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림을 취미로 하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 사이에 회자되었다. 배우 김혜수와 구혜선의 그림이 아트페어에 걸린 이야기가 화제가 되더니, 배우 하정우의 그림이 수천만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다 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으로 ‘아트테이너’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그림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유희’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젤을 세운다. 그리고 하얀 캔버스를 올려 조금씩 스케치를 한다. 아마 노후의 취미생활을 꿈꾸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의 ‘201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는 53.2%가, 60세 이상은 56.4%가 노후를 보내고 싶은 방법으로 취미활동을 꼽았다. 자원봉사나 종교활동 등 다른 활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실제 여유시간을 보내는 여가활동으로 50대의 72.2%가, 60대 이상의 81.2%가 가장 간단한 TV 시청을 꼽았다. 대다수가 이상과 현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응답은 3%도 되지 않았다.
심리적 장벽이 높은 취미 ‘미술’
미술은 시니어들을 위한 취미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분야 중 하나다. 시니어 대상 교육기관에서 미술은 빠지지 않는 단골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붓을 손에 쥐지 못하는 시니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선입견이라고 권인수 화백은 설명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서 5년째 일반인과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화실 ‘아트담’의 대표이기도 한 권 화백은 회화나 미술에 대한 편견이 장벽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가 입시 교육에 집중하면서 학생들이 미술, 그러니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초등학교에서 멈춘 셈이죠. 잘 못 그리는 것이 당연해요. 그런데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에요. TV 프로그램 에 나오는 수많은 달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랜 직장생활과 노력 덕분이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선입견 중 하나는 그림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것.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만 따지면 결코 그렇지 않다. 화실 수업료를 제외하면 이젤과 물감, 붓 등의 구매비용은 25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사진이나 자전거 등에 비교하면 되레 저렴한 취미인 셈이다. 이나마도 캔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강습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기관도 있다.
학원…화실…본인에 맞는 곳 선택을
실제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주변에서 ‘스승’을 찾는 일이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회화 등 미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각 자치구가 운영하는 문화회관과 백화점 등이 운영하는 문화센터가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이나 화실 등이 있다.
구청 문화회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는 다른 취미와 병행이 쉽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육 인원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강사가 1대 1로 지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학원은 입시 미술을 겸하거나 정해진 강의 위주로 운영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고, 화실은 1대 1 지도를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미술학원은 대학 인근에 많고, 화실은 반대로 주거지역 주변에 많다. 수업 형태나 시간, 수업료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충분히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본인에게 맞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림이 시니어에게 주는 장점은 다양하다. 미술 수강생들은 운동에 비해 체력적으로 제한이 없는 취미이면서, 고도의 집중을 통해 잡념을 사라지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11년째 송파에서 화실 ‘모노그라프’를 운영 중인 서양화가 김용일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시니어들에게 제공하는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생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죠. 적은 비용에 비해 얻는 성취감도 크고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배우면 남에게 그림을 선물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서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자존감도 상당합니다. 그룹 전시회를 통해 본인의 그림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팔리는 경험은 시니어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화실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통한 사회활동도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주는 매력 중 하나다. 앞서 소개한 아트담은 인근 구치소 면회자들을 위해 대기실에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고, 모노그라프의 경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그림 봉사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시회 활동은 그림에 대한 욕구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일부 지역의 경우 화실은 체면을 내려놓는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고소득층 수강생들이 많은 한 화실의 관계자는 “재벌이나 정치인, 연예인 등이 신분을 숨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유난히 걸레질이나 설거지에 열중했던 한 회원이 지자체장의 부인이라고 밝혔을 때 주변에서 적잖이 놀란 적도 있어요. 사교를 위해 일부러 모인다기보다, 본인의 원래 모습을 찾아 순수한 문하생으로서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니 관계가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는 치매 예방에 큰 도움
그림은 심리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의 신경과 전문의 로즈버드 로버트는 지난해 발표한 연구 논문을 통해 “그림 그리기 등 노년의 미술 활동이 경도인지장애(치매의 전 단계)에 걸릴 가능성을 73% 낮춰준다”고 발표했다. 그는 4년간 256명의 85세 이상 노인을 관찰했는데, 미술 활동이 수공예(45%), 사교활동(55%), PC활용(53%)보다 인지기능 보호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경도인지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미술 활동을 통해 마음과 정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손의 미세한 운동과 관련된 신경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극들이 신경세포의 퇴화를 방지하고, 새로운 신경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인지기능 유지에 사용되도록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신경가소성 효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그림 창작활동은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시니어들의 전반적인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술 활동은 인지기능이나 창의력 향상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추억 회상을 통해 의미있는 대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의사 소통 능력도 향상시키죠. 자아감이나 자존감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심지어 치매환자 간병인의 삶의 질까지 향상시킨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가르치고 있는 류영선 강사는 “소질을 걱정하는 회원분들에게 관심이 곧 소질이라고 늘 말씀드려요.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니까요. 실제로 시작하고 나면 기대 이상으로 쉽게 적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붓을 잡고 행복하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는 회원분들을 보면 다른 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지난 6월 28일 서울 중구 정동 산다미아노 소회의실에서 (사)다문화교류네트워크에서 진행한 맘마미아 어머니 IT스쿨 수료식이 있었다.
