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하순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현장을 거니는 도중 아내가 불쑥 얘기했습니다.
“나무들은 매년 봄이면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늙으면 그만이라는 게 참 허무하네요. 우리도 이 산수유 꽃처럼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네…”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서 되살아나지만, 우리에게는 손자들이 있잖소. 그 녀석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새봄 아닐까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지난 호(號)에서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손주들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키(key)를 쥐고 있는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서 손주들과의 관계만을 애기하는 건 제게 외손주가 없기 때문일 뿐이지, 외손주들과의 관계가 친손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친외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외손자들의 육아에 가담한 것은 오직 ‘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 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는 정석희 님의 증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석희 저 - )
이처럼 내 핏줄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니까요.
그는 외손자를 키우며 쓴 책의 말미에서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이처럼 아이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중략) 아이들의 존재란, 경험한 적 없으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상되는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손자 녀석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6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두 손자를 키워 온, 아니 그 녀석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저의 생각도 정석희 님의 고백과 꼭같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전형적인 ‘손자 바보’입니다. 그걸 부인하기보다는 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닙니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이지요.
저는 두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취미를 살려서 두 손자가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제 나름의 설명과 소회를 담아 ‘바보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야! 뭐 때문에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나? 그래 봐야 손자들이 크고 나면 할아버지가 잘 해준 것 기억도 못한다”라고 타박을 하더군요. “그거야 자네 생각일 뿐이고…”라며 웃고 말았습니다.
두어 달 후 저녁 자리에서 바로 그 친구가 “나는 밥 후딱 먹고 먼저 갈 거다. 오늘 손자가 집에 오는 날이거든…”
“손자가 얼마 만에 오는데?” 하고 물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하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두어 달 전 그 친구의 타박이 저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세 손주들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어떨 때는 녀석들이 집에 가지 않으려 해서 일주일 이상 함께 자고, 먹고, 뒹굴기도 하는 제 입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손자를 보려고 달려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니까요.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50~60대가 한자리에 모이면 저마다 손주들 사진 꺼내놓고 자랑하기가 바쁘다고 합니다. 동창 모임 같은 데서는 손자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만원씩을 내놓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손주가 있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갑 속이나,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실버 라이프에 있어서 손주들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손주들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애끓는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손주들을 매일 보고 싶은 실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이거나, 아니면 며느리들이 손주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손주들의 엄마, 즉 며느리와의 관계를 보다 친밀한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주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으로 손주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때뿐입니다. 정말 손주들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십시오. 즉, 할아버지가 먼저 동심으로 돌아가서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손주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녀석들과 친구가 되어 놉니다. 놀이터로 가 같이 미끄럼도 타고, 같이 달리기도 하며, 모래판에서 씨름도 합니다. 키즈 클럽에 가면 함께 작은 공이 가득한 풀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좁은 미로 속을 같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같이 노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며느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댁, 혹은 시부모와 자신의 아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사이가 썩 편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연히 손자와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 전에 심하게 반대를 했다거나, 예단 등의 문제로 며느리에게 격하게 스트레스를 준 원죄가 있다면 ‘구원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손주를 맡겨도 좋겠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 스스로가 자신이 어른으로서 예우 받아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며느리가 자란 환경을 은연중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노후의 행복 한 가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체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 며느리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며느리에게 시댁에 올 때 느끼게 되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은 기본적으로 외식을 하되, 메뉴는 반드시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게 저녁시간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폭탄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하지요. 시아버지가 ‘말아주는’ 폭탄주 한두 잔이면, 웬만큼 두터운 장벽도 다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면 며느리가 시댁에 와도 밥 짓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기본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외식을 하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요.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 신사임당 초상화 몇 장 찔러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손주들과 노는 시간에 간혹 역사상의 위인 전기와 같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손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손주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건 인생 최고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축복, 이런 훈장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다른 어떤 것으로 노년의 무료함과 공허함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1994년 1월, 현대건설 이사였던 최동수(崔東秀·77)씨가 사직서를 내밀자 고(故) 박재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이나 롯데에 가려고 그만두는 거냐?”는 물음에 “기타를 만들겠다”고 대답하자 더욱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업체였고, 잘 나가는 건축담당 이사였던 최씨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씨의 선택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기타를 만들고자 한 것은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온 그의 꿈이었고, 20여 년에 걸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아내와 애인(?)을 위한 선택 ‘은퇴’
최동수씨가 아내인 수필가 허숭실(필명)씨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덕수궁 후원을 걷던 최씨는 허씨에게 엉뚱한 고백을 했다. “당신과 데이트하느라 내 애인을 돌보지 않았더니 그녀가 병들었소. 오늘 당신에게 그 애인을 소개해 주리다.” 허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최씨는 들고 있던 기타를 무릎 위에 척 올려놓고는 “기타가 바로 내 애인”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한 애인이 사람이 아닌 기타라는 사실에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허씨 앞에서 최씨는 “그동안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인을 전당포에 맡겨두었더니 습기가 차 피부가 트고 몸도 틀어져 속상하다”며 기타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허씨는 ‘풋내기 예술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고, 그날의 감동이 결국 그녀를 ‘기타 만드는 남자의 아내’로 만들었다.
최씨의 기타 사랑은 고등학생 시절 읽은 한 소설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일본 소설이지만, 당시 전쟁터에서 다리 불구가 된 주인공이 창녀가 된 아내의 집 근처 전봇대 아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 기타에 매료돼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하나 샀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직접 취향에 맞는 기타를 손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집안의 오동나무 장롱 서랍을 뜯어가며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틈틈이 기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기타 만들기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내는 견디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기타를 만들면 그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후, 18년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타국에서 지내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밥벌이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3년 그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때,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외로움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인생은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던 최씨에게 한 가지 꿈이 피어올랐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나 기타 만들까?’라고 물어봤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산기를 가져와 탁탁 두드리더니 ‘앞으로 삼시 세끼 먹는 데는 문제없겠네요. 인생 1막은 아이들을 위해 물질에 투자했으니, 2막은 당신의 정신적 자유에 투자하도록 해요’라며 흔쾌히 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20년 전, 아이들을 키우고 나면 기타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여생을 위해, 그리고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소리가 나는 작은 집’을 건축하다
기타 제작을 결심한 그는 그동안 지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했다. 31년간의 건축가 경험을 살려, 마당이 딸린 집을 직접 지었다. 아늑한 그의 집은 ‘행운의 열쇠’ 모양을 따서 설계한 1층을 지나면, 기타 제작 공간인 지하실 ‘목운(木韻: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는 뜻) 공방’이 나온다. 최씨의 꿈과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는 1년에 단 2대의 기타만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딸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만들고,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기타를 파는 그다. 이 때문에 최씨는 기타를 파는 게 아니라 “백마 탄 기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말한다. 딸을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기타를 만드는 데는 숙련된 솜씨가 뒷받침돼야 할 터. 기타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은퇴한 첫해에는 미국 힐즈버그(Healdsburg)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에 입학했어요. 이듬해에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호세 로마니요스(Jose Romanillos)에게 제작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받았죠. 두 과정 모두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해요. 현재는 미국 현악기 제작가 협회(GAL: Guild of American Luthiers)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기도 하고요.”
