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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동경은]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
- 2016-08-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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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주식투자와 퍼팅, 노후준비가 같은 점은 자기책임!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드라이버는 힘, 아이언은 기술, 퍼팅은 돈’ 아마추어 골퍼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일단 드라이버는 멀리 보내고 볼 일이고 아이언은 정확하게 핀 근처로 갖다 붙여야 한다. 그리고 마무리인 퍼팅이 좋아야 내기에서 돈을 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중요한 퍼팅이 가끔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본인의 최종적인 판단과 실제 퍼팅시 잘못은 생각지 않고 애꿎은 캐디에게 한마디 던지는 골퍼가 있다. 물론 캐디가 경사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캐디의 조언을 받아 본인이 동의를 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필자는 참지 못하고 꼭 하는 말이 있다. “주식투자와 퍼팅은 자기 책임이다. 우리 인생에서 또 하나 자기 책임 하에 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느냐?” 답은 ‘노후준비’이다. 우리가 주식투자에서 다양한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는 것처럼 퍼팅 시에는 홀마다 실제로 공이 굴러간 궤적 등을 보고 익힌 캐디의 조언을 참고한다. 캐디가 못 미더울 때는 동반자의 의견을 구할 수도 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캐디가 있는가 하면 초보 캐디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최종 결정과 최종 퍼팅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엉뚱하게 나왔다고 해도 조언한 사람은 조언에 그칠 뿐이다. 조언을 받아들인 것도 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이다. 노후준비는 어떤가? 노후준비 역시 주식투자나 퍼팅처럼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노후준비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노후준비 또는 은퇴설계 관련 전문가가 주식투자 전문가와 캐디에 못지않게 많다. 오히려 주식투자와 퍼팅은 나름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반면 노후준비는 누구나 당면한 과제이므로 한마디씩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은 안 해도 그만이지만 노후준비는 안 하면 노후가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좀 더 나은 노후준비를 위해 전문가는 물론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선배들의 경험과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노후준비에도 정답은 없다. 여기서 정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맞는 답, 즉 정답(正答)도 없지만 정해진 답이라는 뜻의 정답(定答)도 없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대신 현명한 답, 현답(賢答)은 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니라 노후준비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현문(賢問)에 대해 현답을 하는 것, 즉 현문현답(賢問賢答)인 것이다. 더욱이 그 현답은 자기 책임 하에 나만의 맞춤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스스로 뭔가 계획하고 설계하기에는 뭔가 크게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퍼팅이나 주식투자를 할 때처럼 전문가와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조언과 정보는 헛갈리게 만들 뿐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 2~3명, 이미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선배 또는 친구 2~3명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해서 관련 책을 읽기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듣고 읽으면서 은퇴자들의 실제 생활을 보다 보면 나만의 철학과 전략이 설 것이고 그에 따라 차근차근 나만의 노후라는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 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핑계 없는 노후불안도 없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무덤은 피할 수 없지만 노후불안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후가 불안한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핑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소득이 적거나 가족관계 또는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식이다. 따라서 스스로 한 번쯤 짚어 봐야 할 질문은 “만약 내 노후가 불안해진다면 그 핑계거리가 무엇일까?”이다. 이때 기준은 필자가 좋아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섯 가지 분야, 즉 5F(Finance, Field, Fun, Friend, Fitness)’이다. 분야별로 조목조목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노후에 쓸 돈(Finance)이 부족하다면 왜 부족할까? 은퇴한 후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 또는 취미활동(Field)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뭘 해야 할까? 노후에 나와 함께 할 배우자와 가족을 포함한 친구(Friend)가 없다면 왜 없을까? 재미(Fun) 없는 노후가 예상된다면 왜 그럴까? 현재 건강(Fitness)에 문제가 있거나 문제가 예상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라도 5F 중 가장 부족한 분야를 우선적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과연 돈만 있다고 해서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따라올까? 그 돈을 누구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돈은 비료와 같아서 쓰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 돈을 잘 써야 할 일도, 친구도 생기고 재미도 따라오고 건강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기만 해도 돈과 건강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다.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미활동이나 문화행사 또는 봉사활동에 참가해보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뿌듯함과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특히 걸어 다녀야 몸이 건강하다는 걸 알고 열심히 대사활동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 더 중요해진다. 오래 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100세까지 건강하게 산다면 가족이나 친구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인터넷을 뒤져 재미있는 건배사와 에피소드를 발굴,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써먹어 보라. 하다 보면 늘기 마련이고 잘 하면 나만의 주특기가 될 수도 있다. 사는 게 재미있으려면 내가 재미있거나 재미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평균화의 맹점’은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말이다. “다리의 수송력은 여러 교각이 떠받치는 힘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교각의 힘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리는 가장 약한 곳에서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5F도 평균값을 끌어올리는 것에 못지않게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으면 다른 4F가 아무리 풍족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5F 중 부족한 F를 찾아내서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08-1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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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92세 현역 법무사 이종태, 풍파 이겨 내고 100세 인생 향해 오늘도 일합니다
