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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특집] ‘추석 명절병’ 이렇게 이기세요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윗날만 같아라”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추석은 모든 것이 풍족한 날이다. 그러나 이 즐거운 명절은 생각보다 건강에 많은 악영향을 미치기 쉬운 시기다. 생활습관이나 식습관이 평소와 달라지기도 하고, 평소에 하지 않는 무리한 자세나 행동도 문제다. 무엇보다 그리 달갑지 않은 그 누군가와의 조우도 질환의 원인이 된다. 생각보다 어려운 명절나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각 분야 전문의의 조언을 들어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가장 대표적인 명절 질환은 바로 가족이나 친척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다. 이런 지인들과의 스트레스는 일종의 대인공포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평소에 고부간이나 동서 간, 시누이와 올케 간 등 갈등이 발생하기 쉬운 관계를 평소에 돈독하게 해 놓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런 증상은 명절만 피하고 나면 좋아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명절이 지나도 앙금은 남게 마련. 이런 앙금들이 쌓이면 되레 큰 감정의 폭발을 부를 수 있으므로 미리미리 해소하는 것이 좋다. 가천대 길병원 가정의학과 고기동 교수는 가족 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남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가족 간 문제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들어선 안 되죠. 양쪽을 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양쪽의 입장을 조율하는 중간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나머지 가족들은 특정 구성원에게 집안일이 몰리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남자와 여자의 차이, 가족 간의 서열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서로 감정만 상하게 만들 뿐이죠.” 기름진 식사 계속되면 담석증 주의해야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고생하며 차린 음식이지만 무작정 폭식하다간 되레 화를 부를 수 있다. 추석에는 송편이나 떡, 갈비찜, 각종 부침 등 기름지고 열량과 콜레스테롤이 높은 음식들을 먹게 된다. 이런 요리들을 과식하면 배탈이나 복통, 설사 같은 소화기 증상에 시달릴 수 있다. 만약 위쪽 배 또는 명치 부위에 통증이 있거나 더부룩한 느낌이 자주 든다면 담석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특히 밀가루 음식이나 고기를 먹은 후 소화가 잘 안 된다면 담석증일 가능성이 높다. 담즙 속 염분과 콜레스테롤 양이 변하면서 담낭의 운동성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담석증은 대개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에 따라 우상 복부의 통증이나 소화불량, 황달, 발열 등이 나타난다. 위경련, 급체 등 위장장애와 혼동할 수 있으므로 초음파나 CT를 통해 담석증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담석증은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급성담낭염이나 담낭이 터지는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치료해야 한다. 최근에는 수술 상처를 최소화하는 ‘단일공복강경 수술’이 대표적인 치료법으로 선호된다. 민상진 메디힐 병원장은 “추석 때 과식을 하거나 배탈이 나면 위장이 예민해져 복부질환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이 많더라도 평소의 식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만 연휴 이후에도 복통과 구토 등의 증상이 자주 발생한다면 허투루 넘기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안 하던 집안일 몰리면 관절과 힘줄에 무리 명절이 되면 유난히 날라야 하는 짐들이 많다. 평소에 충분한 운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거운 물건을 급하게 들다가는 순간적으로 힘이 가해져 급성요통이 생기거나 척추분리증 등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 척추분리증은 뼈마디를 연결하는 부위에 결손이 생겨 서로 분리되는 질환이다. 척추분리증은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허리 근육을 강화해서 척추뼈를 제대로 잡아 주면 굳이 수술로 뼈를 붙이지 않아도 평생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치료 없이 방치하다간 합병증을 불러올 수 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집안일이 늘어 어깨와 손목, 팔꿈치 등에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명절 질환이다. 보통은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뼈나 관절, 근육의 이상이라고 여기는데, 사실은 힘줄염으로 인한 급성 통증인 경우가 많다. 힘줄염은 손목이나, 팔꿈치, 어깨 등 힘줄에 염증이 생기는 증상으로 발생 부위가 관절과 가까워 관절 질환과 혼동하기 쉽다. 부평힘찬병원 김태호 원장은 “근육이 수축하면 힘줄을 통해서 뼈로 힘이 전달되고 관절 운동이 이루어지는데, 명절에 지나친 가사노동으로 인해 반복적인 힘이 가해져 근육이 계속 긴장돼 힘줄을 다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주부들이 명절에 흔히 걸리는 병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성묘 때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가을철에 흔한 질환인 유행성 출혈열과 쯔쯔가무시병 등을 조심해야 한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선 잔디에 눕지 않고, 긴소매 옷을 입고 산에 가는 것이 좋다. 농사를 도울 때도 맨발로 논물 속에 들어가지 말고 장화를 신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 모처럼 농촌을 방문했다가 벌에 쏘이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나무나 땅속의 벌집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고 벌에 쏘인 경우 전신이 붓거나 호흡곤란 등의 증세가 있으면 즉시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밤이나 감을 따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추락하는 낙상사고도 명절에 빈번한 사고 중 하나다. 여성들의 고질병 수족냉증 명절이 되면 여성들은 앉은 자세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전을 부치는 것도, 수다를 떠는 것도 바닥에서 이뤄진다. 게다가 그 바닥이 차갑다면 상황은 더 좋지 않다. 명절의 이런 환경으로 혈액순환은 힘들어지고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해 손발이 차가워져 수족냉증이 야기되기도 한다. 특히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수족냉증의 증상은 주기적 또는 지속적으로 두통이나 현기증, 수족의 떨림이 나타나고, 정신적으로는 흥분하기 쉽고, 권태감, 긴장감, 압박감 등이 나타난다. 