄 거리고 웃는다. 최장타 씨는 그린에 가까이 갈수록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친구는 그린을 앞두고 100미터쯤에서 아이언을 여러 번 끊어 친다. KTX 타고 가다가 도착지 부근에 도달하면 완행열차처렴. 이 친구뿐 아니다. 3명도 비슷하다. 깃대를 앞에 두고 마치 볼이 깃대를 거부하듯 피해 다닌다. 뒤땅을 쳐서 볼을 1야드 정도 보낸다. 그리고 핀과 거리를 20야드 남겨두고 홀로 들어갈 볼이 벙커에 처박힌다. 어느 때는 이것도 부담스러운지(?) 토핑으로 그린을 훌쩍 넘겨 버린다. 스탠스하기가 불편한 곳으로. 그것도 아니면 나무 뒤에 볼이 숨어 버린다. 캐디가 최장타 씨에게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린을 싫어하십니까?”“ㅠㅠ. 절대로 싫어할 이유가 없지. 마음대로 안 되서 그렇지.” 장타를 날려 페어웨이 한가운데 보내 놓고 그 다음 샷을 퍽퍽 거려 보라. 아마도 뚜껑이 열리리라. 그런데 이 4명의 골퍼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그래서 캐디들이 좋아한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겠지만. 이것이 골프의 재미다. 돈 좀 잃었다고, 샷이 좀 망가졌다고, 퍼트가 좀 안된다고, 뒤땅 좀 쳤다고 지구가 멸망하겠는가. 5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골프, 웃으면서 플레이해야 장수한다. 골프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인 이유다. 글 안성찬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 2014-09-04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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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혜의 제주 문화 이야기①] 육지엔 없는 전통문화 BIG3
- 제주는 분명 대한민국이지만 "같은 나라 맞아?" 할 만큼 뭔가 다른 특별한 문화가 많이 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독자적인 나라(탐라국)로 지내왔고 중앙정부 손길이 잘 닿지 못한 지역인데다가 섬 문화가 만들어낸 생태문화가 결합된 데 따른 것이다. 집을 수리하고 이사하는 구간 ‘신구간’ “언니, 신구간이 아니라서 집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제주 이주를 준비하는 후배가 나에게 전화해서 물어본 말이다. ‘신구간’ 뿐 아니라 ‘연세’라는 개념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어리둥절한 말이다. 나 또한 탤런트 ‘신구’는 들어봤어도 ‘신구간’은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또 ‘전세대란’이란 말은 제주에는 없다. 전세 자체가 거의 없으니까. 신구간은 대한(大寒)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에만 집을 수리하고 이사하는 구간이다. 약 7일 정도다. 땅에 내려와 있던 신들이 잠시 하늘나라에 올라가 있는 교체기간을 뜻하는 신구간. 이 기간에는 지상에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이 두려워서 못했던 일들을 해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믿었다. 천상천하를 관장하는 신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모이기로 할 때 소별왕이 대한 후 닷새부터 입춘 전 사흘까지 약 일곱 날 동안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다. 이 시기는 농한기이고 1년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다. 제주 신화에는 이렇게 '신구간'의 유래가 소개되고 있다. 신구간이 되면 이사 관련 업계 뿐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가전 업계에서도 덩달아 매출이 오른다. 아마도 신구간 기간 세일을 하는 건 제주도에서만 벌어지는 일일 것 같다. 신구간에 이사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까 제주도는 이 기간에 쓰레기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2014년 제주시의 경우 신구간 기간에 하루 쓰레기 발생량이 평소 526t보다 40t정도 더 증가했고 청소차 운행횟수를 하루 1.5회에서 3회로 늘렸다.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광대역 LTE급 세상에 이 무슨 근거 없는 풍속인가 싶지만, 제주의 기후와 문화를 이해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구간은 제주에서 일 년 중 일평균기온이 5도 밑으로 내려가는 거의 유일한 기간이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늘 세균 감염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사람들에게 신구간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었다. 민간신앙-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영이 깃들어 있다 제주에는 1만8000여 신이 있고 400여개 신당이 남아 있어서 '신화의 섬'으로 불린다는 걸 들어 봤을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제주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연고가 있는 '고향'이라 부르지 않고 내 탯줄이 있는 땅이란 뜻의 '본향'이라 부른다더라. 태어날 때부터 탯줄을 태우면서 기도를 했던 그 땅. 본향이다. 그래서 마을마다 본향당이 있다. 