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인철의 야생화] 보랏빛 꽃다발로 거친 파도를 다독이는, 해국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의 ‘그리움’) 늦가을 철 지난 동해 바닷가를 서성댑니다.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태풍으로 인해, 엄밀히 말하면 주로 일본과 대만 등을 덮치는 태풍의 여파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달려드는 파도를 보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구절을 읊조리게 됩니다.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소리쳐봅니다. 그런데 시인의 말은 다릅니다. 시인은 뭍 같은 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고 장탄식을 했지만, 사실 뭍은, 심지어 잡채만 한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리움을 농축하고 농축해서 만든 꽃다발을 안고 온몸을 열어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파도를 환영합니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부터 달려와 포말을 일으켰다가 사라지곤 하는 파도를 향해 보랏빛 미소를 건넵니다. 보랏빛 미소의 주인공은 바로 ‘바다 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해국(海菊)입니다. 해국은 거센 바닷바람에 날려 온 한 줌 모래흙이 전부인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사시사철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에서 온몸을 드러내놓고 살다가 늦가을이면 어김없이 연한 보라색 꽃을 피웁니다. 꽃송이는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리며 지름 3.5~4cm로 제법 큽니다. 대부분 연보라색 꽃이지만 가끔 순백의 꽃송이도 눈에 띕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높이 30~60cm로 자라는 줄기와 그 끝에 달려 있는 잎은 겨울에도 죽지 않습니다. 줄기는 해가 갈수록 굵어지며 심지어 나무처럼 단단해집니다. 겨울에도 잎과 줄기는 반상록 상태를 유지할 뿐 아니라, 제주도 해안가에서는 늦가을 핀 꽃이 그대로 달려 있기도 하고, 더러는 새로 피기도 합니다.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국이 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만 분포합니다. 당연히 어느 해국이 원종(原種)인지 궁금해집니다. 영남대 생명과학과 박선주 교수는 해국을 비롯해 독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고향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결과의 하나로 2010년 세계유전자은행에 독도 해국의 염기서열을 등록시켜 독도의 자생식물로 국제적 공인을 받았습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독도와 울릉도는 물론 제주도를 비롯해 동·서·남해안 전역에서 해국이 자라고 있으나, 일본의 경우 일본 서해(우리나라로 보면 동해) 지역에만 분포한다”라고 설명합니다. 또 해국의 분포도 및 개체 수 등으로 미뤄볼 때 한국의 해국이 원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박 교수는 조만간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해국과 일본 해국의 유전자 집단 분석 등을 통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답을 찾아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Where is it? 동·서·남해안을 비롯해 제주도·울릉도·독도까지 전국의 해안가가 자생지다. 그러나 강화도나 영종도 등 인천 인근 서해 바닷가에서는 보기 어렵다. 서해안에서는 적어도 영흥도나 안면도까지 내려가야 한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해국을 보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은 일출로 유명한 추암 해변인데,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추암해수욕장으로 가면 된다. 길게 뻗은 모래밭을 따라가다 보면 바위틈에 핀 해국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촛대바위를 바라보는 바위들 사이에 절묘하게 핀 해국(사진-1)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제주도 전역 및 마라도 개쑥부쟁이 군락 사이에 드문드문 핀 해국(사진-2)도 인상적이다.
