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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연금공단 노후 준비 자가진단 “족집게과외 따로 없네”
- 노후준비가 시니어들의 화두로 떠 오른 지가 제법 되었다. “내 노후는 어떻게 되겠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칠까”하고 큰소리는 치지만 길어지는 수명을 생각하면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고 싶었던 참에 국민연금공단의 ‘노후 준비 자가진단’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2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별로 작성한 체크리스트를 갖고 7명씩 소그룹을 만들어 심층적인 문제 진단을 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재산이나 친구 관계와 건강문제를 모두 다 공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심층적인 개인별 진단을 위한 희망자를 받기에 신청을 했다. 보름정도 지나서 국민연금공단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면담이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서로 타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집 가까운 공단지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신을 ‘노후준비서비스팀 노후준비 전문상담사’라고 소개한다. 먼저 내가 가진 재산을 모두 말하도록 했다. 부동산을 위시하여 저금, 보험, 보유주식은 물로 직장수입까지 다 말했다. 술, 담배, 운동 등 나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툭 털어놨다. 종교활동이나 사교모임 등 여가를 보내는 분야도 터치한다. 부부간 가사분담이나 형제간 우애도 물어보고 노년기 친구들 관계도 궁금해했다. 정확한 내 자산상태를 알기 위해 동의를 해주면 관계기관을 통해 자료를 추출할 수 있다고 해서 이 부분도 동의를 해 주었다. 내 처지로는 재무 분야가 제일 궁금했다. 검토결과 ‘실손보험’이 없는 것이 취약점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중대 질병 시 치료비와 입원비를 받을 수 있는 보험에 가입해 있는 점이 그나마 다행으로 나타났다. 노후 수입은 국민연금이 있고 다음으로 은행과 보험회사의 개인연금보험이 있다. 증여는 절세차원에서 자녀들에게 기간을 두고 사전에 조금씩 나누어 주라는 조언도 들었다. 이번 크게 도움받은 점은 연금수급예정에 대해 세금 문제였다. 연금도 수령 금액이 높아지면 세금을 내야 하므로 수령 기간 5년을 10년으로 장기수급을 하도록 권유받았다. 깜박 놓치고 있는 부분이었다. 또 하나는 국민연금을 더 받기 위해 받을 시기를 연기했는데 만약 내가 죽고 아내가 연금을 받을 때는 가산된 연금이 아닌 기본연금으로만 산정된다는 제도다. 남자가 일찍 죽을지 안다면 연금을 받는 시기를 늦추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이다. 수익형 부동산의 구매는 임대수익성을 따져봐야 하는데 소득세, 재산세, 건강보험료 등 공과금과 관리비용, 공실률 등을 고려한 실질수익을 고려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임대부동산 관리는 시설관리와 임차인 관리까지도 신경 써야 하니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었다. 일일이 말하지 못할 정도로 상세한 진단을 받았다. 두시간 이상의 설명을 들으며 이렇게 세밀한 진단을 해 주리라고는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감동했다. 노후 여가활동을 하기 좋은 우리 동네 기관을 알아주고 금융소비자 정보포털사이트도 안내를 해주었다. 막연한 조언을 듣기보다는 이미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라면 족집게과외처럼 콕 집어 알려주는 전문가와 1대1 상담을 받아보고 하루라도 빨리 궤도수정을 하면 좋겠다.
- 2018-10-0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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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에서 ‘밥 아저씨’로 불리는 미국인 로버트 그라프
- 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그 소원을 이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엉클 밥’으로 불리는,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 로버트 그라프(Robert Graff·70) 교수의 이야기다. 그라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주말 나들이객들과 벌초 성묘객들이 몰고 나온 차들로 빼곡했다. 4시간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들어서자 ‘엉클 밥’ 간판이 걸린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2층 건물은 초록 논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더위와 막 헤어지고 온 초가을 바람이 살랑대는 오후였다.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에만 강릉에 와 있다는 그는 카페테라스에서 중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인데 제가 올라오는 날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배운 지 이제 일주일 됐는데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할 때 통역 좀 해보라 할까요?(웃음)” 그가 장난치듯 말하자 학생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창올림픽 때 외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를 가르쳐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됐던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아내 고향인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평창올림픽 개최를 2년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시청 공무원이 택시 기사분들께 영어 좀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강릉 시민으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터미널이나 역에 내린 외국인들이 처음 상대하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예요. 그분들이 강릉의 얼굴인 셈이죠. 그래서 영어로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화 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기사분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은 외국인을 만나면 대화가 안 돼 태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Hello, welcome to 강릉!’ 하면서 인사 몇 마디 나눌 정도는 됐다고들 말해요.” 마을 사랑방이 된 ‘엉클 밥’ 카페 영어 회화 교실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그의 카페에서 열린다. 여러 상황에 대비한 표현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자주 만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해져서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고 술도 한잔씩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를 연 지는 3년 정도 되어갑니다. 2층 집을 짓고 나서 1층을 우리 부부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고 커피도 한번 팔아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커피가 팔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카페 창문에 페인트마카로 크게 써놓은 글을 보여준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기 위해 써놨다는 글이란다. 들여다보니 커피보다는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누구에게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절이 있듯 강릉에서의 그의 삶도 그러해 보였다. ‘엉클 밥’은 그의 애칭.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 부른다. 