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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지표 나이에 맞게 바꿔야
- 얼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봄에 받은 생애전환기건강진단결과에 대한 상담이었다.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였다.”면서 경계선을 넘나든 두어 가지 건강지표를 지적하였다. 보관하고 있는 지난 몇 년 동안의 국가건강검진결과를 살폈다. 세월이 흘러도 보험공단의 건강목표가 변동되지 않았음을 발견하였다. 학계에서는 건강목표의 개선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우리의 실정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 되었다. 사회에서는 지표기준을 병원ㆍ의사마다 다르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이 많은 체질량지수를 비롯하여 혈압ㆍ당뇨ㆍ고지혈증 대사증후군도 건강목표가 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날씬했던 몸매는 나이가 들면서 풍만해진다. 장년을 지나 노년기에 들면 다시 야위어 간다. ‘만물이 생성ㆍ소멸하는 우주의 이치’다. 힘은 사그라지고 키도 점점 줄어든다. 몸도 가벼워지지만 그 속도가 키의 그것을 따르지 못할 뿐이다. 몸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 체질량지수는 수치상으로는 조금씩 오른 상태다. 국민은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하게 되는 지점이다. 국가검진을 신뢰하기 위하여 나이에 따라 건강지표를 바꿔야 하는 이유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건강 걱정이 앞선다. 날마다 체중계에 오르고 피를 뽑아서 당뇨 체크를 하고 혈압을 잰다. 이제는 심근경색, 뇌졸중 등 돌연사도 혈압과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연구결과를 접한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있다. 국가적 차원 연구개발로 돌연사 원인을 찾아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최근에는 위암환자에게 한두 잔의 막걸리가 좋다는 소식도 들었다. 암환자에게 금기시 되었던 음주문제다. 필자가 대장암 확진을 받았을 때다. “친구들과 모임에서 술 한 잔도 못한다면 너무 삭막할 것 같다‘고 의사에 말했었다. ”적당한 음주는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막걸리 한사발로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얼마 전 암학교 5년을 졸업하였다. 국가검진에서 흡연과 음주는 공공의 감시대상이다. 필자는 20년 전에 금연에 성공하였다. 그후로 담배를 한 개비도 피우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과거흡연을 문제로 지적한고 있다. 금연하고 몇 년을 지나야 하는가. 음주를 보자. 알콜 분해 능력에 따라 개인별 음주량 차이가 많다. 맥주 한모금도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상당량을 들이켜도 까딱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평가기준은 같다. 보험공단은 국민건강을 관리하면서 데이터도 많이 축적하였다. 건강지표를 나이에 따라 20ㆍ50ㆍ60대 등 세대별로 세분화하거나 소년ㆍ청년ㆍ장년으로 구분하여 설정할 필요가 있다. 자기 몸에 맞는 목표가 필요하다. 보험공단이 정한 획일적인 목표가 아닌 적어도 나이별 건강지표가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국민은 그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국민건강복지에 감사한다. 대한국민의 긍지를 갖는 대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건강지표 나이에 맞게 바꾸라’고 촉구하면 지나칠까.
- 2017-09-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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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인 박재동의 멈추지 않는 꿈 “꿈이 많아서 힘들어, 하지만 그래서 행복해요”
- “는 좋았어. 너무 신비스럽고 재밌으니까. 아홉 살 때 봤는데, 지금 봐도 재밌어. 김산호 작가는 나와는 띠동갑인데 대단한 분이야.” 진심에서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히어로 만화인 에 대한 거듭된 찬사.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추억에 대한 감탄을 전하는 ‘ 동호회 회장’이자 시사만화계의 전설인 박재동(朴在東·65) 화백의 모습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관통해온 천진함이 느껴졌다. 그 자신이 만화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만화를 많이 읽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만화가 얼마나 재밌어요? 만화에 안 빠지는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 박재동 화백은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부친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만화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원체 책을 좋아하셨죠. 원래는 서점이었는데 만화가 늘어나며 만화가게가 됐어요. 얼마나 행복하겠어. 집이 곧 보물섬이었으니 남들이야 뭐라건, 멋진 상상과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책들을 매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무지 행복했어요. 그 만화들에서 받은 영향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전 지금도 그때 열광케 했던 만화가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문화예술이 주는 가치를 이젠 만화가 채워주기 시작한 거죠.” 등록금이 싸서 서울대를 가다 그러나 그가 자랄 당시만 해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강했다. 사실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수십 번은 변한 지금도 만화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고운 편만은 아닐 정도니, 그 편견의 역사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만화를 못 보게 하는 어르신들이 많았지. 하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공부도 잘해요. 그 자체가 독서거든.” 만화가 곧 공부가 된다는 말은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학교면 어디든 좋았지. 그런데 서울대를 가야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등록금이 쌌거든.” 전교 1등과 전교 꼴찌를 넘나들다 서울대를 들어갔을 만큼, 그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등도 해본 적 있다. 그러나 그는 좀 독특한 전교 1등이었다. 전교 꼴찌(꼴등)를 해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내가 꼴찌하는 걸 보고 이해를 못했지. 별세계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꼴찌도 기술이야. 천운이 있어야 해.” 그는 심지어 전교 꼴찌를 ‘쟁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꼴찌가 된 적도 있었다. “나랑 꼴찌를 다투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봐달라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이젠 자기가 꼴찌가 아닐 수 있으니까. 우선 내 책걸상을 없앴어. 누구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지. 그렇게 숨겨놓으면 선생님이 볼 때 결석이 없단 말야. 그리고 그 꼴찌 친구가 ‘선생님, 답지 하나 모자릅니다’라고 하면 선생님이 그랬나 하며 답지 한 장을 더 줘. 그러면 그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와 똑같이 내 답안지를 쓴 후에,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도 일부러 틀리게 쓰는 거야. 그렇게 내가 꼴찌를 쟁취했었지(웃음).”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꼴찌를 차지한 ‘괴짜’ 박재동의 일면이다. “아버지는 내 성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몰랐어요. 