강남자생한방병원 이상운 원장은 손과 발이 냉하고 따뜻해도 곧 차지는 것을 한방에서는 복부나 허리의 오랜 냉기가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수족이 냉해지는 경우는 당귀나 천궁뿌리 말린 것, 혹은 유자를 넣은 물에 목욕을 하면 혈액순환을 높여 냉증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마른 쑥이나 무 잎을 끓인 목욕법도 냉증을 해소하는 데 효과적이에요. 다만 물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은 38~40도 정도가 적당하고, 자주 목욕하기 힘들면 손발을 매일 뜨거운 물에 담가 기혈의 순환을 원활히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부러진 치아는 우유에 보관 명절에는 아무래도 육류나 견과류의 섭취가 많다보니 자칫 치아가 부러지거나 빠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평소라면 가까운 병원을 바로 찾으면 되지만, 온 국민이 쉬는 추석인데 문을 연 치과를 찾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이럴 때 부러지거나 빠진 치아는 물에 씻으면 안 되며, 생리식염수나 차가운 우유 등에 담가 가는 것이 좋다. 우유의 칼슘 성분은 치아 표면의 부식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생리식염수가 없다면 젖은 수건으로 치아를 감싸 습기를 유지하는 것이 좋고, 빠진 치아를 혀 밑에 넣고 신속하게 치과를 방문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뉴페이스치과병원 정명호 원장은 “치아가 부러졌을 경우에는 당황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치과를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치아가 부러진 후 치료까지 소요되는 시간에 따라 신경, 턱관절에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신속한 치료가 중요합니다”라고 설명했다. 만약 상태가 심각하다면 응급실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보통 치과는 응급실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각 치과대학에선 치과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 명절에 주변에 문 연 약국을 찾고 싶다면 온라인 사이트를 검색하면 된다. 대한약사회에서는 ‘휴일지킴이약국’(www.pharm114.or.kr) 웹사이트를 통해 명절이나 휴일에 운영하는 약국을 안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처방전 없이 급하게 살 수 있는 의약품의 종류나 의약품의 복용법 등의 관련정보도 얻을 수 있고, 집에 보관 중인 약을 복용해도 되는지 의약품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운영하는 응급의료포털 ‘E-Gen’(www.e-gen.or.kr)도 꼭 즐겨찾기 해야 할 웹사이트다. E-Gen에서는 주변에 급히 찾을 수 있는 응급실이나 병원, 민간 구급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야간이나 휴일에도 운영하는 어린이 병원 정보를 제공하는 ‘달빛어린이병원’은 손주를 위해 반드시 기억해 놓는 것이 좋다. 이곳에서는 병원 정보뿐만 아니라 응급상황 대처요령, 자동심장충격기(AED)의 비치 위치나 사용법까지도 안내하고 있다.
- 2016-09-0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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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을 부탁해 PART6] 잠이 부족한 시대 “낮잠 주무시고 가세요!”
- 낮잠. 어린이집에 간 손자, 손녀만 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낮잠 자는 시대다.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라도 편히 쉴 곳, 잘 곳을 찾아 나서고 있는 세상. 노곤하고 피곤한 삶을 보듬고 치유하고자 낮 시간 잠시라도 누울 자리를 찾고 또 내어주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낮잠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수면시간은 적고 스트레스는 높고 “낮잠을 팝니다.” ‘낮잠 카페’ 혹은 ‘힐링카페’가 도시 곳곳에서 성업 중이다. 체인점화된 업체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업장까지, ‘잠’, ‘피로’, ‘힐링’이 산업의 아이콘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일. 책상에 누워 잠깐 쉬면 될 것이 사업이 됐다. 낮잠 카페 등 소위 ‘힐링 사업’이 늘어난 것은 한국인의 잠 부족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2014년 OECD 18개국의 평균 수면시간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7시간 49분으로 꼴찌. 1위 프랑스와 1시간 차이가 났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16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서 한국 노동자의 은퇴 시기는 2014년 기준 남성 72.9세, 여성 70.6세다. OECD 국가의 평균 노동자 은퇴 나이가 남성 64.6세, 여성 63.2세인 것에 비해 7~8년은 더 오래 일하는 셈. 이렇게 잠 덜자고 일은 많이 하니 자연스레 낮잠, 피로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113시간으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이OECD 34개 회원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낮잠 이색 공간 ‘여의도 CGV 씨에스타’ 현재는 여의도CGV에서만 운영하는데 이용객 추이를 살펴 점차 다른 지점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낮잠 장소로 이용되는 곳은 바로 프리미엄관. 대체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운영한다. 잠들기 좋은 어두운 조명에 아로마 향과 뉴에이지풍 음악을 방안 가득 채운다. 좌석마다 촛불형태의 수면등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편안한 숙면을 위한 허브티에 담요 등을 놓아 정말 낮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CGV 프리미엄관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곳이기에 그 어떤 관보다 안락한 좌석에서 편안한 낮잠을 즐길 수 있다. 왼쪽 팔걸이 안쪽의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쫙 펴지면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다. 좌석은 좌우로 남성, 여성석, 중간 좌석은 커플석으로 배치했다. 이용자 양옆으로는 티켓을 판매하지 않아 보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힐링 카페처럼 안마의자는 아니지만 부드럽고 안락한 의자에서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씨에스타에는 이용객을 살피는 ‘미소지기’가 상주해 잠을 깨워주는 등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여의도 유일한 낮잠 공간을 꼭 한 번 이용해 보시길. 이용 요금 1만원(음료, 담요, 안대, 실내화 등 제공) 낮잠 카페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낮잠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힐링 카페 두 곳을 찾아갔다. 고른 연령대가 이용한다는 체인형 힐링 카페인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명동점을 찾았다. 두 곳 모두 기본은 전신 마사지기를 이용한 서비스로 개인 부스와 커플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덧신과 손 세정제를 제공하는 것과 서비스 후 음료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점이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콘셉트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취향에 맞게 골라 이용해야 한다. 