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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의 추천 전시, 도서, 영화, 공연
- ◇exhibition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빛·소리·풍경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올해로 120주년이 되는 대한제국 선포(1897년)를 기념하며 대한제국 시기를 모티브로 덕수궁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조형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강애란, 권민호, 김진희, 양방언, 오재우, 이진준, 임수식, 장민승, 정연두 등 한국 작가 9명의 작품 9점이 덕수궁 내에 전시된다. 덕수궁 대한문부터 그동안 일반인에게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함녕전 앞 행각까지 전시는 관람객들의 입장 동선에 따라 이어진다. 특히 함녕전 앞 행각에서는 오재우의 VR 작품 을 행각 내부에서 누워 체험할 수 있다. 9월부터 11월 사이에는 참여작가를 초청해 일대일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뿐만 아니라 전시와 연계해 특별강연과 영상 상영, 공연 등이 개최된다.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 명작전:NUDE 일정 12월 25일까지 장소 소마미술관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는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등 4개의 미술관을 운영하며 영국 미술을 포함한 세계 최고 수준의 근현대 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소마미술관은 ‘누드’를 주제로 테이트의 작품을 엄선해 18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의 누드 변천사를 살핀다. 윌리엄 터너, 헨리 무어 등 영국을 대표하는 30여 명의 작가를 포함해 세계적 거장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오귀스트 로댕, 루이즈 부르주아 등 총 66명의 작품 122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역사적 누드’, ‘개인 누드’,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누드’, ‘에로틱 누드’ 등 누드를 시대별·경향별로 구분한 총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book 유토피아(미나토 가나에 저·영상출판미디어(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소속된 커뮤니티도, 가치관도 다른 여성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등장인물은 표면적으로는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 선의는 선의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긋난 배려, 쌓이기만 하는 분노, 반전하는 선의 등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묘사했다. 감정이라는 무기(수전 데이비드 저·북하우스) 감정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수전 데이비드가 보다 단순한 삶에 대해 말한다. 아울러 감정 활용법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가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감정의 핵심 가치를 약화시키는 부정적 요소를 잠재우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을 사례와 이론을 근거로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다. ◇movie 남한산성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등 연기라면 이미 증명된 영화계의 흥행 보증 수표들이 대거 출연한다. 이들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했던 47일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은 신념이 달랐던 두 신하를 중심으로 팽팽한 구도 속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다. 같은 충심을 지녔음에도 다른 신념으로 팽팽히 맞서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팽팽한 대립이 긴장감을 선사한다. 5개월의 혹한을 견디며 1636년 병자호란을 재현한 은 생생한 볼거리를 선보인다. 개봉 10월 3일 장르 드라마 감독 황동혁 출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등 어메이징 메리 수학 천재인 7세 ‘메리’를 두고 행복한 삶을 위해 수학자의 길을 반대하는 삼촌 ‘프랭크’와 세상을 바꿀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메리의 할머니 ‘에블린’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에서 세심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마크 웹이 메가폰을 잡으며 다시 한 번 영화를 통해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에서는 의 슈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로 잘 알려진 크리스 에반스가 조카 바보 삼촌으로 변신해 ‘프랭크’ 역을 맡은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실제 천재 수학자들의 인터뷰와 자문을 통해 영화에 사실감을 더했다. 수학적 능력을 지닌 영재들을 스크린 밖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개봉 10월 4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크 웹 출연 크리스 에반스, 맥케나 그레이스, 린제이 던칸 등 ◇stage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뜨겁게 사랑했던 시인 ‘백석’을 잊지 못해 평생 헤어지던 순간을 기억하며 사는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백석의 시와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로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여운을 선사한다. 장소 대학로 유니플레스 일정 10월 19일~2018년 1월 28일 연출 오세혁 출연 강필석, 정인지등 엘리펀트 송 정신과 의사 로렌스 박사의 실종 사건을 둘러싸고 병원장 그린버그와 마지막 목격자인 환자 마이클, 그리고 그의 담당 수간호사 피터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강렬한 스토리, 팽팽한 긴장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9월 6일~11월 26일 연출 김지호 출연 이석준, 고영빈, 고수희 등 M. Butterfly 국가 기밀 유출 혐의로 법정에 선 전(前) 프랑스 영사 버나드 브루시코의 실화를 모티브로 푸치니 오페라의 을 차용해 무대화한 작품이다. 