우리 반에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인 애가 있었거든. 걔한테 통지표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걸 학교에 낸 거야. 그래서 내 성적 통지표가 아버지에게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런데 전교 꼴찌가 되니 학교에서 아버지를 호출했어.” 자신이 전교 472명 중 472등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지. 속으로 화를 삭이신다는 걸.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래 ‘꼴찌는 너무 했다,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게 됐어.” ‘진짜’ 꼴찌와의 만남 전교 꼴찌를 경험한 그에게는 나름의 ‘꼴찌 철학’이 있었다. 꼴찌인 아이들을 봐도 그는 자신 또한 꼴찌였기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꼴찌한 아이에게 ‘저 새끼, 왜 맨날 꼴찌해?’ 하는 마음이 없거든. 되려 친구처럼 친근한 생각이 들지. 그리고 전교 꼴찌였던 나는 그놈한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아이들에게는 꼴찌 아닌 사람이 말하면 먹히지 않는 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사실, 그는 ‘진짜배기 꼴찌’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서울민예총에 갔을 때 거기서 전국 꼴찌를 만난 거야. 난 전교 꼴찌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전국 꼴찌였지.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 사람이 좋아. 독특해. 나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 나는 꼴찌를 했지만 진정한 꼴찌는 아니야. 먹물이지. 그래서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사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아이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친구로 지내. 그게 훌륭한 거야. 진정한 전국 꼴찌야. 하지만 나는 수법을 써서 꼴찌가 됐으니 평범한 사람이지.” 고 김근태 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노동자들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출신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꼴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박재동의 고민도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과 동반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기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화두이기도 했다. 시사만화의 전설로 거듭나다 ‘시사만화는 박재동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는 그이지만, 막상 그는 만화가가 될 생각이 그리 없었다. “미대를 나와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민중미술가가 됐지. 그런데 민중미술은 메시지가 강해서, 저렇게 무섭게 하는 것보다는 만화가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만화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교사로서의 삶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하는데 너무 행복한 거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면 백 배로 돌아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극치감을 느꼈지.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려서 극치감을 느끼고 그림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사람인데, 교육으로 극치감을 느끼면 그림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림을 안 그려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불안한 거야. ‘어유, 큰일 나겠다’ 싶어 학교를 그만뒀어.” 그는 학교를 그만둔 후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죽도록’ 그리고 싶었다. “한겨레가 창간하면서 시사만화가를 모집했지. 후배가 해보라고 했고 응모를 했는데 된 거야. 그때만 해도 내가 만화가가 된 건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개념이었어. 그러다 보니 8년 동안 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이 일에 맞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덕분에 진짜로 그림을 죽도록 그리게 됐어(웃음).” 시사만화를 그만둔 그는 현재 다시 한 번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이상적인 교육이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교육은 뻑뻑한 게 있지. 선생이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아이들에게 뭔가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별로 못해. 그건 아이를 정말로 존중하는 게 아닌 거지. 새로운 시대의 교육은 아이들을 믿고 맡겨야 해. 좋은 교육을 하려면 선생들끼리만 모여서 토론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해야 한다고. 과거 교육은 어떠했고, 현실적으로 기업에서는 이런 것을 원하고, 4차 산업혁명은 이렇고, 입시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등등 이 모든 것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봐.” 그는 또한 아이들이 일찌감치 자신의 직업을 확정해 그것에 몰두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사를 할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장사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거야. 장사 외의 다른 과목들은 교양 삼아서 배우면 되잖아. 장사를 할 게 확실한데 영어가 필요하면 영어를 배우도록 하면 되는 거고. 의사가 되어야겠다면 의사 공부를 어릴 때부터 해야 해. 그리고 그걸로 돈 버는 경험도 해야 해.” 무언가에 푹 빠져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교육과 통일에 자신을 바치고 싶다 예순 중반을 넘었지만 교수 박재동이 아닌 인간 박재동은 여전히 미래를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개인적인 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섞인 것을 만들고 싶어. 그쪽에 나같이 ‘산만한 놈’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이라는 영화를 만든 배용균 감독 때문에 한때는 영화배우가 될 뻔도 했지(웃음).” 그는 일각에 있었던 교육감 제안에 대한 얘기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거 내 절대 안 하지. 그걸 하면 난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거니까. 그래서 ‘난 안 한다, 작품할 거다’라고 대답해줬어. 그런데 그쪽에서 ‘아니, 선생님.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이야말로 선생님의 작품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데 어휴 쒸…(웃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고사했지.” 박재동은 천생 자유인일 수밖에 없다. 장르에 대한 편견 없는 자유와 자신의 활동을 자신이 온전히 다루고자 하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로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기를 찾아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당당하게 살 수 있게끔 해주고 싶어. 그리고 남북관계가 잘돼서 막힌 혈이 확 뚫리면서 새로운 꽃이 피게끔 하는 것.” 당장은 특별한 일은 없지만 교육과 통일을 위해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그의 말은, 그의 육십 년 넘는 만화 사랑만큼이나 오랫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문화예술인으로서 묵묵히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회해서 드러내고 있듯이. “꿈이 많아서 힘들어, 하지만 그래서 행복해요.”