기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8년간의 해외생활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을 활용해 외국의 공방과 자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수집한 것.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만큼 그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계는 꼬박꼬박 기타를 위한 시간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 지하실의 기타 공방으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야근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는 1년에 2대 남짓이다. 기타 제작 과정은 단번에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완성까지 꼼꼼한 설계와 인내가 바탕이 돼야 하는 건축일과 닮은 점이 있었다.
“기타는 ‘소리가 나는 작은 집’과 같아요. 제 인생 전반전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Suntec City), 카타르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역사 등을 짓는 것처럼 기타를 만드는 일도 미학적 판단과 설계가 필요한 종합 예술이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동수표 악기’
오랜 꿈, 아내의 내조를 밑천 삼아 시작한 기타 제작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나 동료 등 지인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헌정했다. 대개 유명 기타리스트의 경우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해외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가 만든 기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기타는 보통 1대당 1000만원 가량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비싼 값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가 공짜로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기타를 주는 것은 결코 공짜 거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돈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겠어요? 대부분 손님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서 지급하죠. 조금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랍니다. 내가 공짜로 기타를 주면 어떤 이는 나에게 훌륭한 그림을 주기도 하고, 좋은 책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악기는 파는 게 아니라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악기는 내 딸인데, 내 딸을 데려갔으면 그도 사위처럼 내 자식이 되는 거지요.”
그는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타’라 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단 하나의 ‘악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기타를 하나둘씩 실물로 탄생시키는 최씨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봄철이면 기타를 만들기 적합하다. 이 시기에 결의 방향과 울림이 좋은 나무를 골라 온도를 맞춘 작업실에 한 달가량 둔다. 그다음 색을 입히는데, 그는 붓 대신 천으로 만든 솜방망이로 문질러 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100~150번을 문지르고, 이 과정을 100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서너 달이 걸리기 때문에, 기타 한 대를 만들고 나면 3~5kg씩 체중이 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에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튜닝이다. 아무리 독특하고 멋진 기타라도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기타도 악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나무마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나무 두께를 가늠해 조율한다. 기타의 모양이 나오면 제대로 된 소리를 얻기 위해 대전의 음향 전문가에게 보내 진동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튜닝을 한다. 튜닝은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뜯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타리스트 배장흠씨의 기타도 앞판을 세 번, 뒤판을 두 번 바꿔가며 튜닝을 마친 작품이에요. 그는 기타가 만족스러웠는지 고맙게도 그 이후에 제가 만든 기타를 두 대 더 구입했죠. 2014년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도 제가 만든 기타로 연주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입장에서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죠.”
요즘 그는 리라(lyre: 고대에 사용한 발현악기) 모양의 기타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는 일흔넷까지만 기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전히 46번째 기타 만들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기타와의 인연을 모아 만든 책 (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타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선사하고, 책을 통해 기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목표다.
“어언 나이가 차서 손을 거둘 날이 가까워져 오잖아요. 그전에 꿈속에서 상상만 하던 리라 기타와 같은 작품을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책이 출간되어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기타 제작 생애의 목표의 반은 성취한 셈이죠.”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대회였다. 그 무렵 일본의 릿쿄대학교와 야하다제철, 미국의 빅토리농구단 등이 한국에 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특정 대학교는 연전연승이었다.
일본팀들을 물리칠 때 시골 아이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동파(申東坡)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10여년 뒤 특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봄에 열린 농구 OB전에서 신동파가 뛰는 경기를 라디오 중계가 아닌, 실제 경기로 보게 된다.
일본팀은 물론 국내 실업팀들을 손쉽게 물리친, 특정 대학교는 연세대이며 당시 멤버는 김영일 방열 김인건 하의건 신동파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이 2세대 ‘독수리 오형제’라면 이들은 1세대 ‘독수리 오형제’라고 할 수 있고 중심 인물이 신동파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까지 아시아 남자 농구의 절대 강자는 필리핀이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62년 자카르타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4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0년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마닐라 대회까지 7차례 대회에서 4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이 사이 아시안게임에서는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1969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아시아 지역 스포츠 단체인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나 이제는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필리핀이었기에 196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홈 코트의 한국을 83-80으로 꺾는 등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절대 강자 필리핀이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86-95로 지고, 일본에도 77-78로 져 3위에 그친 건 필리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근 아시아 남자 농구 판도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고 있는 1950~60년대 강자는 필리핀뿐이다. 필리핀은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중국 창사(長沙) 대회에서 잇따라 준우승했다. 한국은 두 대회에서 3위와 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02년 부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 우승, 2010년 광저우(廣州) 대회 준우승 등 아시안게임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경우 중국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고 201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 필리핀은 6월에 열리는 세계 예선에 참가한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이 농구에서 아시아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진 건 충격을 넘어 ‘사건’이었다. 1969년 11월 29일 밤 TV 앞에 모여 있던 필리핀 농구 팬들은 던지는 대로 쏙쏙 들어가는 한국의 한 슈터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부 매체에는 한국-필리핀의 이 경기가 결승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이 대회는 9개 나라가 돌려 붙기를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 없고 대회 마지막 날 7승의 한국과 6승1패의 필리핀이 맞붙은 경기여서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년 팬들은 아마도 이날 신동파의 슛이 100%의 성공률을 보인 것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인 득점 50점, 한국이 기록한 95점의 절반 이상이 신동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동파는 슛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에 그때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그의 득점은 70점대 이상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팀 득점은 세 자릿수였을 수 있다.
