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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가 있는 여행
-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 2016-03-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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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
-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 2016-03-0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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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투어] 스토리가 있는 여행 브라보 투어
-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 2016-02-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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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맛집] 라면을 먹으며
- 김훈의 산문 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추위와 시장기는 서로를 충동질해서 결핍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짙은 김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콱 쏘는 조미료의 기운이 목구멍을 따라가며 전율을 일으키고, 추위에 꼬인 창자가 녹는다.’ 과장했다고 느낄지라도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라면의 맛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잘 차린 진수성찬보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인 라면 한 그릇이 더 간절할 때도 있다. 오늘 점심에는 라면을 먹으며 저마다 있을 라면에 얽힌 추억 한 가닥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두 번 먹어도 맛있는 ‘첫번째라면’ 진한 조개 육수를 사용해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특징인 곳이다. 모든 라면 메뉴에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수프를 쓰는데 매콤한 향이 침샘을 자극한다. 모든 메뉴에 1000원만 추가하면 라면과 잘 어울리는 멸치아몬드 주먹밥(2개)을 즐길 수 있다(공깃밥으로 선택도 가능). 기본 라면은 조개라면(5000원)이고 그에 올라가는 재료에 따라 새우라면(6000원), 꼬치어묵라면(6000원), 전복라면(8000원) 등으로 나눈다(조개는 모두 들어감). 황태를 우려낸 육수로 맛을 낸 황태라면(5000원)은 인근 회사원들 사이에서 해장라면으로도 잘 알려졌다고 한다. 칼칼한 부대찌개에 라면사리를 넣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김치부대라면(5000원)을 추천한다. 부대찌개 한 그릇 못지않게 들어간 햄과 소시지를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낮에는 라면을 찾는 손님이 대부분이지만 해가 지고 나면 모둠 조개찜(3만 원)에 술을 곁들이러 오는 경우가 많다. 조개찜을 다 먹고 나면 남은 육수에 라면사리를 넣어 먹을 것을 권한다. 빨간 국물의 조개라면과는 또 다른 맑은 조개라면의 맛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조개두루치기(2만 원), 조개계란말이(1만 원), 조개 파전(1만5000원) 등 조개를 주재료로 한 안주 메뉴가 준비돼 있다. 주소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37 아일렉스상가 지하12호 운영 시간 (평일) 10:00~23:00 (주말/공휴일) 11:00~17:00 문의 02-786-2080 서울식 라멘 ‘한성문고(漢城文庫)’ 2004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극동방송국 옆 작은 골목길에서 시작한 라멘 전문점 ‘하카다분코’의 분점이다. ‘문화의 창고[文庫]’라는 뜻의 ‘하카다분코’가 일본 문화만을 전파하는 것처럼 왜곡되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 주인장이 새로운 서울의 문화를 꿈꾸며 서울 가로수길에 ‘한성문고’를 열게 된 것. 한성문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서울라면(1만 원)은 그가 생각하는 오늘날의 서울을 표현한 라면이라고 한다. 서울라면은 지금의 모습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생각을 담아 변화할 예정이다. 현재는 돼지 사골, 닭, 채소, 가다랑어, 고등어를 우려낸 육수에 일반 라면보다 굵은 면을 사용하고 있다. 고명으로는 돼지고기 장조림, 챠슈, 청경채와 대파가 올라간다. 한성문고와 하카다분코 두 곳 모두 판매하고 있는 인(印)라멘(8000원)과 한(漢)라멘(1만 원)은 2일 동안 우려낸 돼지 뼈 육수를 사용해 걸쭉하고 진한 맛을 낸다. 한성문고의 라면은 간이 살짝 짜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싱겁게 먹기를 원하면 주문을 할 때 미리 말해 두는 것이 좋다. 육수 기름의 양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취향에 따라 많게 또는 적게 주문한다. 단, 기름을 너무 많이 빼면 특유의 풍미도 감소한다는 점을 유의해야겠다. 두꺼운 면을 사용하는 서울라면과 한라멘은 익힘 정도도 고를 수 있는데, 조금 덜 익혀 먹을 것을 권한다. 조금 느끼하다고 생각한다면 다진 마늘을 넣어 먹을 것을 추천한다. 처음부터 마늘을 넣어 먹으면 국물 본연의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맛을 보다가 첨가하는 것이 좋다. 기본으로 제공하는 통마늘을 도구를 사용해 즉석에서 다져 넣기 때문에 마늘의 향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한 그릇에 마늘 2~3알 정도면 적당하다. 주소 서울 강남구 신사동 542-3, 2층 운영 시간 11:30~22:30 문의 02-543-7901 라면 장인의 손맛 ‘이재현 55번지라면’ 서울 종로구 화동 55-1번지에 있는 ‘이재현 55번지라면’. 삼청동 골목의 한옥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이곳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인기 있는 맛집이다. 이재현 셰프가 다년간의 연구 끝에 탄생시킨 육수와 양념장으로 인스턴트 라면이 따라올 수 없는 풍미를 자랑한다. 모든 라면에 사용되는 육수는 소뼈를 고아 만든다. 일반적으로는 뽀얗게 우러난 사골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맛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실제 사용하는 육수는 맑은 편이다. 너무 진한 육수를 사용하면 점성이 강해 오히려 텁텁하기 때문에 적절히 우러난 맑은 육수를 사용해야 그 맛이 깔끔해진다고 한다. 육수 농도를 맞추기 위해 계속 펄펄 끓이는 것이 아니라 불 조절을 해가며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 오징어, 바지락, 새우, 버섯과 각종 야채로 맛을 낸 오짬라면(7700원)은 특유의 쫄깃한 오징어와 얼큰한 국물 맛으로 인기다. 