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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맨 김병조의 무한도전
- 한때 우리나라 코미디계를 주름잡던 베추머리 김병조 씨가 요즘 시니어 강사로 나서 명심보감을 강의하고 있다. 지난 10월 28일 동작 50플러스센터의 초빙 강사로 초대되어 시니어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는 자신이 과로로 한쪽 눈을 실명한 사실과 코미디계에서 은퇴한 사유 등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면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웃, 즉 다른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논어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를 인용하더니 청산유수처럼 강의를 해나갔다. 그의 타고난 언변과 유머는 2시간 동안 청중들을 강의에 집중하게 했다. 또 명문 집안의 후손으로서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시간이었다. 불제자로서 불교방송에도 출연한다는 그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삶보다 시니어 강사로서의 삶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강의 제목은 ‘명심보감에서 배우는 행복’이었다. 자왈위선자 천보지이복, 위불선자 천보지이화(子曰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착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려 답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화를 내려 응징한다)로 시작한 그의 강의는 명심보감에 나오는 안분신무욕, 지기심자한과 지족상족 종신불욕, 지지상지 종신무취를 강조했다. 그는 안분신무욕(安分身無慾)을 3/4, 5/4 등 진분수와 가분수로 설명하면서, 욕되지 않게 살려면 진분수의 삶을 살아야지 가분수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 그는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받는 87만원의 수강료에서 8억7000만원의 값어치를 느낀다고 말했다.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강의하다 보니 대학교에서 정식 강의까지 맡게 되었고 현재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하느라 바쁜 삶을 살고 있다고도 했다. “인간은 왜 괴로운가?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새옹지마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인생사 모든 일이 전화위복의 전기가 될 수 있으니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은 좋은 것이다. 집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의 단초이므로 너무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설명에서 그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느껴졌다. “주어진 가난은 가난이지만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말에서는 진지한 탐구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출신 지역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던 아름다운 마음이 이제는 전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병조 교수의 강의는 오늘날의 퇴직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시니어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스트레스 없애는 방법을 알려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래를 보면서 살면 절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자꾸 위를 보기 때문에 힘들어진다.”
- 2016-11-0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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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김성철 교수
-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공한 덕후(마니아)’ 같다고. 다른 분야가 아닌 ‘불교 덕후’. 그러자 웃으며 그가 화답했다. “맞아요. 덕후는 나쁜 표현이 아니에요. 결국 한 분야에 능통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주도하며 세상을 바꿀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를 덕후라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이자 치과의사이기도 한 김성철(金星喆·58) 교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들었어? 남일이가 죽었대. 숙명여고 애들이랑 대성리에 갔잖아. 물에서 못 나왔대.” 서울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성철은 친구의 죽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일이와 같은 미술반이었던 그 역시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학교 클럽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저 혼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에. 처음엔 무덤덤했다. 그저 교실에 빈자리 하나만 눈에 띌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그해 여름방학에 떠난 학교 해양훈련은 엄격해졌다. 선생님들은 안전사고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엄하게 감시를 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모처럼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행사가 힘들기만 한 것이 죽은 남일이 때문은 아니냐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어린 김성철은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의 병’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나 장 폴 사르트르의 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이었죠. 또 엠마누엘 칸트의 같은 철학책들도 있었어요. 뜻도 잘 모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사실 미술반에 들어갔던 것은 화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꾸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에게 그 꿈을 털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놀고먹는’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들어간 우등생이었기에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3이 된 김성철 학생은 이과인 전공에 미술이라는 취미를 덧대려면 건축학과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건축이라면 그림에 소질 있는 손재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손재주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생님이 추천한 것은 ‘치과대학’이었다. 그 추천에 반감이나 저항은 없었다. 무엇보다 치과의사가 되면 근무시간이 짧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치과를 하는 친구는 늦게 출근해서 오후 일찍 퇴근한데, 그리고 골프 치러 간다더라”라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실컷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입학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그림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를 차렸어요. 대학 입학 후 우리가 다니던 화실에 매달 내는 돈만 모아도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2년을 열심히 그렸어요. 학교가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해서, 전공이 다른 친구들 때문에 서대문구 북아현동까지 4번을 옮겨 다녔어요.” 마음의 병에 해답을 얻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서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다. 밀교사상과 선종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으로, 그는 이 경전을 읽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책에서 변치 않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는 파사익(波斯匿)왕의질문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해요. 저 흐르는 강의 모습이 어릴 때와 지금이나 차이가 없듯, 그대 역시 외모는 바뀌었지만 보는 성품은 그대로라고. 원래의 나는 멸(滅)함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불교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덕후’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불교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불교에 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뿐이었다. 