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사람이 사는 마당에 정보가 필요한 법이라 정확한 정보가 운세를 연다.
•84년생 : 언쟁을 삼가고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우려야 어려운 일을 안 당한다.
•72년생 : 좋은 정보를 접하니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금전 운도 좋아진다.
•60년생 : 남의 일로 구설수에 오르게되니 나서지 않음이 좋으리라.
•48년생 : 애를 먹이던 문서가 매기가 있으니 이득이 약해도 결정하라.
◈ 소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통상적인 일이라도 눈을 멀리하면 틀어지는 것이니 게을리 하지 마라.
•85년생 :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운세이나 게으름을 피우면 뒤에 애를 먹는다.
•73년생 : 직장 사업장에서 이상한 일이 괴롭히니 맡은 일을 다시 점검하라.
•61년생 :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움직이면 얻을 것은 얻어지고 일이 해결된다.
•49년생 : 뜻밖의 횡재수가 없으면 술밥간에 좋은 대접이 있으리라.
◈ 호랑이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심혈을 기울인 일은 지금 당장 빛나지 않아도 뒷날 보석처럼 되리라.
•86년생 : 아무리 꾀를 써봐도 얻어지지 않으니 고대하지 말고 훗날을 기약하라.
•74년생 : 답답한 일을 확 풀어주는 운세가 오니 망설이지 말고 처리하라.
•62년생 : 성의를 담은 일이 허사가 될 운세이니 조심하고 미련을 갖지 마라.
•50년생 : 고집으로 일을 고단하게 만들게되니 아집을 버리면 순리대로 처리된다.
◈ 토끼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아무리 이익을 위한 일이라도 선악을 가려서 추진해야 무리가 없다.
•87년생 : 쓸데없는 걱정으로 힘만 드는 운세라 공연한 일에 나서지 않음이 좋다.
•75년생 : 모함과 함정이 도사리니 말을 삼가고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 것이다.
•63년생 : 정신이 혼미해져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운이라 약속은 다음에 하라.
•51년생 : 문서와 인장의 적절한 움직임으로 중도에서 이익을 취하는 수가 있다.
◈ 용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은 열리는 것이라 기다림이 상수이다.
•76년생 : 좋은 인연이 새로 타나나는 운이나 아니면 좋은 소식을 전해 듣는다.
•64년생 : 금전 운이 좋아 들어오는 것은 많으나 일이 꼬여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52년생 : 일사천리로 내딛던 일이 중도에서 막히니 대인관계를 다시 점검하라.
•40년생 : 만사가 지체되나 때가 맞지 않음이라 생각하고 기다림이 좋으리라.
◈ 뱀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것을 만들 듯이 이런 마음이면 무엇이든 해낸다.
•77년생 : 금전 운이 좋아 횡재 수는 있으나 윗사람의 미움을 받는 일이 있다.
•65년생 : 부하를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려움에서 일어나고 재수도 받는다.
•53년생 : 횡재 수는 아니나 금전의 움직임은 크니 조심스럽게 투자해보자.
•41년생 : 집중력이 떨어져 일의 막힘을 읽지 못해 애를 먹으니 타에 의뢰하라.
◈ 말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강물이 넘치나 떠 담을 그릇이 없으면 속만 타지 헛일이 아니겠는가.
•78년생 : 무슨 일이든 준비가 소홀하면 힘이 드는 법이라 오늘은 준비를 잘하라.
•66년생 : 다잡은 토끼를 놓치는 격이라 금전 운도 애정 운도 힘만 드는구나.
•54년생 : 매일 좋을 수는 없는 것이라 오늘은 운수가 막힘이니 바라지 마라.
•42년생 : 물심 양면에 만족한 운세이니 잘만 생각하면 많은 즐거움이 생기리라.
◈ 양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하)
무슨 일이든 활기가 문제라 활력으로 분위기를 살려 나감이 좋으리라.
•79년생 : 선배의 좋은 권고로 새로운 일이 생기나 연인과의 갈등은 힘만 든다.
•67년생 : 잔소리 같은 말도 잘만 들으면 투자에 이익이 클 것이라 귀담아 듣자.
•55년생 : 몸에 이상이 발생할 수라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큰 고생을 한다.
•43년생 : 마음이 허술해져 사기 당하는 일을 조심하고 돈 내놓을 일은 미루어라.
◈ 원숭이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순간적인 발상이 평생을 여는 초석이 되니 작은 시간도 허비하지 마라.
•80년생 : 미루던 일을 처리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금전 운도 열린다.
•68년생 : 이상한 꾀임에 빠져 일이 힘들고 손재를 당하는 운이니 조심하라.
•56년생 : 가물치 판돈은 통속에 있는 법이라 투자한 것이 크게되는 운세이다.
•44년생 : 횡재수가 아니면 먼 곳에서 자손의 좋은 소식이 오리라.
◈ 닭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한결 같은 마음가짐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81년생 : 힘든 일로 용돈을 만드니 좋은 곳에 써야 재수가 끊기지 않으리라.
•69년생 : 비바람도 잠시라 걱정도 잠깐 지나가는 것이니 참고 견디면 해결된다.
•57년생 : 물건을 잘못사서 애먹을 운이니 필요는 하나 경제성을 고려해야 한다.
•45년생 : 나쁜 기운의 바람이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니 현혹됨이 없어야 한다.
◈ 개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말의 능력은 군중을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이 있음이니 표현을 잘해보자.
•82년생 : 말도 안 해보고 혼자 단정하는 것은 기회를 잃음이니 한번 열어 보라.
•70년생 : 어렵게 생각하면 할수록 힘이 드니 생각대로 처리하면 재수가 열린다.
•58년생 : 작은 일에도 소홀함이 없이 신중을 기한다면 오후에 큰 이득을 얻는다.
•46년생 : 물에 빠진 놈 건져내니 보따리 내놔라 는 운이니 나서지 않음이 좋다.
◈ 돼지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쓸데없는 열등감은 사람을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니 마음을 크게 열라.
•83년생 : 내가 마음을 열면 다가오는 사람도 많고 구하는 것도 잘 들어온다.
•71년생 : 좋은 기운의 상승세라 희망하는 일이 열리고 금전 운도 확 풀린다.
•59년생 : 빗나가던 일이 길을 다시 잡으니 일에 활기가 가해지고 서서히 열린다.
•47년생 : 마음속에 꼭 잡고 안간힘을 쓰던 것을 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지리라.
‘오늘 같은 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 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7080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가수 이광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유로운 영혼’이다. 거친 가요계에서 수십 년 동안 매니저와 기획사도 없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공연과 음악활동을 했다. 사정이 그러니 당연히 아무런 홍보도 없이 음반을 냈다. 그런데도 노래가 ‘알아서’ 성공했다는 점은 숙명론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그가 최근 생애 최초로 신성사업단을 자신의 기획사로 삼아 새롭게 가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무엇이든 거침없이 말하며 자신의 인생에 머뭇거림이 없는 남자, 이광조만의 특별한 삶과 생각을 만나봤다.
자유롭다. 이광조와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은 자유 그 자체인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말하자면 진짜 보헤미안이다.
“저는 여태까지 유명한 사람들에게 곡을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그 사람들이 별로 유명하지 않을 때 가서 ‘한번 들려줘봐’ 하고 듣고 나선 할 건가 안 할 건가를 결정했죠. 어차피 매니저도 기획사도 없었고. 저는 자유스러운 걸 좋아해서 남에게 묶이는 걸 못해요.”
구애받는 걸 못 참는 자유 영혼
그는 심지어 “지금 노래는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까지 말한다. 바로 옆에 최근 그와 손잡은 기획사 대표 겸 매니저가 있는데도 말이다.
“안 하려고 했는데 홍순호 대표가 ‘안 하면 안 된다’ 해서 한 거죠.(대표 웃음) 어쩔 수 없이 친구 때문에 이렇게 트로트도, 유튜브도 하고요. 저는 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럭셔리하게는 못 살아도 길거리에서는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는 기획사 대표와 산전수전 다 겪은 가수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사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중학교 선후배 사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는 계약서도 없다.
