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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정말 모처럼의 단비다. 제발 대지를 흠뻑 적셔주면 좋겠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농심이 얼마나 고대한 비인가. 그러나 좀 내리나 하던 빗줄기는 야박하게도 금세 그쳐버린다. 또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비추며 심술궂게 혀를 내밀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뭐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피하기보단 오히려 태양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이며 목련이며 봄꽃 소식에서부터 부고장이며 청첩장까지 줄줄이 달리는 SNS 댓글들 속에서 말이다. 지난 6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부산은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해운대로 찾아든 사람들로 벅적일 것이다. 필자도 이참에 올여름 휴가지로 부산여행이나 추천해볼까? 부산이 처음이라면 동백섬 한 바퀴 돌고 해운대 백사장 거닐다 달맞이고개에서 야경에 취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도 있고, 줄서서 먹는다는 대연동 쌍둥이 돼지국밥에서 민락동 회센터로 이어지는 식도락 코스도 좋고,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는 지름신 쇼핑 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면 좋겠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대학 졸업 때까지 약 18년간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청춘의 황금기를 오롯이 보낸 곳이 바로 부산이다. 몇 년 전엔 졸업 후 약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가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고선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한참을 쳐다보며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간절함이 통했는지 이젠 칠순이 훌쩍 지난 그 옛날의 문방구 아저씨와도 짧게나마 재회의 기쁨도 누렸다. 추억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오륙도의 윤슬! 남구 용호동 끝자락을 밟으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오륙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 같은 날 햇빛에 아롱질 그 눈부신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좌측으론 광안대교를 굽어보며 우측으론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해안절경을 따라 이어진 길도 너무 매력적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몇 년 전에 개장된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그 넘실대는 파도에 부서지는 바위섬은 아찔한 스릴과 폐부를 찌르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때다 하고 ‘부산 아지매’들이 권하는 회 한 접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흥정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지 싶다. 철썩이는 밤바다에 풍경소리, 해동 용궁사! 해운대를 돌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 있는데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용궁사다. 바닷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용궁사라는 이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절이다. 낮 시간대의 비경도 일품이지만 필자는 밤 시간대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철썩철썩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경소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그 밤바다의 ‘콜라보레이션‘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Kiss in the dark’은 바로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애독자들이시여, 부디 ’낮 뜨거운‘ 시간을 피해 어둠을 틈 타 살짝궁 다녀가시길 권한다. 참고로 인근의 송정해수욕장 바다 산책로도 추천한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서울에 둘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 와우~ 여긴 또 어디일까? 부산 앞바다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동으로 이어진 해안절경 길인 송도 갈맷길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케이블카까지 재가동 했다고 하니 올 여름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빨리들 다녀가시라. 어떤 투어이든 일단 여행길엔 입이 심심해선 안 된다. 돼지국밥이나 곰장어 구이, 밀면, 물회도 있으니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부평시장 야시장(일명 깡통시장) 구경하며 거인통닭 시식도 권할 만하다. 인근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단팥죽 한 그릇 하는 것도 이열치열엔 그만이겠다. 아~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 2017-06-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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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여행기(4) 에스토니아
