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살았던 국민이라면 밤 12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24년 전인
1982년 1월 5일, 광복 후 줄곧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의 밤이 세상에 풀려났다. 밤 12시~새벽 4시의 야간 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된 날이다. 전국 도시의 거리에 사람이 오가게 된 것도, 새벽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술자리 습관도 모두 이때 시작됐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 가사다.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난다. ‘0시의 이별’에는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남녀가 0시에 헤어진다면 통행금지 위반인데 가사가 통금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미군정 시절 북한의 간첩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 정부는 ‘범죄예방’ 등의 명목으로 통행금지 조치를 존속시켰다. 전쟁이나 재해 재난이 아닌 상황의 평시통금은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 밤문화…11시 30분 되면 귀가전쟁 시작
자정이 되면 ‘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펴지고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인1조로 이뤄진 야경꾼들은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 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단속은 엄혹했다.
김근석 전 경정(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필동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은 “귀가전쟁이 시작되면 번화가 입구쪽 차선이 사람으로 빽빽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합승은 기본이었고 ‘따블’이나 ‘따따블’ 요금을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밤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혹시라도 통금에 걸리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일단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다. 예전 회사들은 별도의 숙직실을 두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의 유물이다. 술꾼들은 10시30분 정도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거나 술집 문을 닫고 밤새 마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반대로 통행금지가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애인과 술을 마시다가 깜빡한 척하고 통금을 넘겨버리는 수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에게 흔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굳이 섬에 가서 배를 놓친다든가, 두메산골에서 술이 떡이 되어 운전 못 한다고 버티는 등의 영웅담(?)도 심심찮게 회자됐다.
국가는 아주 가끔씩 통행금지를 풀어줬다.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대한민국 밤의 족쇄를 풀어준 88올림픽 유치
대한민국의 밤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 독일(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전해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행금지가 있는 상태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사회에 팽배한 민주화 요구도 어떤 형태로든 숨통을 터 줘야 했다.
1981년 11월 1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19층 중국음식점에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회동이 있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날 갑자기 통금해제안을 꺼냈다. 이견이 나오지 않아 4분 만에 논의가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통금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50개시 139개군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나라를 되찾은 뒤 처음으로 밤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시민들은 잠을 잊은 채 37년 만에 되찾은 자유를 환호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새벽 1시에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심야극장도 이 시절 생겨났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는 보도기록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심야영화의 흥행몰이는 을 필두로 , 등으로 이어지는 에로영화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술문화도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룸살롱, 단란주점 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밤문화도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최대한 급하게 마시던 국민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통금 이후 급등한 민간소비, 오일쇼크 극복 원동력
1982년의 통금해제는 국민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진 계기로 평가된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억압을 빠르게 지워갔다.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밤새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통제에 익숙하던 사회에 자율적 질서가 자리를 잡아갔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뒤따랐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110년 전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자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7.2~1905.11.30) 등 많은 지사들이 이에 항의하여 순국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6개월 앞선 이 해 5월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1874.9.21.~1905.5.12)이 만리타향 영국 런던에서 혼자 힘으로 다가올 파국적 운명을 막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순국한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는 구한말 국권상실과 관련한 순국 1호이다.
그의 순국에서는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북벌의 대의를 저버릴 수 없어 온몸을 바쳐 힘쓸지니 죽은 뒤에나 그만둘 뿐이라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 死而後已)’와 같은 고귀한 정신이 느껴진다. 영국 외무성 문서에는 이란 제목으로 2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가 오늘날 국제정치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당시의 세계정세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비록 현실성은 희박했지만 탁월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국은은 좁게는 한국외교사에, 넓게는 한국근대사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이한응은 유학은 물론 영어를 포함한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1년 첫 영국 상주공사로 임명된 민영돈(閔泳敦)을 수행하여 3등 참찬관(오늘날 서기관)으로 임지에 부임한다. 그러나 민씨 일가였던 민영돈이 1904년 초 귀국함에 따라 그는 서리공사(charge d’affaires)로서 혼자 공관을 지키며 이후 약 1년 5개월 동안 구국외교를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1901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극동위기’가 야기되며 결국 1904년 초 러일전쟁으로 발전한다. 이한응은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긴 메모(memorandum)와 각서(note)를 전달한다. 그리고 1주일 후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면서 메모 두 개를 다시 보낸다.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해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은 다른 열강들과 ‘양해(understanding)’를 통해 어느 쪽이 전쟁에 승리하든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 및 영토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fresh guarantee)’을 해달라고 요망한 것이다.
