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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마을 관악 사랑] 참 아름다운
- 서울 관악구민이 된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젊은이가 많이 살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아파트에서 산다. 은퇴 후 시간 여유를 이용하여 이 골목 저 거리 삶 길을 찾아 정을 쌓고 있다. 앞으로 재미있게 살아갈 관악사랑 이야기를 펼친다. 관악산이 포근히 감싸는 천혜의 자연을 자랑한다. 관악산은 송악·감악·운악·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관악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연주대(629m) 정상에는 암자가 제비집처럼 앙증맞게 추녀 끝에 매달려 있다. 서울대 입구, 사당과 과천은 등산객으로 날마다 붐빈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에서는 물놀이장이 열려 어른과 아이들의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언제든지 산책하기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다. 서울에서 제일 공기 좋은 곳이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전원을 찾아 멀리 떠나야 할 이유가 없다. 정문을 나서면 바로 관악산 가는 능선이다. 교육환경이 최고로 좋다. 집주위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고,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덕분에 아들과 딸은 전학 한번 없이 교육을 마쳤다. 결혼 후에는 가까운데서 살고 있다. 오순도순 정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올해 쌍둥이 손주가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들과 손주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교 부자동문’이 되었다. 앞으로 30년 관악에서 더 재미있게 살아야할 이유가 생겼다. 손주를 정성껏 돌보자. 올바른 시민으로 기르는 인성교육 첫걸음이다. 오순도순 분위 좋은 전원마을이다. 관악에는 구청, 평생학습관 등에서 열리는 사회교육이 활발하고, 도서관 운영은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청운의 꿈을 불태우는 젊은이가 많아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늦었던 사회개발도 경전철 등 발전에 불을 댕기고 있다. 또한 골목길, 고갯길, 사이길 등 도시화가 덜 된 ‘시골길’이 많다. 정이 넘쳐 활기 찬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인적이 뜸해 정을 그리워하는 고갯길도 있다. 도심 같지 않는 포근한 사이길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주민 간 통행 문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으나 이곳은 오히려 이웃과 상생하는 정이 넘치는 곳이다. 인적이 드문 고갯길에는 벽화 그리기 등 도시미화와 도심 속 산골 체험마을로 특성화해 발전시키고 있다. 아담한 사잇길은 전혀 도심 속 같지 않는 곳이며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골 이웃마을 다니듯 어르신이나 아이들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는 도심 속 아담한 정원이다. 30여 년 정을 나눈 따뜻한 이웃이 있다. 아담한 동네 약국은 언제라도 문을 열 수 있어서 ‘연휴 중 당직’ 같은 요란스러운 제도가 필요 없는 곳이다. 마을 주민이 안심하고 찾는 곳이다. 단지 내 인테리어 업체는 만물을 수리하는 곳이다. “불러만 주세요, 언제나 달려갑니다!” 500 세대 ‘안전 지킴이’다. 주민이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도록 한 고마운 곳이다. 부동산 중개사무소는 어려운 시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안 좋을 때일수록 더 열심히 일해야지요!”
- 2016-07-0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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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잡다
-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 2016-07-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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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여자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 한국 여자배구 조혜정
- 지난 5월 22일 도쿄(東京)에서 막을 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배구 세계 예선전에서 한국은 4승 3패로 올림픽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순위는 출전 8개국 가운데 4위였지만 앙숙 일본을 3-1로 이긴 데다 올림픽 출전이 확정된 뒤 열린 경기 패배를 빼면 순위가 더 올라갈 수 있었기에 스포츠 팬들은 23일 개선한 김연경 등 선수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이때 이후 “한국 여자 배구가 40년 만에 다시 올림픽 메달에 도전한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기사들에는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관련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여자 배구 관련 검색어 수준이었다. 잠시 4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본다. 1976년 한국 스포츠의 최대 관심사는 7월 17일부터 8월 1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여름철 올림픽이었다. 4년 전 제20회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북한이 사격에서 금메달 1개, 복싱에서 은메달 1개, 여자 배구 등에서 동메달 3개를 딴 반면 한국은 은메달 1개(유도 재일동포 오승립)에 그쳤다. 충격이었다. 한국으로서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 무렵 올림픽 등 국제종합경기대회 선수단 구성 원칙은 ‘소수 정예’였다. 