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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유영미 아나운서, 뉴스 Queen 내려놓고 시니어와 동백꽃처럼 피다
- “앵커, 명예 졸업합니다. 고맙습니다.” 8년 전 마지막 뉴스를 전하던 날, 유영미(柳英美·57) 아나운서의 마무리 멘트에는 후련함, 시원함 그리고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 나이 오십. 여성 앵커로서 최장기,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뉴스 인생을 마감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로 SBS 여성 앵커의 표본이던 유영미 아나운서. 한동안 안 보이나 싶더니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TV 시청자 눈을 떠나 라디오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었단다. 그것도 빨간 오픈카(?) 타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외치면서 말이다. 시니어와 소통한 보람을 인정받다 “놀랐어요. 내가 벌써 공로상을 받을 나이가 됐나 하고요. 저희 프로그램은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고자 1991년 SBS가 창사하면서 시작한 최장수 프로그램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벽 청취자들을 위한 방송이었죠. 다른 선배님께서 3년 정도 하시다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했는데 이런 큰 상도 받네요.”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서 유영미 SBS 아나운서의 이름이 불렸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5년간 진행해온 공로였다.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DJ는 물론 2010년부터 PD도 겸하고 있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5년에는 한국방송대상에서 사회공익 라디오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SBS 간판 아나운서로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30대 초반에 만난 ‘마음은 언제나 청춘’. “유영미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라디오와 잘 어울린다”는 담당 PD의 사탕발림(?)에 못 이기는 척 승낙한 방송이 인생 역작이 됐다.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선배 세대를 생각하면서 방송했어요. 청취자와 서서히 녹아들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새 시니어 대열에 합류했네요. 그동안 잘 걸어왔어요.” 매일 새벽 5시. 그 누구도 듣지 않을 것 같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멀리서 묵묵히 라디오를 켜는 시니어의 관심과 사랑을 깊이 감지한다. 진행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2000년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노인학을 공부했다. 2010년에는 시니어 프로그램 DJ 경험담을 엮어 ‘두 번째 청춘’도 발간했다. SBS로 채널을 돌리면 ‘또 유영미’ 소리가 나오던 때에 말이다. 금기를 깨고 얻은 타이틀 ‘최초’ 유영미 아나운서는 시청자로서 봐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파스텔 톤 정장에 정돈된 머리 스타일의 그녀가 밝은 갈색 머리에 꽃무늬 로브룩으로 나타났다. 예능의 끼가 느껴진다 말하니 투정 섞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재미난 것을 왜 안 했는지 몰라. 늙기 전에 진작할걸. 옛날에는 뉴스 앵커 이미지 때문에 예능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좀 자유롭게 저를 표출하고 싶어요.” 1986년 울산MBC에서 방송생활을 시작해 SBS 공채 1기로 들어와 현재까지 활동하는 최고령 여성 아나운서. ‘여성 아나운서로서 최초’ 타이틀은 왜 이리도 많은지, 33년 여성 방송인으로서의 삶은 마치 ‘가시밭길 몸소 닦아 새길 만드신 신여성 일대기’와도 같았다. “여성 아나운서는 일을 오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살짝 그런 시절을 비껴갔는데 결혼한 여자가 회사에 있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런데 저는 결혼과 함께 SBS에 입사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와중에 SBS 공채 1기 채용 공고가 났다. 결혼을 미룰 수도, 응시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채용 공고가 언제 또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당시 저희 팀장님이 ‘SBS를 오래도록 빛내고 기여할 아나운서인데 결혼이 뭐가 그리 문제냐’며 윗선의 날선 시선을 잠재워주셨어요. 덕분에 결혼과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동기들보다 두 주 늦게 출근했습니다. 임신 9개월까지 뉴스 앵커석에도 앉아 있었고요. 두 달 출산휴가 마치고 앵커석으로 돌아온 여자 아나운서는 제가 최초였어요.” 여자 아나운서가 출산을 하고 다시 뉴스를 맡은 전례가 당시에는 없었다. 내가 잘해야 후배들이 이 길을 따라올 거라 믿었다. “임신했을 때 뉴스 하지 말라고 했으면 여성운동했을 거예요. 빡빡한 세상이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능력 있고 일 잘하는데 결혼하고 애기 낳는 게 무슨 상관이냐, 뉴스 앵커가 뉴스만 잘하면 되지’ 하면서 응원해줬어요. 선배의 역할은 좋은 선례를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공채 1기이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 선배가 없어요. 그래서 뭘 해도 늘 최초가 된 거죠.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을 그때는 싸워서 얻어야 했어요.” 건물 내 흡연이 만연하던 1990년대 말에는 뜻있는 여성 사우들과 함께 ‘꽃을 든 금연 운동’도 전개했다. 사무실에서 금연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박수도 쳐주는 운동이었다. 요즘 건물 밖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피겨 중계, 웃고 울다 남은 생채기 유영미 아나운서를 만나니 스포츠 중계 관련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녀 이름은 뉴스 앵커와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PD 겸 DJ로 회자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 중계를 한 여성 아나운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피겨스케이팅,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을 중계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가 세계 주니어 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피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던 때였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준비하지 않은 타 방송사에 SBS 유영미 아나운서의 중계가 송출됐다. 이후 SBS는 국제빙상연맹(ISU) 독점 중계권에 이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중계도 독점하면서 동계스포츠 중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유영미 아나운서 또한 2000년부터 피겨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변이 없는 한 김연아 선수의 ‘007 본드걸’ 중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이변은 일어났고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중계석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녀는 방송 인생에서 가장 아픈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녹화 중계였는데 제가 ‘한 선수가 성장하기 위해서 많은 지도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중에 김연아 선수를 위해했던 코치가 지나갔답니다. 그 사람을 지칭해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SBS 스포츠 인터넷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어요.” 중계를 녹화할 당시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 있었지만 원망의 대상은 유영미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제가 마이크를 던졌어요. 조직을 위한 결단이었죠. 그저 침묵이 약이었습니다.” 한참 후 담당 팀장이 스포츠 중계를 권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로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매화랑 동백꽃을 좋아하는데 꽃이 질 때 뚝 하고 떨어져 내려요. 그땐 나 스스로를 부러뜨려야 했어요. 그저 회사만 생각했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안티팬 글을 보고 나면 방송 절대 못해요. 그래도 동계올림픽 최초 여성 캐스터라는 타이틀은 되게 좋았어요. 그런 일들이 있었네요. 아나운서 33년 동안 일이 많았네.(웃음)” 힘들 때 달려와 안긴 곳은 라디오 그러고 나서 힘든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 시니어 청취자를 만날 수 있는 라디오 부스 안이었다. 스포츠 중계석에서 떨어진 동백꽃은 라디오로 되돌아와 다시 예쁘게 자라났다. 마음속 얘기도 꺼낼 수 있고 제작까지 하니 한결 자유로웠다. “힐링도 하고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청취자들이랑 늙는 얘기 진짜 많이 해요. 오십견 온 얘기도 하고,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한쪽 손으로 방송한 얘기도 하고요. 남들은 25년 한결같이 어떻게 했냐고 하지만 저는 매일매일이 새로웠어요. 제 방송을 듣는 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공유하고요.”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 참 간단했다. SBS 최초로 정년퇴임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성적표일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 싶단다. “유영미였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는 그녀의 마무리 멘트다. 맞다! 방송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2019-02-0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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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소자에게 새로운 삶을 이어주는 브릿지 역할
