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오카리나에는 문외한이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은 있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악기인데 청명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일단 휴대가 간편해서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악기가 간단하게 생겼으니 배우기도 어렵지 않겠다는 추측도 했다.
필자가 사는 동네에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이 있다. 거여역 2번 출구에서 첫 골목 50m 정도 들어가면 간판이 있다. 지나다닐 때마다 간판은 봤지만,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이라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마음먹고 방문해봤다.
2층 입구에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나무 벤치에 걸쳐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명이 꺼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원장이 인사를 하며 반겼다. 조명을 밝혀준 후 박물관을 돌아보니 허투루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오카리나가 큰 방, 작은 방에 종류별로 빽빽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부드리오에 있는 오카리나 박물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오카리나 박물관이라고 했다.
오카리나는 원래 흙으로 만든 악기인데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낸다. 기원전 3000~4000년 전에도 이런 악기 형태가 출토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853년 이탈리아의 17세 소년 주세페 도나티(Giuseppe Donati)가 흙으로 거위 몸통 모양으로 만들었던 시기로 본다고 한다. 오카리나는 도나티가 지은 이름으로 이탈리아 말로 ‘어린 거위’라는 뜻이란다. 이어서 1876년 오스트리아의 피엔(H. Fiehn)이라는 사람이 오카리나를 제작은 물론, 1879년에는 호주 시드니 세계 박람회에 출품해 그때부터 미국으로 대량 수출하면서 대중화했다고 한다.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에는 오카리나가 약 2000점 전시되어 있다. 2007년, 관장이 직접 외국에 나가 오카리나를 사 모았고, 40여 명의 우리나라 오카리나 제작자들을 찾아가 오카리나를 기증받아 이 박물관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관장의 사비와 딸이 오카리나 강습으로 번 돈으로 임대료를 내가며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또 거여동을 문화 지역으로 만들고자 오카리나 외에도 카메라, 인형 등을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박물관 관람은 무료이고 구청 등에 지원 요청을 해놓았으나 성사 여부는 미지수라는 설명도 있었다.
오카리나는 가장 배우기 쉬운 악기라고 한다. 보통 알토 C 오카리나는 라에서 파까지 음계가 나오는데 이보다 한 옥타브 높은 소프라노 C, 한 옥타브 낮은 베이스 C, 더 낮은 콘트라베이스 C, 그리고 G, F 키의 오카리나도 있다고 한다. 악기 가격은 보통 10만 원 정도 하며 비싼 것은 몇백만 원 짜리도 있다. 흙으로 만든 것이 기본이고, 한 번 더 구워 유약을 바른 것도 있다. 금속, 플라스틱, 나무, 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오카리나는 유일하게 흙으로 만든 관악기이며 구멍의 크기로 다른 음계의 소리가 난다. 색소폰과 같이 연주하면 색소폰 소리에 묻혀 소리가 안 들리지만 오히려 먼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카리나란다. 파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배울 때는 다른 악기처럼 이웃 주민들의 민원이 있을 수 있어 연습실을 개방한다. 강좌는 12주 과정으로 12만원을 받는데 12주가 지나면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몇 가지 대중가요 정도는 연주가 가능하다고 한다. 거여동 주민을 위해 65세 이상 몇 명이 그룹을 만들어 오면 관장이 직접 무료 강좌를 해준다고 홍보했는데도 인원이 모이지 않는다고 했다. 관장은 오카리나는 노인들에게 적당한 악기라며 직접 이은미의 ‘녹턴'을 연주해줬다. 일요일은 휴관이고 단체 관광이나 해설을 듣고 싶으면 사전 예약을 해달라고 했다. 오카리나에 관심이 있거나 배우고 있는 사람은 관람할 가치가 있는 박물관으로 추천하고 싶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포르투갈.
영토는 한반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서유럽에서는 최고로 가난하다. 그런데 포르투갈 여행을 하다 보면 왠지 친밀하다. 일찍이 해양 진출을 통해 동양 마카오를 식민지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고 가난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겹고 사랑스러운 나라. 그라피티가 난무하는 좁은 골목길, 가파른 계단이 있는 빈민촌 같은 골목에서 은근슬쩍 비춰주던 강변의 아름다운 전경. 지는 햇살에 한껏 색깔을 내주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소도시 포르투 여행은 그냥 행복하다.
도우루 강변의 항구도시, 2000년 역사지구
도우루(Douro) 강변 도시 포르투(porto) 시내에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상 밖으로 앤티크한 웅장한 건물들이 온 도심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벤투 역,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이 포함된 도우루 강 어귀의 포르투 역사지구(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2000년 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고전주의,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시대별 건축물들이 있다.
포르투의 중심지인 자유(리베르다지, liberdade) 광장 위쪽, 포르투 시청사 주변에는 상벤투 역, 포르투 대성당, 76m 높이의 바로크 양식의 클레리구스(Clerigos) 성당과 종탑, 카르무(Carmo) 성당,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볼사궁전 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건축물 중에는 파란 타일을 이어 그림을 그려놓은 아줄레주(Azulejo, 주석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구운 포르투갈 특유의 푸른 빛 타일)가 특징적이다. 또 포르투는 를 쓴 조앤 롤링(Joan Rowling, 1965~)과도 연관 깊은 도시다. 조앤은 1991년 11월부터 이곳 인카운터 영어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다. 1992년 10월에는 현지 방송사 기자인 3세 연하의 조르즈 아란테스(Jorge Arantes)와 결혼해 1993년 7월에 딸을 낳았지만 그해 이혼하고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 명작을 남겼다. 그녀가 이 도시에 머물면서 자주 갔던 렐루 서점(Livraria Lello), 마제스틱 카페(Majestic Cafe, 1921년 오픈)는 이제 명소가 되었다.
포르투를 여행하는 재미는 따로 있다. 이런 역사적인 건축물도 좋지만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 여행이 특별하다. 강변의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여 지은 가난한 건축물들과 그라피티가 난무한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도우루 강변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이 해맑게 미소를 짓는다. 좁은 골목에서 만나는 작은 박물관, 오래된 개인 저택, 공원 등도 흥미롭고 현지인들의 친절도 정겹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도와줄까?”를 묻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포르투다.
