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하면 ‘레미제라블’, ‘레미제라블’ 하면 ‘장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자신의 이름에 나란히 할 만한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는 것은 소설가에게 크나큰 로망이라 하겠다.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허균 최후의 19일’ 등 다작의 장편소설을 통해 실존 인물의 삶을 재조명해온 소설가 김탁환(金琸桓·50). 그는 최근 집필한 장편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주인공 ‘달문’이야말로 20여 년 소설가로 살며 만난 ‘인생 캐릭터’라 말한다.
김탁환의 인생 캐릭터 달문을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 짓뭉개져 입보다 더 낮은 콧등, 날 때부터 털 하나 없는 눈썹, 쏟아질 듯 흔들리는 커다란 눈망울, 시궁창 냄새처럼 풍기는 체취. 완벽한 추남(?) 설정이지만, 소설을 읽고 난 독자라면 그의 아름다운 성정에 매료되고 만다. 세상일에 초연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기희생을 마다치 않는 착하디착한 사내 달문.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뛰어난 춤사위로 여러 사료에 기록된 이른바 ‘조선시대 연예인’이었던 것. 실제 인물이면서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의 주인공 ‘광문’과도 같은 달문의 존재를 김탁환이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무렵.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라 여겼고, 달문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쉽사리 글로 옮길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엔 달문의 1%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소설가가 되고 나서 10%쯤 알았을까? 달문을 처음 만나고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겪고 나서야 그의 삶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었죠. 좋은 인물을 잘 이해해서 독자들에게 글로 보여줘야 하는데, 나는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 7년은 못 쓰겠다고 미뤄온 것 같아요.”
그러던 중 2014년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김탁환은 한동안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등 세월호 관련 소설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거리로 나가 희생자들의 슬픔에 귀 기울였고, 자기 아픔처럼 촛불을 밝혔던 수많은 ‘달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평생 자기희생을 자처하며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한 달문이라는 인물이 이해됐고, 소설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을 만들면서 달문을 알아가다 보니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세월호 소설을 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내게 수고한다든지 고맙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몰랐거든요. 달문의 삶을 잘 이해하고 나니, 그동안 규정짓지 못했던 내 행동까지 이해되더군요.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거리로 나가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내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고작 3~4년 했는데, 달문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구나. 그런 점에서 달문이 인생 대선배처럼 느껴졌죠.”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자의 고고한 인생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는 작품 제목을 통해 달문을 ‘고고하다’는 표현으로 압축했다. 주인공의 외롭고 가난한 생애와 세상일에 고상하고 초연한 태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설명을 더하자면, 달문은 외롭고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았고, 고상하고 초연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캐릭터다. 달문이 그러듯 고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달문의 특징은 남들이 하는 건 안 하고, 남들이 안 하는 건 한다는 거예요. 가령 사람들은 돈을 벌면 저축하는데, 달문은 돈을 모을 생각도 안 하고, 있는 돈도 모두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줘 버리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자기네가 하는 걸 하지 않으니,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 중 대표적인 게 바로 ‘경쟁’이라는 건데, 달문은 경쟁하지 않죠. 자발적으로 경쟁에 끼지 않음으로써 경쟁이라는 것 자체를 무력화해버려요. 그러니 세상일에 초연할 수밖에요.”
물론 달문의 고고한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살아봄직하다고 느끼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원할 뿐,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이에 그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달문은 뭔가를 갖고 있어서 그런 인생을 사는 게 아니에요. 무소유의 삶이죠. 오히려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달문은 다 내려놓고 살면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 딱 하나만을 취하죠. 그게 바로 춤이고, 아름다운 춤을 갈고닦는 일에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요. 제 경우엔, 장편소설 쓰는 게 그 하나입니다. 전에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귀가 얇아 기웃기웃했는데 나이 들수록 그런 부분이 많이 정리됐어요.”
그의 삶이 간결해졌다는 건 책의 작가 소개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 책들만 하더라도 대표 작품과 이력들로 빼곡했던 글귀들이 ‘소설가 김탁환’ 단 여섯 자로 단출해진 것. 그의 이름 앞 ‘소설가’라는 단어가 마치 달문의 생애처럼 고고하게 느껴진 순간이다.
오르막을 향했던 삶, 내리막을 고민할 때
소설 속 달문은 “나의 미래를 만나러 간다”며 명창, 고수, 광대 등 여섯 명의 선배 재인(才人)을 찾아 나선다. 달문은 “선배들이 재인으로 산 걸 온통 후회하며 쓸쓸히 떠나게 하긴 싫었다”며 그들에게 자신이 산대놀이로 번 돈을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세상만사에 초연하리라 여긴 달문 역시 나이 듦에 대한 고민은 있던 터였다.
“달문은 춤꾼인데, 나이 들어 몸이 성치 않으면 춤을 출 수 없잖아요. 선배들처럼 비참하게 늙어갈 수 있으니, 더 예민할 수밖에요. 당시 이름 날리던 재인이라 그 분야에서는 정상에 있었지만,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점에서 나이 든 작가들의 작품을 읽곤 해요. 그들의 글을 보면 말년에 구력이 더해져 빛나는 통찰의 문장이 있는가 하면, 이전만 못 한 부분도 있거든요. 서글프더라도 늙어서 내가 못하는 것들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게 바로 삶의 지혜라고 봐요.”
소설가로서의 오르내림을 고민하며 충실히 살아가는 그이지만, 20대 후반까지 자신이 소설가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박사과정을 수료하며 10년 가까이 문학을 해오면서도 소설만큼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분야라 단정 지었었다.
