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김병종(69)은 남원시에 그림 400여 점을 기증해 미술관을 출범시켰다. 어떤 뜻이 있었을까?
“내 고향 남원은 소리의 성지이자 문예적으로도 명성을 날린 고장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문화예술의 빛이 퇴색했다. 작은 미술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일조하고 싶었다. 그림에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미술관이 멘토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여건이 좋으면 남원에서도 피카소 같은 화가가 나올 수 있는 거다.”
김병종은 전통 수묵의 기법과 정신에 서양의 미학을 수용한 회화로 할 말 다하는 작가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개방적인 작풍이 거둔 성과 역시 돌올하다. 무엇보다 그는 안주하지 않는 정신을 창작의 무기로 삼았다. 작품 경향의 변주가 잦은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바보 예수’ 연작에서 ‘생명의 노래’로, ‘송화분분’(松花紛紛)으로, ‘풍죽’(風竹)으로, 그의 테마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변전했다.
“요즘 미술계엔 단일한 주제나 소재를 지속해야 살아남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여기엔 미술 시장의 자본 논리가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한다. 하나를 평생 파는 화가의 작품이어야 컬렉션의 투자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건 기이한 풍조다. 작가는 창조적 자기파괴를 하는 존재여야 한다. 피카소는 아홉 번이나 경향을 바꾸었다. 괜히 피카소가 아니다.”
‘바보 예수’ 이후 선생의 그림은 하나같이 밝고 따뜻하다. 삶에 붙게 마련인 고독이나 고통의 기미가 없다. 천성이 낙천적인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가족의 생계를 도맡다시피 하셨지만 푸념이나 원망이 전혀 없었던 어머니의 긍정적인 눈길, 낙천적인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
작품의 테마와 소재가 주로 자연이다.
“고향의 산천이 창작의 모태이지. 만산홍엽, 강물, 들판, 보랏빛 자운영 등 가난했지만 풍성한 자연 안에서 행복했던 유소년기의 체험이 기억의 창고 안에 가득하다. 그걸 하나하나 꺼내 풀어놓은 게 작품이다.”
송홧가루의 노란 미립자를 형상화한 ‘송화분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저 너머까지 보이는 것 같아 아득하고 아찔하다.
“어릴 적 봄날, 노란 뭉게구름처럼 바람에 실려가는 송홧가루에서 받은 감동을 되살린 작품으로 생명의 섭리를 그렸다. 이어령 선생께선 ‘송화분분’에 대해 ‘생명의 바깥에서 생명을 그리던 김병종이 마침내 생명의 안에서 생명을 그렸다’고 과분한 평을 하시더라. 난 여전히 미흡한 작가인데….”
피부처럼 정착한 겸양이 느껴진다. 그림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자욱하다. 다독의 힘이 반영됐다. 김병종은 빼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매달 보름은 그림을, 보름은 글을 쓴단다. 이런 그에게 눈총을 쏘는 이들이 많다.
“은사님조차 왜 잡문으로 어지럽히느냐 질책하셨다.(웃음) 완전한 성공을 위해 그림만 하라는 식의 조언과 비난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그리기만 하면 지적 공허감이 생긴다. 글을 읽고 써야 가슴에 차오르는 게 있다. 글은 내게 그림을 퍼내게 하는 수원지다.”
그에게 글과 그림은 한 몸이다. 글 쓰는 본새로 굶주린 듯 그리는 것!
남원 하면 추어탕부터 떠오르나? 그럴 사람이 많겠다. 널리 이름난 향토음식이니까. 소리의 본향으로도 유명한 게 남원이다. 동편제 판소리 가왕 송흥록과 명창 박초월을 길러낸 민속국악의 옥토이자 산실이다. 광한루와 지리산도 남원의 얼굴이다. 이래저래 여간한 고장이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게 많다. 여행자들의 기쁜 순례지다. 최근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 사람들을 줄줄이 끌어들이는 똘똘한 공간이 하나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하 ‘김병종미술관’)이 바로 그렇다. 요천강변 춘향테마파크 안에 있다.
8월의 땡볕이 가혹하다. 게다가 마스크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돌아다녀야 하니 이거 참 ‘병맛’이다. 세상은 알고 보면 아름다워 희망과 긍정을 노래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요즘은 뭐 좀 그렇다.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모두 시난고난, 실의에 빠진 도스토옙스키의 표정처럼 우울하다. 의연한 건 자연이다. 사위로 펼쳐지는 자연 풍광이 싱그러운 김병종미술관으로 들어서자 생기가 돋는다. 야산 언덕배기에 있는 미술관 저 멀리로 지리산 연봉이 보인다. 천하제일 방랑 나그네인 구름이 살랑살랑 산을 넘는다. 흰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새파란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순수하다. 미술관 인근에서도 푸른 숲이 술렁거린다. 자리 한번 옳게 잡았다. 이 미술관은 전원형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2018년 3월에 개관했다. 한국화가 김병종이 기증한 작품 400여 점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이후 길차게 자라는 대나무처럼 성장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해 서러운 게 소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다르다. 개관 이래 다녀간 관람객이 17만여 명에 이른다. 유별나게 화려하거나 거대한 미술관이 아님을 감안하면 이변에 가깝다. 내실과 매력을 갖추면 지방 미술관에도 근사한 피드백이 돌아온다는 걸 입증했다. 작가의 예술과 대중의 일상이 겉도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명소로 떠오른 까닭이 이렇게 완연하다. 미술관을 통해 남원을 홍보하고, 지역 발전의 동력 하나를 보태고자 한 설립 주체 남원시의 의도가 빗나가지 않은 셈이다.
올봄 이 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2021~2022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 명소들의 탐방객 숫자 등 빅데이터를 근거로 고른 이 ‘100선’에 든 미술관은 세 개다. 김병종미술관 외에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원주의 뮤지엄 산이 뽑혔다. 한국의 열악한 문화적 풍토를 병증으로 진단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미술관에도 관광지처럼 일쑤 인파가 몰려드는 게 아닌가. 억눌린 일상의 출구를 예술작품에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무려나 김병종미술관은 탕탕 기세 좋게 행진한다.