- 법무부 2017년 통계자료를 보면 일반 교도소에서 출소한 6만 2624명 중 3년 이내에 24.7%가 재복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법무부 교정본부 통계에 따르면 출소 후 창업, 취업에 성공한 출소자 1670명의 재범률은 일반 출소자와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는 대부분 출소자들이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생계 문제를 꼽는 만큼 출소자의 취업이 재범을 방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일반 비영리법인 사회적기업에서 출소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일반기업으로는 최초로 법무부 인가를 받은 한울배터리 사회적협동조합 이명원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출소자들에게 취업은 사회와 출소자를 잇는 가장 효과적인 가교(架橋) 역할이 되고 있다. 이 업체는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취약계층 채용에 중점을 두고 사회 공익을 실천하는 비영리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이며 예비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이명원 대표는 “전문기술 습득을 위한 직업훈련이 출소자 취업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재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배터리를 판매하거나 출장 교체 서비스 및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을 고용해 기술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며 “갱생보호대상자 및 사회 취약계층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정본부의 구인·구직 만남의 행사에 참여하고, 직업 훈련을 통한 창업을 지원하고, 매출 수익금을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사회 진출과 복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명원 대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에 부도를 막기 위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빚을 갚지 못해 결국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 절실함에 절망을 딛고 교육을 통하여 기술을 습득하였고,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유통 분야 10여 년, 배터리 분야 9년 등 20여 년에 걸친 사업 경험을 토대로 서울시에서 3000만 원을 지원받고 무담보대출은행에서 1000만 원을 빌려 그 당시 받은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업자 20여 명을 모아 힘을 합쳤다. 이로 인해 배터리업체를 열어 전국 30여 곳에 지점을 내면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명원 대표는 “나 자신이 전과자였기에 재소자 내면에 엄습하는 현실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재소자들의 성공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재범률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갱생보호대상자들은 출소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시 방황하며 결국 재범을 하게 되는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고, 당장 먹고살 걱정 때문에, 사회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수감생활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재소자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자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으로 재범을 줄여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취약계층과 출소자들의 주요사업 특징과 그중 배터리사업을 대표사업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출소자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창출, 창업지원, 기술교육 등은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것이 중요하기에 그 일환으로 자동차정비 기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운영 리스크가 적고, 기술습득이 용이한 차량 및 배터리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주요 사업 분야는 차량용 배터리, 산업용 배터리, 정류기반 배터리, UPS 배터리 설치 및 유지보수로, 조합원 모두가 다년간의 차량 및 배터리 분야의 사업 노하우를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차량에 관한 모든 상담과 업무가 가능하다. 한울배터리 서울 본점을 비롯해 전국 30여 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조합원 모두 개인사업자를 갖고 있어 분류상 사업자 협동조합인 것이 특징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에 환원되고, 갱생보호대상자 및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 다각화와 고용 인원 증대에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배터리사업을 위주로 하는 시스템분야에서 2017년에 법무부 고용 실적 1위를 기록했다. 또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법무부, 교정본부,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연대하여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교정본부와 법무보호복지공단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많은 공공단체들이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법무부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를 최초로 받은 취지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인물대상(사회공헌부문)’ ‘2018 이노베이션 기업 &브랜드대상’ ‘2018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인물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명원 대표는 “회사 운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시 하는 것은 업무 시 직원들의 안전”이라며 “안전한 작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회적 적응 능력 배양과 더불어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나 개인적인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고민하고 들어주며 소통의 시간을 갖는 직장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향후 출소자들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올해부터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하여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정비소 개설, 여성 출소자를 위한 크리닝사업부 신설 등을 계획하고 있고, 조합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해 출소자들의 경제 자립 프로세스 마련을 위한 방안도 꾸준히 마련할 계획이다. 향후 갱생보호대상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일자리, 기업 외면의 본질적 문제점을 분석·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술교육을 병행·고용을 확대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에서 나아가 창업을 위한 단계적인 서비스를 펼쳐나간다는 방침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의 마음으로 ‘함께 나눔, 함께 행복, 함께 발전’을 위한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노력하는 이명원 대표는 “갱생보호대상자의 창업교육과 기술교육, 각 구치소 및 교도소 교정본부 산하기관의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에 지속적으로 적극 노력할 예정”이라 밝혔다.