이보다 덜 맵고 하얀 국물의 55백뽕(8800원)과 더 맵게 끓여낸 맵다면(8800원)도 있으니 기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된장을 기본으로 한 소스에 시래기와 두부 등이 들어간 토장라면(7700원)은 들깻가루와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 그 외에 육개라면(8800원), 부대라면(8800원), 순두부라면(7700원), 불고기라면(9900원)도 제대로 만든 육개장, 부대찌개, 순두부찌개, 뚝배기 불고기를 먹는 것처럼 깊은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면을 먹고 공깃밥을 시켜 남은 국물에 말아 먹으면 든든한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다. 라면을 끓이는 시간은 5분 내외이지만 각각의 재료의 맛을 살리기 위해 소뼈 육수를 사용해 불고기 양념을 재는 등 세심한 노력이 깊은 맛을 내는 노하우라 할 수 있겠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기름지고 자극적인 봉지라면 대신 건강한 재료로 담백한 맛을 낸 55번지라면이 어떤가. 된장으로 맛을 낸 토장라면이나 달달한 소고기가 넉넉하게 들어간 불고기라면은 아이들이 먹기에도 좋다. 주소 서울 종로구 화동 55-1 운영 시간 11:00~21:00 문의 02-722-2997
- 2015-12-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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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투어] 용문산 용문사, 만추 여정 느끼기 제격
-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11-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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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맛집] 시린 몸과 마음을 데우는 국밥 한 그릇
- 날씨가 쌀쌀할수록 국밥의 풍미는 더해간다. 몸이 차면 뜨끈한 국물이 더욱 반가울 테니 말이다. 칼바람이 불더라도 국밥만큼은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큼지막한 솥에 갖은 재료들을 팍팍 넣어 오래 푹푹 끓여야 제맛이 우러나는데, 집에 있는 작은 냄비 정도로는 그 농염한 맛을 따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뜨거운 국물에 더운밥을 말면 뜨끈함이 배가된다. 이렇게 내놓는 것이 국밥의 정석이라 하겠다. 요즘은 따로국밥이라 하여 국과 밥을 따로 먹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후후 불어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을 때의 시원함은 그 육수보다 매력적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해장술을 부르는 ‘시골집’ 술을 마신 다음 날 식사로 해장을 하며 곁들이는 술을 흔히들 ‘해장술’이라고 한다. 사실상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주당들에겐 그만한 해장이 또 없다. 그렇다고 커피 마시듯 술만 들이켜는 것이 아니니 그에 맞는 식사도 중요하겠다. 해장술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속도 든든하게 채워주고 안주로도 손색없는 ‘시골집’의 ‘시골장터국밥’을 추천한다. 숙취 해소 효과가 있는 선지를 듬뿍 넣고 사태와 파, 무 등을 곁들여 얼큰하게 끓여낸 옛날식 소고기장터국밥이다. 국물이 약간 걸쭉하면서 간이 센 편이기 때문에 안주로 즐겨 찾는 손님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술국’이라는 메뉴를 따로 파는데, 실제로는 시골장터국밥과 똑같고 공깃밥만 없는 것이다. 가격도 딱 공깃밥만큼 1000원 차이다. (시골장터국밥 8000원, 술국 7000원) 저녁시간이 되면 시골집은 밥집보다는 술집에 가까워진다. 저녁 6시 이후에만 판매하는 전 메뉴를 비롯해 석쇠불고기, 육회, 안동사발문어, 홍어무침 등 다양한 안주에 술자리를 즐기러 오는 이들로 까딱하면 줄을 서야 한다. 이곳이 술을 부르는 이유는 맛좋은 음식에도 있지만 시골집이라는 이름처럼 구수하고 편안한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한옥 구조가 정취를 더하고, 식당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국물이 침샘을 자극한다.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2가 12-1 영업시간 11:30~22:00 (일요일 21시까지) 문의 02-734-0525 ◇삼삼한 손맛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밥풀꽃’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날로 바뀌는 홍대의 맛집들 속에서도 10년째 같은 자리에서 며느리처럼 지조 있는 맛을 내는 곳이다. 대구에서 10여 년간 식당을 운영했던 주인장이 깊은 손맛으로 매일 변함없이 국밥을 끓이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동안 써온 뚝배기 그릇을 대신해 현대식 옹기그릇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맛만큼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팔기 위한 국밥이 아닌 내 자식을 먹일 밥상을 차린다는 마음이 그 비결이다. 국밥 사진을 찍으려 하자 주인장은 “그저 내 집에서 먹는다 생각하고 하기 때문에 예쁘게 담고 꾸밀 줄은 몰라요. 보기엔 투박해도 정성을 다했으니 한번 드셔 보세요”라며 새색시처럼 수줍게 국밥을 내밀었다. 모양새는 꾸밈없음 그 자체였다. 맛 역시 삼삼한 간에 평범한 재료들이 들어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먹는 내내 입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극적인 맛과 재료로 이목을 끄는 여느 맛집과는 다른 수수한 매력이 느껴지는 곳이다. 상상 그 이상의 맛은 아닐지라도 가장 이상적인 국밥 맛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국밥은 다섯 가지가 있다. 비슷해 보일지라도 소고기무국밥(맑은 국)에는 양지 육수를, 소고기국밥(얼큰한 국)과 소고기미역국밥에는 양지와 사태 육수를, 시래기국밥과 김치국밥에는 맑은 멸치 육수를 사용한다. 시래기국밥에는 들깻가루를 약간 넣어 구수한 맛을 더했다. 다른 네 종류의 국밥과는 다르게 김치국밥만은 국과 밥을 함께 끓여 내고 담는 그릇도 뚝배기를 사용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더 맛있으니까. 밥의 풀기가 더해져 살짝 걸쭉해진 국물이 허기진 속을 더욱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계란을 풀어먹는 손님들이 있어 날계란이 함께 나오지만 주인장은 그대로 먹는 것을 권한다. 주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15길 38 영업시간 11:00~23:00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휴무) 문의 02-332-2479 가격 소고기무국밥 9000원, 소고기국밥·소고기미역국밥·김치국밥 7000원, 시래기국밥 6000원, 오늘의 밥상 3만2000원(2人) ◇쌈 싸먹는 나주국밥 ‘삼태기’ 국밥을 먹을 때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이 바삐 움직이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젓가락이 할 일이 더 많다. 