미스터힐링 (명동 인터내셔널점)의 장점은 음료를 마시는 공간(1,2층)과 휴식 공간(지하1층)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전신 마사지기 위에서 쉬는 동안 외부 소음이 적어 쉽게 숙면할 수 있었다. 실내 전체에서 느껴지는 아로마 향과 낮은 조명, 음악, 부스마다 설치된 그림들이 휴식에 도움을 준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심신의 안정에 중점을 두어 구성한 것이 이용객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다. 이용 요금은 30분 코스 9000원(20회/15만원)이고 50분 코스는 1만3000원(10회이용권/9만원)이다. ‘퍼스트클래스’ 는 공항을 연상하게 하는 인테리어 때문일까? 여행가방 하나쯤 들고 티켓 부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피로를 푸는 방 또한 항공기 1등석처럼 꾸며 놓아 재미를 더했다. 퍼스트클래스는 음료 카페와 마사지 부스가 같은 층에 있다. 대신 마사지를 하면서 눈 안마기를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조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퍼스트클래스 마사지 코스는 총 6개로 활력, 쾌적, 수면, 목과 어깨, 허리와 엉덩이, 공기 마사지로 구성돼 이 중 원하는 두 종류를 고르면 된다. 객실마다 개별 이어폰과 스마트폰이 있다는 점도 편리하다. 이용 요금은 7000원에서 1만 3000원가지 다양하며 소셜커머스에서 더욱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의 '공간 휴' ‘공간 휴’를 말하기에 앞서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서울혁신파크가 있는 곳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자리다. 오래전부터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유명했던 곳.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미래청 건물 안에 바로 ‘공간 휴’가 있다. 창문 카페와 서고 사이, 천장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쉬는 곳이 바로 ‘공간 휴’다. 공원에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좀 자고 싶으면 누구든지 누워 잘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베개와 이불도 준비돼 있다. 전기보일러가 설치돼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용할 수 있다. 조명이 있어 뒹굴면서 만화책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엄연히 잠을 자고 쉬기 위한 곳. 10분이고 1시간이고 잘 수 있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이용료가 없는 대신 자기가 쓴 물건만 잘 정리하면 된다. 멋지고 화려한 것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쉼’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 2016-09-0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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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가 막힌 나만의 아지트 대공개] 뒷동산의 추억
- 어린 시절 뒷동산 고갯마루에서 꿈을 키웠다. 성년이 되어서는 대도시 고갯마루를 찾았다. 어머님 품 같이 포근한 그곳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활력을 얻었다. 가는 곳마다 필자의 아지트 ‘고갯마루’이다. ◇시골 뒷동산으로 가출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계셨다. 할아버님께서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고 할머님은 항상 업어주셨다. 그때까지 아버님, 어머님에게 안겼던 기억이 없다. 조부모님의 손자사랑 덕분에 꾸지람 한 번 들어본 일도 없었다.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 상황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부모님의 직할통치가 시작되고 ‘훈시’가 본격화 되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몇 년 후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맘 때로 기억된다. 어느 날 아버님으로부터 이유도 모르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무나 서러웠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집에 있기 싫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른바 가출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보는 논과 밭이 있는 마을 앞으로는 갈 수 없었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뒷동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큰 산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비교적 쉬운 길을 걷다가 경사진 대목 ‘고갯마루’에 이르자 덜컥 겁이 났다. 뛰어봐야 벼룩이지! 어린이가 어디로 가겠는가? ◇어린 시절 꿈을 키운 뒷동산 고갯마루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있고 펑퍼짐한 쉼터가 있었다. 그곳에 멈췄다. 그날따라 석양에 물든 빨강·분홍·하얀색 새털구름·조개구름·뭉게구름이 황홀하게 피어났다. “저 구름 위에 오를 수 없을까? 구름을 타면 어디까지 갈까?” 짧은 시간이지만 상상의 날개는 끝이 없었다. 가슴이 펑 뚫리는 것 같았다. 구름 위로, 더 멀리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아버님의 꾸지람은 이미 잊고 말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에 왔으나 농사일에 바쁘신 부모님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아니 어린 아들의 겁 없는 가출(?)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다. 몇 시간의 짧은 가출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필자에게만 남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다시는 가출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성장하면서 동생과 가끔 그곳에 오르곤 하였다. “우리는 무엇이 될까?” 제일 많이 나누었던 이야기로 기억된다. 더 자라면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는 놀이터였다. 어린 시절 꿈을 키운 필자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새로운 아지트 도시의 고갯마루 성인이 되어서 산행을 꾸준히 하였다. 북한산·관악산·청계산을 올라서면 ‘고갯마루’를 만났다. 여름에는 바람이 제일 시원하게 불고, 겨울에는 눈으로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이 쉬면서 교차하는 곳이었다. 잘 자란 나무 몇 그루가 햇볕을 가려주고, 평탄한 자리는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면서 대화하는 광장이 되었다. 고갯마루 가는 곳마다 새로운 아지트로 삼았다. 친구들과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었다. 조개껍질처럼 옹기종기 ‘도시’가 발아래 펼쳐졌다. ‘천군만마 위에 군림’하는 호기를 부릴만한 곳이 고갯마루다. 책 한 권 펼쳐들면 신선이 따로 없다. 모두가 다 아는 만인의 아지트다.