“‘계약하면 안 한다, 그 대신 의리는 지킨다’ 했죠. 10년이면 10년, 20년이면 20년 안 변할 테니까. 지금 돈도 못 버는데도 같이 있잖아요.(대표 웃음) 매니저 없이 일하다가 이런 큰마음을 먹은 이유요? 늙었으니까.(웃음) 아아 농담이고요, 늙었다기보다는 한 인간(홍 대표)을 살려야겠다, 물론 나도 살고요. 그래서 한 거죠.”
부끄럽게 말하는 그가 귀엽다.
독설에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광조는 한때 가요계에서 독립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PD에게 안 눌리고 혼자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그였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우리 집이 60년대에 차가 두 대나 있을 정도로 잘살던 집이었는데, 중학교 때 폭삭 망했어요. 집에 돈이 없어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제 성격 때문인지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런데 가수들 보면 유명해지면 악착같이 돈을 막 벌어서 자기 집 살리려고 하잖아요. 부모님에게 미안했던 건 제가 떴을 때도 이상한 곳이면 안 가고 제 기준에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싶으면 절대 안 했어요. 매니저를 못 구한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었어요.”
어떤 때는 그에게 독설이 심하다는 비판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는 사실 그랬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참지 못하는 성미 때문이었다. 모 방송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서 노래를 듣고 대놓고 독설을 한 적도 있다. ‘노래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싶어서였다.
“그런데 말을 안 하는 건 애정이 없다는 거죠. 요즘은 너무 거짓말이 많아요. 못하는데도 아주 잘한다 하고. 예를 들어 제가 활동하던 시절에 노래를 할 때는 목소리에 에코를 안 넣었죠. 그런데 요새는 에코를 다 넣어요. 그렇게 하면 더 잘 부르는 것처럼 들리거든.”
무대는 지금도 떨린다
그에게 할 일 하고 할 말 다 하는 배짱이 두둑한 이유는 어쩌면 그의 가수생활이 흘러가듯 자연스레 도착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서울대 미대 출신 가수가 김민기, 현경과 영애, 이정선 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홍익대에는 아무도 없어서 ‘야 너 한번 나가봐’ 하고 미는 바람에 노래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1976년에 데뷔했죠. 맨 처음에 가수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가수 되면 남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래도 노래를 해야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죠.”
그때 그는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생애 최초 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데뷔 앨범은 다 만들어졌는데 레코드 회사가 3개월이 지나도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노래가 너무 어렵고 대중적이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그가 받은 계약금은 100만 원이라는 거액. 그러나 그는 성질이 나서 돈을 갖다 주고 계약을 파기했다.
“계약 파기하고 나간다고 하면 승낙을 잘 안 해주잖아요? 사장이 절 불러서 ‘너 다른 데 가려고 하지?’라고 묻는 거예요. 안 보내줄 것 같아서 ‘그게 아니다. 연극을 하려고 그런다’라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죠. 사실 내 연극 포스터가 붙어 있던 때였거든. 100만 원을 돌려주기 전에 이불 밑에 깔고 세고 세고 얼마나 또 샜는데…. 그 후 오기가 나서 진짜로 가수활동을 시작했죠.”
그에게 있어 가수생활은 어쩔 수 없이 된 거니까 한 거고, 그러다 보니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계기는 그를 여전히 순수한 가수로서 남게 해주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무대 뒤에서는 무지하게 떨어요. 그러나 정작 무대에 나가 조명을 받으면 내 안방 같죠. 콘서트 때도 첫 번째 두 번째 곡을 부를 때까지는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죠. 그러다 점차 노래를 하면서 좋아져요. 내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치스럽지도 않아요. 하지만 ‘내가 이랬습니다’ 하고 드러내기는 싫어요. 누가 나에 대해 물어봐도 ‘그냥 노래하는 가수예요’라고 말하는 정도죠.”
트로트, 싫다?
무념무상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광조의 삶에도 간절함과 절박함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그는 왜 절박하고 간절한 게 없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보니 그 또한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50대 시절, 삶의 고독이나 고뇌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변화무쌍했어요. 미국에서 지내던 때였죠. 미국은 좋았어요. 여길 왜 왔나 싶어.(웃음) 거기 있을 때는 세상에 그런 한량도 없었어.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살았는데 버스를 타면 20분이면 바닷가에 갈 수 있었어요. 음악활동은 전혀 안 했죠. 그냥 바다를 보는 게 전부였어요. 어느 날엔가는 밤에 바닷가에서 린다 론스태드의 ‘Long Long Time’을 듣는데 안개가 마치 뛰어가는 듯하더군요. 노래는 들리고 파도는 치고 있고 삶의 연민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사실 낮에 가면 개똥밖에 없어.(웃음)”
낮에는 개똥, 밤에는 안개가 깔리는 한적한 바다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철저한 보헤미안으로서 십수 년을 미국에서 지내던 그였지만 이제 최첨단 미디어의 도시 서울에 오게 됐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구십이 넘은 어머니에게 매일매일 문안인사 드리는 효자다. 그의 삶이 최근에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트로트도 불러봤다는 그에게 요즘 가요계의 ‘대세’인 트로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물어봤다.
“나는 좀 부담스러워요.”
역시 그다운 직선적인 대답이었다. 어쩌면 그 취향은 우리나라 컨템포러리 가요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묵직한 발라드 히트 넘버를 가진 가수로선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 트로트는 너무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도 필요는 하겠지만… 너무 가볍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물론 제 시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거죠.”
현재진행형 ‘유튜버’는 모험이다
이광조와 요즘 시대의 접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유튜브다. ‘철저한 아날로그 인간일 것 같은 이광조가?’ 싶지만 사실이며, 이광조 TV라는 채널도 갖고 있는 엄연한 ‘유튜버’다. 심지어 그는 웹예능까지 찍었는데, 그 시리즈 제목이 ‘레트로맨’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격하게 웃으며 비명을 질렀다.
“어우, 말도 안 돼. 그 얘기를 할게요. 나는 그런 걸 ‘너무너무’ 싫어해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는데, 신경질을 빡 부렸어. 안 해! 그래서 안 하게 됐어요.”
‘레트로맨’에서 이광조는 풍물시장이나 다방, 성수동 등지를 다니며 동네 여행을 하고 VR도 해보면서 신문물 체험 활동을 보여준다. 비슷한 구성으로 큰 인기를 끈 ‘와썹맨’, ‘워크맨’같은 ‘맨’ 시리즈 벤치마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손사래를 치지만 유튜브 채널에서 아직 감상 가능한 공식 ‘흑역사’다.
“지금 올리는 영상들은 어쩌면 제 노래를 듣고 싶었던 사람에겐 좋은 걸지도 몰라요. 팝송까지 합하면 200곡이 넘어요. 그걸 일주일에 하나씩 요새 목소리로 다시 녹음해서 올리는 건데, 쉽지는 않아요. 나는 노래하는 거 아니면 안 한다 그랬어요. ‘레트로맨’은 나는 몰라.(웃음)”
참,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답다. 여하튼 욕심 한 스푼, 미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그다.
소년이라는 말, 듣기 좋다
이광조는 요즘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냥 좋단다.
“가끔은 떡볶이를 먹고 싶다, 그러면 떡볶이 찾아 삼만 리야. 그런 게 행복이야.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
그는 한 일흔다섯 살까지만 살면 굉장히 잘 살았구나 생각할 거 같다고 말한다. 여든몇 살 돼서 정신 흐트러져 잊어버리는 건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흔다섯 살까지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이 늙은 소년이길 바란다. 맑고 변치 않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산 게 잘한 일 같아요. 남에게 ‘이거 한 사람이야’라고 말 안 하고 산 거. 그 외에는 잘한 게 별로 없어서.(웃음) 뮤지션으로서 남기고 싶은 게 있냐고요? 없어요.”