- 2017-09-0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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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또 다른 관찰 <더 테이블>
- 영화가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가 플랫폼(platform)이다. 요즘 이 단어가 IT 기업의 용어로 변질되어 그 낭만성이 많이 퇴색했지만, 본래는 기차역의 승강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기차역은 서로 무관한 사람들이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공간이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삶의 애환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스토리의 공간이기도 하다. 플랫폼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남편과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의 공간이고 군대 가는 연인을 배웅하는 여인의 애틋한 마음이 깃든 공간이다. 철없이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모정의 공간이기도 하고 죽은 남편이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눈 오는 플랫폼을 서성이는 애절한 공간이기도 하다. 조금 다르지만, 의 이별 장면은 최고의 플랫폼 장면으로 기억된다. 플랫폼은 무정하고 건조하게 늘 그 자리에 있기에 인간의 격정과 대비되며 그 낭만성을 극대화한다. 인간들의 모든 사연을 알고 있지만, 말없이 홀로 삭이며 든든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 때문에 줄곧 의인화되며 삶을 관조하는 상징이 된다. 인간들의 삶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표현할 때 플랫폼이 즐겨 활용되는 이유이다. 영화 은 바로 플랫폼 영화의 전형이다. 카페의 탁자는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사물에 불과하다. 감독은 이 가구를 플랫폼 삼아 스쳐 가는 인간들을 관찰한다. 오늘 이 테이블에는 총 8명의 등장인물이 네 번에 걸쳐 머물다 간다. 그들의 사연은 연결성이 없으며 극히 사소한 삶의 단면만 노출할 뿐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맥락 없는 이야기에 각기 색깔을 입혀 사랑에 관한 기승전결을 엮어낸다. 그날 오전 테이블이 보는 첫 번째 사랑 이야기는 정유미와 정원준이 펼쳐낸다. 이미 스타가 된 전 여친 앞에서 전 남친인 주인공은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의도와 말은 줄곧 불일치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 우리가 그랬듯이 말이다. 두 번째 사랑은 차분하며 관리할 줄 안다. 급격히 진전한 관계를 뒤로하고 불쑥 인도로 떠난 후 연락 없던 남자가 돌아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려 한다. 정은채와 전성우는 성숙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오후 테이블에 올려진 세 번째 이야기는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전환의 단계이다. 한예리와 김혜옥은 결혼 사기단의 짝이다. 그들은 새로 물색한 대상을 속일 계획을 짜면서 느닷없이 다가온 진짜 사랑에 당혹하면서도 메말랐던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큐피드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돈 많은 사기 결혼 상대가 아니라 돈 없는 직원에게 꽂혀버렸다. 그렇다! 사랑은 기획 상품이 아닌 것이다. 저녁나절 마지막 손님들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결론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결혼을 앞둔 임수정은 옛 남친인 연우진을 만난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으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남았나 보다. 여기서 임수정의 입을 통해 “왜 마음이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라는 우리가 아는 사랑과 결혼에 관한 가장 통속적인 대사와 마주친다. 영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테이블에 놓인 꽃을 클로즈업한다. 이 꽃은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마지막 손님인 연우진은 우리의 젊은 날 애인을 기다리며 성냥개비를 쌓듯 꽃잎을 다 뜯어버린다. 사랑의 죽음을 암시한다. 소설도 좋지만, 가끔은 부담 없이 읽는 에세이도 좋다. 솜씨 있는 독립영화로 이름난 김종관 감독이 써 내린 사랑에 관한 에세이 한 편을 읽은 느낌이다. 영화 속 홍차처럼 입맛이 개운하다.
- 2017-09-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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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살것인가
- 서부 50플러스센터에서 건축사 손웅익 강사의 특강에 관심이 있어서 가 봤다. 현재 살아가는 데는 불편이 없지만, 주거의 형태가 나이가 들면서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의 주거 형태가 궁금했던 것이다. 90분 동안 이어진 강의를 듣고 무엇이 중요한가를 배웠다, 현재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Aging in Place’라고 한다. 우선 동네 지리에 밝아 편하다. 내 집이므로 누가 간섭할 것도 없고 편하게 살면 된다. 그러나 건물도 수명이 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한 번 쯤은 또 이사를 가야 한다. 나이가 더 들어 신체 활동이 불편해지면 그때는 자기 집이라도 자기에 맞게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 마끌어지기 쉬운 욕탕 부근에는 손잡이라도 더 만들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혼자 살기 어렵다면 빈 방을 이용하여 젊은 세입자들을 받아 같이 생활하는 방법도 있다. 요즘 셋방 평균 가격이 월 50만 원 정도이므로 이보다 싼 가격으로 내놓으면 세입자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방은 별도로 쓰더라도 거실이나 취사시설, 세탁 시설 등은 여럿이 공유 공간을 갖는 방법도 있다. 이것도 물론 장단점이 있다. 혼자 야밤에 출출해서 라면이라도 간단히 끓여 먹고 싶은데 공유 공간에 여전히 여럿이 안 자고 있으면 혼자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심을 떠나 전원주택으로 가서 사는 것을 생각해 보는 사람도 많다. 요즘은 대중교통의 발달은 물론 서울 외곽순환도로 등 교통이 좋아져서 서울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도 많다. 펜션처럼 수익을 만들 수도 있다. 시니어 주거단지를 만들어 같이 들어가서 살 수도 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살면 재미도 있고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로 구성하기는 경제적 수준도 맞아야 하고 마음도 맞아야 하니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고려해볼 주거 형태가 시니어타운이다. 그러나 그동안 시니어타운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분양에서부터 사기도 많고 운영에서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이 노출되어 세심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어떤 주거 형태가 좋을지는 답이 없다. 의향이 있다고 해도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손웅익 강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관계’라고 정의했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주거형태에서는 부부간의 관계가 중요하고, 전원주택은 그에 더해서 현지인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했다. 공동 주택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므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동거는 스트레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관계를 원활히 하려면 자신의 성격도 누그려 뜨려야 하는데 나이 들어 성격을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람을 피해가는 방법이 낫다. 좋은 관계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 2017-08-3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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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수행중이다