남성과 여성, 서양과 동양 등의 주제를 기반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심리와 욕망에 대해 그렸다.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일정 9월 9일~12월 3일 연출 김동연 출연 김주헌, 김도빈, 장율 등 사랑해요 당신 연기 배테랑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배우의 리얼한 부부 연기를 무대 위에서 만난다. 아내와 자식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과 다르게 항상 퉁명스러운 남편이 아내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장소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일정 9월 29일~10월 29일 연출 이재성 출연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등
- 2017-10-1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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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인의 애인 ‘주모’를 만나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
-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 2017-10-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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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에서 만난 사람] 민 김 오픈뱅크 행장, 미주 한인 은행가의 대모
- 2014년, 금융권의 유리천장을 깨고 최초의 여성 행장이 탄생해 한국에서 연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때 다소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이미 2006년에 첫 여성 행장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당시 3명의 여성 행장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민 김(58·한국명 김민정) 오픈뱅크 행장. 그녀는 미주 한인 은행가의 대모로 통한다. ‘1호 여성 행장’ 타이틀을 얻기 전부터 최초 여성 지점장, 최초 여성 전무, 한인 여성 최고 연봉 등의 수식어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170cm가 훌쩍 넘는 키에 카리스마 넘치는 미모는 여전하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 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뱅커이자 여성 뱅커들의 로망. 민 김 행장을 LA 다운타운 오픈뱅크 본사에서 만났다. 그녀만의 ‘왕좌의 게임’ 2010년 민 김 행장은 당시 한인 최대 은행이었던 나라뱅크의 행장직을 내려놓고, 폐업 위기의 FS 제일은행(현 오픈뱅크)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인 은행권은 술렁였다.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때였다. 은행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내려온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아직도 ‘왜’냐고 묻는다. “행복하지 않았어요. 늘 가면을 써야 했고 책임감과 의무감만이 나를 짓눌렀죠. 이러다가는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에 사표를 던졌어요. 집에서 놀고 있을때 FS 제일은행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행장을 맡아줄 수 있냐고.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러겠다고 했죠. 내가 좀 황당한 제안을 하기는 했는데…(웃음).” 민 김 행장이 제안한 것은 수입의 10% 사회 환원, 전 직원의 사회봉사 의무였다. 일반 기업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사회는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이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해답은 민 김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10% 사회 환원도 일단은 수익을 내고 볼 일이었다. 은행 이름도 새로 내걸었다.‘오픈뱅크’.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민 김 행장의 신앙과 기업관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는, 아주 특별한 은행의 탄생이었다. 고층 빌딩 행장실에서 하이힐을 신고 일했던 민 김 행장은 운동화로 갈아 신고 다시 필드로 내려와 뛰기 시작했다. 부와 명예의 왕좌 대신 택한 것은 순수한 열정과 자유였다. “가장 먼저 부실대출부터 정리했어요. 막대한 부실대출을 1년여에 걸쳐 과감하게 정리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죠. 부실한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발로 뛰며 투자자들을 만나 우리의 비전을 어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최선을 다해 달릴 수밖에 없었죠.” 민 김 행장 취임 이듬해였던 2012년, 오픈뱅크는 창립 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고 1100만 달러 증자에 성공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2012년 2억 달러였던 자산은 2013년 3억 달러, 2014년 5억 달러, 2016년 7억 달러로 뛰어올라 2017년 2분기 말 현재 8억3500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경영을 맡은 7년 동안 자산이 무려 800%나 증가한 것이다. 돈이 아닌 사람을 생각하는 경영 이사진은 점점 고민에 빠져갔을 터다. 민 김 행장이 내걸었던 조건, 10% 사회 환원은 수익이 커질수록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100만원에 10만원은 기분 좋게 기부할 수 있죠. 그런데 점점 기부하는 돈이 늘어나 1억이 되고 10억이 되면… 이건 선뜻 내놓기 힘든 액수가 돼요. 참 감사하게도 이사회에서는 변함없이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누는 기쁨을 알고 함께 즐기고 있습니다.” 오픈뱅크는 올해 말이면 100만 달러(약 10억원)를 사회에 환원하게 된다. 민 김 행장은 전문 부서를 따로 두고 이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민 김 행장은 모든 일에서 ‘사람’을 우선시한다. 처음 은행을 맡을 때도 인재를 영입하는 일에 주력했다. 