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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 아산면 고인돌길, "봄꽃들 자지러지게 필 때면 야생 화원 펼쳐지리라!"
- 고인돌과 습지와 호수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다. 고인돌박물관을 출발점으로 해 고인돌유적지와 매산재를 거쳐 분곡습지에 닿기까지의 거리는 약 4km. 역으로 분곡습지까지 차로 간 뒤 매산재를 넘어 고인돌박물관에 도착해도 된다. 분곡습지 산기슭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휘고 꺾이는 길. 그지없이 수려한 시골길이다. 차로 휘익 지나기엔 아깝다 느끼며 한껏 서행을 한다. 숲에 사는 귀 달린 생명들은 자동차 소음이 성가실 게다. 내 길을 쉬 가자고 덤불 속에 깃든 고라니를 놀래니 이게 민폐다. 옛 스님들은 지팡이를 앞세워 땅을 노크하며 길을 걸었다. 행여 무심한 발길에 죄지은 바 없는 개미며 지렁이 밟힐까 저리 가라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야산 모롱이를 돌 때마다 풍경이 바뀐다. 혹은 솔숲 사이로, 혹은 대숲 사이로, 혹은 자작나무 군락 옆댕이로 길이 나서. 기우는 하오의 햇살을 받은 호수에, 혹은 하얀 물무늬 아롱지고, 혹은 초록 물빛 너울처럼 일렁거려서. 호숫가 나무들은 내내 호수에 시선을 던지고 산다. 물 위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 생애를 살아가는 저 나르키소스들. 나무들의 그 붙박이 시선에도 생의 희로애락이 어릴까. 뒤죽박죽 꼬이고 풀리다 다시 꼬이는 생의 아이러니를 바라볼까. 외투 깃을 세우고 망연히 길에 멈춰 서 전율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쓸쓸한, 저 물가 나무들의 정경. 운곡습지 구역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이곳엔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붙었으니 ‘구름골’이다. ‘오베이골’이라고도 한다. 매산재, 행정재, 호암재, 백운재, 굴치재 등 다섯 고개가 이 골짜기에서 갈리거나 모여 ‘오방곡(五方谷)’으로 통했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이 지역 사투리다. 오베이란 이름, 오 맛깔스럽구나. 사투리란 우리가 고이 간수할 만한 언어의 순수 오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산야의 젖을 물고 살았던 오베이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83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 조달을 위한 저수지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모든 주민이 물러났다. 농토의 경작도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냉각수의 오염을 우려해서였다. 이후 이곳은 인적 끊긴 적막강산일 따름이었다지. 그렇게 30여 년이 흐르자, 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태계가 완연히 살아난 것. 삵과 수달과 담비, 황조롱이와 황새와 팔색조 등 멸종 위기종 생물들이 대거 나타난 것. 폐농경지가 습지로 변하며 생물들의 서식 조건이 좋아진 덕이었다. 비무장지대(DMZ)에 버금갈 생태 경관을 보유하게 된 이 분곡습지는 2011년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었다. 자연과 사람은 길항한다. 사람이 극성을 부리면 자연이 망가진다. 사람이 발을 빼면 자연이 살아난다. 겨울 가뭄 탓일 테지. 물을 담지 못한 습지 일원의 경관은 아쉽게도 무덤덤하다. 봄비 내리고 봄꽃들 자지러지게 필 때면 습지에 수생식물들이 번성하리라. 이채로운 물 위의 야생 화원이 펼쳐지리라. 봄은 벌써 발길을 내딛을 채비를 하는가? 운곡서원 앞 매화나무엔 꽃망울이 소담스레 맺혀 있다. 소녀의 볼우물처럼 앳되고 곱살한 매화꽃이 머잖아 설레며 피어나겠지. 겨울과 봄의 어간에서 들썩이긴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게 인생이지만, 삶도 사랑도 죄짓는 일의 연속방송극일 수 있지만, 매화 망울에서 봄을 예감하는 자의 마음은 소망으로 슬며시 부푼다. 운곡습지를 뒤로 하고 매산재 고갯길로 접어들자 참 걷기 좋은 숲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우리네 삶의 골목골목엔 축축한 상처가 고여 있기 십상이지만 이 숲길에선 가슴 밑바닥부터 말끔한 생기가 돋는다. 이를 신비하다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고개 넘어 길 끝엔 고창고인돌 유적과 고인돌박물관이 있다. 유적지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477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단하며 가장 비밀스런 무덤이다. 빗돌이 있을 리 만무하니 파묻혀 흙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의 덧없는 소멸에 관한 적시다. 바위처럼 닳지 않는 영원을 향한 갈망의 표식이고 말이다. 영원이라니. 하루살이에 불과한 게 사람이라지만 영원은커녕 단 하루라도 제대로 사는 일조차 벅찬 게 삶이거늘. 그러나 죽어서라도 영원을 꿈꾸는 게 사람이다. 영원한 고요와 침묵은 거저 얻어지겠지만.
