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디바 정미조가 오랜 우회로를 거쳐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와 같은 다양한 히트곡들이 가수 정미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겠지만, 사실 그녀는 가수로서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화가로서의 인생 2막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인생의 제3막에서 가수로 돌아온 그녀는 그동안 쌓은 세월의 깊이를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웅숭깊고 밀도감 있는 호흡을 가지게 된 그녀의 노래와 함께 삶의 궤적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kys0701@etoday.co.kr
1972년, ‘개여울’로 데뷔한 정미조는 그 후 7년 동안 대한민국을 휘어잡았던 시대의 디바였다. ‘휘파람을 부세요’, ‘그리운 생각’, ‘아! 사랑아’와 같은 히트곡들로 차트의 정점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79년이 되자 돌연 가수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녀는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가이자 미대 교수로서의 삶을 살며 인생 2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인생 3막. 다시 가수로 복귀한 그녀가 기자 앞에 앉아 있다.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이제 온화한 무게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38년 만에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
“2015년에 23년간 일했던 교수직에서 은퇴했죠.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은퇴한 사람들은 흔히 ‘저녁에 집에 가면 뭘 하지?’ 하는데 난 행복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으니까요.”
37년. 정미조가 수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있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 시간 그대로, 그녀는 ‘37년’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자신의 앨범을 내놨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됐죠. 그리고 CD로 앨범을 만들어 내놔야 하니 부담감과 책임감이 컸죠. 그런데 이주엽 JNH뮤직 대표님이 정말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목소리였다고 응원해주셨고 제가 부르게 될 노래들의 가사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요.”
그리고 지난 11월 17일, 그녀는 앨범을 또 발표했다. 이번 앨범의 제목은 ‘젊은 날의 영혼’. 라틴 음악, 팝 재즈, 모던 포크 등 수록된 14곡에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들어 있다. 그녀는 ‘38년 만에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고 표현했다. 마침 올해는 그녀의 가수 데뷔 45주년이기도 하다.
“이번 앨범에서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했어요. 음악감독은 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씨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가 작곡한 노래가 있고요. 박주원씨 어머니가 제 팬인데, 박주원씨가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작곡한 곡이에요. 편곡이 얼마나 좋은지, 기타와 다른 악기 연주자들과의 합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나왔던 제주소년 오연준과는 듀엣으로 손자와 대화하듯 노래를 불렀죠.”
대한민국이 사랑한 목소리
오래전 얘기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 정미조는 이화여대 안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만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녀로선 갑갑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레코드 회사 사장이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당연히 그녀의 이름을 건 앨범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고, 서양화과에서 4년 동안 과 대표를 내리 맡을 정도로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수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해결한 것은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학과장이자 지도교수인 은사의 한마디였다.
“해봐라, 내 나이 되어 그때 한번 해볼걸 하며 후회하지 말고. 너는 공부 잘하니까 일단 가수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라도 대학원 가서 다시 공부하면 된다.”
지도교수의 한마디, 그리고 그녀의 결심은 적중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민국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화가로서 자리매김한 인생 2막
“유학을 떠나서 몽마르트 언덕 8층 건물 꼭대기에서 살았어요. 한국에서 매니저, 운전기사 등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혼자 지내며 밥까지 스스로 지어 먹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막 울기도 했고.”
그러나 힘들다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한국을 떠날 때 은퇴를 공언했고, 당시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TBC(옛 동양방송) 예능 프로그램 에서 신인가수로 막 데뷔한 최백호 한 명만을 초대가수로 초청한 고별 특집까지 했었다.
“최백호 선생은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정민섭 선생이 그때 나를 위해 ‘나 여기 있어요’를 써줬는데 그 노래를 중간쯤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내 의지로 떠나는 거라 눈물이 안 나올 줄 알았어요.”
그렇게 했는데 파리까지 가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렬 작가의 추천으로 파리에 있는 두 개의 국립학교 중 아르데코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후는 가수가 아닌 재불 화가로서의 삶이었다. 6년 3개월 동안의 박사과정을 완료했고 모나코 전시회에서 상까지 받으면서 성공적인 서양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수원대학교 교수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인생 2막의 삶을 살았다.