카페 이름도 ‘엉클 밥’으로 지은 걸 보면 자신의 애칭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가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주말에는 카페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영어를 배우는 택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클 밥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소가 밭 갈던 풍경이 그립다 젊은 시절, 그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다.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 나라가 마치 오래된 고향처럼 편안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헐벗고 가난한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경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많이 다가왔다. 특히 마을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농기계가 없어 소와 함께 밭을 갈던 농부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농부는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이 차에 오르면 자리를 양보하던 젊은이들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예절을 중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한국 문화가 좋았어요. 제가 살던 미국에는 그렇게 깊고 오래된 문화가 없거든요.” 1년간 짧은 사병 생활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평화봉사단을 통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정부가 가라 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제 의지로 왔어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다시 가고 싶었어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화봉사단을 생각해냈어요. 제대 후 대학교에 있던 평화봉사단을 찾아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냐고 물었지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3개월 후에 그럴 계획이 있다 하더군요. 당장 단원 가입을 했죠.”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라도 영광, 광주 지역에서 3년여 봉사활동을 했다. 한국말은 이때 많이 배웠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20대 시절로 돌아가더니 하숙집 이야기, 맥주 마시러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갔던 일, 어니언스·펄 시스터즈·김추자·서유석 등 가수 이름들을 줄줄 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영광읍에서 공무원인 하숙생과 친하게 지냈어요. 가수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같이 불렀던 기억도 나네요. 어디서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많았어요.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기는 했죠. 그때는 한국에 가정용 냉장고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가야 했어요. 거기는 제법 큰 냉장고가 있었거든요. 푸세식 화장실도 경험했지요. 냄새도 나고 낯설었지요. 그때 새마을운동도 한창이었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없어져서 저는 너무 섭섭했어요.” 결혼, 그리고 귀화 그 후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MBA 과정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휴가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을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운 좋게 1994년 광주은행 IT 보안 업무를 맡아 들어왔다가 삼일회계법인에서 IT 매니지먼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살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화순(66) 씨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측은지심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엔 그녀도 몰랐을 터. “남편 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197cm였거든요. 그렇게나 큰 키에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남편은 화가 나도 내색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는 엄청 기뻐하고 크게 웃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저 사람이 좋았어요.” 이들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가끔 네 나라, 내 나라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 남편이 TV를 보면서 요즘 왜 그렇게 먹는 프로그램이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판하면 은근히 화가 나더군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당신네 나라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하면서 다툽니다. 제가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지만요.(웃음)” 그라프 교수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 해서 약국에 가서 소염제를 사 먹으라 했는데 수면제를 받아가지고 온 거예요. 기겁을 했지요. 남편은 분명 소염제라 말했을 거예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약사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꼭 함께 다녔어요. 지금은 혼자 다녀도 문제없지만요.” 그는 현재 대전에 위치한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에서 IT 관련 비즈니스 강의를 하고 있다. 강릉에선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학교에 가면 학생들에게 “여기 놀러 왔냐,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2007년 삼일회계법인에서 퇴직한 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에게 그동안 향수병은 없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치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을 강릉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고 옷, 백화점, 돈, 물건에 관심이 많은데 강릉 분위기는 좀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서로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사도 하고 손도 잡습니다. 오래전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면 즐겁게 쉬다 가셔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 이것이 엉클 밥, 로버트 그라프 교수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웃과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
- 2018-09-2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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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근 NH농협은행 전북 본부장 “농민이 기뻐하는 은행을 만든다”