- 드디어 발트 3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에 도착했다. 역시 국경을 넘는지도 모를 정도로 버스가 달리다보니 에스토니아였다. 에스토니아는 발트 3국 중 인구도 가장 적지만, 이웃 나라 핀란드 덕분에 발트 3국 중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했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 벨라루스와 접경인 것을 감안하면 이웃나라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아침 기온이 6월 중순인데도 8도에, 비 오고 바람까지 불어 꽤 춥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벼운 패딩 옷을 준비하라고 했는데도 서울의 날씨만 생각하고 반팔 옷만 준비한 사람들은 곤욕을 치렀다. 온도도 초봄날씨지만, 체감온도가 더 춥게 느껴졌다. 첫 방문지는 여름 수도라는 타르투였다. 볼거리라고는 타르투 대학 캠퍼스를 돌아보는 일이었는데 일행 중 절반은 이미 커피숍에 앉아 담소를 즐기고 나머지 절반만 캠퍼스 구경을 했다. IQ가 높은 사람들은 공부하러 캠퍼스 구경에 나섰고, EQ가 높은 사람들은 커피숍의 담소가 더 좋았다고 하여 웃었다. 정복자 스웨덴이었지만, 스웨덴 사람이 세운 대학이라고 했다. 천사의 다리, 악마의 다리가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 역사와 문화의 도시라 하여 대성당, 시청사 광장 등 볼거리를 둘러 봤다. 다음 행선지는 국경도시 나르바였다. 러시아 민족이 주민의 87%라고 했다. 두고두고 골치가 될 소지가 있어 보였다. 온천도시라서 온천욕을 즐겼다. 남녀 혼탕이지만, 수영복을 입어야했다. 다음 행선지는 라헤마 국립공원이었다. 서울의 2배 정도인 습지라는데 과연 땅이 물기를 지니고 있어서 밟으면 물이 올라오는 땅이었다. 30분 정도 산책길을 걸어 들어갔다가 나오는 코스였다. 다음 코스는 합살루라는 도시였다. 옛 러시아 황족들이 타던 열차와 철도, 옛 정거장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금 이동하니 벽돌로 쌓은 고성이 있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135계단을 올라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 전경을 구경했다. 호수 가에는 차이코프스키가 즐겨 찾았다는 벤치가 노래비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었다. 도시 절반은 카페이고 나머지 절반은 기념품 상점일 정도로 관광도시였다. 중세의 신비한 분위기와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현대식 빌딩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웃 핀란드 사람들, 중국 관광객들이 와서 붐비는 도시였다. 구 도시가 하이라이트이다. 유럽의 축소판이라고 보면 된다. 거리마다 악사가 길거리 연주를 하고 오픈 카페가 손님을 끌었다. 매력 있는 골목들과 고만고만한 상점들의 상품도 쇼핑객을 끈다. 러시아 상품들이 꽤 있다는 점이 다른 발트 3국과 다르다. 발트 3국은 도로가 옛 마찻길로 돌을 심어 놓아 매우 불규칙하다. 그래서 멋을 내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심은 여성들은 발목을 삐는 사고가 속출했다. 멋도 좋지만, 발 편한 운동화가 제격이다. 올 때 갈 때 비행기에서 잤으므로 발트 3국 여행에 6박 8일을 보낸 셈이다. 여행 경비는 250만원이 들었다. 탈린에서 이스탄불까지 3시간 반 이동하고 다시 이스탄불에서 12시간 비행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장거리 비행이라 노인들은 힘이 드는 편이다. 더 늙기 전에 가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 2017-06-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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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죽겠다!”
- 발트 관광을 할 때, 전세 버스 계단을 올라서면서 모두들 하는 말이다. 현지인 기사가 “아이고, 죽겠다!”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직역을 하자니 말이 안 되고 노인들이 몸이 힘들거나 피곤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평소 많이 걷지 않던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구경을 하고 쇼핑을 하느라 걸어 다니다가 버스에 오르면 긴장이 풀리고 피로감에 저절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노인들의 단체관광은 특징이 있다. 바로 ‘로코모티브 신드롬Locomotive Syndrome, 운동기능저하증후군’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몸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거동장애다. 다리 근육이 약해지면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로해진다. 균형 감각도 떨어져 지팡이나 난간을 붙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요실금 증세가 있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창가 쪽은 나올 때 불편하니 복도 쪽 좌석을 달라고 요청한다. 버스로 이동할 때도 장시간 운전을 하면 안 되고 화장실이 있는 곳마다 내려달라고 한다. 유럽도 여자화장실이 남자화장실과 같은 비율로 있어 여자화장실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래서 남자들이 용무를 끝나면 체면불고하고 남자화장실을 같이 이용하게 한다. 