- 2018-06-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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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가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
- 토요일 아침에 회원들과 테니스 시합을 하면서 운동은 물론 덕담과 웃음이 오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성회원들이 가벼운 먹을거리도 갖고 오니까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석이조 (一石二鳥)가 아니라 일석 오조 정도는 된다. 이런 날 아침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문자 한통이 날아들었다. 예전에 함께 운동하던 K씨가 자신의 아내가 이침에 사망했다는 비보다. K씨는 55년생이니 아직 60대 중반이 못되었고 그의 아내는 이제 겨우 60대 초반나이에 들어섰다. 부랴부랴 병원에 달려 가보니 K씨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반쯤 넋이 나가 멍하니 앉아 있다. 힘없이 아주 수동적으로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다. 돌아가신 분은 어젯밤에도 아들하고 밤 열두시까지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코피가 나는데 멈추지 않는다고 하여 119 구급차를 불러서 대형병원으로 기는 도중 절명했다고 한다. 이미 죽어서 병원에 왔기 때문에 최종 사인(死因)은 '불명'으로 기재되어있다고 한다.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있나! 남편이자 상주인 K씨도 더 이상 사망원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고 자꾸 물어본다는 것도 고문에 가까운 질문으로 보여 더 묻기가 어려웠다. 문상 간 우리 일행들이 모여서 과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리형식으로 추정해 보았다. K씨는 공기업에서 퇴직 후 작은 빌딩의 관리인으로 취업하여 대부분의 주야 시간을 빌딩에서 먹고 자고 지낸다. K씨의 아내는 착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 일에 매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다. 남편이 집에 없으니 아내는 식사를 부실하게 먹거나. 라면 등으로 대충 때우거나 건너뛰기도 하면서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들을 했다. 주위에 혼자 사는 여자들을 보면 남편이 있고 없고에 따라 여자의 식사수준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옆집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티격태격 부부 싸움도 했지만 늘 시장을 봐오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남편인 할아버지가 죽자 늘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고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간다. 보살펴줄 사람도 없고 간섭할 사람도 없으니 대충 먹고 대충 지내는 것 같다. 서로 보호해주기도 하고 눈치도 봐야하는 가족의 보이지 않는 힘이 대단하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기러기아빠들이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본다. 친구 P씨는 지방의 태양광 발전소에서 혼자 근무했다. 저녁에 라면에 소주 몇 잔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아침에 죽어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에 불과했다. 퇴직하고 제2의 직장은 급여가 적어도 근무조건이 나빠도 ‘나이든 나를 채용 해주는 것도 고맙지’ 하고 감지덕지 한다. 평생현역이라는 말도 듣기 좋고 월 100만원의 수입은 은행에 10억 가까운 돈을 정기 예금한 것과 같다며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사회적 요구에 K씨처럼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렵지 않는 은퇴자도 일자리에 내 몰리고 너도 나도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나이든 남편이 일을 하니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아내도 봉사활동이나 몇 푼 밖에 못 받는 싸구려 허드렛일에 매달린다. 나이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거의 막노동수준의 일이다. 남편이 어렵게 돈을 버는데 나만 잘 먹을 수는 없다는 자격지심에 절약이 도를 지나치어 굶기까지 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사는가! 가족들에게 유언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는 것은 비극이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 없이 무조건 일만하는 것도 문제다. 나이에 맞게 적당하게 일하고 영양보충에 돈도 쓰면서 인생을 즐겁게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죽은 뒤에 아등바등 많이 번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늙어갈수록 부부란 함께 살면서 때로는 힘을 내는 엔진역할도 하고 때로는 몸을 쉬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도 하고 더러는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서로 대신 해 주어야 한다.