와흘 본향당에는 수령이 400년 넘은 폭낭(팽나무)이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무 줄기마다 걸려있는 소지와 염색 천들. 나약한 인간들은 이렇게라도 신령스러운 나무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다. 직장 동료분 말씀이 ‘넋들이’러 가야 한다는 거였다. 제주에는 아직도 일상 생활에서 사고가 났을 때 넋들이는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한 마디로 놀란 넋(혼)을 달래주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적 존재를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은 제주의 풍습 중 하나로 깊이 자리하고 있다. 방사탑은 도로 중간에도 있고 마을과 마을 경계선에도 있다. 탑을 쌓아 올릴 때는 밥주걱이나 무쇠솥을 넣기도 했는데 밥주걱은 밥을 긁듯이 외부의 재물을 모아 달라는 의미고 솥은 불에도 끄덕없이 이겨내니 솥처럼 마을의 재난을 막아 달라는 의미이다. 칠성신은 곡물을 수호하고 풍요를 가져다 주는 뱀신이다. 제주에서는 특히 뱀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제주에 워낙 뱀이 많기도 하거니와 식량이 부족한 섬에서 뱀은 쥐를 잡아주는 아주 유용한 동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철저한 분가제도-안거리 밖거리 제주는 육지와 달리 예로부터 자식이 결혼하면 분가를 원칙으로 했다. 부모와 자식은 취사를 따로 할 뿐만 아니라 경지를 분할하여 독자적으로 생산했다. 말 그대로 한 집안에 살지만 독립된 생활을 했다. 제주도 주택은 ㄷ자 구조나 ㅁ자 구조로, 주 생활 공간을 안거리 밖거리 2채를 짓는다. 한 집이지만 2세대가 살 수 있도록 각 채에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2세대가 한 집에서 살 때 부모님이 작은 집(밖거리)을 쓰고 자식들 가족이 큰 집(안거리)을 사용한다. 식구들이 많은 집이 큰 집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육지의 시선으로 보면, 한 집에 살면서도 안거리 밖거리에서 각각 따로 밥을 해먹는 것이 야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밭일과 물질로 바빴던 제주의 여성들은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하는 것이 오히려 비능률적이었다. 각자 챙겨서 얼른 밥을 먹고 일하러 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80이 넘은 노모도 혼자 밥 지어서 혼자 밥 먹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 동네 이장님댁 어멍(어머니)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떵 안 햄져”(혼자 먹어도 괜찮다는 뜻이다) “지금은 덜하지만 2010년까지 신구간 기간에 이사를 하려면 평소 요금의 2배에서 4배를 요구하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연세라는 임대 방식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죠. 어차피 다른 달에는 이사를 하려 해도 집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요”(고진석 상무이사, 제주희망협동조합)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제주 사람들의 믿음은 여러 책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생태 중심적 사고이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제주에 이주해 살면서 여러 번 느꼈는데, 여기 분들은 웬만하면 뱀도 죽이지 않고 거미도 죽이지 않으려 한다. 그냥 자연에 있는 것들은 자연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 해산물도 필요한 만큼만 채취했다고 한다. 절대 욕심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사는 삶. 그것이 제주인의 삶이다. 이런 분가제도는 부모자식 간에 독립적인 삶이 강조되어서 결혼한 자식들은 철저하게 자립을 해야 했고 부모 역시 완전히 몸져눕지 않는 이상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또 분가제도로 인해 부부 간에도 어느 정도 독립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여자들끼리 계가 따로 있고, 경조사에서도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각각 따로 겹부조를 하는 특이한 상조문화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상갓집에 갔을 때, 그 집 큰 아들과 큰 며느리를 알고 있으면 큰 아들과 큰 며느리에게 각각 부조를 해야 한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제주도 경조사 풍습이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 뿌리에는 제주의 분가제도가 있음을 알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알고 보면 배울 점이 많은 합리적인 문화가 많다. 육지엔 없고 제주에만 있는, 독특한 것들이 아주 많다. 김선혜 객원기자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국어교사 -'랑이야 제주에서 학교가자'(대숲바람) 저자 -http://blog.naver.com/nana8897 운영중
- 2014-08-31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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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기자 리포트] 각자 형편을 고려한 맞춤형 설계가 필요한데… '노후설계 강의 유감'-정운관 기자
