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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자의 계단
- 시원한 새벽이다. 소나기 한방에 제일 무더웠던 여름도 막을 내리고 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사회은퇴생활 너덧 해가 되었다.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프로필을 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직업기재하기가 제일 곤혹스러웠다. ‘무직’으로 통용되던 직업란에 몇 년 전부터 ‘은퇴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은퇴자는 현역시절 직업을 바꿨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은퇴자에게도 ‘수습단계’가 필요한 대목이다. ◇‘자기명함’이 필요할 때 서랍 속에 빼곡히 쌓여있던 남의 명함을 정리하고, 남아있는 자기명함까지 다 버리면서 사회은퇴는 시작되었다. 방학을 맞은 학생처럼 홀가분하였고 영원히 자유로운 날개를 다는 것 같았다. 남처럼 가족여행을 하거나 친구들과 산을 찾았으면서 한두 해가 꿈같이 지나갔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회평생교육과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참여하면서 새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또래 친구들을 사귀면서 매일 즐겁게 생활하였다. 하지만 첫 인사 나눌 때 쉽게 전했던 명함이 없어서 매우 당혹스러웠다. 서로 상대방 연락처를 휴대폰에 두드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자원봉사현장에서 자기소개 기회가 있었다. 중년여성 회원이 “저는 가정주부 000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명함을 건넸다. 가정주부 000, 전화번호와 이메일, 블로그, 아름다운 캐릭터도 새겨졌었다. 이른바 ‘자기 명함’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별다른 사회활동이 없었지만, 장래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여 예비명함을 만들었다. 그후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자기 명함’이 많이 생겼다. 자기명함이 필요함을 느낄 때가 진정한 은퇴자가 되는 첫 관문이다. ◇주위에 현혹되지 않을 때 은퇴자는 명함 한 장 남아있지도 않는 과거자랑을 좋아한다. 듣는 사람이 추임새라도 넣어주면 옛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행동이 허망하고 앞으로 삶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입을 다물고 남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 계단을 오른다. 남의 말에 귀가 얇아진다. 몇 년 전부터 사회평생교육에서도 시니어를 자극한다. 창조경제,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하여 일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경제 불황과 저금리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쉽게 빠져든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두 번째 관문이다. ◇새로운 것 찾아 사회공헌을 실천할 때 사회평생교육에 참여하여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맞춰서 새로운 공부를 열심히 한다.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에서 받았던 은혜를 후대에 전수하려고 노력한다. ‘100세 장수시대’라고 하지만 건강하게 살면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백 마디 말보다 조그만 실천이 필요한 이유다. 은퇴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진정한 관문이다.
- 2016-08-2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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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마이 라이프> 를 빛낸 시니어 세대 한자리에서 만나다
- 지난 23일, 서울시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단행본 출간 기념회가 있었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에어비앤비는 자기 집, 혹은 집의 일부분을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또 찾는 일종의 ‘인터넷 장터’다. 특히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일상생활도 하면서 자신의 집 남는 공간을 빌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에 은퇴 뒤 제2의 인생을 사는 시니어 세대에게 매력적이다. 반면, 지금까지 우리의 정서상 사촌이나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 집을 내어주는 것이 납득 가지 않는 부분도 있을 듯. 은 에어비앤비에 관한 이해를 돕고 시니어 호스트의 참여를 바라는 마음에 나온 책으로 에어비앤비의 ‘시니어 호스트(50세 이상의 호스트)’ 12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는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여행 속으로]라는 섹션으로 에어비앤비 시니어 호스트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본지를 통해 소개했던 4명의 시니어 호스트가 마침 12명으로도 소개돼 출간기념회에서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2월 ‘여유가 흐르는 집’으로 소개했던 파주 헤이리 모티프원의 이안수씨.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촌장이자 에어비앤비에서 강력 추천하는 시니어 호스트 중 한 명이다. 흰 수염 곱게 내리고 너털너털 웃으면 함께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나이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여자에게 ‘누나’라 부르지만 본인은 정작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젊은 날 잡지사 국장까지 지냈다는 이안수씨는 자유롭게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자신의 집 또한 세계가 통하는 플랫폼으로 만들어 놓아 소통하는 중이다. 최근 (남해의 봄날)이라는 제목으로 ‘모티프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냈다. 4월 ‘도심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느끼다’에서 소개된 ‘북촌유정’의 박소자씨와 남편 이형술씨도 만날 수 있었다. 