나라의 경제력 때문에 메달을 딸 수 있는 종목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성된 한국 선수단은 임원 22명과 선수 50명으로 뮌헨 대회를 약간 웃도는 규모였다. 출전 종목은 남녀 배구와 레슬링, 유도, 복싱, 사격이었다. 사격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의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1970년대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김택수 대한체육회 회장의 ‘선(先) 체력 후(後) 기술’ 방침은 시대 상황으로 보아 당위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소의 진통도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불과 두 달여 앞둔 4월 25일 여자 배구 대표팀 주 공격수 박인실이 선수촌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무렵 대한배구협회를 맡은 이낙선 회장은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발전 기금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이 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은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여자 배구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 여자 배구는 동메달의 값진 성과를 거뒀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신세대 스포츠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조혜정과 이순복, 유경화,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조혜정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혜정은 숭의여고를 졸업해 서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스포츠 팬들이 적지 않은데 부산이 고향이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 선수로 뽑혔다. 그렇지만 부산여중을 졸업한 뒤 키가 작다는 이유로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등 설움을 받게 된다. 운동선수들 가운데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있는데 이럴 때 대부분의 선수가 하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중학교) 때 키가 지금 키다.” 그리곤 예외 없이 웃는다. 어렵사리 진학한 숭의여고 졸업을 앞두고 또 키 얘기가 나왔다. “저렇게 작은 애는 실업에서 못 써먹어.” 어렵사리 국세청에 입단했고 전국대회에서 보란 듯이 MVP로 뽑혔다. 아마추어 시절 실업 배구는 국내 최고 무대였다. 그런데 국가대표 선수 선발에서 몇 차례 탈락했다. 이번에는 “키가 작아. 국내용이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일반 여성으로도 크지 않은 키인 163cm의 조혜정이 어떻게 올림픽 동메달 국가의 주 공격수로 활약할 수 있었을까. 선수 시절 그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올드 팬이라면 남자 선수 못지않은 점프력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달려오면서 시도하는 점프의 높이가 60cm나 됐다. 점프력으로 170cm대 공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올림픽 동메달에 가려 있지만 조혜정은 1974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3위로 이끌었다. 2016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성적이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67년 대회에서도 3위를 했으나 이 대회에는 여자 배구 강국인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나라들이 몽땅 빠진 ‘반쪽 대회’였다. 1973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1회 여자 배구 월드컵에서는 MVP로 선정됐다. 한국은 페루를 3-0으로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동메달 나라에서 MVP가 나온 것이다. 그의 뛰어난 경기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혜정은 몬트리올 올림픽 이듬해인 1977년 이른 나이에 국내에서 은퇴한 뒤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테니스의 이덕희 등 여자 운동선수의 외국 진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인 시절이었다. 여자 배구 선수로서는 외국 진출 1호로 리우 올림픽 세계 예선에서 맹활약한 김연경(터키 리그)의 대선배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현대건설 여자 배구단 코치 등 지도자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특별한 내용이 있다. 35세 적지 않은 나이에 수원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야구 팬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조창수 전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스 감독대행과 결혼한 뒤였다. 체육 이론을 공부하고 싶었단다. 이런 그의 적극적인 자세는 2010년 GS칼텍스 여자 프로 배구단 사령탑 선임의 배경이 됐다.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여성 감독이라는 특별한 기록이 그의 이력에 추가됐다. 조혜정은 부부 스포츠 커플에 두 딸 윤희와 윤지가 프로골퍼이니 이만한 스포츠 가족을 찾기도 어렵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7-0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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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 2016-06-2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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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리인하가 오히려 노인의 주머니를 닫게 한다.