박미라 사무총장은 “어머니 IT 스쿨은 SNS 사용이 서툰 다문화여성들이 블로그나 카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익숙하게 사용하고, 이를 통해 다문화구성원들과 원활한 소통함으로써 행복하고 안정된 다문화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 목적이다”고 했다.
2월에 시작해 6월까지 4개월 동안 격주로 진행된 수업 마지막 날, 다문화 여성들과 서포터즈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료증을 받고, 자신들이 만든 동영상을 감상했다. 지난 수업을 되돌아보며 몰라보게 향상된 실력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번 교육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멋진 사진 찍는 법과 SNS 운영법을 배우고 서울의 명소나 문화공간을 찾아 직접 실습을 한 후, 각자의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써보는 것까지 함께 했다. SNS가 서툴고 두려운 사람들도 다행봉사단 서포터즈의 1:1 멘토링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이어진 사진 강의 덕분에 다문화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다문화 여성들은 카페나 블로그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줍게 올린 글과 사진에는 “색감이 좋고 예뻐요”, “사진 잘 찍으시네요”, “감각 있으십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처음엔 서먹했던 사람들도 교육을 받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고 댓글을 주고받으니 금방 가까워졌다.
실습을 위해 다문화여성과 서포터즈들은 짝을 이루어 서울 명소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이화동벽화마을, 정동길, 서촌, 남산길, 창덕궁후원 등 서울 곳곳을 다녔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서울 명소들을 사진으로 찍고 SNS로 공유해 서울 알림이 역할도 해냈다.
교육생들은 수업 후 달라진 점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자신감을 꼽았다. 예전엔 길을 가다 누가 사진 찍어 달라 부탁하면 도망가고 싶었는데, 이젠 자신 있게 찍어줄 수 있는 실력이 생겼다. 또한 멋진 사진을 찍고 나면 SNS에 올리고 싶어진다는 점도 큰 변화다. 문명남(중국) 씨는 “매일 남의 글 보기만 했었는데 이젠 내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건 물론, 동영상까지 만들 줄 알게 됐어요” 라며 “SNS가 즐거워요”라고 행복감을 드러냈다.
이 프로그램이 다문화여성들에게만 유익했던 건 아니다. 한국인 서포터즈로 참여한 이경희 씨는 “다문화여성들과 이번 교육을 함께 하면서 자신도 많은 것을 배웠다”며 “덕분에 잠자던 블로그를 깨워 매일매일 일기 쓰듯 사진하고 글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한흥옥 씨는 “블로그를 해보지 않은 분과 머리를 맞대고 블로그 만드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정하고 블로그를 만들어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도록 돕고 나니 보람이 컸다”고 했다.
사진 강의를 맡은 오은미(사진강사) 씨는 “사진 찍는 것에서부터 포스팅까지 한자리에서 가능한 수업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기량이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어 프로그램이 잘 기획됐다는 것을 느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번 수업에서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을 모아 오는 7월 20일 종로구 충신동 가나의 집에서 전시와 발표회를 열 예정이다.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교사 시절,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선 백 대표는 이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광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통증과 빈뇨(頻尿)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찾은 그녀는 ‘발작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비뇨기과를 수소문해 가보고, 좋은 치료법이라면 뭐든 해보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몸이 아프고 집에 있으면 정말 울음밖에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병에 좋다는 건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 낫더라고요. 암 같은 병도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치료를 해가며 집에서 지냈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참 더디고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 대표는 “꽃구경 가자”는 동생의 권유로 양재동 꽃시장 구경에 나섰다. 그때, 순백의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꽃 한 송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발도리’라는 야생화였다. 말발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당장 꽃을 사려 했지만 꽃가게 주인은 “그 꽃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백 대표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주인이 꽃을 파는 대신 야생화 강사를 한 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야생화를 배운다는 건 생소했죠. 시민녹화교실이나 분재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야생화를 배운 건 그때부터였어요. 점점 집에 화분이 늘어났고, 제 삶도 활기를 더하게 됐죠.”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았을 때는 패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잦은 고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야생화와 함께할수록 베란다에 화분이 가득해졌고 백 대표의 일상에도 한층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고통으로 눈물짓던 그녀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중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꽃에 집중하다 보니 화장실도 차츰 덜 가게 됐고, 화분에 물을 주고 다듬는 등의 활동이 소근육 운동이 돼 몸도 건강해졌어요.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도 낫지 않던, 그야말로 난치병이었는데 말이죠. 모두 야생화 덕분이에요. 그런 야생화가 많아져서 좋았지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공간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고마운 아이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죠. 야생화를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어요.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즈음 화분 수는 200여 개에 이르렀다. 백 대표는 동생과 함께 전원주택이 있는 지역을 둘러봤고, 고심 끝에 현재 백경야생화갤러리가 있는 서원마을(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정착했다.
