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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는 봤는가, 국민연금공단 노후준비 프로그램!
- 대체로 사람들은 국민연금공단(이사장 김성주, 이하 ‘공단’)을 국민연금만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알고 있다. 60이 되고부터 연금을 받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올해로 31주년을 맞은 국민연금은 가입자 수가 215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에 이른다. 연금수급자 431만 명, 기금도 601조 원에 이르는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성장한 종합복지서비스 기관이다. 국민연금의 궁극적 목표는 ‘노후의 행복한 삶’이라는 사회적 가치 실현이다. 노후준비 서비스는 어쩌면 공단의 당연한 업무. 공단은 100세 장수 시대를 맞아 연금을 중심으로 신중장년과 시니어를 위한 노후준비서비스팀을 운영하고 있다. 공단의 각 지역본부에서는 국민연금 관리에 덧붙여 국민의 노후준비를 위한 “NPS 아카데미”를 2017년부터 개설했다. 첫 프로그램으로 작년 7월 한 달여 간 ‘작가탄생프로젝트’ 진행한 바 있다. 이를 비롯해 ‘신중년 글쓰기 마라톤’, ‘1인 크리에이터 과정’, ‘비행(飛行) 신중년 프로젝트’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은퇴자의 구미를 잡아끌었다. 적당한 놀이터가 없는 신중년들에게 문화 플랫폼을 제공함으로써 즐겁고 보람과 의미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신중년을 위한 문화 플랫폼 특화 서비스 국민연금관리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백수현 본부장(이하 북부본부)은 ‘노후준비 서비스가 공단의 소명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공단 사업의 기본은 연금관리입니다. 더 큰 틀에서 봤을 때 국민들의 안정된 미래 노후 생활에 기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부본부에서 ‘신중년 특화서비스’를 2017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기여하는 참신한 노후준비 롤모델로 발전함에 미래의 희망이 보였습니다.” 중단 없는 핵심 사업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백 본부장은 덧붙였다. 공단 업무의 블루오션으로 나아가 글로벌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국민연금 관리의 근본 취지를 살리는 광의의 사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구체적 목적은 첫째, 역량 있는 시니어가 노후를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둘째, 수요자 중심의 프로그램 기획으로 자발적 노후 준비 서비스 희망 고객을 발굴하여 사업 추진 효과를 높인다. 셋째, 국정과제의 하나인 ‘신중년 일자리 보장 및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신중년 노후준비 교육 특화 사업으로 일자리 및 커뮤니티 활동 지원 서비스를 연계 추진한다. 지금까지 ‘작가탄생프로젝트’와 ‘글쓰기 마라톤’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쓰게 하는 작가탄생프로젝트 첫 번째 아카데미 프로그램이 바로 작년 여름내 진행된 ‘작가탄생프로젝트’였다. 방법과 내용이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를 의아해하거나 불가한 일로 단정 짓거나 반신반의했다. 일주일에 2회 강좌와 글쓰기 지도를 통하여 한 달 동안에 참석자 모두가 각자 1권의 책을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참여자 40명 중 37명이 그 기간 안에 집필을 마치고 37권의 책을 출간했다. 한 달 안에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출간하는 참으로 어려운 일로 신중년의 가능성을 보여준 프로그램이 됐다. 그러한 성과를 안고 뒤이어 2018년도에 2기 작가탄생프로젝트를 출범시켜 가능성을 재차 확인했다. 1기와 마찬가지로 한 달에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쓰는 프로그램으로 43명이 참가하였고 그중 36명이 총 6,352페이지의 책 38권을 만들었다. 수강생 김도영 씨의 “은퇴 그리고 아름다운 삶”, 곽정숙 씨의 ”나를 위한 여행” 황선호 씨의 “황 첨지의 독일 유랑기” 등이 있다. 수강생들의 참가 소회에서 프로그램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다. 강정석 씨는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점에 만난 “작가탄생프로젝트”는 새로운 도전의 출발”로 표현했다. 신영균 씨는 이렇게 소회의 글을 남겼다. “이 변화의 와중에 덤으로 성찰의 기회까지 주어졌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이다. 다양한 신중년 문화 플랫폼 성공리에 안착 이러한 여세를 몰아 공단의 북부본부는 지난 5월 5일 일정으로 책 한 권을 쓰는 “글쓰기 마라톤 과정”을 새로 열었다. 2018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마라톤 거리와 같은 총 42.25시간에 걸쳐 글을 온종일 집중적으로 쓰게 했다. 33명이 참가하여 23권의 책을 완성됐다. 권수연 씨의 ‘마르지 않은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화수분’, 장의영 씨의 ‘더 곱게 살즈아’, 조왕래 씨의 ‘브라보마이라이프’, 김종억 씨의 ‘별 하나 꿈 하나’ 등이다. 시니어에 불가능은 없음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북부본부는 여행을 콘텐츠로 하는 ‘비행(飛行) 신중년 프로젝트’를 2017년 11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37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해 여행 커뮤니티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도보 여행가 황안나 씨가 함께해 ‘여행하고 일하며 나이 들기’가 주요 과제다. 매달 한 번 국내외 도보와 여행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영상 시대에 발맞춰 1인 크리에이터을 위한 과정을 열기도 했다. 2018년 2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총 30시간 일정으로 23명이 참가하여 인기리에 진행됐다. 유튜브 채널 기획, 촬영, 편집 과정이었다. 동영상을 통한 새로운 후반생 활기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은퇴자 1000만 명 시대다. 변화무쌍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에게 삶의 보람과 가치를 창출해갈 수 있는 신중년 문화 플랫폼 구축은 크게 기대되는 사업으로 보인다. 특히 고령 사회에 접어든 시점에서 희망의 빛으로 다가옴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소일거리가 없어 고민하는 시니어에 적당한 놀이터 플랫폼으로 여겨진다. 보람 있는 후반생을 꿈꾸는 시니어가 함께하면 좋은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 2018-10-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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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혜은이, 다시 열정에 불을 붙이다
- “지금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웃음), 다시 생을 산다면 발레를 하고 싶어요.” 유년기에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소녀. 그러나 너무 훈련이 고되고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도중에 그만둔 그 소녀는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가수로 거듭나게 된다. 가수 혜은이의 얘기다. ‘진짜 진짜 좋아해’, ‘당신만을 사랑해’, ‘제3한강교’ 등 수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던 노래들의 주인공인 그녀는 지금 모든 것을 불사르는 듯한 무대를 선보이면서 여전히 가수로서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봤다. 아이돌이라는 단어는 1990년대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그 의미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은 있었다. 혜은이를 197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되어 1979년 10·26 사건으로 끝나는 1970년대의 엄혹함은, 오히려 그렇게 엄혹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더더욱 낭만을 꿈꾸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갈망을 채워준 가수가 혜은이였다. 동양적이고 발랄한 얼굴과 그와 대비되는 서구적인 길쭉한 체형. 길옥윤 사단이 만들어낸,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과 그 노래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가창력. 혜은이라는 이름은 비주얼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당시 대중가요의 가장 세련된 경향으로서 역사에 새겨졌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KBS 음악 프로그램 ‘가요무대’ 출연을 준비하는 사이에 대기실에서 만난 혜은이는 조금 살이 빠진 느낌이었다. 10월부터 시작되는 공연들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일까. 수도권과 대도시 위주로 했던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달리, 이번에는 소도시까지 훑는 공연이 될 예정이다. 그녀로서는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문득 지난 호 남진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지방공연을 갈 때마다 굉장히 신나 한다고 말해준 것이 생각나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줬다. “어휴, 선배님은 공연 안 하면 못 사는 분이야. 