- 2019-03-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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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 입은 박준규 가족 나들이
- 카리스마, 예능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그리고 아버지 故 박노식으로부터 이어지는 3대째 배우 가족의 가장인 배우 박준규(56)를 만난 것은 박술녀 한복연구소에서였다. 새해를 맞이해 생애 처음 그가 아내 진송아 씨, 장모(정갑숙), 어머니(김용숙)와 함께 한복 나들이를 한 자리였다. 촬영 현장에서 가족들을 대하며 보여줬던 즐거운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에너지가 저절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드라마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무엇이든, 실제의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을 모든 것에 우선해서 두는 사람이다. 그의 남다른 가족 사랑, 그리고 숨겨뒀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준규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보여준 그의 자연스러운 유쾌함이 계속 궁금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긍정적 마인드죠. 저는 현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연기만 하고 차 안에 있다가 나가고 하는 그런 건 제겐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쉴 때가 되면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거나, 유럽에서 혼자 한 달 동안 지내다 온다는데, 저는 해본 적 없고 그런 생각도 든 적 없어요.”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의 긍정적인 마음은 오롯이 가족을 향해 있었다. “집안 돌아가는 게 모든 것의 우선이죠. 어디 투자도 못하고 꾸준히 먹고살 정도로만 살고 있어요. 빌딩 하나 사도 될 만큼 번 적도 있지만 집에서 놀고먹다가 까먹고.(웃음) 여행도 항상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요. 혼자 있는 거 싫거든요.” 연예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의 아들인 박종혁 군과 박종찬 군은 둘 다 배우다. 박준규의 아버지인 액션스타 박노식 씨까지 아우르는 3대 배우 가족이다. 그리고 아내 진송아 씨 또한 배우다. 그야말로 가족 전부가 연기 전문가다. “아이들 스스로가 택한 길이죠. 쉽지 않은 직업이고 잘 이겨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많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제가 되도록 아이들과 같이 TV에 안 나가려고 해요.” 어째서일까? 그 이면에는 연예인 가족이라는 입장이 주는 부담이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해 쓰는 수많은 ‘악플’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받는 근거 없는 조롱과 멸시도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고, 특히 요즘 사회를 경악케 만든 소위 ‘2세들의 갑질’에 대해 민감해하는 대중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 탓도 있다. “‘네 아버지가 쌍칼이라 잘되는 거지’, ‘애 연기자 시키려고 저러나보다’라는 말들이 큰 상처가 돼요. 그런데 종혁이, 종찬이는 드라마, 뮤지컬 전부 다 스스로 알아서 오디션을 봐서 통과한 거예요. 지금도 계속 오디션을 보고 있고요. 요즘 세상에 어떤 제작자가 아무나 캐스팅하겠습니까. 대충 지인 꽂아서 만들지 않아요. 사실들을 모르고 하는 얘기죠. 물론 그런 과정은 다 겪어야 하는 거지만… 속상하죠.” ‘3대째 하고 있는 칼국수집은 믿음이 간다’ 하면서 ‘3대째 연기자 집안은 끼리끼리 해먹는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편견 아닌가, 어쩌면 연기를 전문적인 기술로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정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늘 함께하는 가족 그러나 같은 일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이어서 얻는 보람과 즐거움도 분명히 있다. 연기에 대해 얘기하자 그의 침울했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따로 연기 공부를 시킨다든지 하는 건 없어요. 종찬이가 뮤지컬 공연할 때 포즈나 행동, 액션에 대해 잠깐 보여주면 ‘이게 낫다’ 하는 정도로만 조언해요. 와이프도 배우이다 보니 네 명이 앉아서 연기나 음악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집중되죠. 우리 가족은 대화 자체가 해피해요. 같은 주제를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대개 가족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이유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박준규의 집에서는 연출이나 연기 등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밖에서 따로 도는 일도 없다.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가족 전부가 모여서 같이 마신다. “저 같은 경우는 금수저로 태어났다가 흙수저가 됐다가 다시 금수저가 되어가는 중이고, 우리 얘들은 금수저죠. 그런데 금수저면 스스로 금수저답게 행동해야지,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게 아니라고 봐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도 맞는 말이지만 좀 늦게 정신 차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1년이 지나 걷는 아이도 있는데 억지로 걷게 해서 더 안 좋아지는 것처럼요.” 박준규의 교육 방침은 기본적으로는 ‘내버려둬’이다. 자기가 살다 보면, 단체 생활을 하게 되면, 때 되면 알게 된다는 게 그의 신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은 가르치고 버르장머리 없고 이기적인 습관들은 지적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것만큼은 지키고 살았죠. 아빠가 일하고 들어왔는데 방에서 공부하느라 인사도 안 한다면, 그런 건 잘못됐다고 봐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서 인사해야 하죠.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한 게 있으면, 약속 전날에 밤을 새든 말든 상관 안 하지만 그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 그의 교육적 방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책임질 부분을 명확하게 하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행히 아이들은 단체 생활인 드라마 제작 현장을 어렸을 때부터 봤기 때문에, 자기들이 잘못된 게 있으면 스스로 고치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게 고맙다고 말한다. “일하다 보면 주변에서 제 아이들이 잘한다는 얘기들을 듣게 되는데, 너무 기분 좋죠. 바쁜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아 아들들한테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 박노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됐지요.” 난데없이 떨어진 7억 빚 그는 사람들에게 “박준규가 나오니 작품이 재미있네”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항상 그렇게 믿음이 가는 배우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은 그가 가진 연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꾸준한 연극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2년 이후부터는 연출도 맡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공연 쪽에서 큰 문제가 난 적이 있었다고 사실을 밝혔다. “2016년에 뮤지컬을 제작했어요.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때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굉장히 잘돼서 ‘음, 역시 박준규는 제작이면 제작, 연출이면 연출 못하는 게 없어’라고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그해 12월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건이 터졌어요. 그러면서 관객 수가 급감해서 망했어요. 그리고 파트너였던 사람이 개인파산을 신청하면서 제작비 전부가 제 빚이 되더군요. 서류상으로 할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서 저 혼자 갚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일로 그가 갚아야 할 빚은 약 7억 원.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채권자 중에는 지인도 있는 만큼 그들에게 도의를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앞으로 1, 2년 더 고생하면 갚을 수 있을 듯해요. 그동안 아이들도 잘되면 좋고. 