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혼자 떠나 치유의 숲에서 활력을 충전하다
- 나를 위한 여정은 결박된 현실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운 나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웰에이징 힐링센터, 힐리언스 선마을에서는 명상, 운동, 요가, 건강식 등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의 쉼표를 찍고 싶은 싱글들이 건강하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사진 힐리언스 선마을 제공 힐리언스 선마을에서는 매월 첫째 주 2박 3일간 이시형 박사와 함께하는 하이라이프 캠프가 진행된다. 이 캠프는 질병 없이 장수하기 위한 생활습관개선법과 이시형 박사의 건강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월부터 12월까지 매월 1회 운영된다. 하이라이프 캠프는 올바른 4대 생활습관(식습관, 마음습관, 운동습관, 생활리듬습관)의 학습을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을 배우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건강검진결과 만성질환 위험인자가 있는 사람, 노화방지를 원하는 사람이 참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2박 3일간 배우게 될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시형 박사의 강의로는 ‘자연의학과 생활습관’, ‘세로토닌과 뇌 피로’ 등이 있다. 이 강의를 통해 ‘왜 지금 선마을인가’와 뇌 피로 회복, 건강과 뇌의 관계, 질병예방을 위한 생활습관개선의 방법,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또 세로토닌의 세기, 행복씨앗 세로토닌을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방법을 배우고 감정조절과 스트레스 관리방법을 체험하게 된다. 생활리듬습관 개선 프로그램에서는 인디언식 키바(KIVA)를 통해 감성을 깨우는 방법을 배운다. 모닥불 감상과 별 감상 등을 하고 고구마도 굽고, 차도 마시면서 동심으로 돌아가 서로 터놓고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감성회복에 도움을 주는 체험인 와식명상은 누워서 전신을 이완시켜 깊은 휴식을 취하는 명상 방법이다. 와식명상은 스트레칭, 누워서 호흡에 집중, 마무리 체조로 구성된 이완명상으로, 이를 통해 피로회복 및 올바른 수면 습관을 체험할 수 있다. 식습관 개선 프로그램에서는 ‘맛있게, 푸짐하게, 건강하게’라는 임상영양사의 강의를 듣는다. 선마을이 만든 거꾸로 식사법 등을 통해 한국인의 식습관에 맞춘 식사습관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기본 원리에 맞춰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마음습관 개선 프로그램에서는 ‘산림 치유 명상’, ‘상쾌한 선마을 종자산둘레 트레킹과 자연명상’ 등의 시간을 갖게 된다. 걷는 즐거움과 함께 심폐지구력 및 근지구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감성회복에 도움이 된다. ‘스트레스와 명상’ 시간에는 스트레스를 주는 내외적 원인을 파악하고, 효과적인 스트레스 예방 및 해소를 위한 중요한 마음습관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참가비는 1인 72만 원. 숲속의 하루와 숲속의 힐링런치 서울권에서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강원도 홍천 힐리언스 선마을은 홍천군으로부터 나트륨 저감화 사업소로 선정되어 건강식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홍천 유명지역을 둘러본 후 선마을 당일여행을 떠난다면 숲여행으로도 손색이 없다. 힐리언스 선마을 ‘숲속의 하루’ 프로그램은 오전 10시에 입촌하여 오후 4시에 퇴촌하는 당일 코스 일정으로 되어 있으며, 시설을 둘러본 후 명상, 요가, 운동, 트레킹 수업 중 하나를 골라 체험할 수 있다. 이후 항산화 콘셉트의 웰에이징 푸드 선마을 점심식사를 한다. 제철재료로 건강한 조리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맛과 건강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영양만점 밥상이다. 이어 황토찜질방, 팔선욕장, 탄산천 등 자연세유 스파를 체험할 수 있다. ‘숲속의 힐링런치’ 프로그램은 힐링 체험과 점심식사 후 미강가루와 각종 견과류, 말린 과일, 올리고당과 두유 등을 넣어 반죽한 현미쿠키만들기 클래스 체험이 가능하다. 숲속의 하루는 1인 5만9000원, 숲속의 힐링런치는 1인 3만5000원에 참여할 수 있으며, 매주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진행된다. 자연스럽게, 느리게 하는 NST 다이어트 N.S.T(Natural Slow trimming) 식단을 적용한 체인징바디 프로그램에서는 생활습관의학 개선에 근거하여 매주 일~월요일 1박 2일간 캠프를 개최한다. 식단은 아침으로 비타민, 미네랄, 살아 있는 효소가 풍부한 주스를 제공하며, 점심에는 메밀요리 또는 현미식단을 제공한다. 하루의 시작은 스트레칭과 하체 근육 운동, 30분 걷기나 100계단 오르기를 진행한다. 또 입촌 시 체성분 측정 및 허리둘레를 측정하고, 파워 & 슬리밍요가, 비타민D 트레킹, 자연세유스파와 명상수업까지 함께 한다. 여름(7, 8월)과 겨울(12월)에는 특집 4박 5일 과정을 진행한다. 1인 1실 18만 원이다. 힐리언스 선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한국 10대 테마코스 치유여행지로 ‘국내 민영 1호 치유의 숲’으로 선정됐다. 강원도 홍천 종자산 250m 고지에 위치한 힐리언스 선마을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건강 체험 프로그램, 면역력강화식단, 전문 강사진을 확보한 웰에이징 힐링센터이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차단된 완벽한 디지털 디톡스존으로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뇌 피로 회복과 최적의 휴식여행 장소로 꼽히고 있다. 숲 명상을 염두에 둔 10개의 트레킹코스와 친환경 시설로 완비되어, 웰에이징 라이프를 위한 힐리언스 웨이 캠페인과 사회건강공헌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문의: 1588-9983 홈페이지: www.healience.com
- 2015-07-27 07:54
-
- [JOY 이색모임] "스텝을 착착, 애정이 철철" 부부가 함께하는 동호회 '참댄스 패밀리'
-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중년부부가 얼마나 될까? 여가 시간이 생기면 함께하지 못해 안달이 난 부부는 또 얼마나 될까? 스킨십이 줄어들고, 각자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요즘 부부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모습이다. 하지만 손을 잡고 함께하는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참댄스 패밀리 부부 동호회 회원들이다. 동반자(同伴者)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고, 반려자(伴侶者)가 있어 행복한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댄스 패밀리의 리더 정기철(정기철 크루즈댄스컴퍼니 대표), 남미경(강남대 겸임교수, 대한 댄스스포츠 경기연맹 강남 연수 원장) 부부에게 동호회의 요모조모에 대해 물어봤다. 부부만을 위한 동호회를 만들게 된 이유 첫 공식 행사는 1999년에 회원들과 함께 새해를 맞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벽 2시까지 춤을 췄던 밀레니엄 파티예요. 하지만 그전부터 조금씩 진행해왔죠. 댄스스포츠와 무용을 전공으로 했던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 댄스스포츠를 알릴 수 있는 부부모임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댄스스포츠가 많이 보급돼 있지도 않았고, 남녀가 춤을 춘다고 하면 대부분 음성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곤 했죠.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끼리 손을 잡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회원은 부부로만 받자고 원칙을 세우게 됐어요. 그땐 이름이 ‘스튜디오 정 댄스’였는데, ‘다른 이름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회원들과 상의한 끝에 ‘참댄스 패밀리’라는 이름을 만들었죠. 