최백호, 손성제, 이주엽과의 인연
“어떤 전시회에 갔을 때 보니 최백호 선생이 자신의 그림 3점을 출품했더라고요. 그 그림들을 보니 너무 좋았어요. 미술계에서는 내가 중견이었으니까, 그림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다시 최백호 선생과의 교류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교수생활을 한 20년쯤 했을 때, 최백호 선생이 점심을 먹자는 거예요.”
최백호가 정미조를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녀는 최백호를 통해 앨범 ‘37년’의 음악감독을 맡은 색소포니스트 손성제, 제작을 맡은 이주엽 JNH뮤직 대표 등 그녀와 함께 작업하게 될 음악계 인사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적 성과를 알고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확신했던 그들의 조력을 통해 그녀는 가요계를 떠난 1970년대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 속에서 오래 닫혀 있었던 자신의 문을 다시 열었다.
“저는 37년 만의 녹음이라 잠도 못 이뤘죠. 그런데 손성제 교수가 굉장히 속도감 있게 작업을 잘했어요. 어떤 노래는 녹음하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했어요. 첫 곡이 가장 좋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는 정말 신나게 불렀었구나 싶었다
마침 얼마 전에 나온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에는 정미조의 대표곡인 ‘개여울’이 리메이크되어 실려 있다. 아이유 특유의 여리고 애조가 깃든 곡 해석은 비슷한 나이대의 정미조가 보여줬던 목소리의 힘과 비교하면 묘한 재미가 있다. 아이유가 구사하는 창법은 ‘37년’ 앨범에 실린, 리뉴얼된 ‘개여울’에 더 가깝다. 그런데 막상 정미조는 자신의 인생 1막을 채웠던 가수로서의 엄청난 인기와 삶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제 인생 1막은 20대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그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보니 ‘아, 내가 정말 신나게 불렀구나, 젊음의 설익은 패기로 마구 전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많은 경험이 인생에 녹아들면 그 경험이 바로 소리가 되죠. 옛날의 제 소리가 시원시원해서 듣기 좋았다면 지금은 삶의 서러움, 슬픔이 배어든 소리가 됐어요.”
그녀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젊었을 적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깊은 호흡, 긴 감성, 나이 든 이의 여백과 회한이 묻어나는 그녀의 창법은 한때 전설이었으나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에서 저 저명한 아프로 쿠반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떠오르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른의 음악이 사라진 시대, 전설이 돌아오다
인터뷰에 함께 동석했던 이주엽 JNH뮤직 대표의 말대로 지금 한국은 ‘어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의 음악에는 인생의 끝자락에 이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7년 동안 우리나라 가요계를 뒤흔들고 사라졌다가 37년 만에 다시 나타난 정미조의 노래에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이번 앨범은 곡들을 너무 잘 만났고 덕분에 제대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우여곡절이 유난히 많은 앨범이기도 했죠. 예를 들어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다 됐는데, 들어보니 너무 화려해서 제가 가진 오리지널함이 줄어든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 고치기도 했어요. 듀엣을 하기로 한 제주 소년 오연준군은 목소리는 아이인데 아이 같지 않은 성숙한 느낌이 있었죠. 그런데 막상 함께 불러보니 처음에는 음역대가 안 맞아서 노래가 제대로 안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극적으로 노래가 완성됐죠.”
이번 앨범 ‘젊은 날의 영혼’에는 정미조가 작곡한 노래들도 세 곡 들어갔다. ‘오해였어’는 작사와 작곡을, ‘난 가야지’와 ‘비 오는 오후’는 공동 작사·작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가 이번 앨범에 갖고 있는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그녀의 인생 3막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인생을 살아보니 때가 있어요. 수십 년 동안 이 노래들을 위해 시간을 보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들지 않았던 감정이죠. ‘지금이 내 때가 온 건가?’ 싶어요.”