-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25%로 인하했다. 부진한 경제성장률과 취약업종 구조조정에 따른 경기 둔화를 우려해 선제로 금리 인하 카드를 빼 들었다고 언론에서 발표했다. 금리를 인하하면 뭉칫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몰리면서 경기가 되살아나고, 돈들이 공장을 돌리고 데 사용되며, 가계는 소비를 늘려 돈이 제대로 돌아 ‘돈맥 경화’가 해소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덧붙였다. 필자도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금리 인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1220조에 달하는 가계부채 확대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고도 한다. 금리가 낮아지면 또다시 집주인들은 월세로 전환하거나 전세금을 올린다. 집 없는 서민은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거나 외곽지역으로 내몰려야 한다, 금리는 낮아졌으나 전세금을 올리면 대출을 그만큼 더 받아야 하므로 나가는 이자는 같아진다. 은퇴하고 은행 이자로 생활해오던 나이 많은 시니어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진다. 필자의 경우 퇴직금을 고스란히 은행에 정기예금을 해 뒀다. 수익형 부동산을 사서 운영해보라거나 펀드나 주식에 투자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나이 들어 재산을 불리기보다 지키는 것이 최고라는 어느 전문가의 말을 따랐다. 마음 편히 적게 벌고 적게 쓰겠다는 생각에 은행만 고집했다. 그러나 은행 금리가 계속 곤두박질하더니 이제는 처음 받던 이자에 비하면 반 토막이 되었다. 1억 원을 넣어도 월 20만 원이 못 된다. 그나마 이제 이 금액도 ‘아! 옛날이여’가 되었고 더 줄어들게 생겼다. 지금은 저축의 시대가 아니고 투자의 시대라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날고 긴다는 투자 전문가들도 뾰족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베테랑이 운영하는 증권회사 펀드도 수익을 못 내는 종목이 수두룩하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이익금을 현금보유로 쌓아놓고만 있지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 기업이 쌓아놓은 돈을 쓰도록 세금을 물리겠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투자가 두렵고 겁나는 시대다. 이런 판에 경험 없는 노인들이 투자할 곳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사람의 심리가 수명이 길어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면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소비를 늘리고 저축을 줄이기 어렵다. 금리 인하정책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 의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줄어드는 이자 수입만큼 소비를 줄이려고 한다. 가진 목돈을 헐어서 쓰기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을 감수한다. 이익을 못 내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 전망이 어둡고 망해야 할 기업을 우물쭈물 이자를 낮춰 계속 살려서 끌고 가면 지금 호미로 막을 일을 나중 가래로 막아야 한다. 오래되어 열매를 제대로 못 맺는 과일나무는 베어내고 새로운 묘목을 심어야 한다. 과거 전성기 때의 과일 수확만 생각하면 바보다. 노인들이 돈을 움켜만 있지 말고 쓸 수 있도록 노후복지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 월 300만 원을 훌쩍 넘는 고급 요양원보다 더욱 저렴한 공공 요양원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금리 인하로 불안해하는 노인들이 돈을 쓰도록 믿음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줘야 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의 주된 원인이 가난이다. 독거노인의 45%가 극 빈곤층이다. 노인이 한번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자력으로 올라가기 어렵다. 극빈층으로 떨어지기 전에 막아 줘야 하는데 안전판이 너무 미약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야 도와주는 지금의 사회안전망은 비효율적이다. 금리 인하가 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검토라도 해보길 희망한다.
- 2016-06-1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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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라이프] ‘행복한 실버’ 진짜로 필요한 건 ‘취미생활’
- 10년 전쯤 동문회 송년회에서 대선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제학 교수님으로 장관급 고위직까지 지내고, 70대 중반에 본인 말로 ‘백수’ 생활을 하는 분이었지요. “65세에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고, 석좌교수 예우를 받으며 70세까지 일하다 몇 년 전 은퇴를 했다. 평생 교단에서 ‘노동은 고통(PAIN)’ 이라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사실이라 믿고 가르쳐왔는데, 최근에서야 노동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없고 외롭다. 현재 일하고 있는 후배들! 가능한 한 오래 버텨라! 직장에서 나오는 순간 행복과도 이별이다.” 평생 일의 노예처럼 살아온 분들의 노후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몇 분의 말씀 후에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대선배님 말씀에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평생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지만, 돈과 일만으로 인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일은 중요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이해관계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관계와 취미를 가꾸는 노력도 긴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야생화를 촬영하는 취미를 가지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가족 같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겨도 ‘뷰 파인더’ 속에서 야생화를 들여다보는 순간 행복감에 도취하게 됩니다. 