불교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도서관. 그 도서관을 편하게 들락날락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불교연구원을 설립한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를 청강까지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교수가 있었던 인도철학과였다. “치대에서 만난 아내는 처음에 이해를 못했어요. 책 때문에 대학원에 가다니. 그것도 치과의사가 인도철학과에 말이죠. 그래도 2년만 기다리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도서관을 다닐 수 있으니 참아 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학부 출신 학생들에 비해 많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알고 보니 제가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불교학과 학부생들의 교과서였어요.” 그렇게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불교라는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내는 이번에는 선선히 응해줬다.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엔 이미 치과를 차려 개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치과의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하게 됐다. 번역서 통해 불교학계에서 ‘주목’받다 그가 불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번역해 1993년에 발표한 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은 나가르주나(중국에서는 용수(龍樹)라 불림)라는 1800년 전에 활동한 인도의 고승이 쓴 책으로, 나가르주나가 쓴 책들은 대승불교의 뿌리가 된다. 은 인도철학, 불교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동안 이 책은 제대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가 번역하기 전까지. “일반 불교학과는 일본어 정도만 할 줄 알면 됐지만, 인도철학과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언어를 익히는 것을 잘해서, 그간 번역이 안 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불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원전을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다른 학자들이 원전과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죠.” 어쩌면 이 선택도 가장 ‘덕후’다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동안 국내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현직 치과의사가 이뤘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5년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체계화한 개론서인 을 번역해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불교학자 무르띠(Murti)가 영어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내놓은 세 번째 책 으로 학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은 중론을 쓴 나가르주나가 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티베트역본, 한역본이 남아 있는데, 김 교수는 이 3가지 언어를 각각 우리말로 번역해 정확한 뜻과 번역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후학을 위한 문법적 해설도 잊지 않았다. 3가지 책에 대한 번역이 끝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학계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가 아닌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치과 폐업하고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가 준비한 것은, 치과를 쉬고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불교 발상지에 가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학문적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교학에 대한 욕심’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족도 치과도 아니었다. 바로 동국대학교였다. “제가 전공한 공(空)사상 분야의 전공교수님이 건강이 나빠져 퇴직하셨다면서, 그 강의를 맡아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그 분야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해서, 일반 불교학자들 중에도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치과는 그만뒀고. 단지 강의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과의사로,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주저함은 없었어요.” 공사상은 의 ‘색즉시공’을 떠올리면 쉽다.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이나 의식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 흔히 공(空)을 무(無)와 혼동하기 쉬운데,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큰방, 작은방 이런 표현을 하죠. 하지만 어떤 방을 보고 큰방이라고 부를 땐 이미 우리 기준엔 비교할 수 있는 방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그런 이분법적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죠. 게다가 요즘의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더욱 부추겨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늘 비교당하고, 경쟁하는 삶 말이에요. 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 원리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행정과 교육, 문화에까지 도입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프로그램을 보세요. 예술을 도구로 경쟁하고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통한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죠. 결국 크게 소리 지르며, 성량이 큰 사람이 이기는 구도로 변질되잖아요. 노래라는 예술이 큰소리를 내는 시합이 아닌데, 경쟁을 통하다 보니 결국 획일화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는 세대 중 하나가 바로 시니어들이다. 육체적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성과주의로 인해 설 곳을 잃고 사회적 수명은 짧아졌다. 그들에게 김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나름의 노력과 수행이 더해진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삶을 사세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데,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종의 종족 보전 본능이에요. 나라는 개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족을 보존하면서 그 욕구가 충족되는 셈이죠. 거기에 수행을 통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도 있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 욕심,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지울 수 있다면 가벼워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빈자리 채워가며 기여하고파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한국 불교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번역서들을 내놓으면서 기여했던 것처럼. 그가 2014년에 내놓은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화생물학, 일반적으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여겨지는 ‘진화론’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최근 각광받는 뇌과학도 불교적 관점에 분석해냈다. “뇌과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마음’이에요. 뇌파나 뇌의 기능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모두 포용하면서 마음이나 윤회(輪廻)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불교학의 힘이죠.”
- 2016-09-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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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野草 이야기] 장수 마을은 어디에 있을까?