단 ‘건강한’ 인재라는 단서를 붙였다. “스펙보다는 오픈뱅크의 비전을 이해하고 함께 뛰어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어요. 같이 일하면서 같은 기쁨을 맛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원들에게 한 달에 6시간 사회봉사를 의무로 하고 있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억지로 하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직원들의 표정이 점점 행복한 얼굴로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은행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요. 이런 것들이 영업실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경영자로서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이지요(웃음).” 민 김 행장은 소형 은행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것을 오픈뱅크의 성공 비결로 꼽는다. 의사결정의 신속성, 고객밀착형 마케팅 등이 그것이다. 고객을 만날 때도 대형은행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그 대신 오픈뱅크의 비전과 기업의 이미지를 전하라고 교육한다. 이웃과 커뮤니티에게 좋은 기업이 되고 싶은 ‘진심’을 말이다. “한인들과 한인 은행과의 관계는 특별하죠. 한인 은행은 한인들의 땀과 눈물로 성장했어요. 밤새워 투잡, 쓰리잡 뛰어서 모은 돈을 들고 은행으로 오셨으니까요. 조그만 비즈니스라도 해보려 할 때 미국 은행들의 문턱이 얼마나 높았겠어요. 영어가 서툰 이민 1세대에게 한인 은행은 막힌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기도 했죠. 저 또한 중3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왔고 이곳 LA 한인타운에서 자라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인 은행은 어르신들이 영어로 된 편지를 가지고 와도 기쁘게 읽어드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오픈뱅크는 바쁜 이민생활에 한 번도 가족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30가구를 선정, 멕시코 크루즈 여행권을 선물했다. 기업 이벤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3박 4일간 동행한 민 김 행장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배 안에서 그분들과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일단은 너무나 즐거웠고요. 저희 스테프까지 12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모두가 가슴에 묵직한 것을 하나씩 담아왔습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커뮤니티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어요. 얼마나 친해졌는지 형님, 조카가 많이도 생겼어요.” ‘늙어감’이 즐거운 이유 USC를 졸업하고 윌셔은행(현 뱅크오브호프)에 입사했던 때가 1982년.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보수적이기로 손꼽히는 한인 은행가에서 최초로 여성 행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이 많았을까 싶지만 정작 그녀는 덤덤하다. “사실 한인 사회 첫 여성 회계사가 꿈이었는데 다른 분이 되셨지 뭐예요. 급히 선회한 것이 은행장이었어요(웃음). 주위에서 남성 위주의 직장에서 어렵지 않았냐 하시는데 저는 그곳에서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행복했습니다.” 심각한 취업난 속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민 김 행장은 ‘남들 보기에 멋있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라’고 조언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은행에 입사하려고 했지만 줄줄이 다 떨어졌어요. 로컬의 한인 은행에 겨우 붙었는데 제가 할 일은 창구에서 손님을 맞는 텔러였죠.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러나 나중에 은행장이 될 건데 뭐 어때 하며 생각을 바꿨죠.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시작부터 뭔가 폼이 나지 않으면 안 하려고 하더군요. 남 보기에 그럴싸한 일을 하려니 더 그렇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애정이 있으면 열심히 일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면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럼 인정받는 거죠.” 민 김 행장은 신입사원 시절의 자신을 기억한다. 출근길은 늘 설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순간순간이 즐거웠다고. 남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삶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더라는 값진 경험을 한 그녀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현재의 삶이 그저 귀하고 감사하다. 민 김 행장은 65세가 되면 아름다운 은퇴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은퇴를 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신앙인으로서 또 경영인으로서 겪었던 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이 아닌,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말해주고 싶어요.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내가 손녀만 셋이랍니다. 우리 딸과 아들이 어렸을 때는 많이 놀아주지 못했는데 사실 그게 너무 아쉬워요. 미안한 마음에 대신 손녀들하고는 틈만 나면 같이 놀아줍니다(웃음).” 민 김 행장은 늙어가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한다. 주말이면 할 일 없이 집에서 손녀들과 뒹구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막역한 친구들과의 수다가 웬만한 철학서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끔 남편과 팝콘 먹으면서 하는 영화관람도 예전엔 몰랐던 재미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니 주저 없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민 김 행장. 은퇴 전까지, 오픈뱅크를 커뮤니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의 롤모델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지막 꿈이다. 아마도 민 김 행장의 출근길이 다시 설레어진 이유일 것이다.