- 2018-01-0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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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은퇴 후 직업으로 목공 분야에 관심 커져
- 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 중 하나. 특히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니어가 은퇴 후 원하는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를 꼽을 때 단골로 선택되는 분야가 바로 목공예다. 뚝딱뚝딱 제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완성된 제품을 보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가족이 만들어진 가구를 반겨준다면 이보다 즐거울 순 없을 것. 또 솜씨가 좋다면 팔아 생활비에 보태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목수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 긴 역사로 인해 현대에 들어와서 목수가 담당하는 영역은 방대해지고 기능도 세분화됐다. 국내에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형틀을 담당하는 형틀목수와 목조주택을 짓는 목골조목수, 한국의 전통가옥을 만드는 한옥목수 등으로 구분하고,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내장목수와 선박목수, 가구목수 등도 있다. 목공 혹은 목공예는 정의에 따라 나무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에서 건축까지 그 분야가 방대하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나 소품을 제작하는 분야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육기관, 시간, 비용 천차만별 목공예가 시니어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연이나 귀농, 귀촌의 대체제 역할도 한다. 나무를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자연을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귀촌 시 반드시 알아야 할 기술로도 꼽힌다. 당장 생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중 하나. 간단한 식기에서 쟁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상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숙련이 되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실제로 목공예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수업에 참여하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시니어의 경우 당장 직업으로 연결짓기보다 노후생활을 위한 준비나 취미활동을 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며 “절박함 대신 느긋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젊은 수강생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솜씨도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목공예 학원부터, 지자체, 목공방, 기술교육원, 프랜차이즈까지 활동 중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 근처 목공방을 찾는 것. 상당수 목공방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자체 교육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또 일부 협회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목공방의 경우 자격증반을 운영하기도 한다.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운영되는 목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상품 제작을 겸한 목공방에선 수업료 겸 시설 이용료를 합한 금액을 지불하면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정 기간 동안 목공방 장비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기술교육원 교육과정은 일반 학원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교육시간은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간단한 소품이나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나 이틀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자격증 취득과정은 최소 이수 교육시간이 40시간정도다. 기간에 따른 교육비용도 천차만별이다. 하루짜리 체험학습은 1만원 내외이지만 창업반이나 자격증 과정은 수백만원 이상인 경우도 있다. 목공예 관련 자격증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국가자격증인 목공예기능사가 있고, 민간자격증으로는 목공지도사, 목공DIY교육사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목공소나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목공방에 취업하려면 자격증 취득이 필수적이지만, 취미나 여가생활이 목적이라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고 귀띔한다. 창업 쉽지만 제품 판로가 문제 목공예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이다 보니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편. 그래서 목공예 시장에서는 구인보다는 구직 인력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한때는 목공방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저렴한 가구를 구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저가의 중국산 가구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이 위축되어버렸다. 여기에 이케아 같은 다국적 기업까지 가구시장에 참여하면서 목공방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장 취업을 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시니어의 경우 목공소나 목공방들이 채용을 기피하는 대상이다. 급여도 적은 편. 그래서 아예 목공방을 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는 사업의 의미보다는 작업실 개념으로 목공방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 사람이 뭉쳐 공방을 내는 경우도 있다. 메리우드협동조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이곳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를 배운 동기 6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목공방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나 시니어를 대상으로 목공예를 지도하고 있다. 나무사랑협동조합도 이와 비슷한 사례. 송파구 시니어복합문화공간 실벗뜨락에서 목공예 수업을 함께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 공방을 만들었다. 목공방 창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비다. 목공용 장비를 기본적으로 갖추려면 2000만원 내외로도 충분하지만, 제대로 가구를 만들려면 7000만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이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것은 예산이 아닌 영업력이다.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창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장 위축으로 한때 난립했던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최근 확 줄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헤펠레목공방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70여 개 목공방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다. 요즘 목공예 분야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용어다. 재활용할 재료에 가치를 더해 더욱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다. 목공 분야의 경우 상품적재용 깔판인 파렛트나 와인상자와 같은 폐목재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많다. 폐목재는 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많은 목공방들이 폐목 리사이클링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자연친화적 나무라는 소재에 스토리와 공익성이 더해지면서 소비자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공예를 하는 시니어들 사이에선 방과 후 학습이나 목공예 체험교육 강사활동도 인기가 높다. 제품 제작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보람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2017-10-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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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로남불'