참댄스 패밀리 동호회 분위기 동호회 이름에 있는 ‘패밀리’라는 단어처럼 정말 가족처럼 지내요. 40~50대 때 동호회 초창기부터 함께 시작하셔서 60세가 넘도록 오랜 시간 함께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여러 사람이 모이면 말도 많아지고, 시기도 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우리 회원들은 못해도 잘한다고 격려해주고, 서툴러도 예쁘다고 칭찬해주죠. 참댄스 패밀리 회원들의 성향 현재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회원들은 130~140명 정도 되고, 거의 대부분 50대 이상이에요. 평균적으로 7~8년 활동하신 분들이고, 병원장 등 의사나 기업 오너분들이 대다수인데, 의외로 의사분들이 춤을 배우거나 색소폰 연주 등을 하면서 취미생활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또, 부부가 함께 춤을 배우려면 시간 할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오너분들에게는 부담 없는 취미가 될 수 있죠. 무엇보다 함께 춤을 추려면 부부 사이가 좋아야 하거든요. 그렇게 부부 관계가 좋은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니 좋은 바이러스가 퍼져서 늘 화기애애하답니다.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먼저 부부가 함께 오셔야 해요. 이러한 원칙 때문에 ‘참댄스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혼인신고서를 내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기기도 했죠. 1차적으로는 저희(정기철, 남미경 부부)가 수업을 하고 있는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압구정본점이나 킨텍스점에 있는 부부 댄스스포츠 크루즈·파티댄스 커리큘럼을 이수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점차 연습도 하고, 레슨도 받으시면서 동작을 익히시면 돼요. 문화센터 등에 지출하시는 교육비는 별도고, 동호회에 가입하실 때는 부부당 평생 가입비 5만 원만 내시면 돼요. 소속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형식적인 차원이죠. 그리고 연회비 역시 부부당 10만 원이에요. 그 외 연중 호텔파티나 크루즈여행, 골프여행 등은 회비에서 일부를 쓰고 나머지는 개인부담으로 즐기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어요. 동호회를 즐기려면? 먼저 춤을 익히는 게 중요하겠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느낄 수 있어야 즐겁거든요. 탱고, 왈츠, 룸바, 차차차 등 댄스스포츠 종목만 10가지가 되는데 그것을 다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파티에서 분위기를 타려면 한 3~4년 정도는 배우셔야 자신감이 붙어요. 춤도 체력이 돼야 하기 때문에 평소 건강을 유지하시는 것이 중요해요.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호흡을 맞춰 춤을 춰야 하니까 금실이 좋아야 뭐든 즐겁겠죠? 참댄스 패밀리 동호회의 자부심 해외 결혼식, 크루즈 여행 등을 가봤거나 대사관, 외교관을 지내셨던 분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서양의 파티문화예요. 서양인들은 즐거운 날이나 모임이 있을 때면 파티를 열고 항상 춤을 추거든요. 그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어색해하고 쭈뼛거리게 되죠. 영어를 못해서 언어로 어필하지는 못하더라도 춤을 추며 몸의 대화를 통해 매력을 발산할 수 있거든요. 우리 동호회는 1년에 한 번씩 크루즈 여행을 가는데 멋지게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밤새도록 춤을 추며 분위기를 즐겨요. 그러면 우리를 구경하는 서양인들도 굉장히 근사하다며 박수를 치고, 서빙하는 직원들도 마치 귀족을 모시듯 대접하곤 하죠. 요즘은 동호회 하면 아웃도어 입고 산으로 가고, 해외여행을 가도 평범하게 즐기다 오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회원들은 우아하게 치장도 하고 품위 있게 춤도 추고 하니 그런 점에서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동호회 회원들이 가장 만족하는 것 호텔 파티를 할 때 시범 댄스를 선보이는 부부가 있는데 주로 결혼 25주년, 30주년 등 결혼기념일이나 환갑, 칠순 생일 등을 기념하는 분들이죠. 그땐 자녀들이나 다른 가족도 함께 초대돼 부부의 춤을 볼 수 있거든요. 그동안 부부가 함께 열심히 연습한 춤을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추는 그때의 벅찬 감동은 잊을 수 없다고들 하세요.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중년이 되면, 특히 주부들은 큰 목표 없이 살아가게 되는데 동작 하나, 종목 하나를 배우자와 함께 한다는 목표를 멋지게 이뤄냈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하겠어요. 그날만큼은 두 사람이 파티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죠. 회원들은 그렇게 무언가를 배우고, 부부가 함께 꿈을 꾸며, 함께 그 꿈을 이루는 등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장 만족스러워 해요. 또 춤 자체가 운동이잖아요. 드레스를 입고 근사한 포즈를 하려면 몸매관리를 안 할 수 없거든요. 그렇게 부부의 정신적 건강과 외적 건강을 모두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참댄스 패밀리의 미래 요즘 100세 시대라고들 하잖아요. 90세에도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차차차를 추는 부부, 백발머리를 하고도 입에는 새빨간 장미를 물고 탱고를 추는 부부를 상상해보곤 해요. 회원들끼리도 “우리 80세가 되면 다 함께 공연할 거예요”라며 즐거워들 하세요. 무엇보다 처음부터 고집스럽게 지켜온 ‘부부’라는 콘셉트 덕분에 건전하고 안정적으로 모임을 유지해 올 수 있었어요. 먼저 배우자를 떠나보내시고 함께 춤을 출 수 없어 외로워하시는 분을 볼 때면 정말 눈물이 나도록 슬프죠. 그렇지만 부부가 함께하는 동호회인 만큼 회원 간에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요.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늘 건강하게 동호회가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참댄스 동호회 박중진(69), 김경희(69) 부부 회원 인터뷰 婦)아내 김경희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지는 20년 정도 됐어요. 그런데 정말 엊그제 시작한 것처럼 아직도 즐겁고 신나요. 동작 하나를 완벽히 익히는 데 몇 년씩 걸리거든요. 남편과 천천히 하나씩 터득해가면서 하다 보니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죠. 살아가면서 나에게 활력을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생긴 셈이에요. 우리는 춤을 출 때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는데, 아무래도 더 근사하고 멋지게 보이려면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런 부분도 서로 챙겨주고 가꿔주게 되니까 더 아름답고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夫) 남편 박중진 중년이 되고 우리 부부가 나이가 들어서도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보통 중년부부들을 보면 함께 하는 것보다는 취미나 여가를 각자 즐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춤을 통해서 공통 관심사가 생기고 함께 즐길 것들이 많아졌죠. 부부 사이가 좋다고 해서 매일 대화만 하고 살 수는 없는데, 같이 몸을 움직이니 운동도 되고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하니까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부부댄스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맞추고 상대를 배려해야만 원하는 동작들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지더라고요. 또, 직장에서 찾은 전문성 외에 무언가 내가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생긴 게 좋죠.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시작했으면 해요. 그래야 몸이 더 유연할 때 빨리 습득할 수 있고, 진짜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으니까요.