-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인 필자를 화나게 하는 일 몇 가지가 있다. 아동 구타가 그중 하나다. 한참 일하던 소싯적에 피로 회복 겸 찜질방이나 스파를 즐겨 찾았다. 그날도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한 여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의 등짝을 때리는 모습에 발끈하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아줌마 아이도 아닌데 무슨 참견이세요?” 날선 반응에 질세라 “아이가 당신 소유물이냐? 여기가 당신 집이냐?” 하는 몇 마디 말로 그쳤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누구도 힘으로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맞아야 하는 의무는 더더욱 없다. 어린아이에게 겁박을 주는 어른은 비겁하다! 힘의 제압은 폭력이고 범법이다. 그만 멈추고 거울에 비친 네 표정을 보아라!’ 날릴 수 없는 수많은 거친 말을 속으로 누르며 끓어오르는 분을 삼켰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다. 질서나 조화가 힘의 논리에서 가능하다면 그곳은 동물의 세계다. 방금 금수의 세계에서 올라온 인간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문 예외다. 나쁜 뉴스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물론 영향력은 쌍방 통행으로 상호간 원인이 된다. 열악한 환경이 가해자를 만들고 거친 가해자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의 쳇바퀴에서 해법은 뭘까를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도에는 비폭력의 의미를 가진 아힘사(Ahimsa)’라는 단어가 있다. 산스크리스트어 ‘hims(때리다)’에서 유래했다. 힘사(himsa) 피해, 상해의 의미이고, 아힘사(a-himsa)는 피해 주지 않기, 비상해의 뜻이다. 폭력은 타인을 살해하거나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 언어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도 포함한다. 물리적 폭력은 당연하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행위, 언어, 사고 등 모든 면에서 상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힘사다. 이는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된다. 벌써 2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필자를 분노하게 만든 에피소드다. 당시 ‘5분 대기조’로 구성돤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5분 안에 학부모들이 모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모임으로 자주 선생님과 학부모들을 만났다. 그런데 어느 날 사물놀이 공연 준비 과정에서 생긴 왕따와 돈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당시 학부모 모두가 전업주부였고, 필자만 프리랜서로 일하는 엄마였다. 대북 연습과 공연을 위한 뒷바라지가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시간 여유가 많은 전업 맘들은 분초를 쪼개서 움직이는 필자와는 확연히 라이프 스타일이 달랐다. 필자는 사전 모임이나 뒤풀이 참석률도 저조했고 느긋한 티타임은 로망에 그쳤다. ‘워킹 맘의 아이는 어딘지 다르다!’ 일하는 엄마를 둔 우리 아이는 어느새 외돌토리가 되어 있었고 필자는 드센 여자가 되어버렸다. 선생님과의 관계도 투 트랙으로 움직였다. 왕따나 편가르기가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모은 감사금 모금도 의견 차가 컸다. 결국 당당하게 손편지 한 장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때는 김영란 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옳지 않음, 부적절함, 정의롭지 못함 등등. 이런 상황 앞에서 피하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정의의 맛을 보지 못한 미성숙함 때문일까? 고3 방학 자율학습에 대한 학교 측의 선결정 후동의에 대한 문의는 아이의 완패로 끝나버렸다. 까다로운 아이로 한 번 찍힌 낙인은 모든 교사의 눈총을 받게 했고 졸업 때까지 꼬리표가 되어 쫓아다녔다. 다행히 수련의 시간을 보내며 아이는 안으로 씩씩해졌다. 아픈 만큼 성장 한다는 말은 진리다. 소소한 건으로는 집 근처 L모 백화점의 주차비 분쟁이 있었다. 쇼핑 주차라 해도 1분 초과 시에는 1시간 비용을 요구한다. 10분 단위로 끊어서 50분에 해당되는 돈을 거슬러 달라 하니 규정상 그럴 수 없단다. 받기는 시간 단위로 받아도 초과분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완전 제멋대로다. 규정의 부당함을 제기하니 자기는 지시대로 할 뿐이란다. 나 역시 버티며 서 있자, 뒤차들이 완전 아우성이었다. 주변 운전자들의 항의에 밀려 무사 출차는 했지만 옳지 않은 것들에 지고 싶지 않았다. 버팀과 저항도 나름 자존이다. 분노는 이전까지의 모든 노력을 단숨에 공으로 만들어버리는 파워가 있다. 오죽하면 분노조절 지도사 자격증까지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어리석은 치기가 일을 크게 만든다. 반백을 넘긴 요즘은 화가 일어나면 잠시 눈을 감고 숨 고르기를 한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넓은 바다! 하지만 그 안의 크고 작은 출렁임을 안다. 내 안에서 시작한 분노는 내 안에서 끝내리라. 그리 되도록 애를 쓴다. 아직도 수행중이다.
- 2017-08-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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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늦은 안녕을 빈다
- '제주 올렛길 서명숙? 요즘은 언니가 대센가?' 서명숙의 버스 광고판을 보고 드는 생각이다. 누구나 채무 의식이 하나쯤은 있으리라. 저자 역시 미처 못 마친 나머지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실존 인물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친다. 성인이 된 이후의 시간이라 그 시절이 문자화하는 것이 도리어 낯설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이지만 필자에겐 아직도 생생한 시간이다. 주인공 천영초 이하 등장인물 모두를 실명으로 적는다. 삶의 옹이를 뽀삽 없이 풀어간다. 눈 가까이에서 대형 슬라이드를 보는 듯 훅~ 빠져들어 단숨에 읽어낸다. 권정생의 ‘몽실언니’와 비운의 공녀 ‘덕혜옹주’가 겹치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누구에게나 시대가 주는 과제가 있다. 두렵든 어리석든 최소한 기억은 해야 한다. 행동까지는 못 가고 비록 머리와 가슴에서 머물지라도. 어느 날 잊었던 묵은 숙제를 꺼내보며 철 지난 자기검열을 한다. ‘누군가에게 언니였던 적이 있었는지? 그때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무엇을 원하고 애썼는지?’ 흑백 무성영화 속 초점 없는 종이인형이 떠오른다. 생각과 시간이 각을 맟추지 못하면 내내 맘이 불편하다. 마음은 하늘에 있고, 발아래의 나날이 여의치 않을 때 삶이 리얼해진다. 안팎이 불안한 20대를 같이 보낸 동시대인으로 미안함이 밀려온다. 때늦은 자기검열을 하니 불완전 연소된 것들이 함께 떠오른다. 방황했던 진로 고민, 미성숙한 그와의 관계, 자신에 대한 불만과 회의 등. 삶이 무거운 데는 이유가 있다. 간간한 자반을 먹은 듯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 물이 당긴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내 마음은 아직도 제3자다. 링 밖 관람자로 있으려 하는 마음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상처나 실패보다 더 힘든 것은 망설임이다. 허둥대며 흘려보낸 시간이 가장 무거웠음을 이제는 안다. 남은 생을 이끌 용기를 스스로에게 갈구해본다.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온몸으로 겪어서 얻은 지혜도 있으리라. 문득 100세 시대가 고맙다. 수많은 영초언니와 이름 모를 언니와 오빠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는 때늦은 인사를 보낸다. 이제는 모두 평안하시라~
