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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난로
- 혹한을 이기는 필자만의 비장의 무기가 있다. 휴대용 손난로이다. 여름철에 올해 유행했던 손풍기가 유용했으므로 겨울철에는 손난로가 제격이다. 손풍기는 젊은 여자들이나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편견이다. 더우면 노인이라도 손풍기를 쓸 일이다. 겨울에 손난로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핫팩이 아니라 손난로이다. 금속으로 되어 있고 안에 솜이 들어 있다. 솜에 라이터 기름을 넣고 불을 붙여 주면 하루 종일 안에서 타면서 열을 낸다. 너무 뜨거워서 헝겊으로 된 케이스가 있다. 케이스에 넣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된다. 아침마다 기름을 넣고 불을 붙여주는 작업이 번거롭지만, 한번 쓰고 버리는 핫팩에 비해 친 환경적이다. 손난로는 작년 신설동 풍물시장에서 샀다. 한 개에 1만 원 정도 준 것 같다. 요즘은 이런 게 있는지 몰라서도 못 사고, 봐도 무엇에 쓰는 건지 몰라서 못 사고, 파는 곳도 찾기 어려워 사기 어렵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애용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땐 그게 뭔지 잘 몰랐다. 어릴 때는 혈액순환이 왕성할 때였으므로 손난로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손난로의 단점은 폐쇄된 공간에 가면 은근히 기름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작년 겨울에 쓰다가 그동안 묵혀 두어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다. 헝겊 케이스에 밴 냄새일지도 모른다. 세탁도 고려해볼 일이다. 순수한 기름 냄새도 아니고 묘한 노인 냄새가 난다. 돌이켜 보니 할아버지에게서 났던 그 냄새였다. 처음엔 주변에 이상한 냄새가 나서 필자도 킁킁 거렸는데 알고 보니 손난로에서 나는 냄새였다.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서 실내에 여러 사람이 모이는 날은 안 가지고 외출한다. 보통 때는 이 손난로가 아주 유용하다. 장갑을 끼어도 손이 시린 날이 있다. 그런 날 손난로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이다.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경험상 목 부위, 발목 부위, 손 목 부위가 추우면 몸이 전체적으로 차가워지는 것 같다. 그리 춥지 않아 사무실에 별 준비 없이 갔다가 손난로를 안 가져온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 으슬으슬 감기 끼가 있었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다 보니 몸이 얼음처럼 차가운 것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위스키 한잔 하니 제 컨디션이 돌아왔다. 겨울철 추운 날씨로 인한 체온 저하는 상당히 몸에 안 좋은 것 같다. 아주 추운 날은 단단히 입고 가니 추위를 덜 탄다. 그러나 어설프게 추우면 옷도 허술하게 입고 나가서 추울 수 있다. 눈 오는 날은 대부분 따뜻한 편이지만, 습도가 높으면 으슬으슬 더 추울 수도 있다. 스칸디나비아에 갔을 때 기온은 그리 낮지 않은데도 틈만 있으면 파고드는 추위에 고전한 적이 있다. 그런 추위가 더 무섭다. 연탄 배달 봉사를 간 날 하필이면 손난로가 꺼져 있었다. 차디찬 연탄을 들어 나르는데 손이 시렸다. 아침에 분명히 기름을 넣었는데 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추운 날씨에 산에 간 날도 손난로를 단단히 믿고 갔는데 중간에 꺼져 있어 제 구실을 못했다. 오래되어 성능이 저하된 모양이다. 이런 날은 아예 핫팩과 손난로까지 완전 무장하고 가기로 했다. 요즘은 핫팩이 흔하다. 약국에서도 팔고 편의점에서도 판다. 군대시절 혹한 속에 훈련 받던 때 핫 팩 하나만 있었어도 견딜 만 했을 것이다. 하긴 고궁에 가보면 옛날에는 아무리 아궁이와 화로에 불을 땐다지만, 왕도 겨울에는 춥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요즘 우리는 호강하는 셈이다. 몸이 차서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으면 1000원에 산 핫팩이 충분히 제 구실을 한다. 집에서 찾아보니 작년 것도 있고 몇 년 된 것도 있는데 오래 된 것은 전혀 효과가 없고 성능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 해에 다 써야 하는데 없어도 그만이니 두고도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쓸모도 없다. 일단 핫팩 재고부터 아침마다 시험해 보고 작동이 되면 가지고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손난로를 기름 채워 쓸 작정이다.