나도 좋은 작품 한 번 또 열심히 하게 되면 좋고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인생사에 새겨진 굵직한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족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배우가 아닌 가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잘한 일은 지금의 가족을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잘한 일이라면 진송아와 결혼한 거죠. 진송아가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해서 쓰레기 인생을 살았을걸.(웃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지금의 아이들이 있어줘서 고맙고요.” 그가 보는 아내의 장점은 ‘괴롭히지 않고 잔소리를 안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오래 함께 잘 살아온 비법은 아이들을 ‘내버려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을 보면 케미가 좋은 동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부의 인연을 오래 고스란히 유지하려면 상대가 바뀌길 바라면 안 돼요. 있는 그대로 둬야죠.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상대를 자기화하려고 해서 일어나요. 가르치려고 들고, 서로 몇십 년간 살아온 습관이 있는데 그걸 바꾸라고 강요하다가 다투게 되죠. 와이프와 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유지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박준규, 깨달음을 만나다 박준규의 강점은 솔직함이다. 그의 이름이 몇 년 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방송에서 아침은 며느리가 차려주는 걸로 먹어야겠다고 말했던 일 때문이다. 요즘처럼 페미니즘이 커다란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는 더 화제가 될 발언이다. “맞벌이 부부라면 아침을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정주부라면 자기 할 일은 해야지. 그런 말 몇 마디 했다가 ‘망언이네, 간 큰 시아버지네’라며 이상하게 몰아가려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돼서 며느리 밥 먹겠다는 게 이상한가? 전 지금도 그걸 바라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뭔가를 힘들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것이 진짜 희생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 발언을 한 후 동네 약국에서 한 사람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내게도 아들이 있는데, 고맙다”라고 말해주더란다. 아마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러나 말할 처지가 못 되다 보니 그의 솔직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족도 그의 솔직함을 약간(?) 걱정하는 눈치다. 솔직함이 때로는 까칠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와이프는 ‘제발 그런 얘기가 나와도 말 좀 가려라, 여성 비하 발언은 조심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살다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부들을 많이 봐요.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 보면 뭐라고 했는데, 이제는 자제하고 있어요. 아내가 ‘그런 얘기를 들어도 뭐 그런 것도 좋겠네 하면서 대꾸하지 마라’ 해서 그럴려고요.(웃음) 정말이지 훌륭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걸랑요.” I’m the best, so you 2019년의 박준규도 지금까지처럼 바쁘게 움직일 생각이다. 봄이 되면 우선 지난해 방영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드라마 ‘검법남녀’ 시즌2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혼자가 될지 여럿이 될지는 구상 중에 있다고. 인터뷰 끝에 앞으로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는 그에게 신년 덕담을 주문했다. “요즘은 자신은 안 돌보고 자식들만 돌보는 사람들이 있고, 반면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임 더 베스트, 소 유(I’m the best, so you), 내가 최고고 당신도 최고다. 우리는 항상 베스트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베스트라는 것도요.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거죠.”
- 2019-02-0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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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만치’씩 살려낸 엄마 음식 ‘저만치’ 해외까지
- 국민배우 김수미(70)를 모르는 대중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그 이름이 예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지킬 수(守), 아름다울 미(美).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늙을 때까지 아름답게 살자는 결심으로 직접 지은 이름이란다(본명은 영옥). 그 이름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김수미는 최근 ‘한국의 맛을 지키는[守味]’ 문화 전도사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전 세계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싶다”는 그녀의 원대한 포부는 40여 년 전 어머니를 향한 짙은 그리움에서 시작됐다. ‘2018 제8회 대한민국 한류대상’ 시상식. ‘수미네 반찬’(tvN)을 통해 우리네 어머니의 손맛을 전수 중인 김수미는 한식 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공을 인정받아 ‘특별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방송을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수미네 반찬’은 근래 넘쳐나는 먹방, 쿡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모던한 아일랜드 주방이 아닌 툇마루와 가마솥이 돋보이는 세트장은 김수미가 어린 시절 살던 시골집을 재현한 것. 게다가 제자로 등장하는 베테랑 셰프들이 눈대중 손대중으로 요리하는 그녀의 레시피를 허둥지둥 따라하는 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색다른 재미를 주고, 그 근저에 깔린 ‘엄마의 마음’은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하며 남녀노소 불문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예상 못했어요. ‘아, 진정성을 갖고 하는 건 역시 되는구나’ 싶더라고요. 몇 스푼, 몇 그램 정확한 것보다도 집에서 하는 방식 그대로 보여주려 해요. 워낙 거침없이 해대니까 카메라가 앵글을 못 잡아 당황할 때가 많지.(웃음) 처음엔 장동민 씨가 ‘선생님 레시피가 있으시냐?’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너희 할머니, 어머니는 저울질해가며 음식하셨니? 요리자격증 있어서 자식들 밥해줬니?’라고 했죠. 그냥 엄마가 딸한테 음식 가르치듯 알려주고 싶었어요. 싱거우면 소금 넣고, 짜면 물 붓고 하면 되지. 경험이 쌓이면 손맛은 다 생기게 돼 있어요.” ‘깍두기에 쪽파를 많이 넣으면 김치가 금세 물러진다’, ‘아귀찜할 때 아귀는 사나흘 꾸덕꾸덕 말린 것을 써야 한다’ 등 김수미는 자신이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수십 년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음식의 지혜라고 말했다. 또 글로 써서 남기는 레시피보다는 어머니들의 기(氣)와 영혼을 물려주고 싶은 게 그녀의 오랜 바람이자 목표다. 엄니, 왜 그 맛이 안 날까요? 베테랑 셰프들도 인정하는 김수미의 수준급 요리 실력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에게 직접 요리를 배워본 적은 한 번도 없단다. 그 옛날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그 맛에 가까워지려 하다 보니 솜씨가 좋아졌다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돌아가신 탓에 요리는 못 배웠죠. 아마 내가 마흔까지 살아계셨다면 음식 안 했을지 몰라요.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근데 결혼하고 임신을 했는데 엄마가 해준 풀치조림이 생각나는 거야. 그거 한 입만 먹으면 입덧이 싹 가실 것 같은데, 다시는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 뒤로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기억을 더듬어 음식을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수백 번 만들었던 엄마의 풀치조림. 그때마다 그립고 그리운 우리 엄니….” 음식을 하면 할수록 손맛도 늘고, 허기도 채울 수 있었지만,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해도 전에 먹던 그 맛이 나지 않으니 헛헛할 수밖에 없다고. “요즘처럼 추울 때 엄마는 김치콩나물밥을 해주시곤 했죠. 가난한 살림에 푸성귀도 없으니 엄마 나름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한 끼였을 거예요. 