유럽의 보도블록은 옛날 마차가 다니던 길 그대로인 곳들이 많다. 작은 돌들로 불규칙하게 울퉁불퉁 만든 길에서 모처럼 멋을 낸다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다가 발목을 삐는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네일아트라 하여 인공손톱을 붙이는 여성이 많다. 가만히 두면 별일 없지만, 머리를 감을 때는 손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럴 때 인공손톱이 떨어져나가는 사고가 생긴다. 여성들은 대체로 가방이 크다. 수시로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는다. 그래서 혼자 짐 보따리를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퀴가 있으니 혼자서 어찌어찌 해보려다가 손목 근육을 다치기도 한다. 남편이 동행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같이 간 남자들이 도와줘야 한다. 식당에서 뷔페식 아침을 먹을 때 계란과 오렌지를 가져가긴 했는데 껍질이 안보여, 한국인들은 계란과 오렌지를 껍질째 먹느냐는 핀잔을 받은 적도 있단다. 쉴 새 없이 먹으니 화장실에도 자주 가야 하고 살도 찐다. 금방 산 목걸이를 걸고 나오다가 분실하기도 하고 모자, 선글라스,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가방이 여러 개인 경우는 깜빡 잊고 숙소에 두고 나오기 쉬워 위험하다. 유럽의 여름은 백야의 계절이라 자정까지도 어둑하지 않다. 그래서 밤늦도록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때가 많은데 노인들은 저녁식사를 마치면 그대로 숙소로 들어가버린다. 그렇다고 시차가 있으니 바로 잠 드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나이 들면 가까운 곳으로 가라고 하는 모양이다.
- 2017-06-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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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친구, 재미있게 사귀기
- 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미있는 제2 인생설계를 위하여 많은 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한두 달 동안의 단기 교육동기들은 학창시절 동창과 전혀 다르게 20년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새 친구 사귀기도 전에 교육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육 중 수업이 끝나면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지속가능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 몇 년 전, KDB 시니어브리지센터 제8기 사회공헌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면서 교육동기 친목모임 ‘두레월회’를 결성하였다. 매달 둘째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친목을 도모한다. 봄과 가을에는 둘레길 도보여행ㆍ문화유적 탐방 등 야외활동을 주로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영화감상ㆍ소양강좌ㆍ독서토론 등 실내모임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보여행을 많이 하였다. 첫 행사는 젊은 시절 즐겨 걸었던 단풍이 곱게 물든 남산에서 시작하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즐거웠던 그때가 그리워졌다. 둘레길을 돌아 장충동 족발골목에서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막걸리잔 높이 들고 메아리를 남산으로 날렸다. 고양시 한북누리길, 사당역에서 양재역에 이르는 우면산 둘레길 새해맞이 도보여행을 하였고, 원당역에서 왕복 행주누리길 산책을 하였다. 회원 간의 교양강좌도 보람이 있었다. 사진전문가 조영대 회원의 강의와 SNS 전문가 오경순 회원의 지도로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기법 강좌를 진행하였다. 동영상의 기능부터 촬영, 저장, 편집과 보내기까지 전반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전문지식과 체험을 갖춘 강사의 열강으로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서 회원끼리 공유하는 실습까지 완료하였다. 문화해설이 곁들인 창덕궁, 덕수궁 고궁산책은 소양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구경이 아닌 살아있는 보물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을 하였다. 저명한 산악인의 실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숭고한 도전을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려졌던 히말라야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해는 양평 물소리길, 삼남길 걷기로 친목을 도모하고 체력을 증진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둘째 월요일에 전철을 타고 양수역에 갔다. 나지막한 부용산은 걷기 좋은 호젓한 산길이다. 한강변 신원역으로 내려가면 서울로 가는 길이다. 복잡한 전철은 오후 4시가 넘으면 썰물 빠지듯 매우 여유가 있다. 친구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활성화 된다. 수십 년 학교동창 모임도 주제가 있어야 한다. 막걸리 사발 돌리는 음식점 회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사회에서 늦게 만난 친구일수록 재미있게 사귀는 방법을 더 생각하여야 한다.