이 경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돼 신동파는 1970년대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에서는 어떤 일이 잘되면 ‘sindongpa’, 잘 안되면 ‘no sindongpa’란 말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동파의 신들린 듯한 슛을 막기 위해 악착같이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경기 막판에는 포워드인 신동파를 센터가 수비하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골 밑에 있어야 할 센터가 외곽으로 나오니 한국의 공격은 그만큼 수월해질 수밖에.
1960년대 초반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기술 지원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필리핀에서는 TV로 생중계됐다. 대회가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한국-필리핀 경기가 수십 번이나 재방송됐고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가 됐다. 신동파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가게들이 줄을 지어 생겼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1970년대 필리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신동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 마크 스피츠와 프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 등에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신동파의 소속 팀인 기업은행은 1970년부터 그가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필리핀 초청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8차례의 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0점이 넘게 넣었고 최고 54점까지 기록했다.
필리핀 관중은 자국 선수의 파울로 신동파가 쓰러지면 필리핀 벤치를 향해 종이 뭉치와 부채 등을 던졌다.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신동파가 PBA(필리핀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관전하러 가면 하프타임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의 전설이 왔다”라고 소개하고 1만 여 관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고 한다.
신동파는 이후 한국 남자 농구 역사에 새로운 일들을 계속 남기게 된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해 13개국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한국보다 키가 훨씬 큰 캐나다를 조별 리그에서 97-88로 잡았고 순위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92-79로 꺾는 등 대회 전체 성적이 4승4패였다.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조별 리그에서 겨뤄 77-82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 부문별 기록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득점자 순위다. 신동파는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넣어 파나마의 데이비스 페랄타(20.0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리 지데크(19.3점)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슈팅 성공률이 80.4%였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던지는 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신동파를 앞세워 조별 리그에서 필리핀을 77-75로 다시 한 번 잡았다.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졌으나 전 대회 우승국인 이스라엘을 81-67로 제치고 축구와 함께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1승1패를 기록한 필리핀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에 64-75로 지는 등 2승3패로 부진해 5위에 그쳤다. 신동파는 김영기로부터 시작해 이충희 문경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농구 슈터 계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한반도에서 체육활동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인기가 많은 축구의 대회 개최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체육회를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해 스포츠 주권마저 빼앗았다. 또 하나 일제는 조선인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최대한 억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경우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은 워낙 선발전 성적이 좋아 뽑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축구의 경우 경성축구단이 1935년 6월 열린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 벌어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쯤 되는 대회) 축구 종목 일반부에서도 정상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 대표팀에는 한반도에서 김용식 선생, 단 한 명만 뽑았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의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의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농구는 좀 달랐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을 선발했다. 농구 엔트리 12명 중 4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도쿄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종목은 마라톤과 축구만이 아니었다. 농구도 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내 집만큼 편한 곳이 없다지만, 은퇴 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루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수십 년을 가사에 시달린 주부들에게 집은 곧 은퇴 없는 노동의 현장과 같다. 그런 시니어의 삶에 활력을 주고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 바로 시니어 주거 복지시설(실버타운)이다. 문화센터, 피트니스클럽, 병원, 약국 등이 집 울타리 안에 있고, 생활의 편의와 안전을 집안 곳곳에서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래 입주민들과 친목 도모까지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이 아닌 그 이상의 즐거움이 있는 주거 공간, 서울시니어스타워(가양), 삼성노블카운티, 더 클래식 500에 대해 알아봤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사전 조사만 3년간 했다. 생활비와 관리비를 따져보니 일반 아파트와 크게 차이는 나지 않지만, 각종 건강·편의·안전 서비스 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피트니스센터와 사우나실, 당구장, 노래방, 동호인실, 대형 아트홀, 병원까지 갈 수 있다. 동선이 짧고 가기도 편하지만 무엇보다 안전하다. 집안에서도 갑작스러운 현기증이나 비상시에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단지 내 24시간 대기 중인 간호사가 달려와 응급처치를 해준다. … 오전도 참 빨리 가지만 오후는 더 바쁘다. 아내는 요가와 한국무용, 노래교실, 보드게임 등을 통해 신체와 두뇌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뒤늦게라도 아내가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식사와 청소 등 가사에 관한 전반적인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니어스 가양타워 윤재건(92)씨의 후기 中
◇ 17년 실버타운 운영 노하우가 곳곳에 ‘서울시니어스타워(가양타워)’
위치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유형 도심형 입주방식 분양 및 임대
면적 39~164㎡ 분양가 (영구임대) 1억7257만~8억7852만원
월 생활비 (1인 기준, 식비 포함) 약 88만~160만원 문의 02-3660-7700
서울시니어스타워는 1998년 서울타워(서울시 중구 신당동)를 시작으로 강서타워(2003년,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분당타워(2003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가양타워(2007년,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강남타워(2015년, 서울시 강남구 자곡동) 등을 운영하고 있다. 모기업인 서울송도병원이 가까이 있어 24시간 의료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며, 식사·청소 등 살림에 대한 전반적인 서비스를 마련해 생활의 여유를 더했다. 20여 종의 문화시설을 갖추고 있어 30여 개의 사회·여가 프로그램 이용이 가능하고, 주거시설과 공용시설에 비상호출, CCTV, 안전손잡이 등을 설치해 안전하게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가양타워는 서울타워, 강서타워, 분당타워 세 곳의 노하우를 집약한 공간으로 부대시설이나 취미 활동 공간에 대한 시설 이용·운영비 선납 제도가 없어졌고,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 식사 등은 쿠폰제로 바뀌면서 원하는 만큼 비용을 내는 합리적인 생활비 운영이 가능해졌다. 대학병원급 전문 재활치료센터와 요양원·주간보호센터(day care center), 내과, 재활의학과 등의 클리닉센터가 단지 내 있다는 것도 가양타워만의 특징이다. 최근 서울시니어스타워는 전북 고창 석정온천지구에 가족 건강 리조트 ‘고창 웰파크시티’를 건설 중이다. 레저·의료·펜션·콘도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돼 가족과 함께 건강과 레저의 즐거움을 누릴 만한 시설이다. (2017년 입주예정, 문의 063-563-9300)