지금은 그 소박한 김치콩나물밥에 소고기까지 넣어 먹는 호사를 누리는데도 엄마가 해주시던 것만 못하네요. 가마솥에 지은 김치콩나물밥에 엄니표 양념간장 쓱쓱 비벼 먹던 그 추운 겨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수미는 줄곧 자신의 음식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라 표현했다. 때문에 편의점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젊은이나 인스턴트로 아이들 끼니를 해결하는 주부들이 늘어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냉동, 반조리 식품 먹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어떤 음식으로 엄마를 추억할까 싶어요. 두부 한 모를 썰더라도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그 음식에 온기가 더해지고 영혼이 담기는 거거든요. 그렇게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온순해지고, 순간 행복을 느낄 수 있죠. 나이 먹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난 예전에 행복은 어디 다락이나 보자기에 싸서 놓은 줄로만 알았어요. 근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에 숟가락 푹 담그면서 밥 먹는 거.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 그게 바로 행복이지.” “훌륭한 음식은 영혼을 감동시킨다”고 말하는 김수미에게 ‘소울푸드(soul food)’는 무엇인지 물었다. 단박에 ‘된장찌개’라고 대답한다. 구십까지 살아도 된장찌개와 총각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다는 그녀. 본인 입맛은 소탈하지만, 맛있는 반찬 소개하려 아낌없이 재료를 쓴 것이 뜻하지 않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방송 1회 때 고사리보리굴비조림을 했어요. 당시 재료비로 따지면 제주산 고사리라 5만 원은 넘게 줘야 사고, 보리굴비도 10만 원은 했을 거예요. 그걸 보고 한 시청자가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김수미 씨는 돈 잘 버니까 비싼 재료도 막 쓰는 거 아니냐’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누가 집에서 한 끼 반찬에 15만 원씩 주고 먹겠나 싶은 거죠. 그 댓글이 참 귀하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요즘엔 진미채, 감자볶음처럼 1만 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반찬으로 준비해요. 앞으로도 ‘수미네 반찬’에서는 비싼 재료 안 쓸 생각입니다.” 끝이 아닌 마지막 인사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 ‘미안하다 사랑해서’, ‘그해 봄 나는 중이 되고 싶었다’, ‘너를 보면 살고 싶다’. 제목만 봐도 글쓴이의 심정을 알 것 같은 이 책들의 저자는 바로 김수미. 국문학도를 꿈꿨지만 대학 진학을 못한 아쉬움을 독서와 글쓰기로 달래며 살았다. 에세이와 소설, 레시피북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그동안 내놓은 책만 10여 권. 그리고 최근 마지막 에세이 ‘안녕히 계세요’를 집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지막’이라니.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칠십이 넘었는데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내가 워낙 준비성이 철저하거든. 준비할 수 있을 때 준비하자, 주변 분들에게 여유 있게 인사 남기고 가자는 마음으로 ‘안녕히 계세요’를 쓰기 시작했죠. 마지막 에세이라고 했지만, 책 내고 한 5년, 10년 더 살면 어때요. 그럼 더 좋은 거지. 걱정 마세요 여러분, 저 당장 안 죽어요!(웃음)” 이번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살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담아낼 계획이란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난 뒤의 삶은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조용필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이 가사가 참 좋아요. 내가 위대한 사람 같으면 괜찮은데, 나는 너무 하찮기 때문에 꼭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이만큼 고생했는데, 그 흔적조차 안 남기면 내 한이 풀릴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자꾸 뭐든 흔적을 남기려 해요. 앞으로는 그 흔적 중 하나가 ‘수미네 반찬’이 되지 않을까요?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 계약 조건을 ‘선생님(김수미)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렇게 해서 사인했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수미네 반찬’은 계속할 거예요.”
- 2019-01-1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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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에게 세배하는, 복수초!
- 기해년(己亥年)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행(五行)에서 ‘기(己)’ 자는 흙의 기운을 표현하며 색으로는 노란색이기에, 기해년은 곧 60년 만에 돌아온 ‘황금돼지해’라고 합니다. 각별하고 신명 나는 일만 벌어질 것 같은 황금돼지해를 맞아, 노란색 야생화가 황금색 술잔을 높이 들고 원숙미(圓熟美)를 더해가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애독자들에게 경배하며 새해 인사를 건넵니다. “만복을 받으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지만 엄동설한의 추위는 여전한데 무슨 꽃 타령이냐고 타박하실 애독자들께는 선조들의 옛 말씀을 전합니다. “동짓날 밤 자시부터 새봄, 새해가 시작된다.” 즉 매년 12월 22일이나 23일, 가장 짧았던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冬至) 밤 자시(밤 11시~새벽 1시)에 이미 새봄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봄의 전령사’ 한두 송이쯤은 새해와 함께 핌 직하다고 말입니다. 북풍한설 중에 잉태되어 겨울의 한복판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는 야생화가 알고 보면 하나둘이 아닙니다. 동백꽃이 그중 하나이고, 매화가 또 다른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가 하면 수선화·갯국도 뒤질세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복수초도 노란색 꽃술을 반짝이며 귀티 가득한 금잔을 하얀 눈밭 위에 살짝 올려놓습니다. 복(福)과 장수[壽]를 기원하는 복수초란 이름 외에 원단화(元旦花)나 원일초(元日草)라고도 불리는데, 원단·원일이란 곧 새해 첫날을 의미하니 새해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인식되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강원도 동해시 냉천공원 산비탈에는 제주도보다도 이른 1월 초부터 복수초가 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석회암 동굴지대의 따뜻한 지형이 그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주와 냉천공원을 빼고 가장 먼저 꽃소식을 전하는 곳은 완도수목원. 1월 중순이면 복수초가 황금색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1보가 전해집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500여 km 떨어진 경기도 연천 지장산에서는 일러야 2월 말에나 복수초가 피니, 결국 봄은 하루 15~20km의 속도로 아장아장 북상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른 곳에선 1월 초 피기 시작하는 복수초가 경기·강원의 깊은 산에선 5월 초까지도 피니, 개화 기간이 5개월 가까이 됩니다. 참으로 긴 기간 피고 지는 봄 야생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습니다. 얼음과 눈 속에서 핀다는 뜻의 얼음새꽃이나 눈색이꽃이란 예쁜 우리말로도 불리는 복수초는 마치 형광 물질을 뿜어내는 듯 강렬합니다.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 해서 설련(雪蓮)이라고도 부릅니다. 실제 활짝 핀 복수초 꽃 속의 온도는 바로 옆 50cm 떨어진 곳보다 7℃ 이상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Where is it? 학명 중 종명 아무렌시스(amurensis)는 헤이룽강(黑龍江)이라 부르는 러시아 아무르 강변에서 처음 채집되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시베리아와 중국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남단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폭넓게 자생한다. 다만 꽃과 잎, 가지 등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서너 종으로 나뉘는데, 제주도에 자생하는 꽃은 잎이 가늘게 갈라진다고 해서 세(細)복수초로 불린다. 남부와 서해 도서지역의 복수초는 가지복수초라 부르는데, 경기·강원 등지에서 만나는 복수초에 비해 꽃의 크기가 갑절 이상 크고 화려하다. 꽃이 필 때 잎도 무성하게 자란다. 꽃 크기가 아주 작은 애기복수초도 있다. 중·북부지역의 높고 깊은 산에서 난다. 복수초, 애기복수초는 잎이 나기 전 꽃이 먼저 핀다.