“결국 비평가로 등단했는데, 지나 보니 스스로 알겠더라고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은 되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라는 걸요. 그러다 사관학교 가서 교관으로 지내며 소설 한 편을 썼는데, 그 작품을 읽고 누가 편지를 보냈더군요. 소설에 재능이 있으니 꼭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죠. 그분이 바로 황현산 선생님이에요. 사실 그러고 기회가 없어 잘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김탁환 너를 발견한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요. 그래서인지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처음 소설가가 됐을 때가 생각나요. 제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인데, 지금 많이 아프셔서 마음이 좋지 않아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틀 뒤인 8월 8일 우리 시대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부고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득 언젠가 ‘왜 소설을 쓰느냐’라는 질문에 “작은 기적을 믿기 때문”이라던 김탁환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작은 기적이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독자가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그의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게 됐다는 엽서를 받는 일이다. 그의 바람처럼, 거리로 나온 수많은 아픔을 다독이며 작은 기적을 이뤄갈 김탁환의 소설들을 기대해본다.
등록금 보태려던 20대 젊은이가 택배물류창고에서 웃옷을 벗은 채 빗자루를 들고 컨베이어 벨트 밑으로 들어가 작업하다가 감전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방송에서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노동당국에서 택배집하장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고 경찰에서 누전차단기 작동여부와 안전수칙을 제대로 준수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사고주위를 면밀히 조사하고 과학의 힘을 빌린다면 원인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전기는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없지만 전기화재나 전기감전사고의 원인도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여름철은 감전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날씨가 더운 탓에 옷을 벗기도 하고, 몸에 땀이 나면 전기가 더 잘 통하기 때문이다. 또, 더우면 정신적으로도 해이해져서 주의력이 떨어지는 것도 감전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나는 전기안전 기술사로 직업 특성상 전기재해 현장을 많이 다니며 사고 원인을 조사했다. 이런 감전 사고를 막으려면 첫째로 설비를 견고하고 안전하게 설치해야 한다. 누전이 될 때 누전을 검출하여 자동적으로 전원에서 회로를 분리하는 누전차단기를 설치하고 병행하여 누전전류를 대지로 흘려보내는 접지시설도 마련해야 한다. 사람은 잠을 자지만 이런 안전설비는 쉼 없이 24시간 감시를 한다. 그래도 100%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전기 전문가가 시설을 체크하고 제대로 동작하는지를 확인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다음으로 사용자의 안전의식이다. 전기설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이나 몸이 직접 전기충전부에 닿으면 누전차단기가 작동해도 감전을 당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일어났던 사고를 소개한다.
청소부 아주머니가 변전실 청소를 하다가 변압기에 감전을 당한 사건이다. 변전실은 직접전기가 충전되는 변압기나 차단기가 설치된 위험한 장소가 있고 근무자가 책상에서 서류정리 등 일반 업무를 보는 장소가 있다. 이 사이를 구획하여 관리한다. 전기담당자가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책상 위나 바닥정도만 청소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출입금지 표시가 된 변압기에는 청소하러가지 않으리라 속단한 것이 화근이었다. 청소아주머니는 청소를 깨끗이 해서 칭찬을 듣고 싶은 욕심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변압기가 있는 곳에 들어가 먼지를 닦으려다 변압기에 손을 대는 순간 감전되었다. 이때는 차단기가 정상적으로 동작을 해도 워낙 높은 전류가 흘러 감전피해를 입게 된다.
작업자가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고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작업책임자는 자신의 지식만큼 다른 작업자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겨서는 안 된다. 기계 밑에는 전기스위치와 전선이 있으니 들어가지 말고 청소는 어디까지만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일러 줘야한다. 작업자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생각지도 못한 잘못을 저지른다.
작업자는 자기 주위에 설치된 기계나 전기나 화학설비가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 만약 잘못되면 어떤 징후가 생기며, 그럴 때는 작업자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관리자는 교과서적인 일반 위험에 대해서만 교육하고 책임 면피용 교육 기록만 해두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행동이다.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약품이 폭발성이나 부식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전기설비가 달라져야 한다. 만약 폭발성 가스가 있는 곳이라면 방폭형 전기 설비를 해야 한다.
사람은 깜박 실수를 한다. 위험한 장소에서는 혼자 작업 시키는 것을 금해야 한다. 혼자 작업을 하더라도 옆에서 지켜주는 감시자가 필요하다. 사회가 온전하려면 직접 생산과 관련이 없는 군인이나 경찰이 필요한 것처럼, 안전작업을 위해서는 감시자가 꼭 필요하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안전은 규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켜야할 규범이다.
50여 년 전 가족을 따라 우연히 전라도 나주에 왔다가 한국 학자로 살게 된 베르너 사세(Werner Sasse·78)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월인천강지곡, 농가월령가, 동국세시기 등은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한국 고대 언어 연구를 위한 목록들이다.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2010년에는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와 황혼 재혼을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모두 운명에 이끌리듯 일어난 일들이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데 현생에 독일로 유배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전생의 육체가 기억해놓은 장면들이 있다면 현생에서 이끌림으로 다가왔으리라. 한옥과 한복을 좋아하고 남도의 홍어와 젓갈의 깊은 맛까지 알아버린 푸른 눈의 남자. 이렇게라도 주석을 달아야, 독일에 있을 때도 매일 아침 한국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봤다는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6년. 독일의 원조로 전남 나주에 비료공장이 만들어졌을 때다. 당시 독일 기술자였던 장인이 “한국에 기술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가 이 나라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25세였던 독일 청년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일 열심히 하고, 정 넘치고, 잘 놀고, 흥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4년간 전라도와 서울에서 살다가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나라가 여전히 궁금했다. 결국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30세의 나이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보훔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로 지냈다.