- 2017-12-2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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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 고시 폐지에 대하여
- 1968년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 모임이 있다. 남녀공학인 대학에서 몇 명 되지않는 여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느라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시만 해도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는 여학생 전용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 지금은 대학로라 불리는 학창시절 동숭동을 떠올리면 유명한 학림다방이며, 중국집 진아춘,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학교앞 개울이 마치 흑백영화가 지나가는 것처럼 생생하다. 친구 모임은 문리대에서 이과 계열은 제하고 문과만 모이는데 각과에 평균 두명 정도라 영문, 불문, 국문, 심리, 사학등을 모두 다 합쳐도 스무명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외국 간 친구를 빼고 지금 만나는 친구들은 열 명 정도이다. 거의가 캠퍼스 커플들이고 남편들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지 출세도 하고 또 사업을 해서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친구들이다. 친구들은 몇 십 년을 만나도 성실한 모범생의 모습들은 변하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도 성공해서 모두 능력 있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60년대 당시 남학생들이 데모로 열을 올릴 때 여학생은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현재도 그 때 즐긴 독서는 내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길러주었다.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해 단순히 짐작하는 것과 독서로 기른 상상력으로 짐작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친구의 아들은 현재 서울대 법학 대학원 교수로 있는데 사법시험 존폐에 관하여 사법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의 주장은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과거를 중심으로 사람을 등용해 왔지만 그때는 모든 제도나 교육이 발달 되어 있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발전 되어 있는데 옛날처럼 과거제도를 통하여 사람을 뽑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법고시를 폐지하는 대신 로스쿨을 만들어서 법조인을 키우지만 로스쿨의 학비가 너무 비싸서 금수저들만 다닐 수 있다는 불평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금수저 아닌 집단에서는 아직도 사법고시 폐지를 반대하는 운동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폐지 될 때가 온 것 같다. 과거제도는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당시로선 선진적인 제도였지만 모든 사람을 상대로 동일한 시험을 치러 성적으로 선별한다는 아이디어는 근대 문명의 다양한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 필자는 여고 시절 법대로 진학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힘들어 보였는지 내가 크면 법관이 되어서 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법대를 지원하는 여학생이 거의 없었고 아버지께서도 우선은 영문과를 들어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셔서 그대로 따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된다.
- 2017-12-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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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여배우의 고독사
- 한 때 유명했던 여배우가 58세에 고독사 했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있었다. 게다가 숨진 지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에도 고독사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고독사는 혼자 살다가 고독하게 죽은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혼자 사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그러니 혼자 살다가 죽어도 주변에서 모를 수 있는 경우가 많아 질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숨진 후 2주 만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2주 동안 주변과 연락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매일 또는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나이가 들면서 일단 폐쇄적으로 변하는 것을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이 싫거나 세상살이가 시들한 것이다. 호르몬 작용으로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요인도 있을 수 있다. 살만큼 살다 보니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염세적인 생각을 갖는 경우도 있다. 남들보다 안 풀려 실망하다 보니 풀이 죽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안으로 움츠러든다. 