어렵든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나이가 들면 눈물샘이 쪼그라들고 말라버리는지 알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슬픈 일을 당해도 스쳐가는 바람 대하듯 무덤덤해 지는 방관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아니다. 조금만 소외되어도 잘 삐지게 되고 서러움의 눈물이 이슬처럼 맺힌 후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감성적으로 그냥 슬프고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아내가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식구들 데리고 제주도 놀러갔단다. 우리보고 같이 가자고 했어도 같이 갈 형편도 못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과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확 오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따로 살고 있으니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며칠 다녀오는 것은 당연하다. 머릿속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이유 모를 황량한 찬바람이 분다.
어머니는 저녁 할 때쯤이면 할머니의 의사를 꼭 물었다. ‘어머님 오늘저녁 뭘 할까요?’하고 묻는다. 농촌의 저녁메뉴는 언제나 특별한 것이 없으니 뻔하다. 밥, 국수, 죽이다. 할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네가 알아서 해라!’이다 매일저녁 되풀이되는 이 질문과 대답을 왜 하는지 어려서는 몰랐다. 필자가 나이를 들어보니 이런 몇 마디 말에 부모는 자신의 권위가 살아 있다는 위안을 받는다.
영화를 보러갔다. 슬픈 장면이 있다. 눈물이 핑 돈다. 주위의 반응이 너무 무덤덤하여 눈물 닦기가 조심스럽다, 나이든 사람이 눈물 찔끔거린다고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비비는 척 하면서 슬쩍 눈물을 훔친다. 양쪽 눈을 다 닦으면 저사람 울고 있네 하는 모습이 들킬까봐 한쪽 눈만 닦고 시차를 두고 다른 쪽 눈을 닦는다. 남들을 의식하면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나이든 남자다. 집에서 TV를 보는데 다른 식구들은 무덤덤하게 잘도 보고 있는데 혼자 눈물이 흐를 때 참 민망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들어온다. 남자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
K는 대학의 시간강사다.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머슴 같은 노력을 계속하지만 점점 더 절벽을 느낀다.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의미를 통 모르는 시골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인 아들 자랑이 대단하다.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은 맞지만 수입도 형편없는 시간강사라는 말을 차마하지 못한다. 더구나 대학교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에게 쪼들리는 경제사정은 더더욱 말 못한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도 한다. 밤에는 대리운전도 해보지만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 동굴이 있다면 몰래 찾아 가서 목이 터져라 ‘이 더러운 세상아!’하고 외쳐 보고 싶다. 그러나 통곡할 장소가 없다. 어디를 가도 인파의 행렬에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마음 편히 울어볼 곳조차 없다.
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하고 이것이라고 적혀있다. 왜! 남자는 울면 안 되는가! 남자는 농경사회에서는 근육질의 몸만 필요했지만 지금은 감성이 필요한 시대고 생존경쟁의 다양한 변수가 많은 세상이다. 한마디로 울 일이 많은 세상이다. 남자도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고 싶을 때가 있다.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 혹시 상대를 못 알아볼까봐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자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니가 대학생이고 필자가 중학생일 때 이문동 주택에서 월세를 산 적이 있다. 우린 별채에 살고 주인은 안채에 살았다. 작은 정원에는 철 따라 꽃이 피었다. 청신한 봄이면 유난히 라일락꽃이 탐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 핀 꽃은 가난했던 우리 자매의 방을 향기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첫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우리의 꿈을 키워가며 설레던 시절이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는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아들 넷, 딸 하나였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갈한 모습에 세련미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가족이 성가를 부를 때면 아들들은 테너와 바리톤, 딸은 알토, 어머니는 소프라노로 멋진 화음을 들려줬다. 경외감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는 이북식 김치밥을 주발에 그득히 담아 건네주시곤 했다. 김치와 고기를 듬뿍 넣은 따끈따끈한 밥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처럼 맛있는 김치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던 우리는 이제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 자매는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에 만난 둘째 아들에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뵈올 수 있기를 잔뜩 기대하며 현재 어디 사시는지, 건강하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해하며 어머니가 치매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니,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엉망으로 변해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 자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매. 인간에게는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인 마무리를 방해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가 예견된다면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남은 삶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배우자나 자식들은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고 평판을 염려해야 하고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산 자들이 종종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할 수 있으려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치매가 깊어 회복할 수 없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듯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치매 집단시설도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지 환자를 위한 공간은 아니다.