- 2015-07-20 09:37
-
- [광복 70년] 베스트셀러 70년 '민족과 역사를 거쳐 글로벌한 개인시대로'
- 광복 이후 출판시장은 1950년의 6·25,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1972년의 10월 유신,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1997년의 IMF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많이 읽히는 책의 유형이 달라진다. 광복 이전이 암흑기였다면 광복 이후 6·25가 터지지 직전까지는 민족문화 재건기로 볼 수 있다. 이후 1950년대는 전후 허무주의,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 1970년대는 산업화, 1980년대는 역사성, 1990년대는 대중출판, 2000년대는 글로벌 출판, 2010년대는 디지로그 출판 시대로 정리할 수 있다. 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사진 ◇ 광복~1949년 민족문화 재건 “아버지가 들고 온 『조선역사』란 책에 빨려들어 밤새도록 읽고 모자라 수업시간에까지 읽다가 들켰다. 그 바람에 전교생 앞에서 10여분이나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대군을 무찌르는 대목을 소리 높여 읽는 수모를 겪었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그 책이 동이 나도록 모두 구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보고 겪은 6·25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역사 앞에서』(창비)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추천사에 나오는 글이다. 신 시인은 한 칼럼에서 『조선역사』가 “한글을 깨치고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이 광복 이후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해방 공간 시기에는 우리 역사와 글, 문학을 펴내고자 하는 욕구와 읽고자 하는 욕구가 넘쳤다. 이런 욕구 때문에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1947), 『조선어표준말모음』(조선어학회, 1946) 등의 사전과 학술교과서가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해방 전후』(이태준), 『내가 넘은 삼팔선』(후지와라 데이, 1949),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크리미센코, 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1948), 『목넘이 마을의 개』(황순원), 『렌의 애가』(모윤숙), 『청록집』(조지훈 외) 등이 있다. ◇ 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 195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의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을 때에 대학교수 부인의 파탄적 행동을 그린 소설이 1년 만에 10만 부가 팔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 소설이 “문화의 파괴자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군”(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이라는 공격이 나왔고, 작가는 열띤 논쟁을 벌여야 했다. 『우리말 큰사전』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가운에 젊은 세대에게 유머감각을 크게 심어준 『얄개전』(조흔파)이 등장했다.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에는 『슬픔은 강물처럼』(최희숙), 『마음의 샘터』(최요안), 『청춘극장』(김래성),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조병화) 등이 있다. ◇ 1960년대 이데올로기 196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최인훈의 『광장』이다. 소설 속 철학도 이명준은 북에 올라가 북한의 정치체제에 가담해보지만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다 제3국행을 택한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4·19의 성과를 5·16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을 지닌 지식인에게 깊은 허무감을 안겼다. 이 시기의 베스트셀러에는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박계형),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윤복), 『석녀』(정연희), 『조선총독부』(유주현), 『거대한 뿌리』(김수영), 『금강』(신동엽) , 『빙점』(미우라 아야코) 등이 있다. ◇ 1970년대 산업화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한 1970년대는 『별들의 고향』(최인호),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겨울 여자』(조해일) 등의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들이 한 흐름을 이뤘다. 산업사회로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여성의 상품화 현상을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존재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늘은 또 있었다. 부랑노동자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객지』와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이 시대의 주목할 베스트셀러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 『데미안』(헤르만 헤세) 등이 있다. ◇ 1980년대 역사성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자 불의 시대였다. 대학과 신문사에서 쫓겨난 지식인들이 출판계에 유입되어 변혁이론의 창출과 보급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성과로 강만길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이자 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등은 모두 대중에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든 ‘역사교과서’였다. 1980년대 내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이념시나 민중시가 거대한 트렌드였지만 정작 불로 뜨거워진 대중의 몸을 식혀준 것은 쉽게 읽히는 서정시였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이밖에 이 시기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바스콘셀로스), 『숲속의 방』(강석경), 『인간시장』(김홍신) 등이 있다. ◇ 1990년대 대중출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 시작된 1990년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은 ‘개인’이었다. 1990년대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세계는 넓고 (내가) 할 일은 많다』(김우중)에서부터 1990년대 말의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까지 책 제목에 ‘나’는 넘쳤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 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등 개인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의 출판시장을 휩쓴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의 역사인물소설 트로이카들도 사실상 자기계발서 역할을 했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던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일본은 없다』(전여옥),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등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물 위를 걷는 여자(신달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양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 사랑(결혼)과 일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석용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등이 있다. ◇ 2000년대 글로벌 출판의 시대 2000년대는 절대 고독의 개인이 발견되는 여정이었다. 고학력 사회가 되었지만 고학력자일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바람에 성공욕구만 넘쳐났다. 덕분에 베스트셀러의 산실은 자기계발서였다.『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 줘잉),『화』(틱낫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배려』(한상복),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플래차드 외),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시크릿』(론다 번) 『이기는 습관』(전옥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대중은‘성공’을 버리고 ‘행복’으로 말을 바꿔 탔다.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로는‘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같은 블록버스터 소설, MBC 방영도서,‘Why’를 비롯한 스토리만화 등이 있다. 이 밖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국화꽃 향기』(김하인), 『가시고기』(조창인) 등과 같은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룬 소설들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도 있다. ◇ 2010년대 디지로그 출판의 시대 1998년의 국지적인 IMF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광풍 앞에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적인 사람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셀프힐링’의 책들만이 인기를 끌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등 멘토가 던져주는 ‘위로와 공감’의 어록집,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등 사회적 어젠다를 담은 책, 대안의 삶, 성찰, 관계나 소통 등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해를 품은 달』(정은궐), 『미생』(윤태호) 등의 미디어셀러와 『서울 시』(하상욱)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다. 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것은 위로와 공감의 어록, 관계와 소통을 다룬 책들이다. 이제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학 학사, 2000년 제41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기획부문 출판상, 학교도서관 저널 대표이사.