- 2016-10-17 15:31
-
- [양승동 변호사의 법률 가이드] 아내의 부양료 청구는 인정될까
- 사례 A는 B와 1980년 1월 1일 혼인하였으나 성격차이로 불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5년 1월경 A는 부모님을 위해 고향 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B와 갈등이 심해져 결국 이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B가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자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해 이혼을 못하고 있었다. A는 B와의 불화 중 C를 알게 되었고, C가 위자료를 빌려 주어 B와 이혼하였다. A는 B와 이혼 후 C와 1998년 1월 혼인신고를 하여 법률상 부부가 되었다. A와 C가 혼인한 이후 B는 A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데리고 나타나는 등 A와 C의 혼인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C는 A와 B가 위장이혼한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A와 C의 다툼이 심해져 1999년 1월부터 별거하기에 이르렀다. A는 C와 별거하게 되자 C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C는 직장도 그만두고 A와 혼인생활을 하였으나, 별거하면서 생활비를 받지 못하였다. C는 2000년 1월 2일 A를 상대로 과거의 부양료 및 혼인해소시까지의 부양료를 청구하였다. C의 청구는 용인될까. 부부 사이의 부양의 의무는 민법 제826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다. 이는 혼인관계의 본질적 의무이고 부양을 받을 사람의 생활과 부양의무자의 생활을 같은 정도로 보장하여 부부 공동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1차적 부양의무이다. 위 사례의 경우 A와 C는 법률상 부부이고, A는 C에 대하여 부양의무를 부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A는 자신의 급여를 통해 C가 자신과 같은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생활을 보장하여야 할 부양의 의무를 진다. C가 A에게 청구한 부양료를 살펴보면 1999년 1월 1일부터 2000년 1월 1일까지의 부양료(과거 부양료)와 2000년 1월 2일부터 혼인해소 시(예를 들면 이혼할 때까지)까지의 부양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양의 의무는 혼인 시부터 부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부양의무자가 부양의무의 이행을 청구받기 이전의 부양료의 지급은 청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부양의무의 성질이나 형평의 관념에 합치된다”고 하여 과거의 부양료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부양의무의 이행청구를 요구하고 있다(참조 : 대법원 2008.06.12. 자 2005스50 결정). 위 사례에서 C가 1999년 1월 1일부터 2000년 1월 1일 사이에 부양료를 청구하는 등 부양의무 이행을 A에게 요구하지 아니하였다면 위 기간의 부양료는 받을 수 없다. 따라서 C는 2000년 1월 2일부터 혼인이 종료하게 되는 시점까지의 부양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참고로 자녀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양의무 이행의 청구가 있어야 과거의 부양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양승동(梁勝童) 연세대 법대, 대학원졸. 사법연수원 32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현재 법무법인 지암 변호사, 양천사랑복지재단 고문변호사 겸 이사.
- 2016-10-14 08:54
-
- ‘영춘원’ 외상 전표의 추억
- 요즘은 현금보다 카드를 많이 쓰는 추세다. 누구나 물건값을 낼 때 돈 대신 쓸 수 있는 카드 한두 장씩은 가지고 있다. 필자도 얼마 전까진 여러 은행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었다. 은행마다 장점을 자랑하며 권하는 바람에 멋도 모르고 여러 장의 카드를 만들었지만 쓰다 보니 하나의 카드로 몰아서 소비하는 게 포인트를 모으는 방법도 될 수 있고 각 카드마다 있는 연회비를 줄일 수 있어 불필요한 비용 절감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과감하게 주거래 은행의 신용카드 한 장만 남기고 다 취소해버리고는 현명한 처사였다고 자화자찬했다. 신용카드의 장점 중 하나는 물건을 살 때 당장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고 3개월 무이자나 할부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목돈을 한꺼번에 내지 않고 나누어 내니 그만큼 합리적이고 이익일 것 같지만 그건 외상이나 마찬가지다.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외상을 좋아한다는 뜻일까? 필자는 외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지불해야 할 걸 미루는 게 찜찜하다. 카드로 결제할 때 액수가 좀 크면 3개월로 나누어 내는 방법을 썼는데 무이자로 나누어 내면 된다니까 그게 이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몇 개월 무이자로 결제하면 포인트가 붙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포인트도 돈인데 붙지 않으면 손해다. 