저는 은퇴를 해도 야생화와 카메라와 그 친구들이 있기에 삶이 무료하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 것 같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면 취미란 ‘인간이 금전적 목적이 아닌 기쁨을 얻는 활동’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대우증권이 2014년 말에 50세 이상의 주요고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시니어 노후 대비 실태보고서’ 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들에게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평생 동안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갖지 못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또 미국의 금융전문가인 웨스 모스는 46개 주에서, 1400명의 은퇴자를 대상으로 ‘행복한 은퇴생활의 조건’을 조사하여 “행복한 은퇴자는 3~4개 정도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취미가 없는 인생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향기가 없는 꽃에는 꽃과 나비가 꼬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인생은 무료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나이 들어 새롭게 시작한 취미활동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삶의 향기를 전해 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진을 통해 만나게 된 류신우 토목기술사(1943년 생)는 은퇴한 이후, 2003년부터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잡았는데, 이제는 토목 전공이 아니라 사진 전공이라고 할 정도로 사진촬영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틈틈이 지난 10여 년간 찍어온 사진파일들을 정리하여 국제사진예술연맹(FIAP)이 인증하는 국제사진공모전에 출품하고 있습니다. FIAP는 유네스코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NGO기관으로 승인한 예술단체인데, 그는 지난해 8월 이후 지금까지 국제사진 공모전에서 293점의 작품이 수상 혹은 입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국제사진예술연맹의 사진작가 칭호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앞으로 소정의 기간이 경과하면 류신우씨는 우리나라에서 FIAP가 인정하는 사진작가 제1호가 될 전망입니다. 그는 “일을 할 때는 늘 사람과의 경쟁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지내 왔는데, 사진은 경쟁 상대가 없어서 좋았다.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만나 렌즈로 들여다보면서 피사체와 나 사이에 서로 감정이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커다란 희열을 맛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몸이 아파도 카메라만 들면 힘이 저절로 솟구친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취미는 인생의 오아시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척박한 사막에 도전하는 것은 그 속 어디엔가 오아시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취미는 사막보다 더 외롭고 혹독할 수 있는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취미는 사람을 살리는 취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을 통해 알게 된 H 회장(1946년 생)은 비교적 규모 있는 중견 건설기업을 운영하던 중, 국제금융위기 여파로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도 위기에 몰리자, 자기가 사는 집까지 포함, 100억원에 가까운 사재를 몽땅 털어서 회사를 정리하고, 전 가족이 수년간 월셋집을 전전한 양심적인 기업인이었는데, 부도 이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송파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만난 초췌한 모습의 그와 소주 몇 병을 비우면서 위로를 한답시고 한 말이 “사진을 배워라. 사진에 심취하게 되면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이 흐른 지난해 11월 경, 그로부터 SNS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허리를 다쳐서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있다면서, 자신은 수년 전 사진을 배웠고, 이제는 사진이 가장 소중한 인생의 반려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만난 그는 사진을 시작한 이후로,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장터가 생각나 전국의 오일장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테마로 사진을 찍고 다닌다며, 최근에는 6개월 코스의 사진스쿨에도 등록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때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사진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엄중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사진이 나를 살렸다.”고 얘기하더군요. 