- 2017-10-0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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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제향날>의 배우 강애심
- 거친 역사와 함께 살아온 작가 채만식의 후기작 이 무대에 오른다. 남편을 잃고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최씨’. 그를 연기한 배우 강애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연출을 맡은 최용훈씨와는 오래된 친구이자 신뢰하는 동료인데 같이 하자고 해서 무조건 승낙했어요. 사실 작품도 안 보고 결정했죠. 너무 솔직했나요?(하하). 이후에 작품을 읽어보니 1930년대 작품 같지 않게 깔끔하더라고요. 다만 무대 위에서 구현할 때 단순한 구조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었죠. 다행히 수준 높은 감각과 내공 있는 연출이 더해져 입체적인 작품으로 탄생했어요. 깊이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 즐겁게 작업하는 중이에요. ‘최씨’는 어떤 인물인가요? 1930년대의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70세 할머니예요. 동학농민운동을 하던 남편을 총칼에 잃고 하나뿐인 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피신해 생사도 모르고 살아가죠. 그 와중에도 굳건히 손자들을 키우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대지와 같은 여인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70세의 연륜, 그 시대의 말투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관객과 공감할 수 있도록 ‘최씨’라는 인물에 신경 썼어요. ‘최씨’의 말 중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나요? 남편이 동학농민운동을 하느라 재산을 반이나 날렸는데도 “뭐, 그까짓 재산이야 있으나 마나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과 아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머지 재산을 탕진한 와중에도 “다 제가 객지에서 요긴하게 쓰느라 팔아 없앤 것이니까 원통할 것은 없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이에요. 물질 만능 시대를 살면서 돈에 연연해하지 않고 호탕하게 “그까짓 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멋집니다. 함께한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무대 위에서의 작업은 팀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죠.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수많은 디테일과 풍부한 감정들, 그리고 배려를 느끼고 알게 하는 게 무대 위의 삶이니까요. 극의 구조상 감정을 나누는 배우는 두 명뿐이어서 호흡도 잘 맞고 별 어려움 없이 즐겁게 연습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머지 배우들도 서로 즐겁게 조언해가며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어떤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연극인가요? 연령층과 상관없이 이 땅에 사는 모두에게 권하고 싶어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고, 중년층과 노년층에게는 슬픈 역사 속 희생양이 되어서도 자식들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더불어 근대문학의 말맛도 맛깔스럽게 녹아 있어 수준 높은 문학을 접하는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해요. 장소 백성희장민호 극장 일정 10월 12일~11월 5일 연출 최용훈 출연 강애심, 김용선, 박윤희, 최광일, 백익남, 김정환 등
- 2017-09-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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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고인에게 상복(喪服)을 입힐까
-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이라고 알고 있는 수의(壽衣)는 우리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단어다. 엄밀히 따지면 장례 과정에서 염과 습을 할 때 입히는 옷이라고 해서 습의(襲衣)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수의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단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변질된 것은 또 있다. 바로 삼베수의의 등장이다. 현재 우리 장례문화에서 삼베수의는 표준이 된 상태. 일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삼베수의는 가격이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대통령 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도 황금색 삼베수의를 입고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왜 삼베수의가 문제라는 걸까? 최근 한 편의 논문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의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일제가 죄수복을 상징하는 삼베로 짠 수의를 어떻게 우리나라에 확산시켰는지 확인하도록 해주는 연구였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한 권의 책 에 주목했다. “삼베수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5년 발간된 이 책을 통해서예요. 김숙당이 쓴 최초의 전문 재봉 서적인데 그동안 김숙당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조사를 통해 식민통치 기관이었던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확인했죠.” 김숙당은 당시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삼베수의를 이 책을 통해 강조한다. 