- 2015-04-03 09:22
-
- [우리 세대 이야기] 돌아오라 7080
-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
- 2015-04-03 09:14
-
- [특집_1955년生 블루스① ]두 번째 청춘이 시작된다
- 어째서 1955년생인가? 지금 1955년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이기 때문이다. 1955년은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해였다. 이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에 학교에 입학면서 사회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이후 군사정권의 폭압이 극심해지던 1970년대에 20대를, 산업 현장의 역군이 되어 곳곳을 누비던 1980년대에 30대를, IMF체제의 가혹함을 가장으로서 부딪쳐야 했던 1990년대에 40대 시절을 보낸 1955년생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시기를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무게중심이 된 1955년생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궤적.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 가까이 되는 거대 인구집단이기도 한 1955년생은 720만 명 베이비부머 중에 65만 명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학계와 문화예술계에 거대한 집단으로 포진한 것은 물론,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도 그 목록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 부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소설가 양귀자, 가수 하춘화, 탤런트 홍요섭,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담철곤 오리온 회장,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최경환 경제부총리,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 등등. 그들이 태어난 1955년은 아직 한국사회가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였다. 물론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사실에서 오는 희망이 있었기에 베이비부머들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65달러였던 생활은 가혹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가족을 세우려는’ 부모 세대의 본능에 의해 태어나던 시절이었다. #따뜻했던 도시락의 추억 1960년대 초는 혁명이다 쿠데타다 하며 불안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1955년생들이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건 보다 머리가 굵어져야 가능할 일이었다. 1955년생들에게 1960년대는 학교를 처음 가서 생활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들이 접하게 된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의 내밀한 세계는 사회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당시 1955년 생들의 기억 속에서 학교는 도시락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한다. 봄 ·여름· 가을에는 뽀얀 도시락보를 풀고 노란색 도시락 뚜껑을 열어 밥과 반찬을 먹으면 되는 일이지만 겨울에 기온이 내려가면 조개탄 난로 위에 도시락을 겹겹으로 9층탑을 쌓았다. 수업 중에도 면장갑을 3겹으로 끼고 도시락을 바꾸어 주었던 친구들도 있었다. 도시락을 열면 노란 도시락통 바닥에 누룽지가 보인다. 여기에 김치 국물을 부어서 숟가락으로 ‘닥닥’ 소리 내며 긁어 먹었다. 반찬은 무장아찌와 무말랭이가 대부분이었다. 좀 산다는 친구들은 계란 프라이를 넓게 펴서 도시락 위에 올렸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 잘라가며 먹는 모습이 그 얼마나 부러웠던지. 소박한 도시락은 1955년생들의 기억을 꽉 채우는 행복이고 추억이었다. #어렵고 가혹했던 시절을 맞이하다 그러나 현실이 추억만큼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후 급격하게 늘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하자 턱없이 부족한 학교와 교육 인프라는 이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 학급 학생을 80명에 달할 정도로 과대 편성했기에 한 학급이 오전에 수업을 받고 하교하면 다른 학급은 오후에 학교 수업을 시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또한 형제가 많았던 까닭에 집에는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다. 돈벌이를 위해 부모들은 집밖을 나서야 했고 가정에서는 ‘따뜻한 관심’보다는 ‘당장의 효과가 큰 매질’, 혹은 ‘무관심’이 흔히 있었다. 교육적 환경으로 보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험을 보고 들어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보다 단단해진 군사정권의 세뇌적 교육 정책으로 인해 일본 군복 같은 교복을 입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교련복을 입고 군사 교육을 받아야 했다. 매스 게임, 인원 동원 등등 살벌한 행사들이 일상에서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 들여졌다. 또한 데모에 참여한 고등학생들은 수배령이 떨어져 전국을 숨어 다녀야 했다. 이렇듯 현재 한국 사회의 주역들을 낳고 무게중심이 된 1955년생들에게는 역사의 가혹한 면모들이 담겨 있다. #치열하게 싸웠기에 보람 있었던 청춘 그러나 불행과 부족함은 반대급부로 기쁨과 보람, 행복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1955년생들은 이 나라가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던 세대이며 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혜택 또한 누렸던 이들이기도 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말기로 치닫던 시대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이들도 당시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던 1955년생들이었다. 또한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경제성장이라는 절대 화두 속에서 이들은 청춘을 불살라야 했다. 학교와 직장 곳곳에서 수많은 좌절들이 있었던 만큼 수많은 성공과 빛나던 순간들 또한 존재했다. 1970년대에는 학생과 직장인으로 반분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본격적인 직장인이자 생활인으로 통일되기 시작한 1980년대는 사회 전면에 등장한 1955년생들의 가치를 증명하듯 한국 경제가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1955년생들은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 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배고프지 않았다. 그들의 뜨거운 노력은 올림픽 개최라는 상징적 장면과 군사정권의 퇴장이라는 사회적 변화로 나타났다. 그래서 1990년대는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답처럼 다가오는 듯했다. #삶을 흔든 IMF체제의 잔인한 칼날 그러나 붕괴는 마치 자연재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IMF체제가 닥쳐 온 것이다. IMF체제가 시작된 1990년대 중·후반 당시 1955년생들의 나이는 40대 초반 즈음. 사회적으로는 중견이고 일에서는 조직의 무게중심이 될 나이대다. 그러나 IMF체제는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으로 이들을 직장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실직자가 된 가장의 권위는 순식간에 추락했고 고전적인 의미의 가족은 해체됐다. 특히 가족의 가치를 믿으며 자라 사회적 성공의 한가운데에 섰던 1955년생들에게 냉정한 경제논리에 의한 가족의 해체는 더없이 충격적인 일이었으리라. 사방에서 단두대의 칼날이 번뜩거리는 것처럼 변한 세상에서 이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든 능력이 좋아서든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이들은 마침내 어렸을 적 만화나 소설에서 본 공상과학의 상상력 속에서 나오던 ‘21세기’를 맞이하게 됐다. # 1955년생, 제2청춘 시대가 온다 한 사회학자는 1955년생들이 부모 봉양을 당연시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들에게 부모대접을 못 받는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55년생들이 ‘낀 세대’임을 증명하는 간결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가장 뜨거운 순간들의 주역이었던 1955년생들은 이제 본격적인 은퇴기를 맞이하고 있다. 수많은 현대사의 곡절만큼이나 쉽지 않게 살아온 세대였다. 그러나 지표로 증명되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은 바로 1955년생들의 활약에 힘입은 결과다. 그리고 이 결과는 그들이 고통에 맞서 희망을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들이 처음 세상을 직시해야 했던 1960년대, 1970년대의 가혹함 때문일까?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은 그들이 IMF체제라는 잔인한 시험을 치르고도 살아남아 지금 은퇴 이후의 삶을 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힘은 1955년생의 미래가 어둡다고 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이미 웬만한 어둠은 충분히 치르고 올라온 이들이다. 또한 성장하는 한국 사회와 궤를 함께 한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으며 배움에 대한 본능적인 체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1955년생들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 2015-01-02 16:04
-
- [유럽여행기] 여행은 살아있는 ‘멘토’ 유럽은 청산별곡이다