◇ 전원생활의 여유와 도심의 편리함을 동시에 ‘삼성노블카운티’
위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유형 반(半)전원형 입주방식 임대
면적 99~238㎡ 입주보증금 3억~9억6000만원
월 생활비 (1인 기준) 128만~222만원, 식비 57만원 별도 문의 031-208-8000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운영하는 삼성노블카운티는 2001년 개원 당시만 해도 전원형에 가까웠으나, 용인~서울간 고속도로 개설과 분당선 개통으로 반(半)전원형 실버타운으로 주목받고 있다. 수려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도심 접근성이 좋아 도심형과 전원형의 매력을 고루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실버타운은 거동이 자유롭고 신체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입주가 가능하고, 신변 자립이 어려워지면 퇴거해야 한다. 하지만 노블카운티의 경우 일반 입주자를 대상으로 하는 타워동 외에도 건강이 나빠져도 거주할 수 있는 너싱홈(치매·중풍 등으로 재활이 필요한 노인에게 24시 간호·간병 제공)과 프리미엄세대(타워동과 너싱홈의 중간단계)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시니어 주거시설이지만 ‘3세대 공존’을 추구하는 만큼 문화시설이나 스포츠센터 등의 부대시설을 모두 지역사회와 공유한다. 어린이집과 유아체능단을 운영해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세대 간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노인만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어른·아이가 어우러지는 활력 넘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6성급 호텔 서비스의 품격을 누리다. ‘더 클래식 500’
위치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 유형 도심형 입주방식 임대
면적 184㎡ 입주보증금 9억2000만원
월 생활비 (2인 기준, 식비 포함) 400만원 내외 문의 02-2218-5000
더 클래식 500은 400여 개의 가구 모두 단일 평수로 구성돼 있다. 구조와 인테리어에 따라서는 A 타입과 B 타입으로 나뉘지만 184㎡로 동일하다. 더 클래식 500은 호텔이 한 공간에 있는 만큼 입주민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게스트룸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위트룸·주니어 스위트룸·스탠더드룸 등 구성원에 알맞게 선택해 자녀, 손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입주민과 자녀들에게도 만족도가 높은 서비스다. 아울러 교통, 백화점·마트·영화관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편의 시설이 인근에 있다.
이러한 호텔식 서비스 외에도 피트니스센터, 수영장, 스파, 실내 골프 연습장, 도서관 등 일반적인 실버타운 내 시설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건국대병원 교수진으로 구성된 메디컬 전문의와 전담 건강 관리팀(의사·간호사·운동처방사·물리치료사·영양사 등)이 개인별 맞춤 건강·운동·영양 관리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입주민들은 다양한 의료 서비스 중에서도 전담 간호사의 케어 서비스에 크게 만족스러워 한다. 전담 간호사는 입주와 동시에 배정되는데, 입주자의 생활 질환부터 식사, 운동 등 전반적인 케어뿐만 아니라 외래진료 예약, 진료 상담을 연계해주며, 이후 투약 방법 교육 및 체크도 진행한다. 노인 복지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품격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 더 클래식 500의 메리트다.
귀촌 생활이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가치의 수단
농협대학에서 귀농·귀촌의 풍요로운 삶을 가꾸다
시니어들이 귀농·귀촌 대학을 찾는 이유는 농촌에 가면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질 향상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귀농·귀촌인의 정착 실태 장기추적 조사’에 따르면 귀농·귀촌 이유로 ‘조용한 전원생활을 위해서’가 31.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껴서’가 24.8%, ‘은퇴후 여가생활을 위해서’가 24.3%, ‘새 일자리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을 위해’가 22.2% 등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농사일이 좋아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 때문’, ‘생태·공동체 등의 가치 추구’가 각각 18.4%를 차지했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건강, 은퇴 후 여가, 전원생활을 위해 농촌을 찾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고학력일수록 은퇴 후 여가나 전원생활을 위해 귀농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귀농·귀촌자가 농촌 정착과정 상에서 자금 문제, 영농기술문제, 농지구입의 문제, 생활여건의 불편, 토착주민과 갈등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귀농·귀촌자가 다시 도시로의 재이주 의향을 보이는 주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기농림진흥재단은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을 대상으로 현장 중심의 이론 및 실습형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인 농촌 정착에 도움을 주고자 2009년에 개설하여 2015년까지 총 3000여명을 교육했다.
특히 경기농림진흥재단에서 위탁받아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농협대학의 귀농·귀촌 대학은 지난해 까지 7기 회원을 모집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120명에서 140명 정도 귀농·귀촌을 꿈꾸는 시니어들이 7개월 동안 성공적인 귀농·귀촌 정착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생산·가공·유통·마케팅 전반에 걸친 폭넓은 교육으로 본인에게 적합한 귀농 형태를 결정짓는 역량을 강화했다.
교육비는 200만원이 넘는 전체 교육비에서 자부담 일부(50만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경기농림진흥재단에서 지원했다. 오전에는 귀농 설계교육과 영농기술 기초학습이, 오후에는 농협대학 교내, 귀농·귀촌 대학 실습장에서 실습 및 현장 견학이 이어진다.
1인당 약 20여 평의 땅이 주어지는데 기초 교육이 끝나는 즉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농계획을 세우는 등 농촌 투어 등 다양한 경험과 실습이 이뤄진다.
경기농림진흥재단 귀농·귀촌 대학을 수료한 이석현(61)씨는 “농촌은 부부가 보다 심신의 여유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고 며느리, 아들 눈치 보지않고 좀 더 여유롭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며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영농 계획을 세웠고, 귀촌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큰 공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공부하고 싶은 시니어들의 참교육場 '사이버대학'
본격적으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갈수록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 세대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재교육 차원에서 사이버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30대 학생 비율이 점차 줄어드는 것과 비교해 40대와 50대의 진학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사이버대의 나이별 대학생 추이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30대의 입학이 매년 2.5% 정도씩 줄어드는 반면, 40대와 50대 이상 등록은 1%씩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50대 이상 입학은 전체 학생의 10.59%로 두 자릿수 평균율을 보였다.
사이버대학이란 정보통신기술, 멀티미디어 기술 및 관련 소프트웨어 등을 이용하여 형성된 가상의 공간(Cyber-Space) 안에서 교수자가 제공한 교육서비스를 학습자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학습하는 가상 학습 공간이다. 일정한 학점을 이수할 경우 학사학위 또는 전문학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고등교육법 제2조 제5호에 규정된 교육부 인가 대학이다. 사이버대학은 언제,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고 모든 수업과 시험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이버대학은 매년 6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신·편입생을 모집한다. 수능 입학을 거치지 않고 입학지원서와 함께 학업계획서와 인성검사를 통하여 지원할 수 있다.
