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은퇴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2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로 살 수 있다는 등 제2의 인생에 대한 말도 많다. 하지만 그 달콤쌉싸름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전하려고 하면 어렵다.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베테랑 보험설계사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자신감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황보환(黃寶煥·52) 메트라이프 보험설계사. 그는 얼마 전 트로트 가수 하진필이라는 이름으로 ‘난 당신 편이야’를 녹음했다. 보험설계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경력을 가진 그가 트로트 가수라는 외도를 과감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명 황보환. 메트라이프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로서 자신만의 탄탄한 영역을 갖고 있는 그는 최근 하진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준비를 나름 충실히 하고 있다. ‘행사’를 뛸 준비를 신경 써서 갖출 정도로 말이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기념으로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해서 가죽 재킷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요새 패션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어요(웃음). 아는 사람들이 보더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입냐고 타박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패션이 트로트 행사용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연을 통해 이어진 트로트 가수로의 길
보험설계사가 갑자기 가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하게 된 걸까?
“10여 년 전부터는 CEO 위주로 보험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CEO 과정에서 일 년 정도 성악을 배우게 됐어요. 거기서 작곡가 최왕국 교수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제게 가곡을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이라는 노래였어요. 그 후 최 교수님이 이번에는 트로트 곡을 작곡했다고, 저에게 맞을 것 같다며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트로트 가수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고 급작스럽게 이뤄진 거죠(웃음). 그런데 저도 이게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조금씩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하진필씨는 아직 트로트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데뷔를 위해 트로트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지만 아직 성악 톤을 완전히 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했던 인생
하씨의 도전이 마냥 뜬금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 음악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력고사 세대인 그는 옥상에 올라가 자주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고 한다.
“제가 84학번인데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1차 예선은 붙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갑작스럽게 출전 일주일 전에 후배 여대생을 소개받고 듀엣을 하게 됐죠. 300여 팀에서 50팀 뽑는데 통과가 되더라구요. 사실 너무 쉽게 통과한 거예요. 연습도 많이 안 했고. 그때 선배님이 작사 작곡을 해주셨는데, 사회운동을 많이 하던 때라서 가사가 사회 풍자적이었죠. 결국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제게는 큰 추억이 됐습니다. 그때 대상을 유열씨가 탔어요. 이정석씨는 제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299번, 이정석씨가 298번이었죠.”
그는 또 모교인 연세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해 연세글리클럽이 조직됐을 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봉사로 노래를 하고 합창단원으로 행사를 뛰는 등 노래와 함께한 그의 삶은 지금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계속 억대 연봉이었죠. 보험 업계에서 19년 일하면 굉장히 오래한 겁니다. 저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한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외국계 보험사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왔거든요.”
그는 한국타이어에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큰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6년 담당하며 9년동안 다니고 그후 푸르덴셜에 입사하여 영업을 하다 부지점장 업무를 맡으면서 8년을 다녔다. 당연히 사람 관리가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럴 바에는 다시 영업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메트라이프로 옮긴지 12년 째다. 메트라이프에서는 중소기업 CEO 위주로 보험설계 업무를 맡고 있다.
한 달 만에 첫 트로트를 녹음하다
“최왕국 교수님과 통화하다 보니까 저를 위한 트로트 곡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보자 해서 다음 날 만났어요.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난 당신 편이야’래요. 그 제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어요. 누구라도 끝까지 자기편이 돼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잖아요. 악보를 받아 가사를 보니 가사 내용도 너무 좋은 거예요. 멜로디도 너무 쉽고.”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자 트로트 가수를 해보자는 마음도 먹게 됐다. 그는 곧장 보컬 트레이너를 소개받아 트레이닝을 받고 불과 한 달 만에 노래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런데 제가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후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열악하죠(웃음). 그래서인지 믹싱 작업이 약간 잘못돼서 제 목소리가 작게 나왔어요. 조만간 수정할 예정입니다.”
트로트 가수로의 삶을 선언한 그에 대한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고 ‘너에게 딱 맞는다’ 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된 일이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수로 데뷔했으니 앞으로 노래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분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우면 좋겠습니다. 가수 데뷔 전에는 동기들하고 노래 봉사도 다녔어요. 생각해보니 봉사 때는 묘하게 트로트를 많이 불렀네요. 그리고 저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친구들도 네가 하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는 트로트를 배우게 되면서 트로트의 넓은 세계를 새삼 깨닫게 됐다.
