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화 추상화가(52세)의 작품은 색채와 그림이 모두 인상적이다. 컬러풀한 색채는 열정과 에너지를 전하고, 역동적인 그림은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도 늘 밝은 기운을 발산해 주변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전시가 대부분 취소된 가운데, 고양시에 있는 한양문고의 ‘갤러리 한’에서 3월 3일부터 6월 8일까지 이선화
퇴직 후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하여 재취업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만난다. 학원에도 다니고 해설서나 문제집을 사서 독학으로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너무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시험을 치면 불합격하는 사람이 많다. 나이 많아 외우고 응용하는데 애를 먹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노후준비는 하루라도 빨리하면 할수록 좋
쓸쓸한 폐교였다. 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초등학교였으나, 시간의 물살이 굽이쳐 교사(校舍)와 운동장만 남기고 다 쓸어갔다. 적막과 먼지 속에서 낡아가다가 철거되는 게 폐교의 운명. 그러나 다행스레 회생했다. 미술관으로. 시골 외진 곳에 자리한 미술관이지만 1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날도 많다 하니 이게 웬일? 이곳에서 관람할 게 미술 작품만은 아니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등의 노래들로 국민가수의 삶을 살았던 김상희. 그녀는 196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 신분으로 가수 데뷔를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여성이 법학과 엘리트라는 점도 특별했지만, 그런 사람이 소위 ‘딴따라’ 가수를 한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감한 선택은 성공
제가 사는 곳은 나이아가라 폭포 가는 길목의 인구 20만 명이 사는 도시입니다. 온타리오의 많은 주택지처럼 계속 인구가 팽창해 집값이 많이 오른 타운입니다만 제 주거지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큰길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건물의 콘도를 구입했던 게 6년 전인데 한적하고 운치 있는 동네를 떠나 큰길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결심한 것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연 한국도자재단 대표가 후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1979년 늦가을부터 1980년 늦봄까지 궁정동에서, 한남동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세 번의 총질로 한국의 현대사는 암흑의 구렁텅이
젊은 시절, 중후함을 무기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배우 한지일(韓支壹·73). 그가 세월 풍파를 뚫고 나와 대중 앞에 섰다. 1세대 모델로서, 영화 중흥기 인기 배우로서 재도약을 꿈꾸는 파란만장했던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뭘 입을까 고민했는데 이 옷이 눈에 띄었어요. 있는지도 몰랐어요. 40년 만에 입어봐요. 잘 맞나요?”
오랜만에 꺼
육세라 씨는 170cm의 큰 키에도 단아함이 풍긴다. 알고 보니 1993년 미스코리아 출신. 전업주부로 산 기간이 길다지만 1998년까지 방송 생활과 모델 활동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KBS, SBS, MBC의 각종 프로그램에서 생방송 리포터를 했습니다. 백화점 전속 모델로도 활동했고 잡지 광고도 찍었어요. 1997년에는 서울모터쇼와 도로사업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연극을 보면서 울고 웃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나 이곳에서는 좀 다르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와 나를 알아간다. 배움의 영역에서 연극의 역할을 알차게 사용하는 교육연극협동조합 ‘재미사마’를 찾아갔다.
서울시 마포구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내의 몸짓교실. 교육연극협동조합 재미사마(이하 재미사마)의 신체 및 이미지 훈련 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