- 에 “고지대 사람은 장수하고 저지대 사람은 수명이 짧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세계의 장수 마을은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역, 일본 알프스의 나가노 현(長野縣) 같은 고산지대나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북 순창군, 제주도 등 해안가에 있다.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은 해발 6000m가 넘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소량은 16.5%, 습도 50%로 건강에 좋은 조건이다.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역은 해발 4000~5000m의 카프카스 산맥으로 이어진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지역을 말한다. 일본의 나가노현은 일본 지역 중 남자가 가장 장수하는 지방이고, 2000~3000m 고산으로 둘러싸여 ‘일본의 지붕’이라 불린다.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은 일본 지역 중 여자가 가장 장수하는 지방이고, 따뜻한 해안가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 서울대 조사에서 해발 200~600m의 산간 지대와 해안가에 장수 마을이 몰려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장수하시는 분들을 조사해 보면 남성 장수자는 강원도 산간 마을에 많고, 여성 장수자는 전남 해안가에 많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 역시 장수 마을인데, 평균 해발 700m의 산악 지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르데냐의 산악지역인 누오로에서는 100만 명당 244명이 100세 이상이다. 그리고 남성 장수자가 여성 장수자보다 많다. 높은 산골에 가서 하룻밤을 자면 남자들은 새벽 발기가 더 잘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남성들에게는 산이 맞고, 여성들에게는 바닷가가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음양의 이치가 바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조깅을 하면 가슴을 움직여 거친 숨을 내쉬는 데 반해, 등산을 하면 아랫배를 움직이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산을 오르다 보면 산소가 엷어지면서 숨이 가빠지는데, 우리 몸은 이를 보상하기 위해 흉식호흡에서 복식호흡으로 바꾼다. 아랫배가 후끈해지는 복식호흡은 단전호흡이나 단전에 뜸을 뜬 효과를 내서, 머리는 시원하게 하고 아랫배는 뜨겁게 한다. 기본적으로 상열하한(上熱下寒)증을 치료한다. 티베트 수도인 라사로 여행 간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은 고산 반응으로 머리가 아프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차만 타면 멀미와 구토... 그런데 움직이지 않던 아랫배가 며칠 지나면서 저절로 들쑥날쑥 복식호흡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고산 반응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때 위장의 연동운동 또한 활발해지며 소화도 호전되었다. ‘신선 仙’자가 ‘산[山]’에 ‘사람[人]’이 붙어 있는 모양을 한 것은 등산과 고산지대 생활이 복식호흡을 도와서 도 닦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네팔의 셰르파족과 구르카 용병이 고산에서도 뛰어다닐 수 있는 것은 고산에 적응해서 복식호흡이 잘 되어 폐활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고차원 티베트 불교가 융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산이란 일교차와 바람이 심한 곳이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은 북극곰처럼 피부가 야물고 단단해야 한다. 천지운기에서는 “중국의 서북지방은 지대가 높고 건조한데, 그 곳 사람들은 추워서 병이 들어도 대부분 땀이 없다”고 했다. 고산 지역 사람들은 주로 붓고 뭉치는 병이 생기며, 땀을 내거나 설사시켜서 치료한다. 고산 지역 사람들은 피부가 단단해져서 몸의 근본 구성 요소인 정액[精], 기운[氣], 정신[神], 피[血]가 잘 갈무리되어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고산에는 항암 효과가 뛰어난 약초가 많다. 중국 육상선수단 ‘마군단’과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늘 복용해서 유명해진 동충하초, 티베트의 4대 약재라고 하는 홍경천, 설련화, 남미 고산의 아가리쿠스 등이 있다. 곡기생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겨우살이도 높은 산의 참나무 윗부분에 기생한다. 이들은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소를 잘 빨아들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세포의 산소 결핍증인 암을 치료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사람 또한 고산에서는 산소를 더 잘 빨아들이도록 변화하기 때문에, 암에 대한 저항력이 커지고 면역력이 높아진다. 등산을 하면 산소 흡취력을 높여줘서 도시 생활에만 익숙해져 약해진 면역력과 저항력을 키워 준다. 해안가도 장수 마을이 많다. 일본 오키나와, 우리나라 전북 순창군과 제주도가 그렇다. 해안가에 자라는 식물들을 보면 짜고 강한 해풍을 맞고 산다. 짠맛은 생명체 속의 물을 빼앗아서 말라죽게 하고, 강한 바람도 생명체 속의 물을 증발시켜 말라죽게 한다. 해안가 식물들은 이런 생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개발했다. 바람을 이기고 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동백나무처럼 잎 표면이 코팅 처리(큐티클 층)되어 있거나, 수분을 많이 머금기 위해 다육식물로 변하거나, 퉁퉁마디처럼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염분을 머금고 있다. 사람도 비슷하게 해풍에 대응한다. 해안가 식물이 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진화하듯,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정액[精], 기운[氣], 정신[神], 피[血]를 잘 갈무리하도록 진화한다. 그래서 피부가 더 억세지는 것이다. 해조류(미역, 김, 파래, 톳, 다시마)가 물을 정화하는 힘은 인체 내에서는 피를 정화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해조류는 혈액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항산화 물질이 많아 LDL 콜레스테롤은 낮추고, HDL 콜레스테롤은 높이며, 고혈압을 내리고, 미네랄을 공급해 준다. 그리고 식이섬유가 많아 대변을 잘 보게 해서 독소를 배출한다. 그래서 해조류는 심혈관계 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좋다. 일본 오키나와와 전남 바닷가, 제주도가 장수 마을로 유명한 것도 해조류의 영향이 크다. 고산과 해안가가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는 없다. 그렇게 척박한 곳 사람들이 장수한다는 것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약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고산에서 적응하기 전에 병이 심해질 수 있고, 피부가 약한 사람은 해안가에 적응하기 전에 해풍과 자외선에 큰 병이 생길 수도 있다. 고산과 해안가가 장수에 좋다는 것은 어느 정도 면역력, 적응력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예방 주사가 좋지만, 너무 약한 사람에게는 무리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해발 고도를 완만히 높여 가거나, 해풍이 적당한 곳에서 적응하는 것이 좋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2016-08-2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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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올해 ‘0’세가 된 현경 교수와 결코 ‘가볍지 않은 우문현답’
-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 2016-08-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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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펑퍼짐한 바지는 가라!