내가 무명일 때 그분 리사이틀에 찬조 출연한 적이 있어요. 열아홉, 스무 살 시절이었는데 공연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지.(웃음)” 그러나 공연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론 혜은이도 못지않다. 데뷔 이후 어느덧 수십 년 세월이 흘렀고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혜은이의 노래는 더 진화하면 했지 퇴화하지 않았다. 그녀의 공연을 본 사람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예순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워풀한 그녀의 목소리와 뛰어다니며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젊은 시절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관록과 에너지가 공연을 휘어잡고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이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노래가 천직이었다 45년. 공식적으로 혜은이가 데뷔해서 지금까지 가수로서 보낸 시간이다. “사실은 더 오래됐어요. 정식으로는 45년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 따라서 노래를 불렀으니. 무명 시절이 4년 정도 있었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에도 이제는 가요계의 대선배가 된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후배들이 끊임없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후배들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최고죠. 노래를 한결같이 똑같이 부르세요.” 한 후배 가수의 말에서는 음악인 혜은이를 향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한 상태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 아니었다. “노래를 하면서 이게 나의 즐거움, 천직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어려서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생계형 가수로 살았죠. 어찌어찌하다 유명해져서 활동을 할 때도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죠.. 첫 결혼이 잘못돼 정신없이 살았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난리가 나서….” 쉽지 않은 얘기,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그 얘기였다. 무대 위에서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가 견뎌온 세월의 무게만큼 묵직했다. 뒤돌아보면 자식들이 보물 그동안 너무 힘들고 바쁘고 딴 곳을 쳐다볼 새도 없이 일하다 보니 ‘노래란, 가수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변화가 찾아왔다. 데뷔 30주년이 됐을 때였다. “노래가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10년 남짓? 15년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맨날 10년이라고 하네.(웃음) 그제야 ‘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네?’ 깨달았죠. 가수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녀는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많은 행복을 느끼며 살지 않았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흐뭇해했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 거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죠. 제 목적은 딸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이든 나를 기다려주는 팬들이 있었고요. 그것들이 제 목적이었죠. 그래서 버텼고 앞으로도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고 자식 둘이 전 재산”이라고 말하는 혜은이는 그 말처럼 딸과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딸과는 ‘30년 기도해서’ 요즘 같이 살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이 정말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면 좋겠어요. 그래서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라고 말해요. 결혼을 하겠다면 하고 아니면 말고. 아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아 조리사 자격증 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딸은 스킨스쿠버 강사로 일하는데 투잡해야겠다고 해서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요. ‘엄마, 한 가지 일로는 돈 못 모으겠어’ 하더라고요.(웃음)” 내 목소리 지키는 게 중요 후배들의 찬탄처럼, 혜은이가 가수로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가수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가수의 의미를 모른 채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가수를 철저히 직업으로서 여겼기에 그토록 자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수가 지켜야 할 본분에 대한 신뢰와도 이어졌다. “옛날 가수들과 요즘 가수들을 실력으로 비교하면 요즘 가수들이 훨씬 잘하죠. 우리 때는 레슨 이런 게 있기나 했나요?(웃음) 타고난 게 있으면 가수가 됐고 작곡가들과 녹음할 때 연습하는 정도였죠. 지금은 기계적인 사운드가 발달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잘하는 후배가 많아요. 그래도 역시 반짝하는 후배들은 가창력이 없는 후배들이고 10년 넘게 오래하는 가수들은 노래를 잘하는 후배들이에요.” 그렇다면 공식 활동기간이 45년인 그녀의 현재 마음가짐은 어떨까?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타성에 젖어서 변하게 돼요. 안 변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요즘 노래를 더 잘 부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옛날의 내 목소리를 지키는 데 더 힘을 쏟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에프엠대로 하는 거예요.” 사실 자기 목소리를 좋아하는 가수는 드물다. 혜은이 또한 임재범의 굵고 허스키한 소리가 좋다고 한다. 그녀의 맑고 소녀 같은 목소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것에 끌리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신곡을 녹음할 때 다르게 부른다고 부르면 노래가 안 되더라고요. ‘선생님, 다시 한 번 불러보실까요. 조금 더 잘하면 좋을 거 같은데’라는 말 듣게 되고. 그러다 결국 찾아내는 건 내 원래 목소리예요. 지금은 옛날보다 노래를 훨씬 잘 불러요. 음량도 더 넓고 풍성하고. 그러나 예전의 그 순수했던 목소리는 못 내죠, 그래서 저에게는 그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혜은이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에 대해 묻자 ‘물론 데뷔곡’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사실 애착 안 가는 노래가 있을까. 콘서트를 하면 시작, 중간, 끝 부분을 대표해야 하는 노래들이 있기 마련이죠. 내 경우에는 그 위치에 분명한 노래들이 있어서 공연 프로그램을 짤 때 편리하긴 하죠.(웃음) 요즘은 모든 공연의 피날레를 ‘열정’으로 맺고 있어요. 나온 지 한 30년 됐나? 그런데 마치 엊그제에 나온 것처럼 불러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시절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눈멀고 마는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이라는 가사가 담긴 ‘열정’은 그 가사처럼 활화산 같은 박력과 리듬감으로 관객을 방방 뛰게 만드는 노래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모든 것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혜은이와 비슷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말에 그녀는 다소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사는 데 시달리고 힘들다 보니까…. 45년 가수 생활을 했지만 중간 20년 정도는 개인 사정으로 빛을 못 발휘했죠. 내 골든타임을 놓친 거예요. 사실 많이 억울하죠.” 그러나 이대로 그냥 마무리할 혜은이가 아니다 싶었다. ‘다시 새로운 도약을 해보자. 난 할 수 있다’라고 되새겼다. 혼자서는 못하지만 팬들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자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결심이 이번 공연의 핵심이다. “혜은이를 사랑한 수많은 팬에게 노래로 갚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공연 투어는 중소도시를 꼭 포함시켜야 했어요.”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남편과의 의리 혜은이에게 깊은 사연이 된 남편 김동현 얘기를 여기서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이 얘기됐지 않았나. 그저 조심스럽게 물어볼 뿐이었다. 그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부부로서 잘 지낼 수 있었던 지혜가 있었는지. 