- 2017-08-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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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밭길에서, 다시 꽃길에 서다
- 여기에 잘 웃는 부부가 있다. 남편의 인상은 얼핏 과묵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빙그레 슬며시 웃는 얼굴이다. 아내의 얼굴은 통째로 웃음 그릇이다. 웃음도 보시(布施)라지? 부부가 앉는 자리마다 환하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귀농을 통해 얼굴에 정착한 경관이라는 게 아닌가. 엎치락뒤치락, 파란과 요행이 교차하는 게 인생이라는 미스터리 극이다. 조물주는 낮잠을 주무시다 깨어 심심하면 인간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 이랬다저랬다, 줬다 뺐었다, 횡포가 심하다. 그러나 인간은 뜻밖에도 견고한 작품이다. 벼락을 일곱 번이나 맞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지 않은가. 지금 내 앞에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곽성진(75)·이옥희(71)씨 부부 역시 일종의 날벼락을 맞은 바 있다. 그러나 끄떡없다. 쌩쌩하다. 도시라는 정글을 벗어나 참신한 시골생활을 누리고 있다. 산봉우리들이 덩실덩실 강강술래를 하는 소백산 자락, 옴팡진 산촌에 산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곽씨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결혼을 했으며, 사업으로 오랫동안 승승장구했다. 선박부품업체를 경영했었다.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사장이었다. 그러나 인간사가 흔히 그렇듯, 그가 구가했던 꽃길은 어느 사이 가시밭길로 바뀌었다. 졸지에 파산하면서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이었다지. 곽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완전한 추락이었어요. 그렇다고 주저앉아 굶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리어카를 장만해 포장마차를 차렸어요. 부끄럽습디다. 아내가 용기를 주더군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고…. 아내는 안주를 만들고 저는 손님들 시중을 들었어요. 다행히 장사가 잘됐어요. 잘나가던 시절에 일식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가락을 살려 일식집 스타일의 안주와 술을 내놓았는데, 그게 적중했어요. 단기간 내에 소문이 좋게 났죠.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그 자금으로 통닭가게를 인수해 운영했고, 그 역시 매우 번창했어요. 이후 아내는 일식집을 개업했고, 저는 건축업에 나섰어요. 그런데 이 건축업에서 다시 철저하게 무너졌어요. 두 번째 도산을 경험했던 겁니다.” 온탕과 냉탕을 거듭 넘나들었구나. 그 와중에 세월이라는 도적은 곽씨에게서 젊음을 앗아갔다. 쓸쓸하고 스산한 황혼의 동구에서, 그는 황급히 다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초원을 뒤덮은 풀처럼 수북한 걱정과 불안이 주야간에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이때 그의 등을 툭툭 치며, 임이시여, 걱정 마소서, 까짓것 다시 시작하면 그만 아니겠소, 라는 투로 당차게 재기를 독려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 이옥희씨였다. 시골로 가자고, 농사를 짓자고, 소박한 낙원을 일구자고, 아내는 그리 주동했다. 곽씨는 선선히 응했다. 강인한 기질과 낙천적 근성을 겸비한 아내의 민첩한 상황 판단력을 믿어서였다. 부부는 즉시 귀농을 결행했다. 그게 10여 년 전의 일. 결과는 성공적. 비결은 근면 혹은 부부애. 옛일을 회고하는 곽씨의 언사는 수굿해 온순한 성정이 묻어난다. 군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强小農) “여기 예천군 은풍면 산촌은 원래 아내의 고향입니다. 아내에겐 유난한 향수가 있었어요. 늘그막엔 고향에 돌아가 살자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사업 파산이 결국 아내의 숙원을 이루게 한 셈이니 사람의 일이라는 게 참 묘하죠. 물론 부담이 없지는 않았어요.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가, 게다가 모든 걸 잃은 빈손으로, 과연 시골 정착이 가능할지 불안했어요.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거처를 마련하는 일, 농지를 구하는 일, 뭐 하나 만만한 게 없었겠죠?” “아내의 친지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자립이 가능했어요. 특히 처남이 집과 배 과수원을 빌려주고 농사를 도와줘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었죠.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사기술을 부지런히 배우기도 했고. 주 작목은 배였어요. 생과 상태로 출하하기도 했지만, 배즙 가공이 그보다 세 배쯤 소득이 높다는 걸 알고 배즙 생산에 집중했죠. 요즘은 칡즙, 양파즙, 가시오가피즙, 헛개나무즙도 생산합니다.” “판로 확보는 어떤 방식으로 했죠?”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의 책에서 힌트를 얻은 게 주효했습니다. 그는 한 개인이 평균 250명 정도와 인맥을 형성한다고 봤습디다. 여기서 그의 성공철학인 1대 250 법칙이 만들어집니다. 한 사람에게 호감을 얻는 것은 그와 연결된 250명에게 호감을 사는 것과 같다는 논리죠. 공감이 됐어요. 그래서 제 주변의 친척,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의 유대 형성에 공을 들였어요. 그게 판매망이 되었어요. 현재 제 핸드폰엔 2300명쯤의 고객명단이 입력돼 있습니다.” 곽씨는 이른바 6차 농업을 구현하고 있다. 1차 농업은 생산을, 2차는 가공을, 3차는 체험이나 관광 농업을 말한다. 이 셋을 통합한 게 6차 농업이다. 그의 농장 ‘소백산 웰빙농원’은 예천 군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소농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이는 거저 얻어진 성취가 아니다. 지진을 겪은 사람은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지진이 우리의 발밑을 서성거리는 걸 안다. 심혈을 기울이고서야 재앙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곽씨 내외는 온몸을 써 농사에 매달렸다. 내외가 농장에 쏟은 비지땀이 몇 드럼에 달할지는 뒷산 신령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다. 땀뿐이랴. 부단한 열정, 상황을 물고 늘어지는 집요한 정신, 패잔병처럼 여기는 눈총을 감수하는 뱃심까지 가세했을 테지. 예순이 넘은 빈털터리 늦깎이로 농사에 입문, 마침내 기세를 돋운다는 건 아마도 거의 이변이다. 곽씨는 은연중에, 노년의 귀농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소득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농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비유하자면, 작은 옹달샘 하나를 팠는데 거기에서 사시사철 샘물이 찰랑거린다 할까? 이 옹달샘은 계속 퍼 써도 마르질 않아요. 계속 샘물이 솟구치니까.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어요. 큰 분의 뜻이리라. 제가 천주교인입니다.” “머리 좋고, 의식 있고, 신념 강한 젊은 사람들조차 고전하는 게 귀농생활이라고들 해요. 정착 과정에서 가장 힘든 건 어떤 점이었나요?” “초기엔 괜히 왔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어요. 농사에 문외한이었다는 것, 그게 가장 난처했어요.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러나 일단은 생계 문제가 워낙 다급해서 잡념을 거두고 일에만 몰두했죠. 실로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만만한 게 하나 없었지만 다 헤쳐 나왔어요. 사실,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겁날 건 없었어요. 