- 이종태(李鍾台·92) 법무사를 만나기 전 단서는 딱 두 가지였다. 90대 현역 법무사이고 봉사단체인 ‘망월원’의 이사장이라는 것. 90대 현역이라니. 고령의 노인이 여전히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고 놀라운 일 아닌가. 달리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년 가까운 시간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이종태 법무사가 입을 여는 순간,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목동 3단지 아파트 상가 건물 이종태 법무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20년간의 법원 생활을 접고 1979년 법무사로 일을 시작해 서소문, 여의도 사무실을 거쳐 1987년 이곳으로 와 일하고 있다. 우선 우리 잡지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뒤 취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 같은 사람 뭐 볼 게 있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전 사람인데 왜정(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 와서 광복 직후부터 14년 동안 국어 선생을 했어. 그리고 서울로 와서 법원 생활 20년을 마치고 법무사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라며 92년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잘 짜여진 영화 로그라인(영화 투자를 위해 감독이 한두 마디로 영화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정확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공부하고 싶던 어린 이종태, 삶이 꼬이다 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했다. “당시 충청남도에는 중학교가 대전과 공주에 하나씩 있었어요. 대전에 있는 중학교는 일본 사람이나 총독부 직원의 자식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없었어요. 그때 마침 큰 형님의 친구가 일본 도쿄의 메이지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분 옆에서 고학(苦學)할 생각으로 일본행을 준비했습니다.” 내선일체라 했지만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 일본으로 가려면 관할 경찰서의 승인을 받은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일본의 사립학교 지원서를 만들어서 경찰서에 제출을 했는데 며칠을 계속 미루는 거예요. 얼마 안 있다 도항증명서가 아닌 일본군 지원병 훈련서를 순사들이 가지고 와서는 도장 찍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동아전쟁이 한창이고 군인이 너무나 부족한데 젊은 사람이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요. 지금은 쓸데없이 공부할 때가 아니다, 천황폐하(일왕)를 위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가 아주 엄격하셨어요. 세수하실 때 수건 들고 서 있어도 봤고, 아버지 명령을 어긴 적도, 말대꾸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순사가 ‘아버지가 일왕보다 더 중요하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원서를 쓴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기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1924년 갑자생의 비애, 첫 징병 대상자로 기억되다 결과는 뻔했다. 빵점을 맞기 싫어 필기시험은 한두 개 정도 맞혔다. 이 정도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신체검사에 합격했고 결국 징집 대상이 됐다. 그 다음 해인 1941년 6월 14일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있던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 전투 훈련을 받았다. “1942년 1월에 용산 제23부대에서 입영통지서가 왔어요. 이제 진짜 전쟁에 나가는 거였죠. 제가 1924년생인데 우리 나이서부터 징병 실시를 했습니다. 나보다 윗사람들은 탄광으로 징용 끌려가 고생했고, 우리 때부터는 징병돼 전투에 나가게 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자대인 제42사단으로 가기 전 중국 칭타오(靑島)로 가 일본에서 징집된 일본인 훈련병들과 또 한 번 6개월의 전투 훈련을 받았다. 전투에 곧바로 투입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저는 전투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에 있는 제42사단에 배치를 받았는데 떠나기 바로 직전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보균자로 판명이 난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후 이 법무사는 중국에서 4개월여 병원 생활 후 히로시마 병원을 거쳐 우쓰노미아(宇都宮)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약이 없었어요. 오전, 오후 한 시간만 입원실에 누워 있거나 안정을 취하고 있으면 됐습니다. 그 외 시간은 공부하는 데 썼어요. 특히 우쓰노미아 육군 병원 도서관이 참 좋았어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어렵고 힘들 때는 소설보고 과학, 철학책을 많이 봐서 스스로 깨쳤습니다.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보통학교 과정이 전부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독학을 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1944년 11월 말 경에 퇴원해 이듬해 광복을 맞았다. 교직생활 14년, 그리고 법원 생활 20년 광복이 되자마자 이 법무사는 교사의 길을 14년 동안 걸었다. 미 군정 당시 초등 공민학교, 고등 공민학교, 호서민중대학의 설립에 동참했다. 또한 학교 경영부서의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도 초등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의 국어 교사로 일했다. 호서중학교, 대전상고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남하하다 옥천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대전 시내를 불태웠고 이때 이종태 법무사가 살던 집도 학교도 다 타버렸다. “학교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어 돈 있는 사람을 끌어 모았다가 그만 학교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참 그땐 많이 힘들었어요.” 평생 직업이 된 법무사, 우연히 시작된 봉사 이 일이 있은 뒤 대전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갔다. 대법원에서 판사를 하고 있던 장인 덕에 법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시 서기보로 들어갔다가 서기로 일했습니다. 법원에서 오래 일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죠. 그런데 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법원에 눌러앉았다 결국 20년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법무사로 37년간 살다보니 90이 넘었네요.” 법무사 일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바로 봉사활동이다. 그의 인생에서 교사와 법무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의 이사장직일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에서 2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서소문에 법무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일주일도 안 돼 한 일본 여자가 이종태 법무사를 찾아왔다. “모치즈키 카즈(望月カズ)라는 여자였어요.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100여 명을 키우고 있던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의 호적 정리가 필요해 도움을 청하러 왔더라고요. 일본 고아 남자 아이 4명을 함경도에서 월남한 분들에게 부탁해 입적을 시켰다고 했습니다. 징병 통지서가 날아와 호적에서 거둬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그 아이들은 일본 사람으로 호적을 다시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도움준 것을 계기로 법률관계 관련해서 내가 돕기로 했어요.” 이후에 모치즈키 여사를 돕는 후원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법률문제와 관련해 뭐든 무상으로 봉사하기로 했다. 일을 좀 도왔나 싶었는데 1984년 모치즈키 여사는 60세가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10년 후, 일본과 한국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세웠던 모치즈키 여사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낙원동 상가 건물을 바탕으로 한국 아이들을 돕자고 법인을 만든 것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이다. “사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이사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 봉사상을 탄 적도 있고요.” 오랫동안 운동 마니아로 사시길 바라며… 사실 이종태 법무사는 운동 마니아다. 88세까지는 등산도 잘 다녔다. 작년까지 마라톤 대회에도 나갔다. 어딜 가든 늘 최고령자. “참 다행인 게 머리숱이 많아요. 검게 염색도 했으니 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더라고요.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영을 했는데 이제 체력이 떨어지는지 좀 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온몸이 쑤시고 아픈 데는 수영만한 것이 없어요. 90이 넘으면서 2층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서 요즘에는 간단히 체조하고 걷는 것 정도만 합니다.” 사실 요즘 이종태 법무사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해 10월 아내 송광섭(宋光燮)씨와 사별하면서부터다. “신혼생활 때부터 자식들 키우느라 뭘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병이 들고서 얼마 안 돼 떠났어요. 지병을 알고 약 먹고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종태 법무사는 어디를 가든 꼭 버선발로 나와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집 사람은 옛날 조선 시대 여자처럼 살다 갔습니다. 여보, 당신 해본 적도 없고 존댓말도 꼭 극존칭을 썼어요. 나는 그저 예사 높임 정도로 얘기했었고 대드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많이 위해줬죠.” 작년 10월에 떠났기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종태 법무사. 꿈에 좀 나왔으면 하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꿈에서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다,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안 나타나요.” 요즘 이종태 법무사는 5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무장으로 일하는 큰아들이 올해 예순 여섯인데 좀 더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이종태 법무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주름 사이로, 순탄치 않았던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숱한 날들을 이긴 그의 이야기.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닌 우리 역사였다.