나보다 나은 사람, 못한 사람을 동시에 접할 필요가 있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배울 점이 있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지금의 나는 행복한 편이라는 실감을 할 수 있다. 특히 봉사를 해보면 봉사를 받는 사람보다 봉사를 하는 사람이 더 얻는 게 많다는 얘기가 그런 이유이다. 물론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좋다. 유유상종의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적당한 커뮤니티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좋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일부러 연락을 안 하는 경우도 많다. 자녀들과도 공연히 연락해봐야 부담 줄까 봐 연락을 안 하고 산다. 자주 안 오고 연락이 없다고 원망할 필요도 없다. 그렇더라도 혼자 얼마든지 잘 산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혼자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할 일이 없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되도록이면 아침에 눈을 뜨면 밖에 나갈 일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에서도 할 일을 만드는 것이 좋다. ‘바보상자’라는 TV 시청도 나쁘지 않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어도 좋다. 좋아하는 스포츠를 보면서 즐기는 방법도 있다. 영화도 무궁무진하게 많다. 필자는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이 없으면 24시간 방영하는 당구 방송을 본다. 필자도 혼자 살기 때문에 지인들로부터 전화나 문자가 오면 반드시 답을 해준다. 답을 안 해주면 무슨 큰 변이라도 당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끼친다. 사실 고독사를 당해도 본인은 죽으면 그만이다. 자녀들이 너무 무심했다며 마음의 짐을 짊어지기는 할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 품에 둘러 싸여 편안히 가면 좋겠지만, 한 세상 후회 없이 살았으면 더 바랄 것도 없다. 수명을 다 했으면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2017-12-1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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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이기는 척
- 필자가 몇 년 째 영어 강의를 하고 있는 중구 노인대학에서 이 겨울이 끝나면 새 학기가 시작 된다. 새 학기가 되면 강의 시간도 조금 바뀌고 새로 생기는 강의도 있다. 필자는 강의 시간에 변동이 없어 지난 학기 학생이 거의 연속 수강을 하게 된다. 학생 중에는 몇 년을 다녀도 조용하게 별 존재감도 없이 다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선생인 필자에게 반찬을 만들어서 가지고 온다든가 집에 놀러 오는 특별한 학생도 가끔 있다. C는 나이가 60세 정도의 특별한 학생이다. 여고 때 탁구 선수를 했으며 나에게 특별하게 잘 한다. 가끔 반찬도 집으로 해오고, 강의 시간이면 brand 커피도 따로 날 위해 준비한다. 그런데 며칠 전 학생 C가 문자를 보내 왔다. 자기가 2학기에는 선생님 강의를 못 듣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유는 새로 하모니카 강의가 생겨서 배우고 싶은데 그게 내 강의랑 똑같은 시간이라 필자 강의인 영어를 포기하고 하모니카를 선택 하겠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은 필자는 엄청 서운했다, 아니, 그렇게 잘하고 생전 그만두지 않을 것 같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강의에 참석한 C가 내 강의를 떠나다니 필자의 강의가 하모니카만도 못 하단 말인가?? C가 우리 집에도 온 적이 있어 남편도 물론 C를 안다. 필자가 서운하다며 C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항상 그런 법이라고, 특별히 잘 하는 사람이 맘도 금세 변하는 거라고 날 위로해 준다. 그래도 서운한 맘은 가시지 않는다. 화도 나고, 하모니카도 밉고, 난데 없이 자존심(?)은 왜 또 거기서 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필자가 얼마 전 감기로 며칠 앓고 나니까, 남편이 새 학기부터 강의를 그만 하는 게 어떠냐고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고, 그 동안 할 만큼 했고 또 필자의 몸이 불편허고 나이도 먹었으니 고만 하는게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불난 데 부채질이다. 사실 복지관까지 일주일에 한번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은 남편이 하는 일이니 봉사의 반은 남편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혹시라도 남편이 그걸 싫어한다면 그만 둘 수 밖에 없는 거다. 자, 어떡한다? 계속 할 것이냐,말 것이냐? 우선 남편의 확실한 뜻을 물으니 모든게 날 위한 것이고 오히려 계속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테고 필자만 원하면 얼마든지 계속하는 것이지 자기는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남편의 확실한 뜻을 안 필자는 우선 영어반 반장과 상의를 하고 내 뜻을 밝혔다. 필자의 말을 들은 반장은 C 빼고 딴 사람은 사람이 아니냐며 절대로 사퇴는 안 된다며 펄쩍 뛴다. 한편으로는 필자를 말려주는 반장이 고마웠다. 필자는 사실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 결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다. 정신 건강을 위헤서라고 한 때의 기분으로 일을 그만 두는 건 후회만 남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못이기는 척 강의를 계속 하기로 하고 나니 어두웠던 마음이 금세 환해 지는 것을 느꼈다.