왜냐면, 형편이 더 나빠질 수는 없었으니까(웃음).” 자연과 교제하며 산촌을 노니는 부부 사람의 난제는 대체로 시간이 해결해준다. 슬픔도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된다. 그러나 생계의 문제는 질이 다르다. 굴러떨어진 밑바닥 자체를 디딤돌로 삼아 기어이 뛰어올라야만 한다. 귀농은 그에게 비상 발령이었으며, 결과는 승전이었다. 도시에 버텨 재기를 꾀하기란 어려웠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에게 도시와 시골의 장단점을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온갖 상품 시장과 문화가 구비된 도시의 편리성에 비하자면 시골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죠. 가령,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선 수십 리 먼 길을 달려 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시골에선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명백한 장점이 있죠. 반면에 도시는 주로 인간끼리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고 말이죠. 경쟁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골에 비해, 물적 조건이 중시되는 도시에선 정서적 안정을 취하기 어렵다는 점이 중대한 단점이라 봐요. 경제상의 기회가 많다는 건 도시의 최대 장점이겠고.” “시골의 자연이 좋다지만,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적막 속에 사는 일은 때로 고역이지 않을까요?” “단골 고객이라든가 도시의 지인들이 스스로 찾아와 식사와 대화를 즐기고 돌아갑니다. 그리운 벗들을 불러들여 회포를 푸는 일도 낙이에요. 고즈넉한 산촌에 살지만, 나름의 사교가 적절히 이뤄지는 것이죠. 갑갑증을 느끼진 못하고 살아요.”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에 잡음은 없었나요?” “이곳이 아내의 고향이라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에 용이했어요. 아내가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죠. 농토에 질긴 애착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원주민들에겐 특유의 자기 기준이라는 게 있습니다. 존중해야 할 대목이라 봐요. 과거의 시골 정서라는 게 붕괴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죠. 그러나 음식을 이웃과 나누길 즐기는 풍습은 여전합니다. 몸에 밴 나눔의 문화랄까. 이런 면은 꾸준히 지속되고 전승되면 좋겠어요. 그런데 남모를 고독을 느끼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호남 태생인 제가 영남에서 산 세월이 55년인데 아직도 호남사람이라며 은근히 무시한다는 거! 선거철엔 아예 입을 봉하고 살아요. 무시무시한 분위기라서(웃음).” 산등성이를 올라 사과 농장으로 들어선다. 사나운 8월의 폭염이 사과나무 잎사귀에 쏟아진다. 나무 아래론 푸른 그늘이 짙어 땀을 씻을 만하다. 재기를 목표로 삼아 귀농, 어언 70대 복판에 접어든 부부는 여전히 일벌레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 하면 무슨 재미? 여흥과 일락(逸樂)이 없다면 반쯤은 허사다. 부부는 자연과 교제하는 일로 산촌을 노닌다. 아침 햇살에 새벽안개가 어떻게 해산하는지를, 밤이면 별들이 모여 무슨 잔치를 벌이는지를 유심히 관람하겠지. 감관이 열리고, 촉수가 파랗게 서겠지. 그것으로 어쩌면 범람처럼 덮쳐오는 노년기의 우수를 능히 해치울 수도 있으렷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럭바위, 사계 내내 짙푸른 솔숲에 번번이 눈이 가고 마음이 움직여요. 나 같은 노년에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귀농으로 얻은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에요. 그럼에도 이즈음엔 다 부질없다는 허무감이 듭니다. 애초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는 만족감 뒤에 찾아오는 허탈과 허무. 무엇으로 그걸 극복할지, 요즘 자주 생각에 사로잡혀요. 제가 말이죠, 사후 묘비명을 정해두기도 했어요. ‘여기 아내를 몹시 사랑하다가 떠난 사람이 묻혀 있다.’ 이게 제법 근사해 보였어요. 그러나 그마저 부질없다 느껴지는, 이 허무감의 정체는 무엇일꼬.” 인생의 황혼에 귀농이라는 새벽길을 훤하게 열어젖힌 사람의 눈가에 그늘이 서린다. 허무의 심연을 무슨 수로 건너나. 그는 화두 하나를 집어든 셈이다. 파란하늘에 뜬 흰구름 몇 조각, 당싯당싯 산을 넘는다.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8-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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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름답고 강한 여인 강주은
- 영화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하얀 깃털이 인도하는 대로 평생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강주은도 최민수라는 깃털에 이끌려 전혀 예기치 못한 라이프가 되어버렸다. 처음 만난 강주은은 생각보다 날씬하고 예뻤다. TV에서의 모습은 미스코리아 출신에 상남자 최민수를 주눅 들게 하는 아줌마의 이미지도 있고 해서 크고 강해 보였는데 막상 마주한 그녀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강주은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집에서 나설 때 내 아내가 꽃단장을 하고 따라나섰다. 평소 TV를 보면서 강주은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아내가 나만 보낼 리 없었다. 강주은을 실제로 본 내 아내도 “생각보다 굉장히 말랐네! 내가 만약 TV에 나온다면 뚱뚱이로 비치겠어!”라면서 강주은의 몸매와 우아한 자태에 찬사를 보냈다. 참고로 강주은과 1970년 개띠 동갑인 내 아내도 아직 훌륭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지만 강주은이 자기보다 통통하리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실 강주은과 내 아내의 이미지는 상당히 닮았다. 아내와 인사를 나눈 강주은도 “이봉규씨 와이프와 내가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다”고 특유의 과도한 제스처를 했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MBN 프로그램 를 녹화하는 스튜디오에서 방송 전에 이루어졌는데 마침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함익병과 홍혜걸이 녹화를 위해 대기실에 있다가 내가 강주은과 인터뷰하는 것을 알고 쳐들어왔다. 그들 부부와 한 달에 한 번씩 댄스파티를 하고 있어서 강주은-최민수 부부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초대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동안 여러 번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갔지만 어색했다고 털어놓는다. 한국 문화에 어색했던 본인 탓도 있지만 독특한 성격의 연예인 남편과 부부 동반 파티는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부부에 관한 틈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파고들었다. 결혼생활에 대한 평점을 매겨달라고 졸랐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레이드(평점)를 매길 수가 없다는 것. 불편한 결혼생활 덕분에 성장했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것이 상당한 영광이다. 남편을 통해서 내가 성장했다.” 즉 지금 방송을 하는 것, 한국말을 잘하게 된 것, 공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등 모두 최민수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불편한 결혼생활 덕분에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고 최민수가 남편이 아니면 오늘의 강주은의 성공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거라는 자기 진단이다. 터프하기로 소문난 최민수씨에게 얻어맞을 각오로 평가한다면? 마치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로 소문났기에 남편이 대철학자가 되었다는 해석이 떠올랐다. 