학비는 학점당 6만~8만원 선이며 18학점 신청 시 학기당 100만~150만원 수준이다. 소득분위 기준으로 지급되는 한국장학재단(www.kosaf.go.kr)의 국가장학금 제도도 활용할 수 있다. 사이버대학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사이버대 종합정보사이트 CUinfo(www.cuinfo.net)를 참조하면 된다.
사이버대학은 2001년도에 총 9개 대학으로 시작했으며 현재 전국적으로 총 21개가 운영되고 있다. 10만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시니어가 몰리는 사이버대학 인기학과 F4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사회복지학과, 상담심리학과, 한국어문화학과는 학생의 1/4 정도가 50대 이상이다. 특히 미디어문예창작학과이 대한 60대 이상 시니어의 관심이 두드러진다.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미디어문예창작학과는 문예창작이론에 영상미디어를 접목한 학과다. 문학예술과 뉴-미디어에 대한 기본 소양을 배우고 폭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사유능력을 키워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에 실천적 문학인을 양성하는 것이 미디어문예창작학과의 목표다. 미디어문예창작학과에는 60대 이상 시니어들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것들을 글로 남기고 싶은 욕구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희사이버대학교에만 개설된 학과다.
한국어문화학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다. 어느 정도 배움이 있는 시니어들이 ‘교사’에 관심이 있고 또 외국인을 대상으로 봉사 차원에서도 활용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고려, 영남사이버대학교 등 9개 사이버대학에 개설돼 있다. 국어기본법에서 정한 한국어 교원 자격 요건에 맞춘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글로벌 환경, 다문화 시대에 필요한 국내외 현장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재를 양성한다. 영역별 필수 과목을 이수하면 한국어 교원 2급 자격증을 준다.
사회복지학과
사회복지학은 현대화, 산업화, 도시화 등 사회변화에 따른 삶의 질 향상과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실천적, 전문적 해결방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가족과 아동, 여성, 노인, 장애인, 청소년 등 다양한 대상들과 지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사회복지적인 개입 방안을 학습하고 이를 현실 사회 속에 실천하는 것에 주력한다. 사회복지전공은 전반적인 사회복지이론 및 기술의 습득, 각 전문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무적 능력을 갖춘 복지전문가를 배양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다. 사회복지학과를 선호하는 시니어들은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봉사하는 시니어들이 많이 찾는다.
상담심리학과
최근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행복한 삶과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이해,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상담심리학과의 경우 4년제 학위가 있는 시니어들이 선호한다. 이론과 실제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다양한 정신건강과 상담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통합적·전문적인 지식과 상담기술 등을 훈련하고 있다. 상담심리학과는 관련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교과목 운영은 물론, 기초단계의 상담심리 교육과정과 영역별 심화 및 응용 단계의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학생들은 졸업 후 다양한 휴먼서비스 영역에서 전문상담가로 활동할 수 있다.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80세 생일을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당신이 일생 동안 이루어 놓은 훌륭한 일들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야 물론 나의 가정입니다.”
인류의 과학사에 남긴 공적으로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폴란드 태생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퀴리 부인)는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도 가정, 가족관계가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특히 실버 라이프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가정, 특히 아내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후에 아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남성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 결혼 생활 20년이 지난 뒤에 하는 ‘황혼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결혼해서 30년이 넘은 부부의 이혼건수가 2004년에 4600여 건, 2009년에 7200여 건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1만300여 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헌상은 ‘남은 인생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실버 세대 여성들의 독립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월급을 가져다 주는 것, 즉 확실한 ‘현금출납기’의 역할만으로 집안에서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의 육아, 진학, 결혼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의 모든 일들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유교적 전통과 남성 중심 교육의 결과로 대다수의 아내들은 그것을 당연히, 혹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다수 부부들은 어쩌면 돈보다 더 중요한, 부부간의 대화와 소통 없이 같은 울타리 안에서 동거인 비슷한 생활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졸지에 ‘현금인출기’ 기능이 사라진 상태에서, 부부가 집안에서 얼굴을 맞대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상 역전, 혹은 갈등 증폭 현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평생을 가장으로 군림해 온 남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나면 누구나 외롭고 허전하고, 때로는 상당 기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런 공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내인데, 정작 가장 필요하고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 아내는 그런 남편들의 언덕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아내들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월급봉투를 무기로 삼고, 가정의 문제를 등한시해온 긴 세월동안,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기만의 성벽을 굳건하게 쌓아 왔습니다.
그러니 현금인출기라는 유일한 무기마저 잃어버린 남편이 그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의 상태가 돼버린 것이지요.
아내 역시 이성적으로는 남편이 안됐다거나,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세워진 심리적 장벽은 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튼튼한 것이 돼버렸으니까요.
오히려 은퇴하여 집에 박혀 있는 남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는 여성들의 수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s’ Syndroms)’이라는 생소한 정신질환까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부부간의 갈등이 발전하여 급기야 황혼이혼의 폭발적 증가라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된 것입니다.
황혼이혼을 당한 남편들의 그 이후의 삶은 거의 오아시스조차 말라 버린 사막에서의 생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맙니다.