- 지금 전라북도에 닥친 경제적 위기는 위중하고 국가적인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의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 한국지엠의 군산공장 폐쇄 등의 무거운 사건들은 전라북도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전반의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제조업의 위기 외에도 농업 기반 지역이라는 특성상 농업의 사이즈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다른 측면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김장근 NH농협은행 전북 본부장이 처한 상황은 이처럼 녹록지 않다. 그가 바라보는 농촌에서의 은행의 역할, 그리고 농업가치에 대해 들어봤다. NH농협은행은 기본적으로는 농협은행 주식회사이지만 정체성 면에서 다른 은행들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면이 있다. “큰 틀에는 농협법의 정신이 있어요. 그 정체성을 지키며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방식이나 지향점에서 다른 은행들과 차이가 있기 마련이죠.” 김장근 NH농협은행 전북 본부장은 ‘농협이 왜 돈장사를 하냐’는 말에 “재일동포도 와서 돈장사하고 외국 사람도 와서 돈장사하는데 농민이 만든 곳이 돈장사하는 게 왜 문제냐”며 우스갯소리로 되받아친다고 한다. ‘농민이 자랑스러워하는 농협’, ‘도민과 고객의 사랑을 받는 농협’을 목표로 은행 영업에서 일등을 목표로 하는 그는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야 농민들이 기뻐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의 기반에는 지역과 연결되어 우리가 모르는 공익적 사업들을 병행하는 농협의 특수성이 자리하고 있다. 농협은행의 특별한 사명 최근 은행들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금융업의 극심한 변화에 따른 수요의 변화상이 있다. 상당한 양의 거래가 온라인에서 점점 간편하게 이뤄지는 현재, 당장 은행 점포를 유지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화두다. “여전히 은행 창구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을 보면 노약자분들이 제법 많아요. 그래서 지역사회 관점에서 보면 점포가 있는 게 괜찮아요. 그러나 주식회사인 은행 입장에서는 점포에서 적자가 나면 문제가 되는 거죠.” 김 본부장에 따르면, 전라북도의 한 지역에는 은행 점포가 농협은행 두 군데뿐이라고 한다. 유지비용을 생각한 다른 은행들이 다 빠져나간 결과다. “지역을 지켜야 합니다. 이익이 덜 나더라도. 은행의 공공성을 생각하면 점포를 무조건 빼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물론 우리도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딜레마는 있죠. 그러나 포용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을 지키며 마을공동체로 거듭나는 은행 그러나 은행 창구에 오는 고객들 수가 줄어드는 큰 흐름이 뒤집힐 가능성은 없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점포가 존재의 정당성을 가지려면 기존 은행 점포 이상의 가치를 갖는 수밖에 없다. 김 본부장은 그 방법론으로서 마을 공동체 역할을 강조했다. 최근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서, 금융위원회에서는 은행 점포들을 무더위 쉼터로 운영한다고 공고했다. 그런데 농협에서는 발표 열흘 전에 이미 플래카드를 걸고 점포를 무더위 쉼터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동사무소 등과 협력하는 등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김 본부장은 그런 모습을 설명하며 ‘점포의 재발견’이라며 흡족해했다. “어떤 은행은 ‘점포를 다 빼도 수요가 늘었더라, 직원들 안 자르고도 할 수 있더라’ 하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런 흐름이 분명히 있다는 게 이해는 갑니다. 앞으로 은행이 과거만큼 중요한 시대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죠. 그런 상황에서 농협은행이 어떻게 운용되어야 할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함께 움직이는 농협 얼마 전 기획재정부에서는 폭염으로 물가가 올라가니 농협의 비축물량을 풀어 물가를 안정시키겠다고 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기재부에서는 왜 농협과 연결해 정책을 운영하는 걸까? 이런 장면이야말로 농협의 특수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할 수 있다. “선진국은 양질의 의식주가 적절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합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국민 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는 게 농협의 목표입니다. 정부에서 못하는, 농협에서 추진하는 협력 사업들이 많아요.” 누가 뭐라 해도 농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국가 간 무역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식량 안보의 이슈가 커져 더욱 민감해진 분야다. 따라서 농업은 공립적 기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서양에서도 국가 자금을 들여 농업을 부양하는 이유다. “농협의 역할은 농업을 보호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농민 숫자는 300만 명쯤 됩니다. 국민 전체에 비교하면 5퍼센트 이내예요. 말하자면 소수의 농민이 대다수 국민을 식량으로 부양하는 셈이죠. 이를 효율적으로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농협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국민 먹거리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농업가치를 생산하는 주체인 농민을 위한 농협의 중요 역할은 ‘농가소득증대’와 ‘안전한 농축산물 공급’이다. 때문에 2020년까지 농가소득 5000만 원을 달성하자는 농협의 목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보인다. 시니어의 로망, 귀농·귀촌의 현실 도시인이 귀농해 사업적으로 성공한 사례들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예를 들어 딸기는 단위 면적당 수익률이 가장 높은 농작물 중 하나로 조사됐다. 또 요즘의 논농사는 98%가 자동화해 노동투입 일수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쌀농사 생산성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이렇게 변화되는 현실은 농업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소해주는 증거들이다. 또한 최근 취재를 하다 보면 시니어의 로망이 바로 귀농·귀촌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랜 세월 분리되어 있던 문화가 합쳐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 본부장도 사람들을 만나며 느끼는 부분이라 했다. “귀농·귀촌은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죠. 금방 되지는 않을 거예요. 도시에서 살다 온 분들은 아무래도 고학력자에, 직책이 높은 사람들이었잖아요? 반면 시골에서 살아온 분들은 평생을 농촌에서 살았던 분들이라 이런 부분에 대해 거부감이 있어요. 얼마 전 이장님이 마을에 일이 있어서 사람들을 모았는데 귀농·귀촌한 분들은 한 명도 안 왔더라고요. 이런 상황에 대해 원래 농촌에 살았던 분들은 ‘그 사람들은 자기 식대로 살면 되고 우리는 그들 없이도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지금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외지인이라고만 생각하는 간극을 좁히는 방법이 필요해요.” 현장에서 함께 사는 은행을 꿈꾸다 김 본부장에게 영업 전략을 묻자 ‘현장을 많이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업은 매일 한두 군데 꼭 들른다고. “돌아다니고 얘기도 들어야 알죠. 폭염이 이렇게 계속되면 소비가 줄어서 기업들이 어려워져요. 직접 애로사항도 듣고 욕도 듣고 그래야죠. 앉아서 영업이 될 리는 없잖아요?” 영업과 함께 병행하는 게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다. 그는 얼마 전 ‘희망나눔집 고쳐주기’ 봉사를 다녀왔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은행을 만들기 위해 그가 기획한 사회공헌 활동으로 장애인 가구의 낡은 벽지와 장판을 교체해주고 있다. “장판하고 벽지 갈아준다는 말은 쉬워요. 그분들이 생활 정리가 잘 안 되기 때문에 짐을 꺼내다 보면 쓰레기도 많이 나와요. 닦고 정리하고 정리가 끝나 다시 짐들을 들여 넣어주다 보니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어제 간 집은 쓰레기가 1t이나 나왔어요. 그런 사람들이 아직 많은 게 현실이죠.” 우리나라 농가 평균소득은 호당 3800만 원 정도에 머무른다고 한다. 도시 근로자 소득에 비하면 60% 내외 수준이므로 매우 낮은 편이다. 가치 있는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사는 농업인을 위한 도움, 그것은 그가 말하는 따뜻한 금융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 2018-09-2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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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싫어!