그렇다면 이 미술관은 무엇을 연료로 항진하나? 우선 김병종의 작가적 무게가 헤비급이다. 그는 자기만의 날개를 휘저어 미술의 창공을 비상하는 화가다. 재미와 재치로 터진 실밥 없이 잘 바느질한 스테디셀러 ‘화첩기행’으로도 지명도가 높다. 호젓하고 청명한 분위기에 감싸인 미술관의 입지와 미니멀한 노출콘크리트 건축물의 미감도 감성을 자극해 호감을 산다.
무엇보다 물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무와 잔디로 채운 정원의 일부는 평범하지만 조경의 축을 이룬 물 정원은 기발하다. 사각형 수조 형태의 얕은 못 다수를 계단식으로 배열해 만들었다. 그 절묘한 물 공간 복판으로 난 동선을 따라 건물로 진입하게 돼 있는데, 관람객들은 이 대목에서 가벼운 설렘 이상의 매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잔잔한 수면엔 햇살이 아롱지며 연신 신비한 무늬를 그린다. 물에 드리워진 나무와 구름과 하늘의 그림자는 유령처럼 미묘해서 아름답다. 굴레가 없어 자유롭고 무방비 상태로 완전한 게 물이다. 그래서 상선약수(上善若水)다. 목줄 매단 강아지처럼 끌려다니는 삶일지라도 내면에 물의 정신을 담고 살면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물의 정원은 물을 명상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낭만과 추억을 길어 올리게 한다. 그러라고 만든 공간이겠지.
동화책처럼 쉽게 읽히는 작품들
2층으로 지은 건물 안에는 전시장 세 개가 있다. 당연하게도 김병종미술관에서는 김병종 외에 다른 작가들의 기획전도 빈번하게 열린다. 지금은 김병종의 기증 작품 특별전 3차 시리즈 ‘생명의 숲과 바다’전(10월 17일까지)이 펼쳐진다. 기증 작품 중 90여 점이 나왔다. 대다수가 미공개작이라 애호가들의 구미에 맞을 전시회다.
화가란 다르게 보는 눈과 다르게 생각하는 머리를 장착한 존재다. 현상의 외피를 걷어내고 본질을 발굴해 캔버스에 옮긴다. 자신만의 인생관과 심미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것인데, 김병종의 초기 작품 ‘바보 예수’ 시리즈는 흑인 예수를 그리는 등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사뭇 독자적인 수묵 기법을 구사해 국내 화단은 물론 유럽 일각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생명’을 화두 삼아 자연을 그리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맸던 경험이 야기한 전환이었다. 이번 특별전에 걸린 작품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생명 작가’라 불리기 시작한 시절의 그림들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김병종의 그림을 보자면 그건 환희이자 순수이며, 존엄이자 행복이다. 신이 고안해 삼라만상에 고루 주입한 사랑의 발현이며, 비루하거나 고통스러울 일이 없는 화평의 지속 상태다. 흥미로운 건 술술 읽히는 동화책처럼 쉽게 다가오는 그림이라 감정이입이 쉽다는 사실. 아이들, 꽃, 학, 토끼, 닭, 물고기, 산, 물, 구름 등이 등장하는 화폭마다 소박하고 밝고 따뜻하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휘갈긴 그림처럼 천진하다.
딱한 건 그림을 보는 사람 쪽이다. 그림은 생명의 생명다운 힘으로 저토록 아름다운데 나의 삶은 왜 피폐하지? 그런 상념, 문득 들솟기 십상이다. 우리는 모두 오욕칠정의 탁류를 헤엄치는 가여운 존재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쯤에서 멈추면 멍청이의 잡념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성격이 좋아진다. 김병종의 그림을 바라보면 막힌 가슴이 어느덧 열린다. 잃어버린 동심과 행복을 돌아보는 사이에 삶의 쇠사슬 같은 게 풀려나가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김병종의 환한 그림이 주는 자극과 감흥의 약발이 이렇게 세다. 가슴속에 고인 불만과 불안을 털고 돌아가게 한다.
전해 들은 얘기가 있다. 개그맨 전유성(72)이 젊었던 날 친구들과 놀러 간 어느 해변에서의 일. 그가 별안간 바다로 걸어 들어가더란다. 바닷물이 몸에 차오르고 마침내 머리까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놀란 친구들, 그를 건져내기 위해 우르르 물로 달려갔다. 그때 전유성이 머리를 수면 위로 쑥 내밀더니 태연히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이랬다. “나 웃겼냐? 바다가 나를 부르더라고!”
그 해변에 폭소가 퍼졌더란다. 친구들을 웃기기 위해 온몸을 던져 펼친 해프닝이었으니 웃음 보시치고도 상품(上品)이다. 그런데 이 즉흥 쇼의 성공 요인은 그 액션 자체에 있지 않다. 물귀신 시늉으로 사람을 웃기는 몸짓은 독창적이지 않은 흔한 일이니 말이다. 전유성은 진부하지 않고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바다가 나를 부르더라고!” 그는 다분히 서정적인 대사를 읊음으로써 이벤트의 격을 높인 게 아닌가. 그날따라 바다에 참을 수 없는 매혹을 느껴 물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아무려나 그는 친구들을 웃기되 이왕이면 운치와 여운까지 가미한 쇼를 보여주고 싶었을 테다. 그렇다면 아마도 충동적으로 떠올린 각본으로 행위를 하고 대사를 읊조렸던 게 아닐까. 하나의 엽편(葉片) 모노드라마를 순간에 기획해 연출하고 연기했던 셈이다. 그의 삶에 피부처럼 붙은 예능 감각과 순발력을 엿볼 수 있는 예화다.
무덤덤한 일상에 웃음을 배포하고, 상황을 요리해 생기를 돋우는 일에 전유성은 능하다. 기발함과 도발을 밑천으로 삼아 지루한 인생사를 소극(笑劇)으로 끌어올린다. 쉼 없이 산소를 들이마셔 허파를 움직이게 하듯이, 그는 쉼 없이 머리를 회전시켜 개그맨이라는 직분에 부합하는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생산한다. 어디서 뭘 하든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집중력과 재능으로 롱런한다.