노후에 벌어지는 부부갈등의 경우 자식조차도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역시 성장기에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였을 뿐, 아버지와 따스한 인간적 교감을 나눠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이 없어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남성의 경우는 배우자 없는 혼자만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남편들은 평생 동안 직장생활 말고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막고 행복한 노후의 필수 조건인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제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은퇴하기 훨씬 이전부터 남편들이 스스로 현금지급기 역할을 넘어서는, 아내가, 그리고 가정이 필요로 하는 다기능설비(multi-functional equipment)가 되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편들의 발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소위 3D 업종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 교육, 진학, 결혼 등의 일들이 결코 아내만의 일이 아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공동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내도 노후에 남편을 위해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은퇴한 이후로도 상대적으로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제가 그런 일들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평소의 저의 그런 자세와 노력을 인정하고 평가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평상시부터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평상시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는 생활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만약 주말의 취미생활을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평상시 주말에 골프 치는 노력과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아내를 위해 할애한다면, 노후에 아내가 남편을 배려하는 노력과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요컨대, 갑자기 늘어난, 두 사람이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함께 시간 보내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인 아내를 곁에 잡아 두고, 변함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해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내가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지 않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 상태로 노후를 보내게 된다면, 무엇보다 아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아내의 독자적 영역에 간섭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조만간 황혼이혼 통보서를 받아 들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버 세대 남성들이여!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라는 실버 보험광고에 등장하는 배우 송재호의 너스레는 결코 너스레가 아닌, 100% 진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삽시다.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어사전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고 나온다. 버킷은 얼마 전까지 바께쓰라고 부르던 양동이나 들통을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명단이나 목록을 뜻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에서 왜 이 같은 풀이가 나오는 걸까? 해서 좀 더 찾아보니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죽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속어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 데서 나온 것이다. 영화 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수용소장 아민 괴트를 교수형에 처할 때 발밑의 나무로 된 받침대를 걷어차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필자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처럼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챙기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누구나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제목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나온 영화 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두 사나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아온 카터 챔버스(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우연히 중환자실에서 만난다. 카터의 어릴 적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과 흑인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TV쇼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해 전용 비행기까지 갖게 됐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로 딸에게조차 잊힌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만큼 외로움의 빈자리도 큰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면서 의기투합한다. 급기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버킷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미리 하지 않은 사실에 후회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데 또 한 번 절망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사들이 갑자기 현직에서 사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3월 애플의 재무최고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는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1996년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430억원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와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의 CFO 패트릭 피체트 역시 52세때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이렇게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2014년 6월 E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가르칠 정도가 됐고 동네 향교(鄕校)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祭官)으로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은퇴를 걱정하느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영화 속 이야기이기는 해도 6개월 시한부 인생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요기 베라는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It ain’t over till it’s over)” 그의 말처럼 설사 은퇴했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은퇴(retire)’란 말 그대로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re-tire)일 뿐이다. 9회 말을 지나 잠시 배트를 놓고 글러브를 벗었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식 리그가 아니라 동네 야구일 수도 있지만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골프에서의 성패 역시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버킷 리스트는 살아 있고 거기다 뭔가를 적어 넣을 여백과 그 리스트를 실행할 용기 또한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떠올려보자.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큰 슬픔을 당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불행에 이은 고독과 병마를 와 같은 불후(不朽)의 작품들로 바꾸어 우리에게 남겼다. 말년에는 원주로 내려가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선생의 버킷 리스트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2014년 3월 애플의 최고재무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가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다들 놀라워했지만 정작 피터가 내놓은 이유는 단순명쾌했다. 1996년에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쯤 피터는 원하던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따고 자가용 비행기 하나 사서 가족과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구글의 CFO 패트릭 피셰트(52세) 역시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유명한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피터 팬(?)들이 수두룩하다.
‘종오소호(從吾所好)’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으리라’ 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리라’고 풀이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쉽지 않은 일이다. 젊어서는 엄청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또는 벌었거나 아니면 웬만큼 도(?)가 텄거나 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 하면 ‘또라이’ 또는 ‘고문관’이라는 말을 듣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주된 직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마음먹기에 달린 일로 바뀌어 간다. 엄청나게 재산이 많지 않아도 도가 트지 않아도 ‘또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가능한 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물론 이때 돈이 좀 더 많을수록 좋아하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수에 맞게 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널려 있다는 점에서 돈의 많고 적음이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2014년 6월 E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몇 년 전에는 50년 이상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써 온 일기가 언론에 보도되고 책으로 발간되기도 한 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점은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이제 가르칠 정도가 되었고 동네 향교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나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종오소호(從吾所好)’야 말로 좋아하는 일, 즐거움을 좇아 사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즐겁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연간 근로시간이 2124시간에 달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모자라는 것은 나만의 시간,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OECD회원국들의 평균 근로시간 1770시간과 비교하면 354시간, 가장 적게 일하는 독일(1371시간)과 비교하면 무려 1.6배나 더 많은 시간을 돈을 버는 데에 쏟아 붓고 있다. 야근과 주말 근무 등으로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인 것이다.
그러다 막상 은퇴하면 말 그대로 막막하기만 하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은 있지만 해 본 적이 없어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뭐 제대로 놀아본 적이 있어야 놀 것 아닌가? 그런데 은퇴 후 하루에 10시간씩 30년의 시간을 뭔가 의미있는 일이나 활동을 해야 하니까 총 11만시간이다. 등산이나 골프, 배드민턴, 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와 화투와 카드, 마작 등의 심심풀이를 배우자와 친구들과 함께 즐기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하다보면 식상해지면서 시간이 남아돈다는 게 은퇴한 선배들의 푸념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TV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단다. 그래서 그런지 은퇴 후 11만 시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3만시간 이상을 TV 시청으로 때운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사실 TV 시청이 시간 때우기에는 매우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놓는 시간에 TV를 본다면 그 또한 나름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TV를 보면서 얻은 정보를 활용해서 나다닌다면 더 좋지 않을까? 나다니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좋은 시간 때우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쿡방’을 보고 요리를 하거나 ‘먹방’을 보고 ‘먹행’(먹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다. 특히 ‘먹행’의 경우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필자에게 꿈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는 막걸리 양조장이 500곳이 넘는다고 한다. 그곳을 섭렵하는 것이다. 우연이지만 전국의 골프장 수와 비슷하다. 어떤 분은 전국의 골프장을 다 가보는 게 꿈이라고 하는데 그런 분이라면 더더욱 골프장 근처의 양조장도 한번 들러보면 어떨까? 1박 2일로 숙소도 잡아놓고 느긋하게 그 동네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잔 걸치면서 저녁을 해보라. 골프를 치기로 했으니 동반자가 2~3명은 될 것이고 그 동반자들이 다 마음에도 맞고 사는 형편도 비슷할 터이니 분위기 또한 더없이 좋으리라.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도 한두 잔 마시다보면 그 맛과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쿡방’이나 ‘먹방’이 유난히 인기를 끌었던 시기는 경기가 나쁠 때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요즘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이럴 때일수록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TV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돈을 쓰면 그게 경제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틈틈이 봉사와 기부활동도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돈을 버는 재미도 쏠쏠하다지만 돈을 쓰는 데에도 재미를 붙이면 그만큼 쏠쏠한 것도 없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는 재미, 즉 재미를 좇아다니는 재미만한 재미가 없을 것이다. 사는 게 재미있으면 시간도 잘 가기 마련이다.