가끔 SNS를 통해 대하게 되는 그의 작품들 속에는 고달픈 삶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절절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 역시 사진이라는 취미활동을 통해 은퇴 이후의 삶을 재미있고, 윤택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2003년부터 야생화 사진촬영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재미있는 골프마저도 끊어 버리고, 역시 사진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주말이면 짐을 싸 들고, 카메라 메고, 차를 몰고 꽃을 찾아 전국의 강산을 헤매고 다니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아내가 야생화 대신 새를 찍기 시작해 요즈음은 함께 다니는 빈도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60 중반을 넘어서 주변으로부터 “사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는 얘기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부공동의 취미생활을 통해 얻게 된 소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야생화 촬영을 통해서 얻게 된 또 한 가지는 꽃과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떠난 만남이었습니다. 2005년 봄, ‘들꽃마을’ 이라는 야생화 사진 동호회를 통해 맺어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족 이상으로 끈끈한 정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과 이런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제게는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란 책(부제 : 날마다 즐거운 생활)을 펴낸 고민숙 작가는 “취미는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은 듯 즐길 수 있었던 일상의 재미난 놀이” 라고 정의하고, “취미의 발견이란, 나를 발견하고, 주위를 발견하고, 일상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시니어 세대의 많은 분들이 스스로 취미를 발견하고, 그 취미 생활을 통해 누군가에게 새로운 ‘취미 발견’의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다면 그 시니어라이프야말로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저는 손자들이 야생화를 바라보며 그 강인한 생명력을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사진이라는 취미를 통해 어려서부터 스스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기회 있을 때마다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현우와 승우에게도 사진찍기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 글 조용경(趙庸耿)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6-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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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도사 되는 법] 핸드폰 기피증 변천사
- 핸드폰이 새로 나왔을 때 지금의 세련된 감각으로 본다면 그건 분명 ‘무전기’라고 부를 만했다. 크기가 좀 얇은 벽돌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용시간이 아주 짧아서 4시간 정도면 다시 충전해야 했다. 온갖 단점밖에 없었지만 핸드폰은 일단 부의 상징이었다. 기기 하나 가격이 유선전화 값의 몇 배에 달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울러 이것을 갖고 있으면 세련되고, 뭔가 중요한 일을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비췄다. 핸드폰을 갖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경이로움 때문이다. 마치 처음 전기 불을 보는 기분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리고 “삐삐”가 나왔다. 유행처럼 남자들은 허리춤에, 여자들은 손에 들고 호출에 남겨진 전화번호를 보며 유선 전화통에 매달리곤 했다. 필자는 하지만 두 물건 모두 기피했다. 핸드폰이 꽤 맵시 있게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도 없이 울려대며 따지듯 퍼부어대는 통화에 경기를 일으키며 적응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일하는 사람이 주위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라는 압력의 수위가 인내의 한도를 넘어서도 필자는 오로지 버티기로 일관했다. 필자의 다음 고민거리는 핸드폰의 뒤를 이어 등장한 스마트폰. ‘세계와 소통하는 시대에 그 무진장한 기능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유론과 ”그거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다’는 반대론이 마음에서 왔다갔다했지만 결국 몇 개월도 안돼 소유하기로 했다. 스마트폰 소유는 결정했으나 배우는 건 지난한 과정이었다. 자식이들에게 SOS를 쳤지만 몇 시간 가르쳐주더니 ‘답답해서 못 가르친다. 컴퓨터가 익숙하지 않으면 더 하기 힘들다”고 두 손 드는 것 아닌가. 필자도 자식들에게 핏대 오르는 경우가 많아 더 하다가는 사이만 틀러지겠다 싶어 결국 독학을 시작했다. 독학으로 공부하자 오히려 맘 편해 학습 효과가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하루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계속 들여다 보느라 몸이 피곤했지만.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유선전화 처럼 익숙해졌다. 필자가 이런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스마트폰을 배우다 보니 우리 같이 나이든 사람에게 가르치려면 같은 노인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퇴 후 일거리를 찾는 분들을 조직해 연구회를 만들고 함께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배우면서 겪었던 문제점들을 모아 커리큘럼도 만들었다. 커리큘럼에 따른 교안을 제작하고 서로 강의를 시연한 뒤 촬영해 문제점도 알려주고 있다. 현재 강사는 모두 10명인데 인턴 과정을 거쳐 강의 교안 작성과 시연에 통과해야만 연구소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하고 있다. 필자는 요즘도 새 스마트폰이 나오면 반드시 연구한다. 스마트폰이 진화하고 있어 프로그램이 업그레이드 될 때마다 따라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강의실에서 나이 많은 학생들에게 최고의 존칭을 받는다. 때때로 아주 황공한 기분이 들어 그만하시라는 말을 한다. 알고 나면 정말 별거 아닌데도 대단하다고 하시니 쑥스럽기 마련이다.