-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9-0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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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재산과 노후자금 지키는 세 파수꾼
- 15년 전에 살던 서울 광진구에 있던 아파트를 올 3월에 팔았다. 6월 4일 잔금 수령 일 등도 관계인들 요청으로 5월 말로 당겨 처리하였다. 현직에 있을 때 계약관계 일들, 법률적인 일들을 오래 처리한 경험이 있어 임차인과의 관계, 새 매입자 또는 매입자가 물색한 새 임차인과의 관계 등 복잡한 4자 관계에서 금전 정산일 들도 모두 정리하고 열심히 처리했다. 직접 모든 것들을 확인하며 발로 뛰며 처리했지만 돌아보니 미진한 점들이 많다. 현직에서 주어진 일들에 성실히 임하며 부모 역할도 열심히 한 후, 집 한 채와 일정 금액의 노후자금을 가진 은퇴자들이 본인의 재산과 일정 금액의 현금을 보호하고 활용하는데 내가 겪은 필수적인 몇 가지 정보와 지식은 상당히 유용하리라 생각되고 최소한 방어적으로 조심하도록 권유하고 싶다. 그것들은 질권, 재산세 부과기준일, 채권양도이다. 1 질권 근대사회 및 자본주의는 근대민법의 3대 원칙인 사유재산권(소유권) 절대의 원칙, 계약자유(사적자치의 원칙, 과실(자기)책임의 원칙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했다. 물론,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의 격차와 경제적인 공황 등으로 신의성실의 원칙,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이 보완되었다. 이중 소유권 절대의 원칙은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큰 기준이거니와 여기에서 용익물권이라는 지상권/지역권/전세권과 담보물권이라는 유치권/질권/저당권이 나온다. 질권은 시계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것 같이 목적물을 유지하는 권리와 우선변제를 받는 권리이다. 시계 대신 임대차보증권/지명채권/주식 등 권리질을 잡을 수도 있다. 광진구에 2004년에 마련한 우리 부부의 새 아파트는 정년을 준비하며 잘 이용했고 3자녀들이 수도권에 적응하는 과정에 잘 사용하였다. 정년 후에도 잘 이용하다가 아내가 맞벌이하는 큰딸 부부의 의 두 아들, 즉 외손자들을 봐 줄 사정이 생겨 용인시로 이사 오면서는 전세(임대차)를 내주었다. 내 집같이 아끼며 사는 세입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4년 전인 2014년에는, 세입자께서 사업자금이 필요하여 은행으로부터 전세자금 3억 5천만 원을 융자받겠다며 절차상 필요한 소유주의 동의를 요청해 왔다. 동의를 해주겠다고 하니 첫 은행에서 전세자금 대출에 필요한 법적 요건인 질권 설정을 해야 하니 필요 절차와 서류의 동의절차를 요청해 왔다. 그러자고 했더니 먼저, 은행을 돕는 어떤 법무법인이 신원을 확인하며 직원을 용인 집에까지 보내 이런저런 서류에 도장을 받아갔다. 그런 다음 첫 융자은행은 친절한 안내문을 보내주었다. “임차인은 임대차보증금을 담보로 제공하고 저희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대차보증금에 대해서는 본 은행이 임차인보다 먼저 반환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8가지 경우 발생 시에는 반드시 알려달라는 주의사항들을 안내해 왔다. 이 중에는 매매 등으로 소유권이 변경되는 경우와 다른 금융기관의 전세자금 담보대출을 허락한 경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년이 지나 전세 계약 기간이 연장되었고 3년이 지나자 임차인께서 이번엔 은행을 갈아타면서 전세자금 융자 이자를 줄이는 융자를 하겠다며 동의를 요청해 왔다. 세입자도 60대여서 이자율을 낮추면 노후자금에 여유가 생길 터여서 또 동의해 줬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은행에선 전화확인만 해오고 사람을 보내어 서류 확인 등의 절차는 밟지 않았다. 아파트가 매매되고 6월 초에 매매 잔금을 받으려는데 임차인께서 5월 말에 두 번째 은행의 융자를 갚아야 하니 임대보증금을 맞춰서 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은행에 확인해 보니 임차인 명의의 융자금이 없다고 했다. 급기야는 첫 은행에 아파트 매매 사실과 그전에 임차인이 타 은행에 변경 융자한 사실을 알리며 임대차(전세)보증금을 아파트 소유자는 누구에게 환급할 의무가 있느냐고 확인했다. 그제야 임차인이 2016년 말에 융자금을 상환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무책임했다. 그리고 기어이 2016년 12월 20일 자로 질권 해지 통지서를 직접 받았다. 은행의 질권 설정 서류엔 2018년 6월 초까지 임대차기간이 명기됐었기에 그래야 법률적인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말 임대차(전세)보증금을 돌려주면서 임차인과 두 번째 은행에 같이 가서 해당 융자금을 상환함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야 3억 5천만 원의 질권분쟁에서 벗어나고 아파트 매매에 따른 심적 부담을 개운히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선의로 임차인의 편의를 위해 질권 설정을 동의해 준다 해도 엄청난 법적 책임과 직접 발로 뛰는 확인 일들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인지하고 동의해줄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권 설정 금액의 두 배 이상 금액에 대한 분쟁과 손실 우려가 발생할 수 있겠다. 2 재산세 부과일 기준 광진구 아파트의 매매 전후의 하자보수비에 대한 매매 당사자들과 기존 임차인 및 새 임차인 간의 하자보수 책임과 비용 분담 등 잔잔한 일들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7월 어느 날 해당 아파트에 대한 재산세가 부과됐다. 