- 내가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 될 때 하는 말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후배가 들려준 이야기다. 사업의 성격상 50대 초반의 여성근로자를 많이 고용하는 업체다. 근로자를 채용할 때 개인별 면담을 하면 고용보험과 관련하여 이런 부탁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즉, 본인이 지금 실업상태여서 고용보험을 받고 있는데 취업이 되면 고용보험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남편이나 아들의 이름으로 급여를 당분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용보험법을 어기는 범죄 행동이지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런 범죄 모의를 술술 제안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이없다고 한다. '회사 사장인 당신은 내가 일한 보수를 줘야하는데 단지 명의만 바꾸어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손해 볼 것이 없지 않느냐'사장으로서 종업원의 편의를 봐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는 기본 바탕의 인식이 너무 강해 뭐라고 타이를 수도 없다고 한다. 또 일을 그만하고 퇴사할 때 자의로 사표를 내면서도 고용보험을 타기위해 회사의 사정으로 해고되었다고 명기한 서류를 고용보험 사무실로 통보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이다. 체용 때와 똑 같은 잣대다. 사장이 당신이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도 다 이렇게 한다는데 못해줄 이유가 뭐 있느냐! 가난한 근로자를 위해 퇴사사유에 몇 자 적어주면 되는데 그 정도 편의를 봐주지 못하면 악질사장으로 금방 소문을 낼 것처럼 표정을 짓는 다는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이런 사람들일수록 남의 잘못에는 용서하지 못하고 흥분한다고 한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세금 포탈이나 아파트 당첨을 위해 위장전입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어찌 저럴 수가 있느냐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일장 연설을 한다고 한다. 내가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또 다른 일면이다. 별것도 아닌 교통사고를 의사와 짜고 사고를 부풀려 오랜 기간 병원에서 나이롱환자 행세를 한다. 비용은 고스란히 자동차 보험에서 지급되기 때문에 누구 개인에게 직접 피해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행동이 도무지 범죄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을 막아야 할 보험회사 직원도 한패가 되어 가담하기도 한다. 이런 비용들이 결국 보험료인상으로 보험가입자 전체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요즘은 길거리의 cctv가 각종교통위반을 적발해내고 벌금을 매기는 교통경찰의 일을 척척해 내지만 과거에는 길거리에 교통경찰이 많았다. 즉 교통신호위반도 잡고 과속도 적발하여 벌금을 때렸다. 적발되면 몰래 돈 몇 푼을 넘기고 봐달라고 사정을 하면 돈의 위력으로 교통경찰이 눈감아주고 유야무야 없든 일로 끝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교통경찰을 매수하였으면서도 돌아서는 교통경찰의 뒤통수에 대고 속으로 쌍욕을 해댄다. 잘못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함에도 돈으로 유혹한 자기 잘못은 제쳐두고 유혹에 넘어간 상대방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쏜다. 참으로 적반하장이요 꼴불견이다. 세상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 하지만 사람은 먹이만 탐하는 짐승과는 다르다. 체면이 있고 예의가 있다. 넓게 보는 공동체의 이익도 생각해야 한다. 강물에 우리 집 쓰레기를 버리면 당장은 우리 집이 깨끗하지만 강물을 먹는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몰라서 하기보다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자신만의 이익을 쪼아 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 2017-08-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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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음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 요즘 젊은 여자들 중에는 발음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드라마에서도 보이고 커피숍에서도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 여자들 대화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전철”을 발음할 때 혀를 전부 사용하지 않고 혀끝만 사용하는 것이다. 목소리는 성대를 울려서 입모양과 얼굴 근육을 이용해서 발음이 나온다. 그런데 얼굴 근육도 안 움직이고 입 모양도 거의 안 움직인다. 성대를 울리기보다 간단히 내뿜는 호흡을 사용해서 발음하기 때문에 영어의 ‘Z' 발음이 난다. 겉멋인지는 몰라도 듣기에 상당히 거북하다. 말투도 빨라서 너무 사람이 가벼워 보인다. 발음을 경망스럽게 하니 공손해 보이지도 않는다. 요즘 여성들이 수다 떨 때 말을 많이 하자니 말하는데 드는 힘을 덜 들기는 할 것이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니 그럴지 모른다. 머리 회전에 따라가려니 발음도 빨리 해야 하는 것이다. 턱을 뾰족하게 하는 수술이 유행이다 보니 얼굴 근육을 많이 안 움직이고 말을 하자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발음이 멋스럽다고 생각해서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 "진짜?", "짜증 나!"도 그렇게 발음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다른 이상한 발음은 남녀 구분 없이 ‘ㅅ’ 발음을 할 때 영어의 ‘th' 발음을 하는 것이다. ’Mouth‘, ’South‘ 처럼 'th' 발음은 혀를 약간 내민 상태에서의 발음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그런 발음이 없다. 흔히 혀 짧은 소리를 한다고 표현한다. 방송에서도 보면 리포터로 나오는 사람들 중에 정규 앵커맨은 그런 사람이 없지만, 리포터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아주 짜증나는 발음이다. 말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데 채용과정에서 이런 사람들을 걸러내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다. 발음이 이상하다는 것을 식별을 못한 것이다. 기억나기로는 초등학교 국어 성적표에 여러 항목 중 ‘말하기’가 있었다. 따로 말할 때 발음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중요 항목으로 성적에는 참조가 되었었다. 문제는 발음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선생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나쁜 습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몸에 배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발음을 잡아 주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다. 혀가 짧아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습성인 것이다. 대화할 때 영어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들도 많다. 그전에는 영어를 섞어 쓰면 유식하다는 인식이 좀 있긴 했었다. 물론 미국 땅을 한 두 번 쯤 밟아 본 사람도 좀 많아졌다. 애들 유학 때 미국 때 잠시 갔다 왔다거나 자주 왕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다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 영어를 제대로 해볼 기회도 없다. 그런데 영어의 “r'발음은 우리나라 발음에서는 애매하다. ”Doctor"를 “닥터”라고 하는 것까지는 들어주겠는데 ‘r'발음을 살린다고 ‘닥털’처럼 발음하는 사람들은 구제 불능이다. 한국에서는 "김 박사"라고 해도 되는데 미국식으로 "닥터 김"이라고 부른다. 꼴불견이다. 우리 발음에 없는 ‘f' 발음이나 ’v' 발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습관처럼 영어가 입에 붙은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적당한 단어가 얼른 생각나지 않아 영어가 튀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발음을 굳이 꼬부리는 것은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일이다. 친한 친구가 그렇다면 빨리 고쳐 줘야할 나쁜 습관이다.
- 2016-08-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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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9년生, 세계지도는 내 인생의 이정표
- 김영희(金英姬) 前 대사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 세 개 있었다. 동네 한가운데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방앗간 집과 우리 집에 우물이 있었다. 1949년 한글날 태어난 나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집 우물에 던져져 죽을 뻔했다는 얘기는 알고 있다.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집에다 큰아들이 국군 장교로 참전 중이어서, 인민군이 우리 가족을 몰살하기 위해 우물의 깊이를 재고 전 가족 이름을 적어갔단다. 옆 동네에서는 이미 우물 속 가족 몰살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우리 식구 명단을 작성해간 이틀 후에 미군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단다. 훗날 내 어릴 적 얘기를 전해들은 미국인 내 남편은 한국전쟁에 자기 외삼촌 두 명이 참전했는데, 아마도 우리 동네를 탈환한 미군 중에 자기 삼촌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형제는 아들 여섯, 딸 셋 9남매다. 그중 나는 여덟 번째로 막내딸이다. 나보다 20세 많은 큰오빠는 6·25전쟁에서 생사를 넘으며 수많은 공훈을 세웠고 충무, 화랑 등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전쟁 막바지에 남한의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대한 대규모 중공군의 끈질긴 공격을 중대 병력으로 격퇴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지도를 바꾼 사나이’로 알려진 우리 오빠 김한준 대위가 2012년 사망했을 때,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육군장(陸軍葬)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장례식이 개최되었다. 세계지도를 보며 넓은 세상을 동경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선 책이 몹시 귀했다. 그러나 나는 오빠, 언니가 많은 덕택에 여러 가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책에는 모르는 세계, 모르는 나라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책은 세계지도였다.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보면서 넓은 세계에 대해 꿈꾸고 상상했다. 