도우루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와이너리
포르투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도우루 강변을 잇는 카이스 다 히베이라(Cais da Ribeira, 강변의 부두라는 뜻) 거리다. 도우루 강변 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도심의 집들이 이어지고 동(쪽) 루이스 1세 다리까지 와인 판매장, 노천 바들이 이어진다. 도우루 강변을 걸치고 있는 172m의 길이에 아치형의 루이스 1세 다리는 포르투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한다. 이 다리는 에펠탑으로 유명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Teophile Seyrig)가 설계해 1886년에 완공했다.
1층에는 자동차가, 2층에는 트램이 다닌다. 1, 2층 모두 보행자 도로가 있어서 걸어 다니며 강변 풍치를 감상할 수 있다. 다리와 강이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다.
강을 건너,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지역의 강변길에는 샌드맨(Sandman), 테일러(Taylor), 그라함(Graham), 카렘(Calem), 오플리(Offley), 크로프트(Croft), 도우(Dow), 라모스 핀토(Ramos Pinto) 등 유명 와이너리가 줄지어 있다. 입장료만 내면 와이너리의 역사, 특징, 재배 및 제조과정, 저장 중인 와인 종류와 특징 등을 알아보는 투어를 할 수 있다. 또 강변을 따라 ‘도우루 아줄(Douro Azul)’ 유람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강변에서 바라보는 풍치는 훨씬 입체적이다. 도우루 강변에 있는 6개 다리(동 루이스 1세, 마리아 피아, 인판테, 상주앙, 프레이소, 아라비다)도 볼 수 있다.
포트와인 이야기
포르투 와인을 ‘포트와인(Port Wine)’이라 부른다. 이곳이 포도 산지로 유명해진 시기는 17세기. 100년 전쟁으로 오랜 견원지간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냉전에 들어갔다. 단단히 토라진 프랑스는 영국에 와인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와인의 공급지를 새로 구해야 했던 영국 상인들은 빌라 노바 드 가이아로 이주해 자국으로 수출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의 항해는 한 달이 걸렸고, 그 사이 와인은 식초가 되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와인에 브랜디를 넣어 숙성시킨 포르투 와인이었다. 알코올 도수는 더 높아지고, 당분 발효가 중단되어 더 달콤한 맛을 냈는데, 이것이 큰 인기의 비결이었다.
그 후 포르투갈은 발달된 항해술로 일찍이 신대륙과 아시아에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한 서양 와인도 바로 ‘포트(Port)’다. 아직도 와인은 달고 은근히 취하는 술이라 여기고, 오래될수록 좋은 와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 ‘포트’ 때문이다. 포르투는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와인에 포트와인이라는 상표를 붙인다. 포트와인은 알코올 함량(18~20%)이 높아 취하기 십상이다. 잘 구운 닭 요리에 도수 높은 포도주 알코올에 취하는 포르투는 영원히 마음속 깊이 간직된다.
Travel Data
항공편 한국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직항은 없다. 먼저 마드리드, 파리,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서 포르투갈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면 한국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가는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마드리드에서 저가 항공을 이용하거나 차마르틴 역에서 야간열차를 이용해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 역(10시간 30분 소요)까지 가면 된다. 마드리드-리스본행도 운행되고 있다.
현지 교통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포르투까지 버스로 약 3시간 30분, 기차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리스본 공항역에서 출발하는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오리엔테 역(약 10분 소요)으로 가면 기차나 버스(Renex)를 이용할 수 있다. 기차는 포르투 캄파냐 역에서 환승해 지하철로 포르투의 중심지인 상 벤투 역에 하차하면 된다. 버스는 환승이 필요 없다.
맛집 정보 포르투갈은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프란세지냐(Francesinha)가 있다. 양이 어마어마해 ‘내장파괴버거’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또 그릴에 구워주는 닭고기 요리가 맛있다. 청과물 시장에서 파는 과일들도 맛이 좋다.
숙박 정보 포르투의 베스트 호텔은 도우루 강을 전망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이트맨(Yeatman) 호텔이다. 야외에서 레드와인 목욕을 즐기거나 와인 투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니콜라우 나소니(Nicolau Nasoni)가 설계한 페스타나 팔라시오 도 프레익소(Pestana Pala′cio do Freixo)는 바로크 시대에 지어진, 포르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 호텔의 프랑스풍 정원 앞으로 푸른 도우루 강이 펼쳐진다. 이 외 18세기 궁전을 개조해 만든 최고급 호텔인 인터컨티넨탈 포르투(Intercontinental Porto)와 2개의 실내 수영장, 터키식 목욕탕, 사우나, 스쿼시 코트 등을 갖춘 포르투 팔라시오 콩그레스 호텔 앤 스파(Porto Pala′cio Congress Hotel & Spa) 등 꽤 많다. 고급 숙소는 100만원이 넘지만 4~5만 정도로도 2인용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
물가 정보 포르투갈의 통화는 ‘유로화’다. 유럽에서는 물가가 낮은 편이어서 큰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날씨와 옷차림 유럽의 11월(가을)은 비가 자주 내리는 시기다. 평균 최저기온은 영상 11.2℃, 평균 최고기온은 영상 17.8℃로 선선한 가을 날씨를 생각하면 된다. 한 달에 2주 정도 비가 내리는데 적지 않은 양이기 때문에 우산을 지참해야 한다. 또 낮에는 선선하지만 밤에는 쌀쌀하니 긴소매 옷들과 두께가 있는 외투와 점퍼를 함께 준비하면 좋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포르투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이 넘치는 도시다. 세계 베스트 관광지에서 항상 최고 순위를 차지하는 곳이지만 물가가 그다지 비싸지 않고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다. 강변에서 여유롭게 낚시도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포도 수확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와인 투어는 필수다. 나라가 크지 않으니 수도 리스본과 주변의 소도시 여행을 연계하면 된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통영 한산도는 이순신이 창건한 조선수군의 수도였다. 조선 개국 이래 버려져 있던 섬이 ‘이순신 수국(水國)’의 서울이 되어 국방과 경제·산업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지낸 3년 8개월 동안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고, 피란민을 구제한 사실상의 수도이기도 했다.