은퇴 후 11만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좇으리라는 ‘종오소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자성어 하나 더. 무엇이나 다 때가 있는 법,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물실호기(勿失好機)!
이순재, 김형자, 송재호, 김학철 씨 등 실버 연령층에 해당하는 유명 탤런트 네 사람이 등장하는 ㅇㅇ 실버보험 광고를 모르는 분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송재호 :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
김학철 : 하하하! 선배님! 진짜 있어야 되는 게 뭔지 아세요?
김형자 : 당연히 ㅇㅇ 실버보험이지! 없을 땐 몰랐는데 있으니까 당당해지는 거 있지?
송재호 : 맞어! 나도 나이 때문에 걱정 했는데, ㅇㅇ 실버보험은 다르더라고…
김형자 : 그치?
김학철 : 보험료 오른다고 자식들한테 손 벌릴 수는 없잖아요. 이건 그럴 부담이 적어서 가입했어요. 고맙습니다 선배님!
이순재 : 제가 아니라 ㅇㅇ 실버버험에 고마워해야죠?
비단 이 실버보험 광고 뿐만이 아니라 은퇴한 실버 세대를 위한 각종 금융상품 광고를 보노라면 이런 상품들에 가입하는 것이 행복한 실버 라이프를 보장해주는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런 금융상품들은 있으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것들이 행복한 노후생활의 본질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버 세대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노후생활이 행복한 것이기를 염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특정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재테크 정도로 (행복한) 노후가 보장되는 것처럼, 인기 있는 실버 연기자를 등장시키는 광고를 통해 실버 세대들의 쌈짓돈마저 거두어 가려는 건 별로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행복한 노후생활이란 어떤 것이고, 그런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일까요…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염원하는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난해에 OECD가 ‘한국인의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56퍼센트가 ‘경제적 여유’ 즉 ‘돈’을 얘기했고, 17퍼센트가 ‘건강’을 얘기했으며, 12퍼센트가 ‘가족관계’를 들었습니다.
한편 60대 이상의 한국인이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동기로 ‘경제적 어려움’이 38퍼센트, ‘건강 및 질병’이 36퍼센트, ‘외로움’이 12퍼센트, 그리고 7퍼센트가 ‘가정불화’로 나타나고 있어, 실버 세대의 행복과 ‘돈’ ‘건강’ ‘가족관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 혹은 자살충동의 이유라고 거론하는 돈 문제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답변들을 심층 분석해 보면 ‘돈’ 그 자체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진정한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기 때문에, 혹은 내 욕망에 비해 가진 돈, 혹은 벌어들이는 돈이 훨씬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분자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분모로 하는 숫자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컨트롤하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문제에 관해 미국의 철학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행복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더 많이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특정한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건강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가 성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행복한 삶’이란 어떤 구체적 조건이 충족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란, 행복이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오늘’ 혹은 ‘나의 현실’ 속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은 ‘내일’ 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한때 독일 시인 칼 붓세의 ‘산 너머 저쪽’이라는 시가 50년 대와 60년 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남들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 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그러나 산 너머 저쪽 어느 하늘 아래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올 수 밖에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동화작가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이야기’에서 ‘미치르와 치르치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서지만 헛고생만 했는데 결국 파랑새는 자기집 처마 밑에 앉아 있었다’ 는 이야기도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에 있다는 걸 암시해 줍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워야 우리들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하루가 행복해야 내일이 행복합니다” 라는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말도 행복은 어디서 시작되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일이 온다고 하여 행복해질 수 없으며, 어렸을 때 혹은 젊었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하여 행복해지기는 어럽다는 얘기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즉 노후에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려 놓는 삶’ ‘버리는 삶’의 자세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이해력이 넓어지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버의 행복, 즉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려놓는 삶’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과거에 오랜 기간 고위직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대접을 받거나, 이른바 ‘갑질’을 해온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가 왕년에…’라는 생각을 털어버리지 못하는 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자신이 유별나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고, 남들에 비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속이 상하는 때가 있어도 늘 ‘내게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저와 같이 적당히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저는 대략 다섯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배우자라는 존재입니다.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 라는 말이 진리라 할 정도로, 나이 들어 배우자라는 존재는 삶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자식들과 손주들과의 관계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자식과 손주들과의 관계를 빼고 행복한 삶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친구’라는 존재입니다. 노후에 좋은 친구라는 존재는 사막을 걷는 순례자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이지요.
네 번째는 ‘일’입니다. 약간의 용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봉사의 성격을 띤 일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다섯 번째는 건전한 ‘취미생활’입니다. 운동을 겸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면 좋겠고,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우리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 수 있기 위해 미리부터 어떻게 살고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편 끝)
>> 조용경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게 돈이다.
은행권에서는 금융자산 10억원, 평균 재산 50억원 정도가 있으면 VVIP 자산가로 본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18만2000명이 여기에 속한다. 대체로 서울 강남, 서초, 송파, 양천과 경기 분당, 동탄, 일산에 가장 많은 부자가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자산가들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정확히 파악하고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문 잡지를 통해 세계 경제 흐름을 파악하고, 의식주 행락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가는 손주한테 우아하게 지갑을 여는 것보다 경제교육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손주에게 무조건 좋은 선물, 지갑을 크게 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며 “올바른 경제관념은 손주아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힘을 길러주므로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돈을 벌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산가들은 분명 일반인들과 다른 공통적 습관이 있었다. 청국장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먼 곳을 가는가 하면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둘이서 나눠 마시는 등 아낄 때는 최대한 아끼고 써야 할 곳에는 과감히 용단을 내린다.