- 2016-08-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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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무난하고 깨끗하며 조화로운 캐쥬얼 선호
- 패션을 잘 한다고 자부하지 않고 패션 감각을 뽐내려고 명품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내면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승부는 내면의 깊이와 멋에서 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예의를 갖추어 옷을 입으려고 한다. 필자의 경우는 조화를 고려한다. 장소와 계절에 맞추고 자신에게 알맞는 옷차림을 고집한다. 단정하게 입되 눈에 띠지 않는 무난한 스타일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옷을 잘 입는다고 칭찬 받은 적도 없고 못 입는다고 비난 받은 적도 없으니 중간 정도는 유지한다고 보인다. 중간 정도의 패션을 유지하고 말씨나 내적인 면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편이다. 인상을 나쁘게 하지 정도의 최소한의 패션을 유지하는 셈이다. ◇캐쥬얼 선호 직장인일 때는 정장을 많이 입었지만 프리랜서인 현재는 캐쥬얼을 입고 특별한 경우에만 정장을 한다. 그러다 보니 정장을 하면 좀 거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창의적인 사고나 유연한 사고를 하는 데는 캐쥬얼 복장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청바지는 거의 입어 본 적이 없다. 꽉 끼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행사나 예식이 있으면 분위기에 맞게 정장을 한다. 수평사회, 지식사회가 되어 복장의 자유가 주어져서 캐쥬얼 패션을 해도 별 지적을 안 받으니 편한 세상이다. ◇짙은 색으로 무난하게 얼굴이 흰 편이라 짙은 색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와이셔츠나 셔츠를 청색이나 갈색을 주로 입는 편이다. 곱슬이라 길면 관리하기 어렵고 지저분하게 보일 가능성이 있어 두발은 되도록 짧게 유지한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옷차림도 이에 맞게 수수하게 한다. 복합적인 색을 소화하기 어려워 단색의 옷을 주로 입는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향에 적합하다고 여긴다. 눈에 띠는 옷차림보다 무난한 패션을 좋아한다. ◇깨끗하고 조화롭게 패선을 유지하는 데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자주 갈아입도록 하고 매일 패션을 지정해 준다. 다른 일에 몰두 하다 보면 옷에 신경을 못 쓰는 편인데 유능한 관리자를 만나 다행이다. 옷에 관심이 없어 잘 안 사니 아내가 필자도 모르게 옷을 사서 이로 인해 자그마한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옷 살 돈으로 책을 사거나 문화활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지만 매번 진다. 패션을 조정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다는 것과 패션 자주성을 상실한다는 단점은 제외하도는 아내의 패션감각에 만족한다. 깔끔한 아내는 자주 세탁을 하고 드라이를 하여 늘 깨끗하게 입혀 보내려고 한다. 남편이 남들에게 복장으로 나쁜 평을 듣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외모에 신경을 안 쓰는 필자는 미술을 전공하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아내의 내조의 덕을 톡톡히 입고 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패션이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은 외면과 내면이 일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장만 그럴 듯하고 내용물이 허접할 때 실망하지 않는가. 외모지상주의로 성형과 명품치장이 유행하는 세태에 영합하고 싶지 않다. 자신을 가다듬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오라를 키우는 것이 어떨까. 자신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자신만의 패션을 시행착오 끝에 발견하여 이를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여도 깨끗하며 조화롭고 단정하며 무난한 캐쥬얼 패션을 유지할 예정이다.
- 2016-08-0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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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건강한 생활
- 잠을 잘 자는 데도 비법이 있는지 잘 모른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골아 떨어져 버린다고 하니 아마도 타고난 잠자기 천재인지 모른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잠을 잘 수 있는지 아내가 무척 부러워한다. 그것도 비법이라면 차제에 한 번 나의 비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단 양치질을 하고 나서 생수를 한잔 들이키는 것으로 나의 일과는 시작된다. 청소력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청소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성공으로 이끌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집 청소를 시작한다. 약간의 땀이 날 정도의 청소를 하고 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해 진다. 또 깨끗한 집에서 하루를 생활할 아내를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간단한 아침운동을 하고 오면 아내가 준비한 건강 식단에 따라 밥을 제외한 과일과 마를 갈은 즙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한 시간 이상 읽어 본다. 가방을 들고 하루를 보내게 되는 국제계약연구소에 들러 진행되는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일과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블랙커피를 한잔씩 하기도 한다. 영등포에서 송파까지 출퇴근하면서 전철 2호선 잠실역에서 8호선 문정역 그리고 사무실까지 약 20분 정도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걷는 것이 주간 운동이 되는 셈이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저녁 식사 후에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책상에 않아 내가 주간에 하지 못한 일이나 취미로 즐기는 블로그 활동이나 바둑을 두면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아마 내가 잠을 잘 잘 수 있는 비법은 이와 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칠 정도로 업무에 몰두하기 때문일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첫째 비결일 수 있을 것 같다. 잠이 들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좀처럼 잘 깨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면 한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잔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에게 어떤 날은 잠이 잘 오지 않는 때도 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거나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는 대개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런 때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일에 더 몰두하거나 아니면 간단한 운동을 통해 몸을 더 피곤하게 하면 바로 잠이 들곤 한다. 어쩌다가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건강에 좋다는 발치기를 좀하고 나면 바로 잠에 떨어진다. 해외 출장 시도 사람들은 시차 적응이 잘 안 되어 잠을 잘 못자거나 설 잠을 잔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별 문제가 없다. 나는 시차적응을 위해 출장지 시간에 맞춰 잘 수 있도록 책을 읽으면서 취침시간을 늦추거나 함께 가는 친구가 있을 때는 출장업무와 관련 대화를 많이 하도록 한다. 그 외 또 한지가 비결이 있다면 샤워와 별도로 나는 최소 7일에 한 번은 꼭 사우나를 한다. 몸만 씻는 것이 아니고 미사를 보러 성당에 가서 영적인 때도 다 씻도록 노력한다. 그것이 어쩜 내가 한 주일을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또 다른 숨은 비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수면이란 육체적인 피로 뿐 만 아니라 영적인 피로도 회복시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잠을 밤 12시 이전에 꼭 자는 습성을 기르고 있다. 