그는 철저한 소멸을 꿈꾼다. 음악도 그냥 하게 돼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스레 충족된 삶으로서 그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금의 이광조 자신이 된 것이리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은 싫고, 먼지도 싫고, 그냥 없어지면 좋겠어요. 입에서 입으로 안 전해지고 그냥 갔으면. 지금 살아 있을 때 얘기 듣는 게 좋지 그다음은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그의 대답을 듣고 입에서 저절로 솔직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지 않을 게 없죠. 죽을 때까지 이렇게 갈 거예요. 제가 바뀌길 기대하는 사람들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웃음)”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손해보는 일이 많으니 주의하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타인의 의견에 귀기울일 것이니 혼자만의 속단은 화를 부르니 의견 수렴을 하기 바란다.
•84년생 : 짜증나는 일이 많이 생기나 이겨내야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
•72년생 : 남의 주머니를 믿으면 더욱더 힘들어지니 잘 견디어 내야 된다.
•60년생 : 어디서 차용하더라도 이 일은 해결해야 뒷일에 문제가 없다.
•48년생 : 자식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 힘든 일이 해결된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호사다마라 좋은 일에는 반드시 방해가 따르니 감수하고 진행하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진행이 빠르고 얻음도 클 것이나 방해가 있으니 차근히 진행함이 길 할 것이다. 자중하여 행하라.
•85년생 : 새로운 아이디어 샘처럼 떠오를 때니 좋은 곳에 쓰도록 하라.
•73년생 : 길가다 보석을 줍는 격이니 출입에 새로운 길이 보인다.
•61년생 : 계약 건은 힘들고 재수는 좋으니 다른 쪽을 알아봄이 길하다.
•49년생 : 명예는 오르나 재수에는 흠이 많아 구하지 않음이 마음이 편하다.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재주는 곰이 돈은 엉뚱한 사람이 다가져가니 힘만 드는구나. 동분서주하여 일을 도모해 이익은 타인에게 돌아가니 허망히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
•86년생 : 할 일 없이 서성대면 시간만 낭비되니 가던 길이나 열심히 가라.
•74년생 : 귀인이 따로 없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도와주니 놓치지 마라.
•62년생 : 근본을 한 번 돌아보면 무엇이 막혔는지 알 수 있어 열어가리라.
•50년생 : 지금은 답답하나 인내하면 길이 보일 것이니 기다림이 상책이다.
◈ 토끼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망망 대해를 떠도는 배도 길이 있는데 사람의 갈 길이 없겠는가.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굳건히 맡은 바를 행하라. 길함이 유할 것이니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는 어두운 구름만이 머물게 된다.
•87년생 : 좋은 계획을 세워놓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니 세운 것만 못하다.
•75년생 : 새로운 구상 나침반이 필요한 때이니 계획을 잘 세우면 길이 보인다.
•63년생 : 재수가 생기다 마니 답답할 것이나 오후에는 조금 풀리니 기다 리라.
•51년생 : 점심 약속이 틀어지니 기분이 안 좋으나 더 좋은 일이 생긴다.
◈ 용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손오공이 날아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잔 꾀를 부려 어려움에서 모면하고자 하나 모두 발각되어 일신에 신용이 실추되니 망동은 삼가하고 중도의 길을 걸으라.
•76년생 : 가슴을 활짝 열어 툭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해결책이 나온다.
•64년생 : 마음에 있는 소리도 안 하면 상대가 모르니 속 시원히 해 보라.
•52년생 : 상대를 칭찬하고 세워주면 술밥간에 먹을 것이 생긴다.
•40년생 : 나를 내세우지 말고 일을 도모하면 얻는 것이 크다.
◈ 뱀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하려다 망설여 그만둔 일이 새로이 떠오르니 적당한 시기를 찾음이라.미루어 왔던 일이 실마리를 찾으니 길함이 있어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진하라. 득이 있을 것이다.
•77년생 :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 재수가 오다가도 돌아가니 편한 마음을 갖자.
•65년생 :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라.
•53년생 : 대궐 출입의 꿈을 꾸어 감투 쓸 일이 생기니 사양하지 마라.
•41년생 : 나에게 좋은 일거리를 만들어주니 힘이 절로 나는구나.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사방을 돌아봐도 꽉 막혀 있어 불안하나 하늘이 도우니 힘을 얻는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어려움에 직면해 있어도 뜻하지 않게 실마리를 찾아 해결을 하게 될 것이다. 노력하는 자에게는 길함이 있음을 잊지 말라.
•78년생 : 구관이 명관이라 버리고 돌아선 곳에서 연락이 오면 다시 가라.
•66년생 : 안 된다고 실망 마라 바른 일이라면 하늘은 도움을 줄 것이다.
•54년생 :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면 안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42년생 : 오랜 친구들과 한해를 보내는 기분으로 주석을 만들면 즐거우리라.
◈ 양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청탁을 받을 때가 좋은 것이다 거절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라. 일신이 높은자리에 유하니 여러사람들이 몰려 들어 부탁의 소리가 분분하다 자못 기분을 상할 일이 발생하니 처신을 잘하라.
•79년생 : 언짢은 심부름도 하고 나면 훗날 나에게 득이 된다.
•67년생 : 일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처리하면 꼬일 일이 없어 모든 게 밝아진다.
•55년생 : 옥에 티가 있어 나를 몰라주니 기분이 상하나 옥은 옥이다.
•43년생 : 나를 찾는 사람이 많으니 겸손히 대하면 새로운 등용의 문이 열린다.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심기 일전하여 다시 한 번 힘을 쓸 때가 되었으니 망동만 삼가라.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나는 의지가 필요할 시기이니 실의에 자책하지말라. 운기란 돌고 도는 것이니 구름이 걷히면 밝은 빛을 보게 됨과 같다.
•80년생 : 자책은 그만두고 일어서라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
•68년생 : 심혈을 기울인 일이 허탕이나 탈기 말고 다시 도전하면 알아준다.
•56년생 : 아직도 길은 많으니 좌절하지 말고 동쪽을 찾아보면 길이 있으리라.
•44년생 : 체통은 뒤로하고 코미디를 하더라도 아랫사람의 인정받으면 좋으리라.
◈ 개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배속은 비었는데 주막은 멀어 그래도 주먹밥이 허기를 면해준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라 운기가 길하니 순순히 해결할 것이며 지체하다 때를 놓치기 쉬울 것이다. 매진하라.
•82년생 : 괴로움에서 벗어나 두드리면 열릴 것이니 일단 두드려 보라.
•70년생 : 집착한 만큼 일의 성과도 크니 공을 드려야 소득이 커진다.
•58년생 : 기름진 고기로 배를 채워 만사가 눈에 안 들어오니 조심해야 한다.
•46년생 :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 시키나 재주는 부릴 줄 아니 잘 다스 리라.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누구에게나 끼는 있다. 전문적인 끼는 좋은 예술을 창조하는 법이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때가 이른다. 하지만 나만의 재능인냥 자만하지 말라. 경거망동은 운기를 불길하게 하니 자중함이 길하다.
•83년생 : 한가지 재주로 일어서 보자 오늘 하루가 즐거워진다.
•71년생 : 나의 기량을 알아주도록 보여줌이 모든 일에 생기를 넣는다.
•59년생 : 돼지꿈을 꾸었으니 복권은 이럴 때 한 번 사보는 것이다. 금전 운 길.
•47년생 : 찾아가서 해결을 봐야지 기다리면 일을 그르친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의 작가, 성공적인 의정 활동을 수행한 국회의원, 그리고 감사와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김홍신의 다양한 삶의 여정은 여러 가지 명칭들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그는 무엇보다도 다시 만년필을 잡고 원고지와 마주한 작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든 외부 활동이 불가해지자 그는 멈췄던 장편소설과 수필집을 완성하기로 했다.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빨갱이’로 몰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장편소설 ‘적인종’의 집필, 그리고 ‘월간 에세이’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수필집 출간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코로나19 여파로 역경의 연속인 삶을 보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울림을 들어봤다.