어찌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냥, 측은지심. 상대를 불쌍하게 생각하면 되는 거 같아요.” 그녀는 인간의 삶이란 항상 ‘맞다, 아니다’의 두 가지라고 말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사람과 안 살려면 끝을 봐야 하지만, 함께 살려면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나름대로 힘들었겠구나. 내가 이렇게 힘든데 당사자인 상대는 얼마나 힘들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만 봐도 그렇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주사를 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마음으로는 아픔을 느끼지만 육체로는 느낄 수가 없다. 상대의 아픔을 알 수가 없으니, 그것에 대해 함부로 재단을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제 종교가 기독교예요. 그래서 항상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하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이 실수했을 때, 무조건 질책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그동안 인생 공부 무지 많이 했죠. 말로 다 할 수 없어요.(웃음)”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여자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공식적인 혜은이의 출생 연도를 보면 1956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1954년생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태어났는데 목포로 나가서 호적 신고를 하느라 신고를 늦게 했대요. 호적에 나이가 그리 되어 있으니 다행이다 싶은데 마음이 그리 안 돼.(웃음) 그래도 ‘호적 나이대로 할래’라곤 못하겠어요. 2년이 어디야?(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니 옆에 있던 매니저가 한마디 거들었다. “팬들이 물어보면 호적이 아닌 실제 나이로 말씀하시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 다들 ‘나는 나이를 줄이고 싶어 죽겠는데 왜 나이를 올리시지?’ 하더라고요.” “언젠가는 호적 나이대로 할 거야. 아마 칠십이 가까워지면 그럴 수 있을 거야.(웃음)” 인터뷰 말미로 가면서 그녀의 웃음이 더 많아졌다. 준비했던 무대가 끝나서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 웃음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 그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는 공연만 생각하고 싶어요. 뮤지컬도 해봤는데, 뮤지컬은 아쉬운 게 개인 콘서트를 했을 때의 기쁨과 속 시원함이 없어요. 다 같이 하는 거니까요. 지금 나한테 절실한 건 노래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해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게 정말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아닐까요.”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운 사람 얼마 전 방송에서 혜은이는 45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렇죠. 그런데 실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또 그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까봐.(웃음)” 그녀는 오랫동안 미로와도 같은 길을 걸었고, 거듭 출발선에 서야 했다. 묵직한 울림과 고통을 알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더욱 응원한다. 그리고 그녀는 변하지 않는 가수로서의 자신으로 그들에게 보답한다.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가수로서도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최선을 다했고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웠죠. 피하지 않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러길 참 잘했다 싶어요.” 혜은이의 시대는 계속 진행 중이다. 무대가 있는 한, 그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2018-10-1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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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담 퓨전 그룹, All Star 아티스트 페스티벌서 공연
- 지담 퓨전 그룹이 서울팝스오케스트라와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개최하는 ‘제2회 All Star 아티스트 페스티벌’ 본선 대회에 참가해 경연을 펼친다. 10월 13일(토) 오후 4시 어린이대공원에서 진행되는 행사에서 지담 퓨전 그룹은 자작곡인 ‘Dear Soonja’를 연주한다. ‘Dear Soonja’는 퓨전 국악 창작곡으로 한국의 어머니를 위해 만들어진 연주곡이다. 지담 퓨전 그룹은 이날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말하듯 웅장함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곡으로 표현할 예정이다. 지담 퓨전 그룹은 싱어송라이터 지담을 중심으로 재즈밴드와 국악가 등으로 결성된 그룹. 이들은 사회의 양극화, 불안정, 갈등과 폭력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이들을 음악으로 치유하자는 뜻을 같이해 의기투합했다. 지난해에는 시리아 내전으로 고통받는 난민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소아암 환자를 위한 자선활동에도 함께했다. 지담은 버클리 음대 출신의 실력파 뮤지션으로 올 초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 건강 캠페인 ‘브라보 체조’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바 있다.
- 2018-10-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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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문명 엘도라도 - 신비의 보물을 찾아서’ 관람기
- 부활한 엘도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황금문명 엘도라도’(2018.8.4~10.28) 1부 전시실의 제목이다. 전시실로 발을 내디디면 어둠 속에서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를 만난다.‘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벽이 스크린이 되어 다양한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3면의 벽을 모두 이용한 거대한 규모의 영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특히 물속에 잠겨 떠다니는 황금 유물들의 영상과 독특한 음향은 제목처럼 부활한 엘도라도 온 듯 신비로움에 빠진다. 엘도라도란 무엇일까? 전시실 벽에 있는 설명을 보자. “‘엘도라도’는 ‘황금을 온몸에 바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콜롬비아의 무이스카 족장이 온몸에 황금을 바르고 콰타비타 호수 가운데에서 황금과 에메랄드를 물에 던지며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이 ‘엘도라도’의 전설이 되었고, 사람들은 황금으로 만든 도시를 탐욕스럽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대항해 시대’에 많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해 인디언의 문명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들은 황금으로 만든 도시‘엘도라도’의 전설을 찾아 콰타비타 호수를 찾았다. 호수 바닥에 황금 봉헌물이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호수의 물을 모두 빼냈다. 바닥을 샅샅이 뒤졌지만, 황금 장신구 몇 개만 겨우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후 콜롬비아 황금박물관이 콜롬비아 전역에서 원주민이 사용했던 다양한 동물 모양의 황금 장신구를 비롯해 인형, 항아리 등을 수집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들 중 일부를 볼 수 있다. 엘도라도의 주인공인 콜롬비아 원주민에게 황금은 사람의 탐욕을 채워주는 재물이 아니었다. 황금은 신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신에게 바치는 소중한 것이었다. 황금은 아니지만 눈길을 끄는 다양한 뼈 항아리가 여러 개 전시되어 있다. 원주민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가매장하였다가 유골만 남게 되면 뼈 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많은 뼈 항아리가 만들어졌고 다양한 무늬로 장식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선사 시대와 삼국시대 초기의 유물로 많은 독무덤(옹관묘)이 출토된다. 먼 거리를 두고 만나는 문화의 공통점이 신기하다. 마지막 전시실은 콜롬비아에 대한 설명을 해놓은 곳이다. 남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전 참전국가라는 것을 미안하게도 처음 알았다. 5100명을 파병해 163명이 전사하였고 448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하니 새삼 고마웠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저 멀리 라틴아메리카에서 달려와 준 나라에도 빚지고 있음이다. 콜롬비아 최고의 특산물이자 수출품은 커피이다. 이왕이면 콜롬비아 커피를 많이 마셔야겠다. 동년기자단 문화 팀에게 관람의 기회를 제공해준 브라보 마이라이프 운영진에게 감사드리며, 초가을 저녁을 문화와 함께 누린 수요일 밤이었다. 전시는 10월 28일까지 계속된다.