“동생 도움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기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동생이 ‘언니 우리 함께 살며 의지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죠. 그 말에 힘입어 식구들을 설득해 두 가족이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야생화 갤러리를 꾸밀 수 있는 ‘모던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설계했어요. 함께 살다 보니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죠. 무엇보다 야생화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요.”
‘서로가 원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서원마을에 온 지도 어언 7년. 화분은 점점 늘어나 이제 600여 개에 달한다. 보살펴야 할 꽃이 많아지면서 백 대표의 손길은 더 분주해졌다. 야외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피부도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져 갔다. 백 대표는 이 마을에 오고 자신의 건강이 95% 정도는 회복됐다고 자부한다. 몸에 활력이 생길수록 야생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갤러리를 찾아온 분이 ‘원예치료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처음 그 단어를 듣고는 ‘아, 꽃도 아플 수 있으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물을 이용해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더라고요. 괜찮겠다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리큘럼이 있었어요. 그 길로 등록하고 논문 쓰고 실습도 다니며 원예치료사 자격을 취득했죠.”
전문가가 되고 나니 강사 자격으로 야생화갤러리, 유치원, 주간노인복지요양원 등에서 야생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던 덕분에 수강생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이들이기에 수업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다.
“꽃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 얼굴을 보면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게 꽃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자기가 필요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이라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느라 야생화 교실이 뜸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백 대표다.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여자들은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야생화갤러리에 와서 꽃도 보고 수다 떨고 하는데 저는 그냥 오라고 안 해요. 기왕 오는 거 옷도 아름답게 입고 예쁜 앞치마도 하나 가져오고 기분 좋게 찾아오라 이야기하죠. 여기 오면 바람도 선들선들 불고 우리끼리 소통하면서 꽃과 함께 예쁘게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공간에서 그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요.”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1. 평생교육원에서 智 학점 올리기
학점은행제, 총장 명의, 교육부 장관 명의 등의 방법으로 학점을 이수하는 학사학위과정을 비롯해 국가공인 자격증 과정, 비학위 교양 강좌 등을 등록할 수 있다. 1984년 이화여자대학교 봄 학기 개강을 시작으로 현재는 대부분의 대학이 각 학교의 특성에 맞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장년에게 유익할 만한 수업 몇 가지를 소개한다.
△ 이화여대 글로벌미래평생교육원 '시니어 컨설턴트'
100세 시대의 사회 상황과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인생 후반기 생활 설계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제공한다. 자신을 위한 행복 노후 설계뿐만 아니라 나아가 타인의 삶을 지도할 수 있는 컨설턴트로서의 역할을 목표로 한다.
강의 정보 주 1회 15주 과정, 수강료 40만원
세부 커리큘럼 매력 있는 시니어 이미지 메이킹/ 행복의 느낌 찾기/ 인간관계 명품의 법칙/ 음식을 통한 건강관리 웰빙 장수 웃음법 등
△ 서울대 평생교육원 '고령사회의 웰다잉 전문가'
웰다잉(죽음 준비) 교육을 통해 죽음을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대면할 수 있는 지적, 정서적, 영적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 비해 죽음이 가깝고, 노년 세대에 비해 더 긴 시간 동안 죽음에 대해 준비할 수 있는 중·장년 세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강의 정보 주 1회 15주 과정, 수강료 50만원
세부 커리큘럼 교양 강의 3주 + 성찰 강의 3주 + 결정 강의 8주 + 마무리 1주
△ 고려대 평생교육원 '품위 있는 글로벌 매너와 이미지 메이킹'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아야 할 기본 생활 예절과 비즈니스 매너, 우아한 식사를 위한 테이블 매너, 상황별 표현법과 호칭, 해외 여행 예절 등을 학습한다.