- 필자는 ‘펑퍼짐한 바지’는 거부한다. 바지통이 타이트해 몸에 짝 달라붙고 길이도 조금 짧아 구두 뒷굽을 가리지 않는 디자인을 입는다. 색깔 역시 노색이 아닌 밝은 계통을 선택한다. 윗도리도 붙는 형태의 것으로 입어 타이트한 바지와 궁합을 맞춘다. 예전엔 위아래 옷이 모두 헐렁한 것을 선호했다. 활동에 편함을 주어서였다. 나이가 들 대로 든 사람이 몸에 끼이는 옷을 입을 경우 보는 사람들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바꾸기 싫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자주 옷을 사지는 않아도 한마디로 젊은 티가 푹푹 나는 옷을 즐겨 입는다. 규율적 교복, 직장인 양복에서 진정한 패션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혼사에 갈 때도 넥타이를 맨 정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자주 청년 같다고 말한다. ◇점잖은 옷을 고집했던 인생일막 필자의 패션(패션이라는 말을 쓰기 뭣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은 젊을 때부터 ‘‘젊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선 옷이 우장 같이 커 펑퍼짐한 것을 입었다. 활동에 더 편한 옷을 선택한 결과다. 색감도 칙칙한 걸 좋아했다. 특히 검은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필자가 입은 꼬락서니를 보면서 사람들이 우울해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니어가 되면서 젊고 멋스러운 옷에 자꾸 눈이 갔다. 아마 오래된 펑퍼짐함과 칙칙함에 대한 싫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시니어’라는 존재적 본질 때문에 스스로 이런저런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속 노티 풀풀 나게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게 무엇보다 익숙하고 편했다. ◇의류업계에 취업한 아들에게 옷가지 선사 받고선… 큰아들이 부산에 본사를 둔 의류업체에 취업했다. 간혹 필자에게 옷가지를 선물이라며 주었는데 모두 그 회사의 최신 패션 브랜드였다. 받은 옷이니 버릴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꽉 끼고 색깔이 튀는 옷을 입게 되었다. 처음 입을 땐 엉덩이가 끼어 못 입겠더니 자꾸 입으니 생각보다 편했다. 필자는 사진작가여서 야외활동을 많이 하는데 이제는 야외에서 입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다. 색깔도 처음엔 다른 사람 보기에 민망했지만 이 역시 익숙해지니 괜찮았다. 옷도 술과 마찬가지로 중독이다. 아들 회사 브랜드를 자꾸 걸치니 이제는 종전의 스타일인 펑퍼짐하고 칙칙한 바지는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신발도 예전의 직장인 티 풀풀 나는 스타일에서 신세대 형태로 바뀌었다. 양말 역시 목이 짧은 것을 신는다. 예전에는 양말과 구두를 옷장과 신발장 제일 위에 있는 거부터 신었는데 이젠 바지 색깔에 따라 변화를 주기도 한다. 더구나 반가운 것은 이런 차림으로 나서면 실제 나이(67세)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때로 10살 어리게 나이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 얘기 다 믿을 순 없지만. 남들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젊게 옷을 입다 보니 마음과 행동도 젊어진다는 것이다. 또 젊은 감각의 옷은 이웃에게 즐거움을 준다. 불교에서 무재칠시(無財七施ㆍ돈 없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중요하게 여기듯 필자의 경쾌한 스타일이 이웃의 눈에 즐거움을 주면 그 자체로 공덕 아니겠는가.