- 노후설계 전문가가 되기 위해 관련 강의나 교육을 열심히 받고 있는 중이다. 이번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인생2막 노후설계 교육에도 월요일부터 참석하고 있다. 다들 화려했던 과거 경력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생2막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하는 반성과 ‘앞으로는 나도 무언가 보람된 일을 준비해야지’ 라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날도 어떤 강사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사실 그 강사의 강의를 3-4회나 들은 나로서는 그분이 몇 년 전에 했던 강의 내용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되풀이되는데 대해 적지 않게 실망하고 있는 터였다. 이미 전문가 양성과정이라는 타이틀로 보면 이제 새삼스레 노후준비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이유가 없어 보였으나 그분은 아마도 다른 곳에서 막 퇴직하려는 그야말로 은퇴 초보자 용 강의 교안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내용을 또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옛날 어린 시절 볼거리가 귀한 때에 읍내에 들어와서 풍악을 울리고 노래도 불러가면서 이상한 약을 파는 약장수 일행을 보던 기억이 되살아나 다소 씁쓸했다. “사람의 몸에는 이러저러한 질병이 많고 그러한 병을 방치하면 나중에 막대한 치료비가 드는데 이 약 한 병 이면 만병이 치료가 된다 “ 는 식이었다. 굳이 이런 비유를 하는 사연은 이렇다. 그들의 공통된 시나리오를 보면 제1가정 : 대한민국에 평균수명은 과거 흐름을 볼 때 매 2년마다 1년이 연장되어가고 있고 이런 추세로 가면 불과 1-20년 내에 평균 수명이 90세를 초과하게 되어 대부분 큰 병에 걸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100세를 살게 된다. 제2가정 : 출산율이 저조하여 우리나라 생산 가능 인구 비중이 급격히 떨어져서 향후에는 젊은 세대가 급증하는 노인세대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 제3가정 : 베이비 부머들은 현금자산은 별로 없고 집 한채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전 재산이다. 이는 자식들 부양하기 위해 모든 소득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후속 매수를 해 주어야 할 젊은이들이 소득수준이 높지 않고 인구도 적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 상승은 어려울 것이고 여기에서 자산 소득 창출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제4가정 : 국민연금 받는 수준은 50만~100만원 수준에 불과하고 서울에서 중산층으로 살기 위해서는 월 평균 200만~300만원 이상의 소득이 필요한데 이에 비해 연금 만 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자, 여러분이라면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어떻게 될 것인가? 대부분의 가정들은 개별적으로 보면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 어느 것도 가정이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노후설계 강사들이 하고자 하는 의도는 명확해진다. 이 약을 사지 않으면 여러분은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되니 이 약을 사라. 이 약은 바로 일자리이다. 처음 몇 번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 나도 무언가 일자리를 차아야 겠다’ 는 긍적적 메시지가 전달되고 좋은 자극제도 되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가끔 무엇인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든다. ‘아니 이렇게도 노후대책이 열악한데도 평균수명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가정은 과연 현실적인가?’ ‘수명증가와 함께 생활비는 그렇다 하더라도 의료비 증가는 매우 클텐데 그 비용은 서민층들이 어떻게 감당하지?’ 등의 의문이 꼬리를 문다. 가락시장역에서 약 300여명 가량 상담을 해본 결과, 사람들이 처한 경제 사정이나, 자산구조 가족 사태 등이 천차만별인데 이를 고려치 않고 평균 수치를 중심으로만 고려한 것과 ‘과거에 이러 했으니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등 몇 가지 가정은 향후 한국 경제가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따라 부분 수정이 되어야 할 것이라 본다. 예컨대 한국경제가 잘 성장하여 국민소득이 4만불을 돌파할 때의 경우와 2만불 대에서 계속 정체할 때의 경제사정은 크게 다를 것이고, 따라서 의료비 및 복지비 등도 예산 제약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니 평균 수명도 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종속변수로 봄이 타당한 가정이 아닐까? 즉, 지금까지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온 것은 과거 세계에서 유례없는 지속 성장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우리보다 평균수명이 약 20세 아래인 북한을 보면 이는 자명한 이치이다. 