강의 정보 주 1회 15주 과정, 수강료 30만원
세부 커리큘럼 동·서양 식사, 음주 예절, 다도(茶道)와 이미지 컨설팅/ 글로벌 여행 예절(비행기, 호텔, 팁 등)/공연장 등 공공장소 예절/ 젊은 뇌 유지 비결과 스피치 훈련 등
△ 아주대 평생교육원 '부동산경매투자비법'
노후 대비를 위해 부동산 투자에 대한 확실한 학습을 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부동산경매투자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론과 그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 임장활동을 중심으로 입지와 공법상의 제한내용, 시가 등을 분석한다.
강의 정보 주 1회 15주 과정, 수강료 40만원
세부 커리큘럼 매수인이 꼭 알아야 할 경매절차/ 주택 임대차보호법 해설/ 좋은 물건의 선정과 임장활동방법/ 낙찰 후 사후 관리 등
△ 동국대 평생교육원 '여행 작가'
사진작가 신미식, 시인 이문재, 출판인 김산환, 음악평론가 임진모, 여행작가 유연태, 변종모, 우지경, 세계일주 여행가 안병일 등이 여행기 쓰기, 여행사진 촬영, 여행서 출간하기 등에 대해 강의한다. 수료 후에는 동기끼리 공동 사진전을 갖고 문집도 펴낼 기회가 주어진다.
강의 정보 주 1회 15주 과정, 수강료 58만원
세부 커리큘럼 사진 장비의 선택과 활용/ 나는 이렇게 취재를 한다/ 도전! 여행 파워블로거/ 내 글을 어떻게 퇴고할까?/ 길 위의 인문학 등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역사문화’반 44학기 개근생 홍인숙(84)씨
“머리가 아닌 마음에 남아야 진짜 인생 공부”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에 다니는 홍인숙씨는 무려 44학기를 이수하고도, 45학기째 수업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일반 4년제 대학을 졸업하려면 총 8학기를 이수해야 하는데, 그것의 5배가 훌쩍 넘는 시간을 ‘역사문화’ 공부를 해온 것. 20년 넘게 한국사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서양 역사에 대해 배웠지만 여전히 수업이 흥미롭다는 그녀다.
홍씨는 “내가 젊었을 때는 평생교육원이니 문화센터니 하는 배움터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참 많잖아요. 뭐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찾아서 배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괜히 노인정에 들락거리는 것보다 무엇이든 배우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평생교육원을 다니게 됐어요”라며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녀에게 공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홍씨는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거창한 의미는 없어요. 그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내가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죠”라며 “무엇보다 이 나이에 학교에 간다고 하면 마음부터 젊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44학기를 이수하며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풍부한 역사적 지식도 쌓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마음에 남은 것이 더 많다는 홍씨. “나이를 많이 먹으니까 내용은 많이 잊어버려요. 남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지식보다는 내가 느끼는 행복, 즐거움이 더 크게 남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공부해온 것 같아요. 지금도 문화센터에서 수필 강의를 듣는데 컴퓨터를 다루지 못해 글을 쓰지는 않아요. 수업 듣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니까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강의를 듣는 시간만큼은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철학적인 이야기에 공감하기도 하죠.”
홍씨는 지난해 ‘민화 그리기’ 수업을 신청했다가 몸이 아픈 바람에 참여하지 못했다. 올해는 평생교육원 ‘역사문화’ 45학기를 다니며, ‘민화 그리기’에 다시 도전하고 ‘라틴 음악’에 대한 강좌도 찾아볼 예정이다. “몇 학기까지 다닐 계획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답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귀촌 생활이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가치의 수단
농협대학에서 귀농·귀촌의 풍요로운 삶을 가꾸다
시니어들이 귀농·귀촌 대학을 찾는 이유는 농촌에 가면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질 향상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귀농·귀촌인의 정착 실태 장기추적 조사’에 따르면 귀농·귀촌 이유로 ‘조용한 전원생활을 위해서’가 31.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껴서’가 24.8%, ‘은퇴후 여가생활을 위해서’가 24.3%, ‘새 일자리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을 위해’가 22.2% 등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농사일이 좋아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 때문’, ‘생태·공동체 등의 가치 추구’가 각각 18.4%를 차지했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건강, 은퇴 후 여가, 전원생활을 위해 농촌을 찾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고학력일수록 은퇴 후 여가나 전원생활을 위해 귀농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귀농·귀촌자가 농촌 정착과정 상에서 자금 문제, 영농기술문제, 농지구입의 문제, 생활여건의 불편, 토착주민과 갈등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귀농·귀촌자가 다시 도시로의 재이주 의향을 보이는 주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기농림진흥재단은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을 대상으로 현장 중심의 이론 및 실습형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인 농촌 정착에 도움을 주고자 2009년에 개설하여 2015년까지 총 3000여명을 교육했다.