전유성은 지리산 근처 남원시 인월면에 산다. 벌써 4년째, 얼추 인월 사람 다 됐다. 그와 마주 앉은 곳은 딸과 사위가 운영하는 찻집 제비카페. 세한의 창밖 저 너머로는 지리산이 수묵화처럼 묵연하다. 많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 이곳에 몸을 둔 건 지리산이 곁에 있어서다.
“내가 ‘절친’이다. 절하고 친하거든. 옛날에 지리산을 자주 오르기도 했고, 이 산의 절에 있는 스님 한 분과 가까워 지리산을 종종 찾아왔다. 그 인연으로 여기에 산다.”
지리산을 자주 오르겠다.
“아직 올라가진 않았다. 올해엔 제대로 올라볼까 한다. 지리산이 어디로 사라질 것도 아니고 마음 내킬 때 가면 되니까.”
어떤 매체에서 봤는데, 살면서 가장 잘한 걸로 쉬지 않고 일을 해온 거를 꼽았더라. 요즘은 무슨 생각, 무슨 일을 하나?
“코미디 전용 극장 만들 궁리를 자주 한다. 여건이 여의치 않아 지연되고 있지만 어떻게든 추진할 작정이다. 일상생활은 나름 분주하다. 남원 동편제 마을에 가서 창의력 강의도 하고, 우리밀로 빵 만들기도 가르친다. 마술도 가르치고.”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게 연예인이다. 이게 불편하진 않은가. 메릴린 먼로는 대중의 관심에 너무도 두렵고 외로웠다 하더라. 선생은 어떤가. 개인의 자유를 수시로 침해당할 수 있을 텐데.
“매우 피곤하다.”
몰래카메라가 늘 나를 주시한다는 기분이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피곤하다. 가령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할 때 사람들이 셀카를 막 찍어대던데, 만약 내가 도박장에라도 들어가 앉았다면 턱없는 잡음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저분들의 관심 덕분에 내가 밥을 먹고 산다는 걸 생각하면 고맙지.”
여행을 자주 한다지? 여행지에선 주로 무엇을 즐기나?
“유럽의 오페라극장을 가더라도 오페라보다 극장 앞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더 흥미롭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거든. 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며 저렇게 웃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상상을 하며 구경한다.”
사람 구경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지만 보통은 외모나 차림새 감상에 쏠린다. 전유성은 다르다.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남들의 얘기와 생각을 읽으려 집중하며 상상을 펼친다. 그는 상상, 공상, 몽상으로 사고의 외연을 확장해 쓸모 있는 아이디어 채집하기를 습관으로 삼고 사는 것 같다. 타성과 고정관념을 깨고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의 촉을 세운다. 이런 전유성의 유심한 촉수가 한번은 자동차 터널에 꽂혔다.
“남원의 어떤 터널을 통과하는데 밋밋한 터널 입구 전체를 돼지 코 모양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 터널 내부에서 울리는 졸음 방지용 사이렌도 돼지가 꿀꿀대는 소리로 바꾸고. 이거 재미있잖아?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지만 별 관심이 없더라고.”
현장에 바로 도입할 만한 아이디어인데?
“당장에 돈 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공기관이나 민간이나 마찬가지다. 난 폐탄광촌을 활용해 누구나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사설 교도소를 세워도 유망할 거라 생각한다.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스스로 형기를 정하면 된다. 하루든 여러 날이든. 가령 소설이 안 써져 괴로운 소설가는 형기 동안 구상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에게 잘못한 게 많은 사람도 하루쯤 감옥살이를 하며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면 된다. 이곳에서 가끔 참선 강좌가 열리며, 모든 ‘수감자’에게 반성문을 쓰도록 하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반성문을 모아 책으로 내고. 이런 교도소, 어떤가?(웃음)”
이색 교도소로 순식간에 이름날 것 같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에 열광하니까. 교도소 옆엔 ‘출소자’들을 위한 주막집도 만들면 좋겠다. 인생에 달관한 주모가 있는.
“그런데 하려는 사람이 없더라. 돈이 생기는 사업은 아니라고 보는 거다.”
흔히 돈에 목숨을 걸다시피 집착한다. 돈만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돈 없는 노후를 맞이할까 봐 미리 과도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나의 노후 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더 좋은 노후가 어디 있겠나. 특별히 욕심 부리지 않으면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월 100만 원 정도로 무난하게 사는 경우도 있더군.”
그는 인월에서 월세 50만 원짜리 아파트에 산다. 집이야 몸을 눕힐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리 산다. 안으로 너른 사람은 바깥 치레에 도통 관심 없는 법이다.
시골 주민들, 특히 노년층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돈보다 참여가 가능한 문화 공간이다. 그분들도 공연 같은 걸 보고 즐겨야 하지 않겠나. 경로당이나 지어주고 외면하는 건 유기(遺棄) 행위에 가깝다.
“관람은 물론 직접 공연할 수 있는 기회 제공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노인 합창단이나 무용단을 만들어 공연에 나서게 하면 된다. 이때 중요한 건 단체 이름부터 재미나게 지어야 한다는 거다. ‘임플란트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의 합창단’이라거나 ‘며느리가 꼴 보기 싫은 할머니들의 합창단’ 같은 이름이라면 빵 터지지 않겠는가.”
끔찍하게 요상하고 재미없는 세상에서도 가장 끔찍한 건 시골 노인들의 지루하고 고독한 일상이다. 전유성, 이 센스쟁이야말로 그 문제풀이에 일조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던 차, 그의 입에서 기발한 합창단 이름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명란젓을 좋아하는 할머니들의 합창단’이라는 이름도. ‘소녀시대가 되고 싶은 할머니들의 무용단’이라는 이름도. 시골 노인들을 위한 복안이 이미 내심에 박혀 있다는 표시겠지.
“너무 진지하게 살 거 없다”
남원에 오기 전 그는 경북 청도에 살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다. 코미디 전용 극단 ‘철가방극장’과 야외 음악 공연 프로그램 ‘개나소나 콘서트’를 만들어 10년을 쾌속 질주했다. 덕분에 고즈넉한 청도군이 일약 코미디와 콘서트가 난무하는 지역으로 도약했다. 개그맨으로서, 문화기획자로서 거둔 성취가 참 많았다. 그중 전유성이 가장 기뻤던 건 구경을 와 흥겨이 들썩이던 시골 노인들의 모습이었다고.