- 2017-12-1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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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면 얼어 죽는 열대 식물들
- 전철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목에 먹자골목이 있다. 크고 작은 업소들이 길 양옆에 포진해 있다. 경쟁이 심해져서인지 몇 달 못 가 문 닫는 업소들이 많다. 그러고는 새 업소가 간판 달고 인테리어 다시 해서 문을 연다. 그때 축하 화분들이 많이 들어온다. 부피가 큰 것으로는 고무나무, 관음죽 등 열대 관엽식물들이 많다. 그런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밖에 둔 열대 식물들이 그대로 얼어 죽은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업소 영업도 부진한데 입구의 얼어 죽은 열대 식물들이 더 처량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은 요즘 사람들이 무지해서 생기는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콘크리트 아파트에서만 살던 사람들이 식물을 길러봤을 리 없다. 열대 식물들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기온이 내려가면 실내에 들여놓아야 한다. 실내에 들여놓으면 공간을 차지한다며 밖에 두는 사람이 많다. 실내에 들여놓는 것도 식물에게는 환경이 바뀌는 것이므로 스트레스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더우면 웃자란다. 웃자란 식물은 그만큼 허약해서 어느 정도 자라면 감당을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사무실에서는 심지어 마시다 남은 커피나 녹차를 화분에 붓는 사람도 있다. 화장실까지 가서 버리기가 귀찮은 것이다. 커피가 식물에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믹스 커피는 설탕 같은 첨가물이 들어가 좋을 리 없다. 원두커피 찌꺼기도 일부러 화분에 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식물에게는 깨끗한 물이 가장 좋다. 애견은 날씨가 추워지면 옷까지 사다 입힌다. 그러나 개에게는 안 좋단다. 애견에게는 그렇게 극성스러우면서 식물에게는 관심이 없다. 열대 식물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얼어 죽는 나무가 많을수록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소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적 낭비다. 식물을 기르는 것은 정서적으로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다. 정성을 다해 식물을 키우다 보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애정도 생긴다. 그런데 요즘은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실내에서 식물 기르기가 마땅치 않다. 햇볕 잘 드는 남향집이면 좀 낫지만, 북향집은 햇볕이 부족해 실내 식물들이 햇볕 드는 쪽으로 기를 쓰며 가지를 뻗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젊은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장기간 파견 근무를 할 때 식물이 주는 위로를 새삼 느꼈다. 주변은 온통 황토빛 사막이었다. 식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있다 해도 잎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것들이었다. 그래서 국내에 휴가차 들어오면 잔디 씨를 사서 가져갔다. 방 안에 작은 용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린 필드를 만들었다. 용기에 탈지면을 깔고 물을 붓고 잔디 씨를 뿌려놓으면 일주일 후 파란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종의 수경 재배였다. 초록색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때 알았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아파트를 팔아 치우고 넓은 마당에 잔디가 깔린 단독주택을 샀다. 마당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고 각종 꽃들을 키웠다. 그래서 당시 열풍이던 아파트 폭등의 호기를 잡지 못해 재테크에 실패했지만 후회는 없다.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다시 기회가 되면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서 넓은 마당에 온갖 식물들을 기르며 살고 싶다.
- 2017-12-1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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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맨을 만드는 여자, 바네사 리
- 영화산업의 메카,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 재봉틀 하나로 ‘할리우드’를 정복한 한국 아줌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바네사 리(48·한국명 이미경). 그녀의 할리우드 정복기는 어떤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공식 타이틀은 ‘패브리케이터(Fabricator)’. 특수효과 및 미술, 의상, 분장 등을 총칭하는 ‘FX’ 분야에 속해 있는 전문직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디자이너의 상상 속에 있던 배우의 의상을 현실에서 재현해내는 일이다. , , , 등 슈퍼히어로의 멋진 의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할리우드 최고 몸값의 패브리케이터 바네사 리를 LA 아트 디스트릭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할리우드 No. 1 패브리케이터 “패브리케이터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생소할 거예요. 번역을 하면 특수의상 제작자 정도가 제일 맞겠네요. 의상뿐 아니라 원하는 모양의 몸집을 만들기도 하는데 팻 슈트(Fat Suit)라고 불러요. 뚱뚱한 몸이나 괴물, 외계인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 개봉을 앞둔 영화 에서 배우 게리 올드만이 윈스턴 처칠 역을 맡았는데 배우의 몸보다 두 배 가까이나 큰 슈트를 제작해야 했어요. 폼 라텍스와 마이크로비즈라는 소재로 처음 시도했는데 정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어요. 게리 선생님도 마치 최고의 예술품 같다며 인정해주셨죠.” 바네사 리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탑’ 패브리케이터다. 이는 지난 13년 동안 쌓아온 그녀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화만 100여 편, 제목만 들어도 반가운 , , , , , , , , , , 등이 그녀의 손길을 탔다. 할리우드의 FX 분야는 철저한 ‘그들만의 세상’이다. 제작사에서 FX 부분을 총괄할 숍(Shop)이나 아티스트에게 작업을 의뢰하면, 다시 그들이 의상, 분장, 헤어, 미술팀을 꾸리는데 보통 인력을 공개 채용하는 법이 없다. 같이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인맥으로만 구성된다는 것이다. 언뜻 공정하지 않고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한 번은 모를까 실력이 없으면 그다음엔 이 바닥에 발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진정한 프로의 세계죠. 나는 이 바닥의 이런 속성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요. 생각해보세요. 서른이 훌쩍 넘은 동양 여자가, 영어도 잘 못하고, 더군다나 핸디캡까지 있는 내가 무엇으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요? 일 잘하는 거 빼고 미인도 아니고 날씬하지도 않아요(웃음).” 상처받은 명랑소녀 그녀는 두 살 무렵, 백신 접종 부작용으로 소아마비를 앓았다. 