방송에서 자주 봐서 익숙한 김홍신 특유의 인자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외모는 여전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는 바이지만, 그의 삶은 그런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저 김홍신 인생이 순조롭다고 여기실 테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는 않죠. 모든 삶이 순조롭다면 지구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음이 있고 고통과 고뇌가 있고 실수와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죠.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신화와 역사가 될 수 없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
그는 원래 의대를 가고자 했지만 떨어지면서 재수를 해야 했다. 그때 느낀 울분과 절망은 스스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결국 재수를 해서 들어간 건국대학교 국문과. 취업도 안 되고 할 일이 없다 하여 타과 학생들이 ‘국물과’라고 부르는 학과였다.
“그때 집안이 망해서 휴학까지 했죠. 그래서 데뷔도 늦었어요. 그나마 당시에 가장 권위 있던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지만 날 이끌 사람이 없었어요. 종합대학 중 문인 숫자가 가장 적은 학교가 건국대였으니까요. 내 소설이 뛰어났다면야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죠.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떨어지니 ‘다 지들끼리 해먹는다’ 싶었고…. 물론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핑계를 대야 내가 견디잖아요? 유명한 소설가들을 비판하면 비평력이 있다고 착각하던 때였죠.”
절망의 청춘을 지나 성숙해지다
그의 날선 비판 대상에는 당대의 대표 소설가였던 최인호도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불만만 가득한 야인으로 살던 시절 끝에, 마침내 ‘인간시장’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순식간에 인기 작가가 된 그는 이제 다른 사람 작품의 심사까지 맡게 됐다.
“그때 최인호 형과 같이 심사하게 됐는데, 너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했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으려니까요. 그래서 ‘선배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라고 먼저 말했죠.”
최인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김홍신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다 털어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을 비판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나를 끌어안는 거예요. ‘내 앞에서 최인호를 비판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너무 고맙다’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을 반성하고 속죄하고자 한 김홍신이나 그런 모습을 보고 기탄없이 받아들인 최인호나 둘 다 넉넉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식사 때 서로 돈을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 결국 의형제를 맺는다.
“그때 인호 형이 한 얘기가 ‘지금 김홍신을 시샘하는 사람이 많다. 그걸 견뎌야 한다.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바른 걸음으로 걸으며 세상과 너무 타협하지 말라’는 거였죠.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는걸(웃음). 온갖 협박 공갈에 편할 날이 없었어요.”
우리 어딘가에 있는 의인들을 도와줘야
그의 고난은 작가 생활을 거쳐 국회의원 시절로도 이어진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한 그는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계속 주변과 싸워야 했다. 15대 국회에서는 ‘이틀만 근무하는 5월에 한 달 치 세비를 받는 건 혈세 남용이라며 세비거부 운동을 벌여 동료 의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2003년에는 당 지도부에 의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강제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치권에서 배척받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진심이 닿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5, 16대 연속 의정 활동 1위 국회의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증거였다. 그는 정치에 대해 싸울 때는 침묵하지 않고 자신만의 할 말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몰아내고 영웅이 될 만한 사람들을 쳐냈어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는 힘 있는 자들의 횡포라고 진단했다. 자기가 역사에 남고 존경받으려면 남을 칠 수밖에 없다는데, 그건 상대를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받음을 잊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은 일궜는데 기쁨을 잃었어요. 배고픔은 해결했는데 배아픔은 해결 못하고 있죠.”
그래서 그는 시대를 이끄는 현자와 의인들은 시대가 만들어주고 옹호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구석구석에 계십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끝까지 진실을 향해 항해하는 사람. 우리 사회 곳곳에 계세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대구의사협회장의 호소문에 응답하는 의사들의 모습도 그런 것이었다고 봐요.”
굴곡 많은 시련을 어떻게 견뎌왔나
얘기가 자연스럽게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로 들어가게 될 시점이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은 끝나기는커녕 미국과 유럽 등지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 거대한 역병의 파도에 쓸려 심신이 고달프고 막막하며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처럼 굴곡진 삶에서 김홍신은 누구보다도 그런 상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히 지옥 생활이라 할 수 있었던 시기는 소설 ‘대발해’를 쓸 때였다. 시작은 법륜 스님의 권고였다. “국회의원, 장관 열 번 하는 것보다 발해 역사를 알리는 게 할일 아닙니까”라는 말에 동의하며 시작된 ‘대발해’ 집필은 2004년 말부터 3년간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며 피폐하게 살게 만들었다. 그때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점도 그를 힘들게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치아와 눈, 허리에 문제가 생겼죠. 불면증도 생겼어요. 자다가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 메모해놓고 잠을 자야 했으니까요.”
소설은 마침내 2007년 여름에 발표됐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요로결석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스카프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연이 있어요. 소설을 쓰면서 밖을 안 나가다 보니 햇볕 알레르기가 생겨서, 햇볕에 노출되면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더군요. 얼굴은 약을 바르면 됐는데 목은 치료가 안 돼서 스카프를 두르게 된 거죠. 그리고 지금도 가끔 손에 마비가 와요. 원고지 만이천 장을 썼으니까요. 교정만 7개월을 봤고요.”
우리는 역경을 거치면 반드시 더 강해지는 민족
김홍신은 ‘대발해’를 발표한 후 7년 동안 소설을 못 썼다. 소설 집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려고만 하면 또 아프다 쓰러지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발해’로 소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끝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지 소설을 못 쓰겠다’는 두려움이 집필에 대한 부담감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다 그동안 사회비판소설, 역사소설을 주로 썼으니 사랑 이야기를 쓰면 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쓴 게 ‘단 한 번의 사랑’이었죠. 그 이후에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쓸 수 있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적인종’을 집필할 수 있게 된 거죠.”
소설을 쓰다 죽을 뻔한 경험을 치른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108배를 하며 세상, 민족, 평화, 북한 동포, 인도 불가촉천민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자신이 기도한다고 세상이 변할까마는, ‘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와 같은 희망의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품앗이 정신이 대단한 민족이에요. 대구만 봐도 모여드는 의사, 간호사, 봉사자들 보세요. 대구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이 달빛동맹으로 교류하는 걸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보려고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걸 보면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토록 남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게 안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 반드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DNA가 있잖아요.”
나를 존중하고 세상을 존중하라
그는 잘 늙으려면 스스로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존중하려면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 공기, 풀, 햇빛을 사랑하고 그 존엄성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과 세상을 위해 깨달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고 말한다. 이는 김홍신 자신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사랑 못할지언정 그에 대한 미움은 없어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면 내 전생의 어머니였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려 하면 내가 편안해져요.”
그에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적 사연이 있다. 과거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를 잡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재작년에 사망했다. 그는 그의 부고 소식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해서 노트에 붙여놓고 그 옆에 그와 자신의 사연을 썼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방향을 향해 108배를 했다. 생전에, 그는 김홍신에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죄를 구했다. 김홍신은 그런 그를 보며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문이 있었다. ‘내가 과연 그를 용서한 걸까?’ 그래서 108배를 해보며 계속 되물었다. 답은, 용서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의 평화를 만드는 마음의 다짐
“지금 제가 찬 시계는 흔들어줘야 가는 오토매틱 시계예요. 이틀 가만 놔두면 죽어요. 이 시계처럼 인생도 자꾸 흔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남한테는 ‘흔들어주세요’라고 말해놓고 자신이 안 하면 안 되겠죠.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흔들어야 해요. 명상과 기도, 고맙다는 감사 등이 그 방법들이에요.”
그는 요즘 모두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집에 있는 진달래, 홍매화도 스승이다. 자신을 기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운 사람이 생겼다고 쳐요. ‘에휴…’ 하다가도 ‘내가 미워하면 안 되지. 잊어버리자’ 하며 다잡습니다. 그리고 저녁기도할 때 ‘내가 미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반성합니다. 그러면 내가 편해져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제 스승인 거죠.”