남편 이형술씨는 ‘북촌마을’의 촌장으로 ‘북촌’이라는 지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북촌유정은 종로구 계동의 작은 한옥으로 에어비앤비 호스트뿐만 아니라 미술작가들의 갤러리로도 활용하고 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하기 전 오랫동안 하던 자원봉사를 못하게 돼 우울증세를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삶의 의욕과 활력을 되찾았다는 박소자씨. 시니어 호스트로서 건강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며 여전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5월 옥상정원에서 만났던 김향금씨는 아름다운 외모 덕에 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기자 간담회와 함께 출간 기념회에 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는 김향금씨. 곱게 생활한복을 입고 나와 책과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대표하는 표지모델로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향금 씨는 지난 3월,서울 리빙 페어에서 처음 만났다. 에어비앤비를 홍보하는 시니어 호스트로 방문객 맞이하며 활동적인 액티브 시니어의 모습을 보였다. 김향금씨의 옥상정원에서는 맛있는 커피도 내려주고 또, 타로카드도 직접 봐주기도. 취재 때 꽃이 없어 서운했는데 꽃이 지기 전 꼭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7월에 1박 2일로 방문했던 영월 앞뜰농장의 주인 장미자씨. 장미자씨의 앞뜰농장은 소프트웨어가 강한(?) 에어비앤비다. 활동할 것뿐만 아니라 먹을 것도 많은 곳. 1박 2일 동안 장미자씨를 따라가 술을 만들고,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동네 언니들과 장미자씨 뽕밭에서 오디도 따며 완벽한 시골 생활을 즐겼다. 아쉬운 점 하나! 영월 맑은 다슬기를 좀 채취를 했어야 했는데 못하고 왔다. 좀 더 추워지기 전 꼭 한 번 방문해야겠다. 는 활기차게 살아가는 시니어 세대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에어비앤비의 시니어 호스트처럼 멋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시니어들을 를 통해 발굴하고 또 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모티프원, 북촌유정, 옥상정원, 앞뜰농장은 소개된 시니어 호스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이다.
- 2016-08-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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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PART5]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⓵강현아, 어디든 같이 가자
- 나이가 들면서 친구 사이도 연인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학창 시절부터 만난 오래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났어도 그 누구 못지않게 마음 잘 통하는 친구도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내 친구, 어쩌다 만났는데 단짝이 된 친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365일, 일만 생각하며 앞만 보고 살았던 금융맨이 퇴직 후 친구들의 여행을 돕는 여행 전문가가 됐다. 일명 ‘동창생 여행 전문가’가 된 정강현(丁康鉉 ·69) 회장. 퇴직 후 서울사대부고 동문 카페에 18회 졸업생들의 여행 모임 ‘여유회’를 만들어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 지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어디든지 간다는 정 회장. 그가 추진하는 여행에는 항상 20명 이상은 참석한다. 이 놀라운 출석률은 정 회장의 탄탄한 여행 준비 덕분이다. 1만원 정도의 적은 회비로 친구들에게 이야기가 있고 맛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고. 답사는 기본이고 역사가 있는 여행지를 선정하면 꼼꼼하게 공부하고 챙겨서 여행 해설가로도 변신한다. 지난 7월 7일에는 작년 메르스 때문에 일정을 잡았다 가지 못했던 양수리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다녀왔다. 이날 비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사람인지 동창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친구입니까? 성기정 강현씨는 두말할 것도 없이 멋쟁이예요. 봉사에 앞장서는 사람, 가장 멋진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강현씨 덕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멋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온 세미원도 예전에 와봤지만 새롭게 단장한 이후 오늘이 처음입니다. 서오능 이런 곳에 갈 때는 역사 공부를 해 와서 친구들한테 설명해 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하고 다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송남영 동창들이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30~40대에는 못 만났어요. 각자 바쁘다보니 그랬습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동문회가 활성화되고. 향수를 찾아간다고나 할까요? 동창회에 간다고 하면 그때 친구들이 좋아요. 강현이가 여유회를 시작하면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서울성곽 길, 전주한옥마을 등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정말 늙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애들 같아요. 귀엽다니까요. 50년 전으로 가버리니까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라 마음이 소년, 소녀가 되는 거죠. 목소리도 깔지 않고 서로 앞에서 폼 잡을 일 없고 너무 편합니다. 유경옥 생긴 건 기본이고 멋지고 근사하고 박학다식하고 멋있는 친구예요. 같은 학교를 졸업해서 동창으로 있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진짜 전문성도 갖추고 정서적인 거,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 그리고 따뜻함을 갖췄어요. 헌신적으로 모임을 위해서 리드를 잘 하세요. 