바로 쌈을 싸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쌈이라 하면, 상추쌈 정도를 떠올리겠지만 이곳에서는 김이 주인공이다. 식당에서 소개하는 방법대로 하자면, 먼저 김 위에 무말랭이무침을 올리고 그 위에 콩나물파절이와 국밥에 들어 있는 고기를 차례로 얹은 뒤 김으로 잘 싸서 먹으면 된다. 지방이 적은 소 앞다리 부위를 사용해 고기 맛이 담백한데, 국물이 맑아 일반 국밥처럼 말아먹게 되면 조금 심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방법대로 쌈을 싸먹으면 다양한 식감을 느낄 수 있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개하는 방법에는 반찬으로 나오는 신김치를 쌈에 넣지는 않지만 취향에 따라 함께 즐겨보아도 색다른 맛을 경험할 수 있다. 간단하게 국밥 한 그릇 먹으러 가서 귀찮게 쌈을 싸먹겠나 싶을 수 있어도 먹다 보면 중독되는 그 묘미에 손놀림이 분주해질 것이다. 쉽게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국밥에 들어간 고기의 양이 꽤 푸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공깃밥을 반 정도만 채운다. 양이 부족하더라도 공깃밥 추가는 공짜라 부담 없다. ‘삼태기’ 1호점은 여의도역 인근에 있는데 올해 KBS별관 근처에 2호점을 열었다. 그 기념으로 올 한 해 동안 2호점에서는 1호점보다 2000원 더 저렴하게 나주국밥을 판매하고 있다(1호점 1만원, 2호점 8000원). 두 곳은 저녁메뉴에도 차이가 있다. 1호점은 삼겹살을, 2호점은 무쌈, 깻잎, 파채를 곁들여 쌈 싸먹는 냄비수육을 판매하고 있으니 취향에 따라 구분해 가보는 것이 좋겠다. 주소 (1호점)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08 아일렉스상가 2층 (2호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45-19 서린빌딩 2층 영업시간 (1호점) 11:00~22:30 (2호점) 10:00~22:00/ 일요일, 공휴일 휴무 문의 (1호점) 02-786-4579 (2호점) 02-761-5957
- 2015-11-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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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사]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 고문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열정
-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경영 교육자,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등 신 고문의 삶은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 드문 경영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신홍순(申弘淳) CMG 고문은 1941년생, 올해로 74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그 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직업인 동시에 유희의 영역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까. 그는 음악과 미술은 기업에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셨던 고(故) 임원식의 친구였던 선친께서 미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컬렉션도 갖고 계셨지. 선친께서 나이 6~7세부터 연주회나 전시회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이후 대학에 와 재즈와 팝 등으로 영역을 넓혔어요. 아내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얻게 된 것도 그렇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서 전시회를 많이 다녀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돼요.” 신 고문의 선친은 동일방직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을 기업에서 구매하여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그의 선친도 그런 일을 했었고, 그 덕분에 화단에서도 그의 선친이 꽤 알려진 이름이어서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환경이 신 고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LG패션 대표이사 시절 갤러리 운영, 미술작품 전시, 재즈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패션마케팅’을 펼쳐왔다. “패션 자체가 색상과 디자인 등 예술적인 감각과 마인드가 필요한 분야인 데다 크게 보면 같은 문화산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패션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창작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죠.” 재즈파크, 한국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재즈마니아인 신 고문은 제 162회를 맞은 ‘재즈파크’ 콘서트를 1세대 정통재즈에서부터 라틴, 퓨전 재즈 등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신구를 아우르며 매회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유명공연으로 만들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입장료 1000원의 재즈파크 콘서트를 꾸준히 열어온 ‘공연기획자’다. 또한 ‘재즈파크빅밴드’라는 18인조 재즈 빅밴드를 구성, 활동하고 있는 예술단체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열의 재즈파크빅밴드 활동으로 재즈파크빅밴드가 국내 최고의 재즈빅밴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재즈공연을 후원해준 신 고문의 감회는 남다르다. “재즈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의 토대를 마련한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1세대들이 설 변변찮은 무대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무대다운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듣고 재즈 1세대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척박한 한국 재즈 환경 속에서 재즈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이끌어온 ‘재즈파크’가 13살이 됐다. 