50여 년 한국 문화를 연구하며 보낸 그는, 이제 자신의 고향은 독일이 아니라 전라도라고 말한다.
다시 찾은 사랑, 그리고 황혼 재혼
태풍 쁘라삐룬이 올라오던 날, 그가 사는 전남 담양으로 출발했다. 비가 사납게 몰아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0여 킬로미터쯤 더 가서야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에 젖은 나리꽃이 마중하듯 반갑게 피어 있었지만 80이 가까운 두 사람이 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산속이었다. 갑자기 몸이라도 아프면 어쩌려고 이렇게 깊은 곳에서 사시느냐 했다. 그러자 홍안의 미소년 같은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그런 걸 왜 미리 걱정해요? 시니어의 관심은 오로지 건강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친구랑 산에 올라갔는데 다음 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이고 나 힘들어 죽겠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봐. 온몸이 다 아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보야, 나도 아파. 그런데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연습 없이 산에 올라가서 아픈 거야. 젊은 사람도 연습 없이 산에 오르면 힘들어’ 하고 말해줬어요. 제가 보기엔 나이가 아니라 엄살이 문제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이 산속에서 어떻게 하냐고요? 일주일만 버텨보셔요. 저절로 치유됩니다.”
그는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사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다고 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불안감이 아닌가 하는 진단도 내린다. 자신은 ‘지금, 여기’ 일만 생각해도 하루가 너무 바쁘다 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요약해보니 그렇다.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낯선 나라에 매료돼 고려방언이니 가사문학이니 한국인들도 쉽지 않은 공부에 골몰하더니, 70세에는 뒤늦은 재혼으로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들은 졸혼이니, 휴혼이니 하면서 무거운 결혼생활 끝내고 혼자 한번 살아보리라 희망할 때 그는 한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배우자는 자유롭고 파격적인 춤을 추며 살아온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 그래서 그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지인 전시회 때 처음 보고 몇 차례 우연히 더 만나게 됐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보자 했지요.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니, 그 나이에 결혼을?’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데 정년이 있나요? 그런 생각에 얽매여 주저할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홍 선생과 같이 산 지 벌써 8년이나 됐네요. 그녀와 저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충돌하는 일이 없어요. 각자 하는 일도 있어 존중해주고 도와줄 일 있으면 힘을 보태면서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젊을 때 결혼했다면 이런저런 욕심이 생겨 이거 하면 안 되고 저거 하라며 상대에게 잔소릴 해댔겠죠. 나이가 드니 상대가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이해하게 되더군요. 집안일도 남녀 구별 안 해요. 누구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자유롭게요.”
사람들은 더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관심과 간섭 속에 상대를 가두곤 한다. 삶의 상상력을 펼쳐야 할 때는 이런 욕구들에 맥없이 멱살 잡혀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베르너 사세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점들은 스트레스가 아닌 영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움, 즉 영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결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해학’이라 덧붙인다. 깊은 산속 빗소리와 함께 들은 최고의 문장이었다.
민낯이 예쁜 나라, 한국
“가끔 한국의 어떤 음식이 맛있냐, 한국의 무엇에 매력을 느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답이 하나일 수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술을 예로 들면, 한국 음식과 곁들일 때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지요. 육체노동을 할 때도 물론 막걸리가 어울리고요. 그러나 목이 마를 때는 맥주가 맛있고, 특별히 분위기를 내야 하는 날은 와인이 낫지요. 한국 음식, 한국의 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랑 먹고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 맛과 매력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그는 전통 문화란 힘들게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고 즐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것을 시대에 맞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데서 진정한 전통의 힘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제가 개량한복 입고 독일 가면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디자인이 예쁜 옷 샀냐고 묻습니다. 저는 양복보다 한복이 훨씬 편해서 즐겨 입어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정작 한복을 잘 입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서는 아름다운 옷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건 앞뒤가 좀 안 맞는 행동으로 보여요. 불편해서 입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데 설득력도 없어 보이고요. 그렇다면 늘 입고 다니는 양복은 과연 편해서 입는 걸까요?”
저서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서도 그는 한국인의 역사관을 냉정한 시각으로 언급했다.
“한국 사람들은 ‘오천년 역사’,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오천년이면 신석기시대입니다. 한국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죠. 외국인들에게 이런 역사관 공감될까요? 저는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봐요.”
가차 없는 논리의 학자다운 지적이다. 고유 문화에만 집착해 사실을 회피하는 자세는 건강한 역사의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보기에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한국이 더 아름답다. 그걸 봐버린 죄(?)로 한국인 못지않은 긍지로 이 땅의 문화를 연구하며 반평생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그는 요즘 수묵화에 빠져 있다. 한국을 소개할 책 번역도 틈틈이 하고 있지만 붓을 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얼마 전에는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서울에서의 전시도 준비 중이다.
“수묵화는 20년 전부터 그렸어요. 한지를 알게 된 뒤부터죠. 서양화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만 동양화는 달라요. 내 의지가 아닌, 붓이 그리는 대로 따라가게 돼요. 동양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붓과, 나와, 한지의 대화예요.”
이제 풍류의 멋까지 섭렵해보겠다는 태세다. 전력을 다해, 더러는 문득 생각난 듯 ‘지금, 여기’의 삶을 살며.
기존 출판의 문제점인 비용과 재고부담을 극복하고자 ‘개인출판’이 등장했다. 자신만의 책을 갖고 싶은 독자라면 교보문고의 개인출판 시스템 ‘퍼플’을 이용해보자.
지금은 출판사에 투고되는 원고의 대부분이 사장되고 있다. 자가 출판은 글을 쓴 저자가 직접 사비를 들여서 책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자비 출판이라고도 부른다. 이 경우 출판사는 저자에게서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을 먼저 받고 일을 진행한다. 비용도 문제지만 지명도 없는 저자는 ‘재고처리’ 때문에 고생이 많다.