매매 사실과 5월 말에 잔금 처리된 사실을 관계구청에 알리고 재산세 부과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매년 6월 1일 기준으로 재산세 반이 부과되고 9월에 나머지 반이 부과된다고 한다. 우리 부부 아파트의 소유권 변경 등기이전이 6월 1일 이후에 이뤄졌으므로 재산세 부과 정정을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9월에 부과되는 것만이라도 새 매입자에게 부과해 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6월 1일 기준이라 안 된다고 한다. 근대민법의 3대 원칙 중에 가장 근간이 되는 소유권절대의 원칙에 따르면 소유 없이 재산세를 내는 격이니 고쳐야 한다고 본다. 매년 6월 1일을 기준으로 재산세가 부과되는 것은 다분히 행정편의를 손해를 끼친 것이므로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논쟁과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6월 1일 기준으로 재산세가 부과됨을 알고 특약조항에 재산세 납부자를 명기하거나 소유권 이전 의무 일을 합의하면 되리라고 본다. 혹은 매매대금 협상 시 알고 반영하면 될 일이다. 3 채권양도 20여 년 전 단독주택 2층에서 거주할 때 임차인이 1층 몇 칸을 얻어 우유 배달업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사업이 성장일로이더니만 어느 날 전세보증금을 양도하고 우유 회사가 양수인이 되었음을 통보해 왔다. 급기야는 임차인이 이사하겠다고 하면서 전세보증금 반환 준비를 해달라고 해왔다. 채권양도양수 통보를 받은 후 수년이 지나서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법정관리가 되고 회사정리법에 따른 복잡다단한 정리채권 확정의 소송들을 진행하던 때여서 양도채권의 효력을 알고 있었다. 받을 채권, 즉 금전에 대하여 압류, 임시압류, 추심명령, 이전명령 등 소위 법적 보전처분들이 뒤엉켜 있어도 채권양도가 통지된 이후엔 양도된 채권이 가장 효력이 강하여 이후의 보전처분들은 전혀 힘을 못 쓰는 것이었다. 만일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내줬다면 우유 회사에 동일금액을 이중 반환할 법적 의무가 생기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이해시키고 우유 회사와의 직접정산을 권유했다. 이렇게 질권, 재산세 부과 기준일, 채권양도 세 가지만의 기본 개념과 법적 효력을 잘 알고 구체적인 사례에 대처한다면 젊었을 때 오래도록 애써 모은 각자의 재산과 노후자금은 예기치 않는 손실이나 법적 분쟁을 막을 수 있는 파수꾼이 되리라고 본다.
- 2018-09-0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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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여행 시 한국 돈
- 한국 화폐는 아직도 국제 시장에서 공식 환전이 안 되는 돈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의 경우에는 한국 돈이 별 불편 없이 사용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호텔 숙박비나 식비 등 큰돈은 여행사에서 알아서 지급하므로 관여할 바 아니고 개인적으로 쇼핑에 사용할 돈을 말한다. 호텔 룸서비스 팁, 마사지 가게, 기념품점, 동네 행상, 기념품 판매점, 농산물 판매점, 공항 면세점에서도 한국 돈이 통한다. 한국 돈 1만 원은 중국 돈으로 약 60위안이다. 중국 돈 1위안은 우리 돈으로 약 167원이다. 미국 돈 1달러가 약 6.71 위안이다. 물건값이 중국 돈으로 되어 있으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금방 계산이 어렵다. 그래서 한국 돈으로 지급 할 수 있으면 금액에 대한 감이 있으므로 계산이 편한 것이다. 우비 하나에 3000원, 좀 더 고급은 5000원, 삼단 우산은 5000원, 장뇌삼 10뿌리에 1만 원부터 굵은 뿌리는 하나에 5만 원도 부른다. 행상이 가지고 다니는 현지 교통지도가 1000원 식이다. 호텔 룸서비스 팁은 보통 1불을 놓고 나온다. 1불은 우리 돈 약 1120원 정도이지만, 1000원으로 간단하게 보면 된다. 그래서 테이블에 팁으로 1000원권 지폐를 놓고 나온다. 무거운 가방을 방까지 갖다 주는 팁도 마찬가지로 1000원이다. 1불은 우리 돈을 미국 돈으로 환전해야 하므로 환전 수수료가 붙는다. 환전한 미국 돈이 한정적이므로 우리 돈 1000원보다 귀하게 쓰인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에 갈 때는 우리 돈 1000원짜리를 많이 준비해 가면 좋다. 1만 원권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1000원 지폐가 더 용도가 많다. 굳이 수수료 내가며 위안화로 환전해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면세점에서도 가격을 미국 돈, 중국 돈, 한국 돈으로 따로 매겨놓았다. 역시 한국 돈으로 지급하면 편하다. 지갑이 불룩한 것이 싫어서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한국 돈을 꺼내 줬더니 구겨진 돈은 은행에서 환전해주지 않는다며 반드시 지갑에 넣어 다니라는 충고를 들었다. 동전은 걸어 다닐 때 짤랑거리고 무게도 있어 불편하다. 보안 검색 때도 금속이므로 여지없이 걸린다. 보안 검색은 공항뿐 아니라 중요 관광시설을 이용하기 전에 받는다. 백두산 산문에서 입산 절차를 밟을 때도 거쳐야 한다. 따로 가방에 넣어 두거나 아예 동전은 떠날 때부터 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단,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이므로 유로 동전이 필요하다. 보통 한번 사용에 30센트, 50센트를 받는다. 동전이 없으면 지폐로 내면 팁으로 생각하고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 일도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면 합해서 지폐로 사용할 수도 있다.