“정말 좋아하시더라. 열댓 번씩 공연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썩 괜찮은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에 즐거웠다.”
그랬으나 판이 흐트러졌다.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시피 군과의 소통에 불협화음이 생겼고, 전유성은 홀연히 청도를 떠났다. 상심이 남았을 것 같지만 그는 훌훌 털었다. 다만 문화를 바라보는 비좁은 시야에 대해서는 보탤 말이 있다.
“문화를 적자와 흑자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무형 자산이기 때문이지. 계산을 앞세우는 태도를 버리고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폭을 키우는 게 필요하다.”
선생의 인기, 기획력, 추진력은 청도에서 입증됐다. 다른 지자체에서 콜 사인을 보내왔을 것 같은데?
“남원에 온 뒤 몇몇 지자체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오더라고. 그때마다 내가 물었다. ‘1년에 공연을 몇 번이나 보십니까?’ 제대로 본 사람이 없더라고. 이래서야 일이 되겠어? 포기했다. 결국 자력으로 코미디 전용 공연장을 만들 수밖에. 문제는 자금이다. 요새 좀 고민하고 있다. 남의 돈을 뜯어올 재주는 없고.(웃음)”
차를 마시다 그가 소주 한잔을 목으로 털어 넣는다. 전유성은 술꾼이다. 생활에 술이 딱 달라붙었으니 외로움인들 범접 가능하랴. 술이란 무적함대? 때로 인생의 난제들을 척척 해치운다. 전유성을 보면 그게 증명된다. 슬럼프니, 못 채운 오욕칠정의 사무친 서러움이니, 무슨 고뇌니, 우리에게 한없이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종목들을 술 한잔으로 거꾸러뜨린다.
“즐거울 때나 고달플 때나 한잔 마시고 잊는다. 날려 보낸다. 난 그게 되더라.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 거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오늘 하루를 재미있게 살면 되는 거 아냐? 그러고도 남는 불편이 있다면 팔자려니 하면 되고. 근데 나 예전처럼은 안 마셔. 건강 문제 때문에 어쩌다 소주 한두 잔 마실 뿐이라고.”
아예 끊어버리진 않고? 선생은 오래 살아 재미없는 세상을 비틀어 웃겨줘야 할 거 아닌가.
“술을 어떻게 끊나? 액체를 어떻게 끊어?(웃음) 담배는 끊었다.”
햐. 그 무슨 금연 비법으로?
“금연을 선언한 뒤 흡연하는 사람들을 마구 욕했다. 그러고서 뻔뻔하게 다시 담배를 피울 순 없잖아?(웃음)”
선생을 ‘아이디어 뱅크’라 한다. 어디서든 반짝거린다고.
“어? 와서 보니 나 아니잖아. 반짝거리지 않잖아?”
겸손하구나, 그리 여겼으나 5초 뒤 다시 생각하니 이게 또 아재 개그다. 내가 유리로 만들어졌냐? 새벽별이냐? 뭐 그런 게 축약된 ‘썰’이지만 거기엔 겸양이 스며 있다.
시퍼런 촉으로 솟은 야산
종교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엔 웃음이 종교보다 파워풀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인 빙하를 녹이는 게 웃음이지 않던가. 삶이 멸치대가리처럼 따분한 건 웃음이 말라붙었을 때다. 전유성은 이 진귀한 품목을 생산하고 가공하고 유통하는 전문가다. 매사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머리와 행보로 ‘개그의 제국’을 구축했다. 이게 백지 상태에서 그냥 된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다독가다. 열 권짜리 ‘구라 삼국지’를 비롯해 다수의 책을 써낸 촉과 깡을 보라. 공부인이 아니고선 도달하기 어려운 지평이다.
“과거엔 개그든 공연이든 잘해 보려고 노력했다. 근데 그건 아마추어 시절에나 필요한 미덕이더라고. ‘잘’하는 것보다 좋은 건 ‘재미있게’ 하는 거거든. 좀 서툴면 어때? 뭐든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어?”
재미있게 살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니 환장할 일이다. 재미라는 샘물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니 그냥 목마르게 사는 거지.
“발상을 전환하자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자는 거다. 가령 그 왜 가수들 공연 시작 때 불꽃 같은 축포를 발사하잖아? 난 뭐든 남들과 똑같이 하는 건 싫더라고. 그래서 내 공연 때는 시장에서 뻥튀기 기계들을 빌려다 뻥뻥 터뜨렸다.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며 엄청 폭소를 터뜨리더라.”
머리에 서리가 내린 뒤에도 장난기와 유머와 재기가 번뜩인다. 단무지 없는 짜장면을 먹는 것처럼 섭섭한 인생에 고소한 양념을 뿌리는 데 이골이 났다.
“생각의 타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재미있는 ‘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가령 ‘직접 만든 수제 칼국수’라고 써 붙인 말 안 되는 간판을 봤다 치자. 그때 저거보다 재미있는 이름이 없을까 생각해보는 거다. 그러면 뭔가 떠오른다. ‘놀러 온 사람이 시켜 만든 수제 칼국수’라거나, ‘소주가 생각나는 수제 손만두’라거나. 이거 재미있잖아? 장사도 더 잘될걸?”
재미의 출처가 곳곳에 널려 있다는 건가?
“바로 그거다. 특별할 거 없는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면 기발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언젠가 마트 입구에 놓인 카트에 이런 문구가 적힌 걸 봤다. ‘정관장 드신 분들은 살살 밀고 가세요!’ 야, 이거 기발하잖아? 기똥찬 광고 문안이잖아?”
강적을 만난 기분이었겠다. 나보다 한 수 위 인간이 있네 하며.(웃음)
“관찰과 생각도 많이 하지만 내 아이디어의 상당 부분은 일상에서 나온다. 특히나 사람들과의 잡담은 아이디어 공장이지. 잡담에 소재를 하나 올려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르거든. 요번에 준비하는 책은 이 잡담에 관한 얘기다.”