넓은 세계에 대한 나의 동경은 장래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으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외교관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외교관이 되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외교관은 해외에 나가 넓은 세상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는 것은 막연히 알았다. 내가 전주여고를 졸업할 즈음에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은 9남매 뒷바라지에 매우 헌신적이셨고, 그동안 오빠, 언니들의 중, 고, 대학 입학으로 논밭은 거의 다 팔려나갔다. 나는 대학 대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마음속에서도 포기한 건 아니었고, 일단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고 야간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68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5급을(현 9급) 국가공무원 시험과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1960년대의 실업률은 하늘을 찔러 매년 공무원 시험 응시율은 상상을 초월했고, 나아가 군대 가산점제도가 있어 여성의 공무원 시험 합격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다행히도 나는 두 곳 모두 합격했는데, 서울시 공무원을 택해 1969년 3월 서울시 중구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0년 국제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지만,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구청의 민원실에서 호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였다. 구청의 민원실에서는 일일이 호적을 보면서 손으로 주민등록 카드를 밤늦게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오후 6시에 시작되는 야간대학 수업에 맞춰 퇴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료들의 격려와 눈총 속에서 겨우 1학년은 마쳤으나, 출석 미달로 학점은 엉망이었다.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1970년 12월 어느 날, 명동의 백화점에 선물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친구는 독일에 가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을 했다. 내 귀와 눈이 번쩍 떴다. ‘해외개발공사’에서 간호보조원(지금은 간호조무사)을 양성하여 독일로 파견하는데, 자신도 그 파견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해외개발공사 간호보조원 양성소에서 차기 입학원서를 받고 있는 중이란 말을 듣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독일 행을 결심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내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다. 독일에 가서 병원근무 마치고 독일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말에 모두가 황당해 했다. 안정된 공무원 직장을 버리고 막연한 해외 파견 꿈을 꾸는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독일에 정말 갈 수 있을지, 또 내가 희망하는 대로 병원 근무 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겠다고 했다. 간호보조원 양성소 입학 자격은 ‘중학교 졸업 이상’이었으나, 들어온 여성들의 배경은 천차만별이었다.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공무원, 은행원, 대학생 등 해외로 나갈 길을 찾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유학생 외에 여성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양성소에서 9개월간 이론을 배우고 병원과 보건소에서 3개월의 실습을 거친 후 간호보조원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 독일로 파견되는 과정이었다. 1972년 8월 27일 초조하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는 독일에 도착했다. 새벽의 쾰른 공항은 안개가 자욱하고 추웠다. 공항에는 독일 전 지역의 병원에서 한국 간호요원들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 푯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 4명과 간호보조원 6명이 북독일의 작은 도시 웰첸 시립병원에 배치되었다. 내가 3년간 일해야 할 곳이었다. 나는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했는데, 대부분 교통사고를 당하고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구의 환자들로 병원일은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야간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힘든 근무시간인 오전 근무를 자원했다. 외진 곳에 있는 병원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자전거를 사서 타는 법을 배우고 밤길을 다녔다. 병원에서 일하는 3년 동안 나는 야간학교에서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우며 대학입학 준비를 했다. 한국에도 라디오가 있느냐고 묻는 환자도 있었지만, 우리는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동양에서 온 ‘천사’였다. 30년 만에 이룬 외교관의 꿈 우여곡절 끝에, 1975년 9월 나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쾰른대학교의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드디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힘든 육체노동 없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쾰른대학교에서 예비과정을 거쳐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10년 동안 나는 죽을 각오로 정말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학 전공에, 부전공으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을 공부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1986년 초 나는 박사 학위를 들고 가슴에 큰 희망을 품은 채 한국에 왔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최루탄 가스에 찌들어 있는 여러 대학을 찾아갔지만, 학연 지연이 없는 내게 한국사회는 냉정했다. 그러나 절망은 없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다. 한국에서 실망하고 다시 독일로 간 내게 쾰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겼다. 보수적인 쾰른대학교에서 외국인이 전공과목을 강의한 첫 사례가 되며, 1990년 7월까지 나는 4년 동안 독일 학생들에게 교육철학을 강의했다. 그사이 유럽에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5월 한국 외교부는 독일전문가 특별채용 공고를 냈다. 그 공고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내 어릴 적 ‘외교관 꿈’이 떠올랐다. 특별채용시험 면접 때 “한국은 나를 낳아 키워주었고, 독일은 내 정신을 살찌게 해준 나라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먼 길을 돌아 30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1991년 2월 말 폰 바이체커(R. von Weizsacker) 독일 대통령 국빈 방한 시 통역으로 나는 외교관 업무를 시작했다. 독일 담당관으로 본부와 독일을 오가며 통역한 정상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독일의 라우(J. Rau), 헤어촉(R. Herzog) 대통령이다. 독일 통일 직후 우리나라의 통일 열기는 대단하여 매년 수많은 고위인사들의 독일 방문이 있었고, 자료 작성과 브리핑, 통역은 정무담당인 내 업무였다. 나는 주 독일 대사관에서 1등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후, 2005년 9월 주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대사가 되었다. 선진국과 분단 극복의 꿈 현재 내 책상 위엔 커다란 세계지도 책이 놓여 있다. 뉴스에 주요 해외사건이 보도되면 지도를 펴 보고 그 주변 국가들을 살펴보며 머릿속에선 습관처럼 보고서를 쓰고 있다. 매년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해외를 방문할 때는 항상 그 나라의 지도가 내 가방 속에 들어 있다. 화성에 착륙한 인간의 모습과 지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3개월은 남편과 함께 베를린에 체류하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철학, 인문학 학회에 참석한다. 겨울 3개월은 보스턴에서 지낸다. 쾰른대학 학생 때 만난 남편은 현재 보스턴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변화된 한국의 위상을 실감하지만, 삶의 여유가 있는 사회가 부럽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우리 세대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산업화, 민주화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국내적인 시각에 머문 편협한 사회현상은 안타깝다. 세상은 넓고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냉혹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분단을 극복하는 꿈을 꾼다. 평생 분단과 함께 살아온 우리 세대와는 달리 다음 세대는 진정한 선진국의 시민이 되어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 파리, 런던까지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김영희(金英姬) 외교관 퇴임 후 세계무대에서 얻은 경험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고자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2010.3.)를 펴냈다. 우석대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특강했다. 언론의 독일통일전문가 토론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현재 '여성평화외교포럼'(사) 이사.