싸우면 이기는 막강 조선수군의 병권을 쥐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제도에, 과거(무과)까지 시행해 민중의 신망이 높아진 이순신은 차차 왕의 의심을 사기에 이른다. ‘한산수국’이 강대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조는 끝내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 사이 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이 첫 전투에서 궤멸당해 한산도는 다시 이름처럼 한산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수영을 차린 것은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3년 7월 16일의 일이다. 왜적이 들끓는 경상도 수역에 자주 지원 출동을 나가게 되자, 여수에서 힘들게 노 저어 가 싸우고, 되돌아가기가 버거웠다. 7월 8일 한산대첩 때 이 섬의 가치를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은 조정에 이진(移陣)을 품신(稟申), 허락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진을 옮겼다.
이진의 필요성은 왕래의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남의 관할에서 싸우는 객장(客將)의 위치가 불편했을 것이다. 전투의 주장(主將)은 번번이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즉시 여수를 떠나 걸망포(통영), 칠천량(거제), 세포(거제), 역포(고성) 등을 돌며 잠시 머물 진지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감추고 기동이 편리한 포구를 찾지 못해 한산해전 때 봐두었던 섬으로 옮겨갔다. 한산도 두을포(豆乙浦), 지금의 두억리다.
한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밋밋한 섬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배를 숨기기 알맞은 포구를 감추고 있다. 섬 한가운데 제법 높은 산(망산·293m)이 있어 남해바다를 감제하기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견내량(見乃梁) 바다가 가까워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물길 견내량은 전라도 해로의 길목이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한산도를 선택한 까닭이 드러나 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진 다음날 지평 벼슬에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서에 그는 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으로 그때까지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완만한 경사지 너른 풀밭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산하던 섬이 삽시간에 번잡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진 1개월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전쟁 수행의 장애 요인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이순신의 직첩을 높여 원균을 휘하에 두도록 배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때까지 없던 직급이었다. “그대 휘하의 장수로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대가 군법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그 뜻이 숨어 있다. 이때까지는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 미뻤던 모양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육군은 존재감이 미미했고, 오직 수군만이 왜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70여 개 고을이 통제사 관할 아래 들어왔으니 가히 ‘수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교서지 한 장만 내려왔을 뿐이다.
조정은 지원은커녕 일선 장수들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올려 보낸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여럿 전해온다. 1592년 9월 18일 행재소에서 소용되는 종이를 넉넉히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우선 장지 10권을 보낸다”는 장계를 시작으로, 9월 25일 의연곡(義捐穀, 기부한 곡식)을 모아 한 배로 보낸다는 장계도 있다. 신하가 왕에게 종이와 쌀을 모아 보낸 것이다. 1594년 6월 26일자에는 “단오절 진상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장병을 먹이고 입히고, 전함과 무기 화약 등 각종 군수품을 조달할 책임은 당연히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명한 둔전(屯田)책이다. 그에게는 전라좌수사 때 영남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돌산도 둔전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통제사가 되자 군량 해결책으로 둔전 개간을 청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전라좌우도 소속 1만7000명 군사를 먹이는 데 적어도 하루 100석, 한 달에 3400석이 필요하다”고 한 장계를 근거로 추산하면, 3도 수군의 하루 군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연안 지역과 빈 섬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경작자들에게서 세곡을 받아들이자는 방안을 낸 것이다.
공도정책에는 어긋나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없는 조정으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둔전에서 식량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개간 기간과 수확이 나오기까지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칡을 캐고 고기잡이를 했다. 칡은 대용양식, 물고기는 부식이 되었다. 남는 고기는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었다.
여러 병영에서 필요한 갖가지 경비를 조달할 방책으로는 소금을 구워 팔았다. 그 시절 소금은 ‘백금’이라 불릴 만큼 값진 식품이었다.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와 조개류를 채취해 경비에 보탰다. 200여 년 공도정책 덕분에 남해 연안 지역과 섬들마다 황금어장이었다.
에는 쇳물을 부어 철부(鐵釜, 다리가 없는 솥)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소금 굽는 쇠솥을 주조했다는 말이다. 남해안의 소금 제조는 바닷물을 오래 끓여서 만드는 전오(煎熬) 제염법이 주류였다. 그만큼 많은 쇠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간이 끝난 농지에서 쌀과 잡곡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20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총포와 화약, 창과 칼, 활과 살 등 무기와 장비를 확충하기에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것들은 관련 산업을 일으켜 해결했다.
특히 조선업 진흥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을마다 솜씨 좋은 목수들이 한산도와 각 지역 수군병영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목재들이 실려 오고, 대장간마다 쇠 소리와 풀무질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여 산에서 선재용 나무를 끌어왔다.” 이런 일기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선(戰船) 건조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날로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1594년 5월 10일자 일기에는 수많은 전선이 건조된 것을 뿌듯이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
조총까지 제조되었다. 임진년(1592년) 4월 부산포에서 우리 병사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총을 만들어냈다. 왜적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떠 만든 것이다. 1593년 9월 14일자 일기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랐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야 만들어냈다. 왜의 총보다 성능이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해보더니 다들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제는 그 묘법을 알았으니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리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뒤의 일기에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을 만들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쓰고 선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도(還刀) 대검(帶劍)을 선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물 공업의 발달상을 알 만하다.
임진왜란 직후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수도였던 통영에 전통 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통영에는 옛날부터 12공방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신발, 목가구, 질그릇, 은세공 등등 격조 있는 집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용품 제조업 발달에 한산도 시대의 몫이 컸다.
이 정도로 ‘수국’이라 할 수는 없다. 끈질긴 상소 끝에 한산도에서 독자적인 무과(과거)시험을 실시한 것이 한산도를 ‘한산수국’ 수도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시험 출제와 관리를 군대 책임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비상시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12월 이순신은 전주에 내려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떠맡은 세자 광해군에게 당돌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만의 무과를 자신의 주관으로, 그것도 전주가 아닌 한산도에서 시행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진중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라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정예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시어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옵고….”
