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옛날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가다 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날보다 아팠던 상처들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딸들을 향한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며느리인 필자가 극심한 차별을 당했을 때, 또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남편. 눈앞의 억울한 현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
전직 상사와 아랫사람 사이 진흙탕싸움이 한창이다. ‘나 살고 너 죽기’이다. 상사에게 토사구팽 당하였다는 하소연부터 아랫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까지 다양하다. 상사가 다 부려먹은 아랫사람을 자르는 것을 토사구팽이라면 아랫사람이 상사와 등을 돌리는 것은 배신이다. 언뜻 달라 보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부산물이다. 추적자와 도망자가 뒤엉켰다.
필자는 어릴 때 한옥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대문 앞에 있던 한 그루 대추나무 때문에 대추나무집이라 불렸던 아현동 집과 반듯한 서까래가 아름다웠던 돈암동 집 등 한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늘 넘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북촌 탐방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차분한 날씨. 이런 날은 여행이나 산책하기에
영하 15℃의 강한 한파가 몰려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던 어느 겨울날 저녁, 대학로로 연극 한 편을 보러 갔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꽃할배로 유명한 이순재, 신구 선생이 더블 캐스팅된 작품이다.
필자가 보러 간 날은 신구 선생이 열연을 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호통을 치는 광고로 매력을 발산하던 신구 선생. 고집불통
택시기사와 70대 할아버지가 언성을 높이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요금시비인가 하고 가만히 들어보니 처음 보는 신기한 싸움이었다. 싸움의 발단은 이렇다. 아침 동이 틀 무렵 교통신호등이 있는 길 옆에서 택시기사가 새벽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하는 시간을 이용해 자동차 백미러의 성에를 닦았다. 그리고 백미러를 닦아 시커매진 휴지를 길바닥에 버렸다. 그 뒤
‘앞으로 10년만 엄마의 상태가 지금처럼 유지되도록 도와주세요.’ 2007년 겨울 엄마의 치매 판정이 내려진 날, 하윤재(河侖材·47) 감독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당시 일흔이 넘은 노모에게 10년은 막연히 긴 시간이라 여겼다. 그러나 만 10년이 지난 현재, 절망으로 휩싸였던 그날의 기억이 무색하리만큼 모녀는 여전히 인생의 희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노래하는 시인 김광석! 마침내 그를 만났다. 지난 해 11월 25일 대구 김광석 거리에서였다. 그는 시인이다. 노랫말이 아름다우면서도 곡은 애잔하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
5년 전이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던 필자가 우니까 아들이 필자를 안고서 등을 토닥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