우주의 파동과 인체의 파동이 교류하면서 나를 항상 피로에서 구해준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참 신기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특히 꼭 일어나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서 자면 거의 시간을 맞춰 일어나는 나는 아마도 잠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잠의 천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잠이 올 때 잠을 참지 못하고 자야 하는 것을 보면 통제의 천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비법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 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과 사회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할 때 잠을 잘 잘 수가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 2016-08-0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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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너와 나 & 우리
- “함께! 너와나 & 우리”라는 슬로건을 통하여 성인 발달장애인 교육을 2016년 3월 3일(목요일)부터 현제까지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주소:서울시 광진구 능동로17길 39, 전화 : 02-450-1515 동장 김용식)에서 매주(수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3~6시 실시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아동(18세미만) 청소년교육은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성인(고교 졸업) 후부터는 교육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요청을 받고 희망벨이라는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경찰이 충북 청주에서 발생한 ‘지적장애인 노동착취 사건’과 관련해 농장주 부부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중앙일보 8월1)는 보도를 접한다. 지적장애인을 노예취급하며 노동력 착취와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기사를 볼 때 분개한다. 발달장애인은 발달장애인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면 지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 등을 말한다. 지적장애인은 정신 발육이 항구적으로 지체되어 지적 능력의 발달이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하여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과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상당히 곤란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폐성장애인은 소아기 자폐증, 비전형적 자폐증에 따른 언어·신체표현·자기조절·사회적응 기능 및 능력의 장애로 인하여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 밖에 통상적인 발달이 나타나지 아니하거나 크게 지연되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사람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이다. (발달장애인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2014년 11월 19(법률 제12844호)‘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발달장애인법)[시행 2015.11.21.]에서 “발달장애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 그들의 생애주기에 따른 특성 및 복지 욕구에 적합한 지원과 권리옹호 등이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발달장애인의 사회참여를 촉진하고, 권리를 보호하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제1조(목적)라고 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3월부터 시작된 교육은 발달장애가 있는 만18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개별 발달 장애특성에 따라 기초문예, 사회활동증진, 건강관리지원, 신체활동, 여가지원, 직업준비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비롯해 미술표현, 무용, 음악, 취미활동을 대상자의 요구와 가족들의 필요에 따라 맞춤식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들이 일상생활과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며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반복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10여명의 발달장애인을 교육하는 희망벨 성인 발달장애인 교육센터는 부모와 장애인 당자사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며 개별적인 욕구와 보호를 함께 나누어 가기를 기대해본다. 관 주도가 아닌 민간이 계획하고 관(주민센터나 지자체)이 협력하는 모델을 통하여 발달장애인 뿐만 아니라 다른 복지영역도 민관이 서로 협력하는 모델이 확대되기를 소망해본다.
- 2016-08-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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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무료 지공거사, 오히려 요금폭탄
- 인생 65세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어르신, 노인으로 호칭되는 ‘고령자’의 대열에 편입된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되고 ‘지공거사’가 된다. 하지만 전철무료 지공거사! 요금 면제커녕 폭탄을 맞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 와중에 출생신고가 몇 년 늦어 이제 65세가 되었다. 기초연금신고와 전철 무임승차권에 대한 안내문을 받았다. 고령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전철을 무임승차하면 어떨까?”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주민의 일상으로 찾아가는 복지행정! 얼마 전 관악구 미성동 복지담당 공무원과 보건소 간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봉지형 복지사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현장을 찾아가는 복지행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철무료승차권과 기초연금신청안내, 주택연금 활용방법 등 손에 잡히는 주제를 설명하였다. 김상희 간호사는 “사회은퇴 후 활동이 축소된 어르신의 건강이 문제된다.”고 하였다. 폐렴예방무료접종, 골밀도검사, 암 검진, 임플란트 치과지원도 설명하였다. 폐렴예방접종이 일생에 꼭 한번 해야 하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치매검사, 우울증검사는 이상 없이 통과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아 친절하게 설명해준 복지사와 간호사에게 감사한다. 환승기능 없는 전철무임승차권 전철 무임승차 시행초기 춘천막국수, 온양온천 등 원거리 무임승차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퍼주는 복지라고 야단났었다. 한편에서는 집안에 머무를 고령자를 밖으로 이끌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긍정론도 있었다. 즐거움은 여기까지였다.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받으면서 ‘지공거사’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문제는 시민이 통상 버스타고 전철을 바꿔 타는 ‘환승’에서 발생한다. 전철무임승차권에는 환승기능이 없다. 대중교통 환승제가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환승기능 없는 교통카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버스와 전철을 한번 환승하면 가까운 거리는 1250원 남짓이면 된다. 전철요금은 무료이나 버스요금은 내야한다. 전철요금은 면제로 알았으나 실제 면제요금은 50원, 한 달 왕복하더라도 3000원이다. “눈 가리고 아옹이지, 누가 전철요금 면제라고 하겠는가?”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공거사 오히려 요금폭탄! 