- 2016-08-0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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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물 머리와 세미원의 만남
-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즉,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세미원.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의 물 머리가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 두 물 머리. 그 유유하게 흐르는 넓은 강줄기와 화사하게 피어난 연꽃들로 조화롭게 탄생된 물의 정원은 참으로 경이로 왔다. 월요일 아침, 필자는 말로만 듣던 세 미원을 향해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블로그 모임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오랜만에 설레는 경춘선 전철을 타고 호평 역이라는 곳에서 내려 합류를 했다. 처음 맞이하는 호평, 평내라는 도시는 완전한 신도시의 자리매김으로 신선한 호감이었다. 국도를 따라 양평 쪽으로 향해 달리는 길은 멋들어진 카페 촌과 먹거리와 맛 거리의 축제였고, 바람 속으로 달려가는 자전거를 탄 남녀의 합창은 낭만으로 가득 찬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일행은 양수리 시장이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간판 앞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연꽃 잎으로 꼭꼭 쌓여진 영양찰밥과 각종의 먹거리로 가득한 시골 음식잔치의 진지상이라는 곳으로 갔다. 처음으로 맛보는 각양각색의 전통적 음식들은 필자 부부에게 대만족이었다. 남산만큼 부풀어 오른 무거운 배를 안고 곧바로 세미 원으로 향했다. 주위 사람들이 수시로 올려대는 사진 속의 연꽃 현장을 빨리 눈으로 맛보고 싶어서였다. 월요일의 한가로움에도 주차할 곳은 넉넉지가 않았다. 두 물 머리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예전에는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한다. 척박한 불모지, 수몰지역으로 버려진 하천부지를 개조하면서, 주민과 정부 환경단체가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시킨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가장 먼저 두 물 머리에서 냄새나는 각종의 오물들을 수거하고 그곳에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난 연꽃들을 심었다고 한다. 넓은 호수에는 연꽃과 수련, 창포를 심었다. 여기저기 6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그곳을 거쳐 흘러 들어가는 한강물은 자연히 정화가 되었다. 인체에 해로운 중금속이나 부유물질들을 거의 제거시켜 주었고, 그 후에는 깨끗하게 팔당댐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도록 재구성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수생식물을 이용한 수질개선으로 기막히게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정화공원이 탄생된 것이다. 두 물 머리와 연꽃 가득한 세미 원을 이어주는 첫 번째 다리는 작은 배로 이어진 배다리였다. 출렁거리는 다리 위로 몸을 흔들어대는 젊은 남녀는 신기함에 웃음이 만발한다. 다리를 건너 곧바로 이어지는 흙 길에도 돌 빨래판들이 길게 나열되어 참으로 이색적이다. 눈에 들어오는 세미 원의 넓은 공원에는 수많은 새색시 같은 연꽃들이 고고한 자태로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불교의 상징이기도 한, 연꽃은 아무리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도 오염에 물들지 않고, 청결하고 고귀하게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 이 꽃은 7월에 피어나서 무더운 8월이 되면 고개를 숙이는 한 여름의 꽃이라고도 한다. 연꽃들은 은은하게 뿜어내는 향기마저도 멀어지면 질수록 더욱 향기로워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는 말도 있었다. 낮 동안에 활짝 꽃잎을 열었던 연꽃은 오후가 되면 수줍은 듯 살짝 잎을 오므린다. 분홍색 백색 의 꽃봉오리는 단아한 자태로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꽃말도 순결 또는 청아한 마음이라고 하는가 보다. 어떤 유혹에도 물들지 않고 구슬처럼 영롱하게 물방울을 잎에 맺히며, 그 향기로 찌든 중생들은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세미 원을 탄생시킨, 두 물 머리의 일출과 일몰 광경은 사진 작가들에게 아주 유명하다고 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절묘한 만남으로 이어져,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 안개와 연인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사진촬영들은 그 진가를 더한다. 옛 영화의 스토리가 얽힌 나루터와 호젓하게 떠있는 황토 돛단배, 늘어진 수양버들의 정취는 강가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해 내고 있어, 지친 삶의 힐링 장소가 되기에 아주 충만한 시간이었다. 더럽고 쓸모없는, 냄새가 가득했던 곳을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창조물은 참으로 위대한 탄생이었다. 많은 대중들에게 더러워진 마음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혼탁한 세상에서 꽃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창출해주는 인간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요즈음같이 정신없는 세상에 여유롭게 흐르는 두 물 머리의 강물처럼 넉넉하고, 세미 원의 연꽃과 같은 청아한 향기가 묻어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 부부는 보람찬 하루를 남겼다. 진정으로 힐링이 가득 넘치는 시간이었다.
- 2016-07-2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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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여행기] (2)대중교통 능숙하게 이용하기
- 피부로 느끼는 여행의 설렘은 비행기 바퀴가 이륙하는 그 순간부터다. 요행히 공항에 일찍 도착한 덕에 차지한 비상구 자리는 이코노믹 증후군에 안전한 편이었다. 하긴 5시간 10분 정도면 비행기 여행치고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어쩌다 까다로운 티케팅 직원을 만나면 필자 같은 쉰 세대에게 그 자리는 어림도 없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승객 대피에 도움은커녕 민폐만 끼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2편과 식사 1번으로 가볍게 도착한 방콕이 딴 나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은 여권 검사자의 느려터진 동작에서부터다. 외국인에게도 허락된다면 인천공항처럼 자동 검색기에 등록하고 싶을 지경이다. 참으로 느긋하다. 이 또한 느림의 미학이라 해야 할지. 그들은 말씨마저 ‘~카아’ 하며 친절하게 쭈욱 뽑아대니 영화 의 나무늘보가 생각날 지경이다. 그런데 방콕에서 신기하게도 빠른 것이 있다. 물론 사람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아 신이 나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온 우리는 적응이 안 된다. 