“진성씨의 ‘안동역에서’라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작년부터 뜨는 노래라고 하더군요. 안동역에는 그 노래의 비석도 있다고 해요. 노래라는 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노래를 통해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가 베푸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념과 경험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인생에서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2014년 9월에 큰 수술을 받았어요. 종합검진을 하다가 우연히 췌장에서 종양을 발견한 거예요. 암일 확률이 굉장히 컸어요. 특히 췌장암은 생존율도 적고 암으로 진단받으면 일 년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검사해보고 암이든 아니든 수술해야 한다 해서 9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죠. 그때 CEO 과정에서 성악했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최왕국 교수님이 제 소식을 듣고 끝이 안 풀리던 가곡 ‘바람이 불어오면’을 마무리했다고 해요.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저는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악보를 보자마자 확신이 든 노래, ‘난 당신 편이야’
하씨가 트로트 가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회장이 제 선배예요. 그래서 그분께 ‘이런 곡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문의했죠. 당연히 말리셨죠(웃음). 그분이 워낙 연예계를 잘 아시니까 ‘네가 돈이 있냐, 젊길 하냐, 특출나게 잘생겼냐, 과연 시장에서 먹힐 거냐’ 하는 것들이 의문이었죠. 그런데 지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면 반응은 굉장히 좋아요. 가사도 좋고 중독성도 있고. 사실 이건 좋은 쪽 얘기고, 나쁜 쪽으로는 확 부각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있긴 했어요. 트로트라면 어떤 부분이 확 튀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확 느꼈거든요.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도 와 닿았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곡이든 발라드든 다 좋아했어요. 트로트는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이렇다’라는 정형화된 스타일을 좇고 싶지는 않아요. 특히 너무 튀고 화려한 정형화된 이미지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래도 좋고 가사도 좋은 트로트 가수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 국한되고 싶지 않아
하씨는 올해 중에 ‘난 당신 편이야’의 녹음을 새로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유튜브에 노래를 올려놓은 상태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그가 앞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요즘은 늦은 나이에 트로트 가수로 입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30여 년을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마땅히 박수 받아도 될 일이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보면서도 자신의 도전이 앞으로의 삶에 즐거움과 희망과 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디너쇼까지 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트로트, 가곡, 발라드… 다만 댄스는 좀(웃음).”
새로 지은 잠실 롯데월드 쇼핑 몰 콘서트홀에서 열린 음악회에 다녀왔다. 동네인데도 처음 가본 것이다. 외국에서 본 입체 쇼핑몰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데 눈이 휘둥그레졌다. 콘서트홀은 8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쇼핑 몰 안이 대단히 넓어서 잘 못 올라가면 다시 내려 가서 다른 쪽으로 올라가는 구조여서 하마터면 공연 시간에 늦을 뻔 했다. 콘서트홀은 엄숙한 분위기의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더 화려하다고 보면 된다. 객석의 구조도 다른 콘서트홀처럼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해서 여러 입체 구분으로 되어 있었다.
이날 공연은 탄둔이라는 중국 작곡가 겸 지휘자가 출연했다. 그가 작곡한 중국 영화 ‘영웅’, ‘와호장룡’, ‘야연’에서 OST로 흐르는 음악 장면과 함께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생음악으로 감상하는 형식이었다. 영화 감상과 음악 감상을 겸한 자리였다.
탄둔이라는 사람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래미상, 오스카/아카데미 상 등으로 수상한 상만 해도 한 페이지를 넘는 세계적인 작곡가라고 했다. 이번 공연 이전에 이미 세계적인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 쟁쟁한 오케스트라와 작업 한 경력이 있다.
탄둔의 지휘로 한국계 피아니스트 지용, 바이올린에 조진주, 첼로에 중국 계 주린이 출연했다. 인터미션을 30분이나 갖는 동안에 8층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 나가 바깥바람을 쐴 수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별세계였다.
중국 영화 ‘영웅’, ‘와호장룡‘, ’야연‘을 다 보지는 못했으나 중국영화의 특성으로 대규모 병력의 전쟁장면과 칼솜씨가 뛰어난 무인의 무협 장면이 주요 포인트이다. 땅이 넓고 인구도 많으니 전쟁도 크게 한다. 2000년 전 진나라 군사들이 광활한 대륙을 휩쓸고 다니는 전쟁의 웅대한 스케일을 화면으로 보면서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는다. 고수들의 마지막 대결에서 숨 막히는 긴장감과 화려한 동작들이 어찌 보면 식상하면서도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들으니 심오하게 와 닿았다.
