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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에 떠나는 山] 대망의 설악산 공룡능선 동계일주
-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 2017-01-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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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의 스타라이프] 백일섭, ‘졸혼’을 고백하다
- 2016년 한 해 동안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이용자가 가장 많이 찾아본 신조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츤데레’, ‘어남류’, ‘어그로’ 등에 이어 7위를 차지한 ‘졸혼(卒婚)’이다. 졸혼은 2015년과 비교해 2016년 많이 검색한 신조어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졸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생소해하는 신조어 ‘졸혼’을 단번에 관심사로 만들어 공론화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중견 스타 백일섭(73)이다. ‘졸혼’이라는 용어는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65)가 쓴 이라는 책에서 유래한 단어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 혼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졸혼은 결혼의 의무에서는 벗어나지만 부부관계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이혼, 별거와 구별된다. 이혼이나 별거의 경우에는 정기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졸혼의 경우는 부부라는 관계가 유지되므로 정기적으로 만난다. 졸혼의 등장으로 함께 살거나 헤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결혼의 선택지에서 제3의 길이 추가된 셈이다. 스기야마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졸혼은 부부의 대대적인 재설정이다. 부부관계가 변화하면서 졸혼이 성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졸혼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되고 또 하나의 결혼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연예인 등 유명인들의 졸혼 선언 영향이 크다. 2013년 일본의 유명 코미디언 시미즈 아키라(63)는 졸혼을 선언해 적지 않은 충격을 주면서 ‘졸혼’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했다. 34년간 함께 지낸 아내는 도쿄에 남고 시미즈는 산악지대인 나가노로 이주했는데, 당시 그는 부인과 이혼한 것이 아니냐는 언론의 질문에 “좋아하는 낚시를 하거나 집을 고치고 있을 뿐 결코 혼자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2016년 11월 3일,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졸혼과 백일섭이 인기 검색어 상위를 차지했다. 백일섭이 이날 방송된 TV조선의 에서 졸혼 사실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나쁜 의미로 표현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이혼이 아니라 결혼을 졸업하자는 생각을 했다. 배우인 아버지로서 집안에서 대우받고 위로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것들이 서로 사이클이 맞지 않았다. 깊이 고민하다가 2015년 집사람한테 ‘나 나간다’ 하고 집을 나왔다.” 그가 36세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어 30여 년간 결혼생활을 한 뒤 졸혼을 선택한 이유다. 백일섭은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따로 거처를 마련해 혼자 지내는 졸혼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집을 나와 혼자 생활하면서 마음이 편했다. 혼자 생활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결혼한 뒤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여러 이유로 집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어수선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일(방송, 영화)을 활발하게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졸혼을 선택했다.” 백일섭의 졸혼 선택에 대해 아들 백승우씨는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큰 감흥은 없다. 두 분이 안 싸우시고, 저는 편하다. 결혼은 부부의 문제다.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졸혼을 선언한 후 아들과 함께 고향인 전남 여수를 찾아 바다낚시를 하거나 지인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혼밥’과 혼자 술 마시는 ‘혼술’에도 익숙해졌다. 그는 “혼자 살면 혼밥과 혼술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이제 요령이 생겨 편하고 행복하게 혼밥과 혼술을 한다. 혼밥과 혼술은 외롭거나 애처로운 것이 아니다.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가지고 와 집에서 요리도 하고 밥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졸혼을 계기로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 등 연예활동도 활발하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이 칠십이 넘으니까 연기에 대한 의욕이 더 많이 생긴다. 좋은 연기를 하려면 건강해야 한다.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혼자 산다고 막사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생활을 관리한다.” 방송을 통한 백일섭의 졸혼 공개는 졸혼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논란을 증폭시키며 큰 파문을 몰고 왔다. 그는 “졸혼은 개인의 선택이다. 부부간의 사정과 상황에 따라 함께 생활하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졸혼을 선택할 수도 있다. 졸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졸혼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고 졸혼을 선택한 부부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결혼정보업체 가연이 지난해 회원 548명(남 320명, 여 228명)을 대상으로 졸혼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7%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여성은 응답자의 63%가 졸혼 문화를 긍정적으로 봤고 남성은 54%가 찬성 의사를 보였다. 물론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엇갈린다. “졸혼은 이혼 수순으로 가는 가족 해체의 전 단계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다면 해결한 후에 건강한 부부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로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라는 부정적 견해와 “이혼과 달리 졸혼은 자녀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이 없으며 주변 시선에도 신경이 덜 쓰인다. 부부생활을 같은 공간에서 하지 않아도 부부관계나 자식과의 관계에 특별한 변화는 없다. 각자 독립적으로 살며 결혼생활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졸혼은 가족의 해체가 아닌 부부의 자존감을 높이는 결혼 문화다”라는 긍정적 견해가 있다. 현재 찬반 논란이 증폭되고 있기는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했듯 졸혼도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라는 백일섭의 말에는 공감하는 듯 하다.