계획적으로 그야말로 여유 있고 즐겁게요. 오늘 보신 것처럼 우리 상태를 보아 가면서 여행 계획을 짜는데 정말 존경스러워요. 김혜자 정강현은 리더십 강하고, 봉사도 잘하고, 정말 사실이 그래요. 이 나이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좋지도 않은 길을 가면서 설명도 해주고 말입니다. 보통 노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니까 하는 거죠. 강현이는 여행을 할 때 꼭 그곳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오는데 대충 알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자기 말로 표현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여행 가이드 이상으로 저희에게 알려주죠. 한번은 부부동반으로 몽골의 갈매기섬이라는 곳에 갔었어요. 여기는 사람이 혼자 가면 갈매기들이 공격해요. 그런 곳을 혼자 뚫고 갔다 돌아 나올 때 배가 고장이 났는데 기지국이 많이 없어 연락이 안 되는 일도 있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고도 다음에 또 보면 그런 오지 같은 데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이 친구 아니면 저희가 또 어떻게 그런 곳에 가보겠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감격해서 잘 따라 다니는 거예요. 서울사대부고 동창 대표 잉꼬 부부 장재숙·하지환 부부 저 친구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이 나이에 앞장서서 희생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강현이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거든요. 희생정신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친구들을 위해 사전 답사하고, 열차 시간까지 챙기는 거 보면 너무 감사하지요. 서울사대부고 동문 중에서도 우리 18회 동창들이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요?
- 2016-08-1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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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문주현 MDM 회장의 돈의 철학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놓은 것, 사회를 위한 나눔으로 거듭나야”
-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 2016-08-1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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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어야 장수 한다
- 1분을 웃으면 10분간 에어로빅한 효과가 있고, 심폐기능이 활발해지며, 엔도르핀이 팍팍 돌아 면역력이 증가한다. 한 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일소일소(一笑一少)란 말은 나온 지 오래됐고, 아토피 피부병을 웃음으로 치료한 사례가 TV 프로그램인 '생로병사'에 소개되기도 했다. 웃음치료(Laugh Therapy)란 말이 생겨나며 학문적으로도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뇌는 바보여서 가짜웃음도 진짜웃음으로 착각한다거나 기분이 좋아서 웃기보다 웃어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도 있다. 나는 평소 유머에 관심이 많았고 같은 말이라도 당신이 하면 맛깔나게 재미있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수명 100세 시대에 노노케어(老老Care)를 위해 노인운동, 노인건강마사지 등을 배우고 정신적으로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웃음치료를 공부하고 웃음치료사 1급 자격을 취득했다. 웃음치료사는 아직 국가자격증이 아닌 민간자격증으로 단기간 교육과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발급되므로 자격증 취득이 곧 능력이라 볼 수 없다. 모든 강사의 과정이 다 그렇지만 특히 웃음치료사는 선천적인 끼에다 스스로 연습을 통해 계속 연마해야 한다. 나는 인생은 연습이라 생각한다.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사람은 적은 연습으로도 발전 속도가 빠르지만, 둔재도 연습을 계속하면 향상된다고 믿고 있다. 웃음의 기본은 유머니까 평소 유머 감각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유머 능력 향상을 위해서는 1. 재미나는 일을 상상하고 말로서 표현해본다. 웃어 보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2.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한다. 처음엔 어색한 웃음도 차차 자연스러워진다. 3. 어린아이 눈으로 세상을 본다. 유머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다. 4. 유머 노트를 만든다. 몸에 밴 자연스러운 복습을 위해서다. 5. 개그프로를 즐겨 본다. 개그프로는 젊은이 프로다. 시니어가 이를 보고 따라 웃으면 수준급이다. 6. 타인의 유머에 적극 반응을 보인다. 실없는 소리로 치부하면 나는 더 늙어질 뿐이다. 7.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마라. 남의 유머에 빠른 반응을 보이려면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 8. 유머적인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9.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 웃다 보면 좋은 생각도 떠오른다. 10. 유머 소재도 분위기와 상대의 수준에 따라 달라야 한다. 부부간 모임에서 "00 아빠는 집에서 언제 큰소리치십니까?" "예? 요즘 남자가 큰소리칠 때가 있습니까? 그냥 죽어지냅니다." "아~그냥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군요. 알겠습니다. 00아빠는 언제 큰소리칩니까?" "돈 갖다 줄 때요. 남편보다 돈이 더 좋다 하네요. 그럼 당신은 언제 큰소리칩니까?" "궁금하시죠? 궁금하면 500원 흐흐. 사실 전 작은 소리를 못 들을 때 큰소리칩니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재미있는 유머 소재는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점점 눈을 돌려 찾아보면 기발한 소재는 충분하다. 세계적인 천재 아인슈타인도 자기 뇌의 20%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 뇌는 사용할 공간이 너무 많다. 언제나 즐거운 상상으로 오늘도 웃으며 사는 것, 가족 모두의 바람입니다.
