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귀농의 밑바닥… 다시 올라서는 방법에 대하여

기사입력 2024-09-27 08:18 기사수정 2024-09-27 08:18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경남 합천군 청덕면에 사는 김정국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그는 인생의 화양연화를 시골에서 누리고 싶었다. 갖가지 스트레스로 불편한 도시와 직장에서 벗어나 한갓진 시골에 사는 게 진정한 만족을 구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 봤다. 김정국(54, 합천군 ‘The버섯랜드’ 대표)의 생각이 그랬다. 그러나 그의 시골살이는 생각처럼 원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혼선과 착오가 많았다. 해 뜨는 동쪽을 향해 달려갔으나 도착한 곳은 정작 해 지는 서쪽? 시골살이 12년의 정경이 대체로 그렇다. 왜 이렇게 됐나. 뒤엉긴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지금 김정국의 고심이 깊다. 그가 아직 두 주먹에 쥐고 있는 건 하나. 여하튼 희망과 낙관으로 상황을 성찰하며 한바탕 더 뛰어보자는 결기 바로 그것이다.

부산 태생인 김정국은 부산의 자동차 정비회사 직원으로 일하다 합천군 청덕면 시골로 이주했다. 먼저 착수한 건 집짓기였다. 건축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직영 공사를 진행했는데, 건축에 문외한인 그에겐 모든 공정이 난해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일종의 고행을 통해 집을 완성했다. 비용 절감 효과는 적고 완성도는 떨어지는 집을. 그러나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으니 보람이 컸으리라. 이제 마음의 여유를 갖고 가족과 함께 온기에 찬 날을 영위하면 그만일 터였다. 그게 시골 생활을 선택한 이유였으니 말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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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귀농보다 귀촌 타입의 유유한 생활에 방점을 찍고 농촌에 입문했다. 굳이 농사가 아니라도 뭔가 생계를 도모할 일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한 1년쯤 관망하며 살다 보면 괜찮은 일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예측했다. 다분히 낙천적인 전망을 한 셈이다. 이게 오산임을 그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농사일 외 수입원을 발굴하기 어려운 농촌 현실과 맞닥뜨렸던 거다. 결국 그는 농촌에 사는 한 농업에 기반을 둔 생활을 꾸리는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 기질 자체가 농사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하기도 했다.

“애초 다들 시골살이를 뜯어말렸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 근거 없는 낙관이랄까. 잘 될 거라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촌에 들어왔다. 그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단견인지 뒤늦게야 알았다. 농촌에 왔으나 농사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섣불리 자금을 투자해 대충 농사를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겁 없이 농촌에 들어온 꼴이었다.(웃음)”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농촌에 그저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농사가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너무 몰랐던 덕분에 용감하게 들어왔다. 한번은 남의 마늘농장에서 수확을 거드는 노동을 하루 했는데 몹시 힘들었다. 일솜씨도 서툴러 녹초가 됐다. 농장주는 이렇게 어설픈 나를 두 번 다시 부르지 않았다. 그즈음 합천군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해 귀농 상담을 받았는데 썰렁한 결론을 내리더라. ‘준비도 전혀 안 됐고, 선생은 농사를 지을 만한 분이 아닌 것 같다’는 답을 들었으니까.(웃음) 이 두 가지 경험을 통해 나의 소양을 돌아봤다. 농사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끈기와 근면성이 내게 있나? 그런 자문을 했는데 다소 회의적이었다.”


도시로 돌아갈 것을 숙고한 시점이지 않을까?

“떠날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집도 지었고,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게 가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골에서 살고 싶었던 꿈을 중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수입을 얻기 위해서는 여하튼 변화가 필요해 부산의 예전 회사에 재취업했다. 혼자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한편 주말마다 가족이 있는 시골집을 드나들었다. 그렇게 3년간 살다 정리하고 시골집으로 회귀했다.”


부산 생활을 마감한 이유가 있겠지?

“농사를 짓고 싶었다. 어차피 내가 살 곳은 시골이라는 생각도 누르기 힘들었다. 그래 직장 생활을 하는 틈틈이 농업 공부를 했으며, 표고버섯 농사가 유망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표를 냈다. 표고버섯으로 안정적인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일에 뛰어들었다.”


표고버섯의 어떤 매력에 착안했나?

“버섯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투자 대비 수익성도 높은 편이다. 특히 표고버섯은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버섯으로 수요가 안정적이다. 유행을 타는 작물도 아니다. 게다가 재배사의 청결한 환경 속에서 작업한다. 비바람과 땡볕을 맞으며 일할 필요도 없다. 일단 고품질 표고를 생산하기만 하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연달아 불상사 발생해

그간의 공부와 모색을 통해 표고버섯을 경주마로 꾹 점찍은 그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마을 일대를 물색해 어렵사리 후미진 산중의 터를 샀으며, 버섯 재배사를 지었다. 토지 구입비를 뺀 시설비 총액은 약 1억 2000만 원. 250평 규모의 터에 공장동 1동, 배양실과 생육실 각 2동 등 모두 5동의 재배사를 만들었다. 왕초보자 홀로 감당하기엔 버거운 규모지만 그는 의욕을 돋우어 적극적인 투자를 했다. 트랙을 질주해 앞서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치는 대목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다지 자비롭지 않아 그에게 행운을 배달해주지 않았다. 농사 서장부터 불길한 먹구름이 뒤엉겼으니까. 재배사 구조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던 것.