가제목도 생각해뒀다. ‘다 알 필요 없다. 잡담이나 알고 지내자’로. 어떤 신들은 인간이라는 미증유의 생물이 너무 불어나거나 장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를 규합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라서다. 반란은 왜? 전유성의 사고에 기대자면 인간들이 너무 진지하게, 너무 재미없게 살아서다. 그러니 잡담이나 하고 가자는 거다. 잡담으로 안면 근육을 실룩여 웃음의 파랑이 너울거리게 하자는 거다.
그의 나이 올해로 일흔둘. 이 나이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다들 그걸 생각해보거나 의논한다. 치매 역시 관심사다. 전유성에게 물어볼까? 이 두 가지 성가신 문제를.
“무슨 수가 있겠나? 오면 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겠지. 난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엔 별 관심이 없다. 치매? 가족들이야 고생하겠지만, 치매에 걸린 당사자는 아무것도 몰라 고통도 없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웃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지만 그게 쉬울까 보냐. 그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할 건가. 농담과 언어유희, 해학과 기지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의 얘기엔 인생과 세상의 문제를 찍어내려는 갈고리가 들어 있어 짭짤하다.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거침이 없어 시원하다. 시퍼런 촉으로 솟은 야산이라 할까 보다. 그 산 언저리에서 귀 호강 한번 잘했다.
산이 높아 숲은 무성하고 마을은 밝다. 피고 지는 꽃이나 명멸하는 별, 그 덧없는 것들을 벗 삼아 지내기 좋은 곳이다. 마을 입구엔 ‘예술인 마을’이라 쓴 팻말이 있다. 아늑한 자연 환경에 이끌린 몇몇 예술인들이 들어와 사는 마을이다.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유휴열(71)이다. 그는 이곳에서 33년을 붙박이 장롱처럼 눌러 살며 그림을 그렸다. 다작(多作)을 하기로 소문난 화가다. 그가 올봄에 개인미술관을 개관했다. ‘유휴열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화가라면 다들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림밖엔 난 몰라! 이렇게 속으로 외치며. 그들은 그림으로 존재의 가치를 돋우고, 그림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길 바라며, 나아가 상상력을 무한 확장한 그림 작업으로 자신만의 심미적 제국을 구축하고 싶어 한다. 그러자면 일단 열심히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취약점이 많은 게 인간의 정신. 뜻대로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자만심, 혹은 매너리즘이 방문해 화가를 나태의 늪에 집어던지기 십상이지 않던가. 이 점에서 유휴열은 귀감으로 회자된다. 그는 그리지 않고서는 숨 쉴 수 없다는 양 치열한 창작을 하기를 평생토록 일관했다. 그렇게 해서 수장고가 미어터지도록 쌓인 작품이 자그마치 5000여 점.
“미술의 공익성, 공공성을 생각했다"
이 많은 작품을 다 어이하나? 노령에 접어든 유휴열은 숙고했던 것 같다. 머잖아 생을 다하는 시간이 찾아올 텐데, 그림들을 등짐지고 함께 떠날 방법은 없고, 다 불태워 없애는 광란(?)은 적성에 맞지 않고, 그는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민했을 것이다. 이건 유휴열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가의 사후, 그의 분신에 해당할 작품들이 처할 운명에 관해 많은 화가들이 심각한 모색을 하고 대책을 찾는다. 이상적이기로는 작품을 공공미술관에 기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을 공산이 크다. 공공미술관이라 하더라도 기증 작품을 수용하기 위한 물적 여건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휴열은 결국 개인미술관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개인미술관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화가가 대부분이라는 걸 고려하면 유휴열은 행운아다. 그리고 그 행운은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게 아니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불러들였다. 어쩌면 꽤 오래된 숙원이었을 미술관을 드디어 출항시킨 그는 이제 사후에도 행운과 동행하기를 염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까지 다했다고 자부해도 좋을 자신의 작품들이 시간을 초월해 후세까지 불멸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유휴열이 미술관을 만든 목적이 다만 작품의 보전을 위한 데에만 있지는 않다. 그가 보기에 전주권, 혹은 전북권의 미술계 토양은 척박하다. 남원시에 있는 김병종시립미술관 외에는 개인을 기리는 기념미술관이 전무했던 현실을 그 하나의 증거로 꼽는다. 따라서 그는 유휴열미술관이 지역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며 일을 추진했다. 유휴열을 알아보는 눈들은 서울에도 많지만, 전주권 문화예술계에선 단연 친숙하게 알려진 원로 화가다. “신기할 정도로 유휴열을 믿고 따르는 인사가 많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유휴열은 이처럼 그를 알아주는 지역의 애호가들에게 미술관으로 화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지역에서 이만큼이나 화가 행세할 수 있었던 게 다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했겠는가. 늘 남들의 도움을 받았다. 알고 보면 내가 도움 준 일이 드물었다. 이제야 철들어 미술의 공익성, 공공성이라는 걸 생각하며 미술관을 만들었다.”
모악산 치맛자락에 안긴 미술관
유휴열미술관은 유휴열이 33년간 살아온 거처를 다듬어 만든 공간이다. 원래 있었던 살림채와 작업실, 수장고는 그대로 둔 채 전시공간과 카페공간을 증축해 틀을 구축했다. 초목들이 길차게 자란 널찍한 정원도 섬세한 보완을 해 야외 조각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자력으로 조달한 불충분한 자금 사정에 맞춰 시설을 구비하느라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한 대목도 있다. 너무 작은 규모의 전시실이 그렇다. 차후 넓혀나갈 예정이라지만 현재로서는 흠이라면 흠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풍치와 구성은 아름답고 안정적이다. 목가적인 전원에 터를 둔 근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전주 사람들이 즐겨 등산을 하며 서기가 아롱진 산이라 예찬하는 모악산의 치맛자락에 안긴 집이지 않은가. 33년간 이곳에 살며 그림을 그려온 유휴열은 33년간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어 주변의 자연과 동화를 이룬 정원 공간을 빚어냈다. 시인 김용택에 따르면 그는 “너부데데한 미륵을 닮은 사람”이다. 유휴열의 외적인 경관과 내면을 아울러 빗댄 표현이겠으나 일단 근골이 두루 짱짱한 외양부터가 돌미륵을 닮아 투박하다. 정원을 일부러 세심하게 가꾸는 버릇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심심파적으로 수목들을 즐겼으리라. 초목들은 햇빛과 물을 끌어들여 저절로 자랐으리라. 저 태연한 풀과 나무들, 무엇이 아쉬워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랴.