물론 무조건 다 그의 말처럼 살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계속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깨달음과 평화가 있음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김홍신이란 이름을 부를 때 기뻤으면 좋겠어요. 아주 기쁘진 않더라도, 싫지 않고 밉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려고 하니까 힘들게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그걸 해내는 게 기쁨이 될 수 있는 거죠.”
마음 한쪽이 아련히 아팠다. 그렇지만 그와 이야기하면서 지금 ‘장총찬’이 절실한 이 시대에 김홍신이라는 문인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무릎을 탁 치며 늙음과 낡음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축복이 스며들었다.
구좌읍 세화리 바닷가를 걷는데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하기엔 기이했다. 물고기가 그런 소리를 낼 리는 없고. 바닷가에 새만 있으니 새소리려니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소리가 해녀의 숨비소리임을 알게 됐다. ‘호오이’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잠수하는 여자(潛女) 해녀
제주 해녀(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는 1~2분간 숨을 참으며 수심 10m까지 잠수해 소라, 전복, 성게, 해삼 등의 해산물을 딴다. 숨 쉴 때는 물 위로 떠올라 재빨리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때 ‘호오이’ 숨비소리가 난다. 해녀는 이 과정을 반복하며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물질을 한다. 산소마스크도 없이 말이다. 해녀가 잠수에 특화된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반복된 물질과 훈련을 통한 결과다.
제주 해녀의 물질 기술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소녀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눈치껏 배우고, 훗날 딸에게 가르치며 대를 이어 전승됐다. 해녀는 물질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해녀가 대장 해녀이며, 해녀 공동체를 이끈다.
오랜 기간 물질을 한 상군해녀는 채취 기술이 뛰어나고, 바닷속 해산물 서식처와 조류와 바람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다. 해녀들이 물질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일기예보보다 상군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할 정도라고 한다. 제주 해녀의 이런 독창적인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6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해녀가 다니던 숨비소리길
해녀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밭일도 하며 생계를 꾸린다. 그녀들이 물질하러, 밭일하러, 부지런히 누비던 길을 스토리로 엮은 것이 ‘숨비소리길’이다. 제주올레처럼 바닷가도 지나고, 마을 골목길도 지나고, 밭도 지난다. 이 길을 걸으며 고된 해녀의 삶을 짐작해보고, 봄기운 무르익은 들판과 비췻빛 바다를 만끽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쉬워 아껴 걸었더니 한나절이 훌쩍 지났다.
숨비소리길의 출발점인 해녀박물관은 제주 여행 필수 코스다. 제주 해녀의 역사·생활풍습·세시풍속·무속신앙·해녀 공동체 등의 자료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해녀 항일운동사까지 정리돼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바다 전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3층 전망대에 오르자 비현실적인 빛을 뽐내는 세화 바다와 세화리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해녀박물관을 둘러보고, 뜰에 있는 해녀상 뒤쪽으로 가, 숨비소리길 첫 이정표를 찾았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세워져 있어, 세상없는 길치이지만 걷는 내내 두렵지 않았다. 해녀박물관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세화 축구장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 아래 자리한 ‘삼신당 여씨할망당’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돌집 안에 여씨할망신위를 모셔두었다. 제주에서는 할망당, 해신당을 흔히 볼 수 있다. 할망당을 뒤로하고 면수동마을회관 앞을 지날 무렵, 아름드리 팽나무, 네 그루에 눈길이 갔다. 왠지 인사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제주 사람들은 팽나무를 ‘폭낭’이라고 부른다. 여름 태풍과 겨울 찬바람에도 견디는 폭낭은 마을 쉼터 역할을 한다.
제주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밭담’
면수동마을회관 사거리에서 하도리 별방진에 이르는 약 2km 구간에는 무, 당근, 보리 등을 심어놓은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잔잔한 바다처럼 보였다. 세로선보다 가로선이 많은 풍경에 맘이 평화로워졌다. 파스텔 빛 바다도, 진초록 보리밭도, 노란 유채밭도, 검은 현무암 밭담도 모두 나지막이 가로누워 있다. 이 구간이 ‘밭담길’이다.
돌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돌을 쌓아 밭 경계로 삼았는데, 이를 밭담이라고 한다. 밭담을 쌓은 뒤로 토지 분쟁이 사라지고, 가축이 농작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줄었으며, 농경지 면적이 늘어 제주 농업 발달에 기여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밭담에도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밭담은 제주도의 전통문화 산물로 평가받아, 국가중요농업유산과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세화리에서 하도리로 이어지는 이 밭담길은 바다를 오가며 생계를 꾸몄던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평상시에는 밭일이나 집안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 알고 보면 고된 물질도 부업일 뿐이었다.
별방진 품에 안긴 하도리
밭담길을 지나 하도리 골목길을 지나면 별방진이 나온다. 별방진은 마을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하도리의 옛 지명인 별방에서 이름을 땄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타원형이다. 별방진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별방진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하도리 마을이,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하도리 포구가 마주보고 있다. 별방진 안에 초록, 빨강, 파랑 지붕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풍경이 동화 속 그림 같다. 하도리 마을이 유난히 평온해 보이는 건 태풍도 왜적도 다 막아줄 것 같은 별방진이 있어서가 아닐까.
별방진 이후로는 줄곧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제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에 그물처럼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원담과 해녀들이 물질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던 불턱들을 차례로 만났다. 제주 해안에는 마을마다 서너 개의 불턱이 있다. 구좌읍에 해녀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어, 숨비소리길 구간에서만 서동 불턱, 보시코지 불턱, 모진다리 불턱, 생이덕 불턱 등을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고, 1985년 전후로 현대식 탈의장이 설치되면서 불턱의 역할은 줄었다.
비췻빛 바다가 매력적인 세화리
세화리 바닷가에 이르자 해녀와 어부들이 물질 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갯것할망당’이 눈에 띄었다. 제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해신당에서 용왕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음력 1월 초부터 3월 초까지, 약 두 달 동안 34개 어촌계에서 해녀굿을 봉행한다. 해녀굿 중 바람신인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영등굿을 가장 성대하게 치른다.
갯것할망당 옆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를 가둬놓은 ‘도구리통’이 있다. 제주 사람들이 용천수 둘레에 네모난 담을 쌓고, 식수를 뜨거나 빨래를 하던 곳이다. 수도 시설이 잘돼 있는 지금도 물통에서 채소를 씻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도구리통을 지나면 곧 해녀박물관이다. 이미 둘러봤으므로 세화해변까지 이어 걸었다. 제주도에서 물빛 좋기로 소문난 곳이 협재, 금릉, 함덕, 우도 등인데, 요즘은 세화를 추가해 손꼽는다. 세화 바다는 협재나 함덕처럼 번화하지도 않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감성 카페와 책방, 소품 가게들이 고요히 자리한 사랑스러운 곳이다.
◇ 주변 명소 & 맛집 ◇
세화민속오일장
세화해변 끄트머리에 자리한 세화민속오일장은 날짜 끝자리에 ‘0’ 또는 ‘5’가 붙는 날 장이 선다. 규모는 작지만 채소, 곡식, 수산물, 젓갈, 생활용품, 간식거리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다 판다. 낭만적인 뷰는 덤이다. 시장 안에서도 세화 바다가 보인다. 이곳 장터는 1930년대 초 하도리·종달리·세화리·연평리·시흥리 등지의 해녀 1000여 명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에는 시장 앞에서 플리마켓 벨롱장이 열린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500-44
카페록록
하도리 바닷가에는 전망 좋은 카페가 늘어서 있다. 이 중 카페록록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시원한 바다와 돌담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내 곳곳에 둔 초록 식물이 온실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인기 포인트. 푸딩처럼 말캉한 에그타르트가 별미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서문길 41 / 10:30~18:30 /카페라테 6000원
연미정
세화리에는 전복돌솥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두 곳 있다. 연미정과 명진전복이 그 주인공. 명진전복은 TV에 출연한 덕에 늘 대기 줄이 길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명진전복을, 가성비를 따진다면 연미정을 선택해볼 것. 전복돌솥밥을 주문하면 1인분이라도 작은 고등어 한 마리와 약간의 활어회가 따라 나온다. 반찬 맛은 평범한데, 전복 내장까지 넣어 지은 돌솥밥이 쫀득하고 구수하다. 제주시 구좌읍 세평항로 14 /09:00~21:30 매월 첫째, 셋째주 수요일 휴무 /전복돌솥밥 1만5000원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바다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만리가 푸르나 자만심은 금물이다. 순풍에 돛을 단듯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순조롭게 진행되면 이룸 또한 클 것이다. 그러나 자만하는 가운데 우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84년생 : 오해가 생기니 내가 먼저 풀어야 이야기가 된다.