중국 영화라 해서 음악도 중국풍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가요가 트로트가 특색이고 일본은 엔카이니 중국도 잘 알려진 ‘야래향’ 방식의 음률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니 탄둔이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것이다. 클래식에 익숙한 우리 서울 시립교향악단이 중국 무협영화의 OST 곡을 연주하는데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클래식에서 조용한 소리를 들려주던 북소리가 자주 나오고 타법도 북 가운데보다는 옆을 두드리는 기법 등이 달랐다. 점잖은 소리만 내던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등이 특이한 소리를 냈다. 탄둔의 음악은 요란하게 클라이맥스로 달려가다가 마지막에 '꽝"하며 동시에 끝나는 음악이 많다. 그래서 연주가 끝난 것을 쉽게 알수 있다. 지휘르르 끝낸 탄둔이 만면에 웃음을 띄며 관중을 향해 돌아선다.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탄둔은 영화의 OST를 오케스트라 협주곡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마지막 공연은 ‘세 번의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전 출연자가 나와서 바그너 탄생 200주년 헌정곡으로 준비된 것이다. 탄둔은 바그너에 대해서 특별한 철학적 공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음악에 대한 그의 철학이 귀를 기울이게 한다. 영화 음악이라고 해서 경시할 것이 아니라 영화 음악은 영상 속 숨은 감정까지 끌어내야 하고 영화의 리듬을 끌고 가는 엔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필자의 문화 수준을 높여보시라며 아들이 푸치니의 ‘투란도트’ 티켓을 보내왔다. 그런데 흔히 보던 뮤지컬이나 영화, 연극이 아니고 극장에서 영화로 보는 오페라라고 했다.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가끔 오페라를 관람했지만, 영화로 보는 오페라는 어떨지 호기심이 들면서 혹시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에 좀 걱정되었다.
주세페 푸치니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아름답고 유명한 오페라 작품을 많이 남긴 작곡가이다. 그를 생각하면 ‘나비부인’의 기모노 입은 가련한 여주인공 모습이 애틋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토스카에서의 ‘별은 빛나건만‘이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어떤 갠 날‘의 주옥같은 아리아가 귓가를 맴돌기도 한다. 독특한 점은 푸치니가 동양의 이국적인 소재를 즐겨 썼던 것 같다. 나비부인도 일본 여성이 주인공이고 오늘 본 투란도트도 중국 북경이 무대이다. 우리나라도 풍부한 소재가 있는데 작품이 되었다면 좋았을 걸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장소는 메가박스로 여러 곳의 극장 중에서 필자는 집에서 버스 한 번으로 갈 수 있는 센트럴 점으로 인터넷 좌석예약을 했다. 요 며칠 뜨거운 날씨로 무더웠는데 강남의 센트럴시티는 별천지처럼 시원하고 쾌적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했기 때문에 길게 줄 서지 않고 입장할 수 있어 좋았다. 재미있는 영화도 많을 텐데 영화로 보는 오페라에 사람들이 올까 의아했지만, 가격이 3만 원인데도 입장하는 줄이 길었고 대부분 좌석이 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관람하러 왔다. 좌석도 넓고 안락했으며 팔걸이 부분이 선반처럼 넓어 많은 사람이 음식이나 음료 준비해 와서 먹고 있었다. 필자도 다음에 올 땐 커피와 샌드위치 정도 준비해 와야겠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이다. 거의 완성되었지만 끝내지 못하고 3막 마지막 장면은 제자 프란코 알파노가 마무리해서 공연했다고 한다. 초연하던 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작곡한 3막 ‘류의 죽음’까지 지휘한 후 지휘봉을 놓고 관객에게 돌아서서 “마에스트로가 작곡한 것은 이 부분까지 입니다.” 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시간이 되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직접 오페라에 온 것처럼 극장 무대가 보였고 수많은 관중이 3층, 4층까지 꽉 찬 공연장이 나왔다. 여성 해설자가 나와 이 오페라에 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많은 인원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소개되고 드디어 영화 속에서 막이 올랐다. 직접 공연한 무대를 찍은 작품으로 오페라의 규모가 엄청났다. 중국이 배경이라 동양의 기와를 얹은 크고 높은 문이 무대로 웅장함과 화려함이 돋보였다.
투란도트는 중국의 공주 이름이다. 별명으로 얼음공주라 불리는 투란도트는 예전에 궁전에 쳐들어온 타르타르국 젊은이에게 어머니가 능욕당하고 죽은 악몽을 떨치지 못하고 복수심으로 남성을 혐오하고 결혼을 기피한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투란도트에게 구혼하는 왕자들이 줄을 잇자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맞히면 결혼하겠지만 못 맞추면 죽이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많은 남자가 도전했다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페르시아 왕자가 사형당하는 날 인파가 뒤덮이고 그 곳에 나라도 잃고 눈까지 먼 쫓기는 신세인 타르타르 왕을 이끌고 노예 ‘류‘가 나타나는데 또한 헤어졌던 타르타르 왕자 ’칼라프‘와 만나게 된다. 노예 ‘류’는 왕자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자의 사형장에 나타난 투란도트 공주를 본 왕자 ‘칼라프’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아버지와 ‘류’의 반대에도 수수께끼에 도전하겠다고 한다.