수하들을 이끌고 전주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분조의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시험장을 한산도로 해달라는 요구였다. 분조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명분을 외면할 수 없어 이순신의 건의는 채택되었다. 날짜는 4개월 늦춘 1593년 4월이었고, 합격자 100명도 거의 진중의 장병이었다. 시험과목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는 편전(片箭)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요구가 100% 수용된 셈이다.
한산도의 번영과 영광은 그때까지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가고 몇 달 뒤 한산도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첫 출전 부산포 해전에서 대패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함대 12척을 이끌고 돌아와 병영을 불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원균은 자기 수하의 배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대피했다.”
뒤따라 한산도에 들이닥친 왜적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분을 풀어보려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분탕질을 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까지 점령해 남해를 자기네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한산도에서는 제승당 포구에 자리 잡은 요트 선착장이 세월의 힘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격전의 현장에 생겨난 레저시설이라니! 오전 10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 페리 연락선에는 금요일 오후의 여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만선이었다. 긴 물거품을 끌고 달리는 페리 갑판 위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비명처럼 높았다.
30여 분의 항해 끝에 다다른 제승당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가 들어온 쪽을 돌아보니 사방이 뭍으로 둘러싸였다. 고동산 돌출부와 한산대첩비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와 내해를 방파제처럼 에워싸고, 그 너머로 미륵도와 통영 반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접근해오는 호화 요트 두 척이 제승당 포구에 들어와 접안하는 것을 보고야 그곳이 관광요트 선착장이라는 걸 알았다. 420년 사이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충무공에게 고하려 함일까!
현장에 가서 본 수루(戍樓)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섬 안의 반도’라 해야 할 내해의 곶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제승당 뒤편 망산 꼭대기에서는 견내량을 감제하고, 좌우 물길과 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런 지리(地利)를 가진 곳이 또 없다. 이곳에서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었다는 달밤이 저절로 상상됐다.
수루 뒤편 중앙에 잡은 제승당(制勝堂)은 본래 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이 수하 막료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장졸들의 의견도 듣던 곳으로, 집무실 겸 주거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원균은 첩을 들이고 울을 둘러 수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배설이 불태워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건물을 복구해 제승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통제영 시설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곳이 활터 한산정(閑山亭)이다. 바다를 끼고 145m 건너편 산비탈에 과녁 셋이 있다. 밀물과 썰물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 적응을 위해 일부러 바다 낀 곳을 골랐다는데, 아마도 국내에 이런 활터는 없으리라 했다.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이곳에서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594년의 과거시험 활쏘기 시험장으로도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다.
원균의 패전 이후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통영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다.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시절 두룡포(오늘의 통영)로 통제영을 옮기고 이듬해 건물을 지었다. 두 차례 증개축을 통해 앞면 9칸, 옆면 6칸의 목조 건물이 되었다. 여수 진남관과 함께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객사 건물로도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통영을 대표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이다. 300년 동안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유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정권 시대 충무공 시호에서 유래된 ‘충무’로 불리기도 했지만, 옛 지명을 선호하는 여론 때문에 다시 통영이 되었다.
강화도에 접어들어 관광객이 붐비는 도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 보면 앳된 군인이 차를 막아선다. 그가 전해준 비표는 이미 많은 이의 손을 거쳐 낡아 있었지만, 잃어버렸을 때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쥐어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때마침 잘 나오던 라디오 음악에 잡음이 끼어들며 괜한 으스스함을 더한다. 그렇게 언덕을 넘으니 교동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앞에서 다시 군인의 출입통제 시간에 대한 당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이 섬과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와 말이다.
키가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자리 잡은 섬으로 면적으로는 14번째로 꼽힐 만큼 큰 섬이다. 섬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 때는 탈출이 어려운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연산군은 이 섬에 유배돼 생의 마지막을 보냈고 광해군과 임해군, 고종 황제의 조카 이준용도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고려 때는 중국과의 교역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만, 교동도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집성촌이라는 것이다.
교동도는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탈북자가 있을 정도로 북한 황해도와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위해 교동도로 월남했던 황해도 도민들이 휴전 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다. 교동도의 대표적 관광지로 꼽히는 대룡시장을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슬픈 사연도 시간의 흐름에 바래버린 것인지 대룡시장에서 만난 한 실향민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이 시장에서 실향민은 별로 없어요. 다들 일흔이 넘은 나이이니까요. 많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두 인천이나 서울로 떠나 남은 실향민 가족도 거의 없어요.”
실제로 대룡시장의 명물 중 하나였던 시계방도 이곳을 지키던 주인의 죽음으로 멈춰버렸지만, 이어받은 이가 없어 문을 닫았다. 시간이 멈춘 것이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다.
실향민의 한, 켜켜이 쌓인 곳
이전까지 교동도는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탓에 출입제한이 있었고, 강화도에서 건너오는 뱃삯은 차량 편도가 1만6000원이나 되어 관광지로 환영받지도 못했다. 유동인구도 적었다. 이런 외부와의 단절은 시간이 지나도 그 시절을 붙잡아둔 듯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들었다. 약국이며 양복점이며 시계방, 잡화점 할 것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교동도의 대룡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지난 2010년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을 통해 소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완공되면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이어졌다. 교동도 토박이들은 아직도 이런 관심에 의아해한다. 대체 이곳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몰려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관광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교동다방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15년째 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은 섬의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이 중 하나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동네 장사였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섬에 사람이 꽤 많았어요. 다들 쌀농사를 크게 지어 풍족했죠. 술 마시다 흥에 겨워 2차, 3차 오는 모임도 몇 개나 됐으니까요. 그러다 사람들이 서울로 빠져나가면서 한동안 섬이 조용했다가, 다리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밀려들었어요. 여기 사방에 붙어 있는 메모도 다리가 생기면서 다녀간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써놓고 간 것들이에요. 장사가 잘될 때는 쌍화탕을 하루에 100잔까지 팔아봤어요. 이후 석모도에 다리가 생기면서 서울 사람들이 그리로 갔고, 요즘은 손님이 좀 줄었어요.”