- 너희가 청춘을 아느냐? 요즘 한국에서는 유명 연예인들이 배낭여행에 도전하는 TV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이 인기를 모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또한 지난 2월 중학교 동창생 7명이 나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뜻하지 않게 첫 ‘도쿄번개’(이태문 객원기자는 현재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의 행복을 맛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 9월에는 고등학교 동창생 4명이 어려운 시간을 만들어 도쿄를 찾아와 2박3일간 구석구석을 함께 누비며 추억 만들기에 성공했다. 평소 차를 타고 다니던 친구들은 내가 짜 놓은 코스를 열심히 걷느라 지치고 힘들어하면서도 다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그냥 떠나면 됐는데 왜 그리 망설이고 힘들었는지”라며 한결같이 여행이 주는 색다른 재미에 새롭게 눈을 뜬 것 같았다. 곧잘 인생은 연극, 혹은 여행에 비유되는데 리허설 없는 본 공연인 인생은 일상의 연속이면서도 종착점을 향해 떠나는 기나긴 여행인 셈이다. 여기가 서울인지 도쿄인지 내 자신이 분간하지 못한 채 함께 웃고 울고 떠들다가 공항까지 배웅한 뒤 돌아설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 학이편(學而篇)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친구들의 방문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새삼 되새겼는데, 특히 청춘(靑春)이 무엇인지, 여행(旅行)은 무엇이고, 삶(人生)은 뭘까 다시금 생각해 봤다. 되돌아보는 느림의 미학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어느새 ‘기성세대’로 불리게 된 요즘, 그때 ‘청춘’의 한 복판에서 비판했던 부모님과 지금의 나 뭐가 다를까 곰곰이 따져 보니 아직 철없는 ‘철부지’ 아저씨가 거울 앞에 서 있다. 대학 수업에서 곧잘 ‘호기심을 잃은 사람은 청춘을 포기하는 것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 앞서 주위에 끊임없는 관심으로 ‘알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라”고 전하는데, 맥없는 젊은이 이른바 ‘애 늙은이’가 늘어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익히는’ 정신이 바로 늘 푸른 봄 ‘청춘’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50대라고 하는데,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과 낙엽 진 앙상한 가지를 떠올리지 말고 풍성한 결실과 값진 수확만을 생각하자. 무한긍정의 힘이야말로 청춘의 밑거름일텐데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첫 50대이기에 설레고, 다시 오지 못할 ‘청춘’이니 더욱 알차게 보내고 아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용필 형님의 노래처럼 ‘푸른 언덕에 배낭을 메고/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속을 벗어나’ 보자. 그 길에서 알몸의 자신과 만날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우물 안 개구리’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것이다. 단 뛰지 말고 걷자. 쉴새없이 듣고 만지고 맛보는 거다. 직립보행의 인간이 주마간산(走馬看山)의 시대를 거쳐 자동차, 고속철도, 비행기의 속도전 속에 일상을 소비하고 있는데, 그런 현대인들이 여행이랍시고 무서운 스피드로 관광지를 돌며 수천 장의 추억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 컴퓨터로 복사한다. 이전 아놀로그 시절에는 한 장씩 앨범에 넣으며 그때 그곳의 향기까지 되새김질했지만, 대량 생산 및 대량 복사의 디지털 시대에는 하드디스크가 인간의 수고로운 ‘감수성’까지 저장해 버렸다. 걸으면 자세히 보인다. 아니 꼼꼼하게 보게 되고,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뛰면 풍경도 뛰고, 달리면 세상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다. 다 털고 인간의 오감까지 모두 열어 놓은 채 떠나는 여행의 묘미, 물결마다 향기가 다르고 바람결마다 색깔이 있다는 걸 느껴보자. 내 속에 잠들어 있던 ‘감수성’이 기지개를 켜고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여행은 결국 내 ‘감수성’과 세상의 만남인 셈이다. 실버에게도 필요한 눈높이 지난 10월 23일은 결혼기념일로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프랑스를 시작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도는 여행에 나섰다. 출발 전날까지 허둥지둥 쫓겼던 성적 처리를 유럽미술사 책을 다 섭렵하지 못한 좋은 핑계거리로 삼고서 떠난 첫 유럽여행은 한 마디로 ‘청산별곡’이었다. 유토피아는 이상으로 그리는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라고 하는데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도 갖고 있다. 유럽 도시를 돌며 그곳의 자연과 유적들을 직접 보면서 놀란 것은 고대와 중세의 흔적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속에 숨쉬는 고대와 중세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理想)사회가 아니라 공존하는 청산(靑山), 그렇기에 다가갈 수 있고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은 200년이 훨씬 넘은 아파트라고 밝힌 로마 가이드의 말처럼 실제로 이상 사회를 구현시키고자 1000 여년 전에 세운 건물 속에 현대인이 살고 있으며, 가장 이상적인 황금비율의 조각상들이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가 아니라 지금도 건재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을 비롯해 루브르박물관, 로댕갤러리, 퐁피두센터 등에서 크고 작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눈높이’의 즐거움도 함께 느꼈다. 미리 유명 작품을 체크해 잰걸음으로 달려 기념사진을 담은 뒤 다음 작품을 찾아 서둘러 자리를 뜨는 분주한 동양인들 틈에서 손주의 손을 잡고서 차근차근 그림을 함께 맛보는 여유가 참으로 부러웠다. 정작 ‘눈높이’ 교육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닐까 뼈저리게 느꼈다. 까놓고 말해 난 세계사에 자신이 없는데다가 중세미술은 문외한(門外漢)이다. 가이드의 설명이 어쩌면 그렇게 쏘옥쏙 귀에 들어오던지 저게 바로 명강의구나 싶어 고개가 숙여졌다. 그 눈높이 덕분에 그림들이 내게 말을 걸었고, 조각들이 움직여서 내게로 다가왔다. 또 한 가지, 파리, 인터라켄, 루체른,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 등을 돌며 내 눈에 들어온 거리이다. 여행의 ‘여(旅)’자는 한자옥편에서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는 군사’라고 뜻풀이하고 있다. 그런 탓일까? 유독 동양인 관광객들은 깃발 아래 뭉치고 좋아하고, 줄줄이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정해진 코스를 예정된 시간대로 성실하게 돈다. 그런 이방인(異邦人)인 나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노천 카페에서 몇 시간째 커피와 맥주를 즐기며 소일(消日)하는 유럽의 거리에서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들의 ‘일상’이 나에게는 ‘비일상’이며, 그들과 같은 여유는 아예 처음부터 부재했던 사치였는지 모른다. 일상의 쉼으로 떠난 여행이지만 결국 우리는 ‘비일상의 탈출’속에서 다시 일상을 짜맞추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물으면서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짐 없는 ‘가벼움’의 여행을 꿈꿔 본다. 힐링은 몰라도 ‘나그네’ 소풍 전날 밤잠을 설친 사람은 마약 같은 ‘설렘’을 알지 싶다. 운동회 가장행렬에서 맛본 ‘낯선 쾌감’도 중독성이 강하다. 여행 역시 떠나기까지가 귀찮아서 그렇지 한번 맛보면 인이 박이는 법. 속된 말로 ‘힐링’이다 ‘웰빙’이네 떠들지만, 또 언제부턴가 맨토라는 말도 불쑥 튀어나와 다들 쓰고 있다. 영어로 써야 더 고상한 느낌이 드는가 싶은데, 아무튼 여행은 ‘힐링’이자 살아있는 ‘멘토’이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 택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 기불선자이개지 다시 논어 ‘술이편’의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선한 사람을 가려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는 살펴 자신을 고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여행에서 마주치는 낯선 세계, 그 속에 던져진 꾸밈없는 자신과의 만남, 그리고 화보집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곳 사람들이 뿜어내는 삶의 향기 등 이 모든 게 나에게 스승이고 가르침인 것이다.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고 했는데, 여행에서는 ‘아는 것만큼만 본다’는 게 문제이다. 사전 지식이 결국 마지막 지식으로 고스란히 보존되고 자신만이 느끼고 얻어낸 새로움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시간과 돈의 낭비이겠는가? 오히려 선입견은 버리고 편견없이 旅행을 떠나자, 홀가분하게 비운 상태에서 호기심의 촉수가 움직이는 대로 여行의 ‘새로움’을 채워넣자. 첫 50대의 이 긴장감처럼 ‘낯선 체험’이 기다리는 여행이야말로 각 세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맞춤복일 수 있다. 50대만이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참 묘미, 훌쩍 속옷 몇 가지 든 가방만 들고 집을 나서자. 내 발길 닿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나는 한낱 불청객(不請客)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들은 내게 값진 삶의 거울이자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다. 일탈을 두려워 말고 망설임을 돌파하자. 여행은 힘껏 발을 굴러 높이 올라가는 그네 뛰기, 더 높이 더욱 널리 세상을 구경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 그네’이기에 걱정하지 말라.