최 교수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고, 삼베수의가 등장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아니겠냐고 추측한다. “결국 그 후 의례준칙을 통해 삼베수의는 명문화돼요. 기록을 살펴보면 1934년에 의례준칙이 제정됐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사용한다고 규정했죠. 일제는 이렇게 규칙을 정해놓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의례준칙시행서를 통해 지방별로 이 규칙을 실행하도록 강제했어요. 각종 단체와 기관도 동원됐습니다. 당시 이렇게 절약된 비단이 일본 신사에 바쳐졌다는 기록도 있어요.” 일제가 준 영향은 우리의 장례문화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좌(靈座) 주변이 국화로 장식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장례에서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대신 종이꽃을 사용했다. 유가족이 팔 완장과 가슴에 리본을 착용하는 것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학계에선 일제가 군중이 모이고 군중의 활동이 만세운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장례를 가족 중심으로 간소화하고 구분을 위해 가족에게 완장을 차게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최 교수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피해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장례에서도 고인이 마지막으로 삼베수의를 입고, 국화꽃으로 조문을 받는 것이 답답했고, 완장과 리본을 찬 상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삼베는 죄인을 위한 옷감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수의로 어떤 옷을 입었을까.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가장 좋은 옷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삼베수의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이 학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복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습니다. 당연히 비단과 같은 재료가 많이 쓰였고요.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도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죠.” 실제로 조선시대 때 삼베로 만든 옷은 범죄자들이 입는 죄수복으로 쓰였다. 조상들이 삼베옷을 ‘상복’으로 사용한 것은 상주나 가족은 ‘부모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자 불효자’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식된 도리로 스스로 고행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상복을 우리는 고인에게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베수의 관습이 지속된 것은 일제의 의례준칙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식물성 의복 또는 수의를 갈아입히고 입관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삼베수의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삼베수의가 정착된 배경 중 하나로는 삼베가 대마라는 특수한 작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마는 환각제인 대마초의 재료가 되는 식물이기에 1977년 국가에서는 대마관리법을 제정하고 대마 재배를 허가제로 변경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늘어나는 삼베수의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좌지우지하는 유통상들에게는 커다란 이권이 됐다. 영원히 입는 옷, 수의 그렇다면 수의는 조상들에게는 어떤 옷이었을까. 최연우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수의를 인생에서 마지막에 입는 옷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영원히 입는 옷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었죠. 육체가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입고 있다가 제사나 차례와 같은 강신(降神) 과정에서 입고 나타나는 옷도 마지막에 입었던 수의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 예서를 살펴보면 환갑이나 진갑이 되면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가장 좋은 옷을 입기 위해 관리는 관복을, 유학자들은 하얀 심의를 입었다. 여성은 혼례복으로 입던 원삼을 입기도 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한 종가집 종부는 혼례식에 입었던 옷을 수의로 다시 준비하면서 “땅으로 시집간다”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는 전통복식들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색상의 옷들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수의를 지키려는 노력은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출토복식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에게 우리의 전통 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고, 또 전통 수의의 복원이 이뤄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었던 곤룡포 수의다. 김 전 대통령 생전에 단국대학교 측이 이희호 여사에게 제안해 미리 준비해놨던 전통 수의가 장례식에서 사용됐다. 곤룡포는 조선시대 때 국상에서 망자(임금)가 입었던 수의다. 단국대 측은 아예 전통복식을 따르는 수의를 보급하기 위해 ‘단국상의원’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전통 예복을 판매하고 있다.