인생의 오후를 여유롭게 유유자적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번 돈을 사회적으로 의미있게 사용하는 태도가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 PB센터 부센터장과 4명의 자산가에게 질문, 용돈관리의 결정적 오류에 관한 실체적 담론을 짚어봤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PB센터 부센터장은 20년 넘게 KB국민은행에서 퇴직연금과 프라이빗뱅킹(PB)을 담당하면서 KB국민은행 최초 국은인상 2회 수상, 카드 2만500장 신규 유치, 보험 700억원 이상 판매라는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 1퍼센트 부자들의 삶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자리하면서 돈을 다루는 그들의 마음과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베스트셀러 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부자를 가장 잘 아는 그가 말하는 ‘부자의 법칙’을 들어보자.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 PB센터 부센터장은 인터넷에 ‘신동일 꿈발전소’라는 자신의 사이트를 개설하여 스스로를 꿈발전소 소장으로 부르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경제독립을 이뤄야 하는 법이다. 그가 운영하는 꿈발전소는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존경받는 1퍼센트 부자와 행복한 부자들을 명예이사로 위촉하여, 그들에게 직접 배우며 부자의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50만원을 쓰느냐 50만원을 채워 넣느냐의 차이
“한 회장님이 해주신 얘기가 기억납니다. 그분은 과거에 바이어와 약속을 잡았는데 차가 밀려서 약속 시간 단 5분이 늦어지는 바람에 1년 매출의 절반을 버려야 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약속 시간 5분 전이나 10분 전으로 설정하지 않고, 반드시 15분 전으로 해서 여유 있게 사람을 만나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고 하죠.”
부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으로, 그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습관은 돈을 대하는 마음에서부터 다르게 접근함으로써 갖게 된다.
“한 공무원이 휴가를 내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월 소득이 적지 않았고 정년이 7년 정도 남아 있었는데 내 집 장만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금융자산은 2000만원에 불과했죠. 그동안 푼돈을 소홀히 다룬 게 원인이었던 겁니다. 백 원 단위의 거스름돈을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부자들은 돈을 1원 단위로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푼돈 관리를 잘 못하는 걸 보면, 그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부자와 보통 사람은 차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푼돈 관리뿐만이 아니다. 돈을 만드는 사람과 못 만드는 사람은 큰 돈을 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예를 들어 정기예금을 만들기 위한 950만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서 50만원은 쓰고 900만원을 예금으로 운용하기 마련이란다. 그러나 부자들은 어디서든 50만원을 가져와서 1000만원짜리 정기예금을 만든다고 한다. 간단한 차이처럼 보여도 습관으로 몸에 배지 않으면 실행하기 힘든 일이다.
성공 습관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
신 부센터장은 그래서 ‘마이 라이프 북’을 만들었다. 자신의 꿈과 목표를 적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체계적인 도움을 주게끔 도와주는 다이어리다. 다이어리에는 로드맵을 3년, 5년 단위로 작성하는 것과 수입 및 지출 파악, 다양한 종잣돈 마련 계획 설정 등 돈을 모으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세부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1퍼센트 부자들을 만나온 신 부센터장의 노하우가 그 안에 녹아들어있다. 그가 다이어리에 적용한 부자들의 성공 노하우는 크게 다섯 단계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입-지출?1원’ 이상이 되는 것이다. 다양한 지출이 넘쳐나는 현대에 매월 마이너스가 아닌 생활을 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는 수입을 늘리거나 지출을 줄이거나 2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 해야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하며, 현실적으로 당장 소득을 늘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지출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두 번째 단계는 종잣돈 마련이다. 1원이라도 남으면 그 돈을 쓰지 않는 한 반드시 종잣돈이 된다. 그리고 1원도 버리지 않고 살피는 습관이야말로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세 번째 단계는 추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아바타’ 창출이다. 여기서 ‘아바타’란 나를 대신해서 수입을 올려 줄 모든 수입원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월세가 나오는 수익형 부동산, 증권 투자를 통한 금융소득을 아바타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아바타’ 수입이 현재 수입을 초과하는 단계인데, 신 부센터장은 이를 진정한 경제독립이라고 부른다. 확실한 ‘아바타’가 생겨서 그것만으로도 생활을 영위하는 게 가능할 때, 그때야말로 현직에서 은퇴해도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성공 습관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한 첫걸음은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죠. 특히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일은 스마트폰보다는 종이에 적는 걸 추천합니다. 스마트폰에도 일정 관리 및 메모 기능이 있긴 하지만 경제독립의 꿈을 이룬 부자들은 여전히 종이에 적기를 좋아해요. 손을 움직일 때 가장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죠.”
부자는 돈을 대하는 방법이 다르다
신 부센터장의 말을 들을수록 부자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돈에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른 관점이란 돈에 대한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부자들이 작은 습관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런 작은 습관마저도 무너지면 그보다 더 큰 것들도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낭비가 없으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방법들을 자연스레 모색하게 된다.
“샐러리맨은 수입이 월급 통장 하나지만 부자들은 계속해서 다른 수입원을 모색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퍼리치들은 투자를 할 때면 3-3-4의 균형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슈퍼리치들의 자산을 보면 부동산이 7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부동산은 사실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나머지 30퍼센트를 주로 운용하는데, 그 30퍼센트 중 절세 상품에 30퍼센트, 정기예금 같은 상품에 30퍼센트, 그리고 투자 자산에 40퍼센트를 배분합니다. 안전 자산과 투자 자산을 6 대 4로 놓는 거죠.”
‘돈에는 흐름이 있는데 그 길을 막지 말라.’ 신 부센터장이 좋아하는 말이다. 단순히 정기예금으로 쓰일 수 있는 돈도 조금만 발품을 팔면 채권이라든지 펀드 등 그보다 더 효율적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관련 정보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속 확인하며 기회를 보는 습관을 지녀야 할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통큰’ 확신이 있다
“과거에 한 1000억 원대 슈퍼리치인 회장님은 선풍기를 하나 틀어놓고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건 습관이라기보다는 신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낄 때는 아껴도 쓸 때는 또 통 크게 쓰기도 해요. 사업 기회가 오면 과감한 투자를 선택하고 아무도 모르게 기부하는 것 또한 슈퍼리치들의 특징이죠.”
크게 투자해야 할 때가 오면 크게 투자하는 것, 기부해야 할 곳에 기부하는 것은 자신이 투자할 대상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확신은 오랜 시간 동안의 공부와 경험을 통해 모종의 기술처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신 부센터장은 초고액 슈퍼리치로 갈수록 투자와 관련해 두텁고 핵심적인 전문가 집단을 네트워크로 두고 있다고 말한다. 보험 하나를 봐도 전문가 2~3명의 의견이 일치했을 때에야 가입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고 계획을 수립하는 것 자체가 50퍼센트는 이룬 것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만 보면 저걸 어떻게 이뤘지 싶어 먹먹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힘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보다 나은 2016년을 위한 다짐, 아직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