칼라프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모두 풀었다. 첫 번째 문제는 어둠을 비추고 다음 날 없어지는 것은? 희망. 두 번째는 태어날 때는 뜨겁다가 죽을 때는 차가워지는 것은? 피. 세 번째 그대에게 불을 붙이는 얼음은? 투란도트였다. 칼라프가 세 문제를 다 맞혔음에도 공주는 아버지에게 이방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네가 한 약속이니 지키라 하고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동이 트기 전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결혼을 취소하겠지만 못 알아내면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투란도트는 노예 ‘류‘를 고문하며 이름을 알아내려 하지만 칼라프를 사모하는 ‘류’는 왕자를 위해 자결하고 만다. 칼라프는 류의 죽음을 애도하며 투란도트의 냉정함을 탓하고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힌다. 투란도트는 류의 죽음으로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걸 깨닫고 얼어버린 마음이 풀린다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인터미션시간에 우리 관객에게도 중간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독특한 방식이다. 오페라는 3시간 넘게 3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시간 동안 혼신의 노래를 펼치는 배우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고 그들의 음악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나오니 영화관 관객석 여기저기서 실제 오페라에 온 것처럼 박수가 터졌다. 필자도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박수를 보냈다. 영화로 본 오페라도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며칠 후에는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를 볼 예정이다.
7월 20일 예술의 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오윤아의 재즈, 탱고, 클래식의 만남’ 공연이 있어 갔다 왔다. 프로그램에 아스토르 피아젤라의 누에보 탱고가 클래식과 융합하여 연주된다 하여 벼르던 공연이었다. 탱고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음악이다. 우리 가요 중에도 탱고 풍의 가요가 많다.
춤도 그렇다. 스탠더드 댄스 5종목에 탱고가 들어가는데 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태동한 댄스인 탱고가 라틴댄스에 안 들어가고 왈츠, 폭스트로트 퀵스텝 등과 함께 스탠더드 댄스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탱고의 문화사를 알아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탱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의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 간 사람들이 처음 췄다고 한다. 주로 이민 간 노동자들이 사창가 등 빈민가에서 추던 춤이라 관능적이었다. 이 춤이 유럽에 건너갔을 때 추기경들을 비롯해서 귀족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에 런던에서 몇 가지 동작을 스탠더드 댄스 동작에 맞춰 표준화해 오늘날의 컨티넨탈 탱고, 또는 인터내셔널 탱고가 되었다. 기존의 탱고는 그대로 아르헨티나 탱고로 불린다.
초기의 탱고는 춤을 위한 음악이었다. 아르헨티나 전통음악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를 클래식이나 재즈처럼 별도의 음악 장르로 승격시킨 사람이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이다. 그러므로 탱고는 피아졸라 이전의 탱고와 이후의 탱고로 나눠 피아졸라가 만든 탱고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라 부른다.
피아졸라는 탱고 춤이 유럽에서 한창 수난을 당하고 있을 1921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4세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이민 간 덕분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가 16세이던 1937년, 그의 가족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 와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던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1954년 프랑스로 유학 가서 세계적인 음악 스승인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나디아 블랑제가 피아졸라의 탱고 연주를 듣고 탱고를 버리지 말고 승화시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해인 1955년에 귀국하고부터 누에보 탱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200년 정도 밖에 안 된 나라이다. 나라는 큰 데 일할 사람이 없으니 유럽 이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덕분에 고기, 낙농 제품, 광물 등을 수출하며 세계 5대 경제 대국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0년대 페론 정부가 들어서면서 실업자들에게도 직장인 평균임금보다 1.5배나 더 많은 수당을 주는 포퓰리즘 정책을 펴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망한 나라에서 모든 피해는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소외된 노동자들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탈출구는 바로 밀롱가를 찾는 것이었다. 말롱가에 오는 노동자에 맞춰 탱고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탱고를 클래식이나 재즈에 버금가는 음악 장르로 수준을 올려 놓은 사람이 바로 피아졸라이다.
이날 연주는 피아졸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4계’ 피아노 3중주로 시작했다. 이 곡은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기 다른 시점에 만들어졌으나 나중에 4계로 묶었다. 인터미션 후에는 피아졸라의 명곡 ‘Tangata’, ‘Milonga Del Angel’, ‘Oblivion’, ‘Libertango’가 연주되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특히 ‘자유의 탱고’라는 ‘Libertango’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외에도 드럼, 다양한 아르헨티나 타악기가 합주되면서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연주에서 미국의 팝 클래식 대가 폴 쉔필드의 ‘Cafe Music for Piano Trio’도 눈길을 끌었다.