- 2017-06-1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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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우리 대교를 달리다
- 다리(橋)로 유명한 곳은 많다. 건축공법이나 조형미로, 또는 긴 길이로, 휘황한 조명으로, 전통미나 주변의 멋진 풍광으로, 전설 또는 유명한 사연이 있거나 하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일본 오키나와 북부의 고요한 섬에 바다색이 이쁘고 길고 긴 다리로 알려진 코우리 대교 (古宇利大橋)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내가 보았던 고우리 대교는 1960m의 기다란 길이가 여행자들을 달려보고 싶게 한다. 그런데 코우리지 섬과 본 섬을 잇는 중요 역할도 있었고, 오르막 내리막의 언덕이 있는 약 2Km의 다리여서 시원하고 멋진 풍경을 바라보기에 최상이라는 면도 많이 어필된 것이다. 게다가 근래에는 공효진과 조인성의 드라마에서 멋진 드라이브 씬으로 유명해져서 한국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리 아래 펼쳐진 양쪽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마치 남태평야 어딘가를 연상하게 한다. 필자가 갔을 때는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서 푸르른 하늘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는 청정한 색감의 여름바다였다. 이제는 다리(橋)가 예전의 강 건너 저 편으로 건너는 수단에서 보고 즐기는 감성의 역할도 포함된 지 오래다. 코우리 대교도 그런 이유로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교량의 미적 감각과 현대인들의 심리를 어루만지는 스피드나 풍광이 빠질 수 없는 중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 남부에 숙소를 두고 북부로 두 시간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남국의 어느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자동차로 달리면 2분 정도의 거리인 코우리 대교가 차창 밖으로 펼쳐지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 속 깊은 곳의 스트레스까지 날아가는 듯하다. 야자수 나무가 가로수길이기도 하고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과일들이 흔하게 보인다. 햇빛 느낌도 우리의 여름과는 다른 뜨거움이 있다. 다리를 건너 차에서 내려보니 해변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그 바닷가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어딜 가나 셀카놀이도 흔하게 본다. 젊은 청춘들의 발랄한 모습들이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덥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간간히 바닷바람이 분다. 아직은 조용한 바닷가, 연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 좋은 곳이다. 근처엔 파인애플이나 곡류, 비치웨어 등을 파는 가게도 있고 푸드트럭엔 먹음직한 시푸드들이 군침 돌게 한다. 약 1000엔 조금 넘는 새우요리가 유명하다고 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근처의 풀빌라나 전망 좋은 숙소에서 며칠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을 힐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거길 나오며 천천히 돌아보고 나오니 길고 긴 다리는 막 시작된 여름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쭉 뻗은 다리 위를 달리며 양쪽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해준다. 언제든 다시 한번 달려보고 싶은 고우리 대교다. 코우리 섬 古宇利島(고우리도)는? 일본 오키나와현 나키진 무라[今歸仁村]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3.12㎢다 일본 오키나와 섬의 북부, 모토부 반도[本部半島] 동안(東岸)에 있는 운텐항[運天港]에서 연락선으로 약 10분이 소요되는 시오야만 [塩屋灣] 입구에 위치한 섬이다. 오키나와 나하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 정도.