- 2018-12-2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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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영혼, 서울 한복판에 별을 짓다 노래하는 예술가 최은진
- 바깥에서 유리문 가까이 고개를 낮춰 눈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깜짝 놀라 몸이 뒤로 밀렸다. 점심시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손맛 좋기로 소문난 동네 맛집으로 고민 없이 향했다. 가을볕 맞으며 맛난 된장찌개 삭삭 긁어 나눠 먹고는 그녀의 별로 들어가 향 깊은 커피를 마주하고 앉았다. 음악소리가 나뭇결을 타고 전해지는 문화살롱 ‘아리랑’ 안. 그곳에서 노래하는 예술가 최은진(崔銀眞·58)의 지나온 인생과 살아갈 날의 이야기 실타래를 조금이나마 풀어봤다. “문화쟁이들은 나 모르면 간첩이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옆에 예술인 최은진의 문화공간 ‘아리랑’이 있다. 사람들이 익히 알 만한 설명이라면 말 많고 탈 많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의 주요 무대가 바로 아리랑이다. 낮에는 손님 받을 생각 없는 듯 늘어지고 한산한 모습이다. 밤이 되면 그녀의 별 ‘아리랑’에서는 따뜻한 불빛 아래 술잔이 오간다. 기분이 좀 오른다 싶으면 최은진의 노랫가락에 흠뻑 젖을 수도 있다. 화가, 글 쓰는 작가, 건축가, 교수 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이들은 성지마냥 이곳을 찾는다. “예술가들 많이 오죠. ‘평범’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인들이 많이 와요.” 최은진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한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만요 가수로만 소개한 것이 아까울 정도로 재능이 많다. 타고난 음색은 노래 분위기에 따라 아이 목소리도 됐다가 농염한 재즈가수도 된다. 옛 가요에 세련미와 특별함을 더해 사랑받고 있다. 인천 출신인 최은진은 초등학교때 인생 최초로 듣게 된 ‘흑자청춘(1966년·정원 노래)’ 한 곡으로 노래에 빠져들었다. 동춘 서커스단 공연 모습을 보고는 교내 체조부에 입단해 활동했다. 20대에는 영혼에 대한 갈증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도 꿈꿨다. 지금은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 정신세계에 관한 공부와 수행, 묵상하는 삶을 산다. 젊은 시절연극배우로서도 두각을 보여 각종 무대에 올랐다. 그 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1999년 현대방송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타면서 매스컴 앞에 섰다. 그때 최은진 나이 마흔. 예인의 길을 걷고자 신중하게 진로를 고민하면서 우리의 음악 아리랑과 인연을 맺었다. 아리랑에 정착하다 “젊지도 않은 나이에 방송사에서 시키는 거 하는 게 싫었어요. 대신 재즈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뉴욕으로 유학을 가려고 마음을 굳혔어요. 그때 우리 아들이 어리니 한 5년만 다녀올까 생각했는데 제 앞에 아리랑이 다가왔어요. 오케스트라 협주로 된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잔뜩 쏟아냈습니다. 이게 내 운명인가보다. 아리랑도 결국 재즈잖아요. 우리만의 소울이 깃든 재즈요. 2003년에 나운규 탄생 100주년 음반 ‘다시 찾은 아리랑’을 낸 것이 새로운 삶의 시초가 됐습니다.” 진정한 음악을 찾아 뉴욕에 가고자 했다. 알고 보니 영혼이 깃든 음악의 본질은 최은진 자신이 서 있는 토양에도 있었다. “이생에서 정체성을 찾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아리랑을 하러 세상에 왔구나. 아리랑 음반을 내고 나서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마이크랑 스피커도 가져다 놓고요. 여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더니… 희한해요. 사람 구경 못하던 거리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저기 가면 옛날 목소리 나는 여자가 있다면서요.” 아리랑에 무슨 애환이 있기에 최은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는 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국제교류 아리랑 축제에 초청돼 갔어요. 그때가 추석쯤이었는데 아리랑 요양원이라는 곳에서 위문공연을 했어요.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목화밭에서 그렇게나 많이 고생하셨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나도 모르게 입구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공연을 못할 뻔했어요. 너무 울어가지고요. 일주일 전쯤 소록도에 갔을 때도 화장장 근처에서 비슷한 경험을 또 했죠. 교감이 되는 거죠. 그 당시 힘들었던 사람들의 삶이 저에게 그대로 오는 거예요. 나도 조금은 특별한 별인 셈이죠.” 다가오는 영혼들의 울림이 있기에 곡마다 정성과 마음을 담아낸다. 2010년에는 지극정성의 보답처럼 2집 음반 ‘풍각쟁이 은진’이 1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인기를 얻었다. “‘오빠는 풍각쟁이(1938)’를 리메이크한 앨범을 냈어요. 처음에 음반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줄 서서 구입했다더군요. 서점에 가서 모르는 척하고 물어봤죠.(웃음) 인터넷도 안 하고 매일 이곳에 있으니 알 수 있겠어요? 마니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대요. 이 여자가 누구냐고요.”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강산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부른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도 그녀의 왕팬을 자처했다. 그렇게 최은진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소문을 타고 흘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에게도 알려졌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기타리스트 하치가 세션과 프로듀싱을 담당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음악 작업에 힘을 보탰다. 진정한 레트로 음반 ‘헌법재판소’ 최근 최은진은 엄청난 시도를 감행했다. 아리랑 소리꾼 혹은 조금 현대적인 느낌으로 편곡된 옛 곡을 부르던 것과 차원이 다른 음악 장르에 도전한 것. 바로 옛 가요를 1980~90년 대 인기를 끌었던 일렉트로닉 스타일로 재해석한 세 번째 앨범 ‘헌법재판소’다. 