따라서 상호 연관관계가 있는 각종 변수들을 독립변수로 놓고 베이비 부머들에게 지나치게 겁을 주는 교육은 부작용을 수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교육을 받고 열심히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도 많겠지만 심리적 압박을 받아 행복한 노후 설계가 아니라 우울한 노후 걱정을 유발 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아도 높은 노인 자살율을 더 높일 우려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나친 비관주의를 따른다면 평균수명이 과거와 같이 지속 증가한다는 논리는 수정해야 마땅하고 평균수명이 지속 증가할 것이라는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려면 우리 한국경제도 지속 성장하고 복지비도 증가할 것이라는 비젼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전문가들이 해야 할 몫일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예는 들 줄 알면서 그 나라 국민소득이 얼마인지는 생각하지 않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산업은행 -한주통산 이사 -세종공업 상무(슬로바키아 사장)
- 2014-06-0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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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기자 리포트]세월호 선장 이준석 vs 청년 이준석-정운관 기자
- 흔히들 100세 시대라 하고 어떤 분은 120세를 살 준비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노인 연령 증가는 통계적 데이터로 입증 되고 있으니 그 추세를 무조건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액티브 시니어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적지 않은 베이비부머들에게서 우리는 작은 희망을 기대한다. 필자도 그런 액티브란 단어에 이끌려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액티브 시니어 과정에 등록하여 훌륭한 교수들과 선배들의 강의에 젊은 때 학창시절 못지 않게 공부하고 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태가 터졌다. 하필 “개똥 밭에 떨어져도 이승이 낫다” 는 어느 강사의 강의를 들은 이틀 후이다. 뉴스 하나하나가 너무나 슬퍼해야 하고 분노해야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과 갈등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왜 이런 사고를 주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가. 우린 왜 그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저 후진적 사고와 행동 습관을 바꿀 수 있는가? ‘100세 시대를 대비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미래를 살아가는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나의 생각은 “저 20세도 못살고 가는 어린 영령들에게 어쩐지 미안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22살짜리 여직원은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을 먼저 살리려 노력하다가 본인은 꽂다운 젊음을 펴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으나 69세 선장을 비롯한 어른들은 자신들만 살겠다고 허둥지둥 배를 빠져 나오는 모습은 도저히 눈뜨고 보기 어렵다. 자식을 키우고 이제는 어린 손자들을 안고서 무언가 세상을 오래 살면서 터득한 좋은 경험과 교훈을 그들에게 잘 가르치고 전달해서 우리 자식들이 훌륭한 이 나라의 국민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응당한 바람일 것이다. 세상을 조금 아는 30대 자식들에게는 무어라고 설명하고, TV뉴스를 보고 사망자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무심코 세고 있는 손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너희는 저 선장처럼 절대로 비겁하게 살지 말고 저 여직원처럼 살아야한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혹은 귓속말로 “그래도 너희만은 얼른 빠져나와서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이야” 라고 충고해주어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나도 차마 어느 쪽이라 말하기 어렵다. “저 선장 나쁜 놈이야” 라고 공분하는 것은 백번 이해가 가고 또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진짜 침몰해 가는 배안에서 그런 얘기를 해야만 그 얘기가 더욱 진실할 것이다. 과연 2014년도를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디에 있는지 말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팬티바람으로 배를 탈출한 이준석 선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논점은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한국인 가운데 ‘극히 예외적인 인물인지 혹은 적어도 평균 수준에 가까운지’ 로 법위를 좁혀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고 그것은 누구에게도 손쉽게 책임을 지우는 매우 간단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문제를 바꾸어 ‘내가 만일 선장이었다면 어떡했을까’ 로 화제를 바꾸면 어떤 답이 나올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아는 거의 모든 다른 한국인들도 그렇지 않을 거야”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사회 일각에서 세월호 사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의 그러한 비겁함에 일견 분노하면서도 ‘나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는 인식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필자는 또 다른 이준석에 주목하고자 한다. 