이는 재즈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즈 공연을 진행해온 신 고문의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이다. “수익을 남기는 공연이 아니라 재즈파크를 통해 재즈인들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생겼고, 대중에게는 재즈와 소통할 수 있는 가교가 마련됐다는 것이 의미였죠. 또한 재즈파크를 통해 선·후배 재즈 아티스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팀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침체된 재즈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어요.”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얻은 삶의 즐거움 신 고문이 최근에 공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의 조상, 그의 가계에 대한 연구였다. “선친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셔서, 그 나머지 일의 뒷정리를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한국처럼 족벌이라는 걸 각 성씨들이 갖고 있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그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죠.” 신 고문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라는 문인을 꼽았다. 영·정조 시절을 살았던 신광수(1712~1775)는 ‘동방의 백낙천’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신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을 쓴 춘원 이광수의 본명은 이보경으로, 그가 필명을 이광수로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신광수의 작품들을 알게 되면서라고 할 정도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던 문인이었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온 극단이 하는 악극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석북 선생의 한시 창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조상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다 신광수라는 걸출한 조상의 발견은 조상의 활동을 시대별로 자료를 취합하여 평전을 만들고 번역을 싣는 작업의 결과였다. 신 고문은 조상의 업적을 정리하는 그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애착을 굉장히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작품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다가오죠. 그리고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그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서로 집안 행사 때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어느 집에서 자료를 가져 와서 ‘1450년대 자료를 보라. 너희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시도 읊고 쌀도 나누고 했다. 1500년대 이후의 교류는 이미 나왔는데 그 이전 건 처음이다’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쪽과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새로운 게 창조되는 기분을 느끼니 자꾸 빠지게 되더군요.” 그런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로 공연을 열다 “조상의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한문을 배우긴 배웠지만 깊이 있게 배운 적은 없어 한학자들이 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한학자가 250여 명 되는데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술대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신광수 선생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하자고.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알거든? 어? 그거 얘기가 되네. 돈만 있으면 그 다음 방법은 내가 갈 길을 아니까.” 신광수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고향에서 한양에 오긴 했지만 집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그게 하필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계동이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을 넘어서 명동, 당시에는 저동이라고 불렸던 곳을 다니곤 했다. 지금의 평화방송 빌딩에서부터 한옥마을 쪽으로 하여 회현동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조상의 기록들을 신 고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누비고 다녔던 동네가 그쪽이니, 공연 장소는 한국의 집 전통예술극장에서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악 공연을 하는 곳인데 200여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인 가곡 예능보유자 김영기 선생을 만났어요. 이런 것 좀 하려는데, 당신이 제일 적임자니 해주십사 부탁을 했죠. ‘당연히 해야죠’라며 얘기가 척척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지.” 자신의 조상의 업적을 발굴하여 그걸 현대에 살아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낸다. 신 고문이 말한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는 말을 납득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말로 시니어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가 젊었을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 아니던가. “나도 젊었을 때는 조상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니 그 윗대에서 알아봐야 할 분들이 새로 생기고, 다른 집안과의 연관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집안의 기록들도 연구하게 됐어요.” 고향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시간 신 고문은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과 가까워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이다. “우리 자식들은 고향에 관하여 기억하는 게 없어요. 가서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고 난리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선 다신 안 가더군(웃음).