특히 경기농림진흥재단에서 위탁받아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농협대학의 귀농·귀촌 대학은 지난해 까지 7기 회원을 모집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120명에서 140명 정도 귀농·귀촌을 꿈꾸는 시니어들이 7개월 동안 성공적인 귀농·귀촌 정착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생산·가공·유통·마케팅 전반에 걸친 폭넓은 교육으로 본인에게 적합한 귀농 형태를 결정짓는 역량을 강화했다.
교육비는 200만원이 넘는 전체 교육비에서 자부담 일부(50만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경기농림진흥재단에서 지원했다. 오전에는 귀농 설계교육과 영농기술 기초학습이, 오후에는 농협대학 교내, 귀농·귀촌 대학 실습장에서 실습 및 현장 견학이 이어진다.
1인당 약 20여 평의 땅이 주어지는데 기초 교육이 끝나는 즉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농계획을 세우는 등 농촌 투어 등 다양한 경험과 실습이 이뤄진다.
경기농림진흥재단 귀농·귀촌 대학을 수료한 이석현(61)씨는 “농촌은 부부가 보다 심신의 여유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고 며느리, 아들 눈치 보지않고 좀 더 여유롭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며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영농 계획을 세웠고, 귀촌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큰 공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공부하고 싶은 시니어들의 참교육場 '사이버대학'
본격적으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갈수록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 세대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재교육 차원에서 사이버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30대 학생 비율이 점차 줄어드는 것과 비교해 40대와 50대의 진학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사이버대의 나이별 대학생 추이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30대의 입학이 매년 2.5% 정도씩 줄어드는 반면, 40대와 50대 이상 등록은 1%씩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50대 이상 입학은 전체 학생의 10.59%로 두 자릿수 평균율을 보였다.
사이버대학이란 정보통신기술, 멀티미디어 기술 및 관련 소프트웨어 등을 이용하여 형성된 가상의 공간(Cyber-Space) 안에서 교수자가 제공한 교육서비스를 학습자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학습하는 가상 학습 공간이다. 일정한 학점을 이수할 경우 학사학위 또는 전문학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고등교육법 제2조 제5호에 규정된 교육부 인가 대학이다. 사이버대학은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고 모든 수업과 시험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이버대학은 매년 6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신·편입생을 모집한다. 수능 입학을 거치지 않고 입학지원서와 함께 학업계획서와 인성검사를 통하여 지원할 수 있다.
학비는 학점당 6만~8만원 선이며 18학점 신청 시 학기당 100만~150만원 수준이다. 소득분위 기준으로 지급되는 한국장학재단(www.kosaf.go.kr)의 국가장학금 제도도 활용할 수 있다. 사이버대학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사이버대 종합정보사이트 CUinfo(www.cuinfo.net)를 참조하면 된다.
사이버대학은 2001년도에 총 9개 대학으로 시작했으며 현재 전국적으로 총 21개가 운영되고 있다. 10만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시니어가 몰리는 사이버대학 인기학과 F4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사회복지학과, 상담심리학과, 한국어문화학과는 학생의 1/4 정도가 50대 이상이다. 특히 미디어문예창작학과이 대한 60대 이상 시니어의 관심이 두드러진다.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미디어문예창작학과는 문예창작이론에 영상미디어를 접목한 학과다. 문학예술과 뉴-미디어에 대한 기본 소양을 배우고 폭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사유능력을 키워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에 실천적 문학인을 양성하는 것이 미디어문예창작학과의 목표다. 미디어문예창작학과에는 60대 이상 시니어들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것들을 글로 남기고 싶은 욕구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희사이버대학교에만 개설된 학과다.
한국어문화학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다. 어느 정도 배움이 있는 시니어들이 ‘교사’에 관심이 있고 또 외국인을 대상으로 봉사 차원에서도 활용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고려, 영남사이버대학교 등 9개 사이버대학에 개설돼 있다. 국어기본법에서 정한 한국어 교원 자격 요건에 맞춘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글로벌 환경, 다문화 시대에 필요한 국내외 현장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재를 양성한다. 영역별 필수 과목을 이수하면 한국어 교원 2급 자격증을 준다.