신생 미술관이라고 얕잡지 말자. 있을 것 다 있고, 볼 만한 것 다 볼 수 있다.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노루꼬리처럼 짤막하지만 고즈넉해 마음을 풀어놓을 만하다. 키 큰 노송들, 붉은 꽃떨기 매단 배롱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커피가 식는 속도보다 빨리 식어버린 사랑의 달착지근한 허무를 반추하기에 적당한 정원이다. 산책로 끝에선 계류가 솰솰 흐른다. 흐르는 물은 무정하다. 떨어진 꽃잎과 누런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다니.
전시실에선 ‘유휴열-산·나무·꽃’전(展)이 펼쳐지고 있다. 화가의 심상에 포착된 자연 풍경을 거친 붓질로 그려낸 유화 작품들을 내건 전시회다.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예쁘장하게 그려진 형상이 하나 없다. 자연물의 외형보다 내적 생명감의 표출에 치중한 유휴열의 의도가 여실히 비친다. 유정한 마음과 관조의 눈길이 아니고선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상적 구상이다. 속사포처럼 빠른 터치로 물감을 짓이겨 두텁게 바른 질감에서는 자연의 기운생동을 가급적 강렬하고 질펀한 화풍으로 드러내려 한 작의가 읽힌다.
속 깊은 그림이다. 분방하나 심층적이다. 거칠지만 흥겹다. 유휴열의 미술세계를 잘 아는 이라면 사족 없이도 금시에 알아차릴 것이다. ‘아하, 보지 않고도 알겠다, 유 화백이 흥겨워 시원하게 물감을 갈겼구나!’ 그렇게. 흥이라는 것, 이건 유휴열 그림의 키워드다. 우리 민족의 토착 정서를 흔히 한(恨)으로 보지만 그는 흥에서 원형을 찾는다. 한이 무르익으면 역설적이게도 신명이 뻗고, 신명에 겨우면 흥이 돋아 어깨춤들을 추며 삽시에 놀이판을 짜는 사람들. 이게 유휴열이 보는 민족의 초상이다. 해서 진정으로 토속적인 것, 전통적인 것, 정신으로 유전된 원초적인 것을 형상화하기에 주력해온 그의 미술 작업의 뿌리는 흥이라는 대지를 탐닉하는 것이며, 오방색을 즐겨 사용하지만 기법은 다분히 모던하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촌평을 볼까.
“유휴열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어법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전통미술의 특성과 한국인의 기질 같은 것들이 마구 요동친다. 화면은 그 박동을 격렬하게 들려준다. 그것은 거의 색채와 붓질로 이루어진 춤이고 노래이고 판소리 사설이고 구음과도 같다.”
유휴열미술관에는 현기증이 나는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유휴열의 작업실이다. 이 미술관엘 왔다가 그 뜨거운 작업실을 구경하지 않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에 속한다. 다산성을 본분으로 여기며 무슨 광포한 충동에 휩싸인 사람처럼 작품 생산에만 매진하는 사람의 예술적 생태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진장한 작품들, 열정의 징후들, 또는 노화가의 미묘한 고독까지를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명소가 아닐 수 없다.
< 2편에 계속 >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남원’ 하면 춘향, ‘춘향’ 하면 광한루원만 생각났다. 남원에는 진정 광한루원 말곤 갈 데가 없을까 궁리하던 때에 마침 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미술관이 좋아 남원에 들락거렸더니 식상했던 광한루원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동네 빵집과 걷기 좋은 덕음산 솔바람길도 발견했다. 이 산책로가 미술관과 연결되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던지. 남원을 여행하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종종 생각났다.
걷기 코스
남원역(남원시외버스터미널)▶차량 이동▶광한루원 북문▶남문▶요천 섶다리▶덕음산 솔바람길 입구▶전망대 레스토랑▶남원국립국악원▶그네매점(또는 약수터매점) 뒤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남원항공우주천문대▶춘향테마파크(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
상상 속 달나라를 구현한 광한루원
광한루원에는 남문(정문)과 서문, 북문이 있다. 오늘 걷는 코스는 북문으로 입장해 남문으로 나가는 것이 동선상 편하다. 북문 앞에는 고품격 한옥 호텔인 남원예촌과 규모 있는 한정식 전문점들이 자리했다. 이 일대는 남원 제일의 관광단지라서 거리가 깔끔하고 작은 쉼터도 조성돼 있다.
주중 낮 동안 일반인 관람이 허용되는 남원예촌을 잠시 둘러본 뒤 광한루원 북문으로 입장한다.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춘향사당이 코앞이다. 조선 중기 사람들은 달나라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산다고 생각했다. 이 상상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머무는 달나라 궁전이며, 광한루 앞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에 섬처럼 떠 있는 세 개의 섬은 지상낙원, 즉 영주산(한라산),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을 뜻한다. 중국 ‘사기’에 등장하는 전설 속 세 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본떠 일컬은 것이다. 나무다리로 연결된 세 섬을 차례로 들러본다. 팽나무가 우거진 영주산 영주각에 올랐다가 봉래산의 대숲을 지나고, 방장산 숲에 숨은 작은 방장정에선 잠시 쉬어간다.
방장정 옆으로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오작교가 보인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걸었던 오작교를 본떠 만들었다. 다리 길이가 57m에 달하는 국내 최장 연지교다.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났던 장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오작교를 건너며 연못을 굽어보니 잉어 떼와 천연기념물인 원앙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노닌다. 광한루원은 원앙과 잉어에게도 지상낙원인 듯하다. 연못가 버드나무와 짝꿍처럼 잘 어울리는 수중 누각 완월정에 올랐다가 남문으로 나선다.