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고향 현지의 문화원과 교류하게 되고, 마침 문화원장 중에서 우리 집안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하는 데 도움도 주시고 날 초청도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니 군수도 알게 됐어요. 2013년이 서천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였죠. 그래서 60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는데 제게 총 준비위원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회의 진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넣고 그랬죠. 그중 금난새씨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게 있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300명의 청소년이 모이다 보니 행사하던 날 그 300명의 부모들이 모두 서천에 오더군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신 고문은 사람들이 두루 도우며 더불어 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계를 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향과 더욱 가까워진 신 고문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하는 사업 중에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고, 발레나 연극 같은 공연을 영상화하여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 클로스업해서 테크닉까지 보여주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문화적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거죠. 알아보니까 큰돈이 안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서 고향 문화원장에게 가서 내가 후원할 테니 해보고자 했어요. 회관 사용 허가가 떨어졌고 ‘호두까기 인형’을 가져갔죠. 군부대 사병들, 학생, 일반인들이 일과 끝나고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문화원장이 사람이 올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 영상이 한 시간 반 동안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군요. 다들 집중해서 보는 거지.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 보람이 깊었고.” 인생 후반전의 밝은 본보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멋지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신 고문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자신이 꾸준히 쌓아왔던 커리어에서부터 비롯된 것 외의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우선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좀 만들려고 할 때 일을 찾는 기본은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열정이죠. 그런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그 열정을 원하는 대로 행사하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서 유도해야 해요. 제 친구 중에 대학을 안 다녔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가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도 서예를 잘했고. 그 친구가 한문학에 자질이 있다는 걸 알았죠. 성격도 괜찮아서, 나하고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씩 목표가 주어지면서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리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내가 요즘 뭔 보람으로 살았을까.’” 신 고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신 고문은 그들을 알아보고 모아서 도화선으로서, 불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득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람을 느껴야 일이 돼요. 나이를 먹으니 그런 쪽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호기심, 열정 그리고 친구 많은 것이 그가 웰에이징 하며 사는 비결이었다.
- 2015-10-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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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에 혼자 떠나는 여행- 혼자서 느릿느릿 떠나는 '청송 심씨 고택'
- 도시의 시간은 늘 빠르게 흐른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빠르고 지나는 차들도 빠르다.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추월해가는 사람을 붙들고 “뭐가 그리 바쁘세요?”라고 물으면 “무엇이든 빠르게 일하고, 빠르게 말하는 것이 도시에서의 예의범절이라우”라는 젊은이들의 차가운 훈계가 대답으로 돌아온다. 숨 막히는 도심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만석꾼 청송 심씨 고택은 느릿느릿 걸어가려고 길손을 여유롭게 맞아주는 곳이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veritas11@empas.com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덕천마을을 지키고 있는 청송 심씨의 송소고택. 거창하게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으뜸가는 만석꾼인 청송 심씨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세도가로 이름을 날렸다는 청송 심씨. 누대의 세도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건 사실이다. ‘삐거덕’ 하고 조심스럽게 솟을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서자 길손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삽살개 검둥이다. 태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어미만한 풍채로 엉금엉금 걸어와 꼬리를 흔들며 길손을 반기는 모습이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것 같다. 저만치서 인기척을 듣고 찰방공파 11대손이자 송소고택의 주인장 심재오 씨가 마중을 나온다. “주말에 주왕산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아 올 10월까지는 주말 예약이 꽉 차 있습니다. 