보육과 다닐 때 ‘왜 그랬을까’를 부른 쿨시스터즈 막내 은교가 과 친구였다. 그런데 은교가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와서 만났다. 그친구은 이름은 옥이다.
은교는 좀 화려한 마인드였던 데 비해 그 옥이는 어린 나이부터 가장 역할을 해온 처지라 더더욱 마음이 갔다.
이 친구도 노래하는 가수였지만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 차도 없이 서울 명동에서 천호동으로, 다시 영등포까지 이른 저녁부터 오밤중까지 이동하면서 노래하는 친구였다. 필자는 낮에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옥이가 노래하는 곳마다 가방과 구두를 들고 따라다녔다. 지금 말하자면 로드매니저 역할이었다.
무명가수였던 옥이가 방송을 타도록 필자는 엽서를 하루 수십 통씩 써서 보내고 옥이의 언니가 레코드샵을 낸다고 하여 필자 오빠를 동원하여 매장 매대 설계와 설치까지 도와줬다.
그러던 어느 날 옥이는 사소한 일로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매일 헌신해준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필자는 ‘나를 친구로 여겼다면 저런 태도는 안 보일 텐데’하는 맘으로 95번 버스를 타고 명동에서 집인 신림동까지 오는 내내 창피한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다.
우리 둘을 다 잘 아는 작곡가는 임종수 선생(옥경이, 고향역 작곡)은 황금당빵집에서 가방과 구두를 들고 우는 필자에게 위로의 말을 하였지만 옥이가 연락할까, 아니 필자가 맘약해 연락할것같아서 전화번호도 수첩에서 지웠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필자에겐 전화위복이 됐다. 갑자기 시간이 나게 된 시간을 체력장과 학력고사 공부하여 4년제 대학에 다시 입학한 것이었다.
그리고 4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옥이가 먼저 전화했다. 대뜸 숫자 욕이 들어간 욕이지만 결국 무너졌다.
본인도 가슴이 멍들었지만 갑자기 매일 보던 친구가 몇 년간 연락 없으니 옥이도 힘들었던가 보다. 옥이와 필자는 이제 새로운 영화가 나와도 함께 가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불쑥 다시 만나는 사이가 이어지고 있다. 옛날 이야기할 때 옥이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야!! 너 나랑 다녔으면 행정학과 다시 갔겠니. 나 때문에 더 발전적으로 산 거야.”
이대목에서 웃어야 할지 아니라고 소리 질러야 할지 난감하다.
시니어들의 ‘손주 사랑’은 세계 공용어다. 영화 의 할머니는
“이 나이에 기다리는 것은 손주와 죽음이다”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또 “난 죽으면 손주의 애완 고양이로 태어날 거야”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 영화 말고도 손주를 통해 ‘웬수’가 된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은 부지기수다.
올 여름, 빈센트 반 고흐가 희망과 꿈을 갖고 떠난 ‘아를’로 손주와 함께 떠나보자.
손주와 ‘론’ 강변을 걸으며 ‘별 헤는 밤’의 그림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그곳에 추억을 남겨놓자.
손주의 여행 경험은 향후 엄청난 학습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한 남부 프랑스
프랑스 남부지역의 프로방스는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특히 프로방스는 많은 시인, 화가, 영화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다. 프로방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은 평생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소설, 시, 그림 등으로 남겼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고향인 폴 세잔, 코트다쥐르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 피카소도 좋아했고 6개월간 안티베(Antibes)에 머물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노년을 보냈던 르누아르의 집, 레 콜레트(Renoir’s House, Les Collettes)는 카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에 있다. 모딜리아니는 니스를 무척 사랑했다.
또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인 , 의 저자인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는 아를과 가까운 님(Nime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을 일찍 떠나 파리에 살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애정을 평생 안고 살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고향 프로방스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겸 영화제작자 겸 영화감독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의 작품에도 어김없이 프로방스가 등장한다. , 등 영화 속에 프로방스가 담겨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는 “가장 아름다운 곳은 프로방스였다. 당신도 언젠가 꼭 한번 그리로 가봐야 한다”라는 편지를 썼고 그는 마지막 거처를 프로방스에 마련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죽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래서 아를은 ‘고흐의 마을’로 불린다. 많은 관광객이 아를로 몰려 드는 이유는 고흐를 만나기 위함이다.
로마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2000년 古都
아를은 테제베 고속열차가 멈추지 않는 작은 역이다. 역에서 1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부서진 로마의 유적 때문이다. 고흐의 그림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 생경한 문화 유적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도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을 문화 유적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건축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투우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을 뿐이다.