•72년생 : 비정상적인 일로 헤매면 재운이 오다가 물러간다.
•60년생 : 정당한 재운은 길하나 과욕을 부리면 오히려 손재가 온다.
•48년생 : 투자는 재미없으나 막힌 일은 서서히 풀린다.
◈ 소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선의의 경쟁은 나에게는 채찍질이 되니 급해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경쟁자나 해방꾼이 있을 수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을 먹고 일을 진행한다면 그르칠 수 있으니 자중하라.
•85년생 : 진행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많다.
•73년생 :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으니 주위를 살펴보고 진행하자.
•61년생 : 지나친 음주는 건강도 마음도 어렵게 만든다.
•49년생 : 옛일이 재수를 열어주니 옛날 사람을 찾아라.
◈ 호랑이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활발한 움직임이 운을 열어주니 모든 일을 게을리 하지 마라.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이익이 발행하게 되니 가을을 만난 말처럼 살이 찌게 될 것이다. 길한 운이 들어 올때 열씸히 노력하라.
•86년생 : 움직이는 만큼 소득이 돌아오니 열심히 하라.
•74년생 : 상대에게 강한 믿음을 줘야 일이 잘된다.
•62년생 : 공연한 시비로 손재수가 많으니 가던 길 그대로 가라.
•50년생 : 분주하고 일거리는 오가는데 실속이 없다.
◈ 토끼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하늘의 내림이니 도움을 사양 말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일진이 가히 좋으니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탄탄대로에 말을 달리는 것과도 같다 하겠다.그러나 자만으로 인해 우가 있을 수 있으니 경거망동은 주의하라.
•87년생 : 계획을 세웠다면 기다리지 말고 바로 실천하라.
•75년생 : 미루어 오든 일들이 해결될 조짐이 보인다.
•63년생 : 변동 변화의 운이니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51년생 : 갑자기 분주해지나 새로운 투자는 보류하라.
◈ 용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생각지도 않은 일이 화를 불러일으키니 간섭은 금물이다. 돕고자 하는 일에 흉이끼니 경거망동은 삼가하고 자중함이 길한 괘이다. 섣 부른 행함은 오히려 나를 흉하게 함을 명심하라.
•76년생 : 사촌이 간다고 나도 가면 해가 많다. 조용히 기다림이 길하다.
•64년생 : 무슨 일이든지 나서면 재수가 막힌다.
•52년생 : 갑갑하던 체증은 내려가나 새로운 일은 삼가라.
•40년생 : 건강에 무리가 안 가도록 서서히 움직여라.
◈ 뱀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무엇이든 정성을 들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법인데 마음을 열라. 지성이면 감천이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혼신을 다해 노력하라. 그러면 이룸이 클 것이다. 귀인이 도움이 있을 것이니 흉길이 반반이다.
•77년생 : 기다리던 연락은 오나 재수는 불길하다.
•65년생 : 여러 가지 생각은 두고 한가지만 뚫으면 열린다.
•53년생 : 만나자는 약속이 들어오면 만나보면 좋은 소식이 있다.
•41년생 :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막힌 일이 열린다.
◈ 말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말고 실리를 추구하라. 티끌모아 태산이라 작은 것에도 소홀이 대하지 말라. 후에 많은 이가 발생할 것이다. 운기가 길하니 도모하는 일마다 이룸이 크다.
•78년생 : 사랑은 마음먹은 대로 금전은 구하지 마라.
•66년생 : 새로운 문서에 함정이 있으니 윗사람에게 상의하라.
•54년생 : 번잡한 일들이 많으나 한가지 집중하면 재수는 들어온다.
•42년생 : 작은 질병도 소홀히 하면 걱정거리가 생긴다.
◈ 양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미리 겁먹지 말고 속내를 보여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노력하는 가운데 실리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만 바탕으로 탁상공론에 그치게 되면 실행하지도 않고 그만두는 것이다.
•79년생 : 힘차게 밀면 연락이 온다. 애정문제도 좋은 소식 있다.
•67년생 : 두드리면 열린다. 말도 안 하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발표가 중요하다.
•55년생 : 음지가 양지된다고 했으니 지금이 그 시기이니 움직여라.
•43년생 : 넓은 강에 큰배는 있으나 사공이 없는 격이라 투자는 안 된다.
◈ 원숭이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본전 생각하면 새로운 밑천이 나간다. 잃어버린 것은 잊어라. 지난것은 지난 것이니 뒤돌아 후회해 본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도 같게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임을 교훈 삼으라.
•80년생 : 애정이 싹트는 때이다 기다리지 말고 내가 움직여라.
•68년생 : 조그마한 투자는 이익이 있으나 큰 투자는 불길하다.
•56년생 : 잘 풀리던 일이 다시 막히는 운이니 급하게 처리하면 손해다.
•44년생 : 지나간 일은 잊고 새로운 일에 힘을 투자할 때이다.
◈ 닭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장수가 승전고를 울리니 애틀 태우던 일이 해결된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처음은 곤고하나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득이되니 조급한 마음은 가지지 말라. 노력하는 가운데 복이 있다.
•81년생 : 목마른 나무에 단비가 내리니 꼬였든 일이 점차 풀린다.
•69년생 : 올바른 마음은 횡재 수를 가져온다.
•57년생 : 귀인이 도우니 재수 없든 일이 이제야 풀린다.
•45년생 : 귀인은 동방에 있으니 약도 의사도 재수도 동방에서 찾아라.
◈ 개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가을 꽃나무가 서리를 맞는 격이니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생각지도 않은 일에 난처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슬기로운 지혜로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82년생 : 명예 체면이 손상되는 일로 마음이 상하나 늦게는 좋다.
•70년생 : 큰 횡재가 올 기운이 보이니 투자도 즐겁다.
•58년생 : 체통에 흠이 가나 실소득은 좋다. 실리를 구하라.
•46년생 : 둥근 달은 나를 기쁘게 하니 한밤에 좋은 손님이 온다.
◈ 돼지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하)
오늘의 일진은 관재 구설이 왕래하니 오늘만큼은 먼지를 묻히지 마라. 관재 구설에 손재까지 발동하니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외출은 금물이다. 가내에서 자중함이 가장 길한 괘이다.
•83년생 : 판단력이 흐려져 이상한 일이 생기니 조심하라.
•71년생 : 사막에서 우물을 만난 격이나 조심해서 마셔야한다.
•59년생 : 구사일생이라 코 빠진 일이 어렵게 얻어진다.
•47년생 : 앞 뒤 분간 없이 밀어붙임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나이 먹어서 즐거운 일은 호수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 일이다. 일하다가 지겨워서 작업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면 공원에 봄볕이 가득하다. 나는 햇볕이 아까워서 하던 일을 밀쳐놓고 공원에 나가 양지쪽에 앉는다. 노인들이 많이 나와 있다.
햇볕을 쪼일 때 해와 나 사이에는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햇볕은 옷을 뚫고 들어와 내 몸속에 스민다.
자연을 받아들이는 행위들 중에서 봄볕을 쪼이는 일은 가장 관능적이다.