시민은 보통 버스타고 전철로 환승하여 다시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대체로 요금이 1500원 안팎이었다. 그런데 지공거사가 부담하는 요금은 2400원이 된다. 면제요금 합한 총 요금은 2150원 1.43배 많은 3650원이 된다. 교통요금 면제커녕 오히려 폭탄이다. 이만큼 예산도 낭비하고 있다. 많은 시민이 실질적으로 전철요금 면제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장이다. 이 대목에서 무료승차권 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전철무임승차가 노인에게 오히려 부담을 늘리는 기막힌 현실이다. 무임승차권 환승기능 부여하라 왜, 전철요금 전액 부담자와 면제자의 요금계산이 달라야 하는가? 지공거사의 무임승차카드 환승기능부터 부여하여야 한다. 환승기능도 없는 무임승차 교통카드 발급을 특정은행에 전담시키는 것도 큰 문제다. 계좌이동제, 인터넷 전문은행 출현 등 은행 간 벽이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모든 은행에 개방하여 시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 2016-08-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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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부자 PART2] "내 친구에게, 나는 어떤 친구?" <디어 마이 프렌즈> 캐릭터로 본 친구유형
- 시니어의 삶과 우정을 주제로 한 tvN 드라마 . 고두심, 김혜자, 나문희, 박원숙, 신구, 윤여정, 주현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우리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인물 간 갈등이나 사건을 통해 그들만의 우정을 진솔하게 그려낸 점이 돋보인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에피소드를 통해 친구유형에 대해 알아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김동철 ㈜김동철 심리케어 대표원장·표현심리 박사 tvN 제공 ◇ 시니어 친구유형 김동철 원장은 왼쪽 페이지의 드라마 속 캐릭터 성격을 참고해 각각의 인물을 동물, 색깔, 도형(모양)으로 표현했다. 나와 가장 비슷한 캐릭터는 어떤 유형인지 알아보자. △오충남(윤여정) 정이 많고 오지랖도 넓어 손해 보는 스타일. 결혼, 연애 경험 없는 골드미스. 학력 콤플렉스가 있어 젊은 지성인들과 어울리려 한다. Dr. Say: 코끼리/노랑/뒤집힌 하트 독신자들을 보면 자신은 자아성찰이 잘됐기 때문에 혼자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솔로인 경우가 많다. 커다란 코끼리처럼 아무도 덤비지는 못하지만 알고 보면 여린 존재. 애정이 필요하지만 결핍된 상황(뒤집힌 하트). 노랑은 콤플렉스의 상징. △이성재(주현) 여자에게 다정다감한 현직 변호사. 학벌, 경제력을 갖췄지만, 아내와 사별 후 뭐든 후회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루라도 더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 Dr. Say: 버팔로/검정/사각형 재미있게 살려고 해도 관계는 사건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평안할 수 없다. 편안한 사람일수록 주변에서 갈등을 안고 찾아올 확률이 높다. 중후한 멋의 검정과 버팔로, 안정을 유지하려는 사각형. △조희자(김혜자) 순수하고 얌전하지만 때론 집착이 심하다. 남편이 죽고 홀로서기를 다짐하지만, 막상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자살 시도 경험이 있고, 망상성치매를 앓고 있다. Dr. Say: 나이 든 강아지/연분홍/타원형 늙은 강아지처럼 보호와 손길이 필요하다. 타원형이라는 것은 완벽하지 않다는 뜻. 삼각형이나 별 같은 반대 성향 또는 빨강, 파랑처럼 색이 확실한 친구를 두는 게 좋다. △장난희(고두심) 생활력이 강하고, 화끈한 성격. 10년 전 남편이 죽고 ‘무조건 즐기자’가 인생 모토다. 사람들을 모으고 즐겁게 해주려고 하는 총무스타일. Dr. Say: 치타/빨강/별모양 치타처럼 거침없다. ‘무조건 즐긴다’ 스타일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지만, 많은 사건에 휘말릴 위험이 커 절제가 필요하다. 리더·총무 역할을 잘하는 열정적인(빨강) 별 성향. △이영원(박원숙) 화내거나 짜증 내는 법이 없는 쿨한 성격. 남자와 스캔들이 많은 화려한 배우로 살며 하는 사업마다 승승장구.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고독하다. Dr. Say: 카멜레온/보라/스프링 다양한 매력의 카멜레온. 자기를 꾸미기 위해 무언가를 발산하지만 알고 보면 경계심도 많고 외롭다. 빨강도 파랑도 아니지만 분명히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보라색. 누구와도 잘 어울리며 유기적인 스프링 같은 사람. △문정아(나문희) 검소하고, 매사 긍정적이며 쾌활하다.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남편이 있지만, 구두쇠에 고지식한 남편에게 억눌려 산다. 늘 자유를 꿈꾼다. Dr. Say: 수달/초록/마름모 남편에게 억눌려 도전의식이 강해진 타입. 그녀에겐 현재가 청년기와 다름없다. 에너지가 충만하고 노련한 수달과. 에너지를 뜻하는 초록, 쾌활한 느낌의 마름모가 어울린다. △김석균(신구) 꼰대 중의 꼰대, 남녀차별이 심하고, 짠돌이에 불 같은 성격. 중졸 콤플렉스가 있어 학벌과 관련해 자기 방어를 심하게 하는 편. 거칠고 화도 잘 내지만, 속정은 깊다. Dr. Say: 말/군청/높은 원기둥 겉으론 험해도 아이가 자면 몰래 이불 덮어줄 사람. 삐죽삐죽한 도형이 어울릴 것 같지만, 마음은 동그라미. 가끔 야생마처럼 뒷발질도 하지만, 일 잘하고 묵묵한 말 유형. ◇ 가장 좋은 친구 유형: 장난희 나이가 들면 ‘소진 증후군’을 겪게 된다. 예전에 많은 것을 가졌고, 활동도 많이 했는데 늙으니 다 소진했다고 느끼며 우울해 하는 증상이다. 활발한 사람 곁에 있으면 활발해지고, 우울한 사람 곁에 있으면 우울해지는데, 노년기일수록 후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장난희처럼 사람을 이끌고 활달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유익하다. 즐겁게 살려는 목표의식이 뚜렷해 곁에 두면 긍정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 궁합이 잘 맞는 친구 사이 △문정아 & 김석균 고집이 세고 까칠한 배우자와 헤어졌다면, 부드러운 성격의 이성 친구를 만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전 배우자와 비슷한 유형을 만나 더 잘해주게 된다. 이미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훨씬 유연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성재 & 이영원 가능하다면 사회적 지위나 지적 수준, 경제력이 맞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좋다. 인물 중에서 그런 조건이 가장 잘 맞는 것은 이성재와 이영원이다. ◇ 에피소드를 통해 본 갈등 사례&솔루션 △이성재 vs 김석균 중졸 콤플렉스를 가진 석균은 잘 나가는 변호사 성재에게 묘한 질투를 느낀다. 베풀고도 욕먹는 성재와 계속 자존감이 떨어지는 석균. Solution: 콤플렉스로 인해 생긴 갈등은 과거에 형성돼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좋은 대학을 나온 성재와 중졸인 석균의 경쟁은 나중에 자녀들 사이의 경쟁으로 번질 수 있다. 두 사람은 자녀의 학벌이나 직업을 두고도 콤플렉스로 괴로워할 수 있다. 성재보다 석균의 자녀가 우월하다면 콤플렉스는 해결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석균을 모임의 리더로 세우는 것도 방법이다. 석균처럼 갖은 고생을 한 사람들은 잔재주가 많다. 그런 강점을 부각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고, 성재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주면 석균의 자존감은 올라간다. △장난희 vs 이영원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난희의 남편 외도 문제에 영원이 오해를 받아 사이가 틀어진다. 20년도 더 지난 일로 다투는 두 사람 때문에 친구들도 난감하다. Solution: 사실 두 사람은 속으로는 오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했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책임 지려고 하는 심리가 있다. ‘책임 강박증’이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증상이 심해진다. 오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상황을 인정해버리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나 소신 등이 모두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먼저 화해하지 않는 것. 제삼자가 중간에서 해결해 줘야 하는데, 이때 누군가에 편에 서거나 잘못을 따지면 오히려 싸움이 커질 수 있다. “얘는 이거를 잘했어”라는 식으로 서로 칭찬을 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자.