아를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로마령이 되었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반질거리고, 울퉁불퉁한 조약돌로 된 골목길과 부서진 성벽 등이 온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Arenes)와 기둥만 남아 있는 원형 극장이 있다. 아레나에서는 매년 투우 축제(4, 9월)가 열린다. 또 이 마을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곳 중 하나로 중세 건축물인 생 트로핌(Saint-Trophime) 대성당이 남아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은 부조와 조각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한 리퍼블릭 광장에 삼색기가 휘날리는 아를시청사가 있다. 그 앞에는 아를에서 제일 높은 시계탑과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솟아 있다. 이 도시의 로마 유적지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를 골목에서 고흐의 작품 현장 찾아내기
오래된 가옥과 골목을 헤집다 보면 포룸 광장에서 ‘고흐 카페’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즐겨 썼던 노란색으로 칠한 카페는 ‘고흐’란 화가의 이름을 파는 상술을 펼치고 있다.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The Night Cafe in Arles)’ 그림을 안내대처럼 세워 놓았다. 유독 그 카페만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카페 주변에는 피카소, 장 콕토 등이 자주 묵었던 낡은 호텔이 있다.
고흐는 이 카페 근처에 일명 ‘노란집’을 얻어 놓고 이곳을 매일 밤 찾았다. 카페에 앉아 늘 ‘녹색요정 압생트’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친구 고갱이 오길 기다리면서, ‘아를의 여인-지누부인’(1888년)을 그렸다. ‘아를의 여인’이라는 제목은 고흐 이전에 알퐁스 도데가 첫 단편집에 쓴 ‘아를의 여인(L' Arlesienne, 1872년 작)’이 있다. 이 작품을 다시 각색해 3막 5장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당대 잘 나가던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가 극장 상연에 쓰일 부수음악 27곡(관현악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같은 제목의 글, 그림, 음악이 만들어진 곳이 아를이다.
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는 ‘아를 병원의 정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가 1888년 12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발작 이후 머물기를 반복했던 병원으로 현재는 문화센터로 바뀌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엔 론 강으로 가서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보자. 고흐가 생레미 드프로방스의 한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에 그린 그림으로, 아름다웠던 아를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지금 고흐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은 론강의 어둠 속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난다. 그 외에도 ‘열두송이의 해바라기’와 ‘아를의 다리(도개교로 링클루아 다리)’ 등도 모두 아를에서 그렸다.
현재 아를에는 ‘반 고흐 파운데이션’이 있다. 하지만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고흐의 작품은 거의 볼 수가 없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과 어릴 적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 등 몇 점만 볼 수 있다.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박물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예술촌을 꿈꾸던 화가는 고갱을 만나 미쳐 버리고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예술촌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이곳에 방을 얻는다. 파리에서 뜻이 잘 통했던 고갱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기 전까지 방을 꾸미고 마음이 들뜬 채로 지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극단적인 성격 차이로 싸우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를 돋구게 된 것은 고갱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는데 고갱이 그린 그림 속에는 고흐는 없고 고갱이 앉아 있었다. 그림 속 고갱의 콧수염은 고흐의 붉은 콧수염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크게 싸웠고 분에 겨운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자른 귀를 싸들고 술집 여자에게 갖다 주었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촌의 꿈은 그렇게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의 발작은 더 심해져 근처 생레미 정신병원(1889년 5월)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발작이 없을 때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병원에서 약 15개월간 머물면서 187점에 이르는 그림을 남겼다. 분명히, 고흐가 아를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라고 보냈다.
고흐는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서 자살한다. 고흐는 테오의 가족이 찾아온 이후 밀밭에 가서 총을 쏘고 집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 이틀 만에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테오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테오는 “조카도 생기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더는 형의 생활비를 대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고흐는 그림들을 테오에게 보냈고 그 대신 생활비를 받았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못 판, 생활 능력 없는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줄 사람도 없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희망없는 삶.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고흐 나이 37세였다. 오베르에 머문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이후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매독에 걸려 죽는다. 두 사람의 묘지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 앞에 있다.
고흐의 삶은 그 어느 창작자가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고흐에 대한 영화나 책 등을 미리 보고 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열연한 영화 과 BBC 다큐인 폴 고갱의 이라는 작품을 추천한다. 아를에서의 고흐와 고갱의 생전의 삶을 알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2014년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벚꽃이 지면서 무성한 초록빛 잎만 남겼다. 반면 잎을 먼저 선보인 철쭉이 그 자리를 메운다. 우리 인생사와 비슷하다. 먼저 되었다고 으스댈 일이 아니고 늦다고 투덜댈 일도 아니다. 야산 언저리에는 앵초 미나리냉이꽃이 수줍게 자리를 지킨다. 그야말로 꽃들의 잔치다. 다른 꽃 부러워하는 일 없이 다들 제멋에 겨워 피었다 진다. 인생도 이들과 같으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꽃을 담다 보니 영화 가 눈을 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타이틀이 무척 시적이면서 왠지 숙명적인 느낌이 들어 사뭇 슬픈 느낌이 든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지칭했다는 이 말은 미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 시대는 아니지만, 1940년대 아직 기생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인의 숙명이 가슴을 친다.