아들 또래인 젊은 음악가와 작업을 하고 음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그녀의 이전 음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이 불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 그 자체다. 시니어가 노래방에 가서 18번으로 잘 부르는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1960)’과 백년설의 ‘아주까리 수첩(1942)’은 젊은 세대의 숨을 불어넣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으로 거듭났다. 원곡을 즐겨듣던 시니어에게는 신선함을, 곡을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음악으로 느껴질 만하다. 지난 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로 다뤘던, 진화하는 레트로 열풍의 기류에 최은진의 새 앨범도 합류했다. “정말 현대적으로 만든 거예요. 나이어린 음악인들과 같이 작업하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거죠. 젊은 세대도 저하고 음악을 만들면서 배우는 게 있었을 겁니다. 옛날 정서를 무시하고 과정 없는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해줘요. 그리고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요즘은 ‘아리랑’ 문을 여는 일 외에는 새 앨범 홍보 쇼케이스 무대에 선다. 12월 1일에는 홍대 더스텀프에서 새 앨범을 소개하고 알리는 쇼케이스를 열어 성황을 이뤘다. “처음에는 ‘아우! 전자악기 반주에 맞춰 어떻게 노래하지?’ 그랬는데 들을수록 좋아요. 이게 정서에 맞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제가 작사, 작곡한 음악도 수록했고요.” 군대 간 아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양구’는 최은진이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어 있는 노래인데 여성들은 무덤덤하게 듣는 반면 남성들은 곡을 듣자마자 “엄마 보고 싶다”를 연발한단다. 삶의 씻김, 문화살롱 ‘아리랑’ 3집 타이틀곡인 ‘헌법재판소’는 이노경이 쓴 곡에 최은진이 가사를 붙였다. ‘아리랑’에서 만나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모든 세대를 위로하고 싶어 만든 곡이다.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면 그렇게들 울어요.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낸단 말이죠. 대부분 다 울어. 그러면 나도 울고. 저마다의 인생에는 어마어마한 일이 많잖아요. 위로가 필요한 모두를 위해 썼어요. 해우소라는 말 있잖아요. 내가 볼 때 이 집은 울다가 웃다가 위로받는 집이야.(웃음)” 어떤 것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뭘 하든 이렇게 가는 거지 뭐”라고 답한다. 그냥 매일을 사는 것. 시상이 떠오르면 적고 악상이 떠오르면 함께 작업하는 음악인들과 얘기하면 된단다. “그 젊은 친구들 밴드 이름도 만들었어요. 대열차강도밴드래요.(웃음)” 무엇보다 공연에 힘을 좀 기울이고 싶다고 했다. 무대가 늘 그리운 천생 무대 체질 그녀다. 세상을 위한 조언이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머리 말고 가슴을 써야 해요. 그래야 바로 연결될 수 있죠. 소통 말입니다. 그러려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요. 후배들에게 고독한 시간이 중요하다고 조언해요. 오늘 인터뷰 때문에 산책을 못했는데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걸까. 헌법재판소 옆. 땅거미가 지면 작은 별 하나가 떠오른다. 위로받고 싶은 이들이 호주머니에 손 넣고 한 명, 두 명 들어와 착석. 위로가 필요한 당신들을 위해 오늘밤도 아리랑의 문은 열린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브라보!”
- 2018-12-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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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난다, 첫눈이 오는 날에는
- 내 마음속에는 첫눈 오는 날의 이야기가 두 개 간직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하려니 가슴이 미어진다. 1995년 11월 25일, 나는 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영정을 들고 나가던 날, 어쩌면 그리도 큰 눈송이가 우리와 함께 걸어주던지…. 싸늘하고 매섭던 며칠 동안의 날씨와는 전혀 다르게 포근한 아침이었다. 눈송이는 나풀나풀 하늘을 날다가 조용히 땅으로 떨어졌다. 내 눈에는 마치 천사가 아들을 마중 나오는 것처럼 환하고 아름다웠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어이없고 아프기만 했던 며칠간의 원통함 속에서 숨도 쉬기 힘들었던 내게 잠깐이나마 평화를 가져다준 그날의 눈송이는 마치 아들이 날 위로하려 주는 마지막 선물 같았다. 천사의 옷자락처럼 숭고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아팠다! 첫눈보다는 내 아들을 데려가지 말았어야지요! 하는 앙칼진 마음속 외마디를 숨길 수는 없었다. 두 번째는 첫눈이 오면 무조건 2시간 후에 만나자던 친구 이야기다. 그 약속을 지금까지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아쉬움…. 봄이 되면 다시 약속 장소까지 정하면서 “이번에는 첫눈 오는 날 꼭이다~” 하며 손가락까지 걸며 까르르 웃어대던 우리. 그러나 한 번도 이루지 못한 허무한 약속으로 남고 말았다. “그게 첫눈이었니?”로 시작해서 “집 안에 있어서 눈 오는 줄 몰랐다”는 둥 “미안하다”는 둥 그렇게 약속을 못 지킬 때마다 “들고 다니는 전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하면, “넌 정말 기발한 생각을 잘도 해” 하며 빙긋이 웃던 그녀. 결핵을 앓다가 먼저 간 친구가 아주 많이 생각난다. 이제 손전화기 들고 다니는 세상이 왔는데, 첫눈이 와도 만나자고 전화할 편한 친구가 이제는 없다. 다들 가족이 있어서 힘들고, 당장 뛰어나와 같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는 너무 멀리 가 있고…. 이제 가슴 뛰는 일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첫눈 오는 날을 바라보게 된 걸까? 올해 첫눈 오는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해봐야겠다. 그 시간을 상상하니 마음이 살살 들떠온다. 슬프고 아픈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는 날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이 소망에 연분홍꽃이 환하게 피어나길 꿈꿔본다.