나는 젊었을 때 혼자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옷을 모조리 홀랑(!) 벗고 개울물 속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장마가 끝나고 며칠 지나면 물의 흐름이 순해지고 향기도 진해진다. 이때 개울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구석구석에 와 닿는 물의 감각은 놀라웠다.
물이 숲의 향기를 싣고 내려와서 새로운 시간을 내 숨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은 육신을 가진 생물로 변해서 내 몸을 안았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려 와서 내 몸을 핥고 지나갔다.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져서 낡은 시간의 똥가루가 빠져나가고 창세기의 새벽처럼 순결한 세상이 전개되었다. 수묵 산수화를 그리던 조선의 선비들은 물을 멀리서 보고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지, 나처럼 홀랑 벗고 들어갈 줄은 몰랐던 것을 나는 답답하게 여긴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산속에서 수행을 계속했고 겨울에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 개울 아래쪽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수행하러 갔더니 ‘나체 목욕 금지’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까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이 짓을 더 이상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데 이 즐거움은 젊은 날의 개울물 수행과 거의 맞먹는다. 나는 봄볕 쪼이기가 개울물 수행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당도하기까지는 초속 30만 km로 달려서 8분 걸린다고 하니 이 무지막지한 공간과 속도는 물리학자들이 알겠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르지만 봄볕을 즐거워한다. 이 밝음과 따스함은 저 무한공간을 건너서 나에게 직접 다가온다. 나는 이 직접성의 사태에 경악한다. 나는 태양의 애무를 받는다.
봄볕을 쪼이면 잘한 것도 없이 상을 받는 것 같다. 봄볕을 쪼이면 어려서 어머니 속 썩인 일과 자라서 아버지 속 썩인 일과 함부로 지껄인 말들이 용서받고 있는 것 같다.
볕은 빛과 함께 우주공간을 건너서 내게로 온다. 빛은 스스로 아무런 색도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한다. 빛은 프리즘을 통과할 때 수억만 개의 색들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지지만, 그 모든 색들을 다 합쳐서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광선이 된다. 모든 색을 다 아우러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다. 봄볕은 그 빛 위에 실려 있다.
봄볕 속에서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분홍색 하늘이 펼쳐지고 그 위에 붉고 푸른 반점들이 별처럼 떠 있다. 반점들은 어디론지 흘러가고 또 다가온다. 그 반점들은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내 생명의 신호들이다. 신호들은 가물거린다.
봄볕은 생명을 깨어나게 하고 삶의 쓰라림을 위로한다. 겨울에 흰 눈에 덮인 공동묘지에 가면 삶과 죽음은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하얀 공동묘지에서 죽음은 범접할 수 없고 말 붙일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
봄이 와서 흙이 부풀고 무덤들이 파래지는 한식날 성묘 가면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서 평화롭다. 오래된 무덤에서는 슬픔의 날카로움이 풍화되어서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봄에는 호수의 거북이들이 바위 위에 올라와서 한나절씩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언 호수 밑에서 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바위 위에서 거북이들은 꼼짝도 않는다. 거북이들은 매우 집중되고 경건한 태도로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눈을 감고 있는데, 거북이들의 눈꺼풀 속에도 반점들이 흘러 다니고 있을 터이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거북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의 즐거움을 안다.
작은 동물원의 미어캣들도 발딱 일어서서 봄볕을 쪼인다. 이것들의 자세는 교양 없어 보인다. 이것들은 몸을 활짝 열어서 봄볕을 맞는다. 아이들이 미어캣을 들여다보면서 미어캣 흉내를 낸다. 아이들의 뒤통수 가마에 봄볕이 가득하다.
닭들은 봄볕에 부푼 땅을 파고 들어앉아 흙을 파헤치며 뒹군다. 닭은 봄볕과 땅기운을 함께 뒤집어쓴다. 닭은 하늘과 땅, 양쪽을 다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나와 거북이와 미어캣과 닭이 다 같은 중생임을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개울물 수행하던 젊은 날이 늙은이의 봄날 속에 살아 있음을 안다. 봄볕은 공짜다.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등의 노래들로 국민가수의 삶을 살았던 김상희. 그녀는 196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 신분으로 가수 데뷔를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여성이 법학과 엘리트라는 점도 특별했지만, 그런 사람이 소위 ‘딴따라’ 가수를 한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감한 선택은 성공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살았던 그녀에게는 50여 년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지난 시대의 역사가 있다. 삶의 지혜 가득한 그녀의 얘기를 들어봤다.
김상희와의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특유의 보이시한 저음이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밝고 힘 있는 목소리 톤에서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1943년생, 올해 행운의 숫자 7을 두 개나 갖는 나이가 됐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토록 젊음을 유지해주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우리 남편이죠. 남편은 우리 집 원동력이고 아주 좋은 친구예요.”
김상희의 남편은 유훈근 씨. KBS PD 출신인 그는 1968년 그녀와 결혼해 어언 52년간을 함께해왔다. 이혼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졸혼이 유행처럼 얘기되고 있는 요즘, 이 부부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단단해 보였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다.
행복의 근원은 남편의 배려심
“대학 4년 동안 그야말로 남자 대학 같은 곳에서 공부했어요. 당시엔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또 밖에 나와서 만나는 방송계, 언론계 사람들도 다 남자들이었고요. 말하자면 남자들 세계에서 생활한 셈인데, 남편이 혹시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그런 내색은 안 하고 편하게 대해줬죠. 친정 부모님은 내가 가수생활 하는 걸 정말로 싫어하셨어요. 시댁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양가 어르신들께 용감하게 입장을 말씀드리고 결혼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남편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남편은 등대이자 나무 그늘이었다고 표현했다. 전혀 불평도 안 하고 감싸주고 보살펴주니 그녀로선 당연히 남편을 인생의 동반자처럼 항상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마음을 다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것 같아요. 특히 상대의 자존심은 꼭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픈 부분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요. 예를 들어 남편은 잔소리, 특히 한 말 또 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부부생활은 철저한 일상인데, 상대의 잘못은 잘 보이고 내 허물은 잘 안 보이기 마련이죠. 그래서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눈만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한다. 밤에 자다가 문득 눈이 떠질 때가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남편을 보면 너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요즘 남편이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에 돈 버는 일을 좀 더 많이 하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돈 벌었잖아, 우리 살렸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래’ 하고 말해주곤 해요.”
정치와 연을 끊은 사연
남편의 후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부의 돈독한 관계와 달리, 부부를 둘러싼 외부 환경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시댁은 정치하는 집안이었어요. 시아버지가 5선 국회의원이고, 시숙부도 4선 국회의원이었죠. 종갓집 맏며느리로 할일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엄청 했어요. 주변에는 늘 우리 집안을 사찰하는 사람이 있었고요. 무슨 움직임이 없나 이런 거 말이죠.”
어느 날 PD였던 남편에게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가 함께 일하자고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 요청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도 정치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결혼을 허락할 때 남편한데 정치를 안 하겠다는 언약을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이 고민할 때 나도 생각이 많았죠. 그러나 ‘나도 친정에서 그렇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는데 저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죠.”
남편은 결국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무렵은 서슬 퍼런 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야당 의원 공보비서가 된 남편과 그런 남편을 둔 가수를 정권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고 그 시간 동안 김상희는 방송 출연과 공연 금지를 당해야 했다. 그때 그녀는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햄버거 장사도 해본 적 있다.
“그런데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내가 계산을 잘 못하는 데다 원가와 이익 구분도 못 하겠더라고요. 장사를 하면 안 될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귀국한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마음 아파했죠. 그렇게 먹고살 게 없었느냐고. 사실 그렇게 부족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시댁에 가서 돈 얘기를 일절 안 했거든요.”