- 2018-10-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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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남자 “김목경은 김목경이다”
- “살면서 나를 케어해준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요.”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아마 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업에 대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확신을 가진 자유인이 아닐까 싶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김목경(60)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롯이 홀로 서서 자신의 일가를 이뤄냈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남자, 김목경의 이야기는 고독하지만 당당한 인생찬가였다. 그를 통해 신중년 시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해봤다. 촬영 협조 청파동 블루스소사이어티 우리나라에서 블루스는 ‘부르스’라는 이름으로,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빠른 리듬의 노래들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느린 템포로 나오는 사교댄스에 가까운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통파 블루스란 현대 록 음악의 기원이며 다양한 장르에 강렬한 영감을 준, 사실상 팝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장르다. 한국에서 정통파 블루스 뮤지션을 말할 때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김목경이다. 올해 나이 예순.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대에서 말 그대로 ‘살고 있는’ 현역 음악인이다. “한국의 에릭 클랩튼이란 말은 듣기 싫네요. 그냥 김목경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젊었을 때는 에릭 클랩튼을 많이 연구했으니까 기타 플레이가 비슷했을 텐데 그게 벌써 30여 년 전이니 지금은 에릭 클랩튼과 비슷하지도 않아요.” 블루스의 성지에 서다 김목경은 천생 음악인이다. 그는 음악을 하며 산 인생에 대해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들이니까. 돈이 되든 안 되든 매순간을 즐기며 사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또래 친구들 중에 돈 많이 번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는데 다들 저를 제일 부러워해요.” 그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도 음악이었다. 그는 200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블루스의 성지인 미국 멤피스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그때 조 카커, 쉐릴 크로 등 당대 최고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명만 초청된 자리였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대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 확고하게 굳혔다. “제 인생 최고 보람이었죠. 그 무대에 서고 난 뒤 일본, 인도네시아 등에서 초청이 계속 이어져서 공연을 다녔어요.” 블루스는 감정이자 반추상화 사실 우리나라에서 정통 블루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루스의 최고 대가가 생각하는 블루스론이 궁금했다. “블루스는 감정으로 해야지 테크닉이나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재즈는 테크닉과 음‘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즈는 그림으로 말하면 추상화예요. 반면 블루스는 반추상화. 약간 정형화되어 있으면서 추상의 느낌이 있는거죠.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에 있어 재즈는 무한대에 가까워요. 음을 벗어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재즈죠. 그러나 블루스는 그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요.” 기타가 텐션이 살아 있어 쫄깃쫄깃한 음을 낸다고나 할까. 블루스는 마치 희롱하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아마 그가 말하는 ‘넘을 듯 말 듯 한다’는 게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블루스는 Blues, 블루(Blue)에다 에스(S)를 붙인 거예요. 블루라는 단어가 가진 뜻이 외로움, 차가움, 쓸쓸함이죠. 블루스가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처음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기에 그런 인상이 있어요. 블루스는 17~18세기 미국 식민지로 건너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든 음악입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어떤 음악적 지식도 없었죠. 그런데 농사를 짓고 밤이 되면 읊조리듯 노래를 했어요. 그게 블루노트고 블루스의 음계죠. 백인들이 어느 날 그걸 들어봤는데 자기들이 쓰지 않는 음계였어요. 신기했겠죠. 그래서 그 음계를 훔쳐와, 미국의 전통음악인 컨트리 음악과 접목을 한 거죠. 록큰롤은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청계천 ‘빽판’이 알려준 진실 그렇다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삶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 사는 김목경은 어떻게 블루스라는 영역에 매혹된 걸까? “어렸을 때는 통기타를 쳤어요. 그때는 롤링스톤스와 레드 제플린 흉내 좀 내보고 싶어도 어려워서 못하던 시절이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청계천에서 ‘빽판’을 사러 다니는 게 낙이었어요. 학교 가면 애들이 빽판을 가져와서 ‘너 이거 있냐?’는 식으로 겨루곤 했죠.(웃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반 레코드를 불법 복제해 만든 ‘청계천 빽판’ 수집은 음악 검열을 하던 시대에 제대로 된 음악을 듣고 싶었던 이들의 은밀한 취미이기도 했다. 불후의 팝 명곡으로 여겨지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검열로 들을 수 없었던 시절, 청계천 빽판이라는 불법 유통망은 금지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러 명이 기타를 치고 있는 두 장짜리 앨범이 있더라고요. 그림이 멋있어서 샀지. 집에 와서 틀었는데, 그 앨범에 기타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었어요.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스톤스나 다 그 음악을 베낀 거더라고요. 그게 바로 블루스 음악이었어요.” 3개월 가기로 한 영국, 6년을 살다 1984년, 김목경의 대학 시절 원래 전공은 일어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해야 할 때였는데, 겨울에 제대하는 바람에 가을에 복학하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생겼다. 딱 3개월만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께 얘기해서 3개월 지낼 비용만 받고 영국을 갔어요. 그런데 갔더니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한참을 더 머물러 있다가 1990년도에 귀국하게 됐죠. 그런 이유로 난 데뷔가 되게 늦은 편이에요.” 3개월만 있다가 오겠다는 외동아들이 장장 6년 동안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부모님 속은 오죽했을까.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게 미안하지. 죄지. 너무너무 죄송해서 이제야 이번 앨범 신보에 음악을 만들어서 넣었어요. ‘엄마 생각’이라는 연주곡이에요.” 단 3개월 머물 비용만 갖고 가서 6년이나 있었으니 영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 4~5가지 일을 해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운 시기였어요. 아침에 여행객이 오면 버스 태워서 호텔까지 바래다주고, 호텔에서 아침 먹은 후 일본 식당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죠. 점심은 그 식당에서 먹고, 네 시부터는 페인트칠을 했어요. 이게 벌이가 가장 짭짤했죠. 그리고 저녁 여덟 시부터는 클럽에서 연주를 했고요. 그러면서 돈을 좀 벌 수 있었죠. 쓸 시간이 없었으니.”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원래 건전가요 영국에서도 당연히 블루스 밴드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88년, 1989년 즈음에 앨범을 녹음했고, 마스터 테이프를 갖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테이프는 서라벌레코드 사에서 발매된 그의 1집 앨범이 됐다. 나이를 생각하면 다소 늦은 데뷔였다. “그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앨범이 될 듯 말 듯 하는 게 있었어요. 에이, 그러면 한 장만 더 내고 가자 하고 한 장을 더 냈는데, 그다음에는 계속 한국에 있게 된 거죠.” 그렇게 낸 데뷔 앨범에 저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 김광석이 불러서 유명해진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처음 노래 부른 이가 바로 김목경이다. “1집 맨 밑에 있던 곡이었죠. 넣을까 말까 하다가 넣은 건데, 그때만 해도 건전가요를 하나씩 넣어야 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노래는 건전가요로 쓸려고 넣은 거였죠. 그런데 그거 말고 건전가요를 따로 또 넣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저작권 덕분에 많이 도움이 돼요.