- 2018-08-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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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72세가 심판받는다면?…소설 ‘마론’이 그린 미래
- 대다수의 사람은 사후에 자신의 삶에 대해 신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선행을 쌓으려고 애를 쓰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는 것일 거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기 전 살아 있을 때 심판을 받게 된다면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100세 시대라는 요즘 70세 무렵에 심판을 받는다면 그때까지 다 선한 일만 하고 살까?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전혀 없을까?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되고 저장되어 72세가 되는 해에 모든 데이터를 장악하고 있는 기계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심판을 받고 유토피아로 가거나 죽게 된다는 믿기 어려운 세상이 있다. 2010년에 데뷔한 부산출생의 정광모 작가가 쓴 ‘나는 장성택입니다’라는 제목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7편의 작품이 들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마론’으로 ‘마론’은 현대의 이슈인 노인 문제와 빅데이터를 결합해서 쓴 작품이다. 소설을 보면, 정부는 알래스카 이누이트 족의 노인들이 겨울에 보관한 식량이 떨어지거나 모자라면 스스로 옷을 벗고 눈보라가 치는 밖으로 걸어 나가 죽음을 택한다는 인류학적 근거를 들어 ‘겨울 노인법’이라는 이름의 법을 발의하고 의회에 제출하여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겨울 노인법’을 보완한 새로운 법으로 ‘대심판관 마론의 법’을 만듦으로써 마침내 마론이 탄생하게 된다. 국민투표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이때 72세 이상 노인들은 당사자라는 이유로 ‘마론의 법’에 투표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72세를 맞은 날의 아침에 마론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마론 앞에 서기 전 71세가 되는 날부터 세 번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심판 한 달 전에 마지막 교육을 받으면서 신분증과 보험증을 비롯한 모든 증서에 한 달 후 닥칠 심판의 날짜가 입력된다. 교육생들에게 1년 전 준 지침에는 사회복지단체에 재산의 15%를 넘겨줄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심판을 불과 한 달 앞둔 교육생들은 그보다 많은 금액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의식주를 개선하는 단체에 기꺼이 내놓는다. 복지부서는 마론의 심판에 앞서 기부받는 엄청난 재산으로 국민들이 70대 초까지 먹고사는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고 있다. 마론은 사람들이 다닌 병원의 진료기록과 사용한 신용카드, 스마트폰과 은행의 기록, 온갖 서류와 행정관청이 보유한 개인정보 모두에 연결되어 있다. 마론은 이 모두를 순식간에 처리해서 일, 월, 년 단위의 선과 악에 대한 평가를 종합하여 심판을 내린다. 마론이 심판에서 적용하는 잣대는 선행과 우애 그리고 자선과 헌신이다. 심판 일을 왜 72세가 되는 해로 삼았는지 작자의 의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현행 노인의 기준이 65세 이상이며 일본에서 70세 이상을 노인으로 하자는 움직임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노인 기준연령을 상향 조정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빅데이터는 이제 실생활에서 폭넓게 쓰인다. 페이스북, 구글 등 세계적 기업에서는 기업경영과 마케팅에 이미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용카드사에서 고객의 카드 이용정보를 모은 정보를 활용하여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편의점에서 도시락 판매 전략을 짜는 데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로 볼 때 앞으로 빅데이터가 쓰이는 영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질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사람의 선행과 악행, 자선, 헌신 등 인간의 삶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평가하고 심판 하는 것은 가상 속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빅데이터에 의해 심판을 받는 세상이 온다면 과연 한 인간이 평생을 흠 없이 사는 게 가능한 것인지, 잘못이 있는 사람한테는 단 한 번이라도 개과천선의 기회가 있는 것인지,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노인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되는지 등에 대해 자못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 2018-07-3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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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마다 일요일
- 정년을 맞이하고 나면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 부자가 된다. 직장에서 근무하던 시간이 오롯이 한가한 시간으로 변해서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날마다 일요일’이라 부른다. 일요일은 편히 쉴 수도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보낼 수 있다. 특히 직장이나 하던 사업에서 물러나면 특정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가다. 특정한 시간이란 생리적 필수 시간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시간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화장실을 가는 경우가 그렇다. 또 은행을 가는 일도 의무적인 시간에 속한다. 이러한 시간을 제외한 한가한 시간이다. 여가란 여가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시간 자체를 의미한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생리적 필수 시간과 의무적으로 하는 시간을 빼고 난 시간으로 하루에 11시간쯤 된다.