- 2016-09-0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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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하룻밤 지내기
- 8월 중순이 넘어도 무더위는 꺾이지 않고, ‘폭염특보’만 휴대폰을 두드린다. 여름에 시원하여 에어컨 가동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관악의 전원주택’ 필자의 아파트도 올해는 요금폭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손주와 함께 더위를 쫓으면서 끈끈한 정을 키운 이야기를 펼친다. ◇올 여름 피서하기 올 폭염에 힘들어 보이는 쌍둥이 손녀·손자를 데리고 피서 겸 견학차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족나들이를 갔다. 아이들은 신안해저유물전시관에서는 어마어마한 유물을 보고 입을 닫지 못하고, 어린이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퇴장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필자가 귀가하면서 “할아버지 집에서 더 재미있게 놀고, 저녁에 할아버지와 같이 자자!“고 제안하였다. 손녀는 머리를 흔들고, 손자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스쳤다. 바로 옆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자주 만나지만 여태껏 부모와 떨어져서 할아버지 집에서 자 본 경험이 없는, 몇 번 시도했지만 성공한 일이 없는 큰 숙제였다. 여느 때처럼 ”엄마가 허락하면 그렇게 할게요!“라고 대답하였고, 며느리는 예전같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손주와 하룻밤 지내기 공 던지기, 끝말잇기, 가위바위보 게임 등으로 신나게 놀았다. 저녁 식사 후 반전이 일어났다. 아들가족과 손녀는 귀가준비를 하는데 “동생도 할아버지와 자는데, 형이 되어가지고 한 번도 자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고 손자가 일성을 발하였다. “초등학생이 되더니 엄청 컸구나!” 모두가 어리둥절하였다. 가까이 사는 5개월 늦은 외손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외손자는 당시 신종 플루 등 감염위험 때문에 필자의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훨씬 전부터 외할아버지 품에서 잘 잤다. 어려서 부모님의 품을 떠나서 하룻밤을 지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는 같은 시골동네 이모님 댁에서도 자기커녕 밥 한 끼 먹지 못하였다. 사촌들과 놀다가도 식사준비 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내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름으로 기억한다. 이모님과 함께 하루를 걸어야 하는 외가댁으로 처음 갔다. 집을 떠나 본 일이 없는 터에 밥 먹기도 힘들고 잠자기는 더욱 어려웠다. 무서운 꿈만 꾸다가 날을 밝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남지 않거나 황당한 꿈을 거의 매일 꾸고 있다. 선풍기·에어컨을 교대로 켜면서 손자의 할아버지와의 첫잠을 잘 자도록 밤을 지켰다. 조금은 서늘해진 아침이 터 오르고 있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이의 표정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부모 품을 떠나서 할아버지와의 첫잠을 손자는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즐겁게 만나라, 칭찬하라 손자와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다. 다음에는 할머니를 좋아하는 손녀와 같이 지내기를 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할아버지, 할머니의 진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처럼 격식에 맞춘 보살핌은 아무 소용없다. 가슴에 안고 즐겁게 만나자. 손자는 할아버지의 가슴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훤히 알고 있다. 책망하지 말고 하루에 3번 이상 칭찬하자.