대룡시장에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간식 ‘꽈배기’다. 관광객들의 배를 채울 만한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교동도의 한 주민이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장의 대표 상품이 됐다. 일부 상인이 놀러온 사람들이 물건은 안 사고 꽈배기만 입에 물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최근에는 외지 상인들이 대룡시장의 빈 가게들을 채우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복각해 곳곳에 붙여놓은 군사정권 시대의 포스터들도 시장의 옛 모습 위에 개성을 더하고 있다. 1970년대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일부 가게의 수익은 마을 공동체를 위해 쓰인다.
북한과 맞닿은 땅
키가 낮은 시장 건물의 처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낯선 제비집이다. 교동도 사람들에게 제비는 지켜야 할 귀한 손님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건물 안에 집을 지어도 내쫓는 법이 없다. 바다 건너 고향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 제비를 마치 북한의 가족처럼 대하는 실향민들의 마음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는 제비집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맘껏 드나드는 제비가 부러워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라며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간식도 제비콩을 즐겨 먹는다고 말한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려가면 망향대를 만날 수 있다. 실향민을 위한 작은 쉼터와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섬에 많지 않은 높은 장소 중에 군사시설을 피해 고른 탓인지 접근도 쉽지 않고 전망도 그리 시원치 않다. 그래도 지척에서 황해도 땅을 볼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북한 땅이 가깝다는 것은 실향민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지만 외지 출신 주민들에게는 공포가 되기도 한다. 2010년 바로 옆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한 주민은 자다 깨면 눈앞에 간첩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한동안 불안장애로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교동도는 다리가 생긴 지금까지도 일부 통제가 이뤄진다. 교동대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왕래가 완전히 차단된다. 여행지 정보를 미처 챙기지 못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갇혀 밤을 지새울 수도 있겠다는 괜한 걱정이 든다. 섬 안에 대형 숙박시설은 아직 없지만 몇몇 민박집이 운영 중이다.
인력으로 만들어진 평야
교동도의 또 다른 이색적인 모습은 벼 이삭으로 가득한 넓은 평야다. 섬에 무슨 평야가 있을까 싶지만 육지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농기계들을 길에서 쉽게 마주친다. 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미소가 이곳의 쌀농사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교동도의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섬 주민의 넉넉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섬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교동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곧고 길게 쭉 뻗어 있어 한국전쟁 때 활주로로 사용되었을 정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넓게 펼쳐진 논이 바다처럼 보이고, 가운데 작은 동산이 황금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교동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즉 분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땅이기 때문이다. 3개 섬 사이의 바다였던 이곳은 고려시대 때 대대적인 간척이 이뤄져 평야가 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이 간척을 주도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구저수지는 가물치와 베스가 잘 잡히는 낚시 명소로 낚시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 저수지로 지정돼 낚시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으로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교동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교동향교와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에 창건돼 국내에 남아 있는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초입을 따라 펼쳐진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군락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곳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교동도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다면 강화군에서 만든 강화나들길 중 두 개의 교동도 코스를 추천한다. 바로 ‘교동도 다을새길’과 ‘교동도 메르메 가는 길’이다. 한 코스당 소요시간은 6시간.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그래야 교동도의 멋진 풍광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우리 엄마는 충남 예산 사람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일찍이 고향을 떠나 사셨기 때문에 엄마가 충청도 사람이란 걸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충청도 지방을 여행하면서 가끔씩 엄마 손맛이 떠오르는 밥상을 받게 되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추석연휴를 마무리 하면서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건 외암마을에서 먹은 시골밥상이 생각나서였다.
외암마을에 들어가려면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한다. 표를 끊으며 보니 '외암민속마을을 재밌게 관람하는 방법'이 쓰인 안내판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쭈~욱 가서 홍보관 영상 보고 상류층, 중류층, 서민층 가옥을 둘러본 다음 자연미 넘치는 돌담을 따라 걸으며 마을 정취를 느껴보길 권하고 있었다. 안내문에 써진 대로 좌측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아빠 무등을 탄 꼬마나 나이 든 부모님이나, 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즐겁게 전통가옥을 구경하였다. 담 너머에서 들리는 다듬이 방망이 소리에 옛 추억이 생각난 사람들은 다듬이 체험장에서 신나게 방망이를 두드렸다. 어린 아이들에게 다듬이질을 보여주고 싶은 엄마들도 신이 나 보였다.
전시관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진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고즈녁한 동네가 나온다. 명문 고택과 초가로 된 농가가 한데 어울려 있는 소박한 마을이다. 마을은 온통 돌담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돌담의 길이가 무려 6,000m에 이른단다. 집 안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낮게 만든 돌담은 제주도 돌담과는 또 다른 운치를 느끼게 했다.
돌담길을 걸어 찾아간 곳은 이 마을 유일한 밥집인 신창댁이다. 밭에서 직접 길러 만든 반찬으로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먹을 수 있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1인분에 5,000원이니 시골인심이 듬뿍 느껴진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신창댁 아주머니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막 쪄낸 옥수수를 싸주었다. 내가 미안해 하자 '여긴 아직 촌인심이 살아있다'고 선하게 웃던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아주머니를 위해 달달한 파운트 케익 하나를 준비했다.
대청마루에 앉아 구수한 청국장찌개를 먹는 동안 아주머니는 방 안에서 빵을 드셨나보다. 밥을 다 먹었을 즈음, 빵이 너무 맛있다며 밥상도 물리지 않은 상에 다가오셨다. 아주머니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시부모님 몰래 밤 마실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려고 하니 시아버지 방에 불이 켜있어서 오도가도 못하고 쩔쩔 맸던 옛날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었다. 밥도 맛있고 커다란 대청마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도 즐거웠다. 마치 시골 친척집 아주머니집에 다니러 온 것 같이 편안한 느낌이었다.
여유로운 농촌에서 휴식을 즐기는 것이 요즘 여행의 트렌드다. 잘 여문 벼들과 감나무, 밤나무, 고염나무 열매가 풍성한 가을날, 외암민속마을을 거닐며 보는 풍경은 한없이 정겹다. 서울에서 차로 1시간 30분이면 올 수 있다. 게다가 외암민속마을 주변에는 현충사나 공세리성당, 온양온천, 도고온천, 아산온천 등 즐길거리도 풍성해 당일여행으로도 매력적이다.