- 2016-08-0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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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삶이 예술이고 작업실이 작품이다, 영화 같은 삶과 예술, 화가 변종곤
- ‘영화 같은 삶’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예술인, 변종곤(67세). 극사실화의 대가인 변종곤은 사물(오브제)을 활용한 아상블라주와 조각의 영역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를 만난 브루클린 코블 힐의 스튜디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그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이었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이 인기를 끌면서 가장 뉴욕스러운 곳으로 자리매김한 코블 힐에서 울고 웃으며 변종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는 1978년 나이 스물아홉 최초의 민전인 제1회 동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신예 화가로 급부상했다. 고교시절부터 신문사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현대미술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에콜 드 서울’의 일원으로 활동을 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때늦은 수상이었다. 그는 “당시 유일한 미술인 등용문이었던 국전은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아 아예 출품을 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동아미술대전은 그에게 구세주였던 동시에 파란만장한 삶의 신호탄이었다. 미군 철수 후 황폐화된 대구 앞산 비행장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린 대상작품이 문제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 용납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혼혈아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에 분노해 그린 작품이었다. 굶주리고 헐벗던 시절, 그의 할머니는 대문을 항상 열어 두셨다. 밤낮으로 몰려오는 거지와 한센인을 귀한 손님처럼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냈던 할머니. 부처님과 예수님은 물론이고 달과 해와 별, 그리고 서낭당의 고목과 바위에도 두 손 모아 절을 했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촉망받는 화가로 성장한 그에게 내팽개쳐진 아이들의 상황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의 시선은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회 부조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 당시 북한은 그의 작품을 칭송하면서 우리 정부와 미국을 비판하는 대남방송을 계속해댔다. 표현의 자유는 고사하고 장발과 미니스커트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언론 탄압에 맞서 언더우드 타자기를 초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비롯해 사회·정치적 이슈가 담긴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자 정보기관의 압력과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1981년, 배낭 하나에 1인용 전기밥솥과 화구, 그리고 작품 몇 점을 챙겨 야반도주를 하듯 예술적 망명을 했습니다. 미군은 싫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앤드루 와이어스와 히피문화에 끌려 미국을 택했지요.” 그는 긴박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그때는 여권 발급받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문희 대주교께서 위험을 감수하시면서 도와주신 덕분에 가능했던 미국행이었습니다.” 미국의 삶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를 아꼈던 변종하 화백(전 국전 심사위원)의 도움으로 비가 새는 할렘의 다락방이었지만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한대수(가수·사진작가) 부부는 미국생활의 안내자였다. 지하철 비용을 아끼면서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한 아트 스튜던트 리그(ASL)를 다녔다. 체류 비자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물감 사는 것도 부담되자 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이 작품의 소재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탄재조차 재사용했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예술인에게 깨어진 바이올린은 아름다운 인체였고 고장 난 시계의 톱니바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주인 잃은 인형에서는 못내 그리운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오브제를 서로 결합하고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넣은 변종곤의 아상블라주는 이때 시작됐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의 교수와 작가들은 그의 실력과 경력을 높이 평가해 줬다. 하지만 그가 굶주리는 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결국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으니 호주머니에 작가들이 몰래 넣어 둔 수백달러가 있었어요. 호의는 고마웠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되돌려주려 했지만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 돈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뛰쳐나왔습니다.” 변 화백은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화가는 먹고살려고 고귀한 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접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한대수 부부가 애써 생선가게에 일자리를 찾아줬지만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나에게 펄떡이는 생선을 자르는 일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난방도 수도도 없는 싸늘한 할렘의 다락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신이시여, 저를 얼마나 위대한 작가로 키우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유일한 낙이었다. 밤새 그린 그림을 생선가게 벽에 걸어 놓고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 애썼다. 3개월 쯤 지난 어느 날, 가게를 찾은 한 신사가 벽에 걸린 ‘할렘가 풍경’을 보고는 가게 주인에게 누가 그린 것인지 물었다. 그의 작품인 것을 알고는 가게 주인도, 신사도 놀랐다. 그 신사는 리버데일 갤러리의 헬무트 지츠위츠 대표로 미술계의 마당발이었다. 비린내 나는 작업복을 당장 벗고 따라 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갤러리에서 일을 돕고 그림도 그리면서 망가진 몸과 생활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지츠위츠 대표는 그의 작품을 눈 높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선보였다. 언더우드 타자기 그림 등 몇 작품이 거래되면서 3만달러를 손에 쥐게 됐다. 뉴욕의 웬만한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리버데일신문은 ‘한국에서 사라진 화가, 미국에서 성공하다’라고 대서특필했다. 드디어 미국에서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 재외작가 초청 전시회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와 함께 초대됐다. 금의환향이었다. 그는 이때 인형의 몸통에 섬뜩한 소리를 내는 시계를 얼굴로 결합한 아상블라주 등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고 귀족생활이 시작됐다. 