그러나 남편의 정치 도전은 끝이 좋지 못했다. 마침내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전주시 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남편에게 전주 갑은 아버지의 지역구였기에 의미가 컸고, 모두들 그가 당연히 국회의원 후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당에서 공천 명단을 발표했을 때 남편은 떨어지고 변호사 출신 인사가 후보가 됐다. 남편은 분노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그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 일로 환멸을 느낀 남편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0월 26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날
어쩌면 그런 ‘팔자’였을까. 김상희에게도 정치계와 관련된 비화들이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10·26 사건과 그녀가 인연이 있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녀는 유신정권 시절,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히 할 말을 했던 에피소드들을 들려줬다.
“어느 날 밤 청와대에서 공연을 하라고 부른 적이 있어요. 나이트클럽과 계약이 되어 있었던 터라 못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문화공보부 장관이 몇 시 스테이지냐고 묻더라고요. 9시, 11시라고 했더니 그럼 그 전에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갔죠. 그런데 노래를 끝내고 나왔을 때 아무도 없는 거예요. 청와대 입구까지 혼자 어떻게 걸어 나와요. 그래서 냅다 소리를 질렀죠. 장관 이름을 부르면서.”
청와대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대단한 ‘깡’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녀를 장난삼아 ‘깡패’라고 부르곤 했다는데, 그녀의 대찬 기질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어이, 깡패. 왜 그러는 거야’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공연 때문에 나이트클럽에 가야 하는데 내보내준다고 해놓곤 연락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비서들에게 ‘여기 봐!’ 하더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거 아냐’ 하고 혼을 내더라고요. 그래서 쏜살같이 공연하러 갈 수 있었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관계였기에 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다.
“10월 26일 저녁에 청와대 연회 공연이 있었어요. 공연을 끝내고 저는 돌아왔고요. 그런데 그 후 안가에서 사건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머리가 띵하더군요. 바로 전에 만났는데….”
다양한 장르 섭렵한 멀티 플레이어
전직 대통령들과의 에피소드는 그쯤에서 끝이 났고, 이제 그녀의 음악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요즘 김상희는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이나 품격 있는 공연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양재무 음악감독이 이끄는 남성합창단 이마에스트리와 함께하는 공연도 그렇다. 이마에스트리로선 창단 이후 최초로 대중가요 가수와 협연하는 공연이기도 하다. 그런데 60년 가수생활 동안 그녀는 가요만 부른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가곡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부른 게 있고 동요도 불렀어요. 일본에선 재즈 앨범도 만들고 뮤지컬 넘버를 발췌한 앨범도 냈어요. 내가 생각해도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어.(웃음) 뮤지컬도 하고 영화도 찍고 할 거 다 했거든요. 이번에는 클래식과 함께하는데 이질감이 없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즐기는 사람’, 뭐든지 잘 흡수하는 ‘한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스스로 분석하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했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처음엔 잘해요.(웃음) 그런데 내 몫만 하는 타입이죠.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노래의 깊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졌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강직함
김상희는 지금도 밥공기에 밥풀 한 알 남기는 일 없이 먹는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밥상머리 교육’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친정은 상인 집안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무역을 했어요. 굉장한 재력가셨죠. 외화도 수입하고 극장도 운영하셨는데,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걸 아주 싫어하셨어요. 어쩌다 떨어진 밥풀을 보면 우리더러 다 먹으라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명을 어기기 힘들었죠. 그때부터 남김없이 밥을 끝까지 먹어치우는 버릇이 생겼어요.”
친정어머니도 강직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이 실수를 하면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닌 연대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나중에는 형제들끼리 실수가 없도록 서로 단속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김상희에게서 느껴지는 꼿꼿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도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이란다.
달이 뜨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을 속여야 했기에 가명을 썼다.
“나는 좋아하는 걸 하게 되면 밀어붙이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엄마에겐 대못을 박았구나, 깨달은 적이 있어요.”
김상희의 둘째 아들도 그녀가 졸업한 고려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그런 아들을 사랑스러운 자식이자 자랑스러운 후배로 여겼다. 법대에 들어간 만큼 사법고시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아들은 여유만만하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났는데 낙방이었다. 얼굴이 새까매진 아들은 “전 고시할 팔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오늘 부로 접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노랬죠. 친정어머니도 내가 가수한다며 법 공부 안 했을 때 남산을 세 번을 돌면서 울었다고 했어요. ‘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게 됐죠. 아들에게는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행복을 찾아’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요즘도 둥그렇게 보름달이 뜨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요.”
나이 들어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이사장이자 가요계의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그녀에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을 물어봤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와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요. 어떻게든 귀를 열어 듣고, 얘기할 때는 나잇값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사실 나잇값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서로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요즘은 일단 듣고, 의견을 물으면 맨 마지막에 해요. 너무 나서지 않고요. 특히 ‘내 나이가 얼만데’,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말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양가에서 결사반대했는데 결혼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그렇게 결혼했어도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가 지키는 삶의 법칙은 절대 남에게 험한 얘기를 안 하는 것이란다. 화가 나도,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은 평생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얻은 좋은 기운이 그녀의 삶을 굳게 지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가수로, 엄마로, 아내로, 나로서 잘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면 잘 산 거겠죠? 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하고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쉽게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 같은 그녀의 노래가 깊은 내면 속으로 울려 퍼졌다.
음식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방랑 셰프 임지호님의 자연주의 요리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고 듣고 하던 터였다. 영화 시사회 초대를 받고 무조건 가기로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뒤숭숭해도 잠깐 숨통 트여보자 싶었다. 지뢰를 피하듯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조심조심 동대문 메가박스까지 다녀온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밥정이든 요리 이야기든 할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영화 속 음식들을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이제야 그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꺼내본다.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다. 밥정이라는 말도 정겨웠고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에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요즘은 집에서 밥 한 끼 준비하기가 귀찮을 지경이 됐지만' 한때는 요리의 즐거움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으니까.
밥정은 방랑 식객으로 잘 알려진 임지호 셰프의 이야기다.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요리 철학을 담기 위해 박혜령 감독이 10년에 걸쳐 만들어낸 82분짜리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된 수작이기도 하다.
방랑 셰프 임지호 선생의 자연주의 요리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떠돌다가 지리산 마을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 세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밥정으로 표현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임지호님은 말한다. 들판에 풀 한 포기나 바닷가에 떠다니는 해초만 보아도 맛있는 밥상 차릴 생각에 손길 닿는 대로 채취해서 담는다. 자연의 재료로 두툼하고 거친 손이 만들어 낸다. 흙냄새 바다 냄새나는 음식에 담긴 정이 감동의 맛으로 전해진다. 그 여정 속에 변화하는 사계절의 풍광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시골길을 따라 걷거나 깊은 산골 마을이나 바닷가를 따라 방랑하는 셰프. 비바람 속에서, 눈보라 치는 들판에서 식재료를 얻는다. 그 길에서 만나는 나물, 이끼, 잡초, 바다풀로 마을 어른에게 밥상을 차려 드린다. 솔방울과 나뭇가지가 멋진 소품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임지호 셰프는 강조한다.
그는 어느 날 안동댐 주변을 지나가는데 이 길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엄마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생모가 김씨라는 것밖에 모르고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이 길을 갈 때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 그분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전해진다.
2009년 지리산으로 식재료를 구하러 떠났다가 산골 마을의 텃밭에서 나물을 뜯던 김순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가끔 찾아가 밥을 지어드리거나 과자와 사탕을 전해주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7~8년 지내오다가 어느 날 김순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세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된 마음을 표현하는 108가지의 자연친화적인 음식을 3일 동안 장만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할 수밖에 없다.
밥과 사랑과 그리움은 닮았다. 거기엔 누군가와 이어지는 따스함과 은근한 속정이 함께 한다. 결국엔 그것이 가슴 뭉클하게 하는데 혹시 이것을 밥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잔뜩 겉멋 부린 요란한 영화들 속에서 냇물에서 세수만 한 듯한 순하고 담백한 영화,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다만 허기짐을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있는 듯 평화롭다.
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 지치지 말고 서로 마음 모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봄볕 좋은 날 속정 깊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마음 놓고 밥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