기획 출판은 일반적인 출판 방법으로 원고를 받고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출판사가 부담하는 대신, 정가의 약 10% 정도를 인세로 저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출판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마케팅과 물류 관리까지 모두 알아서 해주기에 저자로서는 비즈니스 면에서 출판사에 일임하고 저작에만 집중하면 된다.
개인출판은 기존의 출판과 달리 비용부담이 전혀 없다. 먼저 주문을 받은 후 제작과 판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의 출판문화의 대혁신이다. 원고작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책임이다. 누가 교정을 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 충분한 원고가 먼저 작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시 100페이지, 산문 200페이지 이상이 보통이다. 물론 전문사적은 제한이 없으나 소책자인 경우에도 30페이지 이상을 보통 요구하고 있다.
원고가 완성되면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한다. 다음에 ‘작가등록’을 한다. 등록승인은 곧 나온다. 홈페이지 '북 만들기 START'에 들어가 안내서에 따라 PDF 양식으로 작품을 올린다. 제목을 정하고 차례, 저자소개, 책 소개가 중요하다. 표지는 책의 얼굴이다. 앞표지, 뒤표지, 등지, 앞날개, 뒷날개 모두 디자인하여야 한다.
판매자 계정을 만든 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판매신청을 하면 관리자의 승인이 날 때까지 며칠이 소요된다. 보완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 요구가 들어온다. 정도에 따라 여러 날이 필요할 때도 있다. 승인이 완료되면 홈페이지 ‘신간 서적’에 제목, 차례, 저자, 책 소개가 등재된다.
POD 도서는 주문형 출판으로 파일 형태로 가지고 있다가 주문이 있을 때 제작되어 고객에게 배송되는 시스템이다. 즉 편집이 완료된 파일만 있다면 특별한 비용이 들지 않고, 오히려 판매 수익을 받는다. 도서 정가에 제작비용과 저자 인세가 포함되는 것으로 작가가 지급하는 비용은 전혀 없다. 제작 사양을 모두 포함한 판매 정가가 정해지고 정가의 20%가 인세로 지급된다. 출간된 책은 교보문고의 유통망을 통해 웹사이트뿐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의 교보 eBook 애플리케이션, 제휴 채널 등에서 판매된다.
아내가 무릎 연골을 다쳐 병원에 함께 가는 중이었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코너가 흘러나왔다. 그 내용은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등산 중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배낭 속 사과를 꺼내 먹고 싶었으나 정상에 올라 먹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참았다. 정상에 올라 기쁜 마음으로 사과를 꺼내는 순간 절벽으로 떨어져 결국 먹지 못했다. 그 당시엔 실망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사과는 애초에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을 때 먹었어야 했는데 나중을 위해 아껴두었다니' 하면서 우리의 삶에서도 미래를 위해 지금의 삶을 억제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 일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아내는 봉사활동과 다른 일을 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고 필자도 퇴직 전보다 퇴직 후에 많아진 약속으로 인해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착용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머플러, 퇴직 후 전원생활을 하면서 농사지을 귀한 씨앗 등 미래를 위해 잘 보관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잠시 일을 미루고 내가 꼭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바로 실천해보자. 업무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을 해보자.
아내의 무릎치료가 끝나면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싶다. 설령 아내가 거절한다 할지라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더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기 전에 말이다.
우리 인생을 1막, 2막, 3막으로 나눌 때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 정년까지 일하는 시기를 1막으로 잡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55세에서 60세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거나 봉사하는 시기를 2막으로 잡는다. 60세 이상 70세까지로 본다. 인생 3막은 유유자적하며 사는 시기로 70세 이상부터 죽을 때까지이다.
필자는 인생 1막을 잘 보냈고, 인생 2막에서도 약 20년간 ‘액티브 시니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다. 봉사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시니어 활동도 열심히 했다. 특히 댄스는 현역 선수로 눈부신 업적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산다는 데에 이젠 좀 지치기도 해서 여러 가지 공직도 다 내려놓고 쉬기로 했다. 인생 2막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인생 3막의 시작이다. 이제껏 잘 나가지도 않던 지역 문인협회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별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남들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참석만 해주면 되는 쉬운 일이다. 패키지여행도 자주 다닌다. 그동안 발목을 잡던 댄스 교실도 그래서 접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 어울리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소개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이름을 말한다. 그러나 음향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장소나 잡담하는 사람을 통제하기 어려운 분위기상 잘 안 들리고, 들린다 해도 금방 까먹는다. 현역 때 직장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 2막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특기가 있는지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필자는 무엇을 특징적으로 내세울 것인가 고민했다.
인생 2막의 화려했던 활동을 대부분 접고 나니 필자 소개를 할 만한 재료가 빈약해졌다. 온종일 뒷방에 처박혀 있는 ‘뒷방 노인’은 아니고, 아무것도 안하고 놀러 다니는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성의해 보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특기 분야에서 ‘댄스’와 저서 ‘캉캉의 댄스 이야기’라는 책이다. 댄스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분야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나기 힘든 사람이 댄스 하는 사람이다. ‘댄스 강사’에 ‘현역 선수’라고 하면 반응이 요란하다. 춤 솜씨를 보여 달라며 시끄럽다. 더구나 기네스 기록이 될 만한 두꺼운 분량의 4310페이지 책 ‘캉캉의 댄스 이야기’ 저자라고 하면, “설마?” 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스마트 폰 검색을 해본다. “책을 몇 권 냈소!”라고 하기보다 이 책 한 권으로 끝나는 것이다. 책 이름이 ‘캉캉의 댄스 이야기’이니 외우기 어려운 실명 대신 ‘캉캉’이라는 닉네임까지 한꺼번에 소개한 셈이다.