- 2016-08-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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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덴티컬(Identical) - 비교하지 말고 내 세계를 존중할 것
- ‘아이덴티컬’이라는 같은 제목의 다른 영화 두 편을 봤다. 아이덴티컬(Identical)은 일란성 쌍둥이를 말한다. 외모가 거의 같으니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도 벌어진다. 하나는 더스틴 마르셀리노 감독의 영화인데 출연에 레이 리오타, 세스 그린, 애슐리 쥬드, 아만다가 나온다. 가난한 부보가 일란성 쌍둥이를 낳자 하나는 아이가 없는 집에 입양 보낸다. 둘의 환경은 아주 다른데 타고난 음악적 소질은 서로 통해서 벌어지는 일을 영화화 했다. 하나는 아직 영화 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스쳐 본 영화인데 쌍둥이 중 하나는 잘 나가는 금융맨이고 하나는 무명의 화가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더 인상적이다. 잘 나가는 금융맨은 같은 사무실에 사귀는 여자가 있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여자는 아니고 그냥 연인관계를 유지한다. 문제는 이 여자를 버리면 여자가 고발할 경우 직위를 이용한 성추행 내지는 성폭행에 연루되기 때문에 고민한다. 때 마침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를 공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거기에도 연루되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출장과 회사 파티가 겹치자 금융맨은 화가 형제가 자신의 여인 파트너로 같이 자리를 하면 회사사람들의 눈길을 돌려 자신들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계획을 꾸민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단순한 대역이 아니라 꽤 가까운 사이로 진전된다. 여자의 끼도 있고 무명의 화가로서는 만나기 힘든 세련된 미인이다. 여자도 금융맨이 너무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진지한 면이 없는 반면 화가는 진실한 면이 있어 끌린 것이다. 화가는 여자를 사랑하지만,여자는 금융맨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금융맨의 아파트를 빌려 금융맨인 것처럼 행세하며 여자를 불러들이지만, 결국 여자를 죽이고 만다. 일란성 쌍둥이가 같은 길을 가면 스토리가 간단하다. 그러나 둘이 완전히 다른 환경에 있고 비교되면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비교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돈 잘버는 옆집 남편과 비교하거나 ‘엄친아’처럼 공부 잘하는 다른 집 아이와 자기 아이를 비교하는 것은 매우 못 난 사람이 하는 짓이다. 동창 모임에 가 보면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를 나왔는데도 사회적 위치가 크게 다르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상당히 의식한다. 여자들은 겨울철이면 동창회 가는 날은 유난히 밍크코트를 입고 나가는 여자들이 많다. 서로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을 무난하게 생각한다. 더구나 외모까지 비슷하게 생겼다면 더 짙은 유유상종 의식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 만족하고 산다. 돈의 많고 적음, 사회적 지위의 고하, 남이 가진 행복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 2016-08-1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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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규칙적으로 운동한다.