전반부의 꽃같이 화려한 기생의 의상과 더없이 맑은 소녀들의 우정이 지나치게 밝고 고와서 빛나는 사금파리를 보듯 오히려 불안을 더한다. 그 두 소녀는 국악인 ‘정가’의 맑은소리를 타고난 정소율(한효주)과 노랫가락이 심금을 울리는 서연희(천우희)다. 여기 그 시대 최고 작곡가 김윤우(유연석)가 소율의 애인으로 등장하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런데 기생이면서 예인인 소율과 연희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을 만나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두 소녀의 우상인 이난영은 정가보다는 유행가에 알맞은 목소리를 극찬한다. 당시 윤우도 자신의 역작 ‘조선의 마음’을 부를 사람으로 소율이 아닌 연희를 택한다. 결국, 윤우는 연희에게 곡도 주고 마음도 준다.
철석같이 믿었던 애인의 배신에 소율은 윤우의 사랑을 되찾으려 연희같이 유행가 가수가 되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세속적 권력의 논리로 운명에 대적하려는 비극을 내포한다. 그녀는 결국 끝까지 지키려던 정조를 버리고 일본 경무국장의 애첩이 되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의 맑은 정가 소리를 헌신짝 내버리듯 던져버린다.
권번에서 함께 배우던 기생들이 부러워하던 소리를 버리고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은 변심한 애인을 되찾기만큼 힘들고 절망적이다. 잃은 것을 찾으려는 급급한 마음은 소율을 점점 불행의 늪으로 빠뜨린다. 결국,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소율은 연희를 따라 윤우도 죽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연희를 쫓는다. 최근 발굴된 연희 앨범을 자기 것이라며 연희 역할까지 한다.
비극과 멜로의 차이는 작지만 분명하다. 주인공의 비극이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면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느냐의 여부이다. 마지막 거짓 공연장에서 만난 PD는 “진정 저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사랑은 거즛말이’였어요.” 라고 말한다.” 그것은 죽기 전 윤우가 어쩔 수 없는 변심을 용서하라는 의미로 소율에게 준 곡이다. 이 지점에서 경계선이 애매해진다.
영화는 맑은 정가의 소리와 목포의 눈물, 사의 찬미 등으로 이어져 뮤지컬만큼 다채롭고 화려하다. 성예람 작곡에 조선 중기 문신 김상용의 시조를 붙인 정가 ‘사랑은 거즛말이’는 가슴을 파고들며 에인다. ‘사의 찬미’ 또한 시대를 담고 영화의 결말의 복선으로 알맞다. 진실에 맞닥뜨려 꽃다발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해어화와도 어울리며 사랑의 상징인 꽃, 피었다가 시드는 사랑의 실체 등으로 중의적 의미를 나타낸다.
박흥식 감독은 당시 역사 속에 기생의 삶을 빌어 사랑과 인생에 대해 여러 생각을 영화 속에 담으려 한 것 같다. ‘사랑은 거짓말’ ‘그렇게 좋은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요?’ ‘헛된 나를 잊는 대신 부디 너만은 잊지 않기를····’ 등의 대사 속에 품은 의미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한 가지 주제로 쭉 끌어가는 힘이 옅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영화가 거의 그렇듯이 마치 뷔페를 차려 놓고 관객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먹으라는 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것이 스타시스템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흥행 여부를 떠나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한 바 크다. 남자 배우들의 ‘브로맨스’에 기대는 흥행 공식을 떠나 여배우를 투톱으로 내세운 것은 그런 면에서 모험적이며 두 배우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한효주의 눈물 연기와 천우희의 애절한 목소리는 영화를 살리는데 한몫을 했다. 눈물에 섞인 ‘사랑은 거즛말이’ 곡조가 지금도 가슴속에 바람처럼 잦아들며 기어코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그날따라 신촌 길을 걷고 싶었다. 봄바람이 불던 첫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걷던 길 멀리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신촌 홍익문고 앞 피아노. 많은 젊은이가 멈춰 서서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갈색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길 위의 피아니스트 장요한(張요한·62)씨를 만났다.
차 한잔 함께 하실래요?