사실 댄스는 그만두었지만, 댄스를 가르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패키지여행 때 일찍 호텔에 들어가는 날은 할 일이 없다. 시골이라 호텔 밖에 나가봐야 들판이고 날씨도 안 좋으면 호텔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여름철 유럽은 백야 현상으로 밤늦도록 하늘이 훤하다. 그럴 때 호텔 세미나실을 빌려 댄스 강습을 하는 것이다. 1시간 정도면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열심히들 댄스를 하고 나온다.
인생 3막은 남들과 어울리되, 구속력이 없는 모임에 나가는 것이다.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르면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나가면 좋고 안 나가도 좋아야 한다. 패키지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음 여행 때 다시 보는 일도 있지만, 드물다. 그래서 부담이 없는 것이다.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커뮤니케이션 학자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말을 잘한다고 느끼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목소리(38%), 표정(35%), 태도(20%), 논리(7%) 순이다. 즉 말주변이 없어 고민하는 이들도 목소리와 표정, 제스처 등을 신경 쓴다면 충분히 말 잘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 임유정 라온제나 스피치 대표에게 자가 목소리 진단과 개선 방법 등에 대한 조언을 들어봤다.
도움말 임유정 라온제나 스피치 대표
일러스트 원앤원북스 제공 참고 도서 ‘성공을 부르는 목소리 코칭’(임유정 저)
STEP 1 내 목소리도 문제가 있을까?
임유정 대표는 “중장년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동안의 삶이 녹아 있다”며 “목소리가 따뜻하고 여유 있는 이가 있는 반면, 톤이 높고 빠르며 독단적인 말투를 지닌 이도 있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수록 오랜 세월 자기 목소리와 표정에 익숙해져 문제점이 있더라도 잘 모르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임 대표가 코치한 한 기업의 대표 A 씨는 평소 사람들에게 무섭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A 씨 자신은 왜 그런 인상을 주는지 몰랐다는 것. 이에 임 대표는 몰래 그가 대화하는 모습을 찍어 보여주었는데, 그제야 사람들의 반응에 수긍했다고. 이렇듯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와 표정, 제스처가 다른 이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점을 인식하고 개선 의지를 갖는 것이 좋은 목소리를 향한 첫걸음이다.
STEP 2 ‘자기 경청’을 통한 목소리 자가진단
A 씨처럼 우연히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 “내 목소리가 원래 이런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나 표정, 제스처를 점검해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말하는 모습을 직접 동영상으로 찍거나 대화를 녹음해 살펴 듣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기 경청을 통해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노력하다 보면 발음과 발성이 좋아지고, 대화의 호흡을 맞추는 방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자기 경청 SLRF 법칙: S-말하기(speaking), L-듣기(listening), R-인정하기(recognition), F-강화하기(finding)
STEP 3 몸의 언어를 향상하는 방법들
나에게 맞는 키톤 찾기 내게 맞는 자연스러운 키톤으로 말했을 때, 듣는 사람도 편하게 들을 수 있다. 먼저 편안하게 선 자세를 취한다. 어깨를 내려 몸의 긴장을 풀자. 몸이 너무 긴장되어 있으면 내 몸을 울려 소리를 낼 수 없다. 팔을 아래로 툭툭 털고, 명치라고 불리는 공명점(맨 아래 갈비뼈 중간 지점)을 누른다. 이 상태로 “아~” 하고 소리를 낼 때 나오는 편안하고 안정된 음이 자기 몸에 맞는 키톤이다.
1) 말투와 제스처는 동그랗게
발성학자들이 꼽는 가장 좋은 목소리는 ‘동그란 목소리’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 중 말을 할 때 자신감 있으면서도 겸손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면, ‘동그란 목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말과 제스처는 짝꿍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투가 아닌 부드럽고 교양 있는 동그란 목소리와 제스처에 익숙해지자.
2) ‘고현정 표정 100종 세트’ 따라 하기
표정이 좋아지는 방법은 딱 하나다. 말하는 내용에 맞게 표정이 잘 따라가주면 그만. 희로애락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는 훈련이 중요하다. 평소 얼굴 근육을 스트레칭을 해둬야 다채로운 표정을 자연스럽게 지을 수 있다.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고현정 표정 100종 세트’를 쳐보자. 검색한 이미지를 보고 따라 하면 도움이 된다.
STEP 4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의 기술
1) 어휘보다는 에피소드를 늘리자
한 분야에만 종사해온 이의 경우 자기 일에 관한 이야기는 술술 털어놓는 반면, 그 외의 대화에는 자신 없어 하곤 한다. 말은 소재, 즉 에피소드가 많아야 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수록 에피소드는 더욱 다양해지기 마련. 특별한 소재가 없다면 공감과 질문 기법을 활용하자. 상대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요? 대단한데요”라고 공감하거나 “참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질문하다 보면 한결 여유롭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2)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뉘앙스도 중요
자기 경청을 통해 단순히 목소리나 발음만 듣는 것이 아닌 말의 뉘앙스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임 대표는 “스피치란 내용과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며 “가령 배우자에게 ‘당신 참 대단해’라는 말도 진정성 있게 하는 것과 비아냥거리듯 표현하는 것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조언한다. 아무리 발성, 발음, 톤이 완벽했더라도 이러한 뉘앙스로 인해 상대가 불쾌해하거나 말뜻을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상황별 목소리&제스처 코칭
#1 취임식 스피치를 할 때
취임식에서는 “이런 중책을 맡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하겠다”라는 감사함과 열정의 목소리를 가득 표현해야 한다. 첫인사를 할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 중·후반부에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원고를 미리 준비했다면, 보고 읽는다고 해서 리듬이 너무 빠르면 안 된다. 오히려 천천히 하나하나 또렷이 읽어야 책임감이 강한 목소리로 들린다. 또 중간중간 쉼을 줘야 한다. 특히 문장 끝머리에는 고개를 들어 청중을 바라본다.