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고 이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다. 생리적 필수 시간 중에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어 여가는 더 늘어난다. 단순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시간으로 비칠 수 있다. 날마다 그런 시간이 눈앞에 펼쳐지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1시간을 분 단위로 환산하면 660분이다. 숫자로 보면 짧은 시간으로 보인다. 칫솔질하는데 가장 적정한 시간은 3분이다. 실제 3분을 사용하여 양치질하는 경우는 드물다. 3분도 길게 여겨지는 데 무려 660분은 긴 시간일 수밖에 없다. 정년 후 살아가야 할 햇수가 40, 50년이 될지 모르는 장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아침에 눈만 뜨면 일요일이 되는 정년 후의 시간 관리가 중요해진다. 그렇다면 어떠한 유형의 여가활동이 바람직할까? 여가 학자들은 그 방법으로 ‘5.35.11 법칙’을 권유한다. 여가활동으로 취미, 자기계발과 학습, 봉사활동으로 나눠진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너 개 이상의 여가활동을 하고 있으나 더욱 고상하고 거창한 종류나 분야만을 여가활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여가는 심리적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시간으로 정의한다. 세부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음을 보여준다. 5.35.11 법칙의 5는 5가지 이상의 여가활동을 의미한다. 5가지 중에서 1개 이상은 배우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종류를 개발함이 좋다. 35는 일주일에 하는 여가활동 시간이다. 하루에 5시간을 여가활동으로 보내기를 제안한다. 하루에 5시간 이상을 즐거운 여가활동으로 보내면 암을 49% 예방한다는 통계가 있다. 2시간 반이면 39% 예방한다. 11은 35시간 중에서 11시간 이상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보내는 시간을 나타낸다. 사회적 건강을 챙기는 활동이다. 동호회에 참가하거나 봉사활동, 재능기부 등으로 보람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사회적 건강을 챙길 방법이다. 건강은 신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영적 건강과 사회적 건강이 함께 해야 한다. 장수 시대에 가장 힘든 일은 돈 없이, 아프면서 장수하는 것보다 하릴없는 무료한 생활이다. 5.35.11 법칙을 실현하는 일이 즐겁고 보람 있는 노후 여가를 보내는 바람직한 여가활동 유형이다.
- 2018-07-2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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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같이 한방 쓸까요?
- 결혼하고 40대에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게 된 인연으로 가깝게 지내던 여고 3년 선배가 있었다. 내가 카톨릭 신앙을 가지게 됐을 때 가톨릭 신자이던 대모로 모시고 세례 받을 만큼 가깝다. 나는 평소에 대모를 ‘언니’라고 불렀다. 은행원 남편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언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에 언니네 집으로 자주 놀러가곤 했다. 언니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며 잘 살고 있기는 했지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각방을 써왔다는 점이다. 부부는 대체로 반대로 만난다고 하는데 언니 부부는 둘 다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우리 나이에 각방이 문제가 되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부부의 각방 쓰기는 신혼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하고부터 서로 잠드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달라서 애를 많이 먹었다. 언니의 남편은 8시 뉴스만 끝나면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일어났다. 언니는 TV 드라마가 끝나는 새벽 1시나 돼서야 잠이 들어 아침 8시쯤 눈을 떴다. 우유와 요깃거리로 해결하는 언니 남편의 아침 식사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이 부부는 긴 시간을 따로 밥 먹는 ‘따밥’하는 부부가 됐다. 언니 남편이 직장 생활을 하던 현역 시절 동안에는 문제가 안 됐다. 언니 남편 혼자 아침 간단히 먹고 출근하면 점심은 따로 해결하고 저녁만 같이 먹으면 됐다. 퇴직 이후, 남편은 습관대로 12시 정각에 점심을 먹었다. 남편을 위해 부인이 매끼를 식탁에 차려 놓으면 남편이 먹고 나중에 언니 혼자 따로 먹는 따로 밥 먹는 생활이 됐다. 따밥에 따방(따로 방 쓰는)부부로 살게 된 지도 이제 10여 년이 넘었단다. 같이 밥을 먹고 지낼 때는 잔소리도 많아 다툼으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따로 식사하면서 다툼도 없고 평화 유지도 쉬웠다. 대화가 없는 곳에 다툼이 있을 리가 없다. 익숙함이 가져다준 또 다른 의미. 이게 바로 졸혼이었다. 작년 말 어느 날, 밤늦도록 영화를 보던 언니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부부가 죽는 날까지 ‘따밥’하다 죽을 것을 생각하니 인생 절반을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에 슬퍼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언니는 그날 중대한 결심을 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방 쓸까요?” 그것도 살며시 껴안으며 말을 건넸다고 했다. 언니 남편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사실은 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당신이 거절할까 봐 두려워서 못해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은 뒤 곧바로 한방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언니네 부부는 재혼한 부부처럼 조심하며 싸우지 않고 신혼 생활을 하고 있다. 전화로 언니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장미꽃 한 다발을 주문했다. ‘화려한 신혼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리본에 써서 언니에게 보내드렸다.