두 다리가 굳어진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어머니는 매일같이 침을 맞히러 다녔고 찜질을 해주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3년 만에 오른쪽 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끝내 왼쪽 다리에는 장애가 남게 됐다. 하지만 이씨는 명랑소녀였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쾌활한 성격에 친구도 많았다. 학창 시절 내내 오락부장을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 가족은 정말 빈털터리가 됐어요. 아빠 치료비로 다 쓰고 쌀을 살 돈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집이 망하니까 친구들이 다 떠나버리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마음을 다 주지 말아야 하는구나. 현실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거죠.” 미대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형편상 포기해야 했다. 대신 택한 것이 메이크업 학원.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영화를 좋아한 이씨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 사회는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메이크업을 해주는 직원으로 취직이 됐어요. 일을 잘하고있는데 일주일 만에 사무실에서 호출이 오더군요. 다리가 왜 그러냐고 묻기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렇다고 하니까 봉투 하나 내밀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짤린 거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요. 이후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됐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권리 딸이 상처받는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과감히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 1993년, 이씨는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한국을 떠나왔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생계 때문에 공인회계사 사무실에 취직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뭔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패턴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술을 가르쳐주고 취직도 시켜준다고 하길래 그 길로 등록을 했죠.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패턴을 배웠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신명나게 하는지, 이씨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실력도 남달라 패턴을 배운 지 6개월 만에 취직이 됐다. 이후 7년간 그녀는 자바(LA 의류산업 중심지)에서 일하면서 고액 연봉을 받는, 소위 잘나가는 패턴사로 자리 잡게 된다. “자바에서 일하는 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딸아이도 낳고 점점 생활이 안정되어갔어요. 그런데 어느 해 딸이 아파서 잠시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때 조그만 신문광고를 보게 됐어요. 할리우드의 한 숍에서 특수의상 패턴사를 구한다는 광고였는데 그게 제 마음을 흔들어놓은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이씨는 다시 자바로 돌아가지 않았고, 시급 12달러를 받으며 밑바닥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이씨의 선택을 두고 주위에서는 걱정과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때 힘을 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투잡, 쓰리잡이라도 뛸 테니 원하는 것을 하라며 용기를 줬다. “살다 보면 운명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는 거 같아요. 나중에 알았는데 할리우드 쪽에서 신문에 구인광고를 내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광고가 나왔고 내가 그걸 본 거예요. 나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물론 한동안은 돈이없어 정말 고생을 했죠. 딸아이에게 정부에서 나오는 공짜 분유를 먹여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가족은 행복했어요. 남편과 함께 지금도 이야기해요. ‘우리 그때 진짜 재미있고 행복했지’라고요.” 슈퍼맨을 만드는 여자 지나고 보니 한국에서의 상처도 자바에서의 7년도, 버릴 것 없는 시간들이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빈틈없는 실력으로 무장된 바네사 리는 할리우드에서 깐깐하기로 이름난 넘버원 아티스트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특수분장계의 대부 릭베이커, FX 디자이너 패트릭 타투포우로스, 특수효과의 거장 스티브왕, 완벽주의 의상감독 콜린 앳우드…. 할리우드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은 모두 바네사 리의 스승이자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동료이며 친구다. 창의력은 기본, 사고의 유연성과 순발력은 패브리케이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보이는 모든 것이 의상 재료가 될수 있고 부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을 볼 때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다. 특수한 원단은 통달하고 있어야 하고, 각종 신소재에 대한 세미나가 있으면 찾아다니며 공부해야 한다. 슈퍼히어로의 전투 의상을 하도 많이 만들어 전쟁이나 무기에 대해 박사가 됐다. 우주선과 우주복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나사(NASA)에서도 일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해졌다. 실제로 에서 그녀가 만든 우주복을 보고 나사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고. 의상을 맡았을 때, 팔꿈치 장식을 위해 해체한 스키 부츠가 스무 개가 넘고, 샤키 오닐이 입을 라이트 의상에 사용할 특수 라이트테이프를 찾기 위해 전 세계 전기 회사의 신제품들을 뒤졌다. 늘 화학약품을 다루다 보니 스태프와 배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방면으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정말 좋아서 미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스포트라이트는 없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일하고 고작 엔딩크레디트에 수백 명의 스태프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릴 뿐이죠.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도 있냐고 묻는데 ‘패브리케이터’ 카테고리는 없어요. 특수효과 부문에 속해 있으니까요. 돈이요? 물론 적지 않게 받죠. 메이저 제작사가 아니면 의뢰를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할리우드 제작 환경 안에서 보면 그렇게 대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에요. 돈을 벌려면 배우가 되는 게 낫죠(웃음).”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비하인드스토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숨은 즐거움 중 하나이지만 그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들의 사생활 보장은 스태프들의 프로페셔널 정신이기도하다. 