(웃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시간씩 연습 “기타는 나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기타로 하는 거야.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연주할 때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연주하는 거죠.” 김목경은 지금도 매일 배우며 산다고 말한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은 컴퓨터 틀어놓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 시간 동안 하는 연습이다. 매일 지키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제일 즐거운 시간이라고 한다. “연습을 안 하면 금방 티가 나요. 무대에서 바로 드러나죠. 내가 원하는 플레이가 나와야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는 말 그대로 무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일주일에 한 번 무대에서 공연한다 가정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공연할 수 있을지를 계산해봤다. “내 남은 생애에 오백 번을 못 넘긴다고 나오더라고요. 숫자 오백 번이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지더라고요. 에릭 클랩튼이나 비비 킹이 돈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그렇게 계속 공연을 간절히 원했는지 이해가 됐어요. 그 순간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어디든지 가요. 어디든지. 그렇게 해서 좋은 점은, 공연 횟수도 채울 수 있고(웃음) 내가 항상 준비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항상 무대 사운드에, 무드에 젖어 살 수 있는 거죠.” 그 대답만 들어도 그가 왜 행복한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철저한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목경은 최근 신보 녹음을 끝마쳤다. 그의 정규 앨범으로는 일곱 번째 앨범이다. “총 아홉 곡 중 일곱 곡은 내가 만든 거고 두 곡은 남의 곡이에요. 한대수 씨 거 하나와 옛날 록 그룹 무당의 노래 리메이크 하나. 타이틀곡은 고민 중인데 ‘산을 돌아’로 할까 ‘더 블루스 밴드’로 할까 고르고 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곡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그 전에 그러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곡을 만들어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기타리스트 김목경, 무대에서 늙다 “인생의 목표? 그런 거 없는데? 건강관리? 담배 피고 술 먹고.” 소위 말하는 웰빙 라이프와는 거리가 한참 먼, 뭔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음악인다운 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목경은 최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음악에 대한 깊이는 젊었을 때와 큰 차이 없는데, 밴드하고 연습할 때 뭐가 잘못되면 예전에는 날카롭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잘못됐을 때 내가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둥글둥글 넘어가주죠. 이게 나이 먹으면서 좋은 점이기도 해요.” 브라보 공식 질문인,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우직하게 “기타리스트 김목경”이라고 대답했다. 초지일관 그다운 대답이었다. “앞에 ‘좋은’이 붙으면 더 좋고.(웃음)” 그는 이미 삶의 상당 부분을 확신하고 확정지었으며 이제 그곳에서 즐거움을 퍼 올릴 일만 남은 사람이다. 자신만의 답도 찾아냈고 그걸 실현시킬 능력도 갖춘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저는 지금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무대에 서지 못할 때까지 하고 싶은 거죠.” 올해 60의 나이가 된 그가 부르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노래 맛은 어떨지 오늘 밤에 소위 그의 ‘나와바리’인 논현동으로 노닐러 가볼까나. 헤이, 브라보 블루지 라이프!!
- 2018-10-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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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바로 재면 큰 병 막는 체온계 바로 알기
-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인천성모병원과 함께 ‘백세 건강 챙기는 가정용 의료기 백배 활용법’을 연재합니다. 시니어가 흔히 가정에서 쓰는 의료기를 제대로 알고 사용할 수 있도록, 재미있는 영상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영상은 네이버TV 브라보 마이 라이프 채널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감수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출연 안지현 인천성모병원 간호사 지난겨울의 극심한 추위가 아직 잊히지 않았는데, 올여름엔 무더위가 우리를 괴롭혔다. 심한 추위나 더위는 정상 체온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 체온은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 몸의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 중 하나. 때문에 정기적으로 체온을 측정하는 것은 건강관리의 가장 기본으로 꼽힌다. 시중에는 다양한 형식의 체온계가 판매되고 있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다. 컨디션의 급격한 변화를 느끼거나 열감(熱感)을 느낄 때 체온을 측정해 기록하는 습관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015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메르스 사태로 체온 측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늘었지만 개선해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다. 특히 지속적으로 열감을 느낄 때 체온을 측정하지 않고 서둘러 해열제부터 복용하는 태도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감염성 질환 진단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체온을 측정하면 건강의 변화도 확인할 수 있다. 체온계를 통해 나와 가족의 건강을 꾸준하게 점검해보는 것은 어떨까? 01 비접촉식 체온계 피부적외선체온계, 이마체온계라고도 불린다. 피부에서 발생하는 적외선을 측정해 체온을 알아내는 방식이다. 체온계가 피부에 직접 닿지 않아도 측정이 되기 때문에 위생적이며, 단체를 대상으로 사용할 때 적합하다. 또 제품 종류에 따라 실내 온도를 측정하는 기능이 포함된 것도 있다. 시중 판매가격은 6만~8만 원 선. 체온이 지나치게 높게 나오거나 낮게 나올 때 혹은 결과가 의심될 때는 여러 번 측정해서 정확한 체온을 가늠하는 것이 좋다. 체온계가 지나치게 차가울 때는 오차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상온에서 30분 정도 놔둔 후 측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또 몸이 젖어 있는 경우에는 물기를 제거한 후 측정해야 한다. 운동이나 목욕 후에 체온을 재면 올바른 측정이 어렵다. 실온에서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체온을 측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측정 방법 a 센서를 보호하고 있는 뚜껑을 제거한 후 전원을 켠다. b 작동 중이 확인되면 체온계의 센서 부분을 이마의 중앙에 위치시킨다. 이마와의 거리는 1~3cm를 유지한다. c 측정 버튼을 누른 후 1초 정도 기다리면 결과가 나온다. 02 고막형 체온계 귀의 고막에서 발생하는 적외선을 측정해 체온을 알아낸다. 비접촉식 체온계보다 사용자에 따른 측정 편차가 낮다. 귀에 직접 센서 부위를 넣고 측정하기 때문에 위생 관리를 위한 일회용 커버가 필요하다. 시중 판매가격은 3만~5만 원 선.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어 귀가 차가울 경우 몸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체온계가 차가운 곳에 보관됐을 때는 상온에서 30분 정도 놔둔 후 측정한다. 수영이나 목욕 등으로 귀가 젖었을 때, 외이염이나 중이염 등 귓병을 앓고 있는 경우에도 사용해선 안 된다. 측정 방법 a 센서를 보호하고 있는 뚜껑을 제거한 후 도구를 사용해 일회용 커버를 씌운다. b 전원을 켜고 센서 부위를 귀에 삽입한다. 이때 귀를 살짝 당겨 귓구멍을 확장하고, 센서와 고막이 마주 볼 수 있도록 한다. c 1~2초 후 측정 버튼을 누른다. 03 전자식 체온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체온계. 접촉식 센서를 통해 겨드랑이나 혀 밑, 항문 등을 통해 체온을 측정한다. 접촉식 체온계이기 때문에 위생에 주의해야 한다. 측정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단점. 그러나 측정 결과가 다른 체온계에 비해 정확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1만 원 이하의 제품도 있다. 운동 후에는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측정해야 정상적인 체온을 알 수 있다. 물이나 땀으로 겨드랑이가 젖어 있을 때는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측정 방법 a 체온계의 전원을 켠 후 건조된 상태의 겨드랑이 정중앙에 센서 부위를 위치시키고 팔을 내려 체온계를 감싼다. 센서 부위가 팔 뒤로 빠지지 않게 유의한다. b 시작 버튼을 누른 후 완료 신호음이 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 반대쪽 팔로 측정 중인 쪽 어깨를 감싸주면 좋다. c 완료 신호음이 나면 액정에 표기된 체온을 확인한다.