부부 관계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뭔가 있다. 한량 이봉규는 최민수에 대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강주은의 눈과 심장으로 보면 최민수는 100점을 넘어서서 평점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최민수도 부인의 은공을 높이 평가한다. 언젠가 철학적인 고백을 강주은에게 했다고 한다. “23년을 살고 난 오늘의 최민수가 23년 전으로 돌아가 주은이를 만났어야 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강주은은 “만약 그랬다면 오늘의 주은이는 아닐 것, 평범한 아내가 되었을 거다.” 철학적으로 치고받는 이 부부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삼라만상에는 항상 이면이 있기에 반전을 노리면서 파고들었다. “이혼 생각을 해본 적 있나?” “Of course!”라는 강주은의 대답이 1초도 안 쉬고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한술 더 뜬다. “결혼식장에서부터 이 결혼이 맞나? 잠깐만요! 다시 생각해봅시다!”라고 설득하면서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었다는 것. 심지어 결혼 후 한동안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지니고 다닐 정도로 매일매일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충격 고백을 쏟아 놓는다. 우리 부부의 사랑은 ‘다른 차원의 사랑’ 한 방송에서 “최민수가 이상형이었냐?”는 질문에 “지금은 너무 감사하게 제 이상형의 이상, 그 이상이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했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있나? 싶었다. 상상 못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해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반전도 이 정도면 국가대표급이다. 그녀의 순수한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만큼 사랑하지 않는 부부가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오히려 축하해주고 싶다고 덧붙인다. 이 같은 철학은 부부가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지라고 평소 주장해서 ‘이혼 예찬론자’ 소리를 듣는 한량 이봉규와 맥을 같이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사는 부부는 위선이다. 심지어 다른 파트너와 성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부부 사이는 억지로 형식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대단한 반칙이라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강주은은 지금도 최민수를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 애잔함도 있는 듯. 항상 버림받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남편에게서 늘 느끼고 있기에 그 마음이 더 끔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마 이 같은 감정은 동정심을 뛰어넘는 일종의 모성애 같은 것이라고 어렴풋이 판단된다. 그래도 끝까지 확인하고 싶어서 또 물고 늘어졌다. “앞으로도 이혼하지 않고 늙어갈까?”라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이제 이 남자를 너무 완벽하게 잘 알아서 어떤 환경에도 잘 살 것 같다. 남편을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다”고 마음을 모아 대답한다. 자신들의 사랑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나를 잡아줄 남자는 최민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남편을 잡아줄 여자도 강주은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We earned that!”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강주은의 큰 입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영화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하얀 깃털이 인도하는 대로 평생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강주은도 최민수라는 깃털에 이끌려 전혀 예기치 못한 라이프가 되어버렸다는 것. 남편 따라 가다 보니 대통령도 만났고 평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인생이 펼쳐졌는데, 앞으로도 포레스트 검프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배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이 영화에서 바보처럼 보이는 톰 행크스의 아름답고 순수한 여정과 강주은의 인생이 너무 닮아 보인다. 그만큼 강주은은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한량의 어른스런 눈빛에 순수한 영혼이 들키기 싫었는지 터프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너무 순수하게만 보이면 왠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춘기 때 가출한 적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량 이봉규가 듣기에 강주은의 가출사건은 가소로웠다. 사연인즉, 가출하고 몇 시간 차를 몰고 가다가 문득 어떤 시 구절이 떠올랐다는 것. “Water water everywhere but not a drop to drink(물은 어디에나 있건만 내가 마실 물은 한 모금도 없구나).” 갑자기 그 시의 구절이 떠오르자 불문학을 전공한 어머니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공중전화로 그 시를 낭송하면서 펑펑 울었다는 것. 오히려 어머니가 담담하게 웃으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와라!” 하고 다독였다고 한다. “너는 이마가 제일 예쁜데 왜 가리니?” 고등학교 때 두 번이나 가출을 감행하는 등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이봉규에게 강주은의 가출담은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만큼 천진난만한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에서 그동안 많은 여자 스타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들의 남편들 중에서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인물을 몇 명 봐왔지만, 최민수처럼 처복이 많은 남자도 드물 것이다. 관상학적으로 보면 강주은도 복이 많아 보인다. 그녀의 훤하고 톡 튀어나온 이마와 높은 턱의 선은 일품이다. 때문에 결혼 전 별명이 ‘걸어 다니는 이마’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전 자신의 이마가 못마땅해서 가리고 다니기 일쑤였단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너는 이마가 제일 예쁜데 왜 가리니?”라고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런데 최민수도 연애 시절 부모님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는 것. 그때 처음 이 남자가 부모와 똑같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꼈고, 그게 결정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고 털어놓았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참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그녀가 요즘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끌고 있는 비결도 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화면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살에 느꼈던 것을 여전히 그대로 느끼고 싶다”는 강주은의 삶은 성공했다. 그녀가 스타라서가 아니라 본인이 꿈꾸던 대로 여섯 살 어린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한 책 를 읽으면 그녀의 순수함의 원천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 2017-08-2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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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분노