솔숲이 우거진 덕음산 솔바람길
광한루원 남문으로 나오면 바로 요천변이다. 요천 제방에 올라 벚나무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가 우거져 그늘이 짙다. 덕음산 솔바람길로 가려면 승월교나 섶다리를 이용해 요천을 건너야 한다. 흔한 시멘트다리 대신 섶다리를 선택해 건넌다. 이 섶다리는 옛날부터 요천에 섶다리 두 개가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근래에 만든 쌍섶다리다. 섶다리를 건너면 춘향테마파크와 식당, 놀이공원, 국립국악원 등이 있는 춘향촌 입구가 보인다. 춘향촌 입구 왼쪽에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가 있다. 나무계단을 조금 오르면 솔숲길이 이어진다. 잔잔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숲길이 전망대레스토랑 앞 전망대로 인도한다. 이곳에 서서 남원 시내를 굽어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같고, 도심 가운데로 요천이 흐른다. 남원의 젖줄 요천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 남해까지 간다.
탁 트인 남원 풍광을 감상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국립민속국악원 방면으로 내려간다. 국립민속국악원은 판소리의 성지인 남원의 국악 수준을 잘 보여주는 공연장이다. 주말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통 공연을 선보인다. 주말에 이 길을 걷는다면, 공연시간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다. 국립민속국악원 뒤쪽으로 이동해 덕음산 솔바람길의 또 다른 입구를 찾는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김병종미술관까지 이어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된다. 길 곳곳에 전시돼 있는 시, 그림, 캘리그래피 작품을 감상하고, 솔숲 향기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다. 데크에서 내려오면 바로 김병종미술관이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에서 미술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남원의 뜨는 명소 김병종미술관과 화첩기행 북카페
2018년 3월 개관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 한국화의 거장 김병종이 자신의 작품을 남원시에 기증하면서 건립이 기획됐다. 덕음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실내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푸른 숲이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은 1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가의 초기작이자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바보예수’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동심이 느껴져 절로 미소 지어진다. 김병종 화가는 여행 에세이 ‘화첩기행’을 저술해 문학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상설전시장 옆에는 화첩기행 북카페 ‘미안’도 자리해 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청년 카페지기가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라는 뜻을 담아 ‘미안’이라 이름 지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김병종 화가의 작품과 그가 기증한 미술, 인문학, 문학 관련 도서 등 약 20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나머지 벽면은 통창을 설치해 물이 가득한 정원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미술관과 카페를 만나 걷는 즐거움이 커진다.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맛있는 커피와 빵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어간다.
춘향테마파크 걸을까, 오감만족숲을 걸을까
미술관에서 걷기를 마치고 광한루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더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항공우주천문대를 거쳐 춘향테마파크 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으로 내려가도 좋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광한루원이 멀지 않다.
항공우주천문대는 미술관 뒤쪽으로 난 길 끝에 있다. 미술관에서 약 300m 거리다. 오르막을 살짝 오르면 돔 형태의 지붕을 얹은 천문대를 만난다. 여러 대의 천체망원경을 통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을, 밤에는 달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관측을 할 수 없으니 날씨를 봐가며 입장해야 한다.
천문대 뒤쪽, 솔바람길 이정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춘향테마파크 뒷문이 나온다. 이 문은 춘향테마파크의 가장 위쪽 구역에 있으니 아래로 내려가면서 관람하면 된다.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공원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세트장이 남아 있다. 뒷문 근처에는 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첫날밤을 보냈던 월매집 부용정, 춘향이 변 사또에게 고초를 당했던 관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춘향테마파크에 입장하지 않고, 뒷문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감만족숲/광한루 방면 숲길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오감만족숲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오감만족숲은 2017년에 덕음산 기슭에 조성한 공원으로 걷기 좋도록 지그재그형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승월교로 바로 연결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전통시장의 정취가 물씬 남원공설시장
광한루 서문 앞에 있는 상설시장이다. 오일장날에는 아침부터 붐빈다. 남원에는 산과 강이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다. 특산물을 구경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남원산 미꾸라지가 흔하다. 시골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오래된 뻥튀기 가게도 있다. 온갖 곡식은 물론 무까지 튀겨준다. 남원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즐겨 사 먹는 또 다른 인기 메뉴는 닭발 튀김. 뼈를 발라낸 닭발에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다.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남원시 의총로 51, 4와 9로 끝나는 날이 오일장.
맛의 고장 남원 맛집
남원에서는 남원산 미꾸라지와 된장을 넣고 푹 끓인 추어탕이 유명하다. 광한루원 서문 쪽 요천변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돼 있다. ‘새집’, ‘현식당’, ‘부산집’이 입소문 났다. 광한루원 북문 앞에 있는 남원 한정식 전문점 ‘종가’도 추천할 만하다. 보리굴비 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찜, 육회, 전복구이 등 맛깔난 전라도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돌솥비빔밥 전문점인 ‘반야식당’도 광한루 인근에서 오래 장사한 소문난 집이다. 최근 뜨고 있는 ‘집밥, 담다’는 ‘따뜻한 가정식 한 끼’를 표방하는 젊은 감각의 음식점이다. 정갈한 식단으로 호평받고 있다. 예약은 필수.
남원 사람은 다 안다는 명문제과
남원에서 오래 장사한 동네 빵집이다. 가게는 작고 허름하다. 다른 빵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빵을 개발해 인기를 얻었다. 남원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인데 ‘백종원의 3대천왕’에 출연한 뒤로 손님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평일에도 줄을 서며, 오후 늦게 가면 인기 빵은 동나 살 수 없다. 3대 인기 빵은 생크림소보로, 꿀아몬드, 수제햄빵이다. 광한루원 북문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남원시 용성로 56.
걷기 Tip
❶ 5월 8일부터 12일까지 광한루원과 요천 일대에서 제89회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야간 조명을 밝히는 밤에 산책해도 좋다.
❷ 4월 24일부터 5월 19일까지 바래봉 철쭉제도 열린다.
“매일같이 쉬지 않고 놀러만 다녔어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가 숙제 같았어요.”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만난 황형연(黃炯淵·61)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아내 이선자(李善子·58) 씨와 젖소를 키우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은 베테랑 목장주이자 낙농인이다. 소를 키우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사소한 고민이 하나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 자식 같은 소들을 돌보고, 젖을 짜고, 집유 차량에 우유를 넘겨주고 나면 하루 일과는 끝. 저녁 먹기 전까지 4시간 동안 할 일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부부가 맨 처음 시작한 것은 주변 산들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황 대표는 주변에 안 다녀본 곳이 없다고 말한다.