죽을 날 기다리며 남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은 최악이다. 필자라면 한 손에 읽던 책을 든 채 자는 듯 죽고 싶다.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20대 초반쯤 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사택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담 너머로 무심코 눈길을 돌리던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은 짐승우리 같은 곳에 발가벗은 사람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오물을 벽에 칠한다는 치매 환자임을 알게 됐다. 가족은 농사를 지으러 논밭으로 나가야 했기에 환자를 집 안에 둘 수 없었다고 한다. 치매와 관련해 필자가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필자의 친구 부부는 둘 다 6·25 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신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덜컥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사돈은 왜 우리 집에서만 사냐고, 다른 자식은 없냐며 타박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아들 옆에 붙어 잔소리를 해대는 시어머니가 서운하고 미워서 저녁이면 친정어머니와 놀이터로 가서 도리도리 짝짜꿍 놀이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어머니를 차마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마음의 병을 주는 게 바로 치매다.
도봉구에서 만난 한 수강생은 자기 어머니가 예쁜 치매에 걸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사극치매에 걸린 노인도 있다고 한다. 며느리가 외출 후 집에 들어오면 공손하게 “마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하게 묻는단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네 이년!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며 며느리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극치매.
한 노인은 돼지고기를 볶아 맛있게 저녁을 먹고는 아들이 퇴근하자 며느리가 밥을 안 줘 배가 고파 죽겠다며 악을 썼다고 한다. 치매는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고 모르는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90세의 한 노인은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필자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내가 치매 환자인데 돌봐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집으로 갔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당신 곁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단다. 자서전이 내일이면 나올 날이었는데 노인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3일 후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 의해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치매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갑이 지나고 보니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지인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려 모시고 갔는데 그곳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기억을 잃어가도 생존 본능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84세의 친정어머니는 아직 맑은 정신을 간직하고 계시지만 치매를 떠올리면 불안감이 밀려온다. 사회적 고립감이 치매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자주 드린다. 어머니를 만날 때는 앨범, 빨간 내복, 반짇고리, 어머니께 사다 드린 옷과 목도리, 형제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한다.
가족의 사랑만이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만약 필자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기도 싫다. 우선 고혈압과 당뇨에서 풀려나야겠다. 그리고 살도 좀 빼야겠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exhibition
王이 사랑한 보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독일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폴란드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그가 수집한 예술품 중 130점을 총 3부로 구성해 전시한다. 제1부에선 아우구스투스의 군복과 태양 가면, 사냥 도구 등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소개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기 위해 만든 보물의 방 ‘그린볼트’를 소개하는 제2부에선 당대 최고의 장인을 동원해 제작한 공예품을 선보인다. 각종 보물이 사용된 작품을 통해 화려한 바로크 예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선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수출 도자기와 초기 마이센 자기를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 전시장 내부를 확대사진 기술을 사용해 드레스덴 궁전 내부와 비슷하게 연출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그 in 강남
일정 11월 19일까지 장소 강남미술관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이해 동양화작가 곽수연, 사진작가 김현욱, 입체작가 빅터조, 업사이클링작가 엄아롱, 일러스트레이터 이연경, 도예작가 틸다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가 모였다. 반려동물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회화, 설치, 사진, 조형 등으로 표현된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강남미술관이 무료로 제공하는 애견기저귀를 착용할 경우 반려동물도 입장이 가능하다. 반려동물이 있다면 함께 관람해도 좋다. 다양한 작품 외에도 유기견을 입양한 견주들이 보내준 사연을 읽어볼 수 있다. 또 반려동물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등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시장 건물 옥상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쉴 수 있는 ‘반려동물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book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민음사)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 작품 속의 ‘오늘’인 그의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아낸 이야기다. 가족 간의 쉽지 않은 소통과 그럼에도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여정으로 그려내며 아스라한 동경과 영원한 그리움의 상대는 가족임을 들려준다.
