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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받음이다 PART8]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라 일본의 기부 문화 현주소
- 우리말 가운데 ‘이웃사촌’은 잘 보존된 전통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살아 있는 미풍양속, 즉 미덕(美德)이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이상, 사회 속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며, 특히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이는 기쁨과 슬픔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웃을 돕는 행위는 크게 모금과 기부, 그리고 봉사로 나눌 수 있겠는데 최근에는 재능 기부의 형태로 크고 작은봉사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금전적인 제공의 모금과 다르게 기부의 범위가 단순한 물품의 제공을 넘어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모금은 재해로 인한 생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지역과 재해민에게 전달되는 의연금과 현지에서 지원 활동을 벌이는 단체들에 제공되는 활동지원금으로 분류되는데, 후자는 대개 ‘기금’이라고도 한다. 2011년, 그해 6월 일본 적십자사는 일본 코카콜라 주식회사와 손을 잡고 모금 기능이 딸린 자동판매기를 실현시켰다. 일본 적십자사는 그동안 자동판매기의 판매액 일부가 적십자사로 기부되는 ‘지원형자동판매기’를 설치하여 운영해 왔는데, 거기에 판매기 본체에 10엔과 100엔 전용의 모금 스위치가 설치되어 ‘이용자가 직접 모금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동판매기를 추가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2011년 9월에 활동을 시작한 특정 비영리활동법인 기부형자동판매기보급협회(kjf.or.jp)를 중심으로 현재 일반재단법인 일본 국제기아 대책기구, 특정비영리 활동법인 아시아 식림 우호협회와 국경 없는 의사단, 일본 국제자원봉사센터, 인정 NPO 법인 굿네이버스재팬과 난민지원협회 등 수많은 단체가 이용 중이다. 또한 아이치(愛知) 현 등 일본 전국의 지역자치단체에서 광역별로 지역 공동기금 조성에 기부형 자동판매기를 이용하고 있다.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부 행위에 따르는 번거로움과 기부의 투명성을 해결하기 위한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브원(www.giveone.net)이 운영 중이다. 기부 라이프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이 사이트는 NPO프로젝트 단위로 기부할 수 있는데, 각 프로젝트의 내용 검색은 물론 각종 리포트를 통한 비교 검토도 가능하다. 사용자는 자신의 관심에 일치하는 기부를 골라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신용카드 기부를 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온라인 모금 사이트이다. 또한 단체 지정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테마로 활동 중인 여러 단체에 기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테마 기부도 가능하다. 기부를 마친 사용자는 활동 리포트를 통해 자신이 기부한 프로젝트의 ‘자금’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재 환경, 마치즈쿠리(거리 만들기), 긴급재해, 문화 예술 스포츠, 국제협력, 고용 취로 지원, 인권평화, 어린이 청소년, 여성, 장애우 등 10개 분야에 235개 프로젝트가 운영 중이다. 불용품이 소중한 지원품으로 국제사회지원 추진회가 운영하는 월드 기프트(world--gift.com) 사이트를 살펴보면 일본 전국의 사용하지 않는 물품과 기증품을 받아 개발도상국에서 활동 중인 여러 NGO와 기금에 기부하고 모금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쓰이고 있다. 지원물자는 헌옷, 인형, 잡화, 식기, 장난감 등 다양하며, 재사용 및 재활용으로 발생하는 이익금도 국경 없는 의사단, 세계자연보호기금, 유엔 식량지원기관인 WFP 등에 기부금의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유치원과 보육원에는 문방구 등을 기부하고 있다. 한 이용자는 “인형과 의복, 그리고 문방구를 포장했는데, 모두 오래되고 그중에는 더럽혀진 물건도 있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활동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다시 기회가 있다면 또 이용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철도회사의 자연사랑 실천 일본의 철도회사 오다큐( 小田急) 전철은 올해 5월 후지산이 보이는 도쿄 근교의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하코네초( 箱根町) 마을사무소를 찾아 하코네초 자원보전기금 142만3896엔을 기부했다. 이는 오다큐 전철이 하코네초의 천연수를 사용해 2009년 4월 선보인 미네랄워터 ‘하코네의 숲에서’와 2012년 12월부터 발매된 ‘하코네 숲 녹차’가 판매될 때 한 병당 1엔을 기금으로 모은 돈이다. 2009년 4월부터 기부 총액은 1890만 엔에 달한다. 1년에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기부가 이뤄진다. 이들 두 음료수는 오다큐 전철이 달리는 노선의 각 역 매점과 자동판매기, 지역 슈퍼마켓과 편의점, 오다큐 그룹의 각 점포와 하코네초 사무소 등 관련 시설과 식당 내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는 지역자치단체와 철도회사의 상호 시너지 효과를 높인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의 특산물과 관광명소를 살려 그 혜택과 이익금을 지역에 환원하는 예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이용한 각종 상품에서도 볼 수 있다. 21세기형 고향 사랑의 실천 일본은 2008년부터 ‘후루사토(고향) 납세’ 제도를 실시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후루사토 납세는 본인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더라도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개인적으로 내는 기부금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개인이 