- 한여름 삼복더위에 열대야까지 겹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서 설치고 다음날이면 당연하게 피곤해하고, 나이가 들면서 수면장애를 겪는 이들이 상당히 많고 대다수가 수면제 또는 약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잠 잘자기 위한 나만의 대처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계절에 구애받지 말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걷기 또는 자전거 타기를 약 10km 1시간 정도를 꾸준히 하여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고, 오전, 오후 햇빛을 받으면서 1일 만보정도 걷기를 생활화 하고 있다. 햇빛을 받으면 몸속에 비티민 D가 생성되는데 도움을 되므로 햇빛에 가능한 피부를 노출해야 한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다니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고 계단을 최대한 이용 한다. 둘째, 식사를 일정하게 한다. 아침식사는 싱싱한 제철과일로 먹고, 점심은 채소위주로 식단을 구성하고 저녁은 채소와 과일 위주로 식사를 하고 식사 후 2시간 지나면 아무리 더워도 찬물은 마시지 말고 미지근한 물,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을 500ml이상을 조금씩 맛을 음미 하듯이 마신다. 잠자리에 들기 전 까지도 계속수분을 보충한다. 셋째, 잠자리는 편안하게 한다. 베개는 머리에 받치지 말고 바닥에 닿은 상태로 잠을 자면 목 주름도 방지 해 주고, 머리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방향으로 위치를 하고, 잠자리 바닥은 푹신한 침대보다 딱딱한 바닥에 얇은 이불을 깔고 허리가 일직선으로 쭉 펴지도록 하면 척추도 똑 바르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넷째, 잠자는 시간은 규칙적으로 지키다. 저녁시간을 본인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TV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주로 인문학 및 소설책을 주로 읽고 1일 1시간 정도는 악기를 치는 것을 생활화 하고 있다. 주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밤 12시 전, 후에 잠이 들고 아침 6시면 기상을 하여 하루 일과를 반복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다섯째, 편안한 옷 차림을 한다. 타인의 시선도 중요하지만 본인에게 불편한 옷을 멋 부리려고 한다면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없을 것이다. 평상복은 꽉 뀌지 않는 면소재 의류를 잠자리에서는 얇은 속옷과 잠옷을 입음으로서 몸에 아무도 걸치지 않은 느낌을 주는 옷은 잠자리를 더욱더 편안하게 해준다. 필자는 아무리 더운 열대야도 아주 추운 겨울에도 하루 6시간정도는 깊은 잠을 자는데 잠들었을 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숙면을 자고 있는데 잠 못 이루는 분들은 한번 따라 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잠은 생명의 에너지와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 2016-08-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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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여행] 와인 구매 가이드라인 8가지 포인트
- 세상에 와인을 구매하는 행위보다 간단한 것도 없다. 마트나 와인 숍 등에서 여느 상품처럼 그냥 돈을 내고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원하는 와인을 제대로 구매하는 것만큼 까다로운 일도 드물다. 글로벌 시대에 특히 뉴 월드 와인이 공산품처럼 대규모로 생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와인은 여전히 규격화된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와인 중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와인의 최고 전문가라 해도,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을 모조리 꿰차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실수하지 않고 와인을 구매하려면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아라. 최고로 비싼 와인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향과 맛에 관한 한 최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존재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최고일 뿐이다. 게다가 주관적인 관점은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리고 그날의 기분, 컨디션, 분위기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 음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평소 여러 종류의 와인을 접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르는 훈련이 필요하다. 와인 선택에도 당신의 개성과 끼를 발휘하라. 둘째, 비싸다고 다 좋은 와인은 아니다. 대체로 값과 질은 비례한다. 저 유명한 1855년 보르도의 ‘그랑 크뤼 클라세’도 가격을 바탕으로 작성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값에 비해 질이 수준 이하인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특정 AOC의 명성을 배경으로 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와인들도 있다. 그러니 레이블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아직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격 대비 질이 우수한 와인을 찾는 노력을 하라. 