유명 배우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럴 때는 좀 난감하다고. 이씨는 여간해서는 배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로서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폼’ 빠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그래도 좋은 이야기야 어떻겠냐며 하나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친절한 바네사 리. “게리 올드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게리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내가 만든 팻 슈트(Fat Suit)에 완전히 감동을 받아 먼저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배우와 찍은 유일한 사진이에요(웃음). 딸아이가 연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하자 조언을 해주고 싶으니 꼭 촬영장에 데려오라고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에요. 또 배우 매튜 매커트니에게 직접 소개를 해주어서 그가 주연을 맡는 영화 에 참여하게 됐어요.” 숙취 때문에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서도 남다른 미모를 뽐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막내 스태프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건네던 안소니 홉킨스는 영화 에서 만났는데 무거운 슈트를 입고도 불평 한 번 하지 않던 영국 신사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녀가 애써 만든 전자회로 슈트가 아쉽게도 통편집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하자 직접 텐트로 찾아와 아쉬움을 표했다고. 보디슈트를 만들려면 배우들의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다면서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는 유쾌한 그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조니 뎁의 보디슈트를 언젠가는 꼭 만들고 말겠다는 사심(?)도 드러낸다. 꿈의 공장 ‘슈퍼슈트팩토리’ 올해는 바네사 리에게 조금 특별한 해였다. 할리우드에서 일한 지 13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스튜디오를 갖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슈퍼슈트팩토리(Super Suit Factory)’. 이제 회사의 대표로서 제작사와 FX 숍을 상대하게 되었다. 영화사와 직접 계약을 하기도 한다. 개인으로 활동할 때보다 입지가 훨씬 굳어진 셈이다. 물론 몸값도 뛰었다. 또 하나 강동원 주연의 한국 영화 을 맡게 된 것도 그렇다. 한국 영화가 특수의상에 큰돈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데 특별히 은 주인공의 전투복을 위해 할리우드 최고 제작자를 찾았고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은 아마도 나에게 특별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워낙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라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점도 큰 의미가 있어요. 한국은 나에게 아픈 기억도 주었지만 솔직히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었던 부분이 있거든요. 한국인의 근성과 기술은 미국인들이 못 따라와요. 언젠가 나의 경력과 노하우가 한국 영화계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의 팬들에게도 깜짝 선물이 될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한국 배우와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이 늘어나는 만큼, 그녀의 역할도 주목된다. 실제로 이씨는 10년지기이기도 한 할리우드 특수분장 및 헤어 전문가 다이아나 최씨와 함께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언제 그 그림이 완성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거지요. 지금은 다이아나도 저도 너무 일이 많아서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오늘을 후회 없이 살다 보면 어느덧 내가 바라던 내 일이 되어 있더라고요. 너무 영화 같은 소리만 한다고요? 글쎄요… 뭐 여긴 할리우드니까요!(웃음)”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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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흘릴 줄 아는 남자
- 연말이 되면 언 가슴을 녹이라며 구세군 종이 울린다. 가슴을 녹인다는 것은 돌덩이 같은 마음을 머시멜로처럼 노골노골하고 달짝지근하게 만들라는 말이다. 그래야 바람도 들고 비도 들고 낙엽도 보인다. 옛날 옛적 한 임금 이야기다. 일을 무척 열심히 하는 왕이었는데 과로 때문인지 시력이 날로 나빠져 거의 실명 위기에 처했다. 좋은 약도 써보고 전국의 명의들을 불러 치료했지만 아무도 고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전 앞에 어떤 노인이 와서 섰다. 그는 임금의 눈을 치료하러 왔다며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남루한 행색을 보고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집요한 그의 요청에 견디다 못한 신하가 임금에게 고했다. 그러자 임금님은 어차피 실명할 상황이었으므로 그를 궁전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임금 앞으로 오더니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임금의 얼굴과 체구와 혈색을 살폈다. 그러곤 약을 주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이 눈을 치료하시려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고는 돌아서 나가버렸다. 신하들은 무례하다며 그를 벌줘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임금은 그를 내버려뒀다. 이후 임금은 그의 처방대로 눈물을 흘려보려고 애를 썼다. 궁전의 배우들을 불러 슬픈 연극도 하게 하고 슬픈 음악도 연주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바윗덩어리처럼 딱딱했다. 감동하는 일이 없으니 당연히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노력해도 되지 않자 임금은 감정이 메말라버린 자신이 슬퍼졌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임금은 감정 없이 일만 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면서 눈물을 쏟았다. 이후 슬픈 연극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 감사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궁을 나가 가난한 백성을 둘러보고 그들의 사정을 들으며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시력은 점점 더 좋아졌고 백성들을 마음으로 사랑하며 통치를 하니 나라도 평화로웠다. 일상에 쫓겨 감정이 메말라간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드라마를 보며 남편이 몰래 눈물을 훔치더니 이젠 대놓고 티슈를 가져다 놓고 코까지 풀어가며 운다고 못 볼 것 본 듯 고개를 흔드는 아줌마들이여, 그 눈물이 보약이다. 마음껏 흘리도록 추임새까지 넣어줘야 한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남자는 분명 따뜻한 사람이니 당신은 복 터진 거다.