이렇게 빠르면 고령자들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느린 사람들이 씽씽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멀쩡하게 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느린 그들은 인내심도 대단하다. 서울을 능가하는 방콕의 교통 체증에도 모든 차는 조용히 기다린다. 도심 골목골목도 다 차들로 가득한데 불행히도 주차된 차가 아니고 시동 걸린 차다. 필자가 볼 때 그들은 거의 득도의 경지다. 일 년 내내 더위를 견디다 보니 그런 인내심이 생긴 건지 불교 신앙의 탓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도심 곳곳은 물론 심지어 쇼핑센터 앞에도 불상, 향 피우는 곳과 간단한 제물들이 놓여 있으니 종교 덕분도 있는 듯하다. 방콕에서 여행자가 이용하기 손쉬운 교통수단은 택시와 지하철이다. 택시를 이용할 때에는 합법적인 ‘우버 택시’가 좋다. 우선 우버 앱을 스마트폰에 깔고 서울에서 카카오택시 부르듯이 전화만 하면 된다. 택시를 부르는 순간부터 그 차가 진행하는 것이 휴대전화 지도상에 뜬다. 요금도 정확히 찍혀 나오니 흥정하거나 싸울 일도 없다. 한 가지 중요한 팁은 우버 택시를 처음 이용할 때에는 약 9천 원 정도를 깎아준다. 두 사람이 가면 두 번을 아주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도 공항을 오갈 때 사용해 택시비를 한 번에 3천 원 정도로 해결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순간이다. 지하철의 시설은 우리나라보다 못하지만, 요금은 더 합리적인 편이다. 정거장 수에 따라 대여섯 가지로 차등을 두었다. 정기권이 아닌 경우 매표기에서 사야 하는데 반드시 동전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불편했다. 지폐밖에 없을 때는 일일이 창구에 가서 동전으로 바꾸자니 번거로웠다. 왜 지폐도 되는 매표기를 놓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정류장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같은 곳에 선다는 점이다. ‘~행’이라고 쓴 것이 우리나라처럼 조금 더 가거나 덜 가는 거려니 하고 무심코 탔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마냥 갈 수도 있다. 외국어라 발음이 낯설어 언젠가는 방송이 나오려니 하다가는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여행자가 많은 방콕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다 모이지만, 중국 사람은 매번 싸우듯이 떠드니 어디서나 튀어 실제보다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매일 한국말이 어디선가 들린다. 요즘은 대개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거나 채근하는 소리다. 그것도 주로 빨리하라는 얘기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뭐든 빨리 못해 애가 탄다.
- 2016-07-1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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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제사 변천사
- 어렸을 적 제사는 꽤 부산했다. 필자 집이 장손으로 친척들이 다 모였었기 때문이다. 제사는 하필이면 한밤중에 지냈으므로 그냥 안 자고 기다리거나 자다가 깨우면 일어나서 제사에 참여해야 했다. 대부분 잠들었다가 한 밤중에 일어났다. 온수도 없을 때였으므로 찬 물에 세수하는 것이 싫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쇠고기 산적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쇠고기 산적은 먹기만 하면 한 보름은 위에서 신물이 올라와 고생해야 했다. 고기도 안 먹다가 먹으면 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셨을 때는 아들 역할을 자청하던 목사 주관으로 추도식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을 가득 채우던 음식도 없이 간단히 추도식을 한다는 것이 보기에 안 좋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업을 하는 둘째는 전통방식으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그래서 한 동안 제사를 종교별로 1부 추도식, 2부 전통식으로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다시 전통식으로 돌아 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우리 형제들이 주관하여 집안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냈으므로 설과 추석까지 하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가 꽤 자주 있었다. 어머니 혼자 제사 음식을 준비하다가 점차 나이가 들자 며느리들이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첫째 형님은 돌아가시고 나서 형수님이 혼자 오려고 하지 않았다. 무릎 수술까지 해서 거동도 불편하니 도움도 되지 않았다. 둘째 며느리는 아이들 교육 차 늘 캐나다에 가 있고 셋째인 내 아내는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적어도 일박을 해야 하는 제사 음식 준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넷째 며느리에게까지 차례가 간 것이다. 어머님이 8순이 되자 더 이상 힘들어서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곤란하다고 했다. 장자 역할을 하는 둘째가 모셔가야 하는데 시내 절에서 제사를 치르자는 제안을 했다. 남부터미널 근처의 절인데 회비만 내면 절에서 제사를 집행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 형제마다 종교가 달라 불교식 염불에 맞춰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편했다. 둘째 형님은 사업 상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며 굳이 고조부 제사까지 모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2세들이 평일 제사에는 직장 퇴근이 늦어 참석이 어려웠다. 청년 취업난시대에 제사지낸다고 일찍 퇴근하다가 밉보이면 안 되니 오지 말라고까지 했다. 어머니도 무릎이 안 좋아서 더 이상 참석이 어렵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만 모이다 보니 제사의 원뜻인 돌아가신 분을 추념하고 그 때문에 모인 산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취지가 무색해졌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면 제사를 지내는 중간에 서로 대화도 한다. 그러나 절에서는 2시간 동안 제사를 주관하는 스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불경을 따라 읽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럴 바에는 절에서 지내는 제사를 재고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차라리 제사를 우리 형제들 집에서 돌아가며 단출하게 직계 부모만 지내자고 했다. 형식적인 제사상을 차리지 말고 참석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상을 차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2세들이 모일 수 있게 주말을 택해서 모이자고 했다. 어버이날이나 생일도 그렇게 한다. 당일이 평일이면 모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세대는 우리가 죽고 나서도 2세들에게 제사를 강요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산소도 없고 유골을 산이나 강물에 뿌리기도 한다. 시대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기일에 꽃다발 들고 유골함 모신 곳에라도 와주면 고마울 정도이다.