하지만 주중에는 한산하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 받지 않은 자영업이나 전문직 손님들이 부부동반으로 오시거나 혼자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로 가득 차 왁자지껄한 고택의 모습은 왠지 상상하기 싫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애써 찾아와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고 싶은 여행객들이라면 반드시 주말을 피해 이곳을 찾는 것이 좋다. 손님 하나 없는 넓은 고택에서 주인 행세도 해보고 귀여운 검둥이의 애교를 혼자서 독차지하려면 한산한 주중이 제격이다. 심 씨 땅을 밟지 않고는 뒷간도 못 간다고? “고을의 부자는 대개 천석꾼입니다. 옛날 청송 심씨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는 황해도와 개성까지 전부 청송 심씨 땅이었어요. 사정이 이러하니 심 씨의 땅을 밟지 않고는 뒷간도 못 간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죠.” 집안의 위세를 설명하는 심재오 선생의 어조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옛날 경주의 최부자는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원칙을 세우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으니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청송 심씨 역시 최부잣집에 밀리지 않는다. “일제시대 의병 군자금이 죄다 청송 심씨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놓고 군자금을 줬다간 총독부로부터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 음성적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 가문은 송호택 증조부님께서 국채보상운동 청송지부장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시면서 일정시대 독립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오래된 집, 오래된 탁자, 오래된 문갑. 송소고택이 박물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과 손님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저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던 길손을 송소고택 곳곳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운이 옛날로 끌고 들어간다. “송소고택은 만석꾼 심처대 할아버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재산이 불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본래 선대가 터를 잡고 있던 지금의 성주봉 아래 덕천마을로 되돌아와 더 큰 집을 짓고 사신 거죠. 아들 넷을 둔 송소 심호택 할아버지는 맏이네 99칸의 송소고택을 짓는 데 13년, 나머지 세 아들에게 각각 30칸 규모의 집 세 채를 짓는 데 7년이 걸렸어요. 여기에 첩의 아들이 분가해 살 수 있도록 25칸의 집을 짓기까지 모두 21년 동안 214칸의 집을 지어 물려주셨지요.” 송소고택은 4형제의 집 모두 대문채, 큰사랑채, 작은 사랑채, 인채, 별당과 조경을 갖춘 거대한 규모의 대궐이었다. 하지만 전란과 정치적 소요를 겪으며 송소고택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이 안타깝게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수백 년 전 선조들의 생활방식이 그대로 투영된 전통가옥이기에 여관이나 모텔과 달리 불편한 점이 바로 화장실이다. “전립선이나 요실금으로 고생하시는 중장년층 손님들을 위해 재미삼아 사용해보시라고 요강을 드려요. 송소고택을 찾아오시는 중·장년층은 평소 전통가옥에 관심이 있는경우 재래식 화장실 같은 불편함을 감수하시는 반면, 아무런 정보 없이 재미삼아 들르신 분들은 밤을 버티지 못하고 퇴실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저희 집이 체통을 심히 따지는 종택은 아니지만 나름 전통을 지닌 가옥이에요.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오시기 전 사료를 찾아 공부를 한 후 송소고택을 찾아주시면 한옥에서 하룻밤 묵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실 수 있습니다.” 새색시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송정고택 송소고택 주인장의 당부에 이곳을 찾아갈까, 말까 고민이 든다면 독자들을 위한 또 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송정고택이다. 송소고택과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쪽문을 통해 왕래할 수 있는 송정고택은 심호택 선생이 차남 심상광 선생에게 지어준 것으로 현재 심재오 선생의 육촌 여동생 심증옥 여사와 남편 정진철씨 부부가 기거하며 손님들을 맞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결혼해 분가를 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4년 전에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돌아와 은퇴생활을 하고 있어요. 거의 40년 동안 집이 비워져 있었던 터라 손볼 곳이 많았는데 말끔히 수리를 해서 예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어요.” 방 한쪽 벽면에는 의친왕의 친필이 새겨진 현판이 눈에 띈다. 마루 한편에 펴놓은 좌식상은 500년 된 나무로 만들었으며, 집 곳곳을 지키고 있는 두꺼비상은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더 이상 채굴이 금지된 귀한 꽃돌로 만들어졌다. 객실 벽면에 세워져 있는 화조도 병풍은 족히 100년은 되어 보이며, 재떨이와 곰방대 꽃병 등 선친들이 사용했을 법한 물건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주인장 부부가 도둑 걱정에 잠을 편히 잘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정고택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며칠 집을 비우느라 문을 잠가놓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곧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퇴 후 살 곳을 찾기 위해 춘천, 영월, 안성 등 전국을 돌아다녀봤지만 청송만큼 여유롭고 인심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혼자 여행하시는 저희 또래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여기 집을 내놓은 곳이 있나요?’ 하고 매번 물으실 정도니 처음 찾은 분들의 소감이 이곳에 정착해 사는 저희들의 느낌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혼자서 찾아온 여행길, 손님을 맞는 부부의 즐거운 모습에 울적했던 마음은 이내 사그라든다. 십수 년간 켜켜이 묵은 때마냥 쌓인 도시생활의 염증을 이곳에서 단번에 치유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든지 혼자서 느릿느릿 찾아갈 수 있는 곳을 알게 됐으니 행복의 단서 하나만은 제대로 주머니에 챙겨온 듯하다.