바로 새누리당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던 청년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그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동안 알려진 이미지로 볼 때 그는 적어도 선장 이준석 처럼 홀로 탈출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22살 젊은 처녀의 몸으로 꽃다운 인생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을 먼저 구조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고 박지영 의사자를 적어도 청년 이준석도 그러했을 것이라 믿고 쉽기 때문이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100세 시대를 외치고 있는 필자를 비롯한 많은 시니어 세대들이 부끄러워해야 하고 한편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청년 이준석이 선장 이준석 나이가 되더라도 청년 이준석의 정신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될 것이고 그도 똑같이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시니어 이준석으로 늙는다면 우리 민족은 더 이상 동아시아를 리더할 힘을 잃고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할 지도 모르겠다. 부디 잘 성장해주세요, 청년 이준석님! △56년생 △한국산업은행 △한주통산 이사 △세종공업 상무(슬로바키아 사장)
- 2014-05-2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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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정착 성공사례(10)] “부지런해야 살 수 있기에 시골은 행복한 곳이죠”
- 지리산이 좋아 귀농을 마음먹은 젊은 부부. 어렵게 마련한 생활 터전이 산사태에 쓸려 나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서 얻게 된 새로운 행복. 해야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아서 행복하다. ◇지리산 여름휴가 왔다가 마음먹게 된 귀농 2012년 9월 17일 새벽3시, ‘뚜뚜, 뚜뚜, 뚜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어…. 아직도 비가 오네?” 부스스 일어나 어두운 작업장에 불을 켠 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시작하려는 순간. 왜일까? 오늘따라 얼굴과 몸 주위로 정전기가 일듯 기분 나쁜 전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내 몸을 맴도는 정전기들을 날리고서 제빵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계량을 하고, 반죽기를 돌리고, 1차 발효…. 성형을 한 후, 다시금 2차 발효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후, 커피를 준비한다. 요 며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이순간이 저녁인지, 아니 새벽이던가? 가끔 헷갈릴 정도다. 뭐 어찌됐던, 지리산에서 느끼는,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2011년 4월 남편과 지리산으로 휴가를 왔다가 휴양림에 텐트를 치고 2박3일 야영을 하며, 둘레길을 돌았다. “와, 이런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이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 3개월간 산청, 하동, 유림, 함양, 남원, 산내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모든 조건이 적당히 들어맞는 빈집을 찾아 나섰고, 우연한 인연으로 ‘동네 대소사는 나를 통해 움직인다’라며 스스로를 ‘할매이장’이라고 칭하시던 할머니 한분을 뵙게 되었다. 그분이 소개해준 허허벌판 그리고 싸리나무밭. “아뇨, 할머니 저런 벌판 말고, 기왕이면 빈집에 조그마한 마당도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런 곳 없을까요? 순간, 화색이 만연한 할머니에 미소를 보았다. “오호라, 그런데~ 있어, 있어. 난 또 집 짓는 줄 알았지. 이리와 봐, 여기” 이렇게 소개받은 이곳. 흡사 폐가를 연상시키는 첫인상에 과연 이집을 고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빈집 수리는 10여개월여의 공사기간 동안 1주일에 3일씩 공을 들였다. 직장 생활을 병행하면서 왕복 4시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열정을 쏟았다. 먼저, 쥐가 뛰어다니던 천장을 빠루(지렛대)와 삽으로 뜯어내고, 콘크리트 드릴로 벽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벽 하나를 허물어냈다. 고무대야와 삽만으로 시멘트 50포를 반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열 겹짜리 벽지를 떼어내고, 스크레퍼로 벽면을 고른 후 얼룩진 벽에 퍼티를 발랐다. 