- 2016-08-1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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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결혼하여 살면서 온몸으로 느낀 삶의 지혜
- 우리 시니어 모두다 세상에 애기로 태어나서 자라나 어린이로 학생으로 성장하여 특별한 경우 외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를 결혼시키고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 계속 되고 있다. 부모로서 지혜로운 삶의 지혜를 말해도 다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부모가 하는 말은 늘 하던 잔소리로 들을 수 있기에 글로 써본다. 1.공부하는 자녀들에게 낳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너의 인생을 맘대로 결정지어 미안하다. 그래도 바뀌지 않을 환경을 직시하여 어떻게 해야 좀 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지혜로운 상황일까 뭔가 안보여도 안 잡혀도 끓임 없이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기를 권하고 싶다. 사춘기때 필자도 포기하는 모습으로 부모님을 일부러 속상하게 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결국 본인이 손해였던 것을 알았을 때 돌아가서 다시 이루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 인생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 인생이 마라톤이라고 해도 역시 마라톤우승자는 1그룹으로 치고 나간 사람 중에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나중에까지 일할 수 있는 것 등 지금보다 더 장수시대가 될 테니 미래와 노후를 미리부터 준비하는 인생을 상상이라도 해보기 바란다. 필자는 첫 번째 대학의 과선택은 잘 할 자신이 있고, 취직이 잘 되는 과를 선택하여 선택했으나 결혼 후 아기를 가지면 더 이상 유치원평교사로 음악에 맞춰 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2. 결혼을 앞둔 자녀들에게 옷매장에서 점원이 딱 내 옷이라고 부추긴다고 그냥 샀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있었는가 부모님을 생각해서 떠밀리듯 하는 결혼은 하지마라 자녀들은 이미 낳아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 줄 기쁨을 다 준 존재들이다. 부모자격시험없이 부모가 되었다는 것을 지금생각하면 참 걱정스런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이모저모 다 따져봐도 결혼은 했던 것이 잘 한일이라고 인생 후반에 미소 지을 자신이 있다면 해도 좋다. 신혼집인 것 말안해도 그 동네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면 이사올 때부터 다 안다. 문단속을 소홀히 하는일이 없어야 하며, 확인후 문열어주도록 한다. 어떤 피해가 있었다면 본인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의 외출도 길가집이라면 외부로 통하는 창을 반드시 잠그는 것은 기본이다) 임신을 한 경우 아기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기고 아기를 기다린다. 한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뱃속에서부터 귀하게 여기기 바란다. 필자의 뼈아픈 경험이니 꼭 명심하기 바란다. 3, 아기를 키우는 초보부모들에게 뜨거운 다리미를 다루거나 주방에서 음식할 때 만일에 일어날 사태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라. 잠깐 이라도 집을 나설 때는 주방가스나 전기렌지를 끄고 움직인다. 모양이 예뻐도 아이가 어릴때는 유리주전자나 유리컵 사용등은 자제하라고 하고 싶다. 깨진후 위험은 물론 완벽하게 제거하는 과정은 생각만 해도 땀나는 일이다. 책자에 나오는 내용대로 싱크대에게 아기목욕을 시키지 마라. (지역에 따라 집에 따라 뜨거운 물이 갑자기 나와 여린 아기가 화상입을수 있다) 결론은 위험한 행동 ,만일에 일어날 일을 염두에 두고 안전하게 자녀를 키운다. 실제 경험한 내용만 적어보니 다른 분들도 어마어마한 실제 삶속의 경험속의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2016-08-1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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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1년생, 엇나간 나의 꿈
- 고금석 연극연출가 허망한 소싯적 꿈~ 나의 원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문학과로 대학 진학을 했던 것이고 1학년 때부터 경제원론이니 법학통론, 정치외교사 등을 두루 청강하였다. 5개 국어를 마스터할 계획도 세우고 첫 방학부터 중국어, 프랑스어 학원을 찾았다. 당시 독일문화원에는 독일 문학이나 시사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대학생 모임이 있었는데, 모든 의사소통을 독일어로 하였다. 그 모임의 성격이 나의 구미를 자극하였다. 그래서 독일어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2학년이 되자마자 그 모임을 찾았다. 이때가 1971년 4월! 잘못 찾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30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여학생도 많았는데 몇몇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뻤다. 웬 늙수그레한 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우리말로 발표를 했다. ‘너무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러나?’ 기나긴 발표가 끝난 후 웬 책자를 나누어 주더니 윤독을 하자고 했다. 제목을 보니 ‘당통의 죽음’. 연극 대본이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옆 사람에게 물으니 ‘프라이에 뷔네’(Freie Bühne-독일문화원에 소속된 연극단체로 독문학과 학생들이 주축을 이룸)란다. 대본이란 걸 처음 봐서 그런지, 내 차례만 되면 긴장되어 눈앞이 핑핑 돌고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혀는 꼬여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첫 연습을 마쳤고, 시(始)파티 자리까지 가서 막걸리를 진창 얻어 마셨다. 그러나 다시 그 연습장을 찾지는 않았다. 난 원래 연극은 꿈도 꾼 적이 없으니까~.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1주 후. 집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프라이에 뷔네’란다. 왜 그랬을까? 방을 잘못 찾던 날, 자기도 2학년이라고 유난히 친절하게 굴며 집 전화번호를 묻던 그놈,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가? 오늘이 캐스팅하는 날이라고, 연출자가 나를 꼭 보고 싶어 한다고. 왜 나갔을까? 캐스팅 자리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외교관의 꿈을 꿀 수 있었을 텐데…. 연출자는 꼭 보고 싶다던 나에게 대사 여덟 마디짜리 단역을 주었다. 그러나 여덟 마디도 버거울 정도로 난 연기에 문외한이었다. 읽기는 그럭저럭 견뎌냈는데, 블로킹(동작선 긋기 연습)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영광스럽게도 난 연극의 첫 장면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건 첫 장면 출연자를 빼고 나머지 45명의 배우가 한꺼번에 내 연기를 보는 끔찍한 사태를 의미했다. 여덟 마디였지만, 첫 대사는 엄청나게 길었다. 대본의 반쪽 페이지가 넘게 길게 이어졌다. 