- 2015-07-0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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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특선-문화 읽기] 추천 연극 '3월의 눈'
- 글 김성수 문화평론가 연극은 배우들의 연기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예술이다. 하지만 현대 연극은 배우들의 몸짓 이외에도 다양한 볼거리들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탁월한 희곡은 이미 그 안에 배우들의 대사와 감정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볼 것들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배우들의 연기와 어우러질 것인지를 잘 담고 있다. 연극 ‘3월의 눈’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은 절제되어 있다. 아니, 일흔이 넘은 노부부들이기 때문에 몸도 입술도 절제를 강요당한다. 그 빈 구석을 메꾸고 있는 것은 그들과 평생을 함께 한 한옥 고택이다. 연극에서 고택 전체를 다 보여주고 있지는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무대장치에 불과한 이 세트의 기둥이 빠지고 마루가 뜯겨져 나가는 장면을 볼 때 자식을 둔 부모들의 마음은, 혹은 아버지의 주름살을 더하며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식들은 가슴이 그저 먹먹해진다. 그것은 대사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는, 그 장면 앞에서는 그 누구도 말문이 막히고 몸에 기운이 풀려 대사와 행위가 붙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 지극히 성공한 연극적 압축이다. 연극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아 갈수록 무대는 비워지고, 노부부의 말과 행동도 작아진다. 자기 손때가 묻고 서로의 숨결이 배인 집이 사라진 곳에 남겨진 노부부의 뒷모습은, 어쩌면 베어지고 남은 그루터기 같아 보인다. 하지만 3월에 내리는 눈처럼,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가.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며 움켜잡기보다 비워주는 것이 왜 이 사회에 더 필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신구, 손숙 두 노배우가 서 있는 것만으로 극장은 이미 일상이 된다. 3월 13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은 죄지은 자식들에게는 참회의 자리이며, 부모들에게, 특히 아버지들에게는 배움의 자리가 될 것이다. 일정: 2015.03.13.~ 03.29.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출연: 신구, 손숙, 김정호, 김정은, 이종무 등 제작: 국립극단
- 2015-03-0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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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UR] 담따라 향따라 한걸음 두걸음, 전주 한옥마을을 가다
- #천년 역사의 중심에 선 한옥마을 전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지 천년이 훌쩍 넘는다. 신라시대 때인 757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속에 녹아든 역사의 무게는 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지닌다. 후백제의 마지막 수도이자, 조선왕조를 꽃피운 발상지로 역사의 중심이 되어온 도시다. 그게 다가 아니다. 현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식창의도시이자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또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담고 있는 도시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전주라는 이름의 화려한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그 중심에 한옥마을이 자리한다. 700여 채의 한옥이 도심 한복판에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한옥촌이 형성된 것은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자긍심의 표출로서 지금의 한옥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전주에도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처음에는 전주성 바깥쪽 전주천변에 거주했으나, 성곽이 강제 철거되고 성 안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력을 확장하며 일본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고 만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30년을 전후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전통가옥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일본식 건물에 맞서 뜨거운 민족의식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조선왕조의 뿌리이면서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려는 저항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역사의 향기를 따라 거닐다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오목대에 오를 것을 권하고 싶다. 이곳에 올라야 한옥마을 풍경과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천천히 올라도 10분이면 충분히 오를 만큼 나지막하다. 언덕바지 중턱에 설치된 조망대에 서면 기와지붕과 처마 곡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종친들과 전승 축하잔치를 벌인 곳이다. 그 자리에서 유방이 불렀다던 대풍가를 읊어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을 넌지시 나타냈다고 한다. 훗날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오목대라 이름 붙였다. 정자 앞에는 고종황제의 친필 비석과 비각도 함께 세워져 있다. 태조께서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문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든다. 한 왕조의 막을 내리는 황제가 그 나라의 문을 열었던 선조의 머문 자리에 글귀를 새기는 심정은 어땠을까. 오목대에서 내려와 태조로를 따라 400미터 정도 가면 두 마리의 사자가 기다린다. 경기전 정문 앞에 있는 하마비(下馬碑)이다. 