2000엔 이상의 기부금을 원하는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할 경우 본인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세금이 환급 공제된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현재 구조로는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루사토 납세’는 거주지에 내던 세금의 일부를 본인이 원하는 임의의 지방자치단체로 분산해 대도시 중심의 세금 집중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루사토 납세를 통해 기부하는 이용자들에게는 기부하는 지역의 특산품을 제공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수산물과 농산물, 상품 등의 선물에서 지역온천의 숙박권, 그리고 인기 관광명소와 다양한 시설 이용권을 보내준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한 지방자치단체를 응원하면서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정확히 알고 납부할 수 있는 장점에 선물과 소득세 혹은 주민세의 공제 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해마다 이용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도입 첫해인 2008년 기부자는 총 3만 명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2014년에는 총 15만 명이 참가했다. 사이타마(埼玉) 현에 거주하는 요시다 씨(32세)의 경우 맞벌이 부부로 세살짜리 딸이 있는데, 연간 세대 수입은 650만엔으로 ‘후루사토 납세’ 공제 한도는 약 12만4000엔에 실제로는 군마 현과 나가사키 현의 두 군데에 총 10만 엔을 기부하고 있다. 세금 환급으로 결국 자기부담 2000엔에 불고기와 스키야키 세트 1.1kg×5세트, 고시히카리 쌀 10kg×3세트, 양식 참치 400g×2세트 등을 선물로 받았다. 한편 ‘후루사토 납세’는 장기적으로는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태어난 사람을 비롯해 해외 귀국 자녀, 그리고 일본 거주의 외국인들에게도 제2의 고향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간다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로서는 그 지역의 특산물을 일본 전국에 홍보하는 한편 각종 숙박권과 시설권으로 관광객 유치의 효과도 노릴 수 있어 2, 3차적인 경제적 연쇄효과가 기대된다. 일본 전국의 ‘후루사토 납세’ 특산품과 혜택, 그리고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관련 사이트 운영도 점차 늘어나고 있어 새로운 비즈니스의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 경시청 보고서는 2011년 당시 1만5878명 사망, 6126명 부상, 2713명 실종을 확인했다. 또한, 25만4204동이 반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12만9225동이 붕괴되었고 69만1766동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확인하였다. 기부금은 ‘마을자원보전기금’에 적립돼 자연환경 보전활동 등에 쓰인다. 매년 일본 전국의 대표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대상으로 인기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2015년 그랑프리 투표 사이트 는 다음과 같다. www.yurugp.jp/vote/ 예를 들어 5만 엔까지 공제가 가능한 사람의 경우 ‘후루사토 납세’로 5만 엔을 지방자치단체에 보낼 경우 2000엔을 제외한 4만8000엔의 세금이 되돌아오며, 거기에 1만 엔당 3000~5000엔 상당의 그 지역 선물까지 받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결국 ‘1만 엔을 기부하면 답례로 쌀 10㎏을 받을 수 있다’는 지방자치단체 5군데에 ‘후루사토 납세’를 하면 자기 부담 2000엔에 50㎏(10㎏×5)의 쌀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2015-12-3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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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뉴스, 그 사람]“서울올림픽의 의미는 6·25만큼 중요”
-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운용(金雲龍·85)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정치인과 관료, 경제인이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거쳐 갔지만 유치 준비부터 폐막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 이는 김 전 부위원장이 유일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6·25전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의미를 돌이켜본다면 지금은 저절로 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나는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역사에서 6·25전쟁에 비견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축 늘어져 있던 한국 국민이 ‘우리는 할 수 있다, 해 냈다’고 느끼면서 의식을 개혁하게 됐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사에 남긴 의미는 단순한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적인 의식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서울올림픽의 모토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세계무대에서 정말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문화국가로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올림픽이 최초로 기획된 것은 언제인가 얘기를 하려면 먼저 1978년 제49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씨와 함께 유치한 대회였다. 멕시코에서 선수단 숙식을 하루 10달러에 제공해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급해진 나는 하루 5달러면 된다고 ‘뻥’을 쳤고 결과적으로 대회를 잘 치르게 됐다. 