#2 건배사를 할 때
신년회, 송년회, 동창회 등 각종 모임에 가면 으레 건배사를 한다. 자신감 없는 건배사로 흥을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열정 가득한 건배사로 흥을 돋운다. 알다시피 건배사를 할 때는 목소리가 일반 말하기 볼륨보다 커야 한다. 그러나 천천히 말하는 것이 관건이다. 빠르게 말하면 너무 준비한 티가 나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말하되, 끝에 건배 제의를 할 때는 더 큰 목소리로 카리스마 있게 외쳐야 한다.
#3 결혼식 주례사를 할 때
주례사를 할 때는 어떻게 주례를 맡게 됐는지 그 사연을 오프닝에 넣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신랑·신부에 대한 애정, 양가 부모를 향한 존경심을 가득 담아 말하되, 자기 자랑이나 ‘이렇게 살라’는 훈계는 절대 사절이다. 내용은 “첫째, 서로 대화를 많이 하자. 둘째 ~ 셋째~” 이런 식으로 크게 3가지로 압축해서 말하는 것이 좋다. 하객과 함께할 수 있는 퍼포먼스도 넣어보자. 박수를 유도하거나 말을 따라 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4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자기소개가 너무 길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소개를 할 때 ‘난 뭐라고 이야기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축 처지는 일정한 톤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리듬감을 넣어서 말한다. 자기소개 목소리는 무조건 ‘반갑다’는 친근감이 들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자.
>>임유정 라온제나스피치 대표
CEO스피치코칭(삼성, LG, 현대, SK외 대기업 다수 코칭), 스피치 스타일, 보이스 스타일, 소통 대화법, 프레젠테이션, 미디어 트레이닝 등 다방면에서 강의를 펼치는 스피치코칭 전문가. 저서로는 '스피치 트레이닝 60일의 기적', '트겹ㄹ한 순간, 리더의 한 말씀', '성공을 부르는 스피치 코칭', '성공을 부르는 목소리 코칭' 등이 있다.
경제 성장이 절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불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렸더니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한 마리로 불렸다. 고도성장을 과시하듯 연이어 열린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전쟁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낸 듯 우리나라가 함박웃음 짓던 그때. 우리를 동경하던 대륙의 청년이 있었다. 한국의 발전상이 그저 궁금했을 뿐 저 먼 미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눈 맑은 청년. 훗날 그는 한류 문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한류를 파는 중국인, 중국 온라인 패션 기업 한두이서(韓都衣舍) 두정국(杜廷國) 부회장을 만났다.
한류 때문에 하루가 바쁜 사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빡빡합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직접 상담하다가 돌아갑니다.”
한국에 오면 주로 뭐하냐는 질문에 재미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중국 패션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온라인 기업 한두이서그룹주식유한공사(이하 한두이서) 공동 창업자이자 부회장의 서울 일정이 야박할 정도로 쉴 틈이 없다. “그저 일만 하다 간다”는 넋두리가 여운처럼 슬며시 깔린다. 알고 보면 사정이 딱하지도 않다. 한국에 오기 위해 이용하는 중국 칭다오 류팅 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한 시간 거리. 중국 내 출장보다 가까워 당일 출입국이 가능할 정도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두정국 부회장에게 대한민국 서울은 나쁘지 않은 업무 장소다.
“한국 분들이랑 짧게 몇 마디 정도 대화하면 제가 한국 사람인 줄 알더라고요. 얘기가 깊어지면요? 그때는 중국놈으로 알아챕니다!(웃음)”
중국 사람을 낮춰 부르는 표현도 넉살 좋게 쓰는 것을 보면 한국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두정국 부회장은 한국 기업과 한두이서 사이 소통 창구 기능을 톡톡히 하며 한국을 자주 찾고 있다. 최근 한국 콘텐츠 회사와의 만남은 물론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패션 업체와의 선약으로 한국 방문이 부쩍 잦아졌다.
시니어 패션도 한류다
한두이서(韓都衣舍)는 ‘한국 옷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2006년 온라인 전문회사로 창립해 2년 뒤인 2008년 본격적인 한류 패션 전문 쇼핑몰로 새 단장했다. 중국 온라인 패션 업계 1위 자리를 꿰찰 만큼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현지 스튜디오에서 한국인 모델을 기용해 촬영한 이미지로 한두이서 홈페이지(handu.com)를 채우고 있다. 온라인 사이트에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델이 죄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친근함이 묻어난다. 한두이서가 특히 한국에서 이름을 알린 이유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한류 스타 전지현, 지창욱, 박신혜 등을 피팅 모델로 발탁했다는 점. 배우 전지현은 지금도 한두이서를 대표하는 모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출에서도 한두이서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룹 내 자체 브랜드 16개 중 하나인 ‘H스타일’은 이용 회원만 1700만 명, 연간 매출은 우리 돈으로 3500억 원이 넘는다.
한두이서 홈페이지에는 매일 한류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유아, 어린이, 시니어 브랜드에 이르는 제품들이 각각 100개 이상 업데이트된다. 특히 ‘H스타일’ 못지않게 시니어 패션 브랜드의 활약도 눈부시다.