- 2014-11-24 08:36
-
- Fashion is Passion 런웨이에 선 시니어
-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14-11-21 17:31
-
- [FOCUS] 인생2막, 시니어 모델계의 기린아로 우뚝 서다 '시니어 모델 곽용근'
- “이 더위에 슈트차림하고 나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 아마 눈에 확 띌 겁니다.” 30도를 웃도는 폭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정갈한 슈트차림에 중절모와 나비넥타이로 한껏 멋을 낸 중년신사가 유유히 걸어온다.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와 꼿꼿한 자세, 힘 있는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모델포스가 넘친다. 그의 말대로, 아니 그의 말보다 더 확실히 눈에 확 들어온다. 지난 한해 시니어 모델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라 9편의 광고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뽐낸 곽용근(76)씨다. 남다른 표현력과 연기력으로 광고뿐만 아니라 가수 이효리와 김완선의 뮤직비디오, 각종 영화와 연극 등에 출연하며 그 누구보다 활기찬 인생2막을 살고 있는 그다. 얼핏 보면 유머러스한 생김새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그도 수년간의 연습과 노력 끝에 지금의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고. 젊은 모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만의 끼와 열정으로 경쟁하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한양대 화공과를 나와서 어엿한 기업의 임원자리 까지 올랐었다. 이후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고 어디 중소기업이라도 들어가서 일하자 해서 일했는데, 거기도 환갑이 다 돼가니 나가라더라. 그래서 뭐라도 시작하려면 컴맹은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서 노인복지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모델 수업을 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준비해서 2004년에 처음 보험 회사 지면광고를 찍게 됐다. 정말 내가 이렇게 살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다.” 현재의 모습이 이르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 “모델일 자체나 하는 과정에서 힘든 것 보다 이 일을 결정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환갑이 지나서 ‘내가 무얼 할까’, ‘제2의 인생으로 태어나면서 어떻게 태어날까’하고 생각이 많았다. 긴 고민 끝에 ‘이 길로 가야겠다’고 목표를 정한 뒤에는 연극을 처음 시작했다. 당시 또 한 가지 힘들었던 점은 집에서도 반대했다는 거다. 말 안 하고 있다가 방송에 나오면 놀라곤 했다. 처음에는 창피하게 그런 일을 한다고 마누라가 나무라면 ‘그래도 이렇게 살아야 내 인생은 즐겁고 행복해.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지 당신 체면 차린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냐’라고 했지. 자식들도 사돈댁에서 알까봐 부끄러워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많이 나아졌다.” ‘시니어 모델’이라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 “나는 내 몸이 자산이다. 내 몸이 망가지면 모델일도 연기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몸 가꾸는 일은 게을리할 수 없다. 보통 광고를 찍게 되면 여름 제품을 겨울에 찍는 경우가 많아 추운 날씨에도 얇은 반소매 차림에 촬영을 하고 나면 자칫 감기에 걸리고 드러눕기 십상이다. 나이 든 모델은 평소 체력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모델’로서 가장 노력하는 점 “당연히 ‘몸매 관리’다. 매일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등산, 스포츠댄스도 한다. 나이가 들면 등이 굽고 근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젊은 모델보다 배로 신경 쓰고 노력해야 지금의 몸매와 골격을 유지할 수 있다. 워킹연습도 꾸준히 해야 걸음걸이가 좋아진다. 저기 저 청년보다 내 몸매가 훨씬 낫지 않나?”(웃음) 연기 생활 신조 “두말할 것 없이 ‘감독에게 절대 복종’이다. 광고나 연극은 감독이 그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동선 하나하나를 전부 계산해서 나오기 때문에 내가 끼 부리고 잘난척하면 작품을 망치고 감독의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아무리 젊은 감독이고 나보다 어리더라도 그의 주문대로 하는 것이 좋다. 내 기분이나 상태는 배제해야 한다. 난 그의 주문을 더 정확하고 빠르게 수행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오디션 or 캐스팅 “요즘은 감독들이 나를 먼저 찾는다. 유머러스한 이미지가 섭외 1순위 요소다. 하지만 현재의 캐릭터로 인정받기까지 7년여간 연극 활동을 해오며 안면 표정을 연습해왔다. 물론 오디션에도 떨어져 봤다. 모델로 등단하기 위해 오디션은 필수다. 모델의 끼가 있나 없나, 해당 작품에 어울리는지 여부 등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다. 그 특성상 오디션에 떨어질 수도 있는 데 이에 연연하거나 낙담하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짧든 길든 무명시절이 있듯 그 무명시절 속에서도 자신을 가꾸고 준비해야만 좋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영광을 안을 수 있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말처럼.” 촬영 현장에서 느끼는 고충 “이 나이에 어디 가면 대접받겠지만 촬영장에 가면 보통 100여 명의 스태프가 모두 바삐 움직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다 하여 나를 특별히 생각하거나 따로 더 챙겨주는 이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어른대접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모두가 함께하는 작업이니까 참아야 한다. 굳이 꼽자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촬영장에서 아직은 매니저나 코디 등 보조 인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충이 있기는 하다.” 가장 희열을 느낄 때 “단편극 중의 단편극이 광고다. 사진 한 장 또는 30초짜리 영상만을 통해 상대방을 웃기고 감동을 준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흡입력 있고 단숨에 감동을 선사하는 데는 모델의 역할이 크다. 때문에 나 역시 다채롭고 깊이 있는 표정연습에 주력한다. 그렇게 내가 연기한 광고를 통해 많은 사람이 웃고 즐거워하고 감동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보람되고 뿌듯하다.” 도전하고 싶은 역할 “내가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놓친 역할이 있다. 요즘 ‘명량’으로 뜨고 있는 최민식이 연기한 충무공 이순신 역할이다.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어서 수염도 길러봤는데. 하하하. 전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해 대 역적 역할을 맡은 적 있다. 그런 것도 좋고 왜적장수 역할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안 해본 연기가 거의 없다. 연극을 통해 기본기와 안면표정, 제스처 등을 연마했기 때문에 어떤 배역을 하게 되도 자신 있다.” 언제까지 모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년 1월에 이태리에 갈 거다. 국내에서도 열린 적 있는 세계양복맞춤협회가 주최하는 런웨이가 이태리에서 열리는데 그 무대에 서기로 했다. 여러 나라 사람들도 올거고 젊은 애들도 많이 올 텐데 내가 거기서 좀 뻐기고 와야 하지 않겠나. 매일 워킹연습하고 체력도 키우고 있다. 꼭 그 무대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 몸이 따라주는 그 날 까지는 일을 계속 해 나갈 거다. 죽는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만큼 나는 내 일에 취해있고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시니어 모델’을 꿈꾸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열과 성을 다하면 성공하기 마련이지만, 모델일은 그 무엇보다 ‘끼’가 중요하다. 끼가 있어야 연기도 더 개성 있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의 끼를 발견하고 그 끼를 남들에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체력관리도 해야 하고 워킹연습, 대사연습, 표정 연습... 연습 또 연습해야 한다. 이 일의 장점은 ‘자유직업’이라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더 많은 역할에 도전해 볼 수 있고, 그만큼 더 행복해진다. ‘이 일로 얼마를 벌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어떠한 역할에 대한 도전정신과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력한다면 수입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돈이나 캐스팅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 이 일을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임해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곧 행복을 낳는 거위다.”