- 2016-05-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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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다이아몬드의 살아 있는 전설 김영덕
- 1982년 출범한 국내 프로 야구 KBO 리그 35번째 시즌이 지난 4월 1일 시작했다. MBC 청룡과 삼미 슈퍼스타즈 같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구단을 비롯해 6개 팀으로 닻을 올린 KBO 리그는 올 시즌 10개 구단으로 두 번째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와 고척스카이돔이 새롭게 문을 열면서 올해 프로 야구 관중은 800만 명을 바라본다. KBO 리그는 머지않은 장래에 1000만 관중 시대가 열릴 수도 있는 가파른 인기 상승세를 타고 있다. 1군 진입 4년째인 NC 다이노스가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힐 만큼 KBO 리그는 변화무쌍한 판도를 보이고 있다. 야구 팬들로서는 흥미진진한 판세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팀당 144경기, 리그 720경기의 장기 레이스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누구도 자신 있게 내다볼 수 없다.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삼성라이온즈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 황규봉과 이선희, 이만수 등 가장 많은 아마추어 국가 대표 출신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 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과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원년 우승은 많은 전문가들이 중하위권 즉 4위 정도로 예상한 OB 베어스가 차지했다. 미국 프로 야구 마이너리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철순의 투구력을 간과한 측면도 있지만 프로 야구 시즌 예상은 많은 변수를 안고 있기에 족집게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프로 야구 원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끈 김영덕이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김영덕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에서 감독으로 활동했기에 어지간한 야구 팬이라면,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도 알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선수로서의 활약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최근 경기도 분당에서 여든을 막 넘긴 나이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老) 감독을 만났다. “교토에 있는 부모님에게 1, 2년만 (한국에서 야구를)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난 게 반세기가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노 감독의 얼굴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연을 맺은 70여 년의 야구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德)에서 김영덕(金永德)으로 바뀌었다. 가네히코는 본관인 경남 언양(彦陽)에서 따온 성이고 그의 부모는 경남 합천이 고향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가 듣고 배운 우리말은 경상도 사투리였다. 28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 왔을 때 땅 설고 물 설은 환경은 둘째 치고 서울 말씨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대 거의 모든 일본의 야구 소년들이 그랬듯이 김영덕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동네 야구 를 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체격도 좋았고 형이 유도 선수로 명문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할 정도였으니 집안 내력으로 운동신경도 좋았던 김영덕은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즈시가이세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난카이(南海)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에 입단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고졸 신인의 길을 택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맏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보냈다. 3년간의 2군 생활 끝에 1959년 1군에 올라간 투수 김영덕은 그해 6승6패 평균자책점 3.09의 수준급 성적을 올렸다. 이후 한국행을 결정하기 직전인 1963년까지 4시즌 동안 7승9패 평균자책점 3.57의 기록을 남겼다. 청·장년 야구 팬들과 달리 글쓴이에게 김영덕은 감독보다는 선수로 더 익숙하다. 까까머리 청소년 때,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키 큰 투수 김영덕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 방문 경기를 한 뒤 1960년 귀국해 성공적으로 한국 실업 야구(교통부→기업은행)에 적응한 김성근을 보고 김영덕은 큰 용기를 얻었다. 한국 진출을 결심할 무렵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즈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인천이 대한해운공사를 소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인이 제일은행도 소개했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대한해운공사에 입단한 김영덕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야구 올드 팬들은 스리쿼터 투구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는 김영덕을 기억할 것이다. 1964년 시즌 실업 야구는 13개 팀이나 됐다. 전해까지 있었던 춘·추계 리그를 없애고 1~4차 리그로 시즌을 운용해 팀당 48경기, 전체 312경기였으니 1982년 팀당 80경기, 전체 240경기를 치른 프로 야구 원년 시즌보다 전체 경기 수가 많았다. 서울운동장과 육군 야구장(용산), 상업은행 야구장(수유리), 인천 야구장, 대구 야구장 등 전국 5군데 구장에서 5월 11일 개막해 10월 18일까지 107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니 사실상 프로 리그였다. 김영덕은 그해 33경기에 등판해 255이닝을 던져 9자책점만으로 0.32라는 믿을 수 없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이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렇게 잘 던졌는데도 그해 다승왕은 김영덕이 아니었다. 24승5패의 신용균이 1위에 올랐고 20승4패의 백수웅, 20승5패의 김성근에 이어 김영덕은 18승5패로 다승 4위였다. 백수웅을 빼고 모두 재일동포였다. 재일동포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외국인인 이들이 국내 야구 마운드를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1980년대 초, 중반 ‘빨간 여권’(일본 여권의 표지가 빨간색이어서 나온 말)을 들고 활약한 김일융, 송일수(이상 삼성라이온즈), 장명부, 이영구(삼미슈퍼스타즈),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타이거즈) 등 재일동포 2세대의 선배 격이다. 그런데 1964년 실업 야구에서 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재일동포인 배수찬이 타율 3할3푼6리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한 가운데 김영덕은 3할로 6위에 올랐고 진원주가 6개로 1위를 차지한 홈런 부문에서는 4개로 재일동포인 김금현과 공동 2위를 기록했다. 1950~60년대 홈런왕 박현식은 3개로 4위였다. 출루율은 4할7푼6리로 3위에 랭크됐다. 김영덕은 요즘 일본 리그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를 뛰어넘는 투타 겸업 선수였다. 그해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두 차례 퍼펙트게임이 펼쳐지는데 9월 23일 고순선이 철도청과의 경기에서, 9월 25일 김영덕이 조흥은행과의 경기에서 각각 대기록을 세웠다. 