“내게 표고버섯의 모든 걸 가르쳐준 멘토가 있었다. 재배사 역시 멘토의 기술자문을 받아 시설을 구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가르쳐준 대로 지은 재배사는 표고버섯용이 아니고 노루궁뎅이버섯용이었다. 버섯은 종에 따라 생육 환경이 다르다. 표고의 경우 인공적인 재배 공간에도 자연이 들어와야 한다. 바람과 햇볕 같은 자연환경이 병행해야 튼실하고 맛좋은 표고 생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지은 재배사는 자연광이 필요 없는 노루궁뎅이 재배사였다. 따라서 첫해 농사부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외양부터 칙칙해 상품성 없는 물버섯이 나왔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멘토는 표고 전문가도 아니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구조를 교정할 수밖에 없었겠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표고버섯 생산을 포기하고 표고 배지(톱밥과 버섯균의 혼합물을 병이나 봉지에 집어넣은 버섯 재배 틀)를 생산해 분양하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선회해 상황을 타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배지 분양 사업 역시 순조롭지 않았다. 2년간은 어느 정도 수익이 나왔지만 이후에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으니까.”


어떤 복병을 만났기에?

“어쩌다 보니 부실한 배지 입봉 비닐업체와 연결돼 곤욕을 치렀다. 업체를 통해 공급받은 비닐봉지가 배지 배양 중 모조리 터져 전량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매출 제로를 기록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사안이었지만 누구를 탓하랴, 치밀하지 못한 내 실책이다 하고선 그냥 묻었다. 불상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런! 또다시 악재를 만났다?

“배지 분양을 해주고 대금을 받지 못한 일이 2년간 연달아 발생했다. 2년간 헛수고를 한 셈이다. 이렇게 되자 일어서기 힘들더라.”


난관을 만날수록 단단해지는 게 사람이다.

“내게 이런 건 있다. 무언가에 일단 꽂히면 끝까지 가본다는 거. 버섯 농사 역시 마찬가지 태도를 견지했다. 활로를 뚫기 위해 이번엔 녹각영지버섯에 도전했다. 이 버섯은 영양성분이 뛰어나 기대주로 손색없는 작물인데, 원물 생산 판매 대신 가공 제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스틱형 또는 파우치형 액상차를 생산했다. 오랜 연구를 통해 영지버섯 특유의 쓴맛을 잡은 녹각영지워터를 정립해 특허출원도 했다. 이건 국내 초유의 제품이다. 하지만 고전하고 있다. 워낙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마지막 자금을 녹각영지버섯에 털어 넣었는데 결과적으로 빚만 늘어났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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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돈 안 되는 일만 하나?”

버섯 농사에 심혈을 기울여 열심히 뛰었지만 제자리다. 아니 후진을 거듭했다. 버섯 재배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분량의 육체적·정신적 비지땀을 쏟았지만 손에 들어온 게 없다. 그는 일쑤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당신은 왜 돈 안 되는 일만 하나?” 그러나 그가 좌절에 빠진 기미는 어디에도 없다. 인생사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투철하게 배웠다는 쪽으로 상황을 읽는다. 물론 농사 공부에 치른 수업료는 너무 과했다. 하지만 그걸 인생 공부로 치자 애석할 게 없더라는 거다. 버섯 농사의 악전고투 하나에만 매달려 살지도 않았다. 즉 그는 대책을 숙고해 솟아날 길을 찾아냈다. 마을 속으로, 마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삶 자체의 방법과 방향을 바꾸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현재 ‘청덕면 도농교류센터’의 센터장을 맡아 새로운 질주를 하고 있다.

“‘도농교류센터’는 귀농 희망자들에게 미리 농사를 배우고 원주민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곳이다. 귀농 실패 모델인 나의 경험을 나누어 남들의 귀농 정착을 도울 수 있으니까. 더 소중한 가치는 주민들에게도 유용한 공간으로 쓰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난 이곳을 마을 사랑방으로 가꾸고 있다. 주민들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다. 도시로 돌아갈까 수없이 번민했지만 그걸 날려버릴 수 있었던 건 주민들의 호응 덕분이었다. ‘자네는 농사엔 어울리지 않아. 그러나 우리 마을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그 한마디에 기뻤다. 농사는 무너지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삶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을 비로소 찾아낸 기분이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이곳에서 월급이 나오나? 생활은 무엇으로 도모하느냐는 얘기다.

“센터를 위탁 경영하고 있다. 월급은 없다. 민박과 휴게소를 운영해 소소하게 벌고 있고, 틈틈이 알바를 하고, 향후 버섯체험장을 만들어 수입원으로 삼을 참이지만 현재 상황만으로도 만족한다. 마음만큼은 시름없이 편안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도시에서나 여기에 와서나 사실 돈에 가치를 두고 살았다. 그러나 금전적 면에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고서 돈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돈이야 먹고살 정도면 되겠지. 중요한 건 마음의 평화다. 그리고 그걸 이제야 얻었다. 적어도 난 불행하진 않다는 걸 알고 산다.”

낙원과 지옥은 붙어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정체가 달라진다. 김정국은 그 흥미진진한 인생 드라마의 한복판에 들어가 있다.


김정국이 주는 귀농 Tip

•나의 성향과 체질이 과연 농업과 부합하는지 냉정하게 판단한 뒤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사전에 귀농교육과 농촌의 현장 경험을 충분히 해두자. 이게 없으면 반드시 고전한다.

•집부터 짓지 마라. 자금을 비축해 생산에 투자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라. 농사로 자리 잡은 뒤에 집을 지어도 늦지 않다.

•비용을 절감하고 원하는 스타일의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직영 공사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신중하게 생각하자. 갖가지 리스크 발생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해 농사를 하자. 재배와 유통에 유리한 점이 많다. 작물 선정 뒤에는 반드시 해당 작물 재배 농가를 통해 1년쯤 농사를 실제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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