- 2018-09-25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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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기도 궁합이 맞아야 오래간다
-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는 버킷리스트. 그러나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애써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도 어떻게 이뤄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주제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을 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앞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5위를 차지한 ‘한 가지 악기 마스터하기’에 대해 알아봤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을 대상으로 배워보고 싶은 악기를 조사한 결과 1위 기타(44%), 2위 장구(25%), 3위 피아노(16%) 순이었다. 악기 레슨 전문 스튜디오 스마일라이프 이경연 대표는 시니어 수강생들이 선호하는 악기 중 하나가 색소폰이라 말한다. 김현정 음악교육 전문가 역시 시니어에게 추천할 만한 악기로 색소폰을 꼽았다. 전문가들은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듯, 자신에게 잘 맞는 악기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기타, 장구, 피아노 그리고 색소폰을 배우려는 이들을 위한 도움말을 담았다. 도움말 스마일 라이프 이경연(색소폰)·김선길(기타)·이미송(피아노) 강사, 마포문화재단 정종숙(장구) 강사 기타 추천 성향 7080세대, 20 ~30년 전 기타를 쳤거나, 반대로 그 시절 로망으로만 간직한 채 배우지 못한 분들이 선호한다. 통기타의 경우, 연주와 동시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스트레스 없이 노래를 잘하는 이들에게 알맞다. 다른 악기에 의존성이 덜하고 장소에 제약이 적어 가족이나 모임에서 소소한 공연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권한다. 악기 구입 요령 입문자라면 20만~30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 악기 상점 두세 곳을 방문해 소리를 들어보고 사야 한다. 직접 기타를 쳐보고 소리를 가늠해야 하는데, 초보자라면 연주가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 악기상 주인들은 기타를 칠 줄 아니, 대신 연주를 부탁해 소리를 꼭 들어보자. 기타는 대중화한 악기라 중고 거래도 활발하다. 일반 중고판매 사이트나, 음악인들이 애용하는 ‘뮬(www.mule.co.kr)’을 통해 중고로 구입해도 괜찮다. 연습 과정 기타는 손에 굳은살이 박여야 하는데, 그 과정을 힘들어하는 이가 많다. 매일 1~2시간 정도 3주에서 한 달가량 연습하면 굳은살이 잡혀 그 뒤로는 진도가 빠르게 나간다. 기타를 연주하다 보면 손가락 끝에 통증이 생기는데, 증상이 심하다면 레슨 강사의 도움을 받아 잡기 편한 코드로 수정하는 등 융통성 있게 연습한다. 기타를 다시 배우는 이라면? 과거에는 친구들끼리 가르쳐주고, 한 곡만 특정지어 연습했다. 즉 기본기가 부족하거나, 응용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적으로 들인 습관을 고치는 게 힘들지만,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개선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장구 추천 성향 사물장구는 율동이 더해져 체력소모가 있지만, 가락장구의 경우 앉아서 연주하기 때문에 힘이 덜 든다. 우스갯소리로 ‘젓가락 들 힘만 있으면 된다’ 할 정도로 장구채 쥘 기력만 있다면 충분하다. 여럿이 왁자지껄하는 것보다 자기만의 싸움과 만족을 원하는 분들이 알맞다. 악기 구입 요령 처음 2~3개월은 기관이나 학원 등에 있는 장구로 연습한다. 어느 정도 배우다가 나에게 맞는 악기라고 여겨진다면 개인 장구를 구입한다. 종로 국악사 등에서 파는 장구는 10만~15만 원 정도면 적당하다. 연습 과정 군밤타령, 아리랑 등 귀에 익숙한 가락을 연주하다 보니 쉽게 잘 되리라 여기지만, 막상 가사와 장단을 맞추려면 시간이 걸린다. 끈기 있게 1년은 꼭 버티시라 조언한다. 장구는 소리가 위아래로 울려 층간 소음 문제가 있는 집에서는 연습하기 불편하다. 평상시 연주 장면을 찍어둔 뒤, 젓가락이나 스틱을 이용해 박스, 쿠션 등을 놓고 영상을 보며 익힌다. 장구가 익숙해졌다면 민요도 함께 부르며 연습한다. 민요가 곁들여져야 어디 가서 장구 가락에 노래 한 소절 뽑을 수 있다. 피아노 추천 성향 혼자 하는 악기이다 보니 감성적인 분들이나 차분한 성향의 분들이 하면 좋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건반을 치다 잘 안 되면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손주에게 동요 등을 연주해주고 싶어 오는 조부모도 있다. 악기 구입 요령 피아노는 가격대가 높은 편이니 키보드와 같은 건반을 먼저 사서 익히면 좋다. 20만~30만 원대도 있지만, 너무 저렴한 것보다는 50만 원 정도의 국내 브랜드가 적당하다. 연습 과정 대부분 처음 특정 곡을 정해와 ‘이거 하려면 얼마나 걸려요?’라고 묻는다. 기본기가 전혀 없다면, 두세 달은 해야 원하는 곡을 완주할 수 있다. 다른 악기에 비해 악보를 잘 봐야 한다. 계이름이나 부호 등을 익히는 기초 과정에서 인내심이 요구된다. 오래 꾸준히 하면 좋은 취미가 되고, 힐링이 되는 악기이니 1~2년 정도를 기본으로 보고 해나가길 권한다. 색소폰 추천 성향 멜로디 악기이기 때문에 가수와 똑같다 생각하면 된다. 밴드를 이루면 색소폰은 가운데 서서 멜로디를 주도한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리더십 있는 분들에게 알맞다. 반면, 소심한 분들도 색소폰을 하면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화하는 사례도 많다. 악기 구입 요령 입문용 색소폰을 사서 쓰더라도 1~2년 이상 쓴다 해서 고장 나거나 못 쓰게 되지는 않는다. 한 번 사면 오래 연주할 수 있는 악기다. 색소폰 소리를 좌우하는 건 ‘마우스피스’다. 때문에 마우스피스는 가능한 한 좋은 것을 사시라 권해드린다. 연습 과정 관악기이다 보니 호흡에 어려움이 있는 시니어에겐 적합하지 않다. 그 외에는 비교적 쉽게 배워나갈 수 있는 악기다. 다만, 독학으로 알음알음 배워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잘못된 습관이 들면 고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힘들더라도 기초를 잘 다져야 한다. 