- 어느덧 이순(耳順)의 나이를 지났다. 공자는 육십의 나이를 이순이라 불렀다.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인생을 그 나이만큼 살면 어떤 상황이든 대부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리라. 그런데 이순의 나이에도 아직도 화를 내는 일이 있으니 문제다. 물론 예전보다는 화를 적게 낸다. 지나고 보면 화를 낼 일이 아닌데 화를 내서 후회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다 보니 다시 한 번 상황을 검토하는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과 공공적 차원의 분노를 구분해본다. 개인적 차원의 분노는 주로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관계를 할 때 상대가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거나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거나 약속을 위반하면 화가 난다.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수준보다 형편없게 일을 처리하거나 노력한 만큼 일의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다. 그러나 노력하면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화는 대부분 피할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그러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100%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생각해보면 화를 줄일 수 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모두들 이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아웅다웅하며 살다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후회를 한다. 이 세상에 여행 온 나그네처럼 좋은 추억만 남기고 가고 싶다. 그렇다고 화를 안 내고 살 수는 없다. 또 마땅히 내야 할 분노도 있다. 공익적 차원에서 내는 분노는 거룩하다. 필자가 애송하는 시 중에 변영로의 시 ‘논개’가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로 시작되는 시다. 시인은 우리나라를 짓밟은 왜에 대한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 표현했다. 거룩한 분노는 의분이고 공분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는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인간을 노예로 팔거나 인간성을 파괴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볼 때는 참기 힘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익을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화가 난다. 건강하고 거룩한 분노다. 개인적 차원의 분노는 수양과 수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적 차원의 분노는 건강한 사회가 형성되어야 없어질 수 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거룩한 분노는 더욱더 필요하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분노는 줄이되 거룩한 분노는 잃지 말고 살자.
- 2017-08-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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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감이 틀린,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예술과 시장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아니 정확하게 문학작품과 상업영화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작자인 줄리언 반스가 ‘영화는 소설로부터 멀리 갈수록 좋다’고 말했다는데 이건 원작과 달라진 영화에 대한 찬사일까? 아니면 영화가 책과 다르니 소설을 읽으라는 야유일까? 아무튼, 각기 다른 장르이니 무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다. 런던에서 빈티지 카메라 점포를 운영하며 노년을 지내고 있는 토니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내용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첫사랑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의 죽음과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유산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유산 담당자를 통해 그 유산이 고교 친구인 아드리안의 일기장인 것을 확인했지만, 베로니카가 주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베로니카를 찾아 나선다. 이 사건을 계기로 토니는 젊은 날의 기억을 다시 소환한다. 영화는 토니의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가면서 기억을 재현한다. 그러니까 베로니카를 찾아가는 과정은 곧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우리가 얼마나 기억을 윤색하고 편집하는지,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토니는 가까운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모든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하여 기억하고 있다. 집요하게 베로니카를 찾아낸 토니는 그녀가 냉소와 함께 건네준 과거 자신이 보냈던 편지를 읽고 충격에 빠진다. 그 편지는 첫사랑이었던 베로니카와 존경하던 친구 아드리안을 동시에 불행에 빠트린 악의에 가득 찬 저주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그의 기억은 혼선을 일으킨다. 베로니카가 자신을 버리고 아드리안과 사랑에 빠진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친구의 배신으로 알고 있다든지,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엄마인 사라에 대한 기억의 왜곡 등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로니카가 손잡고 정신지체아 모임에 데리고 다니는 또 다른 아드리안을 보는 순간 당연히 베로니카의 아들로 생각했던 그가 사실은 동생임을 알았을 때 기억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작가와 감독의 행보는 이즈음에서부터 갈라진다. 작가는 구제불능의 토니를 통해 기억을 윤색하는 인간의 본질과 역사의 허구를 이야기하는데, 영화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로 이끌며 멜로드라마로 전환한다. 원작에 없는 딸의 출산과 새 생명의 탄생을 계기로 이루는 가족 간의 화해는 우리 드라마에서도 익히 보아온 너무도 식상한 줄거리가 아닌가. 언뜻언뜻 등장하는 아드리안의 지성과 비범성은 너무 생략되어 지적인 재미를 반감시킨다. “역사는 승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동시에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평범한 사람들의 회고이기도 하다.” 같은 대사는 맥락을 잃고 방황한다. 아드리안 2세가 베로니카의 동생이라면 아드리안과 엄마의 관계가 아리송한데 모든 것을 관객의 상상에 맡겨버린다. 또 드라마적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다. 다만 출연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는 놀라웠다. 늙은 토니 역의 짐 브로드벤트와 늙은 베로니카 역의 샬롯 램프링은 기억에 남는다. 전체를 관통하는 카메라와 사진의 이미지는 기억과 왜곡을 이야기하는 소도구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우리가 팩트로 믿고 있는 사진도 알고 보면 찍은 이의 시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 2017-08-18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