향기 탐색 (셀리아 리틀런 저·뮤진트리)
고고학자인 어머니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한 저자 셀리아 리틀턴의 향기 탐색서다. 냄새로 기억되는 곳들을 추억하며 향의 발자취를 답사하고 회고한다. 각 나라 특유의 향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향의 기초적인 원료와 재배법, 향수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movie
유리정원
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국내에선 보기 드문 소재와 독창적인 스토리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끌었다. 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속에 감춰진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10월 22일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신수원 감독의 남다른 상상력을 실감하게 만든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숲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며 초록 피가 흐르는 ‘재연’ 역을 맡은 문근영이 2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개봉 10월 25일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감독 신수원 출연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 임정운 등
리빙보이 인 뉴욕
이후 , 시리즈를 연출한 마크 웹 감독이 다시 한 번 로맨스 영화로 돌아왔다. 은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젊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통해 도시 뉴욕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았다. 마크 웹 감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도시인 뉴욕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며 뉴욕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드러냈다. 맨해튼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선 로 얼굴을 알린 칼럼 터너가 남자 주인공 ‘토마스 웹’ 역을 맡았다.
개봉 11월 9일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마크 웹 출연 칼럼 터너, 케이트 베킨세일 등
◇stage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항상 사랑받기를 꿈꾸며 살았던 여인 마츠코의 기구한 삶을 감성적인 연출과 음악으로 그려내며 진정 그녀의 인생이 혐오스러운 삶이었는지 되묻는다.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일정 10월 27일~2018년 1월 7일 연출 김민정 출연 박혜나, 아이비, 강정우 등
도둑맞은 책
인간의 행동은 의지인가 욕망인가. 영화대상 시상식 날 납치된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 그리고 그를 납치한 보조작가 조영락. 두 사람을 통해 연극 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려 사람다움을 포기할 때 얼마만큼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일정 10월 13일~12월 3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현철, 이갑선 등
에어포트 베이비
미국으로 입양된 조쉬가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입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백하고 재치 있는 대사로 풀어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8년 동안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친 작품으로 현실적 소재를 잘 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일정 10월 17일~12월 31일 연출 박칼린 출연 최재림, 유제윤, 강윤석 등
오펀스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공연계의 독보적인 연출가로 불리는 김태형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중년의 부유한 갱스터 해롤드. 아픔과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을 통해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9월 19일~11월 26일 연출 김태형 출연 박지일, 손병호, 장우진 등
깊어가는 가을밤 지금 충무아트홀에서는 ‘벤허’가 공연 중이다.
벤허의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리메이크된 영화도 있지만 그래도 벤허를 생각하면 필자의 젊은 날 대한극장의 와이드 화면으로 보았던 찰톤 헤스톤 주연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여고 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전교생이 대한극장에 가서 단체로 명화를 관람했다. 당시에는 극장 중에서 가장 크고 화면이 넓은 곳으로 대한극장을 꼽았다.
대한극장에서 많은 명작을 보며 꿈을 키우고 가슴 설렜던 그때가 눈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대한극장에서 보았던 ‘벤허’는 누구에게나 큰 감동을 주었다. 와이드 화면에 펼쳐졌던 수많은 명장면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특히 마차 경주 장면은 아무리 리메이크를 한다 해도 다시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명장면이라는 생각이다.
신당동의 충무아트홀에서 ‘뮤지컬 벤허를 보았다.
뮤지컬을 좋아해서 몇 번 와본 공연장이지만 벤허의 그런 스펙터클한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매우 궁금했다.
벤허의 방대한 내용을 3시간 안에 어떻게 연출했을지도 기대되었는데 역시 훌륭한 배우와 연출가의 역량으로 탄탄하게 잘 함축되었다.