창녀들이 골목길에서 교미하는 개들을 보고 깔깔거리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었는데, 리딩할 때는 그럭저럭 잘나가던 대사가, 90개의 눈알이 주시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려니 맥락도 잡히질 않고, 얼굴 근육이 떨려 도무지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몇 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무래도 간덩이가 너무 작아 그러는 거 같으니, 연습 전에 술을 마시자.’ 당시엔 왕대포라고, 막걸리를 큰 대접으로도 팔았다. 이 방법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그렇게 난 매일 음주연습을 했다. 이 습관은 공연 당일까지 이어졌다. 공연장에서 막걸리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공연 당일, 분장하기 전에 구멍가게에서 미리 매실주 한 병을 구입했다. 병이 납작해서 윗저고리 속주머니에 들어가기 딱 좋았다. 그래도 도수도 높고 500㎖는 족히 되는 사이즈였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시간이 임박할수록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그때마다 몰래 한 모금씩 홀짝이다 결국 공연 직전엔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내 데뷔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선배 한 분이 무대에서 술냄새가 진동하더라며 음주공연한 사람을 색출하려 했다. 난 기겁하여 다음 날 공연 땐 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난 예의 창녀촌 장면 도중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대사! 5초가 지나 10초, 15초~ 결국 나는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객석에서 격려 박수 소리가 터지며 다음 배우가 등장하여 연극을 진행시켰다. 난 하릴없이 무대를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연기 데뷔 무대가 이리 허무하게 끝나다니~. 힘없이 무대를 나오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튀었다. 초장부터 연극을 망쳤다며, 누군가가 내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난 그 사람이 연출자인 줄 알았다. 최근 그 연출자에게 내 뺨을 후려친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자기 작품을 망친 배우를 응징하지 않는 연출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난 아직도 의문이다. 그렇게 2학년의 1학기를 온통 연극에 허비하는 바람에, 1학년 때 올 A에 평점 4를 넘던 학점이 그만 C·D투성이에 평점도 3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또 그랬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외교관의 꿈을 이루어줄 책들을 싸 메고 연극과 인연이 닿지 않는 외딴 세계로 기어 들어갔다. 고향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이었다. 고시생들에게 알려진 명문 절답게 옥천사에는 예닐곱 명의 고시생이 있었다. 나의 꿈 재도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가져간 책과 참고서적, 문제집 들을 죄다 독파하고 한 달 반 만에 의기양양 하산하였다. 그러나 개학을 열흘도 채 남기지 않은 날, 다시 그놈한테서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주인공 자리가 비어 있다고, 이번에는 독일어 원어극이라고, 발음은 독일 사람이 봐준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독일어로 공연 한 번 하면 회화는 저절로 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원어민이 가르쳐 주면 독일어 발음이 얼마나 정확하고 좋아지겠는가? 왜 또 그랬을까? 난 또 반갑게 독일문화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판단 미스였다. 발음은 좀 나아졌는지 몰라도, 난 지금까지 독일어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2학년 말, 극단을 빠져나오려고, 연극을 접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내 동기와 선배들이 모두 군대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 버린 후였다. 극단엔 1학년 신입생과 예쁜 여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를 즈음해 외교관의 꿈은 완전히 접혔다. 관객모독 엇나가긴 했지만, 이후 나의 연극인생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계속 배우로 활동했으면 내 인생은 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배들이 없는 상황에서 난 연출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1977년, 난 독일의 걸출한 작가, 페터 한트케를 만나 연출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나중에 기국서라는 연출가가 재공연을 해서 더욱 유명해진 . 관객들은 욕먹고 수모를 당하고 모독당하기 위해 줄지어 세실극장을 찾았다. 모독을 당하다 겁을 집어먹고 실신한 나머지 극장 밖으로 실려나간 관객도 있었다. 공연을 마친 다음 날, 단원들이 예매처를 돌며 수금을 해왔다. 여관방에 모여 결산을 하는데 모두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꾸역꾸역 기어냈다. 연극을 해서 처음으로 돈 버는 경험을 했다. 연극에 입문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카스파 난 계속 페터 한트케에 매달렸다. 1978년엔 를 선보였다. 16년 동안 갇혀 살다 세상에 나온 소년이 언어를 배우며 겪는 고통을 언어고문극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는 1983년에 재공연되어 극비평가그룹으로부터 작품상을 받고, 1996년에 앙코르 공연을 가지면서 500회 가까운 공연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엔 고려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을 연출하여 전국대학연극축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그해 국립극단에 입단하였다. 엇나간 꿈은 힘을 받아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광대학교 나의 대표작으로는, 1987년 ‘우리극장’이 만든 를 들 수 있겠다. 아마추어 극단을 고수하던 프라이에 뷔네는 1979년 전문 직업극단으로 탈바꿈, ‘우리극장’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는 배우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훈장과 학생들이 벌이는 코미디극인데, 고리타분한 훈장이 자유분방한 학생들한테 백전백패를 당한다. 는 춘천으로 살러 가 만든 극단 ‘춘천앙상블’의 창단공연으로도 제작되었으며, 1992년 재공연된 후 현대백화점, 서울우유 등 기업체와 학교 순회공연을 다녔다. 1994년에는 LA교민 위문공연을 다녀오고, 2000년엔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로 부임하면서 다시 업그레이드되었다. 는 전주 동네 구석구석에 초청 공연된 후 중국 수저우(蘇州)까지 다녀오며, 1000회 이상의 공연 기록을 남겼다. 산너울패 2008년, 아내의 암 투병을 위해 충남 서천에 새 집을 짓고 아예 눌러 앉았다. 아내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바로 ‘산너울패’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2013년의 일이다. 산너울마을 동네 주민들로 이루어진 작은 극단이다. 동네 아이들 7~8명도 따로 모여 연극놀이를 하며 어울린다. 첫 작품으로 어른 팀은 를 공동 창작하였고, 어린이 팀은 고(故) 임길택 시인의 시를 모아 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 공연하였다. 창단 2년째에 산너울패는 의미 있는 행사를 가졌다. 송년공연으로 동네잔치 한마당을 벌인 것이다. 단원들은 낭독공연()을 하고, 초청가수들이 내려와 노래 불러주고, 국립창극단 박성환 배우가 판소리도 들려주고, 서천 토박이 박광배 시인이 자작시 낭송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막걸리를 사오고 삼겹살을 구웠다. 막판에는 초대가수와 춤꾼 구별 없이 노래 부르고 한데 어우러졌다. 이문재 시인이 옵서버로 이 구경을 하다가 곧장 경향신문 정동칼럼에 이 멋진 광경을 그대로 옮겼다. 시골 극단이 가야 할 길의 모범을 보인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고금석(高金錫) 1951년 광주 출생. 서울 배재고·고려대 독문과 졸. 극회 프라이에 뷔네 단원. 전국대학연극축전 최우수상. 국립극단 단원. 극단 우리극장 창단. 올해의 작품상(연극비평가그룹 제정) 수상.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전주대 영상학부 강사 역임. 서천극단 산너울패 창단.