최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 미용실의 VIP고객이 되었고 휴가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고성(古城)에서 보냈다. 하지만 귀족생활은 시작부터 파탄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센트럴파크가 아니라 쓰레기 나뒹구는 할렘을 고집스레 그리니 후원자도 수집가도 몇 년간 참다가 결별을 선언했다. 변 화백도 라면조차 눈치가 보여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던 생활에 동화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지츠위츠 대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반겼다. 그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극에 달할 때면 여행을 하고 극사실화를 그렸다. 10여 년 전 그는 미국 서부 사막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버림받은 인디언 원주민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의 영감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굿모닝 아메리카’이다. 흑백기념사진 같은 침울한 인디언 군상과 황금빛의 샤넬 향수병을 대비해 그린 이 작품은 미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샤넬의 회장이 스튜디오에 찾아와 값에 관계없이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팔지 않았다. 분신을 팔 수는 없었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은 포스코가 소장하고 있는 고 박태준(朴泰俊. 1927~2011) 명예회장의 초상화다. 인물이 화면의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져 박 회장의 겸손함을 저절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철의 정밀성과 전진을 상징하는 18세기 독일 시계가 가운데 더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초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론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수시로 소개되고 프랑스의 마리 로지에 감독이 제작한 그의 다큐멘터리가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는 등 국내보다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명성이 더 높다. 2011년 프랑스문화원과 브루클린의 인비지블 독 아트센터가 공동 주최한 ‘30주년 개인전’은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찰이 교통정리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변 화백의 스튜디오에는 그의 영혼이 담긴 작품과 억대를 호가하는 귀한 책을 비롯한 수만 가지 오브제가 발 디딜 틈 없이 진열되어 있다. “이 오브제를 보면 심장이 뜁니다. 오브제는 고유한 기운이 있고 이야기도 합니다. 나 자신도 하나의 오브제이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사는 동료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과 진귀한 오브제를 보다 널찍한 공간에서 세계인들이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 본다.
- 2016-08-01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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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리포트①] 늙지 않는 여성들의 습관
-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 몸에게 묻는 것이 건강관리의 기본 마에다 비바리(前田美波里·영화배우, 1948년 가나가와 현 출생) 더위를 모르고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마에다 비바리는 이전 주목받았던 화장품 광고 이래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탄력 있는 몸매와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 어떤 역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동작도 소화할 수 있도록 늘 몸을 다듬어 놓는데, 피아노의 조율과 마찬가지이다. 여배우로서 건강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걸 항상 의식해 몸 만들기에 신경을 써 왔다. 무대에서는 모든 각도에서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어디서 보더라도 좋게끔 해 두고 싶다. 나아가 반듯한 몸에는 제대로 된 정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하고 있지 않다. 해야 할 것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매일 습관처럼 하는 노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이상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겠다. “아침에 눈 뜨면 먼저 전신 ‘임파(淋巴) 체조’를 10분, 그 뒤로 온천물을 데워 한 잔 마시는 게 일과이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신문을 읽고, 아침을 먹는다. 주로 채소 샐러드에 빵과 삶은 달걀 한 개. 그리고 머그컵에 커피를 붓고 코코넛 오일을 우유를 넣어 카페오레로 마신다. 달달한 과자를 군것질로 곁들여. 몸을 깨우는 데는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 비 바리는 작년 가을 비 오는 날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어깨를 골절했다. 그때 뼈가 붙자마자 재개한 ‘에고스큐(egoscue) 체조’가 빠른 회복에 크게 도움이 됐다. “시작한 지 4년 반쯤 되는데, 아침 식사 후 30~40분 에고스큐 체조를 반드시 한다. 근육을 자극하고 단련해 똑바로 움직이고, 몸의 비틀림을 바로잡는 운동이다. 몇 년 전부터는 되도록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1주일에 한 번 수중에어로빅도 하는데 물의 저항이 몸에 좋다. 내부근육도 단련되고, 달랑거리는 팔의 살도 금방 없어지고…” 울퉁불퉁 근육질의 여성스럽지 않은 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한 트레이닝은 하지 않는다. 어떤 운동이 몸의 어느 부분에 효과가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연구해 왔는데, 이게 나의 재산이다. 허리가 아프다는 연기자나 스태프가 있으면 내가 가르쳐 주고, 나 자신도 한 달에 한번 에고스큐 선생님과 상의해 새로운 메뉴를 지도 받는다.” 운동 이외에 아름다움과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건강보조 식품과 효소, 온천물 등을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와 친구들이 추천한 게 많은데, 괜찮다고 생각 들면 먹어 보고 자신에게 맞으면 받아들여왔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은 없다. 수십 년 계속 먹어온 건강보조 식품도 무대 공연으로 피곤할 때는 좀 많이 먹는다든지 그날그날의 몸 상태에 맞게 양을 조절한다. 그렇다고 건강보조 식품에 의지하는 삶은 싫다.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손발이 찬 체질이라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데, 에어컨은 되도록 쓰지 않고 여름에도 샤워만 하는 게 아니라 탕에 들어가 여유 있게 기분전환을 한다.” 욕탕에는 수소 거품이 발생하는 걸 넣어서 수소를 흡입하고, 수소수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탕에서 나와서는 바디오일을 바르고 침실은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바닐라, 망고 등을 좋아하는데, 맘이 차분히 가라앉고 잠도 잘 온다. “자기 몸에 물어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 계속 해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에는 진다 유카와 레이코 (湯川れい子·음악평론가·작사가, 1936년 도쿄 출생) 지난 1월 80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카와 레이코는 지금도 아티스트 취재로 국내외를 돌고 있으며, 집필활동 외에도 합창단의 멤버로서 노래하는 등 “지금이 내 인생 중 가장 바쁠지도 모르겠다”며 팔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바른 자세와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음악가를 양성하는 ‘스쿨 오브 뮤직 전문학교’의 명예 교장이기도 한 그녀는 삿포로, 센다이,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에 있는 학교를 돌며 졸업식과 입학식에 6번 참석해 인사를 했다. “연설은 내가 1년간 일을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음악정보를 말하는 거야말로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스며들지, 과거의 추억담을 얘기하면 전혀 울림이 없다. 