그 긴 스토리도 어느 곳 하나 허술하지 않게 잘 연출되었으며 뮤지컬 배우들의 열연은 여느 뮤지컬보다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영화와 뮤지컬의 차이를 알면서도 자꾸만 찰톤 헤스톤의 벤허와 비교하며 이 장면은 어떻게 표현할지 미리 상상해 보는 나쁜 관람 태도가 있었지만 억울한 누명으로 노예선에 탄 장면은 깜짝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뒤 배경으로 영상을 띄웠는데 진짜 노예선에 탄 사람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을 주며 멋지게 연출되었다.
그러나 역시 마차 경주 장면에선 웃음이 나왔다. 흰말 검은말 8마리의 모형 말이 방향을 바꾸어가며 움직여 마차 경주 장면을 연출했는데 무대 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래도 마차에 탄 두 배우 벤허와 멧살라의 연기는 진지하고 멋지게 다가왔다.
서기 26년 예루살렘은 제정 로마제국의 폭정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벤허는 명망 높은 유대의 귀족으로 오랜만에 로마의 장교가 되어 돌아온 친구 메셀라와 재회한다.
메셀라는 전쟁 중에 고아가 되어 벤허의 가문에서 거두어 벤허와 친구로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벤허를 질투하여 증오심을 가진 인물이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장교가 된 그는 벤허에게 유대인 폭도의 소탕을 도와 달라 하지만 벤허는 거절한다.
벤허의 여동생 티르자는 메셀라를 좋아한다. 어느 날 로마 총독의 행군을 옥상에서 구경하던 티르자가 메셀라를 찾아보다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사고를 낸다.
메셀라는 이를 문제 삼아 벤허 가문 전체에 반역죄를 씌운다.
나쁜 놈, 키워준 은혜를 모르는 나쁜 놈이라는 욕이 절로 나온다.
억울한 누명을 쓴 벤허는 노예선에 오르게 되고 부유한 귀족이던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내다 문둥병 환자가 되는 비극을 맞는다.
노예선에서 해적과의 난투 중 사령관을 구한 벤허는 그의 양자가 되어 로마 귀족이 된다.
생사의 갈림길을 극복한 벤허는 모든 것을 앗아간 메셀라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전차경주에서 메셀라는 다쳐서 죽고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편 예루살렘은 나사렛에서 유대의 새로운 왕이 온다는 소문으로 술렁이고 예수의 고난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문둥병이 사라진 어머니와 여동생과 사랑하는 여인 에스더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잘 함축되어 보여 졌고 관객들은 웅장한 음악과 배우들의 열연에 뮤지컬이 끝나고도 계속 기립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잘 아는 내용임에도 또다시 큰 감동을 준 멋진 뮤지컬 ‘벤허’였다.
지난주에 광화문의 역사박물관에서 국가보훈처가 주관한 가슴 뭉클해지는 체험이 있었다.
6.25당시의 다부동 전투현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VR로 전하는 나라 사랑 이야기’인데 다부동 전투는 6.25의 격렬했던 전투로 이곳에서 북한군을 막아주어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다는 중요한 격전지이다.
VR은 가상현실에 직접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해 볼 수 있으니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게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시스템이다.
필자는 VR을 지난번 평창 테스트올림픽 팸투어에서 한 번 경험해 보았다.
젊은 날 겨울이면 스키 타는 걸 매우 즐겼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 한군데 부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어서 스키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VR을 통해 직접 타지 않아도 슬로프에 서서 멋지게 활강하는 듯 생생한 느낌을 받아서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오늘 체험한 VR은 그렇게 신나게 즐기는 내용이 아니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지키려고 어린 학생들이 전쟁터로 나갔을 때를 체험해 보는 것이어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체험존에 있는 VR기기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머리에 착용했다.
10여 분간 진행되는데 기기를 착용한 순간 현실 세계가 아닌 다부동 전투현장에 서 있게 된다.
오늘의 청소년들이 민족사의 아픔과 참담했던 6.25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 체험한 VR은 당시 중학생이던 어린 병사의 이야기이다.
아직 어린 나이의 병사이야기가 시작되자 필자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아려왔다.