10월 21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가을여행주간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를 비롯해 전국의 지자체와 민간기업이 함께하는 국내여행 특별 주간으로, 여행주간 기간 동안은 정부의 지원 아래 지자체, 관광업계가 협력해 전국의 주요 관광지에서 숙박ㆍ편의시설, 입장료 등을 무료 혹은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가을여행주간(fall.visitkorea.or.kr) 사이트를 둘러보고 깊어가는 가을을 즐기러 떠나보면 어떨까.
올해 22번째 맞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매스컴이나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별들의 잔치에 직접 참석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뻤다.
항상 보았듯이 빨간 카펫이 길게 깔리고 멋진 남녀 배우가 그 위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한다.
부산은 매우 역동적이고 활발한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다.
게다가 필자가 좋아하는 생선회에 대한 문화도 발달한 곳이어서 항상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다.
이전에 몇 번 관광차 왔을 때도 자갈치시장 등 부산은 시끌벅적하고 사람 부대끼며 사는 맛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이곳은 떠나고 만나는 인생의 애틋함이 느껴지는 항구도시이며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기도 하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정책기자단에서 20여 명의 기자가 함께 부산 국제영화제 취재차 여행을 시작했다.
하필 비가 내려서 걱정이었지만 하얀색 비닐 우비로 온몸을 칭칭 싸고는 내리는 빗방울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막식장을 찾았다.
비 오는 날씨임에도 수많은 사람이 영화제를 보기 위해 모였다.
외국인도 많았고 바로 옆자리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축제인 듯 즐기는 모습이었다.
개막식 전 축하공연으로 김용걸 댄스팀이 웅장한 볼레로 음악에 맞춰 멋진 군무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조각 미남 장동건 씨와 소녀시대 윤아 양의 사회로 개막식의 닻이 올랐다.
집행위원인 강수연 씨는 오랜만에 보는 모습인데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미국의 올리버 스톤과 중국의 리샤오펑, 이란의 바흐만 고바디 등 많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전했다.
특별한 시상식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창설부터 20여 년을 함께한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기리며 ‘지석 상’을 신설했는데 아시아영화의 발굴과 격려를 위함이라고 한다.
올해로 22년째인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명실공히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었다.새로운 작가를 발굴 지원함으로써 아시아 영화의 비전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1996년 시작되어 한국과 아시아 영화 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공헌한 부산 국제영화제이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을 상영한 이후 혼란을 이어오던 BIFF(부산국제영화제)가 예전처럼 활기를 되찾을지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역시 강수연 씨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니 우려가 현실이 될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이날 개막식에 모인 영화애호가들을 보니 우리 영화계의 앞날은 밝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가까이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큰 화면으로 무대 앞자리의 유명 영화배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성기도 보이고 손예진, 문근영의 모습도 보였다.
개막식이 끝난 후 상영한 개막작은 오랜만에 영화계에 돌아온 문근영의 이라는 작품이다.
초록 식물의 화면이 아름답게 펼쳐진 신비하고 독특한 소재로 문근영의 촉촉하고 서늘한 눈 연기에 흠뻑 빠진 좋은 영화다.
먼 항구도시 부산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을 보았으니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기억은 필자 마음속에 영원히 저장될 것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행복한 추억으로의 여행을 마쳤다.
경원선 백마고지역 개통 후 기차를 타고 철원평야에 처음 갔다. 경원선의 종착역이자 출발역인 백마고지역은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철도역이며 2012년 개장되었다. 이 역은 한국전쟁 중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공방전을 기념하기 위해 역 이름으로 명명했다. 신탄리 고대산에서 멀리 내려다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철원군의 남부는 대체로 산지를 이루어 금학산ㆍ고대산 등이 있다.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이 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흐르는데, 용암대지 위를 흐르면서 전형적인 유년기의 침식곡을 형성하였다. 하안에는 주상절리와 수직단애가 발달해 곳곳에 절경을 이루고, 역곡천이 군의 서부를 동서로 흐른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었다. 철원평야는 200~500m 높이의 분지이다. 영서 북부지방에 있는 이 평야는 삼남지방의 평야지대에 비하면 작지만 평야가 좁은 강원도 내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크다. 현무암이 풍화된 비옥한 토양은 농사에 적합하여 예로부터 철원 오대쌀이 유명하다.
철원평야에는 물이 부족하여 평지에 흙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곳은 날씨가 추워서 논농사 한 번으로 끝이다. 겨울철은 낱곡을 찾는 철새들의 천국이 된다. 이때쯤 월동작물 재배를 위하여 준비가 한창인 다른 들녘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밭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한가한 이국이었다.
차를 이용할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관광버스가 유일한 교통이동 수단이었다. 백마고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정도 안보관광을 하였다. 제2땅굴을 살폈다. 뭣 때문에 두더지처럼 바위를 뚫었나. 다음에 철원평화전망대에 올랐다. 철책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무장지대와 철원평야가 확연히 갈렸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는 아무 것도 없어 황량하였다.
민통선 너머로 푸르른 숲이 무성하다. 새들이 날고 짐승도 마음대로 뛰노는 우리의 강토다. 저 멀리 ‘피의능선’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관광해설사의 날마다 남과 북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백마고지의 혈투 설명에 가슴이 메었다. 수만 명 피를 흘리고 우리가 차지한 철원평야다.
철원군은 광복과 함께 38선 이북지역으로 들어갔다가 휴전이 성립되면서 철원읍 등은 수복되었으나 일부는 비무장지대로 또 다른 일부는 북한으로 나뉘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월정역을 둘러보았다. 통일대박을 꿈꾸던 곳이다. 하지만 월정역까지 복원공사가 중단되었다.
통일수도를 그려보았다. ‘한반도의 배꼽’ 이곳이 딱 좋은 장소다. 유라시아 철도를 개설하고 넓은 대륙으로 말을 달려보자. 갑갑한 가슴을 활짝 열어보자.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주는 시간이라고 했다. 패션에 대한 당신의 생각도 이젠 변화가 필요하다.