- 2018-12-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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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하는 소녀에 담긴 사연
-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S예요. 선생님 저 곧 결혼할 거예요. 고마웠어요, 선생님" "S야 정말 오랜만이구나. 참으로 축하한다. 이제는 힘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S를 만난 것은 그녀가 평택여고 2학년인 1998년도 봄학기였다. 어느날 컴퓨터실에 갔던 나는 작은 소동을 목격했다. 보육원에서 살고 있던 S가 같은 보육원의 다른 친구와 둘이서 소풍비 청구서를 그곳에서 인쇄하다가 그만 그들의 담임 선생님께 들켜버린 것이었다. 혼나고 있는 아이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가슴 아팠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온순한 성격의 학생들이 얼마나 용돈이 쓰고 싶으면 가짜 청구서까지 만들었을까. 그달부터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두 학생에게 한 달에 각각 만 원씩 용돈을 줬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하고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했다. 이일은 그들이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여름 어느 날 2층에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던 나를 본 S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뒤로 감췄다. 때마침 S는 아래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다달이 자신에게 용돈을 주던 내 눈치가 보여 맛있게 먹던 아이스크림을 숨기는 행동에 다시 마음이 내려앉았다. "S야 괜찮아 그 돈은 뭐든지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쓰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쓰라고 준 것이거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내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며 긴장한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S는 졸업 무렵, 나에게 주석으로 된 연주하는 소녀 인테리어 소품을 선물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줬는데 나한테 쓰다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허나 내 선물을 산 것도 그녀가 쓰고 싶은 곳에 돈을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녀가 전화로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린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학교를 나가서도 나를 잊지 않고 소식을 알려준 S가 고마웠다. 먼 지방에서 결혼하는 그녀의 결혼식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행복을 마음껏 빌어주었다. 외롭게 자랐던 그녀가 사랑하는 이와 서로 믿고 존경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했다.
- 2018-12-0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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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고는 트렌드에 사무친 시니어의 문화 콘텐츠
- ‘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
- 2018-11-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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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미국인 친구
- 스포츠 장갑을 제조 수출하던 회사에 근무할 때 바이어로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노크했을 때 반겨주고 첫 주문까지 해줬던 고마운 친구이다. 내가 직장을 퇴사하고 개인 사업을 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근년에는 아예 일 년의 절반은 생산지 근처인 상해에 머물면서 한국에도 봄·가을로 한번 씩 온다. 하던 사업을 접은 지 꽤 오래됐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접대해야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꾸준히 연락했다. 몇 해는 그런대로 만났으나 그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하고…, 솔직히 경비가 부담됐다.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해야 했고 2차 장소로 옮기다 보면 만만치 않게 돈을 써야했다. 초기에는 친구 혼자 들어 왔지만 점점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늘었다. 작년에는 그의 중국인 여자친구, 대만 공급업자와 그의 가족까지 대 부대를 이끌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 결국 이메일로 솔직한 내 입장을 밝혔다. 만나는 것은 좋으나 너무 많은 비용 지출이 있으니 이제는 본인이 부담하라고 했다. 그는 회사 경비를 여행비로 쓸 수 있는 입장이고 회사에서 나오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 나는 힘들다고 솔직 고백을 했다. 답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 폴 포트 공연을 꼭 보고 싶고 바빠서 못 만나겠다고 다음을 기약하고 피했다. 그대로 그와의 인연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와 만날 때 경비와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동대문에 있는 몇몇 스포츠 용품회사에 해외 영업 관련 부분을 자문하고 있는데 내 상황에 대해 털어놓으니 앞으로는 걱정 말라며 그 중 한 업체 대표가 법인카드를 손에 쥐어줬다. 사업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30년이나 된 친구가 연락을 하는데 어떻게 연락을 안 받을 수 있느냐고 했다. 이번에도 그 친구가 한국 방문을 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동대문 업자가 준 카드를 가지고 그가 30년간 늘 묵던 남산에 있는 한 호텔로 시간 맞춰 갔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프론트 데스크에 물어보니 그런 손님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다시 보니 같은 체인의 강남 쪽에 있는 숙소였다. 친구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일단 그 친구가 묵은 호텔 프론트에 메시지를 남기도 택시를 잡아탔다. 금요일 저녁이라 길이 막혀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중간에 내려 전철을 몇 차례 갈아타고서야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객실에 없었다. 인근 음식점들을 몇 군데 들어가 둘러보다가 못 찾고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려던 순간, 프론트에서 연락이 왔다. 그와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한국인 업자 부부까지 일행이 6명이었다. 비싼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 숯불구이로 메뉴 수준을 낮췄고 한국인 업자 부부가 밥값을 지불했다. 2차도 비싼 호텔 바 대신 근처 치킨 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그간의 오해는 풀고 부담 없이 계속 만나자고 했다. “30년이나 만난 사이인데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보겠느냐”며 “이미 주변에서 고인도 많이 생기고 남은 우리라도 이렇게 만나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자”고 했다. 동대문 업자가 쥐어 준 카드는 쓰지도 못했으나 돌아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 2018-10-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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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 진 빚 희망으로 갚다, 산악인 엄홍길