직원분의 안내에 따라 기기를 조작하며 필자는 전투 속으로 들어갔다.
유엔사령부의 작전참모 회의도 들여다보고 폭격이 쏟아지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서보기도 했으며 실제로 총을 쥔 듯 적의 탱크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 보기도 했다.
폭탄이 난무하는 속에서 어린 병사들이 땅 구덩이 안으로 몸을 피해 웅크리고 있는 곳에 필자도 따라 들어갔다.
그 안에 피신하면서 얼마나 무서웠을지 어린 병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막사 안에 들어가 보니 소년병들이 모여앉아 주먹밥을 나누어 먹고 있다. 그 모습도 애틋해 마음을 울렸다.
오늘날이라면 열심히 공부하고 사랑받는 아이들일 텐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야 했던 그 시대의 소년병들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래서 국가보훈처의 따듯한 보훈은 이렇게 나라를 위해 헌신한 많은 분들을 잊지 않고 찾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손을 잡아 드린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가상체험 VR을 통해 나라 사랑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19명의 고등학생이다.
6.25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의 학생들이 3개월의 제작 기간을 두고 다부동 전투현장을 찾아보며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 VR 콘텐츠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만드는 동안의 과정에서 국가유공자를 생각하는 마음도 커졌을 것이고 나라의 소중함도 더욱 크게 느꼈을 것이다.
VR로 전하는 나라 사랑 이야기는 10월 31일까지 서울 광화문 역사 박물관 VR 체험관에서 체험해 볼 수 있고 세종시에서는 11월에 고운 중, 아름 중, 도담 중, 등 세 학교에서, 부산지역은 12월에 중순까지 부산 유엔 평화기념관에서 운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6.25전쟁뿐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영역을 넓혀 VR로 전하는 나라 사랑 이야기의 범위를 확대한다고 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도록 나라를 지킨 많은 국가유공자를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VR 속 중학생 소년병이 어머니께 쓴 편지가 군모에 담기고 전사하는 장면에선 어쩔 수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안타까움과 함께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직 말일까지 기회가 있으니 많은 분이 역사박물관을 찾아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체험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치매는 외상이나 암, 사고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밤손님처럼 슬그머니 온다. 치매환자가 자신의 치매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막상 자신의 병을 알 때가 되면 인지능력이 사라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건강할 때 치매에 대비하여야 한다.
어머니는 환갑이 지난 다음 해 큰 사고로 전혀 회생 가능성이 없는 ‘식물인간’ 막내딸의 곁을 꼼짝하지 않고 지키며 20년 동안 간병에 매달렸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점차 환자가 되었다. 결국 체력이 소진되어 고관절이 골절되는 큰 사고를 당하였다. “수술하지 않으면 고관절이 괴사한다”는 진단 결과였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자 걱정대로 치매가 소리 소문 없이 찾아왔다. 치매환자는 그 증상이 여러 가지다. 어머니는 야간 발작이 심하고 움직임이 불가능하였다. 가족회의를 한 뒤 노인요양원에 어머님을 모셨다. 매주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치매환자에게는 ‘삶과 죽음, 꿈의 경계가 없다’고 느껴졌다. 어머님의 의식이 조금 돌아왔을 때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기억력은 가까운 일부터 천천히 상실되었다. 문병 올 때마다 좋아했던 증손들을 먼저 잊고 손자, 며느리, 사위를 차례대로 잊었다. 장남인 필자를 마지막까지 겨우 알아보았다. 아버님과 막냇동생의 소천을 알리지 않았으나 누구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한 해 전에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밤중에도 휴대폰을 머리맡에 두고 있어야 하였다. 소원대로 아버님과 막냇동생을 따라 10년간 치매로 고생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치매 발병은 고령이나 유전이 주된 원인이라고 흔히 말하고, 불치병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요양원에서 만난 보호자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 ‘사고’가 의외로 많았다. 골절이나 외상이 없는 낙상, 조그만 외상 등 본인이나 주위에서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작은 사고가 면역력이 약해진 시니어에게 큰 병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치매는 당사자도 고생이 많지만 돌보는 가족의 고통은 더 심하다. 자신이 치매환자가 된다면 가족으로부터 격리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가끔 들었다. 하지만 막상 자기 앞에 닥치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인지능력이 상실되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치매환자다. 아무 대비 없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뿐인 ‘생명’이다.