“산이란 산은 다 찾아다녔죠. 주변 관광지도 웬만한 곳은 다 다녔고요. 좋다 싶은 곳은 두 번 세 번을 갔는데, 너무 자주 다니니 신물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 황 대표 눈에 들어온 광고 한 줄. ‘순천대학교 목장유가공 교육과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거다 싶었다.
“우리가 원유를 생산하니까 활용하면 좋겠다 싶었죠. 가족이나 지인들을 위해 만들어도 보람있겠다 생각했어요.”
황 대표가 먼저 시작했지만, 치즈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은 오히려 아내 이 씨였다. 농장을 하기 전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제약회사도 다녔기에 이론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라도의 ‘어머니’로서 지니고 있는 ‘손맛’도 치즈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이 씨는 말한다.
“교육을 받으니까 슬슬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원래 유제품을 잘 먹기도 했고요. 새벽같이 착유를 끝내고 8시까지 교실에 도착해야 해서 많이 바빴지만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똑같은 교육과정을 열 번이나 반복해서 수료했죠. 학교 연구원들이 왜 자꾸 오냐 핀잔을 줄 정도였어요.”
이 씨는 수업시간에 계량된 재료들을 꼭 손으로 한 번씩 쥐어봤다. 눈으로 보는 수치보다 손으로 느끼는 감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중엔 손대중으로도 정확하게 계량해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렇게 재미 삼아 만들던 것을 사업화하기 시작한 것은 7년 전 부터다. 처음부터 거래처를 정해놓고 만든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눠주던 치즈가 소문이 나면서 본격적인 허가를 받고 생산량을 늘렸다. 무항생제와 해썹(HACCP) 인증을 받고 가장 큰 거래처인 생활협동조합에 납품을 시작했다. 이후 부부의 제품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황 대표 부부의 유가공 회사명이 ‘하먼치즈’가 된 사연도 재미있다.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데 회사명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황 대표 어머니 입에서 ‘하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하먼’은 ‘그렇지’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가 담긴 전라도 방언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누구 할 것 없이 사명을 ‘하먼치즈’로 하자는 데 동의했다.
하먼치즈는 모차렐라, 슈레드, 스트링, 고다 치즈, 구워 먹는 치즈까지 생산 중이다. 요구르트도 만드는데, 공산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맛을 자랑해 인기가 좋다. 단일 목장의 우유를 당일 착유해 당일 가공하는 제품이라 품질이 나쁠 수가 없다.
하먼치즈에는 황 대표 부부 외에 4명의 직원이 더 있다. 최근에는 며느리도 순천대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돕겠다고 나섰다. 농장일은 이제 아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 이 씨는 치즈 사업을 시작한 뒤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즐겁다고 말한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치즈를 만들기 시작해 오전 8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요. 그렇게 작업을 해놔야 직원들이 치즈를 성형하고 제품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농한기를 맞아 한가해진 주변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해도 만날 틈이 없어요. 제 시간이 없어졌죠. 그래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 같아 늘 즐거워요.”
제84회 남원 춘향제가 5월 1~6일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일원에서 열린다.
이번 축제는 ‘사랑이야기, 남원에 물들다’를 주제로 누구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랑과 만남의 문화·예술·체험 행사들로 마련됐다.
축제 첫날인 1일에는 춘향제의 대표 행사인 ‘전국 춘향 선발대회’가 진행된다. 이 외에도 오페라 춘향 갈라쇼·신판 춘향 길놀이·춘향 시대속으로·방자 프린지(마당놀이)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를 즐길 수 있다. 축제 마지막 날인 6일에는 KBS 전국 노래자랑도 함께 열려 대미를 장식한다.
축제기간 동안 오토캠핑 70동 규모의 ‘춘향 캠핑장’도 함께 운영한다. 춘향 캠핑장은 5월 1~3일(1기), 3~5일(2기)로 나눠 신청 가능하고 참가비는 4만 원(1박 2만 원 기준)이다.
남원시는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축제 기간 중 5~6일에는 외래 관광객에게 광한루원을 무료로 개방한다. 신분증을 지참한 남원시민의 경우엔 축제 기간 내내 광한루원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3월 넷째 일요일인 23일 포근한 날씨 속에 봄꽃이 만개하면서 전국의 유원지는 나들이 인파로 북적거렸다.
원동매화축제가 열린 경남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일대에는 가족과 연인 수만 명이 찾아 활짝 핀 매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며 봄 추억을 만들었다.
매화와 산수유 등 봄꽃이 활짝 핀 하동 섬진강변과 거제 외도, 통영 장사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에도 봄꽃 정취를 느끼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잇따랐다.
'미선나무 꽃 전시회'가 열리는 충북 청원군 미동산수목원에는 많은 가족 단위 행락객이 찾아 꽃향기에 취했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로, 이번 전시회에는 200여점의 분화가 전시되고 있다.
이미 진달래와 개나리 등 봄꽃이 만개한 제주도에도 주요 관광지마다 봄꽃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경기도 과천 서울랜드에 2만여명, 용인 한국민속촌에 4천여명이 찾아오는 등 전국의 유원지에도 봄기운을 느끼려는 시민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
3ㆍ15 마라톤대회가 열린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각지공원에서는 3천여 명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참가해 건강을 다졌다.
산악자전거대회와 족구대회가 열린 경남 사천시 삼천포대교공원과 김해 가야대 운동장에도 각각 1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산행으로 봄맞이하는 등산객도 많았다.
강원도 설악산국립공원에는 6천여명의 등산객이 찾아 산행을 즐겼고 평창 오대산과 원주 치악산에도 7천여명이 몰렸다.
전북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과 무주 덕유산, 정읍 내장산 등에는 1만여명의 행락객이 찾았고 인천의 대표적 산인 강화도 마니산에는 평소 주말보다 1천여명이 많은 4천여명이 몰렸다.
농촌 들녘에서는 농민들이 복분자 가지를 치고 밭갈이를 하는 등 한 해 농사 준비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