- 2016-08-0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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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강마을 배나들이 옛 이야기
- 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2016-07-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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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미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달렸다
- 한국이 출산율을 높이고자 최근 매년 10조 원 이상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5년 기준 1,24명으로 1.3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1960년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수) 6.0명→1990년 1.5명→2013년 1.22명→2015년 1.24명인 것이다. (2015.1.11.통계청‧‧보건복지부 잠정집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인구는 지금의 절반인 2,468만으로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다. 심지어 2500년에는 중남미 소국인 바하마 인구수준인 33만 명 수준이 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취업-결혼-첫 출산-둘째 출산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은 벌고 아내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벌어 집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둘이 죽자 하고 벌어야 집도 마련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가 된 요즘 아이만 덜컥 어른들에게 맡기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국공립 어린이집은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고향에 가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접고 올라와야 했다. 아기를 받아본 것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라는 그의 말이다. 어느 TV에서는 일부 산부인과는 폐업하고 피부과를 개업하였다며 비싼 산부인과 기계가 먼지가 쌓인 채 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아기가 없다.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는 시골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폐교도 늘어난다. 어린 학생들로 넘쳐나야 할 학교가 전교생 다 합쳐 4명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학교도 6학년 두 명이 졸업하면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 한다. 출산에 따른 가족계획표어를 살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66년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년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 1990년 ‘엄마건강 아기 건강 적게 낳아 밝은 생활’ 등 이었다. 2004년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가족계획 표어가 선보였고, 2006년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변했다.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와 ‘아들딸 구별 말고 많이 낳아 잘 기르자!’ 하는 표어가 등장했다. 출산장려에 나선 보건 복지부가 전 국민에 출산장려 공모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는 평생 선물, 자녀끼리 평생 친구." 이 표어가 2014년 7월 제3회 인구의 날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출산장려 국민표어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물론 표어가 출산장려를 촉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가분수 형의 인구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몫은 정부에 있다. 여건만 되면 더 낳겠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차례다.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아이 울음소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부터 저 지리산 꼴짜기 마을까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 2016-07-2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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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6] 일본 할아버지·할머니의 ‘똑똑한’ 손주 사랑법
- 지피지기, 즉 적을 알면 백전백승. 하지만 손주는 적이 아니다. 쌍둥이에게도 세대 차가 있다는 유머처럼 아무리 인생의 대선배이지만 손주를 접하는 방법에 자식인 부모와 차이가 있고, 또 그 아이인 손주와도 세대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걸 뛰어넘어 손주랑 멋있게 그리고 알차게 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태문 동경통신원 gounsege@gmail.com 1.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착각 손주가 잘 안 따른다며 고민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다. 당연히 귀여운 손주를 보고 싶어서 어루고 달래지만 손주가 좀처럼 익숙해하지 않고 길들지 않는다면 무조건 사랑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왜 그런지 환경, 조건,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는 없는지 등 먼저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2. 며느리의 고민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주를 때리는 걸 보고 정말 기가 찼다. 