- 2017-06-1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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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만의 행복은 없다
- 그해 늦은 여름, 갑자기 달라진 주변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서둘러 떠나보내고 나면 후련할 것만 같았는데 영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실컷 들어간 풍선 같은 마음을 다잡고 차를 돌려 근사한 간판이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모처럼 혼자가 된 것을 자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발걸음을 그냥 집으로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날,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가방 속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짐이 한 가득이었다. 남편을 겨우 달래 미국으로 보내고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도망치듯 달려온 탓에 두 다리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남편 대신 운전을 한 탓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은 어쩌다 짧게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지만 이번 외출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열심히 살아온 우리 부부는 IMF라는 국가적 경제 위기 속에서 아주 위태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론가 떠나 휴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있는 것이라곤 밤마다 끙끙대며 해결책을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들뿐이었다. 이러다가는 큰일 날 듯싶었다. 남편에게 미국 여행을 권했다. 그렇게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선 멋지게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훤하게 보이는 창가 쪽 아주 푹신한 곳에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자유분방한 여인처럼 우아하게 앉아 가장 비싸고 맛있게 보이는 메뉴를 주문을 했다. 홀가분함이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닥쳐온 풍파 속에 마구 쏟아지던 폭풍우가 그 혈기를 다 풀어놓은 듯 아주 조용하고 쾌청한 마음이었다.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당당했다. 그 황홀함과 넘치는 행복이 사라질까봐 마구 주워 담고도 싶었다. 그 후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자유로움을 지켜내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 필자에게도 계절은 바람처럼 거침없이 불어왔다. 가뜩이나 무서움을 잘 타는 탓에 자다가 깨어나면 우두커니 걸려 있는 옷걸이가 사람처럼 보였다. 집안 쓰레기를 버리는 등 궂은일까지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더구나 남편이 마무리 짓지 못한 일까지 책임을 져야만 했다. 혼자가 되었다는 홀가분함은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면역체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혼자만의 행복과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도 외로워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며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끝내는 가족이 있는 울타리 속에서 남편과 함께 고난이든 기쁨이든 함께 나눌 때, 그만한 행복이 따로 없음을 진지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라도 남편과 떨어져 있으며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몸서리치게 체험해봤다. 그리고 가족, 남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의미 있는 존재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 2017-06-0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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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동네 오아시스, 자만벽화마을
- 전라북도 전주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옥마을이다. 옛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어지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른바 ‘핫’한 도시로 거듭난 지도 오래. 살 뽀얀 아가씨들의 화려한 한복 차림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전주만의 매력이다. 떠들썩, 사람 넘쳐나는 한옥마을을 지나 ‘도란도란 시나브로길’이란 표지판이 서 있는 구름다리 앞에 다다른다. 그 건너에는 따뜻한 햇살 아래 예술가들의 온기와 사람 사는 향기 그윽한 자만벽화마을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꿈같은 작업 현장 전주한옥마을 끝자락 도로 건너에 있는 자만마을은 최근 지역 명물로 자주 소개되고 있는 옛 달동네 벽화마을 중 하나다. 형형색색 예쁜 지붕과 벽화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 동네의 작은 골목 사이, 회색빛이던 벽에는 그리움 넘치고 정감 묻어나는 벽화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자만마을은 원래 한국전쟁 피란민이 들어와 정착한 달동네다. 4~5년 전, 전주의 한옥마을 일대가 관광지로 유명해진 반면 이 지역 문화 예술인이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에 자만마을이 젊은 작가들에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면서 벽화마을로 탈바꿈한 계기가 됐다. 동네 곳곳에 벽화가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고 음악이 흐르고 사람의 발길이 늘어나는 활기 넘치는 문화마을로 거듭났다. 옹기종기 만화 속 마을 같은 한옥마을을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면 자만마을 입구가 보인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연신 뛰어다녔을 것 같은 달동네에 올라서면 벽화들이 서서히 눈앞에 펼쳐진다. 벽 속에서 꽃들이 날고 분홍빛 버스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곳,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스타를 벽화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자만마을이다. 생각 내려놓기, 그냥 걷기 생각보다 북적이지 않았던 따뜻한 봄. 덥기는 했지만 간간이 바람이 불어 걷기 좋았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 따라가던 기억으로 골목길을 걷고 있으면 옆을 스치는 벽화들이 추억처럼 따라와 붙는다. 혼자라도 어색하지 않고 친구와 또는 가족과 걸어도 조용히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나을자만’이라고 불리는 자만마을 청년모임 소속 작가들이다. ‘나을’은 ‘낫다’ 또는 ‘나아지다’라는 의미로 보다 더 나아진 문화, 더 나아진 청년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공동체다. 