며느리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한 달에 나가는 돈이 너무 많아 일시금으로 결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이자로 몇 개월에 나눠 내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소비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요즘엔 외상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려운데 옛날에는 빈번한 일이었다. 동네 가게에서도 심심치 않게 외상을 했고 드라마에 나오는 옛날 술집엔 ‘외상 사절’이란 팻말이 꼭 붙어 있었으니 그만큼 외상이 많았던 시절이다. 외상에 대해 생각하니 재밌는 기억이 난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돈암동에 살았는데 동네에 ‘영춘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요즘도 시내에 나가거나 들어올 때 꼭 지나치는 건물이다. 지금은 다른 점포가 들어섰지만 필자가 어릴 때는 꽤 오랫동안 중국 사람이 경영했다. 자장면이라도 먹으러 가면 중국말로 쏼라쏼라 하는 말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고 음식도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우리 가족 단골집이었다. 중국인 사장님에게는 아주 잘생긴 아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배달원으로 일했다. 직접 가서 먹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배달을 시켜 먹었고 그때마다 잘생긴 아들들이 번갈아 배달을 왔다. 그런데 지금도 재미있게 기억되는 건 음식을 시켜먹고 돈을 내지 않고 메모지 조각에 전표를 써서 준 일이다. 짜장면 2그릇 또는 우동 하나, 탕수육 하나, 이렇게 메모지에 썼다. 얼마나 많이 시켜먹었는지 잘생긴 그 집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우리가 써준 전표를 수북하게 들고 결산하러 찾아왔다. 그러면 전표 하나하나 우리 가족이 쓴 글씨인지를 확인하고 돈을 줬다. 가끔씩은 우리 글씨가 아니네! 어쩌네! 하면서 실랑이도 벌어져서 그다음부터는 꼭 사인을 하기로 약속했던 우스운 일도 있었다. 한 달에 몰아서 음식값을 지급하면 ‘영춘원’에서는 특제 탕수육이나 고구마로 만든 중국식 맛탕을 서비스로 갖다 주었는데 그 맛이 너무 훌륭해서 지금도 우리 자매가 모이면 “그거 정말 맛있었지?” 하고 추억한다. 가느다란 설탕실이 죽죽 늘어나는 바삭한 맛탕은 요즘 맛탕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었다. 요즘엔 외상을 주는 음식점이 거의 없다. 그땐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공무원이신 아버지가 월급을 받기 전에는 돈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외상으로 시켜 먹고 월급을 타면 갚았던 것이다. 참 재미있는 서로의 방식이었다는 생각이다. 외상이라는 걸 싫어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서로 믿고 편의를 봐주었던 정겨운 시절이 그립다. 우리에게 외상을 주고,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받아가고, 맛있는 요리를 서비스로 갖다 주던 잘생긴 배달원 아들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하루다.
- 2016-10-11 12:47
-
- 중국과 어떻게 유대관계를 강화할 수 있을까?
- 미국은 중국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통제를 하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통제가 어려운 것 같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지 15년이 지나 국제사회에 진출하도록 지원을 하는 한편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중국을 어느 정도 통제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북핵 관련 6자회담을 추진했으나 현재 상황으로 볼 때는 실패한 정책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중국을 잡는 방법은 경제적인 방법 외는 현재 대안이 없는 것 같다. 지난 7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관련 중국의 9단선에 기초한 영유권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중국의 인공섬 건설은 불법이라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도 무시해 버리는 상황이다. 즉 중국의 남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일대일로의 정책과 미국의 항행의 자유를 관철하고자하는 미국의 정책이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제소 당사국은 중국과의 적대관계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미국과 연합하여 이를 이행하도록 종용하는 대신 도와준 미국을 경원시하고 오히려 중국과 협상을 모색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중국과 유대관계를 어떻게 강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과거 소련은 공산주의만을 주장하다가 망했고 중국은 서구 자본주의 모델을 접목하여 수정공산주의를 통하여 경제발전을 이뤘다. 글로벌 무역과 투자가 증가할수록 중국의 국제사회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커졌다. 