- 2017-09-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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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 있는 길] 종로통 구석구석 옛 기억이 살아나다
-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2017-09-1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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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전령사’ 매미의 세레나데
-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뭐지? 생각해 보니 그동안 눈만 뜨면 여기저기서 지천으로 들렸던 매미의 노랫소리가 뚝 끊겨 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집은 북한산 자락에 있어 매년 여름이면 시끄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매미가 노래를 했다. 이웃집 할머니께선 "아이구, 시끄럽다."고 불평도 하시지만, 필자는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매미 소리가 참 반갑고 듣기에 좋았다. 아직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오늘 그 많던 매미가 다 어디 가고 노랫소리가 이렇게 한꺼번에 사라졌단 말인가? 매우 서운함이 느껴진다. 여름 내내 가깝고 먼 곳에서 합창하는 매미 소리를 매우 좋아했다. 올해도 필자는 필자만을 위한 매미의 세레나데를 즐겼다. 어느 날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바로 필자 귓가에 앉은 듯 온 집안을 울리는 커다란 매미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스테레오로 웅장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처럼 깜짝 놀랄 만큼 컸는데 베란다 문을 보니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가 붙어 소리를 내고 있다. 단지 딱 한 마리일 뿐인데 작은 우리 집이 쾅쾅 울리고 있다. 멀리서 들리던 것과 다르게 귓전에서 울리는 우렁찬 매미 소리에 필자는 즐거워졌다. 다가가면 날아갈까 봐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 사이를 두고 마주 앉았다. 매미는 필자가 보이지 않는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건 꼭 필자만을 위한 세레나데인 것 같아 자꾸만 미소가 떠오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가깝고 먼 나무와 숲에서 들리던 소리와 또 다른 기쁨을 매미가 선사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을 지치지도 않고 "맴맴~" 노래하다가 필자의 기척에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에이, 좀 더 조용히 있을 걸 후회가 되어 베란다 문을 열고 날아간 매미 쪽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우리 집 방충망에 날아와 필자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간 매미가 고마웠고 다시 와주기를 바랐다. 매미의 노랫소리에는 어떤 규칙 같은 게 있었다. 대체로 '맴맴맴'하고 여섯 번을 울고는 '매에에엠'으로 마무리를 했다. 여러 번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일정한 패턴으로 소리를 내고 있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미의 일생에 관한 글을 읽고는 애잔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매미로 태어나기까지 7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왔다. 수컷 매미가 목청껏 울어 짝짓기에 성공하면 매미의 알은 나무줄기 속에 있다가 다음 해 6~7월에 유충이 되고 땅속으로 들어가 7년 정도 변태를 거듭하며 굼벵이로 지내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긴 세월 굼벵이로 잘 버틴 후 땅에서 나와 매미가 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지만 결국 7~20일만을 살고 짝짓기를 한 후 생을 마감한다는 비운의 곤충이다. 우리가 여름마다 듣는 매미 소리를 내기 위해 한평생 준비하고 반짝 빛나는 시간을 가진다니 안타깝다. 이제 노래를 멈춘 매미를 아쉬워하며 매미의 노랫소리 하나에도 기뻤던 필자의 감수성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음이 감사하다. 올여름엔 이제 매미의 노랫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서운하지만, 열심히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며 아름다운 도약을 할 날을 기다리는 매미의 다음을 기다리기로 한다. 필자만을 위한 세레나데를 불러준 매미야~ 고맙다.
- 2017-08-2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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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식에 대한 추억
- 올해 77세로 미수를 맞는 남편과 필자는 다섯 살 차이다. 남편은 6․25전쟁 때 아버지가 납치된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가끔 아버지가 납치되기 전 자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다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즐겁게 하곤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장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필자는 남편이 6.25전쟁 전에 자장면을 먹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도 없고 또 오토바이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배달을 시켰으며, 중국집이 있기나 했냐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지방에서 개인 병원을 하신 필자의 아버지는 주말에나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의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살았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다른 집 아버지들도 주말에만 집에 오는 걸로 알았을 정도다. 