가격이 적당하면서도 질이 우수한 새로운 와인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똑같은 와인이 어느 날 유명 전문 잡지에 소개되고 나면 값이 20~30% 이상 치솟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먼저 선수를 쳐라! 참고로 프랑스에는 병당 1만5000원 이하의 와인만 모아 놓은 와인 가이드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와인을 레이블이나 값으로 마시지 않고 각 와인의 고유한 특성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와인 애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오래된 와인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와인은 생산 후 5년 안에 마시는 것이 좋다. 화이트나 로제 와인의 경우는 1~3년, 레드 와인의 경우는 3~5년 정도가 적당하다. 그리고 샹파뉴는 특별한 빈티지 샹파뉴를 제외하면 구매한 후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소비하는 것이 좋다. 보졸레 누보는 6개월 내에 마셔야 한다. 물론 뛰어난 빈티지의 고급 와인의 경우 보관기간이 10~20년 이상 가는 것들이 대다수지만, 이런 와인은 값이 비싼 만큼 예외적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런 고급 와인은 하나같이 타닌이 높아 몸체가 탄탄한데, 너무 일찍 마시면 향과 맛이 채 열리지 않아 절대 고급 와인의 오묘한 진수를 느낄 수 없으니 창문으로 돈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 넷째, 빈티지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많은 와인 아마추어들이 빈티지 표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신봉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빈티지는 와인의 출생신고 같은 것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지역, 같은 빈티지라 할지라도 주조하는 사람의 정성과 테크닉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와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빈티지를 참고는 하되 너무 신봉하지 않는 게 좋다. 게다가 나쁜 빈티지는 오랜 보관이 불가능하므로, 고급 와인이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기다리지 않고도 마실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 우리 실정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가끔 활용해보기 바란다. 다섯째, 머잖아 마실 와인과 장기간 보관했다 마셔야 할 와인을 구별하여 구매해야 한다.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고 10년 이상 보관했다 마셔야 제격일 ‘그랑 크뤼 클라세’를 구매해서 그날 바로 마시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행위이며, 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자칫 돈만 낭비하고 얼굴을 찡그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여섯째, 같은 와인을 최소한 여섯 병 단위로 구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사람과 마실 때 한 병으로 모자라는 낭패를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한 종류의 와인을 일정 시간을 두고 마시게 되면, 그 와인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와인이 자신의 기분이나 컨디션,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할 사정이면 최소한 두세 병이라도 구매하는 것이 좋다. 물론 매우 귀한 고가의 와인일 경우는 한 병으로 만족해야겠지만. 일곱째, 믿을 만한 와인 가이드북을 한 권 정도 준비하는 것은 필수다. 한글로 번역된 것들도 있으니,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접근이 가능하다. 가이드북을 통해 와인을 구매하기 전에 구매할 와인에 대해 사전에 공부를 할 수 있고, 마시고 있거나 마신 와인이 어떤 것인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평과 전문가의 평을 비교해 봄으로써 와인 시음에 대한 능력과 자신감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매우 까다로운 문제인 ‘언제가 마시기 적절한 시기인가?’에 대해서도 상세히 일러준다. 가이드북의 종류에 따라서는 생산자나 가격에 대한 여러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 각자의 필요에 맞는 와인 가이드북을 꼭 한 권 갖추라고 권한다. 한 가지 문제점은 매해 새로운 빈티지가 나오기에 매해 새로운 빈티지를 첨가한 가이드북의 개정판이 나온다는 점이다. 와인 마니아나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적당한 간격으로 구매하면 어떨까 한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차선은 되리라고 믿는다. 여덟째, 공동구매를 해보라. 와인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같이 공동구매에 대해 논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 모르는 와인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습득하게 되고, 특히 할인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가격대가 높은 와인일수록 공동구매는 더욱 유용하리라 본다. “당신이 어떤 와인을 마시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만큼 이제 와인은 단순한 음료나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와인의 선택은 간단한 생필품 구매와는 여러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주머니 사정을 넘어, 선택하는 사람의 성향과 인품을 나름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 장 홍(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하고 있다.