로버트 졸릭 전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 국무부에 근무 시 '책임 있는 이해관계자론'을 제기하며 중국을 조정하였다. 즉 미국은 중국을 국제사회로 끝여 들여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관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임의대로 행동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제규범과 국제법 테두리 안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자는 정책이었다. 적어도 무역 분야에서는 미국의 전략이 통하고 있다. WTO 회원국으로 중국은 시장경제국지위(MES)를 자동적으로 부여받고자 한다. 시장경제국이 되면 덤핑률을 계산할 때 유리하다. 수출국의 국내가격과 수출제품의 판매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비시장경제국은 제3국의 국내가격을 적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반덤핑관세를 부과 받는다. 따라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중국의 철강덤핑 등과 같이 저가 수출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MES자격 부여를 해주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을 통제하는 정책을 우리도 시급히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중국 부동산의 버블 현상과 지나친 가계부채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이는 중국의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탄소 감축도 중국이 감내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중의 하나일 것이다. 중국의 국제화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활용하여 우리도 중국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 나가야 할 것이다. 현재 경제력의 차이로 인해 미국과 같이 효율적으로 중국을 통제하기 힘들 것이나 중국을 통제할 수 있는 원리를 알면 얼마든지 유대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 외환으로 인한 위기를 맞는다면 우리에게는 위기이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의 통일이 중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만들어 중국이 나서서 우리의 통일을 돕도록 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최선의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정치권과 경제권에서도 미국과 같이 활발한 대중국 정책을 위한 싱크탱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라 판단된다. 고구려 시대 우리가 수나라 및 당나라와 대등한 전쟁을 펼쳤듯이 우리도 방안을 찾으면 그리 어려운 일만이 아닐 것이다.
- 2016-09-30 13:37
-
- [꽃중년@] 압구정동 그녀들의 은밀한(?) 성지 ‘은성탕’
- 10월호 // [꽃중년@] 압구정동 그녀들의 은밀한(?) 성지 ‘은성탕’ 90년대 ‘오렌지족’, ‘X세대’라는 말이 생겨나면서부터였을까?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은 그저 다른 동네였다. 성형외과 간판이 줄을 잇고, 고급 브랜드 상점과 높고 넓은 빌딩이 빽빽한 곳. 사람 냄새가 사라진 이곳에서 특이하게도 정감 있는 장소를 하나 발견했다. 럭셔리(Luxury)란 말로 포장한 듯한 압구정동 한복판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같은 ‘은성탕’이 있다. 10월에는 압구정동에서 발견한 동네 목욕탕 정취에 빠져 볼까? 압구정동에서 목욕탕을 검색해 간 곳이 은성탕이다. 압구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모든 게 달랐다. 시간이 멈춘 듯 크고 작은 소도구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서비스 개선 차원에서 여름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해 한결 깨끗해졌지만 정감은 그대로다. 이곳의 단골손님들은 ‘꽃다운 나이’ 자랑하는 50에서 70대 사이 ‘언니’들. 새벽 5시 ‘땡!’하면 출근해 물에 몸을 담그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목욕탕 멤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문봉숙(74)씨는 H백화점 VIP고객인 재스민 회원이다. 여전히 건강하고 돈 잘 버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단골손님 중 1등으로 목욕탕에 도착해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언니다. 오랜 친구인 김양순(71)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욕탕으로 출근(?)하는 문씨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또한 살뜰하게 친구들도 챙기는 문씨. 취재 당일도 아침 목욕을 끝내고 H백화점 VIP라운지에서 시간을 즐기러 갔다가 점심시간 쯤 친구들과 함께 먹을 밥을 준비해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왔다. 목욕탕에서 왜 선글라스 같은 안경을 벗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최근 안검하수 수술을 받았다는 문봉숙씨. 눈 위에 살들이 쳐져 불편했는데 수술 뒤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청록카바레 주름잡던 우리 젊은 우리 50대 시절 김양순 내가 느꼈어. 