- 2016-07-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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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민이야기 (1)이산가족의 만남
- 1998년 8월 남편은 왕복 비행기 표 1장과 이민 가방에 달랑 옷가지 몇 벌을 담아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6개월에 걸쳐 필자가 설득시키고 단행한 1차 이민이었다. 온 나라에 경제 위기와 그 도미노 현상으로 가정이 휘청거려 별다른 대책이 없어 무조건 단행한 모험이었다. 온 살림에 빨간 딱지가 붙고 집은 경매로 날아갔다. 게다가 여기저기 쏟아지는 빨간 독촉장들,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정신적 싸움에서 오는 고달픔은 차라리 휴식이 필요했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낯선 곳이지만 먼저 가서 여기저기 살펴보기 위한 작전이었다. 큰딸은 미국 고등학교 기숙사로 보내고 초등학교 작은딸만 데리고 가느라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무너져가는 가정을 직접 나서서 수습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떠나고 1년 후, 남편의 미국 생활은 그럭저럭 안정을 취해가는 것 같았다. 코리아타운에서 세탁소 일자리를 찾았고 얼마 안 되는 주급(주말마다 정산해줌)이었지만 혼자 생활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수시로 국제전화로 연락하며 아이들 걱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남편이 떠나고 난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살림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태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나갔다. 막내로 태어났으나 큰아들 같은 남편은 힘든 것 다 견딜 수 있는 데 너무 외롭다고 전해 왔다. 서둘러서 작은아이 미국 비자를 만들어 이듬해 8월 이민 가방을 챙겼다. 작은 아이마저 보낸 그해 9월의 계절은 그림자들로 가득한 기나긴 방황의 몸서리치는 고독한 시간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극적인 상봉을 위해 기숙사에 있는 큰딸과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빠와 작은딸, 큰딸과 엄마, 눈물의 오작교 시간이었다. 남편은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까맣게 탄 노동자 얼굴로 덜덜대는 중고차를 끌고 나와 포옹하며 가족을 맞이했다. 온 가족은 만나자마자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있는 북창동순두부 집으로 달려갔다. 값싸고 한국 정서가 담겨 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소박한 음식이었다. LA에서는 한 번씩 거쳐 가는 꽤나 이름난 곳이었다. 얼마나 맛나게 먹어대는지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남편은 부자 동네 아고라힐의 커다란 성 같은 집(방 5개짜리)에서 작은 방 하나를 한 달에 550달러에 렌트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아이를 맞이하며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옮겨야 했다. 중학교 입학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한국 아이들이 없는 곳, 코리아타운에서 먼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왜냐하면 한국 아이들이 많은 코리아타운은 영어가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씨미벨리 집은 남편이 나가던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 목사님 집의 방 두 개를 900달러에 얻어 마련했다. 남편은 불교 가정 출신이나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갔다. 교회만이 유일한 한국 사람들과 교류의 장소라며 주보 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국은 딸과 한방을 쓰는 것은 불법이어서 방 두 개짜리를 장만했다. 부엌은 없었으나 마당이 딸린 자그마한 예쁜 주택이었다. 가족은 큰방 옆에 붙어 있는 그라지(차량을 넣어두는 창고)에 조그마한 부엌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함께하니 짧은 시간 안에 대충 그럴듯하게 아기자기한 부엌이 탄생했다. 누구나 처음 이민 오면 그렇듯이 이 사람 저 사람 살림을 가져다주었다. 짝 잃은 총천연색 그릇들이 부엌 풍경을 장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가족은 이사를 마친 후 코리아타운으로 달려가 삼겹살과 상추 등 각종 채소를 사와 파티를 벌였다. 미국 백인 동네에서 모처럼 만에 조우한 한국 이산가족은 한국 사람 사는 냄새와 삼겹살 내음이 넘실거리는 행복에 취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 2016-06-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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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고난과 실패로 무르익는 ‘인생의 가을’ -고전평론가 고미숙
- 우리가 살면서 겪은 고난은 몇 가지나 될까? 고통으로 몸서리치던 날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고난이 아닌 인생의 한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실패와 우여곡절로 다듬어진 조각들이 모여야만 인생의 큰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高美淑·56)씨다. 그녀는 중년 이후 삶의 여정에 는 훌륭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그녀는 를 리라이팅하며 를 다시 봤다. 그전까지만 해도 는 만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만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인간이 왜 이렇게 긴 여행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가 담겨 있다는 것은 중년 이후 정독(精讀)하면서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남녀노소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그동안 생각해온 철학적 사유나 구원의 문제 등이 어우러져 있었죠. 정말 최고였어요. 아마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손오공이나 요괴 등의 캐릭터에 집중할 것 같아요. 하지만 중·장년이 읽으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대비해 굉장히 많은 인식의 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막상 이런 장편을 읽으라고 하면 중·장년은 ‘내가 책을 놓은 지 오래됐어’, ‘한동안 공부를 안 했는데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서지만 는 정말 쉽거든요. 심오하거나 고상한 것 없이 나를 아주 편안하게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 주는 책이죠.” 인생의 안전띠 ‘고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14년간 10만8000리를 걸으며 총 81가지 난(難)과 마주한다. 이들은 108 요괴와 대적하며 구법과 구원을 위해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한다. 위험천만한 고비가 많지만, 고난과 실패 없이 사는 삶이 훨씬 위험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젊어서는 성공과 에로스를 향해 달려가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앞만 보고 달려왔어. 이제 나는 뭐하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할 뿐이죠. 오히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게 다행이에요. 그러면 걸려 넘어질 테고, 더 달려가지 못하잖아요. 그게 결국 날 구하는 것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야 알아요. 젊을 때는 걸려 넘어지면 ‘나만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은 다 그래’라고 이해하죠. 