김영덕은 이후 크라운맥주, 한일은행에서 1969년까지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 간다. 1967년 시즌에는 팀이 치른 32경기 가운데 무려 25경기에 등판해 17승1패, 승률 9할9푼4리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그해 54이닝 연속 무실점에 10연승 기록도 세웠고 평균자책점은 0.49였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0점대 평균자책점은 선동열이 3차례(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9) 기록했는데 앞으로 0점대 평균자책점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70년 시즌 실업 야구 2차 리그가 끝나고 강대중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영덕은 곧바로 그해 우승 감독이 됐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차 리그에서 5개국 가운데 4위로 밀린 한국을 2차 리그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역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때 받은 체육훈장 청룡장은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1971년 김응룡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 주고 창구 업무를 보게 된 김영덕은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고국에 온 이후 두 번째로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1977년 장충고등학교 감독으로 야구계로 돌아온 김영덕은 이후 천안 북일고등학교 감독(1977~1981년)을 거쳐 1982년 프로 야구 OB베어스 초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호 우승 감독의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삼성라이온즈 감독(1984~1986년)과 빙그레이글스 감독(1988~1993년)을 지낸 뒤 LG트윈스 2군 감독(1997~199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환갑을 조금 넘어서였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노 감독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면서 재 보았더니 키가 3cm 줄었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최근 건강이 조금 좋지 않지만 매일 50분 정도 걷기를 하면서 많이 회복됐다고 했다. 고국이긴 하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 땅에서 반세기를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의 곁에는 해운공사 시절 팀 동료 성기영 전 롯데자이언츠 감독의 소개로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김해영이 늘 함께했고 이제는 성규 성연 성란 1남 2녀가 낳은 친손주 2명과 외손주 2명이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 한국 야구의 ‘경계인’ 재일동포선수들 재일동포.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핏줄을 일컫는,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에서 듣거나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저리다.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1983년 프로 야구 개인상 시상대에 선 장명부(2005년 작고)와 김무종이 떠오르곤 한다. 그해 10월 21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MBC 청룡을 8-1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V10의 첫발을 내디뎠다. 장명부는 시즌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뽑혀 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선발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현역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이었던 두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한국에서는 ‘반(半) 쪽발이’로 불리며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부터 24년 전인 1959년 8월,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4회 재일동포학생선수단의 일원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OB베어스 코치로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했다. 그리고 2007년 6월 28일 SK와이번스 감독으로 문학구장에서 롯데자이언츠를 10-2로 물리치고 국내 프로 야구 두 번째로 900승 사령탑이 됐다. 그해와 2008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50여 년 동안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한화이글스 김성근 감독이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5-1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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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전원생활 도시서 즐기기
- 친구들과 오르는 경기 동두천 마차산은 온통 연두색 파스텔화다. 정상에서 태풍급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무 향기 가득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세먼지까지 말끔히 씻어낸 쾌적한 ‘전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은퇴 후 편리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원에서 살다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사이에 도회지로 되돌아온 이웃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전원과 현실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고독감, 교통 여건과 편의·의료 시설 부족이 큰 문제”라고 역 귀향 사연을 말했다. 장래를 생각해 전원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시니어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도시에서 전원처럼 쾌적하게 생활할 방법을 찾자. 첫째,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유’보다 편리한 ‘이용’이 대안이다. 사실 시니어가 부동산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 투자비용, 관리비, 제세 공과금 등 ‘소유비용’이면, 마음에 드는 전원을 찾아 즐기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서해안 명승지에 전세 들어, 바다낚시와 조개잡이로 얼굴을 검게 그을리면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2년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깊은 산골로 갈 예정이라고 자랑했다. 일부 명승지에서는 월 단위 임대사업도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동호인끼리 한 주일씩 교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멀리 다니기 어려우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자. 관악에서 정들어 산 지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사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전원마을‘ 이다. 집 앞과 뒤, 옆으로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다. 아이들은 전학 한 번 안 하고 학교를 마쳤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 물놀이장은 어른·아이들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누구나 산책하기도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쾌적한 전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주 배낭 메고 친구들과 찾는 북한·도봉·청계산은 우리 차지다. 전원생활! 바로 내 앞에 있다.
- 2016-05-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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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6월은 장애인댄스스포츠 경기대회 시작하는 달
-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 2016-05-10 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