사격대회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약간 허황된 건의를 했다. 박 대통령이 검토해보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정부가 올림픽 유치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국민체육심의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정부에서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고 나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서 참석했다. 대부분 올림픽 유치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박종규 씨가 “유치에 직을 걸자”고 주장하면 김택수(전 IOC위원) 씨는 “내가 왜 그만두느냐, 당신이나 그만둬” 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뭘 해보기도 전에 10·26사태가 터졌다. 세상이 뒤집혔으니 (올림픽 유치계획도) 그렇게 스톱이 됐다. 다시 정부가 유치방안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직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여러모로 어려울 때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나라를 끌어올리기 위해 올림픽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악했다. 얼마 전에 전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때는 IOC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더라. 돈도 참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 국제심판도 없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이 나밖에 없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좌우지간 우리나라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나고야가 우세했는데 어떻게 역전했나 나고야는 승리를 과신했다. IOC총회를 맞는 자세나 준비는 부실했다. 나고야의 전시실에는 여성 홍보요원 두 명에 사진 몇 장이 전시돼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 보여줬다. 일본은 나고야가 중심이었지만 우리는 거국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나고야가 아니라 한국과 나고야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개최지 발표 순간 “쎄울, 꼬레아” 소리에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멍해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쉬움이 남는 순간은 2001년 총회에서 유색인종 최초로 IOC위원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쉽고, 2005년 5월 구속된 상태에서 불명예스럽게 IOC위원을 사퇴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2008년 복권이 돼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연례보고서에서 ‘김운용씨가 한국 정치인들에 의해 2003년 실시된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의 희생양이 된 양심수’라고 기록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최근 활발히 힘을 쏟고 있는 일이 있는지 집필 활동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온다. 현업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경험하고 배웠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기려고 한다. 만나게 해달라면 연결해주고 얘길 해달라면 해주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돕겠다. 이름을 빌려달라면 빌려주고 뛰어 달라면 뛴다. 한국에서 IOC위원 50명과 아무 때나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밖에 없다. 아직 운동도 하고 있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필라테스도 한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어렸을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열심히 쳤다. 서울 삼선교 인근에 사시던 신재덕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배웠다. 1947년 당시 레슨비가 한달에 2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내게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피아니스트가 꼭 돼보고 싶다. 연세대 재학시절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쳤다. 대학 1학년때는 전교 음악회에서 독주도 했다. 쇼팽의 음악을 곧잘 연주했다. ‘즉흥환상곡’을 가장 좋아했다. 쇼팽의 음악에는 연인에 대한 로맨스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6·25가 발발하면서 공부도, 음악도 그만둬야 했다. 외교관으로 주미 대사를 하면서 국제법 학자이자 피아니스트를 해보고 싶다.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 분과위원장,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외 체육계에서 맹활약했다.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2부산아시안게임 등 대한민국이 주요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하는 과정은 대부분 김 전 부위원장의 손을 거쳤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에서는 남북한 공동입장을 성사시켰다. 