파벽으로 포인트도 주고, 자꾸만 떨어지는 천장지를 붙잡으려 겹치는 부분마다 얇은 몰딩을 대어주니 마치 일본 다다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사에 연속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낼 곳도, 피곤한 몸뚱이를 잠시나마 누울 한 평 공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추억이 된다더니,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고 2012년 2월 10일 완전 전입과 함께 ‘경축, 귀농생활’을 시작한지도 6개월이 지났다. ◇산사태로 쓸려간 보금자리 보고 ‘헛웃음만’ 2012년 9월 17일 오전 7시. 빵 굽기 완료. 남편이 빵 배달을 간다. 우산을 쓰고, 한손엔 빵 바구니를 들었다.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측은해 보인다. 여전히 몸 전체에 정전기가 맴돌고 있다. “왜 이러지?” 아마도 비 때문일 거야 하고 넘겼다. 이후 시간이 지나 오후 12시 10분.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들어가기가 싫다. 계속 졸리고 춥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거실에서 인터넷 서핑 중인 남편 옆에 누웠다.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하는데, 오늘따라 물소리가 참 크다. ‘안방에 들어가서 잘까?’ 생각하는 순간 “우르릉 쾅…….와지직 우당탕, 쿵쿵. 와장창.” 일순간 유리파편이 얼굴로 날아들고, 차가운 빗물이 머리위로 쏟아졌다. 그랬다 바위가 벽을 치고 거실 안까지 들어왔다. 아니다. 이미 우리 집 창고와 안방, 화장실은 쓸려가고 없었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벽과 지붕도 없어졌다. 우리가 누워있던 거실 빼곤 모든 곳이 산에서 흘러내린 바위, 나무와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1초, 2초, 3초…. 흙탕물이 밀려들어온다. 이건분명 현실이다. 거실 창문으로 간신히 빠져나오는 그 순간에 느낀 공포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집 앞 도로는 이미 계곡으로 변해있었고, 산에 박혀있던 중대형 사이즈의 바위들이 도로를 점령했으며, 우리 집은 앞 틀만 남고 옆과 뒤쪽은 모두 쓸려간 후였다. 떨리는 손을 꼭 잡고, 남편과 몸만 빠져나왔다. 그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살았다. 남편과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집 뒷산의 자랑이었던 30년 된 호두나무와 밤나무가 시뻘건 흙탕물에 엉켜 있었다. 눈물은 커녕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게 밀려들었다. “거의 1년을 고치고, 딱 6개월 살았는데…….” “화목보일러에(기름겸용) 기름 200리터 채워놨는데…….” 현실을 무시한 바보 같은 미련들만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산사태가 나고 2시간 정도 지나니 비가 그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분들 모두 우리 집 앞에 모여 걱정이 많으시다. “어떻게 저산에서 산사태가 나지?” “산사태가 날 산이 아닌데….” “사람 몸 안 상한 게 어디냐, 젊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하시며 모두 응원에 말씀을 해주신다. 그래, 생각하면 할수록 당혹스러우나 그래 젊지 않은가! “역시 이래서 귀농할 거면 젊을 때 해야 해!! 그치?” “응, 응, 그러네요.….” 처음 빈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 소개받았던 그 허허벌판 땅에 재해협회(수재민 구호단체)에서 빌린 임시주택과 작은 컨테이너에서 2012년 9월 17일 낮 12시 10분, 3번째 태풍 ‘산바’로 인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산사태 1주일 후 제빵용 오븐과 소모품을 다시 사 모았고, 전기도 물도 없는 곳에서 50여 일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수도가 들어왔다. 두달 후 전기가 들어오면서, 2012년 겨울 컨테이너에서 다시 빵을 굽기 시작했다. 한겨울 밖과 안에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그 서늘한 공간에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가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빵을 만들었다. 한 달 수입 단돈 3만1000원. “이런 시골에서 빵집이라니 그것도 우리 밀빵?” “유기농 설탕? 100% 우유버터는 뭐야? 뭐가 다른데?” “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먹어보면 차이도 모르겠는데 비싸기만 하고 에이, 장사가 되겠어?” 처음 빵집을 하겠다고 하니 모든 귀농인과 주민들에게 우려에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역시나 쉬운 일도 없고 세상에 공짜도 없었다. ◇단조롭지 않고 할 일 많아서 즐거운 인생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죽을 하고 빵을 굽고 포장까지 하려면 6∼7시간이 걸린다. 시장 빵과 프렌차이즈 빵집과의 차별화를 위해 매일 반죽을 하고 굽고, 정확한 시간에 배달했다. 그렇게 3개월쯤이 지나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반품이 줄어들었다. 비록 10평 남짓한 작은 북카페이고, 1억5000만원이 넘는 빛을 안고, 매달 내야하는 이자에 허덕이며 살지라도 우린 힘들지 않았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허무한 요행과 단조로운 일상보다는 매일매일 새로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이런 현실을 즐길 수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린 웃을 수 있었다. 