6장의 도표를 곁들인 국은의 메모는 세계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 그리고 세계적 차원(global level)의 동맹체제를 동아시아 지역 차원(regional level)에서 전개되는 분쟁에 적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아이디어 등으로 신선하기 짝이 없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은 동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서쪽(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최근 들어 협력하고 있다. (3개월 뒤 ‘영불협력’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나 이들 양국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경쟁하고 있어 균형상태가 건전하지 못하다. 일-러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과 한국이 압력을 받게 될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도 이 분쟁에 휩싸여 범세계적 균형체제가 파괴될 것이며 이들의 이권은 침해받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같은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러-일 양국과 함께 4개국조약(a quadruple treaty)을 체결하여 러-일 간의 불안정한 체제에 ‘못’을 박고 심판관의 자격으로 동아시아 분쟁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도의 분석적인 구상은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영국 외무성은 수일간 그의 메모를 철저히 검토한 끝에 이한응의 메모는 결국 영국이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후 그는 1년 이상 본국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1902년 영일동맹에 의거한 조선의 독립보장 요구, 경의선 철도 건설 제안 등을 통해 영국정부를 집요하게 설득하지만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문제를 이미 일본에 일임한 영국으로부터 외면당한다.
동아시아 정세는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과 일본의 잇단 승리로 다음해 11월 17일 을사늑약까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일본은 이에 힘입어 ‘내정개혁’이란 명목으로 조선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는데, 이 중 해외주재 공관을 축소하고 외교관들을 철수시킨 조치는 이한응의 장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1905년 3월 중순 이한응은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만리타향에서 1인 공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 당연히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었을 것이다. 4월 12일 하이드 파크에 있는 서펜틴(Serpentine)이라는 긴 연못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일본인 같은 두 동양인이 위협적인 자세를 보였다면서 영국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외무성은 이를 두고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짓’이라는 논평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1905년 4월 말 병으로 눕는데 5월 10일 랜스다운(Lansdowne) 외상으로부터 빠른 회복을 바란다는 서신을 받는다. 이에 용기를 얻은 듯 외상과의 면담을 신청하며, 외무성이 이를 호의적으로 검토하는데, 국은은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5월 12일 음독, 순국한다.
순국에 즈음하여 이한응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이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영국 외무성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논평을 남기지 않았다. 1900년 4월 명예 한국총영사에 임명되어 있던 부유한 영국인 프리처드 모건(Pritchard Morgan)은 국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피력했다. “이 가련한 젊은이는 극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며 외교관으로서 그의 경력이 끝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음이 틀림없다.” 국은의 죽음을 애국심과 경력 단절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복합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을사늑약 후 고종은 이제 외세에 의존한 독립이란 불가능해졌으며 의병과 같은 국민적 봉기만이 일본에 대항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에 반일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안으로 순국열사들에게 시호와 관직을 추서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국은은 이에 포함된다.
을사늑약 체결 9일 후인 11월 27일 고종은 용인 군수를 국은의 향리로 보내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내무부차관)으로 추서하면서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렸다. 국은의 묘소는 오늘날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있다.(2015.5.5. 그의 110주기 기일을 앞두고)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독거노인이나 희귀난치성환자 등이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신속하고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생명의 팔찌’가 보급된다.
안전행정부는 ‘라이프태그’ 도입 등 의료안전망 사업을 추진할 ‘재난대응 의료안전망 사업단’을 15일 출범시켰다.
라이프태그는 팔찌 모양의 정보장치다. 이 장치를 스마트폰을 갖다대면 전화기의 엔에프씨(NFC) 기능이 활성화돼 착용자의 병명, 응급상황 때 대처요령, 보호자 통화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어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조처를 신속하게 취할 수있다. 환자의 응급상황에서 라이프태그 정보는 119상황실에도 직접 전송돼 구조활동에도 활용된다.
현장에 도착한 소방관은 소방관용 애플리케이션으로 보다 상세한 환자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안행부는 세브란스병원 등록 환자를 대상으로 연말까지 라이프태그 시범사업을 한 뒤 독거노인과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대상을 확대할 계획이다.
강병규 안행부 장관은 “재난대응 의료안전망 사업단은 재난의료 분야의 사회공헌과 민관협업의 새 전기를 마련하는 모델이 될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우수한 정보통신기술과 응급구조가 결합된 라이프태그 서비스는 시간이 생사를 가르는 질환이 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