그때부터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81난을 겪어야만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덜어낼 수 있다는 의 내용처럼, 인간은 자랑스러운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살면서 몇 가지 난을 겪었느냐”고 종종 묻는다. 대부분 대답을 들어보면 몇 가지 꼽지 못한다고. 그런 그녀는 그동안 몇 가지의 난을 겪었을까? “굉장히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어요. 현대인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고루 겪으며 살았죠. 그런데 나중에 고전을 공부하면서 ‘과연 그런 것들을 안 겪는 게 더 좋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겪은 것들이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에는 그런 고난이 날 너무 무겁고 힘들게 했죠.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가 뭘 알아?’라는 식으로 주변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런 환경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둬두고 있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자발적으로 고난에 뛰어들면 구법의 여행이 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 상처가 된다는 것을요.” 결국 과거 고난은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난은 없는 셈이었다. 그녀는 고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약자가 되어 트라우마라는 착각을 핑계거리 삼는다고 지적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강하려고 온 게 아니라 생고생을 자처해서 온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을 즐기는 거죠. 갖은 고생을 해서 한고비를 넘겼을 때만큼 뿌듯한 것도 없잖아요. 고난을 통해 내가 변한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실패는 두렵지 않아요. 기꺼이 대응할 수 있죠.” 인생의 가을, 청춘으로부터의 해방 그녀는 중년을 가을이라 표현한다. 인생의 봄, 여름을 지나 겨울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만큼 삶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생기는 시기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년에는 자기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 해요. 젊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기술적인 것이나, 전문적인 것에 치중하죠. 중년이 되면, 스펙이나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단기적인 목표도 아니죠.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삶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 그것을 걸고 공부해야죠. 그런 공부 없이는 노년을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술이나 쾌락에 빠질 테고요. 그런 것을 뛰어넘으려면 진리와 접속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진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질문은 저절로 생기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회피하죠. 청춘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도망가려 해요.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라고 탄식하며 말이죠. 가을이 됐는데 봄을 모방하는 것은 가을의 정취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보면 봄이 썩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않았어요.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1위가 20대예요.” 하지만 인생의 봄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터. 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닐지 의아했다. 이러한 물음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경제력이나 명성, 능력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돌아갈 만하겠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노하우에 몸은 젊으니까요. 나는 젊은 시절의 무능한 상태가 싫었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죠.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많고 세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요. 이게 좋은 것 아닙니까? 폐경기가 되면 또 어때요. 나는 여자다울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롭잖아요. 어려서는 얼굴에 점 하나도 큰 고민거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자잘한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게 바로 청춘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죠.” 진정한 노후대책은 ‘유머’를 갖는 것 에는 81난이 나오지만, 상황이나 인물의 행동 등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 단순히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의 매력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유머를 겸비해야만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고, 세대 간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지혜롭죠.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에 유머가 없으면 바로 설교가 돼버려요. 정말 옳은 말인데 듣기가 싫은 거죠. 그게 세대 갈등의 포커스예요. 노인은 정말 못지않게 많은 고난을 겪은 분들이잖아요. 하지만 그 경험들을 이야기할 때,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해요. ‘너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노년세대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태도로 전달하면 소통의 벽이 생겨요.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대화를 못 하면 혼자 떠돌아 다녀야 하는데. 돈에 대한 설계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제시한 노후대책은 한 가지 더 있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라는 것. 그리고 오늘을 소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되고, 대부분 중·장년이 30년 뒤를 생각하며 부담을 느끼죠. 하지만 그럴수록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인식해야 해요.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억울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를 굉장히 집중해서 살 수 있어요. 앞으로 100세까지 뭘 하고 사느냐를 걱정하는 것은 내 삶을 유예시키는 것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한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또 언젠가 그날이 온다 해도 현재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고민은 도움이 되지 않죠.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오롯이 살기 위한 것이에요. 거기에만 소용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진정한 노후대책 아닐까요?”
- 2016-03-11 0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