악기에 도전하는 시니어를 위한 Q&A 도움말 김현정 음악교육 전문가 Q 악기를 배우다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처럼 악기도 저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악기가 좋아서, 뭐 하나 배우고 싶어서, 소리가 멋지고 좋아서 등등 노력의 대가와 성질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악기를 접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악기는 한 번 배우기 시작하면 적어도 1~2년은 배워야 일정 수준에 오르는데, 이때 악기와 내가 궁합이 잘 맞아야 오래 익힐 수 있습니다. 악기를 배우기 전 그 악기의 특징은 무엇인지, 내 성향에 잘 맞는지 알아보고 상담 등을 거쳐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Q 내게 맞는 성향의 악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요? 크게 리듬 악기와 멜로디 악기로 나눕니다. 장구나 드럼 등 리듬 악기는 다른 악기들을 리드하면서도 배려해야 하기 때문에 소통 능력과 책임감이 강한 분에게 맞습니다. 혼자만의 음악을 즐기고 싶고 차분한 성향이라면 난해하지 않은 베이스 악기가 좋습니다. 성격이 급한 분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등 멜로디 악기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리듬 악기는 치면 바로 소리가 나고 반응이 있는 반면, 멜로디 악기는 음정을 맞추고 멜로디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립니다. Q 시니어에게 추천할 만한 악기가 있다면요? 요즘은 색소폰을 많이 배우십니다.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고, 소리도 크게 잘 들리고, MR기기를 휴대할 수 있어 반주자 없이도 연주가 가능한 게 매력입니다. 음악에 소질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부담 없이 배우고, 실력 향상도 잘되는 편입니다. Q 악기를 배우는 시니어들의 고충은 무엇인가요? 악보 보는 것을 어렵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배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별문제 아닙니다. 그보다는 악기마다 기본자세를 잡는데, 이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이올린만 하더라도 허리 펴고 어깨나 손목 등의 자세를 익히는데, 레슨 한 번 받으면 몸살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중요 단계이므로 무리하지는 말되, 소홀하지 않게 잘 다져야 합니다. 몸에 불편한 곳이 있다면, 악기를 배우기 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Q 악기를 배우며 찾아오는 슬럼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요? 대부분 성인은 3개월이 고비입니다. 개인 의지도 중요하지만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자기 능력을 끄집어내주는 것은 물론, 힘든 고비마다 일으켜주고 다독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악기를 배우다가 포기하고 싶을 때, 섣불리 악기를 내려놓지 말고, 배움터를 바꿔 다른 선생님과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혼자 하던 사람이라면 앙상블에 들어가거나, 모임 위주로 했다면 개인 레슨을 받는 등 환경 변화를 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Q 악기를 배우는 분들에게 격려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악기는 실력이 계단형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고 나면 정체기가 오고, 또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실력이 부쩍 오르게 됩니다. 그 꼭짓점을 하나씩 짚어가며 실력이 나아진다는 믿음을 갖고 넉넉한 마음으로 배워나가시길 바랍니다.
- 2018-09-1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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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철 별미 ‘전어’ 이야기
- 전어는 바닷물고기로 전어 과에 속한다. 몸은 옆이 납작하여 청어와 비슷하게 생겼다. 이 고기는 가을철 별미로 매년 이맘때쯤이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입맛을 당겨준다. ‘가을 전어 머리에는 깨가 서 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갔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고소한 맛으로 잘 알려졌다. 전어에 대해 너무도 궁금하여, ‘임원경제지’(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저서)를 펼쳐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전어는 기름기 많고 맛이 좋아 상인들이 소금에 절여 서울에서 파는데, 양반이나 천민 모두 좋아해 돈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고 해서 전어라고 부른다.‘ 여기에 너무 웃기는 희한한 전어에 관한 내용이 있다. ‘며느리 친정 간 사이에 시부모가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다.’ 전어는 그만큼 맛이 좋은 생선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전어에는 우리 체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필수 아미노산이 8종류나 함유돼 있고, 영양가도 높다. 또 콜레스테롤과 체지방을 분해하고, 피부미용에 좋아 여자들이 선호하며, 타우린, 칼슘, 비타민, 미네랄이 많아 피로 해소에 좋은 식품에 속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요리여왕 뚝딱이님’라고 소개한 바 있는 아내는 가을이면 전어를 사다 요리 솜씨를 자랑했다. 아내가 요리를 할 때면, 고소하게 풍기는 전어 냄새에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요리여왕 뚝딱이님'은 어느새 전어 회를 썰어 초고추장과 막장을 쳐서 가져왔다. “상추쌈으로 아삭아삭~ 씹어 드세요”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는다. 살아있는 전어를 잡자마자 회를 쳐야 맛이 있다고 요리여왕답게 솜씨 자랑을 한다. 그러더니 “전어구이는 크기가 한 뼘 되어야 맛이 있다” 하면서 나에게 한 입 건네준다. 찬바람이 불고 가을이 깊어질수록 전어는 맛이 차오른다고 한다. 아내에게 별명 하나를 잘 지어준 덕분에 놓칠 수 없는 가을 별미 전어 한 상으로 호강했다.