인물이 예쁘면 시집을 잘 가. 나도 인물이 받쳐줬기 때문에 은행원한테 시집 간 거야(웃음). 문봉숙 얘 젊었을 때는 예뻤어. 지금은 망가져서 그렇지(웃음). 김양순 김신조가 넘어왔을 때 1968년에 내가 육군본부에 있었거든. 나는 육군 장교하고 엮어질 줄 알았어. 그런데 은행원한테서 중매가 딱 들어오니 집에서 난리가 난거야. 은행원인데다가 집안도 좋고 대학도 좋고. 간판이 사람 죽이더구먼. 나 그래서 간판보고 시집갔잖아. 그런데 성격은 더 좋은 거야. 남편이 나 놀던 걸 전혀 몰라. 뭐 내가 카바레 가려고 거짓말하면 “왜 여자들이 저녁에 문상을 가냐고 낮에 가지” 그랬어. 모르니까. 우리는 또 그냥 집에서 나왔다가 밖에서 옷 갈아입고 그랬었어. 고속버스터미널 옆 청록카바레, 옛날 우리 때는 고속버스터미널 옆 청록카바레가 제일이었어. 우리 50대일 때 거기가 유명했다고. 20년 됐어. 그때도 참 인기 있었는데. 9월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문봉숙씨(왼쪽)와 김양순씨(오른쪽). 두 사람은 40대 중반에 자녀들 초등학교 자모회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서로 실향민 2세라는 사실을 알고 돈독해졌다고. 10여 년간 은성탕에 같이 다니면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17년째 은성탕을 운영 중인 김은진(57)씨. 10년 전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동생 사는 미국에 갈까도 생각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오랜 단골 만나고 사는 게 좋다. “머리에 영양 주는 거예요. 머리가 뻣뻣해서. 머리는 항상 여기서 해. 편하니까 여기서 해요. 목욕탕 안에서 하니까. 머리하는 가격이 저렴해.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기서 이렇게 하는 거야. 파마 3만원, 압구정동에서 완전 싼 거잖아. 안 그래?” “죄송하지만 뒷모습을 좀 찍고 싶은데 물속으로 들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한 분은 물속으로 또 한 분은 그냥 찍으라고 한다. 욕조에 걸터앉은 분은 1주일에 3번 신장질환으로 혈액투석을 한다. 병원에 가는 날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와서 수다도 떨고 목욕도 하면서 몸의 순환을 돕는다고.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보니 혈액투석을 위해 두꺼운 주사바늘을 오랜 시간 꽂은 탓에 팔 혈관이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물 안에 앉아 있는 분은 국내 유명 일간지의 언론인 출신이다. 요즘은 기존에 만나던 사람들 대신 목욕탕에서 만난 친구들 사는 얘기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다고. 목욕탕에 앉아 맑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2016-09-29 08:55
-
-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주택연금과 부모님 생활비
- 요즘 40~50대의 고민은 말 그대로 3중고(三重苦)라고 할 수 있다. 자녀들의 교육비가 만만찮은 가운데 부모님의 생활비 또는 용돈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나와 배우자의 노후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40~50대, 심지어 60대까지도 3세대, 즉 3G(generation) 은퇴설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배우자만 챙기면 되는 선진국의 1G(generation) 은퇴설계와 비교할 경우 심적·물적 부담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는 게 한국적 상황이다. 그런데 내 자녀의 교육비는 나만의 문제여서 형편대로 줄이고 늘릴 수 있는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부모님에게 드리는 생활비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들이 모두 관련된 것이라 갈등의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형제간에 사는 정도는 물론 자녀의 수, 사는 지역 등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형제애가 돈독한 가운데 형편이 좋은 형제나 장남 등 누가 나서서 부모님을 보살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좋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간의 차이를 따지고 들면서 혜택을 많이 받은 형제가 부모님 생활비를 더 내야 한다고 나서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학원에다 유학까지 부모님께서 보태주셨으니 그런 형제가 부모님 생활비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또 뭐 하나 더 받은 것도 없는데 장남이니까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필자가 직접 상담을 받은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A씨는 40대 후반으로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형제가 장남인 자신을 포함해 3명(2남 1녀)이어서 매월 50만원씩 150만원을 생활비로 부모님께 드렸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아이들 학원비가 많이 들어가서 1년을 봐 달라는 바람에 자신이 내야 하는 부모님 생활비가 100만원으로 늘어났다. 