아버지는 조상숭배는 물론이요 선산에 가묘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구순이 되던 해에 충수염 수술을 받고 나서 거동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백세인생을 넘보던 아버지는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산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뿌려 달라”고 자식과 손자까지 다 불러서 유언을 남기고 얼마 후 소천하셨다.
치매환자가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환자는 의식이 없어서 고통 자체를 모르지만, 괴로움은 오롯이 가족에게 남는 것이 치매다.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여야 한다. 가족이 모이면 종종 아내와 아들딸에게 이야기하고 대체로 의견을 모았다. 내가 걸리든 아내가 걸리든 마찬가지다.
우리 부부의 의견은 “건강하게 살도록 최선을 다한다. 치매에 걸리거든 가족과 분리하라. 그래야 남은 가족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중증이 되더라도 연명치료는 절대 하지 마라”였다.
치매에 걸린 남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남편이 밥을 먹는데 아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밥을 먹던 남편이 휴지에 밥을 싸기 시작한다. 누굴 주려고 밥을 휴지에 싸냐고 묻자 남편은 “너 먹어” 하며 휴지에 싼 밥을 아내에게 내민다. 아내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껄껄 웃고 만다.
TV에서 보았던 다큐의 한 장면이다. 아내 사랑이 지극했던 남편이 치매 때문에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는 걸 지켜보는데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겪는 치매는 다큐처럼 찡하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그저 힘겹고 혹독한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시아버지는 대문에서부터 손녀딸을 큰 소리로 부르며 들어왔다. 예쁜 손녀를 위해 매일 스펀지케이크를 사왔다. 이걸 누가 먹는다고 매일 사오냐고 시어머니는 현관에서부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크를 다른 빵으로 바꾸어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환불해 달라는 미안한 부탁을 하러 제과점으로 뛰어다니긴 했어도 시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몰랐다.
가끔씩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올 때도 있었다. 길을 잃어 힘들었다며 히쭉 웃었다. 아버님이 좀 이상하다고 하니 어머니는 “얘는 별말을 다 한다”며 서운해했다. 그때 아버님은 60대 중반을 막 넘긴 나이여서 가족들은 아버님에게 다가오는 치매 증상을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게 찾아왔냐는 의사의 말에 반성할 새도 없이 아버님은 무섭게 나빠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해 가족 모두를 고통에 빠뜨렸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올 때면 수줍게 웃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내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해댔다. 과묵하고 점잖던 집안의 가장이 심술쟁이 욕쟁이 할아버지로 변해갔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욕설은 정확히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이 아내의 의무라 생각했는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뽀얗던 어머니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가는 걸 보고 그 고생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본 후 치매가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라는 걸 알았다. 가족들은 말은 안 하지만 치매에 대한 불안증을 안고 산다. 만일 치매에 걸린다면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걸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치매는 노화의 일부이고 누구든 걸릴 수 있는 병이지만 건강한 생활습관만 길러도 발병률이 50%나 감소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삼성서울병원 나덕렬 교수는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듯 뇌도 열심히 훈련하면 건강해지고 근육이 생긴다며 술, 담배를 끊고 바른 식습관으로 체중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등 바른 생활을 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독서나 글쓰기, 악기와 외국어 배우기 등 앞쪽 뇌를 자극하는 활동이 치매 예방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가 권한 것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실천하기 어렵지 않은 항목들이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고 발병 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20년 이상 긴 잠복기를 거친다. 60대에 온 치매는 이미 40대에 내 몸속에 잠복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치매가 걱정된다면 40대부터 미리미리 치매 예방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치매로 아버님을 떠나보낸 나와 우리 가족이 얻은 가슴 아픈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