- 2018-09-1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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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 발광 소녀 감성, 전성기를 맞이하다-박애란 동년기자
-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9-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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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 플로렌스 너싱홈
- 노후를 어디서 보낼 것인가. 죽기 전까지 어디서 살 것인가는 시니어의 마음 한쪽을 무겁게 만드는,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주제다. 특히 치매나 중풍 같은 질환으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면 더욱 문제다. 한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인보호)시설은 죽음을 기다리는 시설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일반 사회적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후를 맡길, 안심하고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은 없는 것일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새 연재는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첫 번째 주자가 된 플로렌스 너싱홈의 문을 두드렸다. 자유로를 따라 파주시 탄현면을 찾아 달린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러 두 번이나 왕복한 길이다. 웬만해선 붐비지 않는 그 길을 따라 서울에서 30분 정도 달려가면 ‘대동리’라 쓰인 출구가 나온다. 달랑 대동리라고만 쓰인 표지판이 다소 생경하다. 거기서부터 중앙선도 없는 국도를 5분 정도 달리면 드디어 플로렌스 너싱홈이 나타난다.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설계된 구조 요양원을 둘러보니 구조가 독특하다. 병실과 식당, 공용시설 등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는 병원과는 다르게 어느 곳을 봐도 거실 모양을 한 공간이 눈에 띈다. 사방이 비슷한 풍경이다. 이예선 원장은 유니트(Unit) 단위로 조성된 설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외 너싱홈도 이렇게 유니트 개념을 도입한 곳이 많아요. 1개 유니트에 11~12명 정도가 머무는데요, 어르신들의 침실과 함께 거실과 화장실, 목욕탕이 세트로 구성돼 있습니다. 작은 한 집에서 소수의 어르신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거주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작은 집 여러 개를 합친 전체 시설을 운영하는 개념이죠.” 단일 유니트에는 전담 요양보호사들이 배치돼 함께 생활하고, 각 유니트는 성별이나 질환 종류, 개인별 성향 등이 고려돼 환자들이 배정된다. 혈관성 치매 환자들은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장기요양보험 4~5등급 정도의 가벼운 치매 환자들은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할 수 있을 만큼 일상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구성된 플로렌스 너싱홈의 정원은 총 49명. 2015년 증축 결과 설치 허가 면적 기준으로만 계산하면 56명까지 인가가 가능했지만, 동선이나 생활의 편의성 등을 위해 정원을 축소했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삶의 끝이 아닌 연장으로 플로렌스 너싱홈이 지향하는 환자들의 생활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각자 인생을 살면서 갖게 된 기호나 취향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노력한다. 이를 위해 개개인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자녀에게도 숨겨온 ‘까막눈’을 고치고 싶어 하는 환자에게는 글쓰기나 산수 숙제를 내어주기도 하고, 마비된 모습을 남에게 숨기고 싶은 어르신에겐 태블릿 PC를 통해 침실에서 할 수 있는 전래동화 보기 같은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평생 가사를 해온 사람이 많기에 요리 재료를 다듬고 있으면 잔소리하는 어르신도 많다. “예전 기억이 되살아나 손질법을 알려주시기도 한다”고 전담 영양사는 웃으며 얘기한다. 매번 어르신들의 손을 빌리면 노동으로 비춰질 수 있어 계절별로 날짜를 잡아 실컷 만져보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김장 속을 버무리거나, 잔뜩 받아온 콩을 다 같이 둘러앉아 손질하는 식이다. 이외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수시로 운영된다. 실버체조나 레크리에이션이 운영되기도 하고 분기별로는 가까운 관광지에 나들이를 가거나 공연을 관람하기도 한다. 종교 역시 ‘살아온 삶’의 범주에 들어간다. 인근 종교 시설에서 찾아와 어르신들을 위한 예배나 미사를 시설 내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또 주변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찾아오는 봉사활동도 플로렌스 너싱홈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다. 관계자는 “지나친 포교 목적이 아니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한다. 환자 건강 위해 농장도 운영 음식은 환자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변화가 많지 않은 생활이다 보니, 식사가 오락 중 하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너싱홈이 자랑하는 부분 중 하나가 여기 있다. 바로 식재료에 관한 것. 플로렌스 너싱홈은 신선한 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 자체 농장을 마련했다. 원하는 농작물을 직접 재배하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쓰는 식이다. 지역 주민들과의 교류가 많다 보니, 주변 농가에서 농작물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필요하면 언제든 뽑아가라”는 농민들도 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음식을 만들고 나서 대접하는 데도 원칙이 있다. 반드시 어떤 음식을 드시고 있는지 원형을 보여드리고 그 자리에서 먹기 좋게 요양보호사가 잘라주며 식사를 돕는다. “예전에 어떤 곳에서 아예 음식을 모두 갈아 내오는 경우를 봤어요. 아무리 환자에게 유동식이 좋다지만 섭식이 가능한 어르신들에게는 어떤 음식을 드시고 계시는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리한 그대로의 음식을을 식탁에 올립니다.” 환자의 건강을 위해 명지병원과 촉탁계약을 맺고, 물리치료실도 별도로 운영 중이다. 물리치료실 방문을 나들이 삼아 즐기는 어르신들에게는 단골 놀이 장소다. 몸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물리치료사가 직접 찾아간다. 이러한 맞춤형 환자 관리는 운영 전반에 적용된다. 이곳에서 요양보호사들과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간호사 모두가 매일 아침 환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효과가 좋았던 방법들도 공유한다. 이런 운영 방식에 대해 이 원장은 “1000명의 어르신이 계시면 1000가지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불편함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일이나 여러 증상에 대한 대응은 환자마다의 특징이나 삶의 배경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배회를 하시거나 용변을 만지거나 소변 냄새가 심한 분은 모두 원인이 있어요. 배회와 용변을 만지는 원인을 찾아내야 해요. 소변 냄새로 수분섭취량을 감지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저희의 일입니다.” 이 원장은 환자 가족들을 위한 조언으로 “그래도 가족만 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가족과 떨어져 살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가능하면 자주 면회 오시는 것이 좋아요.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대부분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서 견디다 오시잖아요. 어쩔 수 없이 맡기셨다 해도, 엄마 표정이 편해졌다, 건강해졌다는 말 해주실 때가 가장 보람 있어요.” 요양병원과 요양원 뭐가 다를까? 법적으로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기관이다. 따르는 법도 다르다. 요양병원은 의료법을, 요양원은 노인복지법을 따른다. 적용보험도 국민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으로 구분돼 재원도 다르다. 요양병원은 의료인이 설립하고 상주해야 하는 반면, 요양원은 의료인이 아니어도 설립 가능하다. 요양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대상은 만성질환자 혹은 회복이 필요한 대상으로, 치매 등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요양원과 구분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런 시설의 주요 수요자인 치매 환자의 경우 대부분 만성질환을 갖고 있어 조건을 모두 충족해, 양쪽 중 선택해 갈 수 있다. 현장에서 “결국 가족이 기관을 선택하는 조건은 가격과 입지”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요양병원은 보험으로 식비 지원이 되지만 간병비 부담이 큰 반면, 요양원은 요양비를 80~90% 보험으로 지원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월 비용은 요양병원이 다소 높다. 요양원마다 가격 차이가 있는 것은 대부분 식비와 비급여 항목 때문이다. 이예선 원장의 요양원 선택법 "부모님 모실 때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치매실태조사를 위해 전국의 요양병원, 요양원을 다녀본 이예선 원장의 요양원 선택법은 두 가지. 1 직원의 표정을 살펴라 안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 직원을 살펴보면 그 기관의 분위기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너무 조용하거나 딱딱하면 사무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높다. 2 냄새를 맡아보자 청결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냄새로 확인하는 것이 확실하다. 악취가 나지 않으려면 청소도 자주 해야 하고 환기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역한 냄새 없이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청결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뜻.
- 2018-08-23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