- 2017-12-0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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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말고 꼭 있어야 할 것들
- 은퇴를 앞둔 사람이 제일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돈이다.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과연 먹고살 수 있는지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노후생활을 위해서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할까 궁금하다. 2017년 초 금융회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노후자금은 7억 내지 10억이 필요하다. 20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이렇게 큰돈이 필요한 걸까.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은퇴 후 부부가 생활하려면 월평균 200만원의 생활비가 든다. 만약 정기예금의 금리가 연 2.4%라면 10억원을 예치했을 때 월 200만원의 이자를 받는다. 금융회사에서 노후자금으로 10억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런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주장은 자사 금융상품을 팔기 위한 공포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자기 회사에 맡기면 월 이자로 그만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정해서 말하면 노후생활을 하기 위해 10억원의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적정생활비에 상응하는 월 200만원이 나올 수 있도록 현금흐름을 만들면 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이런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을까? 직장생활을 정상적으로 한 사람이라면 국민연금을 통해 월 100만원의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 국민연금으로 적정생활비의 반은 해결하는 셈이다. 그리고 정년이 되었을 때 규모는 크지는 않더라도 집 한 채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노후에 이 집을 주택연금에 위탁하면 또 월 100만원의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국민연금과 주택연금을 이용해 최소한 은퇴 후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 금융 회사의 말만 듣고 노후준비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생활비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 물론 소비는 하방경직성이 있어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은퇴 전에 미리 소비 수준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검소한 생활을 하겠다고 작정하면 살아가는 데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비싸지 않다. 가격이 비싼 것들은 생필품이 아니고 대부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들이다. 돈만 있으면 노후준비가 다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돈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인생 2막을 살기 위해선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은 자존감을 지켜주고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다만 그 일은 남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로저스가 최근 자선단체에 180억달러를 기부했다. 우리 돈으로 20조원 가까이 되는 돈이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철학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될 수 있다면 전 재산과 바꾸어도 좋다고 했다. 올해 그의 나이 87세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돈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인생 2막에는 자신이 꿈꾸었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더욱 좋다. 이란 책이 있다. 오래전 이 책을 사서 캐나다로 이민 간 지인에게 선물을 했더니 교포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며 좋아했다. 이 책은 의대를 나와 오랫동안 의사로 일했던 저자가 54세에 밴쿠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캐나다 역사를 수학하고 쓴 것이다. 의사는 그가 먹고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었지만 은퇴 후에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인생 2막은 바로 이런 일을 찾는 과정이다. 국내 H그룹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만돌린을 배우러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지인도 있다. 그는 소기의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지금은 이웃들에게 만돌린을 가르치고 있다. 간혹 서울시향과 협연하기도 한다. 그에게 직장을 중도에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물으니 전혀 그렇지 않단다. 직장에 있었으면 지금쯤 퇴직을 해야 하는데 자신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연주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다가 은퇴 이후에 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어느 정도의 돈, 좋아하는 일, 그리고 친구다. 얼마 전 란 책을 펴낸 김형석 교수도 무엇보다 친구의 떠남을 아쉬워했다. 나이 들어 친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빌 게이츠 이전에 세계 제일의 부자는 월마트를 창업한 샘 월튼이었다. 그는 죽을 때 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했다. 그의 주위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인 L회장도 그러지 않을까.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죽을 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다. 더구나 주위에 자기 얘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을까. 내가 먼저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후반생은 길지 않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홀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건강수명은 70세에 불과하다. 60세에 정년퇴직한다면 10년이 내게 주어진 시간이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겠다. 