좀 있다가 여동생도 형편이 어렵다는 바람에 요즘 월 150만원을 혼자 부담하고 있다. 처음에는 1년만 봐 달라던 동생들이 1년이 지나도 돈을 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자신은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다지만 아내에게 면목이 안 서는 게 더 어렵다고 했다. 40대의 월급쟁이에게서 부모님 생활비로 월 150만원이 나간다고 해 보라. 당연히 생활이 쪼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누가 모시고 사느냐?”고 물었더니 부모님은 따로 사신다고 했다. “그럼 그 집은 누구 명의고 실제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냐?”고 했더니 부모님 명의로 되어 있고 부모님이 평생 벌어서 남은 유일한 재산이라고 했다. 가지고 있던 현금과 예금 등은 자식들이 결혼할 때 나눠서 다 물려주고 그 집 하나만 남은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우리 시대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예금 등 금융자산은 물론 가지고 있던 금 목걸이 등도 다 넘기거나 팔아서 준 다음 달랑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60대 이상 가구의 가계자산 구성(2015년 통계청)을 보면 총자산 3억 6042만원 중 78.4%에 해당하는 2억 8259만원이 거주하고 있는 집 등 부동산이다. 반면 예금 등 금융자산은 6502만원으로 18%에 불과하다. 더욱이 60대의 부채가 4785만원에 달하고 있어서 당장에 갚지 않아도 되는 부채도 있겠지만 금융자산 중 부채를 빼고 나면 실제로 사용 가능한 현금과 예금은 1717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A씨에게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이 어느 정도 하냐고 물었더니 시가가 무려 8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 비싼 집을 깔고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들이 40대의 자녀 3명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서 근근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녀들은 부모님께 드리는 생활비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마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주택연금을 소개하면서 부모님과 자녀(배우자 포함)들이 모두 함께 모여 가족회의를 열라고 권했다. 부모님의 집을 주택연금에 가입해 매월 308만원(부모님의 연령 75세, 1억원 당 매월 39만4000원 수급)을 받아 그 돈으로 부모님이 편안하게 살자는 데 가족 모두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순 서는 자녀들과 그 배우자들이 모여서 합의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동의를 얻는 것이다. 일부 부모님들의 경우 이 집이라도 물려줘야지 하면서 반대를 하거나 자녀들이 이 집이라도 물려주셔야지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A씨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동의해서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었다. 매월 50만원을 못 내는 형제들 입장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녀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주택연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문(後聞). 한참 지난 후 A씨를 만났더니 가족의 은인이라면서 고마워했다. 갈등의 소지가 보였던 가족(형제)관계가 완전히 회복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녀들로부터 월 150만원을 받아 쪼들리며 살던 부모님께서 308만원을 받으면서부터는 자녀와 며느리, 손자와 손녀들에게 후해지면서 그간 소원했던 부모님 댁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라면서 즐거워했다. A씨의 경우 상당히 고가의 주택이어서 매우 다행한 경우였지만 좀 작은 규모의 집이라도 주택연금은 주거 안정과 생활비를 상당 부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부모님 두 분 중 남은 한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현재 사는 집에서 연금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분 부모님께서 남들보다 좀 일찍 돌아가시면 정산 후 남은 부분은 상속을 받을 수 있다. 주택연금은 60세 이상 고령층이 보유한 주택을 담보로 매달 연금을 받는 상품이다. 본인 또는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이면서 주택가격이 9억원 이하이면 가입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는 주택연금 가입 시 일시 인출 한도가 연금 지급 총액의 50%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4월부터는 일시 인출 한도를 70%로 대폭 확대하였기 때문에 대출금이 많은 경우에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MIT의 로버트 머튼 교수는 ‘한국의 주택연금은 은퇴자들에게 축복’이라고 극찬하면서 “주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보다는 노후소득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집 한 채 달랑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은퇴자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권고는 없을 것 같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09-28 14:42