산사태가 나기 전, 운영하고 있던 북카페. 그곳에 들렸던 대다수에 손님들은 자신들도 귀농을 꿈꾼다 했다. 하지만 막연히 시골생활은 평화롭고 안락하리라는 동경 속에서 환상과 헛된 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련 속에서 견뎌낼 수 있을 지부터 상상해 보라고, 우선 온갖 벌레(지네, 나방, 거미, 개미 등)들과 집안에서 함께 생활 할 수 있는지, 한여름 뙤약볕에 썬크림 없이 서있을 수는 있을까? 그로인해 주근깨와 얇아진 표피층에 자외선이 닿아 검은 점들을 만든다면? 내가 산사태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 그 상황 안에서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친다면 귀농생활 성공확률 50%이다. 남은 50%는 근면, 성실함 등이 채워줄 것이다. 시골은 부지런해야 살 수 있고, 부지런하면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고, 할 일이 끊이지 않으며, 내 땅이 없다 해도 서글프지 않다. 이른 봄. 눈 녹기가 무섭게 산을 오르면서 산나물(다래순, 취나물, 곰취 등)을 뜯어 발효액도 만들고, 고로쇠 수액도 받는다. 여름엔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농사일로 바빠진다. 낮엔 더위를 피해 계곡에서 다슬기도 따고,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가을엔 호두, 밤, 감 등을 따고, 곶감, 고추도 말리고, 버섯, 오미자, 산머루 등 여러 약초들을 캐러 다니며, 그것으로 수입을 창출한다. 겨울엔 겨우살이 채취 또는 메주, 된장, 고추장, 김장김치(절임배추)를 담아 판매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귀농에 있어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자연과의 동화인 듯싶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확실히 부족하나 풀, 벌레, 새, 나무 등 자체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또 즐긴다면 시골살이가 단지 고단함과 무료함의 연속이진 않을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서울, 창원(주말부부) ·귀농 전 직업: 직장생활 ·귀농 결심동기: 시골생활에 대한 꿈 ·귀농 선택작목: 지역 특산품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 시 나이: 39세 ·귀농지 선택사유: 지리산을 좋아해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2억 2000여만원 ·현재 영농규모 : 고사리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유기농 빵 판매로 연간 2500만원 정도) ·향후 계획: 다양한 많은 일들을 도전하고 싶다
- 2014-05-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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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리 찾기2부-일자리가 최고의 복지]②실버도슨트를 아시나요?
- ‘고령자 고용 확산을 위한 서울시 어르신 적합 직종 연구’ 지난해 5월 서울시가 발표한 연구 보고서다. 기존의 어르신 일자리 연구와 정책으로는 변화한 고령자들의 특성과 욕구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새로운 고령자 적합 일자리 개발에 뛰어든 결과물이다. 여기에 현장 전문가와 일에 종사하고 있는 고령자 인터뷰를 거쳐 최종 76개의 직종을 개발ㆍ제안했다.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라는 슬로건에서 비롯된 정책 연구였던 것이다. 분야에 따른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하면 구직자들은 자신들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있다. 서울시에서 제안한 일자리는 조리사나 주방 보조원과 같은 음식 서비스 분야부터 동화구연사와 문화재 해설가, 복지주거환경코디네이터에 이르기까지 그 분야도 천차만별이다. 이 중에서도 예술 문화 분야의 한 일자리를 꿰차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벌인 직종이 있다. 바로 도슨트(Docent)라는 일자리다. # 미술관의 소금, 도슨트(Docent) 도슨트.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직업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관람객들에게 작품에 대해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미술이나 전시품에 대한 설명을 담당하는 일종의 안내인 또는 가이드인 셈이다. 화창한 봄 햇살이 세상으로 나들이 나온 8일 서울 종로구의 탑골 미술관. 그곳에서 불화(佛畵)설명에 여념이 없는 실버 도슨트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러 간 서울노인복지센터 1층의 탑골미술관은 약 10여점의 불화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부터 취재진,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 중 왼쪽가슴에 반짝이는 명찰이 유난히 눈에 띄는 4명이 있었다. 명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실버 도슨트’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고 미소가 아름다운 두 여인과 말끔한 정장과 넉넉한 웃음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두 신사가 있다. ‘불화(佛畵), 전통으로 피어나다’라는 기획전이 열렸던 이 날. 