어쨌든 그 당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필자의 외식에 대한 추억은 대학교 입학 후 영어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과 사먹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고 시절에도 빵집이나 광화문 근처 국수집에서 외식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에는 연애를 했던 남편과 함께 OB`s Cabin’ 같은 명동의 레스토랑에서 햄버그스테이크도 사먹었다. 다진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특별한 맛이었다. 그 당시 남편 사준 메밀국수를 먹다가 고추냉이(와사비)에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요즘은 아들네 식구가 주말에 오면 일하기가 싫어 외식을 하곤 한다. 메뉴는 주로 손주 입맛에 따라 결정한다. 손주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주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된장에 찍어 먹는다. 피자나 자장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이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전히 토종 식성이다. 밖에서 식사를 한 후 커피는 집에 와서 마신다. 일요일인 어제는 스파게티 소스가 있어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손주에게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어줬다. 겨자를 얹어주었더니 그건 안 먹고 김치만 먹는다. 이 다음에 연애할 때 겨자 못 먹으면 그 옛날 할머니처럼 쑥스러울 거라며 겁을 주며 먹어보라고 해도 손주는 먹어볼 시도도 안 한다. 제 엄마인 며느리의 토종 식성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이다. 요즘 식당이나 커피 집은 거의 프랜차이즈다. 외국엔 몇백 년 된 식당이 많다. 몇 대에 걸쳐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인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특별한 브랜드의 음식들을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그래서 누가 별다방(스타벅스) 커피를 먹으면 따라서 먹는 경우가 많다. 핀란드에는 각 가정마다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커피콩도 다르고 커피 내리는 방법도 달라서 당연히 획일화된 맛의 프랜차이즈 커피 집이 잘될 리 없다. 우리나라도 그 도시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으러 여행도 하고 관광사업으로도 연계되어 지방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2017-08-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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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하고 제일 잘 맞아
- 나이 들어 꼭 필요한 것이 ‘친구’라고들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나이 많은 분들이 한 말은 아니다. ‘그럴 것이다.’ 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세칭 젊은 노년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은 당장 80세 이상의 고령자 분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해야 한다. 주위에 80세가 넘으신 분들과 직접 대화를 해보면 친구가 없다고 한다. 아니 자연히 없어지더라고 말씀하신다. 살아 있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약주 한 잔 함께 나누지 못할 정도 건강이 뒷받침 되지 않는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이들은 자연히 멀어지더라고 한다. 게다가 친구 몇몇은 경제적 사정으로 만 원 한장도 수중에 없는 노인들이여서 만나기를 피하고 이런 사람들과 억지로 만나서 뭔 말을 하겠느냐고 한다. 농촌 마을도 별반 차이가 없다. 마을 경로당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이지만 농사일도 해야 하고 누군가 새로운 소식을 공급해 주지 않는 한 만날 이유는 점점 희박해진다. 텔레비전으로 사람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경로당의 모습보다 텅텅 비어있는 농촌 경로당을 자주 보면서 안타깝다. 친구는 힘 있을 때 돈 있을 때 친구가 필요하다. 올해 98세의 김형석 교수님의 ‘인생백년을 살아보니’ 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교수님의 강의 중 친한 친구 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가 유명한 철학교수다. 이중 한분이 이제 살날도 많지 않은데 우리 자주만나 친하게 지내자고 제의를 했다. 그런데 다른 한분이 말씀하시길 맞는 말이지만 친하게 지내다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면 남아있는 사람의 슬픔을 생각해 봤느냐며 그냥 이정도 친분으로 지내자고 했다고 한다. 인생의 저승길은 누구라도 동행인이 없다. 혼자 가야 한다. 불교경전에 인생이란 원래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는 의미의 독생독사(獨生獨死)가 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한역(漢譯)된 말이다. 카필라성의 왕자 싯다르타는 출가하는 날 자기와 함께 왕궁을 나온 마부 ‘찬나’에게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찬나는 ‘무서운 짐승이 우글거리고 길도 험한데 왕자님을 혼자 내버려두고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 말을 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찬나야 인생이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것이다. 어찌 동반자가 있겠느냐? 