이곳을 지날 때는 계급의 높고 낮음과 신분의 귀천을 떠나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이곳의 하마비는 한 쌍의 사자가 판석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비를 세워놓았다. 여느 하마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왕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봉안한 곳이기에 수문장으로서 하마비의 위용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전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로 거북이 그것. 정전 중앙에 ‘丁(정)’자형으로 돌출된 배향 공간이 있다. 그 돌출된 지붕의 측면에 거북 두 마리가 붙어 있다. 경기전을 지은 목공이 화마를 피하고 조선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한 쌍의 거북을 붙여놓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 거북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거북을 찾아보는 것도 작은 재미다. 경기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본전 외에도 전주 이씨 시조 이한공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어진박물관 등이 함께 자리한다. 어진박물관에는 태조의 어진을 비롯해 세종, 영조, 정조, 고종, 순종 임금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가까이서 왕의 얼굴을 마주하는 즐거움을 누려볼 기회다. 경기전과 마주 보고 있는 전동성당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성당 중 하나다. 호남지역 서양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픈 역사도 함께 한다.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나온 장소가 여기다. 많은 천주교 신자가 참수당한 자리에,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하에서 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돌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스며들었을까. ‘한국 최초의 순교터’라는 비석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전동성당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고려 때 쌓은 성문이 우뚝 서 있다. 풍남문이다. 옛 전주부성의 남쪽 문으로 네 곳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보물이다. #맛에 반하고, 멋에 빠지다 이쯤 되면 슬슬 허기가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한국을 대표하는 맛의 고장답게 맛있는 음식이 수두룩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비롯해 콩나물국밥, 오모가리탕, 전주백반, 한정식까지 무엇을 먹어도 후회는 없다. 풍성한 음식은 물론 훈훈한 인심까지 더해져 여행자의 오감을 만족시켜준다. 오모가리는 뚝배기의 전주 사투리다. 크고 작은 오모가리에 끓여낸 매운탕이 바로 오모가리탕. 얼큰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 ‘전주막걸리집’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막걸리 주전자가 추가될 때마다 특별 안주가 코스로 따라오는 전주만의 특별한 문화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 전주 음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에서 맛보는 가장 한국적인 음식, 그 맛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다시 거닐어 보자. 오목대에서 경기전으로 이어지는 태조로를 걸어왔다면, 이제 한옥마을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은행로를 걸어볼 차례다. 수령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버티고 선 은행나무 길. 한가로이 거니는 발길 따라 맑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조그마한 실개천이 길 옆으로 흐르고 있어서다. 물길 따라 곳곳에 정자와 작은 연못, 물레방아 등이 조성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전통문화가 묻어나는 공간과 세련되게 꾸며진 공간이 오밀조밀하게 어우러져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는 다양한 전시관, 박물관, 체험관도 재미를 더한다. 한옥마을이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이와 함께 상업시설이 그만큼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게스트하우스와 음식점, 카페 등이 들어서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한옥카페에 앉아 우리 문화를 즐기는 외국인의 모습에 뿌듯한 마음도 든다. 한옥과 어우러진 커피향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다. 골목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번잡한 도심의 풍경에 익숙해져 잊 혀가던 곳. 좁은 골목 사이사이 스며든 세월의 향기가 옛 정취를 고이 간직한 채 기다린다. 반가운 마음에 돌담 너머 누군가의 살림집 마당을 염치도 없이 훔쳐보게 된다. 골목길에서 느끼는 감정은 연령대마다 다를 것이다. 골목을 가로막고 실컷 뛰놀던 시절이 있을 테고, 지친 마음으로 지나쳤을 때도 있을 테니 말이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에 마음이 즐겁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골목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조심스럽다. 행여 추억이 달아날까. 더 느린 걸음으로 남모를 향수에 젖어든다. 처마 밑으로 저녁밥 짓는 냄새가 풍겨오면 다시 오목대로 가자. 석양에 익어가는 한옥마을 풍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짙어가는 노을 아래 하루 동안 지났던 길들이 오버랩 돼 쌓여간다. 걸어온 인생의 길처럼. 천년의 향기를 품고 있는 전주한옥마을.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직도 돌아볼 곳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비둘기 집’이란 노래를 불렀던 마지막 황손을 만나러 ‘승광재’도 들러야 하고, 문학의 향기를 좇아 ‘최명희 문학관’과 ‘책방거리’도 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서두르지 말자. 하루로 모자라면 하룻밤 머물러도 좋고, 다음에 다시 찾아와도 좋다. 느린 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니까.
- 2014-12-04 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