사회복지학과
사회복지학은 현대화, 산업화, 도시화 등 사회변화에 따른 삶의 질 향상과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실천적, 전문적 해결방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가족과 아동, 여성, 노인, 장애인, 청소년 등 다양한 대상들과 지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사회복지적인 개입 방안을 학습하고 이를 현실 사회 속에 실천하는 것에 주력한다. 사회복지전공은 전반적인 사회복지이론 및 기술의 습득, 각 전문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무적 능력을 갖춘 복지전문가를 배양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다. 사회복지학과를 선호하는 시니어들은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봉사하는 시니어들이 많이 찾는다.
상담심리학과
최근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행복한 삶과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이해,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상담심리학과의 경우 4년제 학위가 있는 시니어들이 선호한다. 이론과 실제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다양한 정신건강과 상담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통합적·전문적인 지식과 상담기술 등을 훈련하고 있다. 상담심리학과는 관련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교과목 운영은 물론, 기초단계의 상담심리 교육과정과 영역별 심화 및 응용 단계의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학생들은 졸업 후 다양한 휴먼서비스 영역에서 전문상담가로 활동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은 인생 2막 설계에 관한 관심이 높다. 그런 요구에 맞춰 각 대학은 발 빠르게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신중년세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 전 국민의 고등교육화를 꿈꿨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프라임칼리지를 개설해 신중년들의 미래 인생설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젊은 은퇴로 고민에 빠진 신중년들에게 한국폴리텍대학은 펜 대신 드라이버와 망치를 손에 쥐어 주며 실전 학습을 가르치기에 나섰다. 인터넷 발달과 함께 방송대 대항마로 떠오른 사이버대학교는 이상 실현과 재교육을 토대로 시니어들의 배움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이다. 미래 설계가 아직 좀 미흡한 신중년들이 있다면 주목하라. 더욱 나은 제2의 인생으로 인도할지니.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40·50세대를 위한 제2 인생설계·준비과정
원격대학의 원조,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안에는 또 하나의 대학이 있다. 바로 프라임칼리지다. 1997년부터 운영돼 온 방송대의 평생교육원이 2012년 프라임칼리지로 개명한 것.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기존 평생교육원의 틀을 깨고 전 세대를 아우를 만한 다양하고 특색 있는 학습 프로그램으로 무장했다.
프라임 칼리지는 평생학습시대, 국민의 생애주기와 학습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다.
특히 40·50대 신중년들을 위한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 등을 시행하고 있다.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은 중·장년층의 자립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더 나아가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 꾸준히 수요가 늘고 있다. 2012년 제2 인생설계과정 32개 신규 교과목으로 총 2660명 수강에 이어, 2014년에는 총 1만284명이 프라임칼리지를 이용할 정도 관심이 뜨겁다.
프라임칼리지 교육과정은 제2 인생대학, 인문교양·시민문해, 귀농·귀촌, 창업, 사회적 경제, 국제개발협력 사회봉사, 전문자격, 명장교수, 평생교육 등 10가지 대분류 아래 각각에 부합한 과목을 배치했다. 영미영작 단편선, 문해 교육 이론 등은 물론, 집짓기, 창업, 다양한 국가의 어학학습 등 프라임칼리지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과목들을 개설해 놓았다. 방송대 학생은 프라임칼리지에서 강의를 들으면 졸업학점으로 최대 12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어 굳이 다른 곳에서 배울 강좌가 아니라면 꼭 한번쯤 프라임칼리지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외에 20·30세대를 위한 선취업·후진학 학위과정과 재직자 기초과정도 주목받고 있다.
인터뷰Ⅰ 박찬영 블루베리-연금나무, 게으름의 농장 수강 (서울, 방송대 농학과 15학번, 54)
귀농·귀촌을 꿈꾸는 신중년들에게 좋은 길라잡이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강좌를 기웃거리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에 작년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전공 교수이신 문원 교수님이 블루베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셔서 조금 더 알려 달라고 했더니 프라임칼리지 강좌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실 귀농·귀촌할 생각만 있었지 어디로 갈지 또 어떤 작물을 키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블루베리에 관한 관심이 한창일 때 들었던 프라임칼리지 강좌는 꽤 도움이 되더군요. 적어도 블루베리가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쉽고 수익성 좋은 작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농업에 관련한 일을 알아 가는 데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해요.
프라임칼리지뿐만 아니라 학교 자체가 귀농·귀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요. 귀농·귀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방송대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프라임칼리지를 먼저 알았더라면 이쪽 강의를 먼저 들었겠죠. 프라임칼리지에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을 학교 입학하고 난 후에 알았거든요(웃음). 프라임칼리지도 새로운 인생 2막의 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우선 농학과 공부에 집중한 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프라임칼리지를 좀 더 이용할 계획입니다.