-
- 고객은 왕이 아니다
- 어느 음식점에서는 종업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객이 반말로 주문하면 우리도 반말로 주문 받습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술 취한 승객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반말을 듣기도 하는 택시기사도 있고 114에 전화를 걸어 성희롱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방송에서 듣고 개탄합니다. 전에도 백화점에서 고액 구매자라는 권리로 종업원을 무릎 꿀리는 갑질을 했다고 해서 사회가 시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호텔이나 음식점에서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귀족풍의 선남선녀들이 입에 담기 어려운 쌍욕을 해가며 종업원을 호통 칩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여기 책임자 오라고 해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또는 ‘지배인 나오라고 해 종업원들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시킨 거야?’ 이 모두가 ‘고객은 왕이다.’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이런 행동이 나옵니다. 고객은 왕이 아닙니다. 단지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고객일 뿐입니다. ‘고객은 왕이다.’ 또는 ‘고객의 말은 언제나 옳다.’ 라는 관용어는 원래 서비스 제공자들의 모임에서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봉사한다는 근대적 서비스 이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고객의 작은 소리를 귀를 쫑긋하여 크게 듣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러한 서비스 제공자의 생각을 마치 옛날 봉건주의 시대에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왕이나 된 냥 소비자가 착각하는 순간 진정한 서비스는 사라지고 평등의 사회가 아니라 차등의 사회요 갑과 을의 불평등 사회가 됩니다. 갑과 을의 불평등 관계는 일을 맡아서 하는 하청업체나 필요한 물건을 갖다 주는 납품업체에도 일어납니다. 갑과 을의 대표적 불평등이 각서입니다. 민법 제 104조(불공정한 법률행위)에 위배됩니다. 각서라는 것이 대부분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은 아무런 서명도 하지 않고 의무도 지지 않으면서 ‘궁박’한 상대방에게 작성 서명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각서를 일방적인 선언과 약속으로 보고 도덕적인 맹세나 선서는 될 수 있어도 민사상의 권리의무를 발생시키는 법률행위로는 원칙상 각서는 무효가 되어야 합니다. 일자리 창출은 산업사회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급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발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서비스업 부가가치 창출이 2014년도에 약53.5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종사원도 1,771만 명으로 전체 고용자의 69.2%나 차지합니다. 지금도 경제적 비중이 높은 산업이지만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세계 주요국의 서비스산업 비중이 70%를 상회하고 있고 영국이나 미국은 80%에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비스 산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로 ‘고객은 왕이다.’라는 국민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서비스사이언스전국포럼’ 공동대표이며 한국교원대 정책전문대학원 정기오 교수가 말합니다. 욕먹고 얻어맞고, 의무는 있고 권리는 없는 서비스 산업에 좋은 인재가 발을 들여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선진국에서는 호텔의 지배인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고 아주 귀빈이 올 때만 지배인이 직접 영접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청소상태가 불량하다고 지배인을 불러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칩니다. 이 모두가 '고객은 왕이다.' 라는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있습니다. 왕권시대의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사소한 기분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왕권시대가 아닙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평등의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고객이라 하여 왕처럼 군림하는 의식을 버려야 진정한 민주사회입니다. 고객은 왕이 아니라 고객의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누리는 고객일 뿐입니다.