- 2014-08-27 18:39
-
- [브라보 라이프]은행지점장실에서 보일러실로 일터를 옮긴 이만호씨
- 중.장년의 희망은 오직 기술뿐 !. 자신과의 싸우며 기술 배우기를 3년…… 수백 통의 이력서로 취업 활동 후 드디어 취업에 성공! 저는 56년생으로 2010년 10월 은행 경영의 악화의 원인으로 고액 연봉자들의 대대적인 명예퇴직을 유도하여 전직원의 25%인 3800명이 퇴직할 때. 저 또한 나이가 정년에 가깝고 경영악화의 주범으로. 그리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고 퇴직을 하였습니다.. 2010년 11월부터 그동안 여행하고 싶었던 몇 몇 곳을 선정하여 나 홀로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전국으로 여행 다녔으나. 마음은 항상 퇴직 후 무엇 하며 노후를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아니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제2인생 준비할 것인가? “노력하는 자에겐 하늘이 돕는다” 퇴직을 결심하고 돈을 절약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 집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하기 위해, 그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하여, 동네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가서 고치면서 기다리는 중에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옆에 있어, 물었죠, ‘이 자전거 가게 사장님은 노후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다’고, 그랬더니 가게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하시는 말씀이’이 자전거 가게를 이 자리에서 40년을 했는데 큰돈은 벌지 못해도 자식을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으며, 작은 건물도 구입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같은 60대 나이에 은퇴도 없고 자식들에게도 손 내 밀지도 않고 친구들 모임에 회비를 낼 수 있고 가끔 막걸리도 사주는 친구들 중 가장 유일하며,가장 행복한 친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구나. ‘기술만이 남은 여생 30년을 보낼 수 있겠구나’를 생각하였으며, 나도 자전거 수리를 배워, 노후를 보낼까를 생각하면서 삼천리 자전거 홍보부에 근무하는 후배를 만나 자전거 수리점에 대하여 많은 의견과 자문을 받아 보는 등 여러가지로 고민하며 수일을 보냈습니다., 2010년11월 은퇴 후, 12월 중순에 은행으로부터 2년 계약직(지점감사업무)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통보 받아 1월 초에 근무지로 출근하던 중. 지하철역에 붙여있는 홍보 벽보에 서울시에서 기술교육을 무상으로 가르쳐 준다는 포스터를 보았으며. 아! 그렇구나 내가 여생은 큰 힘 들이지 않고, 적은 수입이라도 뭔가 할 수 있는 일거리로 보람을 느끼며 앞에서 언급한 자전거 가게 사장님과 같이 뭔가 기술을 배워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늙어서 할 수 있는 기술이 뭔지를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기술을 배울 것인가? 그동안 강남의 대형 점포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알고 지냈던 사장들과 식사하는 중에 ‘조경과 보일러, 목공, 자동차 수리, 조리 기술 중 어느 기술을 배우는 것이 미래가 가장 유망 하겠나’를 물었더니, 조경 쪽으로 교육 받으라고 하였으며, 조경은 무료교육 대상자 모집에서 연령제한이 없었으나, 보일러, 자동차 수리 등은 만 55세는 이후 노령자는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하여, 연령이 제한되기 전에 보일러, 자동차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보일러 기술은 월급이 적지만 힘이 들지 않는 직종이라 생각하여, 2011년 2월에 서울종합직업학교(현 동부기술교육원) 보일러과에 지원하였습니다. 등록 후 합격자 발표만을 손 꼽고 기다렸으나, 합격자 발표일에 제 이름 석자가 없었기에, 아!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또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발표일 3일 후 기술학교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등록학생 중 몇 명이 주간으로 등록을 변경하게 되어 야간학생 결원이 있어 예비 합격자 중에 제가 포함되어 합격 했으니 3월 3일부터 학교에 나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여, 3월부터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술 취득과정 (1) 보일러 기능사 취득 과정 2011년 3월부터 고덕동 소재 서울종합직업학교에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개월 공부하였으며, 실습할 때는 30년간 책상에 앉아서 근무한 은행원이 보일러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하여 용어를 익히는데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특히, 가스나 전기 용접시에는 옷을 태우기도 하였으며, 손이나 발을 다치기도 하는 등 잦은 실수를 연발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로부터 웃음꺼리가 되기도 하여 창피하기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나 참고 견디었습니다. 필기시험은 과거 5년간 시험 출제 문제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어느 문제가 자주 출제되는지를 분석하고 외웠습니다. 입학 2개월 후 용어도 잘 모르던 제가 현장에 근무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하여 입학하여 공부한 학생들도 낙방하는 보일러 기능사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며, 5월부터 보일러 기능사 2차 실기시험을 준비하였으며, 6월에 최종 합격하여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2) 공조냉동 기능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시험 준비는 기술학교에서 보일러시험 끝난 후 기초적인 내용을 가지고 졸업할 때까지 약 2개월간 배우고 실습하였으며, 학생들이 쉴 때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홀로 가스 용접 실기에 매달렸으나 무난히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과는 달리 2차 시험인 실기 시험에 낙방하여 10월에 재 응시하여 12월에 어렵게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3) 에너지산업기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을 가르쳐 주시는 교수님께서 보일러, 공조냉동 자격증을 취득 후에는 요즘에 인기 있고 정부차원에서 각종 지원되는 에너지관리 기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으나, 정해진 수업기간이 끝나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술학교 보일러 과정을 끝마친 후 또 다른 기술을 준비 중에 기술학교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더니, 에너지 관련 수업이 9월부터 진행된다고 하여 9월에 지원하여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에너지관리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에너지 기사시험은 실무 경력이 없어 에너지관리 산업기사 시험만 응시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시험은 1년에 1회밖에 없으며, 2011년의 경우는 124명이 응시하여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이라고 유념하여 공부하라고 하였다.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공부할 때는 33명이었으나, 각종 공식이나 수치 계산 등으로 점차 공부가 난해 함을 느끼고 또한 수업하는 교실이 추워서 공부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다들 중간에 포기하였으며, 마지막 남은 3명의 학우들도 포기하자고 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금년 아니면 내년에 공부한다고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나이가 60대를 바라보니 지금 이 기술 공부를 포기하면 갈 곳이(취직할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끝까지 기술 공부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험이지만, 2012년에는 내가 한번 도전하여 합격 했다는 소문을 듣게 하겠다고 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에너지관리시험 준비하기를 7개월,.. 드디어 1차 시험을 무사히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을 주관식을 치르게 되었으며, 합격자 발표 전날 밤 꿈에, 합격자 명단을 보니까 4명이 있는데 나의 이름이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전국에 단 4명만이 합격하였으며, 그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크게 감동했으며 노력하는 자는 하늘이 돕는 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근무하던 지점의 은행 직원들이 더 좋아했으며 같이 공부한 동료학생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습니다. 1차 시험에 60점으로 겨우 통과했는데, 2차 시험은 과연 몇 점이나 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 했더니, 문답 50점 만점에 22점, 동영상 문제 50점 만점에 38점으로 더도 덜도 아닌 합격점수 커트라인인 60점으로 합격하여 감동의 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4) 전기기능사 취득과정 보일러, 공조냉동, 열에너지관리산업기사 자격증 있으면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은행보다는 조건이 더 좋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취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가입하여 컨설턴트와 상담도 하고, 베이비부머 취업박람회에 참가하는 구직활동에 전념하였지만 성사되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많이 활용되며 취업대상업체가 더 광범위한 전기기술을 배워 기술력을 더욱 향상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기기능사과정 교재와 동영상 C/D를 구입하여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전기기술을 가르쳐 주는 기술학교 야간과정에 등록하여 9월부터 수업을 듣게 되었으며, 수업 듣는 그해 12월에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보다 먼저 1차 필기 시험과 2차 실기시험을 통과되어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5)전기산업기사 자격증 취득 도전기 2012년 12월에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하여 이젠 취업이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여러 곳에 취업활동을 하여 00시설관리공사, 00회사, 00구청 등 무려 수십 곳에 서류전형에 합격하여 면접을 보았으나 결과는 역시 나이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젊은이에게 밀려 나기를 수십 번…. 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능사 자격증만으로는 나이에 대한 한계를 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점점 나이에 따른 압박관념에서 모든 일이 점점 위축되었으며, 노후에 대한 자신감과 활기를 잃어가며 가족들 간의 유대도 소홀해 지며, 패배의식이 팽배해져 가며, 우울증으로 지내기를 수개월 지난 후 어느 날 한편의 신문에 실린 다음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참판집 종으로 일하며 ‘도둑공부’… 신분벽 넘어 형조판서 우뚝 공부하고 싶은 노비의 열망이 높은 신분의 장벽마저 뛰어넘었다. 참판 집안의 종에서 형조판서로 우뚝 선 반석평(潘碩枰·?∼1540)의 이야기다.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조상이다.19세기의 족보 ‘만가보’에 따르면 석평은 충북 음성에서 아버지 반서린(양반으로 추정)의 서자로 태어났다. 석평은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노비 신분으로 서울의 이 참판 집에서 종노릇을 했다. 본래 똑똑했던 그는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자기 또래였던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글씨를 쓰면서도 배우는 대로 외우는 영리한 아이였다. 