인터뷰Ⅱ 양봉선 제2 인생대학 마스터클래스- 마음 외 5과목 수강 (전주, 방송대 국문학과, 58)
프라임칼리지는 마력이다
동화를 쓰고 창작을 하면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방송대에 편입학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몸에 고장이 단단히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동화 작가. 직장인, 주부, 엄마, 방송대 학생으로 숨 쉴 틈 없이 살아온 탓일까요. 1~2년 전 9개월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지냈어요. 그런데 병원을 오가다 우연히 프라임칼리지의 제2 인생설계 광고를 보게 됐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클릭해 보았는데 평소 관심 있던 과목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삶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과목도 있고요. 두 과목만 수강할까 하다 프라임칼리지에서 수업을 들으면 방송대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기에 욕심을 좀 더 냈죠(웃음). 강좌를 선택하다 보니 6개가 되더라고요. 제2 인생 설계과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중년의 삶,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삶 등을 공부했습니다.
내 이름을 단 아동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 ‘작은집-싸게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즐겁게 들었습니다. ‘안전, 웰빙, 스마트 여행을 위한 건강관리’ 강의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다른 나라 예절, 선물로 현지인들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배웠습니다. 듣다 보니 3개월 단위로 끊어지는 강좌를 6개월이나 들었더라고요. 지금도 듣고 싶은 과목은 한없이 많아요. 프라임칼리지 너무 좋습니다. 글을 쓰면서 부족했던 것들, 살면서 배우지 못한 처세술도 배울 수 있었어요. 고령화시대에 남다른 감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펜 놓고 손에 기름 묻히길 원하는 자
한국폴리텍대학으로 가라!
한국폴리텍대학(이하 폴리텍대학)은 말 그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을 추구한다. 이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고 학습한다. 1968년 국립중앙직업훈련원으로 시작해 2006년 24개의 기능대학과 19개의 직업전문학교가 합쳐져 지금의 폴리텍대학이 됐다. 폴리텍대학은 해마다 8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보인다. 땀의 결실을 보게 해주는 알찬 대학으로 세대와 학벌 위주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국민 누구나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 학비 걱정 없이 기술을 배우고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평생직업교육대학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이 시니어들의 재취업과 제2 인생 설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학사과정 외 시니어들을 위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은 3개월 단기과정으로 만 45세 이상 만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기업 맞춤형 과정으로 진행된다. 장년층의 재취업을 돕는 이 과정은 올해 전국 31개 캠퍼스에서 실시할 계획이다.
2012년 333명의 수료자를 시작으로 지난해 1868명이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수료했다. 놀라운 사실! 3개월 교육과정이 전액 무료로 이뤄지며 수료생에게는 별도의 지원금도 지급된다.
인터뷰 송재구 (청주,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 2015년 8월 수료, 59)
노래하는 만학도에게 새 삶을 준 베이비부머 훈련과정
지난해 8월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을 수료했습니다. 30년 이상 의류업과 요식업을 하면서 살았 습니다. 아이들 다 키우고 성장했을 무렵 늦바람이 불었는지 48세에 대학수학시험을 봐서 2013년 새내기 대학생이 됐습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다 2014년 말에 음식점 문을 닫았어요. 예전부터 전기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충주지역 폴리텍대학 광고를 보고 베이비부머 훈련과정을 알게 돼 훈련과정에 들어왔습니다. 기초부터 전기 에너지, 설비, 이론 등 다 가르쳐주더라고요. 일단 배우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었던 것을 배워서 자신감도 생기고 삶에 활력이 됐습니다. 과정 수료하고 바로 아파트의 시설관리기사로 취업했습니다. 아무래도 폴리텍대학에서 훈련과정을 수료한 것이 합격에 도움이 됐습니다. 내 나이에도 그런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이력서를 내니 업체에서도 좋아하더군요. 전기 설비에 관한 한 내 손으로 다 고치고 만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나이에 기술 없으면 딱히 취업할 곳이 없어요.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기회를 저는 얻은 거죠.
지금 학교를 나온 이후에도 전기기능사 시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은 꼭 하나 더 따고 싶어요.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목표지만 나보다 힘들고 직업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로 그분들을 도와가면서 사는 게 목표 중 하나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80세, 그 이후까지도 사회에서 일하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작가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위해서 달려갈 수도 없는 곳임을 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바쳐서 작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구름의 바다 위로 동이 튼다. 나는 지금 2002년 11월, 나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 있다. 매일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해가 새롭게 뜬다. 지금 구름의 바다 위에 무지개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름바다는 내가 작년에 많이 썼던 King′s Blue이다.”