그는 태권도 세계화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취임 이후 국기원을 건립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효자종목’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적으로는 대통령특사 국제교류대사를 맡은 바 있으며 16대 국회에서는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교수, 미국아메리칸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 석좌교수 등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1989년부터는 아호인 윤곡(允谷)을 따 국내 최대 여성 스포츠 시상식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시행해 왔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인 박동숙씨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약력 1931년 대구 출생(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美메리빌大 법학박사) 1961년 내각수반 비서관·국방장관 보좌관 1963년 주미대사관·주UN대표부·주영대사관 참사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대한체육회 이사 1972년 국기원 건립, 국기원 이사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설총재 1985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TV 분과위원장 1990년 대통령특사(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199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1993년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96년 외무부 국제체육교류 대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재 아메리칸스포츠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 2015-09-11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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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나의 性칼럼] 포경수술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 “선생님, 물어보기 좀 거시기하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돼유?” “저는 거시기한 부분만 보니까 물어보셔도 돼요.” “그러니까… 제가 포경수술을 안 했는디, 요즘에 자꾸 껍데기가 헐어서 안 좋네요. 무슨 큰 병은 아닐까요?” 진찰을 해보니 음경의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포피가 헐어서 전체적으로 돌아가면서 세로로 터져 있는 모양이었다. 염증이 심하지는 않았고, 단지 피부가 헌 정도로 보였는데, 아프거나 덧나지 않도록 연고와 약 처방을 해준 후 말씀드렸다. “아버님, 나이가 드시면서 피부의 탄력도 떨어지고 더 약해져서 그런 거니 자꾸 재발하면 포경 수술을 지금이라도 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그게 위생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환자분은 2주 정도 후에 국소마취로 포경수술을 하고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잘 지낸다. 자, 그럼 포경수술은 도대체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나이가 들어서 해도 아무 상관 없을까.사실 포경수술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행해왔던 수술 중 하나다. 주로 고대 이집트와 중동 등 이슬람권 국가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슬람교, 유대교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계속돼 왔다. 우리나라는 어떤 종교적 배경이 없는데도 포경수술을 많이 하는 편에 속해왔는데, 신생아 포경 수술이 인권문제로 대두하면서 많이 감소한 추세다. 그러면 안 해도 되는 걸까. 포피가 귀두를 덮으면 청결한 환경 유지에 어려움이 있고, 소변 잔류물 등으로 냄새가 날 수 있다. 성인이 됐는데도 귀두가 노출되도록 포피가 벗겨지지 않으면 (이를 진성포경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가 생긴다. 또 한 가지, 요즘 감염 관련 연구에서 많이 나오는 보고 중의 하나가 세균감염이라 바이러스에 의한 성병이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남성에서 포경수술을 한 남성보다 더 전파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서구의 여러 나라가 연합한 연구에서 아프리카의 후천성면역결핍증 (AIDS) 바이러스의 전파에 관해 포경 수술 여부가 영향이 있다는 것을 발표한 지도 한참 됐고, 국내의 연구 데이터도 비교적 흔한 성병인 곤지름(성기사마귀), 헤르페스 등 성적 접촉으로 전파되는 질환은 아무래도 포경수술을 한 쪽이 위험도가 덜하긴 하다. 특히 평균 수명이 80세 이상으로 길어지고, 중년 이후의 연령층이 더 두꺼워지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고, 성생활에도 건강을 유지하려면 안 하는 것보다는 수술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의학적으로 신생아 포경은 음경암을 예방하려는 의미가 클 뿐, 그 밖의 다른 장점은 없다. 비뇨기과 의사 입장에서도 아무리 어린 아기라도 바늘로 찌르면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데, 엄마 젖도 다 떼지 않은 아이를 소량의 마취제만 바르거나 아직 신경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마취도 안 하고 포경 수술을 하는 것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생활환경이 좋아지고, 건강관리도 잘 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음경암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발생빈도도 선진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0.3~1% 정도로 확 줄어들었다. 국민 건강 면에서는 음경암을 걱정해 신생아 포경 수술을 해주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포경 수술을 한다면 무슨 이유로, 언제 해야 하는 걸까? 필자의 비뇨기과 의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당히 주관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포경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는, 첫째, 귀두 포피에 반복되는 염증이 생기는 경우 입구의 협착을 막고 더 위생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해 줘야 한다. 둘째, 성인이 돼서도 포피가 뒤로 젖혀지지 않는다면 해줘야 한다. 