- 2016-01-0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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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재미 플로럴 아티스트 클레어 원 강, 플라워아트 손끝으로 완성하다
-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2016-01-0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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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shion is Passion 런웨이에 선 시니어
-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14-11-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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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시대, 인생2막 재취업으로 대비④]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요구해야
- 중장년층과 베이비부머세대, 퇴직자들, 즉 시니어들이 공통적으로 최대의 관심 정보는 뭘까? 바로 일자리다. 재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연금은 부족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55∼64세 고령자 고용률은 2012년 63.1%로 1995년 63.6%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고용지표상으로만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인 50대 중심으로 취업자가 늘어가고 있고, 여성과 중장년층의 고용율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보면 시간제근로자, 기간제근로자 등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숫자만 채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50대 이후 시니어들 재취업은 정부와 기업의 전직지원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재취업에 절망 비자발적, 자발적이든 정든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던 퇴직자들은 인생2막을 열기 위해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재취업이 필수다. 그러나 시니어 계층의 재취업과 창업에 대한 절박한 사회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화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장년층 구직자들을 위한 전직 서비스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고, 기업들이 퇴직자를 바라보는 편견도 넘어야 할 벽이다. 명예퇴직 신청을 한 1년 전부터 50대 초반 A씨는 6개월 동안 ‘전직지원전문가’에게 심리상담, 진단과 피드백,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전직교육, 취업알선 등 전문 컨설팅을 받았고, 퇴직 후 곧바로 자신의 경력과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장에 재취업했다. 퇴직이 배우자의 사망에 이은 가장 큰 심리적인 충격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퇴직은 개인에게 또한 매우 큰 시련이다. 게다가 고령화사회 정년퇴직 연령이 낮아지는 노동시장의 형태 속에서 퇴직은 고급 인력들의 사회 참여 폭이 작아지는 사회 해체의 문제와도 연관돼기 때문에 퇴직자들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고민은 매우 커져갔다. 따라서 그 동안 회사를 위해 기여한 근로자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그 대안으로서 아웃플레이스먼트(전직지원프로그램)가 도입되고 확대되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퇴직 후 일정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또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훈련제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정년연장과는 별개로 기업들은 고령화의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전직지원서비스에 주목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의 최선의 복지는 일자리 제공이며, 일자리가 행복의 조건인 상황에서 이직하는 근로자가 가급적 실업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지원하는 전직지원서비스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자에게 일시적 희망 퇴직금이나 복리후생보다는 근로능력이 있는 중·장년 근로자를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장년의 재취업과 창업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재취업에 대한 비틀린 시선이다. 시니어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재취업 지원이 시니어들의 전문성이나 그간 해왔던 일들과는 상관없는 일감들을 맡기기 일쑤라는 불평을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실행이 잘 안되는 이유 소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일지라도 퇴직을 앞둔 1주일 전에 단발성으로 워크샵을 가거나 온라인 상담정도에 그친다. 이력서 쓰는 방법 알려주거나 면접 보는 스킬정도. 직전 퇴사 처리된 회사에 대해 악의를 품지 않도록 잘 달래주는 일이 겨우 아웃플레이스먼트라고 시늉하는 행태에 머물러 있다. 기업들의 평판에만 신경쓰는 저비용 고효과를 기대하는 변형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흉내내고 있다는 의미다.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있다고 소문난 기업에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개념도 모르고 있는 곳이 많다. 퇴직자들이 아웃플레이스먼트제도를 요구하지 않아서 도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HR부서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정보를 아예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기업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가 IMF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 전직지원장려금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내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도입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한 기업들과 퇴직자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기업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해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만큼 서비스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퇴직자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퇴직 시에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보다는 현금 보상을 더 선호하는 상황이다. 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전직지원 서비스 요구해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도입 초기에 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계 기업 및 국내 기업은 많이 늘었지만,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만 커진 시장 규모는 역설적으로 그리 크게 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중인 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이같은 퇴직(전직)자에 대한 재취업, 창업 알선 등 지원서비스가 의무화 되면 전직지원서비스를 하려는 기업은 늘어 날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자 가운데 장년을 대상으로는 전직지원 장려금을 지급하고, 사업주에게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것이다. KT는 지난 4월 무려 8300여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1조3000억원 가량을 명예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1억4457만원에 이르렀다. 또 한국시티은행은 최근 실시한 명예퇴직에서 5년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4억원에 달했다. 이밖에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 혜택도 보장했다. 현대차그룹 계열회사도 최대 2억원을 넘게 퇴직위로금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감원인데, 막대한 인건비를 지출하게 된다. 경력관리체계가 자리 잡힌 일본, 공공과 민간 양쪽에서 재취업 지원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치룬 해외 선진국에서는 재취업-창업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들이 우리나라보다 고도화되어 있다. 일본은 정부의 ‘헬로워크’와 민간의 ‘시니어살롱’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헬로워크는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고용안정 기회 확보를 위해 만든 공공직업안정소의 애칭으로 전국에 약 500개가 만들어져 있다. 