초기에는 벽화를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개인 활동을 하다가 2015년 4월, 1인 기획사 제이알 이벤트의 이정길 대표가 주축이 돼 지금의 ‘나을자만’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현재 공연팀과 벽화팀, 플리마켓팀으로 나뉘어 자만벽화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벽화마을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봄·가을 미술전을 개최하고, 문화 공연, 콘서트, 플리마켓 등을 정기적으로 열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달동네에서 바라본 하늘은 바다다 달동네 커피숍 꼬지따뽕은 나을자만과 자만벽화마을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다. 고즈넉한 자만벽화마을 길을 한적하게 걷다가 알록달록 원색의 세상으로 풍덩 빠지는 느낌이 든다면 꼬지따뽕에 도착한 것이다. 전주 시내가 옹기종기 눈 아래 펼쳐진 전경도 꼭 마음속에 담아야 할 풍광 중 하나. 더운 여름 아이스커피 한잔 들고 선베드에 몸을 뉘이면 푸른색 하늘이 마치 바다처럼 쏟아질 것이다. 이곳의 초록 너른 마당은 ‘나을자만’의 공연이 이뤄지는 공연장이기도 한 ‘우모네모’ 쉼터다. 정기공연기간에는 이곳에서 다양한 이벤트와 콘서트를 열어 관객을 맞이한다. 선베드와 흔들의자가 놓인 모습이 편안함 그 자체다. 전주 토박이 작가는 작업이 한창 한낮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나을자만 소속 작가이자 전주 토박이인 이지현(26)씨가 벽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림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벽화를 그리다 보니 자만마을에서 터 잡고 작품을 만들고 그리는 예술가가 됐다. ‘이자벨 장난감’이라는 작업실을 열어 하고 싶었던 그림 작업도 하고 판매도 직접 하고 있다. 3년 전부터 취미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어엿한 자만마을 대표 작가다. 이렇게 자만벽화마을은 별다른 지원 없이 예술가와 주민들이 자력으로 꾸리는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벽화만 볼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 마실 것 하나 꼭 먹고 사기를 권한다. 자만벽화마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만벽화마을은 젊은 세대의 남다른 감각과 옛 정취의 조화가 돋보인다. 형형색색 꼬지따뽕 같은 카페가 있다면 나무판자에 술값을 휘갈겨 쓴 동네 구멍가게도 있다. 전주에 한옥마을만 있다고 생각했던 여행객들, 다시 한 번 전주행 티켓을 끊길 바란다. 전통뿐만 아니라 소박한 현재 우리의 문화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2017-06-0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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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진한 삶을 보다
-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 2017-05-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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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불사 암자에서 온 엽서
-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댓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 불현듯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고운 얼굴은 아니었어도 목소리는 청아했다. 필자가 자원입대한 공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에 복학했을 때 그녀는 3학년이었다. 나이는 필자가 네 살 위였다. 경상도 시골 태생이었던 필자는 서울 생활이 서툴기만 했다. 세련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의상학과를 다녀서인지 옷매무새가 세련되고 늘 깔끔했다. 나이 차이가 있어 친오빠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만나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곤 했다. 여동생이 없었던 필자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4학년이 되던 봄날, 제안을 해왔다. 여자 친구와 단양팔경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는데 여자끼리는 두려우니 필자가 함께 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통에 거절도 못하고 따라가 경호원 역할을 하기로 했다. 물론 기차여행이었다. 출발 시각에 맞춰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일이 급하게 생겨 못 가게 되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음부터 필자와 함께하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기차를 타고 단양으로 향했다. 살가운 누이동생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도담삼봉과 상선암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어 하룻밤을 지낼 숙소를 찾아야 했다. 참으로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냥 즐거운 모습이었다. 따로 방을 잡으려니 혼자 무섭다며 반대해 한방에 들었다. 남녀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이미 각오했지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하룻밤을 한방에서 보냈다. 친누이 동생을 보호하듯 팔베개까지 해서 말이다. 대단한 인내심의 발휘였을까? 아니면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나머지 여행까지 마치고 우리는 귀경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일이 오히려 그녀에게 큰 신뢰를 준 것 같았다. 필자에게 더 마음을 쏟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짝사랑에 필자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후회가 남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필자는 기대했던 행정고시에서 낙방한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지리산 자락 고향 마을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그 시기에 그녀는 계절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 필자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리라 기대했을 그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필자가 직장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종로에 있는 커피숍에서 재회했다. 물론 필자는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필자와의 만남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걸 자기 운명으로 돌렸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약사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았단다. 그 뒤 친정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다 옛 생각이 나서 얼굴 한번 보려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 뒤 필자는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어느 늦가을 그녀는 지리산 칠불사 암자로 온 이야기와 함께 골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엽서를 쓴다고 적었다. 엽서 맨 아래에는 ‘다른 곳으로 떠나며… 칠불사에서’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연락이 되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만나 그녀가 좋아하던 짙은 커피 향을 맡으며 추억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 2017-05-0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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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유인촌, ‘광대’의 삶을 말하다