셋째, 성생활이 예전에 비해 많이 오픈되어 있고, 훨씬 더 어린나이부터 성생활을 하고, 성 상대자가 인생에 걸쳐 한 사람만 있는 경우가 드문 요즘 젊은이들은 해줘야 한다. 성병에 걸리거나 성병을 보균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다. 넷째, 어쨌든 수술 없이 잘 지내왔는데, 나이가 들면서 포피가 자주 헐거나 붓는 경우 전문의의 진찰과 상담을 거친 후 수술을 해 주는 것이 낫다. 반드시 비뇨기과의사의 상담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성기나 음낭의 모양이 비뚤어져 있거나, 성기가 살 속에 숨어 작은 경우는 그냥 포경 수술을 하면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 포피가 모양을 교정하는 데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술을 언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니면 차후에라도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고 싶은지 등등을 고려해서 수술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성병 문제만 따진다면 성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해주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런 면을 고려하면 만 10~12세 정도가 제일 적당하다. 이 시기를 지나서는 언제든 상관이 없다.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서 결정하고, 편한 시기에 하면 된다. 나이가 들었다고 ‘이 나이에 무슨 포경 수술이야’ 할 게 아니라 건강관리상 유리하거나 필요하면 하는 것이다. 단,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남들이 안 하니까 안 한다든지, 주변에서 많이 하니까 한다는 식의 결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골골 백세’가 아니라 ‘건강 백세’, 기왕이면 건강하고 탈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닌가. >>> 윤하나 이대목동병원 비뇨기과 교수 대한성학회 상임이사, 대한여성 성의학 연구회 학술이사, 대한요실금배뇨장애학회 교육이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 와 공동저서 등이 있다.
- 2015-09-11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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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지금은] 그대는 꽃 '인순이'
- 그녀가 노래를 불렀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수많은 가톨릭 신도와 일반인 앞에서. 2014년 6월 15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앞에 열린 특별 공연이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거위의 꿈’,‘우산’,‘친구여’였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전 “‘거위의 꿈’을 부르며 희망을 나누고, ‘우산’을 부르며 서로 힘이 되는 사람을 생각해보고, ‘친구여’를 부를 때는 함께 잘 살자는 힘을 북돋우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대중에게 노래를 통해 희망과 힘, 감동을 주는 그런 가수다. 인순이(58)다. 그녀는 여전하다. 무대에서, 방송에서 활력이 넘치는 가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 올 들어 생소한 하나의 모습이 더해졌다. 진행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녀는 지난 1월 5일부터 방송된 KBS 프로그램 ‘그대가 꽃’의 MC로 나서 시청자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 드라마와 토크 형식이 혼합된 ‘그대가 꽃’에서 인순이는 다양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울고 웃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녀를 보면 엄동설한 忍冬草가 떠오른다 젊은 아이돌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하며 현재진행형의 전성기 가수로서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인순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동초(忍冬草)가 떠오른다. 인순이가 엄동설한에도 잎과 줄기가 얼어 죽지 않고 견디다가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인동초 같기 때문이다. 인순이의 오늘은 숱한 아픔과 고통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우리는 인순이를 수식한다. ‘한국 최고 가창력의 가수’, ‘한국 디바의 최고봉’,‘세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팬을 확보한 스타’,‘폭발적인 카리스마와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가수 여왕’,‘판소리에서부터 댄스까지 모든 음악을 소화하는 이 시대의 여자 가객’이라고. 그리고 또 묘사한다. ‘혼혈아의 희망’,‘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의 수호천사’라고. 인순이는 말했다. “나 자신에게 박수치고 ‘진짜 멋져’라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내가 봐도 정말 근사하고 멋지게 살아온 걸요. 내 앞에 많은 장애물도 헤쳐가면서 말이에요.” 대중과 전문가로부터 극찬의 수식어로 묘사되는 인순이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평했다. 이러한 찬사를 받는 사람이면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인순이’라고 하면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된다. “가난하든, 장애가 있든, 무엇이 부족하든 누구나 보편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름과 틀림에 대한 생각이 중요하다고 본다.” 인순이가 지난 2월 2일 국가인권위원회로 인권홍보대사로 위촉된 뒤 밝힌 소감이다. 인순이의 소감은 그녀가 가난해서, 황색과 다른 검은색 피부로 태어나서 차별과 편견 속에 자랐기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한때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인순이. 