“4, 5년 전에 꽃중년 여성을 겨냥한 한류 스타일의 브랜드 디큐나(Dequanna)를 런칭했습니다. 젊은 중국 여성 패션이 한국과 큰 차이가 안 나는 반면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중년 패션은 한국과 많이 다릅니다. 그것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탤런트 윤해영 씨가 ‘디큐나’ 홍보모델로 활약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큐나의 실제 구매자는 누구일까? 바로 H스타일에서 옷을 사 입는 시니어의 자녀들이다.
“스스로 옷을 사 입는 시니어도 있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구매합니다. 우리 메인 브랜드인 ‘H스타일’ 회원만 1700만 명이고 한두이서몰 전체 회원이 4000만 명입니다. ‘H스타일’에 들어왔다가 ‘디큐나’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입는 옷에도 눈이 가는 것이죠.”
현재 중국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시니어 패션 브랜드 중에서 ‘디큐나’가 1위라고 두정국 부회장은 말했다. 1위가 아니면 배우 윤해영을 어떻게 쓰겠냐며 시원하게 웃는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류를 알아보다
두정국 부회장이 배우 윤해영을 설명하면서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에 나왔던 배우라고 소개해서 적잖이 놀랐다. 1990년대 후반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이지만 한류 드라마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 그렇다면 한류 전문가 느낌이 물씬 나는 두정국 부회장은 언제부터 한국을, 한류를 직감한 것일까?
“한국을 알게 된 건 한류 열풍이 불기 아주 오래전 전부터죠.”
이웃 나라 한국의 성장이 궁금했던 두정국 부회장은 한국을 알고 싶은 마음에 1993년 산둥대학교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에 진학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어학과가 신설됐으니 한국어를 배운 첫 번째 세대다. 한류 전문가로서의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뭔가 멀리 봐서 전공을 결정한 거라기보다는 한국의 빠른 성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국어를 배운 것이 운명이었던 것이죠. 마침 우리 회사 조영광(趙迎光) 회장님도 같은 학과, 같은 반 출신입니다. 유학덕(劉學德) 한국지사장은 기숙사 룸메이트였고요.”
한국어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많이 알게 됐다.
“1980~90년대, 중국에서는 홍콩류나 일본류가 있었습니다. 오래가지 못했어요. 인기가 좀 생기나 싶었는데 사라졌어요. 그런데 한국어를 전공한 저와 회장님은 한국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 문화는 다른 나라의 유행과 달리 침투력이 강했습니다. 1990년대 말 한국 정부도 국가 정책으로 문화 관련 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고요. 유행이 오래갈 것으로 판단했고 사업 콘텐츠로 삼기로 했습니다.”
한류 패션을 지탱하는 것은 한류 문화라고 두정국 부회장은 목소리에 힘을 줘 강조하면서, 한류 패션은 한류 문화, 드라마, 연극, 영화 등으로 시작해 패션으로 뻗어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스타에 대한 친근함도 중국 스타와 비교되는 점이었다고.
“중국 일반인에게 연예인이란 거리감이 있고 숭배해야 하는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한류 문화로 알게 된 한국 연예인은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뭐든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대상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노래도 잘하고, 잘 노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 욕구가 있는 만큼 한류 패션도 생명력이 있다고 판단했죠. 결국 우리의 판단이 맞았음이 증명되고 있잖아요. 2003년쯤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한류의 인기는 여전합니다.”
한류 스타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 그 노력의 결과로 중국에서 제일가는 온라인 패션 브랜드로 한두이서는 성장했다. 현재는 한류 패션을 넘어서 뷰티와 생활용품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투명 경영이 지속가능한 회사를 만든다
두정국 부회장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마음 관리에 꽤 엄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5년 전부터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있다. 누구를 만나든 도를 닦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행동하고 사고한다. 두정국 부회장은 본인의 생각이 회사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두이서의 비전은 사원들과 외부 파트너가 꿈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만의 생각이 아니고 임원진과 함께 많은 토론을 거친 부분입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꿈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회사 문화는 협동으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궁극적으로 직원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만들면 회사는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직원들이 부자가 되면 회사는 더 큰 부자가 되는 거잖아요. 직원이 다 실패하면 회사도 물론 무너지고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사주 일가의 갑질과 관련한 이야기가 새어나와 두정국 부회장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경쟁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항상 남을 이기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부작용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오래 사업을 하고 싶다면 투명 경영을 해야 합니다. 저희는 대내외적인 투명 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모두가 좀 솔직해야죠.”
한두이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지양한다. 대신 작은 조직체를 많이 만들어서 개별적으로 일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든다. 실적이 좋은 팀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이때 원인을 파악해 팀원을 다른 조직으로 분산 배치하거나 개인 실력 차에 따라 조직에 기여하게 한다.
“이것도 자연의 법칙입니다. 순환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이죠. 우리는 온라인 시장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두이서는 회사 내 조직이나 관련 외부 업체가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줍니다. 물류, IT, 생산, 홍보 등 다양한 시스템을 지원합니다. 사내 자체 브랜드이든 파트너 업체이든 모두 한두이서의 시스템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회사 연혁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빠르게 업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온라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이런 조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요. 온라인에서는 이런 식으로 조직을 이끌어가야 발전 흐름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한두이서의 장기적인 목적 중 하나가 빅데이터 자료를 기반으로 한두이서 내부 조직을 포함해 함께 일하는 업체가 더욱 편하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성장 중이거나 온라인 창업을 준비하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교육도 제공하고 온라인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빅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이미 갖췄기 때문에 한두이서가 중국 내 규모가 가장 큰 온라인 브랜드 그룹이 됐다고 두정국 부회장은 설명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중국 진출을 희망하는 업체와 협약식이 있었다.