- 인간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중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엄홍길(嚴弘吉·59) 대장은 ‘신들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 정복이 그의 꿈이었다고 말한다. 꿈을 위해 목숨까지 건 남자,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해발 8000m 이상의 봉우리 중 독립된 산줄기를 이루는 봉우리는 총 14개.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에 위치한 이 14개 봉우리를 통틀어 ‘8000m 14좌’ 또는 ‘히말라야 14좌’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뒷동산 올라가듯 히말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히말라야도 그저 그런, 높고 추운 산에 불과했겠지만, 순순히 정상을 내어주지 않는 히말라야는 실패를 마약으로 삼는 자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엄홍길 대장은 14좌를 오르는 대가로 동상에 걸린 엄지발가락 한 마디를 잘라냈다. 또 등반 중 사고로 부러진 발목은 뼈가 그대로 굳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는다. 죽음의 경계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그는 등반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말렸어요. 근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제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기분이었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처럼 저도 산이 그곳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매년 히말라야를 정복하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산악인이 산 4000~5000m 부근에 설치된 등산기지, 베이스캠프에 모여든다. “베이스캠프에선 닭볶음탕, 김치찌개, 냉면 등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해먹을 수 있어요. 주방장도 있는걸요. 다만 산속이다 보니 수산물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짐을 꾸릴 때 간고등어, 홍어, 조기 같은 생선을 챙겨가죠. 양이 한정적이다 보니 생선 먹는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에요. 아껴먹어야 하죠.(웃음)” 비 오는 날엔 막걸리에 전, 스키장 정상에선 따끈한 라면 국물, 운동 후엔 시원한 맥주가 당긴다면 영하 20~30℃를 웃도는 베이스캠프에서는 어떤 음식이 가장 꿀맛일까. ‘그’ 음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엄홍길 대장의 얼굴이 미소로 번졌다. “홍어찜! 홍어 냄새가 코를 찌르잖아요. 근데 그 산속에서 먹는 홍어찜은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어요.(웃음) 홍어찜 한 젓가락 입에 딱 넣으면 햐…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도는데 아주 황홀한 맛이죠.” 먹는 이야기까지 들어보면 히말라야도 참 살 만한 동네(?)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리얼’ 히말라야 등반은 베이스캠프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엄 대장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눈사태,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크레바스,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낙빙 등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상을 오르는 내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장 두려웠다. “눈사태에 휩쓸려서 눈에 파묻히면 운 좋으면 사는 거고 나쁘면 죽는 거예요. 얕으면 파내면 되지만 큰 얼음덩어리에 갇히면 파낼 수도 없거든요. 히든 크레바스는 눈이 살짝 덮여 있어서 잘 안 보여요. 거기에 발을 잘못 디디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틈 사이로 추락할 수도 있어요. 이 중 어느 하나도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아요. 마치 죽음과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산 높이 8092m의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에서 10번째로 높은 산이다. 산 이름은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이지만 온화한 느낌과는 다르게 예측 불허의 기상과 난코스로 악명이 높다. 엄 대장도 이곳에서 네 번의 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도는 기상악화로 실패. 이듬해 봄, 그는 다시 장비를 꾸렸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고개를 들었는데 앞에 있어야 할 셰르파가 사라진 거예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히든 크레바스를 보지 못하고 빠진 거죠. 깊지는 않았는데 V자 모양이라 떨어질 때 턱을 찧었나봐요. 숨을 희미하게 내쉬고 있었는데 구조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어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동료의 죽음은 언제 겪어도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일 년을 다시 기다려 네 번째 등반길에 올랐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산에도 와 닿은 걸까, 7600m까지는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다. 정상까지 400여 m를 남겨둔 상황, 마치 손만 뻗으면 정상에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그때 앞서가던 대원이 실수로 경사면에서 미끄러져버렸다. “그 친구한테 묶여 있던 로프가 제 옆으로 후루루루룩 지나가는 거예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로프를 낚아챘죠. 가속도가 붙으니깐 두꺼운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타들어 가. 놓자니 놓을 수 없고 잡자니 잡히지 않고. 근데 어느 순간 몸이 붕 뜨는 거예요. 로프 끝자락이 제 오른발 발목을 낚아챈 거죠. 정신을 차려보니깐 눈에 제가 처박혀 있더라고요. 발목이 180도 돌아가서 뒤꿈치가 앞에 있는 상태로.” 목숨은 건졌지만 달랑거리는 발목을 끌고 4500m까지 내려가야 구조용 헬기를 탈 수 있었다. 빙벽에서는 줄과 한 발에만 의지한 채, 그리고 평지에서는 기어기어 내려가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발목을 현지에서는 수술할 수 없어 급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발목에 쇠 핀 두 개를 박아야 하는 대수술이었다. “의사가 앞으로 등반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죠. 5개월 동안 재활 치료를 하고 삼각산 백운봉에 올라갔어요. 그때 든 생각이 ‘이젠 포기해야겠다’가 아니라 ‘조금만 열심히 치료하면 곧 산을 탈 수 있겠다’였어요. 그리고 10개월 만에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아갔죠. 다들 저보고 정신 나갔다고 했어요.(웃음)” 멀쩡한 몸으로도 네 번이나 실패한 안나푸르나를 쇠 핀을 박은 채로 올랐다. 발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뼛속을 타고 전해졌지만 죽은 동료의 목표까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8092m,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도착했다. “엉엉 울었어요. 행복해서가 아니라 너무 서러워서. 하늘로 가버린 동료 생각, 지난날들의 여정. 막 소리 질렀어요. ‘결국 이렇게 받아주실 거면서 왜 그런 고통을 주시고 동료까지 데려가시고,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면서요.” 엄 대장과 안나푸르나의 지독했던 인연은 이렇게 끝나는 듯했지만 또 다른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뒤따라오던 여성 대원 지현옥 씨와 셰르파 한 명이 하산 도중 실종된 것이다. 밤새도록 무전을 기다려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안나푸르나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렇게 그 둘은 안나푸르나 꼭대기에서 영영 내려오지 못했다. 엄 대장은 14좌를 모두 오르고 위성봉인 얄룽캉(8505m)에 이어 로체샤르(8400m)까지 올라 2007년 16좌 완등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열여덟 번의 실패가 있었고 열 명의 동료를 잃었다. 제2의 16좌를 향하여 “저는 살아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이미 얼음산 속 어딘가에 냉동인간으로 잠들어 있어야 정상이죠. 산꼭대기만 보고 살았던 제가 어느 순간 산 아래가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아이가 보이더라고요. ‘아, 산이 나를 살려 보낸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 산이 나에게 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라는 뜻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8년 그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하고 히말라야 아이들을 위해 학교 짓는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엄홍길휴먼재단에서 현재까지 완공한 학교는 총 14개, 2018년 11월엔 15번째 학교가 완공될 예정이다. “제가 16좌에 올랐기 때문에 16개 학교를 짓는 게 목표예요. 16번째 학교는 하나의 학교가 아닌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체육관이 있는 종합 교육 타운으로 만들고 싶어요. 여력이 된다면 대학교까지.(웃음) 제 인생을 8000m 산이라고 하면 지금 7000m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이제 가장 힘든 구간이 남아 있는 거죠. 16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비로소 하산할 수 있지 않을까요.”
- 2018-09-20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