이제 그녀의 이름은 우리에게 희망과 감동의 등가물이다. 인순이는 혼혈 가수와 무명 등 힘든 상황에서 노력해 성공한 연예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이 용기를 내 삶을 살아가게 힘을 주는 인생의 좌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을 뿐” 그녀의 나이 58세, 그리고 가수 활동 경력 37년, 이 정도의 나이와 경력은 연예계에선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순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인순이는 10~20대 가수도 소화하지 못할 대형콘서트를 혼자서 소화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돌 그룹의 전유물이라는 ‘뮤직뱅크’, ‘쇼! 음악중심’뿐만 아니라 ‘열린 음악회’단골로 출연하고 있다. 대중은 인순이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조건반사적으로 특유의 활력이 넘치는 노래와 퍼포먼스를 기대한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인순이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시련을 이겨낸 입지전적인 스타’라는 표현이다. 인순이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흑인 아버지 사이에 혼혈아로 태어난 순간부터 차별과 편견 속에 던져졌다. 오죽했으면 “학교 다닐 때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자랐다. 여기에 그녀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채 생업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혼혈아, 학력, 경제력, 아버지 부재 등 우리 사회에서 힘든 경우의 수를 모두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바로 1978년 3인의 여성 그룹으로 결성된 희자매다. 희자매 때 인순이는 빼어난 댄스와 가창력을 보였지만 대중이 보내는 시선은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 가득 찬 이색적인 외모만을 향하는 것이었다. 이때 인순이는 이를 악물었다. 인순이는 “20대 때 유일한 바람은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자’였지요. 힘든 걸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잠깐 오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이길 수 있었어요. 인생을 살면서 돌부리에 채이고, 눈도 맞고, 비도 맞는 거로 생각하면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혼혈아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대중의 시선에 대해서도 “내가 합리화시키려고 너무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외국에도 차별은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엔터테이너입니다. 어떤 거라도 돋보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라며 웃었다. 희자매를 떠나 솔로로 나서면서 노래를 부를 때는 온 힘을 기울였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순이의 유일한 존재 의미였기 때문이다. 뛰어난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보여온 인순이는 가수로서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 공연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음악적 실험, 새로운 장르의 도전, 무대의 규모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인순이는 “춤을 추더라도 안정적으로 노래를 끌고 가야 합니다. 숨차서 헉헉대면 ‘인제 그만 하지’라는 소리 들을 수 있으니까요. 댄스곡이 있으면 뛰면서 연습합니다. 후배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늘 새로운 음반을 구입해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인순이에게 “정말 프로다”라는 말을 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프로정신은 거창한 거 같고 살아남겠다눈 생각이었어요. 오랫동안 살아남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했어요”였다. 이투데이 신춘음악회서 열정의 무대 발산 “2006년 9월 4일, 제 인생의 전부였고 가장 소중했던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때도 공연장에서 공연했죠. 관객들에게 아무 내색도 않고 웃고 떠들며 활기차게 공연을 했죠”라는 인순이의 말은 그녀가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의 무대를 꾸미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오늘의 인순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멍에처럼 짊어진 편견과 차별, 궁핍에 굴복하지 않고 이겨내며 체득한 생명력,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삶의 긍정성, 그리고 오늘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 무시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태도 등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순이를 진정한 스타로 찬연하게 빛을 발산하게 하는 또 하나가 있다. 인순이는 다문화 가정 자녀 등 과거의 자신처럼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가 필요한 데는 늘 달려가려고 해요.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잖아요. 저는 힘든 시절과 시련을 겪었을 때 저에게 내민 따뜻한 손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힘이 되는지를 너무나 잘 기억해요. 작은 사랑이지만 늘 내 손을 내밀려고 노력해요.” 무대에서 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관객과 사람들에게 감동과 힘을 안겨주는 인순이가 3월 5일 열리는 이투데이 주최 신춘음악회 ‘2015 따뜻한 콘서트’에 나선다. 벌써 기대가 된다. 그녀가 이투데이의 신춘음악회를 어떻게 수놓을지가…
- 2015-03-12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