그의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봄이라지만 밤은 겨울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가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소에 나와 피아노를 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저 취미로 피아노를 칩니다. 일과를 마치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풀린 거 같아서 신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동안 장요한씨는 신촌이 아닌 여의도 IFC몰 CGV영화관 안에 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분이고 30분이고 피아노를 쳤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날이면 영화관 측에서 관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주를 좀 해서 그런 지 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촌에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나온 겁니다.”
장요한씨가 최근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작년 3월 인사동에 설치된 ‘달려라 피아노’를 알고부터다. ‘달려라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거나 거실,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화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해 한국에는 신촌 홍익문고 앞, 인사동, 선유도 공원, 어린이 대공원, 동대문 DDP 등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장요한씨는 인사동과 신촌, 여의도를 오가며 매일 연주를 했다. 피아노 칠 때는 모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몸이 아주 힘들었다.
“쉬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퇴근만 하면 자꾸 발걸음이 피아노 있는 쪽으로 향하더라고요. 가끔은 왜 내가 아프면서까지 피아노를 치고 고생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중독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고 난 뒤 쉬어야 하는데 박수를 받으면 연주를 끊을 수 없다. 몸이 좀 힘들어도 그가 연주하는 이유다.
피아노는 배운 적이 없다? 천재 아니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풍금을 접한 것이 피아노를 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어느 날, 커피숍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원래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다가 때려치우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음악과 함께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 악대부원으로 활동할 때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악대부 유니폼을 입고 안동 시내 시가행진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취미활동도, 특별활동도 늘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음대에 가라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유학을 가 큰누님 집에서 살았다. 등교하기 전 피아노를 30분정도 치고 갔다.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생이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었나 싶다. 작곡가 출신이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대신해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는 장요한씨. 그런 그에게 음악선생님은 음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장요한씨는 음악은 그냥 취미로 여긴다며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거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대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음악선생님이 대구시립 교향악단 지휘자였거든요. 음대에 가라고 했는데 저는 1년 더 공부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피아노를 쳤다.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이나 피아노가 있던 대구교대 안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남아 있는 듯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히 소질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재능을 알아보고 잘 키워줬으면 어땠을까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음악을 더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과거의 이루지 못한 꿈이 미련으로 남아 장요한씨를 길 위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도 대학 다닐 때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용한 음악이 좋지만 저도 나름 20대 때는 록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그룹사운드 ‘메디컬 사운드’ 2기 출신이다. 본과에 올라가기 전까지 활동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의 그룹사운드다.
낮에는 치과의사 장요한의 삶을 삽니다
장요한씨의 본업은 치과의사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1기로 졸업한 뒤 35년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피아노를 치는 삶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영락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만 치고 치과 진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직한 진료로 꼼꼼하게 환자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과잉 진료를 피하는 방법도 적어두었습니다. 은퇴하는 날까지 양심적인 치과의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장요한씨는 마음을 비우고 일반 환자만 치료하고 있다. 임플란트 시술도 안 한다. 엑스레이 찍기, 스케일링도 장요한씨 스스로 한다.
“속은 편합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게 문제지만, 돈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됩니다. 내 월급 누가 주는 거도 아니고 진료가 끝나면 저는 피아노 치러 나갑니다.”
치과의사를 하는 35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만큼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제 나이는 이제 은퇴할 나이잖아요. 하루에 받을 만큼만 예약한 환자들을 봐줍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봐서 에너지가 축적이 된 건지. 그래서 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요한씨는 피아노라도 안 쳤으면 서울서 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힐링 되는 연주 선물하고파
“저는 레퍼토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냥 놔두면 2~3시간 칠 수도 있어요.”
장요한씨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비롯해 영화 OST , , , 등 피아노로 치기 편하고 인기 좋은 음악들을 고른다.
“힐링이 되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가 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따뜻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연주가 편하고 좋다며 다가와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요한 씨는 좋은 연주를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단다.
“어떤 팝송이 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곡을 계속 열심히 듣습니다. 듣다 보면 내가 따라 할 수 있고 딱 듣기 좋은 부분들이 들립니다.”
영어 어휘력을 늘리듯이 그렇게 차근차근 손에 건반의 느낌을 익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 풀릴 때까지 연습한다.
“반복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되더라고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악보도 치다 보니 됐습니다.”
장요한씨는 은퇴 후 의료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는 사람들도 많고 또 치료해 줄 의사도 많다고 느낀다.
“치아 미백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하면서 돈을 번다는데 저는 그런 거하고 멀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서울이 더 좋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치는 게 그리울 거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뭐 하실 건가?”라는 질문에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니 여의도에 가서 피아노를 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장요한씨. 1년 넘게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제한다. 봄이 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칠 생각이라는 장요한씨. 오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의도 IFC몰로 가보기를 권한다. 산뜻한 표정의 치과의사, 아니 밤의 피아니스트 장요한씨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