“우수한 한국 패션 브랜드의 중국 진출을 돕는 것도 우리 일입니다. 오늘은 임블리(부건FNC)와 업무 협약을 맺었습니다. 나라마다 온라인 시장의 규칙이 다릅니다. 무턱대고 진출하면 실패율이 높습니다. 임블리가 한국에서는 잘나가는 회사일지 몰라도 중국 시장에서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거예요.”
끝으로 한류를 파는 두정국 부회장에게 한류의 수명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냐고 물었다. 뉴웨이브란 이름으로 왔다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타이완류, 일본류, 홍콩류는 늘 있었다.
“제가 50년은 더 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 겁니다. 한류의 유통기한을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일본류나 홍콩류보다는 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류 문화 기반이 이미 잘 닦여 있으니까요. 한류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한류 패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계속 만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할 것 같습니다.(웃음)”
평생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며 하나의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이들에게 두 번째 삶, 은퇴 후 인생설계는 그저 막막한 일일 뿐이다. “후배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잔소리했지만, 정작 회사 밖으로 나오니 눈앞이 캄캄하더라”는 어느 공기업 정년퇴직자의 소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퇴직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자사 임직원의 은퇴 준비, 노후 준비를 돕기 위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 선명한 미래가 업무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 아닐까. 이런 기업 중 모범 사례로 꼽히는 포스코를 찾아 인생설계 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본지 제호와 비슷해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 이름은 포스코의 퇴직 후 인생설계 프로그램명이다. 교육 참여는 50세 이상의 포스코 임직원이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은 2001년부터 포스코인재창조원이 운영해온 정년퇴직 예정자 대상의 교육 과정인 ‘그린 라이프 디자인’이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교육 진행 과정 중 정부의 정년퇴직 연장 정책에 따라 2016년과 2017년에는 정년퇴직자가 발생하지 않게 되면서 프로그램 운영에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준비기간’에 대한 의견도 반영됐다. 교육 시점이 정년퇴직 3개월 전부터 시작되어 인생설계에 제대로 반영하기엔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린 라이프 디자인 교육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약 30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여했다.
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정년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그린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이 퇴직이 임박한 이들을 대상으로 실제적으로 필요한 서류 처리나 연금 문제 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퇴직 후 생활에 대한 마인드 변화, 방향성 제고와 같은 포괄적인 부분이 중심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래가 명확해야 근로의식 높아져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에 참여 예정 인원은 330명. 포스코의 주된 사업장인 포항과 광양의 임직원 300명과 서울 근무자 30명이 참여한다. 강의에 참여하는 인원만 13명. 포스코인재개발원의 교수 외에 다양한 분야의 사외 강사들이 각 전문 분야의 교육을 담당한다.
포스코인재창조원 김일수 교수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50대를 넘어선 직원들이 퇴직 후 삶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젊은 시절부터 포스코에 몸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사 밖에서의 삶에 겁을 먹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회사가 나서서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생애설계와 퇴직 준비를 지원해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근로의식도 고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또 퇴직 후 삶의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고요.”
2016년과 2017년 진행된 프로그램에는 총 7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여했다. 본인의 생애설계에 대한 진단과 자산관리, 생애관리, 건강관리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뤄졌고, 관심 분야와 관련한 현장 탐방과 체험 학습도 이뤄졌다. 참여자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어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5점 만점에 평균 4.88점의 반응이 나왔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올해 변화를 줬다. 초기 프로그램이 1일 8시간 포괄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교육시간 부족, 교육 내용 전문성에 대한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직업형 트랙과 자산형 트랙으로 나눠 자신에게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산형 트랙의 경우 자산관리는 결국 부부 공동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 임직원의 배우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원한다면 두 프로그램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재무관리 교육과 달리 특정 금융상품의 밀어주기가 없다는 점도 참여자들에게 환영받는 이유다.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것까지
직업형 트랙은 1인 창업이나 프랜차이즈 창업의 특징과 차이점, 창업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위험 요소, 재취업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구직 목표 설정, 자격증 취득 등과 같은 현실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자산형 트랙은 수익형 부동산이나 부동산 경매 또는 공매에 대한 정보, 세금과 관련 법률에 대한 소개, 각종 금융상품이나 상속·증여와 관련한 교육도 실시한다.
또 각 프로그램에선 즐거운 여가를 위한 본인의 여가 유형 진단에서부터 여가 활용 방법과 건강관리를 위해 지켜야 할 사항 등도 함께 소개한다.
프로그램의 구성이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 흥미로운 부분. 포스코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이렇게 주제가 넓어진 것에 대해 “직원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임직원들의 관심이 많은 건강과 재무, 인간관계, 여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단순한 재테크 활동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후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나 준비사항에 대한 교육도 진행한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개인별로 성격검사와 적성검사도 실시한다. 여기에 직원에게 재취업 장애요인은 없는지 체크한다.
오프라인 교육과 별도로 사이버학습을 사전학습 형태로 진행하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특징 중 하나다. 인생설계, 창업, 귀촌과 같은 커리어 디자인과 재무 디자인, 라이프 디자인을 온라인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은퇴 대비에 ‘눈치 보기’는 없어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의 참석률은 전체 대상자의 20% 정도. 은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년퇴직을 10년 앞둔 임직원까지 대상에 포함되는 것을 고려하면 꽤 높은 편이다.
혹시 회사가 먼저 나서서 ‘퇴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사측에서 퇴직을 권하는 것처럼 비춰지진 않을지, 또 프로그램 참여가 퇴직 의사를 밝히는 것처럼 여겨지진 않을지 의문을 가졌지만 참가자들은 “사내 분위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갖는 의문”이라고 일축한다.
한 프로그램 참석자는 “포스코라는 기업의 특성상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정년 때까지는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런 문화 때문에 정년퇴직 후 생애설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사내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