석평의 도둑공부를 알게 된 이 참판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석평은 이 참판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 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종은 공민권이 없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남달리 여긴 이 참판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석평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고 아들이 없는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석평은 150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검열(예문관에서 사초를 기록하던 정9품 벼슬)이 되었다. 경차관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賤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문신 안당의 추천으로 경흥부사가 되었고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조참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531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정2품·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를 지냈다. 그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석평이 형조판서일 때 길에서 옛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거지가 다 되어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석평은 초거(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절했다. 석평은 왕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벼슬을 깎아 이오성에게 주기를 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 용서하고,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제 벼슬을 내리고 석평의 관직도 그대로 유지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석평과 조정을 모두 높이 평가하며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 풍속이 어찌 분발하지 않겠으며 재주 있고 덕 있는 자가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물론 석평의 출세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 참판이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태워 양인이 되게 해 주었고 석평이 노력해 정식으로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보살펴 준 이 참판의 아들이 거지꼴이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양심고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중종실록에는 석평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그가 종 출신이지만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등용된 바람직한 사례로 든 것이 인상적이다. 위 기사에 힘을 얻어 다시 전기산업기사에 도전하면서 취업 활동을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201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지참하여 인근 도서관에 9시에 도착하여 밤 10시까지 공부하였으며, 친목회,동창 모임 등 참석하지 않고 기술 공부에 홀인 하였습니다.2014년 3월 제1회 전기산업기사에 시험을 응시했으나 역시 유사직종에 근무한 경험이나 유사한 학과에 공부하지 않는 터라, 또다시 5~8점 차이로 낙방하는 쓴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격증으로 재 취업! 전기기능사는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합격하였으나, 역시 기사 시험은 실무나 관련 학과와 인연이 있어야 이해가 쉬워 기사 시험 응시에 쉽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도서관 다니며 공부하다보니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마저 우울해지게 되어 기사 시험 종료와 동시에 취업하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홈페이지와 노동부의 워크넷에 등재된 채용공고를 검색하던 중에 2014년 2월 27일 국민은행 본점 시설과 근무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28일 이력서를 제출하여 가진 자격증으로 응시하여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친 후 2014년 3월5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결론적으로 말하면 눈높이를 낮추면 미래가 보이며 국가나 사회나 자식들에게 손을 내 밀수 있는 것보다 은퇴후에도떳떳한기술하나라도배우고익히면,개인이 행복하고 가정이 건전하며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확신합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만 유념 하시면 됩니다. 첫째, 지난 것 다 잊으시고, 오직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지점장을 했느니? 정부, 재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느니? 월급을 얼마나 받았느니? 이런 생각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라야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같이 배우는 옆 학우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 시대는 과거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느 직업을 가졌나 보다는 오직 자격증만이 살길입니다. 자격증 없이는 사회적으로 대우도 못 받으며 월급도 많이 받지 못합니다. 물론 경력도 중요하지만 당장 회사에 취직을 한다든가, 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자격증을 소지해야만 우선 지원서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금이 넉넉하여 쉽게 회사나 가게를 차리실 수는 있겠지만, 기술이나 경험이 없이 시작하는 것은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둘째, 처음 시작하는 아름다운 마음 변하지 마시고 끝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기술을 배울 때는 하루 빠지시면 그 다음 수업과 연결이 안 됩니다. 특히, 기술을 배우시는 분들은 더 더욱 그렀습니다. 용어 등이 생소하기 때문이며,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용어들을 그때그때 듣고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와 같이 보일러과에 등록하신 분들 중에 열심히 참석하신 분들은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다 취득하셨으며, 또한 공조. 냉동자격증 까지 바라보고 공부하여 원하는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반면에 상반기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 출석이 부진 했던 분들은 교수님께서 출제 예상 문제를 가르쳐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석이 빈번하여, 불합격 원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기술을 배우시려고 하신다면 중간에 여러 가지 극복하셔야 할 일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야간으로 기술 받는 기간 중에도 여러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자는 제안이, 유혹이 많았습니다. 물론, 2~3년은 현재보다는 더 많은 월급 받고, 대우도 받으며 살겠지만,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여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또한, 연말 연시 때나 주말에 동창, 동료직원, 각종 사회모임으로부터 회식, 등산, 골프, 낚시 등 많은 종류의 유혹들도 있었지만, 제2인생을 준비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회사 퇴근 후나 주말에는 곧바로 기술학교로, 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말입니다. 셋째,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를 잘하면 또 다른 하나를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즉, 필기 시험에 자신이 있는 분은 실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고요. 실기시험에 강한 분들은 필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같이 합격하실 수 있도록 상호 서로 도와주라는 뜻 입니다. 그래야, 힘들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기억력이 약하여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고. 특히 실기시험은 완전 빵점 인생 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을 위해 필기시험에 대비하여 교수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제공 하였더니, 필기시험에 도움 받은 동료 학생들이 실기 때는 제가 모르는 각종 공구들, 밸브들, 전기용접 및 가스용접 등등… 많은 도움을 주어 쉽게 실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지난날들을 회상해 볼 때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은행 지점장이 겨우 보일러 기능사 공부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기술만이 남은 30년 인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원봉사하며! 내가 배운 기술로 겨울을 따뜻하게, 여름을 시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기술을 펼치며 보람 있게 살며, 멋지게 보내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끝으로 이 모든 것들을 먼저 기도로 준비했으며, 다음에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위 내용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에서 올해 초 실시한 중장년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 2014-04-17 18:11
-
- [초보할배의 손주일기(3)] 피아노에 재미를 붙인 외손녀
- ※한국손주돌봄(격대교육)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계신 전영철님의 블로그 일기를 저희 '브라보 마이 라이프' 사이트 성격에 맞게 편집한 기사 입니다. '3대가 행복한 동행을 위한 조부모의 손주교육(격대교육) 일기장'이라는 블로그의 문패와 걸맞게 일기에서도 손주에 대한 사랑과 가족애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2014년 04월08일 / 글 : 전영철 서현이는 오늘도 피아노학원에 다녀왔다. 지난 주부터 시작된 서현이의 피아노 레슨이 1주일째 계속되고 있다. 6개월 이상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고 조른 끝에 드디어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서현이. 피아노 선생님의 칭찬이 고맙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40분 동안 집중해서 선생님의 지도를 잘 따른단다.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 놀이터에서 30분 가량 놀다가 엄마의 손을 잡고 집 근처에 있는 피아노학원으로 가는 서현이. 자신이 좋아하는 수업을 즐기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나중에 성장해서 피아노 전공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취미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수준의 연주실력을 쌓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이 엄마의 생각이다. 아직도 서현이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더 남아있다. 바로 태권도를 배우는 것이다. 아이 부모는 초등학교 입학 후에 태권도 학원으로 보낼 모양이다. 서현이 화이팅!!!!
- 2014-04-10 0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