여행의 빛나는 하이라이트는 떠나기 전날 짐을 꾸릴 때다. 여행지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지는 짐을 싸는 그 순간 결정된다. 자, 자신의 여행 트렁크를 떠올려보자. 당신은 히말라야 등반을 가는 것도 아닌데 편하다는 이유로 등산화를 챙기고, 쌀쌀한 날씨를 감안해 등산 점퍼를 챙기고, 또 막 입어도 좋다며 등산 바지를 챙겨넣을 것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배낭과 스포츠 선글라스, 아웃도어 모자까지 넣다 보면 지구 어디로 떠나든 트렁크 속은 비슷해진다. 하지만 당신의 여행 티켓에 적힌 목적지는 등반을 위한 곳이 아니라, 유럽의 화려한 도시나 동남아시아의 평안한 휴양지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부터 여행은 꼬이게 된다. 배경만 다를 뿐 속리산 관광객과 똑같은 복장의 사진으로 도배될 것이고, 여행의 특별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영화 은 노년의 영국인 주인공들이 인도여행을 즐기는 내용이다. 최근 2편까지 나온 이 영화는 노년기의 사랑과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 머리가 백발이 된 배우들은 인도와 잘 어울리는 실크 아우터나 린넨 원피스, 스카프 등으로 차려입고 나오는데, 그 모습이 인도의 아스라한 배경과 어우러져 감동을 배가시킨다.
당신은 여행을 떠나며 목적지와 어울리는 옷에 대해 고민해본 적 있는가? 여행 패션의 기본은 편안함이지만 스포츠웨어 같은 방식의 편안함은 아니다. 테크니컬한 기능이 들어간 옷보다는 여행지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패션이 필요하다. 요즘 숙박 광고의 카피처럼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간접체험해 봄으로써 쳇바퀴 같은 삶에서 탈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백미다. 그 속에서 패션은 아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 이제 다시 트렁크를 싸는 여행 전날로 돌아가보자. 당신의 목적지가 도시인가? 그렇다면 편안한 소재에 실루엣이 여유로운 옷을 고르자.
어떤 상황에도 어울릴 옷으로 여자는 롱 드레스, 남자는 면 재킷과 스웨터를 추천한다. 휴양지로의 여행이라면 썬 드레스와 하와이언 셔츠처럼 비치와 잘 어울리는 아이템을 고르자(아웃도어를 입고 바다로 뛰어드는 꼴불견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했던가!)
여행 짐은 많을수록 독이다. 우선 어떤 스타일링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기본 아이템 위주로 챙기자. 그러고 나서 한국에서는 입지 못했던 혹은 잘 입지 않았던 가장 화려한 옷도 한 벌 넣자. 여행지에서는 남들 다 가는 패키지 코스를 벗어나 저녁에는 근사한 레스토랑도 가고, 우아한 공연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결코 즐길 수 없는 시간을 그곳에서 만들자. 그 시간을 대비한 갖춰진 옷이 필요하다. 진주 귀고리나 목걸이, 브로치도 챙기자. 남자라면 한국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보타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서리도 준비하자. 분명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네일숍은 여행 전 꼭 추천하고 싶은 코스다. 타지에서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탈을 해보자. 튀는 컬러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립스틱도 가장 화려한 것으로 준비하자. 네일 컬러 하나만으로도 기분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패션에 신경 쓴 당신의 여행은 등산복과 함께할 때보다 다채로워질 것이고, 여행 중 남기는 사진 역시 평소와는 다른 당신을 기록할 것이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꿔주는 것이라고 했다.
패션에 대한 당신의 생각도 이젠 변화가 필요하다. 여행 전날 밤, 가져갈 것과 남겨놓을 것을 챙겨보며 담아올 것과 버리고 올 것을 생각하는 시간. 그때가 바로 여행의 빛나는 하이라이트다!
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 해안 도시인 페트로바츠(Petrovac)는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구석은 없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 신선한 공기, 푸르고 맑은 물빛, 모래와 조약돌이 어우러진 해변, 16세기에 만들어진 요새, 바다 앞쪽의 작은 섬 두 개가 전부인 해안 마을이지만 동유럽의 부유층들에게 사랑받는 휴양도시다.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도시는 긴 여행에 지친 여행객의 마음을 매우 편하게 해준다. 낚싯대와 책 한 권이 꼭 필요한 곳이다.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
발칸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몬테네그로는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크로아티아처럼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안선을 끼고, 해안으로부터 디나르알프스(Dinar Alps) 산맥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풍경의 장관을 보여주는 나라다. 풍치는 빼어나고 음식은 이탈리아 버금갈 정도로 맛있고 물가도 싼 나라인데도 크로아티아 뒷전인 것은 순전히 매스컴 영향 탓이다. 무분별하게 보여주는 영상매체를 스스로 걸러낼 수 있어야 수준 있는 사람이다. 몬테네그로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크기로 유럽 내에서도 매우 작은 국가다. 좁은 땅에 로브첸(1749m), 오르엔(1894m), 두르미토르(2522m) 등의 고산이 90%나 차지하고 있어 매우 척박하다. 현지민들은 살기가 힘들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최상의 여행지다. 고산을 지붕 삼고 푸른 아드리아 해안을 정원 삼은 해안 도시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은 몬테네그로를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조우’라고 표현했다.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Podgorica)는 전쟁으로 온 도시가 폭격을 당했지만 아드리아 해안선은 완전히 다르다. 코토르 만을 따라 이어지는 293.5km 해안선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와 경계에 있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를 시작으로 페라스트(Perast), 티바트(Tivat), 리산(Risan), 코토르(Kotor)까지 그림 같은 해안 도시가 이어진다.