- 2016-08-0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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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강마을 배나들이 옛 이야기
- 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2016-07-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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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클래스] 그림 그리기 ‘특별한 취미’가 아닙니다
- 최근 그림을 취미로 하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 사이에 회자되었다. 배우 김혜수와 구혜선의 그림이 아트페어에 걸린 이야기가 화제가 되더니, 배우 하정우의 그림이 수천만원에 거래된다는 이야기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다 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으로 ‘아트테이너’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그림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유희’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젤을 세운다. 그리고 하얀 캔버스를 올려 조금씩 스케치를 한다. 아마 노후의 취미생활을 꿈꾸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통계청의 ‘201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는 53.2%가, 60세 이상은 56.4%가 노후를 보내고 싶은 방법으로 취미활동을 꼽았다. 자원봉사나 종교활동 등 다른 활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실제 여유시간을 보내는 여가활동으로 50대의 72.2%가, 60대 이상의 81.2%가 가장 간단한 TV 시청을 꼽았다. 대다수가 이상과 현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응답은 3%도 되지 않았다. 심리적 장벽이 높은 취미 ‘미술’ 미술은 시니어들을 위한 취미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분야 중 하나다. 시니어 대상 교육기관에서 미술은 빠지지 않는 단골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붓을 손에 쥐지 못하는 시니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선입견이라고 권인수 화백은 설명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서 5년째 일반인과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화실 ‘아트담’의 대표이기도 한 권 화백은 회화나 미술에 대한 편견이 장벽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가 입시 교육에 집중하면서 학생들이 미술, 그러니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초등학교에서 멈춘 셈이죠. 잘 못 그리는 것이 당연해요. 그런데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에요. TV 프로그램 에 나오는 수많은 달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랜 직장생활과 노력 덕분이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선입견 중 하나는 그림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것.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만 따지면 결코 그렇지 않다. 화실 수업료를 제외하면 이젤과 물감, 붓 등의 구매비용은 25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사진이나 자전거 등에 비교하면 되레 저렴한 취미인 셈이다. 이나마도 캔버스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강습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기관도 있다. 학원…화실…본인에 맞는 곳 선택을 실제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주변에서 ‘스승’을 찾는 일이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회화 등 미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각 자치구가 운영하는 문화회관과 백화점 등이 운영하는 문화센터가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이나 화실 등이 있다. 구청 문화회관이나 백화점 문화센터는 다른 취미와 병행이 쉽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육 인원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강사가 1대 1로 지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학원은 입시 미술을 겸하거나 정해진 강의 위주로 운영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고, 화실은 1대 1 지도를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미술학원은 대학 인근에 많고, 화실은 반대로 주거지역 주변에 많다. 수업 형태나 시간, 수업료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충분히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본인에게 맞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림이 시니어에게 주는 장점은 다양하다. 미술 수강생들은 운동에 비해 체력적으로 제한이 없는 취미이면서, 고도의 집중을 통해 잡념을 사라지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11년째 송파에서 화실 ‘모노그라프’를 운영 중인 서양화가 김용일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시니어들에게 제공하는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평생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죠. 적은 비용에 비해 얻는 성취감도 크고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배우면 남에게 그림을 선물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서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자존감도 상당합니다. 그룹 전시회를 통해 본인의 그림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팔리는 경험은 시니어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화실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통한 사회활동도 그림을 배우는 과정이 주는 매력 중 하나다. 앞서 소개한 아트담은 인근 구치소 면회자들을 위해 대기실에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고, 모노그라프의 경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그림 봉사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시회 활동은 그림에 대한 욕구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일부 지역의 경우 화실은 체면을 내려놓는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고소득층 수강생들이 많은 한 화실의 관계자는 “재벌이나 정치인, 연예인 등이 신분을 숨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유난히 걸레질이나 설거지에 열중했던 한 회원이 지자체장의 부인이라고 밝혔을 때 주변에서 적잖이 놀란 적도 있어요. 사교를 위해 일부러 모인다기보다, 본인의 원래 모습을 찾아 순수한 문하생으로서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니 관계가 홀가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는 치매 예방에 큰 도움 그림은 심리적인 부분 이외에 실제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유명한 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의 신경과 전문의 로즈버드 로버트는 지난해 발표한 연구 논문을 통해 “그림 그리기 등 노년의 미술 활동이 경도인지장애(치매의 전 단계)에 걸릴 가능성을 73% 낮춰준다”고 발표했다. 그는 4년간 256명의 85세 이상 노인을 관찰했는데, 미술 활동이 수공예(45%), 사교활동(55%), PC활용(53%)보다 인지기능 보호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경도인지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미술 활동을 통해 마음과 정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손의 미세한 운동과 관련된 신경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극들이 신경세포의 퇴화를 방지하고, 새로운 신경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인지기능 유지에 사용되도록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신경가소성 효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그림 창작활동은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시니어들의 전반적인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술 활동은 인지기능이나 창의력 향상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추억 회상을 통해 의미있는 대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의사 소통 능력도 향상시키죠. 자아감이나 자존감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심지어 치매환자 간병인의 삶의 질까지 향상시킨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가르치고 있는 류영선 강사는 “소질을 걱정하는 회원분들에게 관심이 곧 소질이라고 늘 말씀드려요.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니까요. 실제로 시작하고 나면 기대 이상으로 쉽게 적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붓을 잡고 행복하다는 말씀을 연발하시는 회원분들을 보면 다른 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 2016-07-27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