전반생에서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었다면 후반생은 선택이 필요한 시기다. 많은 사람을 사귀기보다 만날 때마다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인생 2막에서 어느 정도의 돈, 자신이 좋아하는 일,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친구, 이 세 가지만 갖출 수 있다면 비교적 행복한 후반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 2017-1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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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위해 노래하다, 아모르파티! 가수 김연자
-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 2017-12-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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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 끝이 찡한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
- 날씨가 매우 차가워졌다. 이제 정말 깊은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듯하다. 쨍한 공기를 코끝으로 느끼며 대학로로 뮤지컬을 보러 나갔다. 제목만 보아서는 어떤 이야기일지 가늠이 안 되었지만, 박칼린 씨가 연출했다고 한다. 실력 있는 공연 연출가의 작품이니 탄탄하고 멋진 무대일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주말의 대학로는 젊은이로 넘쳐났다. 생기발랄한 그들에 묻혀 필자도 젊은이가 된 듯 에너지가 솟았다. 공연시각보다 좀 일찍 나와서 이 골목 저 골목 산책을 하니 예전 뜨거웠던 대학로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하다. 공연장에 걸린 포스터를 보니 뮤지컬의 내용이 좀 짐작된다. 에어포트 베이비라면 공항의 아기이니 입양아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무거운 주제일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이 작품은 2013년 제1회 ‘뮤지컬 하우스 블랙 앤 블루‘ 지원작으로 선정이 되었고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뮤지컬 우수공연 제작지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야기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제작된 진정성 있는 뮤지컬로 위트 있는 가사와 세련되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관객에게 사랑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보았던 대작 뮤지컬에는 유명연예인이나 뮤지컬 배우가 등장했는데 이 작품의 배우는 모두 필자에겐 생소해서 어떤 연기를 펼칠지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무대가 열리고 공항의 안내음성이 흘러나오며 산뜻한 젊은이들의 경쾌한 노래와 춤이 시작되었다. 주인공 ‘조쉬’는 어렸을 때 백인들만 사는 애틀랜타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청년이다.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따뜻한 양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잘 컸다.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조쉬’는 뿌리를 찾아 20년 만에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는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하며 뿌리 찾기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한국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입양아라고 말하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이니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음식이 그리워 이태원을 찾아가는데 우연히 들린 집이 게이 바 ‘딜리 댈리’이다. 그 집에는 ‘딜리아’라는 노인 게이와 두 명의 젊은 게이가 바를 운영하고 있다. ‘조쉬’의 이야기를 듣고 누구보다도 그의 감정을 이해하는 ‘딜리 댈리’ 식구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그들의 도움으로 뿌리 찾기가 시작된다. 이 뮤지컬은 입양아 문제뿐 아니라 성 소수자인 게이에 관한 문제도 같이 다루었다. 게이라는 이유로 핍박받기도 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회현상으로 떠오른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이다.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이 특수한 곳을 떠나면 테러당한다는 공포를 안고 사는 이들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들의 도움으로 TV 출연을 한 후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그리운 엄마를 찾아가지만, 엄마는 그와 만남을 거부한다. 이에 두 번 버림받은 주인공이 애틋해 가슴이 아팠는데 엄마는 왜 그를 안 보려는 걸까? 몇 번을 찾아간 끝에 엄마를 만나 알게 된 사실은 참으로 슬펐다. 너무나도 어려웠던 당시의 형편에 '조쉬‘에겐 쌍둥이 형이 있어서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동생을 입양 보내고 형과 함께 살았다. 양부모를 잘 만난 ‘조쉬’는 유복하게 잘 자랐지만, 엄마와 같이 살던 형은 어려운 형편에 일을 하다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고생하다 죽은 큰아들 생각과 같이 키우지 못한 작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엄마는 찾아온 아들 만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아들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었던 그때를 후회하지 않는다는 주제곡을 열창할 때 관객석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고 필자도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게이 할아버지와 게이 청년을 연기한 배우들이 너무 멋진 열연을 해서 보는 내내 즐거웠다. 입양아지만 밝고 당당하게 잘 큰 주인공도 멋진 연기를 펼쳤고 관객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엄마역의 배우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자칫 어두울 수 있는 내용인데도 밝고 경쾌한 노래와 춤이 즐거운 재미있고 탄탄한 뮤지컬이었다.
- 2017-11-24 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