그래서 내년에도 학생들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올 한 해도 더욱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올해 아티스트 취재로 호주와 영국에도 갔다 왔으며, 개인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4인조 코러스 그룹 ‘스완시스터즈’의 연습에 본인이 단장을 맡고 있는 가스펠 그룹 ‘도쿄여자합창단’의 단원으로서 동일본 대지진 부흥 자선콘서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와 작사가 이외에도 라디오 DJ를 하거나 젊은 사람들을 응원하고 노래하면서 환경과 평화와 관련된 문화활동도 소화하는 등 한마디로 사방팔방 종횡무진 대활약중이다. “샐러드도 상추만으로는 질리고,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 있으면 맛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다채롭고 풍부한 삶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또 늘 앉아서 하는 일의 피로가 노래함으로써 풀리고 위안을 받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21살 때 급성복막염 수술을 받을 때 수혈로 인해 C형 간염에 감염. 병명을 알게 된 것은 1989년 53세 때이다. 하지만, 감염이 판명되었지만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서 의사는 C형 감염 환자의 87%가 간경화에서 간암이 된다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의사는 술 마시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히 잠을 자라며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을 이기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수면이 부족하면 면역력도 저항력도 떨어진다. 그 뒤로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잠을 자도록 하고 있다. 사실 60대 중반에 건강진단을 받고서 췌장암과 간암이 발견됐었다. 의사는 더 크면 위험하니 수술하자고 했지만 안 했다. 불안은 있었지만, 나이 들수록 어딘가 나쁜 곳이 나오게 되는 법인데, 나는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 병과 공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더욱 수면과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결국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이 몸을 지켜준다고 믿게 됐다.” 공연 취재와 지방 강연회 등으로 바쁘더라도 전날 1박 하는 식으로 7~8시간의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는 유카와는 “잠이 안 오거나 도중에 깰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눈을 감고 어쨌든 자는 상태를 유지한다. 안 자더라도 누운 상태만으로도 수면 중의 3분의 1 정도 체력이 회복이 된다고 하니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가 쉬지 못하니까 잠이 안 올 때는 침대 위에서 호흡법을 한다. 단전 아래 3㎝ 정도 떨어진 곳을 의식해 코로 숨을 쉬고 천천히 길게 입으로 내뱉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뇌가 빈 상태로 되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게 잠이 든다”며 “해외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고 밝혔다. “식사를 하면 위장이 움직이고 몸이 활동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거의 안 먹는다. 탑승하기 전에 와인 한 잔 마신 후 호흡법을 하면서 마냥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긴 장거리 비행에도 피로가 안 쌓이고, 시차도 없다.” 60세쯤부터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면역력을 높이는 호흡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전철 안 혹은 책상 앞, 자기 전에도 꼭 한다. “수면과 호흡법 덕분에 암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크지 않고 있다. 호흡법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에는 등골과 관절 등을 움직여 뼈에 적당한 부하를 거는 ‘뼈 호흡 체조’를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장에 다니며 지도를 받고 있다. 뼈를 강화해 주고 비틀림을 고쳐주고 대사를 촉진해 준다.” 연예계가 남성 중심의 경쟁 사회라 싫은 일도 많고 낙담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일은 오늘로, 싫은 것들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침대 위에서 호흡에 집중해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기분 좋게 눈 뜨면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하는 힘도 생기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떠오른다. “끙끙거리고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낙담하는 감정은 좌뇌로 거기에 음악의 템포를 부여하면 자동적으로 우뇌가 우선이 되면서 좌뇌의 고민을 잊을 수 있다. 걷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가 되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에 맞춰 걸으면 그 효과는 몇 배 커질 것이다.” 몸과 마음의 젊음은 음식이 정한다 ◇ 우에키 모모코 (植木もも子·관리영양사·국제중국의사·국제중국의약요리관리사, 1953년생) 젊고 똑똑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이것이 삶의 주제라고 말하는 우에키 모모코는 서양의 영양학과 동양의 한방학 모두를 섭렵한 전문가로. “늙지 않기 위해서는 식생활을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신이 스트레스에 약한 체질을 알고 평소의 식사습관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어서, 생활습관에 개인 차이가 생긴다. 나이 들수록 그 차이는 커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동양의 한방의학에서는 인간의 몸은 기(氣), 혈(血), 수(水)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이 먹으면 그 균형이 깨지기 쉽고, 몸의 이상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이 상태로 두면 몸의 노화가 빨라지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기는 영양과 피, 수분을 몸 구석구석에 옮겨준다. 생명 활동을 행하는 에너지, 기가 부족하면 체력이 떨어져 제대로 보충하는 게 중요하다.” 건강의 근본이 되는 기를 보완하는 식재료는 닭고기, 고등어, 양배추, 산마, 꿀 등. 체력은 물론 기력이 저하됐을 때 추천할 만하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 몸을 움직임으로써 피의 흐름이 좋아지고,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체내에 쌓인 여분의 수분과 노폐물이 배출될 수 있다. 덥다고 냉방기를 틀어놓은 실내에서만 지내면 물의 순환이 나빠지며 발이 붓고 관절통 등의 증상도 나타난다. 여름에도 샤워만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적절히 땀을 흘리고, 음료수와 음식도 따뜻한 걸 권하고 싶다. 기, 혈 수가 잘 돌도록 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몸도 마음도 활기차고, 더위도 먹지 않는다.”
- 2016-07-29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