취직 상담, 직업 교육, 직업 소개, 고용보험 관련 업무 등 취업과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에서도 헬로워크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무 능력을 가진 중·고령자들을 위해 단순한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시니어살롱’은 전문 경력을 가진 시니어를 대상으로 구인구직 및 직업 교육, 상담을 진행하는 민간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의 국가 공인 경력관리체계가 안착됨에 따라, 경력관리모델에 의해 노년에도 전문성을 충분히 살리는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베이비붐이란 단어의 탄생지인 미국은 비영리단체(NPO)가 잘 정비돼 있어 경험과 지식이 많은 계층의 재취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NPO는 200만 개 정도 있는데 그중 절반은 의료,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30% 정도는 각종 교육 활동, 나머지 20%는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미국에서는 NPO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취업 인구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미국 전체 취업 인구의 10% 가까이가 NPO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나온다. 즉 취업 알선 분야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분야 자체가 일자리까지 제공할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각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취업 지원 활성화 시작 우리나라도 문제들에 대한 대책과 대안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공공기관과 기업들은 매 시기마다 열리는 다양한 일자리 박람회와 함께 다양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장년 재취업 프로그램’이 경제단체와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40대 후반 항공회사 출신 조기 퇴직자는 “간혹 일자리를 연결해 줘도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일자리들이 너무 열악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앞으로 10년 뒤에도 폐지가 노인 일자리를 감당하는 비극적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기업은 퇴직을 앞둔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전직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고용정보원 한 연구원은 전직지원 서비스에 대한 기업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퇴직자에 대한 전직지원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선진 외국처럼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나 통계치 목표에 기준을 두지 말고 ‘양질의 일자리’를 모색한다면 퇴직자들이 전직 및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퇴직 후 재취업은 이제 근로자 개인의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중장년 퇴직자의 전직과 노후설계 지원은 기업이 정부, 전문가와 손잡고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되어야 한다. 현재 많은 기업에서 전직지원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기업에 따라 기본교육만 실시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전체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기본교육은 퇴직을 앞둔 대상자의 변화, 심리, 가족, 건강, 여가, 경력, 법률, 재무, 인생설계 등 퇴직후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말한다.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 기업에 따라 집합교육 및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직 도입단계인지라 전직지원에 대한 집체교육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으며 전직지원 상담의 경우에는 개인적 상황에 따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하고 있다. 상담 및 컨설팅의 경우는 개인의 재무상태나, 경력 활용방안, 법률적 문제나 여가활용 방안 등 개인의 문제를 1:1로 전문가에 의해 심층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며 창업이나, 재취업의 경우 컨설팅을 통해 재취업 실행까지 지원 하도록 해야 한다. P&G, 수출입은행, 한전, KT에서는 이러한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이미 시행 중에 있으며, 퇴직 예정자 뿐만 아니라 이미 퇴직한 사람들도 유용하게 접할 수 있어 향후 기업들이 전직지원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삼성 그룹, 계열사별로 18개 경력컨설팅센터 운영 중 한편 대기업들도 자사의 직원들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를 차차 갖춰나가고 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 탄생한 개념으로 우리 말로는 ‘전직 지원 프로그램’ 또는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들 중 80% 이상이 이를 실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이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IMF 이후 기업에서는 효율적인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정부에서는 실업률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활용돼 공공과 민간부문에서 지속 적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실행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삼성 그룹을 들 수 있다. 삼성은 회사를 떠난 임직원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퇴직 관리를 해주는 경력컨설팅센터를 2001년부터 시작하여 현재 각 계열사별로 18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40~50대 중장년 퇴직(예정)자들의 재취업을 돕는 전직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경력컨설팅센터는 퇴직임원, 정년퇴직자(또는 예정자), 퇴직자(또는 예정자)를 대상으로 자문역 전직, 정년준비, 전직 상담을 해주며 재취업 알선뿐만 아니라 재교육, 창업지원을 하면서 퇴직 후 삶을 계획할 수 있게끔 종합적으로 관리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총 3천 600명이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이 센터측의 얘기다. 센터 관계자는 “전직지원 프로그램 제공을 통해 회사는 내부 고객으로서의 근로자와의 계속적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퇴직과 관련한 근로자 개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심리안정 후 여기서는 6단계의 교육을 실시합니다. 일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고 자산을 체크, 가족, 건강, 여가, 관계 등을 탐색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한다”고 말했다. 재취업자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실패를 줄이기 위해 사후관리까지 해주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가 국내 전직지원서비스의 롤모델로 부각되면서 LG, SK 등도 벤치마킹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전직지원장려금제도 부활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장, 재취업보다는 더 늦기 전에 생애설계부터 하지” 전문가들은 재취업 준비를 자신의 장점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로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물론 척박한 재취업 환경을 갖고 있는 현재에 그를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당연히 시니어 본인은 재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고 실행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재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니어 취업자들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는 아직 현실적으로 시니어들의 취업 지망과 기업이 인재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의 격차가 큼을 우회해서 알려준다. 물론 시니어들의 눈높이 낮추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기업에서 시니어들을 고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갖는 풍토 또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를 위해선 시니어 재취업에 있어 정부에서 기업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 세금 감면, 인센티브 등이 보다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 중장년 대다수가 일할 의사가 있는데도 정년은 57세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고 기업의 장년 채용 기피 관행이 있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중장년 재취업 대책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보완책을 내놓아 중장년 고용률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2014-09-12 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