- 국민 드라마 의 바르디바른 둘째 아들 용식,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무대에서 빛나는 베테랑 연극인, 그리고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어느새 올해 67세를 맞이한 유인촌의 이미지는 이렇듯 여러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매스컴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연극인으로 돌아간 그는 OBS의 대담 프로그램 MC를 맡아 3년째 드라이빙하고 있다. 광대로서, 그리고 뼛속까지 순간예술인임을 자각한 유인촌과의 만남 뒤로 생각보다 진중한 얘기가 있었다. 유인촌은 자신이 맡은 OBS 의 방향성이 최근의 방송 트렌드와는 다르게 진중한 점이 좋다고 한다. 뭐든지 예능화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그가 과거에 진행자로서 인기를 얻었던 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 방송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은 정말 좋은 점, 장점,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점을 중심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 보니 방송이 원하는 자극은 없어요. 그러나 보고 나면 따뜻해져요. 다행히 OBS가 그걸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주 다른 분을 만나기에 그분들에게 보고 배우는 게 많아요. 1년에 50여 명을 만나니 지금까지 150여 명을 만난 셈이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이어령 박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을 꼽았다. “이어령 선생은 첫 방송에 모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 교육부 장관을 하셨던 분인데 인생 스토리가 너무 놀라웠어요. 한국전쟁 전에 걸어서 월남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다가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분이죠.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은 김안과를 만드신 분인데,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구할 게 생겼다 유인촌을 의 영원한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느새 67세라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제가 공직에서 나와 다시 연극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 전성기다.” 유인촌에게 전성기라는 개념은 철저히 연극인 유인촌으로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삶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영상은 젊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지만 무대는 달라요. 희곡 작품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어렵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화되고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려면 남자는 40이 넘어야 해요. 그 전에는 아기 같아요. 사실 40대까지는 대학생 역할을 했었어요. 성인 남자의 역할은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어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 전성기’라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4년 전 얘기. 지금 유인촌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개인으로서 하려 했던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했던 걸 모두 지우고 연기자로서 새로운 뭔가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외의 다른 사업이라든지 기관장이라든지 말고요. 순수하게 내가 배우로 뭘 한다고 하면 그동안 쭉 쌓아왔던 걸로는 다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배우 훈련입니다. 발성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연극인 유인촌이 발성부터 다시 배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겉으로만 보였던 거라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특히 저는 우리만의 전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전통의 멋이나 깊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제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고 정리해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 수련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 주고파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는 올해부터 의미와 가치에 중점을 둔 계획을 여러 가지 세우고 있다. “사실 극장도 내가 퇴직하고 나와서 대관료를 만원 받으며 운영했었어요. 젊은 친구들 하라고. 그걸 3년을 했네요. 올해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과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어요. 여름방학 기간에 4박 5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라이딩 투어를 준비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그는 소문난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와 자전거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진 걸까? “오래전부터 탔죠.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설렁설렁 타다가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늘 탔지만 취미 내지는 생활처럼 된 건 그 정도 됐죠. 저는 배우를 했잖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인 걸 다 배워야 했어요. 수영, 자전거, 바이크, 펜싱, 검도,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한 게 아니라 업계에서 알아볼 정도로 했죠. 승마도 장애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다는 못하고 걷기, 자전거, 수영, 스키, 스노보드 정도만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취미도 운동도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특히 걷기는 그가 여전히 좋아하면서 계속할 수 있는 취미이자 운동이다. 670km를 걸어서 종단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아직도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장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보람을 일깨운 마지막 햄릿 연극인으로서의 성공, 정치인으로서의 논란. ‘개인적으로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의 삶의 그래프는 급격하다. 