부드바와 바르 중간쯤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
그러나 아름다운 곳에는 늘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풍치에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때때로 지나친 상흔을 보여주는 곳이 번잡한 관광지다. 긴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때 찾았던 곳이 페트로바츠다. 페트로바츠는 수도 포드고리차의 식당 직원에게 추천받은 곳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서 몬테네그로로 입성해 터미널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음식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메인 요리를 두 개나 시켜 먹고 나서 영어를 잘하는 스태프에게 질문을 했다. “네가 좋아하는 도시를 추천해줄래?”라고 묻자 그는 메모지에 페트로바츠라는 지명을 써주었다. 지역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코토르를 도망치듯 떠나 ‘부드바(Budva)’에 점을 찍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바르(Bar)’까지 가버렸다. 버스의 남자 안내원이 인파에 밀려 동양인 여자가 목적지를 꼭 알려 달라 했던 지명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르에 도착한 버스의 여자 운전자는 말 안 해준 안내원보다 더 안달이 났다. 그녀는 페트로바츠까지 되돌아갈 수 있는 버스 편을 가르쳐주기만 했지 공짜표는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너네 잘못이니 표 값 돌려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생각일 뿐이었다.
로마 때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도시
페트로바츠는 부드바(17km)와 바르(21km) 중간 즈음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관광객들로 온통 북적대던 인근 해안 도시에 비해 조용하고 정적이다. 이 도시는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서인 듀클랴(Duklja) 공국의 성직자 연대기(年代記, 연대순으로 역사적인 사상을 열거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 로마시대 때 한 부부가 이곳의 크라스 메딘스키(Krsˇ Medinski)에 별장을 지으면서 사람이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을 욕조로 한 모자이크 조각이 세인트 일리야(Prophet Elijah) 교회 뒤에서 발견되었다. 원래의 지명은 라스트바(Lastva)였다가 20세기, 세르비아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Petar Karađorđevic´, 1844~1921) 왕조 때부터 페트로바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으로 나서면 600m 해안선을 가진 루치차 해변이 있다. 작아서 한눈에도 해안 주변은 다 보인다. 해안선 북쪽 오른쪽 끝에는 오래된 듯한 작은 요새가 있다. 반대편 해안에는 자그마한 소나무 산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가옥 몇 채가 있을 뿐, 해안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바다 앞쪽으로는 작은 섬 두 개가 있고 바위 섬 위에는 마치 ‘인형 집’ 같은 작은 교회가 있다.
영화 등 촬영지로 인기
우선 눈에 익은 듯한 북쪽 해안 끝 카스텔(Castel)로 다가선다. 작은 이 요새는 16세기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선원들의 작은 등대 역할을 했다. 요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와 싸우고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하기 위한 작은 오벨리스크가 기둥처럼 솟아 있다. 요새 옆의 거대한 아트갤러리(Red Commune)는 베네치아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창고 겸 검역소다. 와인 등의 제품들을 보관했고 전염병이 돌면 환자의 숙박시설, 검역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건축가인 마르코 그레고비치(Marko Gregovic)가 19세기 후반 개조해 오늘에 이른다. 이 건물에는 1만500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이 있고 연중 많은 연극, 예술, 음악 이벤트가 펼쳐진다.
특히 이곳 풍경이 낯익은 것은 영화 (레이첼 와이즈, 애드리언 브로디, 마크 버팔로 주연)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사기꾼 형제 중 동생(애드리언 브로디 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도망쳐온 곳이 바로 이곳. 레이첼 와이즈와의 사랑을 이루는 엔딩 장면도 이 요새와 레드 코뮌을 뒷배경으로 보여준다.
바닷가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은 카티치와 스베타 네제리아(Katicˇ and Sveta Neđelja)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앙증맞은 이 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정보부가 유고슬로비아 게릴라와 연락 교신하기 위해 주둔했다. 난파선 선원의 귀환을 기원하는 성 일요일이라는 작은 교회가 남아 있다. 교회의 종을 울리면 행운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지만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렵다. 이 도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현재도 외부 관광객보다는 현지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지노가 있는 멋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원 없이 휴양을 즐기면 좋을 곳. 아침 햇살을 맞으며 요새 근처의 바에 앉아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싶은 곳. 낚시를 즐긴다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힌다면 한국식으로 회를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Travel Data
항공편 직항은 없다. 동유럽, 서유럽, 터키 등지에서 항공편으로 몬테네그로로 진입한다. 포드고리차 티바트 공항은 도심과 50km 거리에 있다. 육로로는 주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에서 접근할 수 있다.
현지 교통 기차보다는 버스가 편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버스로 이용할 경우, 헤르체그노비를 거쳐 3시간 만에 코토르에 도착한다. 코토르에서 페트로바츠까지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해상 편은 굉장히 불편하다. 인근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등 형제 국가에서의 진입에도 엄격한 여권 검사 등 국경 통과 절차를 밟아야 한다.
화폐 공식 화폐는 ‘유로화’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해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언어문제 몬테네그로어와 라틴 문자,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관광지 대부분은 영어로 소통하는 데 문제없다.
먹거리 도시 안쪽이나 바닷가 쪽에 레스토랑, 바, 카페가 있다. 음식은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바닷가 근처라서 해산물이 많다. 또 몬테네그로산 프로슈토 햄도 유명하다.
숙박정보 카지노가 있는 호텔 외에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꽤 있다. 카지노 호텔은 30만원선이고 게스트하우스나 아파트는 5~6만원선에 이용 가능하다. 저렴한 호스텔은 없다.
날씨정보와 옷차림 몬테네그로는 해양성 기후로 여름이 길다. 9월은 물론 10월 낮에도 바닷가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습기가 없고 건조해서 여행하기 좋으나 낮에는 햇살이 따갑다. 10월의 평균온도는 20도 정도이니 가을 옷을 준비하면 된다. 겨울에는 9도 정도로 온도가 급강하한다.
치안정보 몬테네그로는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대부분 안전한 편이나 관광지에서는 바가지 상술을 겪을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란다.
페트로바츠 관광 사이트 www.petrovac.org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한국인들은 매스컴 등의 영향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을 선호하지만 바로 인접해 있는 몬테네그로의 풍경은 크로아티아 버금간다. 크로아티아 여행과 함께 몬테네그로 여행 계획도 세워보자. 그리고 페트로바츠에만 머물지 말고 시간 배정을 잘해서 몬테네그로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해보자. 크로아티아부터 시작해 아드리아 해안선을 따라 울치니(Ulcinj)를 벗어나 알바니아, 그리스까지 여행을 한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렌트(www.montenegro-car-rent.com)를 하거나 유람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