이들은 어떤 것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임석환 불화장의 그림이고 어떤 것이 전수자들의 그림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 사람들은 과거에 무슨 일을 했을까’ 궁금증이 생길만도 하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거침없이 해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 중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없다. 다만 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이들을 도슨트에 세계로 인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거침없이 미술 해석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끊임없는 교육에 있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약 한달 간 이뤄진다. 또한 새로운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그 전시회의 성격에 맞는 전시 정보 숙지 교육도 치러진다. 현대미술사부터 서양미술사에 이르기까지 소양 교육과 도슨트 역할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 교육의 강도가 적잖이 세다. 이 과정을 거쳐 현재 탑골 미술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슨트만 해도 20명이나 된다. # 은퇴 후 국화빵 장사에서 도슨트에 이르기까지 도슨트 송련(남ㆍ72)씨는 10년 전 은퇴했다. 송씨는 은퇴 후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했다. 국화빵 장사, 공인중개사 자격증 취득 후 복덕방, 상담가, 지하철 택배, 노인 학대 지킴이까지.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그저 넉넉한 웃음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도슨트가 되기 전까지 도슨트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그. 이제 도슨트는 그가 생각하는 다양한 경험의 종착점이다. 송씨에게 도슨트가 종착점이 된 이유를 물었다. “관심 분야에서 일하니까요. 젊은 시절 취미가 그림이었고, 현재는 유화 그리기에요. 취미를 일로 하기가 쉬운게 아니죠. 그리고 정말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취미이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도슨트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힘이 닿는데까지 이 일을 하고 싶어요.” # 음악선생님이 가르치는 미술관 탑골 미술관에서는 음악 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러니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도슨트 임순영(여ㆍ66)씨다. 은퇴 전 임씨의 직업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에서 성악가 그리고 비올리스트까지 음악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만한 젊은 날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악보가 아닌 그림이다. 그러나 전혀 거부감이 없는 그녀다. 예술은 음악이나 미술이나 한 맥락이라고 보는 임씨다. “음악만 40년 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전문적이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림은 악보 같은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도슨트 일에 임하고 있어요. 악보가 있으면 어느 곡이나 다 할 수가 있거든요. 전시회 전에 교육도 받고, 음악과 미술을 응용해서 생각하려 하니 이 일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녀의 말에서 행복감이 묻어났다. 인터뷰의 한 질문이 끝날 때마다 “너무 행복해요”를 연발했다. 그녀는 은퇴 후 인사동이나 미술관을 많이 찾아 다녔다. 미술관을 다니며 묘한 미술의 매력을 느꼈다. 미술로 인해 일상도 달라지자 이것을 소개하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그 때 발견한 것이 도슨트다.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임씨가 도슨트가 된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도슨트 일하는 것 외에도 짬나는 대로 미술관을 찾는다는 그녀. 이제는 도슨트가 직업병이 됐다. 미술관에서 도슨트나 큐레이터가 보이지 않을 때 학생들이나 관람객들에게 꼼꼼히 설명을 해준다는 그녀다. 못말리는 선생님 기질이다. 선생님에서 도슨트까지 가르치는 것을 위해 태어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8일 찾은 탑골 미술관 도슨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활기차 보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어디에서 뿜어 나오는지 모르는 아우라의 근원은 아마도 일에서 찾은 재미와 열정이 아닐까. 일자리가 복지다? 이들에게 복지를 운운하기엔 이들의 열정이 너무 젊게 느껴진다. 어쩌면 ‘일자리가 회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 2014-04-10 0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