고 대답을 했다. 독생독사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필연적으로 인생길은 혼자다. 마음에 맞지 않는 친구와 마음을 맞추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과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자. 나는 나와 제일 잘 맞는다. 나이 들어 애완동물을 키우는 분들을 보면서 반려동물에게 너무 깊은 정을 주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애완동물은 사람보다 수명이 짧다. 자칫 정이 깊어지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슬픔에 복 받혀 거액을 들여 거창한 반려동물 장례절차를 치루지만 마음만 더 공허 해진다.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없다. 하지만 배우자의 죽음처럼 친밀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슬픔이 배가될 것이라는 점은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은 된다. 나이 들수록 혼자 노는 방법에 익숙해야 한다. 먹은 나이만큼 함께 살아온 자신이 가장 좋은 친구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먹고 혼자 산에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고독력 키우기다. 나를 알고 나와 친해지고 ‘나는 나하고 제일 잘 맞아!’ 라는 말을 연습하는 것이 노년을 잘 보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 2017-08-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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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수수죽과 옥수수빵 이야기
- 필자는 옥수수를 무척 좋아한다. 상앗빛의 알이 고른 옥수수를 하모니카처럼 들고 먹는 생각만 해도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상상이 돼 입안에 침이 고인다. 한창 잘 먹을 땐 앉은 자리에서 10개를 먹은 적도 있다. 시장에 가니 막 쪄서 올려놓았는지 커다란 솥 위의 쟁반에 윤기 나는 옥수수가 김을 내며 탐스럽게 쌓여 있어 한 봉지에 3개 들어 있는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는 필자에게 여러 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다. 필자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옥수수빵이 급식으로 나왔다. 요즘 빵처럼 생긴 게 아니고 노랗고 거칠거칠한 옥수수가루를 반죽해 손바닥만 하게 쪄낸 모양이었다. 후에 둥근 모양으로 급식시간에 나온 옥수수빵은 필자가 좋아하던 맛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도 필자가 먹었던 노란색의 거친 옥수수빵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같은 나이가 아니면 필자가 아는 옥수수빵을 모른다 하니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별로 없다는 게 못내 허전하다. 필자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대전에서 살았다. 우리 동네였던 대흥동 성당에서는 담장에 문을 만들고 그곳을 통해 사람들에게 옥수수죽을 나눠주었다.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도 많았고 전쟁고아도 많아 적잖은 사람이 옥수수죽 도움을 받았다. 우리 집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필자는 장난처럼 동네 친구들과 줄을 서서 옥수수죽을 받아먹어 보았다. 삶은 옥수수나 노랗고 거친 옥수수빵은 그 맛이 좋았지만 옥수수죽은 그리 맛있지 않아 더는 줄을 서지 않은 기억이 있다. 그때 성당 옆 담장에 길게 줄 서 있던 사람들의 행렬이 생각나는데 그땐 몰랐지만 배고픈 사람들이었으니 그리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맛있는 옥수수로는 단연 동해안 바닷가에서 맛보았던 것이 최고였다. 바닷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뜨거운 모래사장 위를 가녀린 할머니 한 분이 옥수수 함지를 이고 다니셨다. 옥수수를 좋아하는 필자는 여러 개 샀는데 먹어본 옥수수 중 그런 맛의 옥수수는 처음이었을 정도로 맛있었다. 할머니가 가신 후 좀 더 많이 살걸 하고 후회할 정도였다. 강원도 옥수수가 맛있다더니 할머니가 텃밭에서 딴 옥수수를 직접 쪄서 가지고 나오셨을 그 옥수수의 맛을 잊을 수 없다. 학창 시절 엠티로 자주 갔던 강촌에 친구의 세컨 하우스가 있어 작년 여름 피서를 그곳에서 했다. 주변 경관도 빼어나고 그림처럼 예쁜 별장이 부러울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구곡폭포도 시원했고 뒤편의 문배마을에서 맛본 동동주와 산채나물도 아주 맛있었는데 문배마을은 영화 처럼 6.25전쟁이 났을 때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지냈을 만큼 아늑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몇 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을 알지도 못하고 지냈다니 참 신기하다. 그 동네의 옥수수도 정말 맛있었다. 며칠 전 친구가 그 동네 옥수수를 택배로 받을 수 있다며 한 접은 너무 많으니 반접씩 사자고 했다. 반접에 택배비 포함 2만5000원이라 했다. 반접이면 50개일 텐데 그 많은 걸 어쩌나 했더니 한꺼번에 쪄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을 때 다시 살짝 찌면 된단다. 옥수수를 워낙 좋아하니 당장 주문했다. 택배로 온 옥수수 자루를 보니 어찌나 큰지 좋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했다. 50여 개나 되는 옥수수 껍질을 벗겨내는 것도 큰 일거리였지만 필자는 차로 만들어 마시면 혈압에 좋다는 옥수수수염을 따로 모아 채반에 널어 말리기도 하면서 아주 알뜰하게 손질을 끝냈다. 큰 들통에 두 번에 나누어 옥수수를 쪄낸 다음 식혀 비닐봉지에 서너 개씩 담아 냉동실에 쟁여뒀다. 가득 채워진 옥수수를 볼 때마다 흐뭇하다. 하루에 한 봉지씩 꺼내어 쪄 먹는 맛이 쏠쏠하고 그 맛에 행복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오늘도 옥수수를 먹고 있다. 아주 맛있게.
- 2017-08-17 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