그가 ‘내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작년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는 햄릿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60대 중반 넘어선 사람에게 왕자 역할 하라고 하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해랑연극상 받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윤석화가 전체에서 가장 막내였고 내가 그다음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내가 햄릿 역할을 하게 됐는데,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죠. 다행히 유종의 미를 거뒀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햄릿 역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내 연기 인생의 전반부가 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러면서 연기하고 연극하길 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계산보다는 명분과 충분한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가 세운 극장도 처음에는 한 달에 2500만원씩 빠져나갔는데 그때마다 다른 곳에서 일한 돈으로 메꾸면서 운영했다고 한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서 평소의 신념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주변에 여러 가지가 연관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고 있어요. 제게 섭섭한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좀 좁히려고요. 이제 와 일을 벌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연극도 1년이나 2년씩 구상하고 준비해서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연극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쉬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젊어서 좋은 거예요. 그것 외에는 크게 장점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핸디캡이 아니에요.” 그는 ‘어차피 늙는 건데 (인생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그가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연극 중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라는 작품이 있는데, 늙어감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유난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를 1997년에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했는데 지금까지 매번 적자였어요. 그러나 작품의 의미나 형식이 너무 좋아서 적자가 나는데도 계속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의 대사 중에 ‘중후하게 늙을 것인가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 중후하고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라는 말이 나와요.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하는 거예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삶을 관조하는 늙은 얼룩말을 맡았던 연기자 유인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는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화자인 얼룩말은 다양한 역경을 겪은 늙은 말이다. 이 얼룩말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되는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젊음과 늙음 등은 인간사 희로애락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술의 보람과 감동을 알기에 놓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밟아보지도 않아. 자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해. 내 여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살아.’ 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관객 중에 홀스또메르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못 마주쳐요. 그래서 흥행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 이 연극을 보신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울기도 합니다. 저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근두근해요.” 한번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친구 때문에 를 보게 됐는데 이 연극을 본 후 죽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거지. ‘내가 꼭 성공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어요. 그걸 보면서 예술로서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편지 하나 때문에 연극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궁금했다. 유인촌은 어떤 이유로, 어떤 힘으로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다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같은 작품을 했는데 어떻게 늙어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지금의 유인촌은 그 고민의 결과다. 예술은 사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고 그 화두를 접한 사람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싫지만 취미를 갖고 싶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게 좋아요.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은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의 날, 미술관의 날 등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예술을 접합니다. 돈을 모아서 강연회를 열기도 해요. 아주 지적인 취미생활인 거죠. 우리도 할 게 많아요.” 기자가 늘 놓치지 않고 묻는 마지막 질문,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기억되지 않는 게 좋다고. 가족에게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해뒀어요. 광대 팔자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연극은 순간예술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죠. 저는 저를 영상으로 남기는 게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했어요. 필름은 50년, 70년 돼도 남는 것이라 부담스럽거든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몰라서 지하철을 타도 아무 불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사람마다 저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방송인으로, 누군가에게는 배우로. 그냥 그렇게 각자의 나름대로 가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유인촌과 ‘홀스또메르’가 오버랩되면서 옳다 그르다 선을 긋기 전에 인생역정 겪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선 그에게 다시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편협한 생각으로 나눴던 대화, 그끝에 알게 된 건 그가 영원한 연극인이라는 거다.
- 2017-04-13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