때린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더 꺼리고 싫어질 텐데… 손녀에게 ‘손’하며 내미는 손을 잡고 웃는 할아버지 얼굴을 봤는데, 강아지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다루다니… 이런 속사정의 며느리가 있는 게 현실이다. 매를 들더라도 그것은 부모의 몫이고, 자칫하다가는 학대로 비칠 수도 있으니 절대로 삼가야 한다. 또한 손주는 절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완동물도, 장난감도 아닌 엄연한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3. 둘만의 원칙을 정하기 놀이를 통해 배우는 건 운동 및 인지,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협력과 문제 해결 과정의 사회성이다. 용돈을 주면서 돈의 가치와 쓰임새, 그리고 활용에 대해 함께 가르쳐 준다면 더 큰 효과가 있듯이 자칫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자라지 않도록 적절한 원칙을 만드는 게 중요할 것이다. 놀이터에서 놀 경우에도 시간을 정하고, 간식을 주더라도 양을 정하는 식으로 무한 애정과 무한 만족은 구분해야 하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뭐든지 정도껏 원칙 아래에서 행해져야 그 효과도 클 것이다. 4. 좋은 놀이법 공유하기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손주의 시선에 맞춘 돌보기는 결국 손주가 받아들이기 쉽다는 걸 뜻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요즘 유행하는 놀이법도 배워서 서툴지만 함께 즐겼을 때 그 기쁨은 더 클 것이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적극 물어보고, 같은 세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떤지 그 사정도 들어본다면 정보의 폭도 넓어지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 밖에서 뛰어놀지 않고 방에 처박혀 공부만 하다 체력이 약해진 요즘 어린이 등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것들도 결국 평소의 습관, 그리고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관건인데, 부모와 놀이법에 대해 상의하고 공유한다면 자신에게도 신선한 자극과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5. 새 육아법을 받아들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세대간 흔히 문제가 되고 갈등의 씨앗이 되기 쉬운 게 바로 ‘육아에 대한 생각’, 즉 육아법의 차이다. 예를 들면, 툭하면 안기려는 버릇이 생기니 좋지 않다, 오냐오냐하면 버릇이 나빠진다 등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간섭하게 되면 손주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나빠질 수 있다. 새로운 육아법은 받아들이되 선배로서 조언하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선에서 참고할 만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아낌없이 전하고 함께 나눈다면 세대의 벽도 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손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평소의 모습 그대로 손주와의 관계를 차곡차곡 쌓고, 함께 나누며 지내는 시간은 알찬 삶의 활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6. 기억은 규칙 속에서 추억으로 일회성은 피하자. 뷔페 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은 오히려 질리기 쉽고 식상하기 마련이다. 원하는 대로 뭐든지 들어주는 게 결국 손주를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일회성보다는 반복, 그리고 규칙적으로 행하자. 집 냉장고에 있는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함께 만들어 보는 걸 일주일에 한 번씩 해 보든가, 동네 산책을 매번 다른 길로 다녀 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편의점과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살 때 재료가 뭔지 성분과 열량 표시에는 뭐가 씌어 있는지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횟수를 거듭할수록 커뮤니케이션도 깊어지고,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아 나이가 들어도 잊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존재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7. 손주보다 자식에게 사랑을 손주가 귀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손주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부모임을 잊지 말고, 먼저 손주를 흐뭇하게 쳐다보기 이전에 자식에게 사랑을 쏟고 있는지, 혹은 손주 앞에서 자식을 혼내지는 않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식사와 대화, 놀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손주에게 이어지고 더 커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과의 신뢰 관계, 그 태도를 보고 손주가 크며, 또한 손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건 바로 자식임을 인정한다면 손주를 대하는 방법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서 존경 받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손주의 듬직한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라도 듬뿍 사랑을 쏟는 게 어쩌면 자식과 손주에게는 지나친 관심이고 간섭일 수도 있다. 8.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을 알자 앞서 말했듯이 귀여운 손주의 재롱과 투정, 그리고 어리광에 그저 오냐오냐 응해주거나 혹은 넘치고 남을 만큼 모든 걸 주는 건 과잉보호일 수 있다. 부모가 보더라도 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분에 넘친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도를 넘어선 간섭이 된다. 일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대선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든든한 매력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 날리기, 비눗방울 만들기 등 놀이 방법을 가르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꾀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놀이를 통해 인사법과 식사 예절 등을 가르쳐도 좋을 것이다. 특별히 손주를 가르친다고 의식하지 말고 평소 말투 그대로 이야기하며 함께한다면, 손주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배워 나갈 것이다.
- 2016-07-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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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초등학생시절 처음 하늘을 날았다
-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 2016-07-14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