- 2016-09-21 11:02
-
-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22)소셜 넘버 따기
-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2016-09-21 11:01
-
-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22)소셜 넘버 따기
-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2016-09-21 10:54
-
- [일본 초등학교 전학](6)... 오도시다마(세뱃돈)
- 1983년이 되었다. 외국이지만 아이들에게 우리의 설을 느끼게 해 주려고 정성들여 녹두전도 부치고 삼색 나물도 무치고 내 식으로 설음식을 만들었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만두를 빚었고, 전을 부치는 곁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고 떠들어대었다. 온 식구가 모이는 떠들썩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오붓한 설날 분위기는 부러움 없는 즐거운 풍경이었다. 만두 속이 터져라 꼭꼭 넣은 사골 떡 만둣국을 후후 불어가며 외국에서 먹는 행복한 설날을 나는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었다. 일본사람들은 네모난 찹쌀떡을 석쇠에 구워서 멸치 다시국물에 넣어 파랗게 데친 시금치와 짙은 분홍색을 띤 어묵 종류중 하나를 썰어서 고명같이 올려 아주 예쁘고 담백한 오조니라는 것을 만들어먹는다. 우리는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려는 속셈이 섞인 걸쭉한 기분이 드는 걸 먹는데 그들은 춥지가 않아서인지 아주 상큼 맞고 심심한 것을 먹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먹는 것도 꽤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끔 간단하게 만들어 먹는 나의 메뉴로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들은 12월 말에 갖가지 오세찌라고 하는 새해를 위한 요리를 정성껏 많은 양을 만든다. 1월1일부터 사흘간을 집에서 먹고 자고를 해가며 반복해가며 먹기 위한 준비란다. 거의 일주일 치를 전부 만들어 놓고 그걸 또 차려 먹고 치우고 또 차려 먹으며 지낸다나? 사흘 내내 같은 음식을 먹으며 집안에서 조용하게 가족단란을 보낸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반복되는 같은 맛의 반찬을 먹느라 고역이라는 얘기다. 매번 때를 같은 반찬으로 때운다니 어이없었다. 이유는 못 물어 보고 한 엄마가 흘리는 말로 귀찮아서 그렇다며 웃었다. 정말일까? 모르겠지만 주부들이 일 년을 열심히 일해야기 때문에 힘의 저축을 위한 푹 쉼의 의미? 일본인다운 발상일 듯도...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른들에게 새해 인사를 가는 풍속은 있었다. 우리가 세뱃돈이라는 걸 받듯이 일본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오도시다마라는 걸 준다. 어른들은 그 오도시다마를 넣어주는 봉투들을 문방구나 예쁜 것들을 모아 놓고 파는 곳에 가서 자기 취미와 받을 사람에게 적합한 봉투를 무척 심중하게 준비한다. 일본 아이들은 그 돈을 받아 일 년 동안 자기의 용돈계획을 짠다는 것이다. 우선 받으면 즉시 은행에 개설해 놓은 자기 통장에 넣고 부모도 형제간에도 그 돈에 대해서 터치할 수가 없단다. 본인만의 돈 관리를 직접 해 가며 자기의 경제적인 영역을 넓혀가고 자기만의 용돈관리를 습득한단다. 확고한 셈을 직접 경험해가며 돈의 흐름을 실수도 해 보고 일어서는 법도 혼자 터득하고 배워 간단다. 한사람 1통장의 교육이 정확하게 실천되고 있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 엄마들처럼 아이들이 받은 것을 엄마가 보관해 준다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어려서부터 경제적인 머리를 키워 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어느 한 편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아무튼 두 나라의 새해보내기는 사뭇 달랐다. 우린 영양적으로 우수한 음식을 먹으면서 윷놀이를 해가며 떠들썩하게 온 동네가 들썩이는데 반해, 간단한 음식에 경제적인 중요성을 위한 돈 관리를 정확하게 알게 해주며 어른들은 징그러울 만큼 푹 쉬는 게 새해인 거 같았다. 아이들에게 통장관리 시키는 거 하나는 건져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 2016-09-05 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