추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홍정희(1945~ ) 화가가 2002년 12월호 에 쓴 글의 일부이다. 한 가정의 주부로, 같은 미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의 어머니로 오십 여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화혼(畵魂)의 세계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학창 시절의 작품을 모두 불사른 그 결연함이 그만의 세계를 열어왔다.
‘특정 사조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채 50년 간 꾸준히 색채 탐구와 부단한 모색과 실험, 자신만의 색면(色面) 회화의 세계를 구축,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평론가들은 예찬한다. 1996년 현대화랑에서 펼친 전람회는 1000호(5.3mx2.9m) 크기의 초대작을 비롯해 100호(1.6mx1.3m) 40여 점으로 화랑을 가득 채운 장쾌한 눈부심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아(我)’ 주제에서 ‘탈아(脫我)’ ‘passion’ ‘nano’로 이어져 온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아래 그림은 ‘탈아(脫我)’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인사동 어느 모퉁이 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추상화 작품들로 벽면을 장식하던 첫날에 떼어 온 것이다. 화랑 주인은 구상(具象)의 다른 그림을 권했지만 황토 빛깔의 ‘아(我)’ 타이틀의 이 작가 그림과 나란히 걸고 싶어서 선택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담소를 하던 중에 얼핏 시선이 간 그의 손은 영락없는 험한 노동자의 것이기에, 빤빤한 내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 적이 있었다. 치열한 생산에 기여한 그 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추상화는 어떤 정형이 없기에 눈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 점, 선의 연결부터 색상의 다양함이 도대체 이성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화면을 흩뿌리는 무작위의 물감과 불규칙적인 붓질이 보는 이의 의식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런 작품들과 친해지려면 긴 시간의 눈 맞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화면의 구도와 색상의 대비와 어울림이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고 보는 이의 의식을 출렁인다. 마음의 분화구로 사유가 흘러넘쳐 용암처럼 흐른다. 내가 나를 벗어나면 나는 없다. 다만 그 길 위에는 그 무엇이 남는 걸까. 간단치 않은 화두이다.
미술사는 현대 추상화가 1910년대 러시아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화가들이 처음 시도한 이래, 현재 많은 예술인들이 그 주제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즈음 세계 유수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우리나라 원로 화가들의 모노크롬(단색 추상화)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김태호(1948~ ) 화가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탄탄한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그리드(grid, 모눈형의 사각)의 입체를 벌집을 짓듯 쌓아 올린 아크릭 물감의 여러 색상과 선들이 오묘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고 물감을 바르고 마르면 칼로 물감을 깎아내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깎아내고 하기를 스무 번쯤 반복한 후에야 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그 물리적 노고와 끈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작가는 왜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색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 힘든 작업에서 작가는 어떤 성취감을 느낀단 말인가? 작품 ‘내재율(內在律) 200801’은 화랑에서 전시회 첫날 작가가 직접 작품 설명도 하는 자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구입한 것이고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작가는 “타이틀이 왜 내재율이냐?”는 질의에 “광부가 채광해서 귀금속을 발견하듯 표면의 물질을 깎아내 찬란한 재료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진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서로 다른 색이 날줄과 씨줄로 천을 짜듯 하나하나의 그리드를 만들고 그들이 화폭 가득히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의 요철(凹凸) 공간이 수직과 수평의 입체감을 형성한다. 물감이 두께를 더하면서 그리드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일그러져 자연스레 화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층층이 다른 색들도 나타나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방에서 생명을 뿜어내는 우주를 본다”는 작가의 변(辨)이 이해된다.
한때는 이들 두 작가의 그림을 오디오 룸에 걸고 진종일 음악을 듣다가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탈아의 화두는 풀리지 않을 뿐이고, 잠재된 의식의 흐름을 운율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양(斜陽) 무렵, 서해안 작은 언덕에 올라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순간의 풍경과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 화가가 되고 싶던 열망이 그림 수집으로 대리만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치 한 수레를 사봐야 진품 한두 점을 만날 수 있다”거나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비로소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는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섭치란 ‘여러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못하고 너절한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으로 객관적으로도 가치 높은 미술품을 구입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술품의 가치 평가는 주관적이므로 언필칭 경제의 잣대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여러 기법으로 표출하는 비의(秘儀)를 풀어가는 여정만으로도 예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녘으로 스러지는 한 줌 햇살이 깊은 고요에 침잠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새 빛이 잉태되지 않던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