- 2018-07-2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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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화와 영양을 고려한 ‘실버 푸드’ 시장이 뜬다
- 살아가는 데 음식은 꼭 필요하다. 요즘은 과잉 섭취 때문에 고민이거나 다이어트가 큰 관심사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집 안 물건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간소하게 먹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TV를 틀면 넘쳐나는 쿡방, 먹방 프로그램.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은 전문가가 나와 요리법을 시연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엔 음식점을 컨설팅해주거나 여행과 결합해 외국의 맛집까지 탐방하는 등 계속 진화 중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이 미식과 여행에 관심이 커졌다는 방증이다. 먹는 즐거움이 영원히 가능하면 좋겠지만, 시니어는 노화로 인한 신체 기능 저하로 식생활에 제한이 생긴다. 그래서 최근 고령화 사회가 심화되며 시니어를 위한 식품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시니어 식품 시장 규모 갈수록 늘어 바나나, 두유, 두부, 청국장의 공통점은? 고령화로 매출이 성장하고 있는 식품들이다. 1인 가구와 고령화로 간편식을 찾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식품의 매출 판도도 달라지고 있다. 과일도 깎지 않고 씻기만 해서 간편하게 먹는 과일이 인기다. 유통회사나 식품 관련 기업들은 이런 흐름을 파악하고, 매장 진열은 물론 시니어 식품 시장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현재 65세 이상 인구가 7명 중 1명인 고령화 사회다. 또 황혼이혼이나 사별로 인한 노인 1인 가구도 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삼시 세끼는 필수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시니어 식품 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기업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시니어의 식생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의 유명한 욕구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하위 단계에서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즉 가장 하위 단계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인 안전 욕구가 충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인들의 식생활 사정은 심각해 보인다. 2015년 질병관리본부가 노인 28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6명 중 1명은 영양 섭취가 부족했다. ‘영양 섭취 부족’은 1일 권장 열량 섭취량(남성 2000kcal, 여성 1600kcal)의 75% 미만에 해당하고, 칼슘 등의 섭취량이 평균에 못 미치는 경우를 말한다. 칼슘은 전체의 약 82%, 지방은 약 71%나 부족했다. 단백질이 부족한 노인도 약 31%나 됐다. 이렇게 영양이 부족하면, 신체의 대사기능이 저하되고 면역체계에 이상이 온다. 최근 한 기업에서 40~80대 부모를 둔 자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절반이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귀찮다(26%), 소화가 안 된다(22%)는 이유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니어는 연령대에 따라 건강상태도 다르다. 스스로 식재료를 준비하고 식사를 챙길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노화로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혼자 식사를 챙기지 못할 경우가 문제다. 나이가 들면 왜 식사하는 데 불편함을 겪게 되는 걸까. 그것은 몇 가지 신체 변화 때문이다. 우선 미각의 변화다. 혀에서 맛을 느끼는 미뢰가 크게 줄어들면서 미각이 둔해지는 탓에 짜거나 달게 먹게 되어 당뇨와 고혈압 위험이 커진다. 그다음으로는 저작(咀嚼) 장애다. 치아와 잇몸 손상으로 음식 씹기가 힘들어 영양 섭취가 어려워진다. 또 연하(嚥下) 장애(삼킴 장애)로 음식물이 기도나 폐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소화액이나 연동운동 감소로 인한 소화 장애도 생긴다. 이러한 여러 장애 때문에 고령자를 위한 별도의 식품과 서비스 개발이 시급한 것이다. 실버 푸드가 발달한 일본 고령친화산업 진흥법에 따르면, 고령친화식품은 ‘노인을 위한 건강기능식품 및 급식 서비스’로 정의된다. 건강기능식품, 특수의료용도식품, 두부류 및 묵류, 전통 및 발효식품, 인삼과 홍삼 제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농림축산식품부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고령친화식품 시장 규모는 출하액 기준 2011년 5104억 원에서 2015년 7903억 원으로 약 55%나 급증했다. 2015년 국내 전체 식품 시장 규모로 보면 아직 1.5% 수준으로 비중이 미미하지만, 고령화 속도로 볼 때 급성장이 예상된다. 같은 보고서에서 소비자 조사 결과를 보면, 고령친화식품은 영양분과 소화 용이, 저작과 연하 용이 순으로 중요했다. 또 60세 이후 건강한 간식을 챙겨 먹거나, 영양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식품의 소비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시니어를 위한 식품과 서비스 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일본은 전체 인구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노인이다. 이들을 위한 고령친화식품을 일본에선 개호(介護)식품이라 표현한다. 일본개호식품협의회는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UDF, Universal Design Food)로 식품의 굳기와 점도를 고려해 규격에 맞춘 식품을 판매한다.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는 쉽게 씹을 수 있는 1단계부터 삼킬 수 있는 4단계까지 구분된다. 이후 2014년부터 개호식품은 스마일케어식(Smile Care Foods)으로 명칭을 바꿔 판매 대상을 넓혔다. 개호 예방을 위한 식품부터 무스나 젤리 상태의 식품까지 범위도 넓다. 이런 음식들은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없이 물성을 변화시킨다. 심화되는 고령화, 실버 푸드 시장 온다 나물 종류의 채식을 좋아하는 시니어도 있고 육식을 선호하는 노인도 있다. 또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은 식단 조절이나 영양 관리를 해줘야 한다. 그래서 고령자를 위한 식품은 만성질환을 위한 건강식, 끼니를 챙기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간편식, 저영양 상태를 보충하는 영양식, 건강이 악화된 사람의 간병식 등 세분화되어야 한다. 신체가 쇠약해져 이동이 어려우면 식재료를 사러 다니기도 힘들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구매 난민, 쇼핑 난민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편의점이 진화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배달하고 노인을 위한 식품을 판매하거나 이동 점포까지 운영한다. 또 상품배달뿐 아니라 고령자 혼자서 하기 힘든 전구 교체 등의 집안일까지 지원해 인기다. 우리나라도 최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고령친화식품 한국산업표준(KS)을 제정했다. 식품기업들도 고령자를 위한 식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요즘 시니어는 미식과 간편식을 즐긴다. 고령친화식품 시장은 이제 막 걸음을 뗀 상태이지만, 시니어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식품과 서비스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 2018-07-05 1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