- 2017-01-3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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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의 뉴컬처 키워드] 문화와 생활 트렌드 이끄는 ‘YOLO’
- “YOLO! You Only Live Once.” 2016년 3월 4일 방송된 tvN 프로그램 아프리카 편에서 신세대 스타 류준열이 혼자 캠핑카를 몰고 아프리카를 여행 중인 외국 여성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건네자 돌아온 대답이다. 이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YOLO(욜로)’의 뜻을 잘 몰랐다. 그런데 , 등 트렌드 분석서들이 올해 유행할 트렌드로 한결같이 ‘YOLO’를 꼽았다. 욜로는 이제 생활뿐만 아니라 문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두문자어(acronym)로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의미다. 2011년 미국의 인기 래퍼 드레이크의 노래 ‘The Motto’의 가사 중 한 구절인 ‘You only live once: that’s the motto, nigga, YOLO(인생은 한 번뿐이야. 이게 인생의 진리지, 욜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2016년 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건강보험 개혁안인 ‘오바마 케어’ 가입을 독려하기 위한 홍보 영상에 사용돼 눈길을 끌었다. 2016년 9월에는 옥스퍼드 사전에 신조어로 등재됐고 이후 ‘헬로(Hello)’나 ‘굿럭(Good Luck)’ 대신 사용하는 인사말이 됐다. 또한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욜로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용어다. 욜로 트렌드의 부상으로 장기적인 미래 계획보다는 현재 느끼는 ‘즉시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더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를 즐겨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비슷한 의미처럼 들리겠지만 카르페 디엠은 삶의 태도에 대한 격언이고, 욜로는 현실적 삶에 대한 버전인 셈이다. 욜로는 오늘은 불행해도 내일을 위해 참고 산 기성세대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담보 잡는 삶을 살아온 많은 사람에게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희생하기보다는, 후회 없이 즐기고 사랑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는 에서 “욜로와 관련한 문화와 소비는 단순히 물욕을 채우거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활동을 넘어 자신의 이상향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장은 에서 “욜로는 한 번뿐인 인생이니 하루하루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다. 막살자는 것도 아니고, 대책 없이 오늘을 흥청망청 보내자는 것도 아니다. 오늘을 충실히 살다 보면 내일도 충실해질 수 있다. 오늘의 행복을 찾으면 내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내일이 막연한 미래라면, 오늘은 구체적인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욜로 트렌드의 부상으로 전세금을 털어 1년간 세계여행 길에 오르거나, 월셋집에 살면서도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만의 취미생활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쓰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통장의 잔고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신한카드가 ‘욜로 아이(YOLO i)’라는 상품을 출시했고 금융기관, 유통업체, 여행사 등도 욜로 트렌드에 부합한 상품과 서비스를 앞다퉈 내놓고 있다. 욜로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는 현재의 ‘즉시적 행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데일리 디톡스(Daily Detox·일상에서 찾는 휴식)’,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 ‘맞춤형 휴가’, ‘이터테인먼트(eatertainment·식사 그 이상)’, ‘홈퍼니싱(Home Furnishing·소품으로 집 꾸미기)’ 등 소소한 생활 속 만족을 지향하는 문화를 유행 트렌드로 부상시키고 있다.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인식하고 더 즐겁고 행복한 오늘을 보낼 수 있게 하는 문화 콘텐츠도 속속 제작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이들을 통해 인간애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다루면서도 의미 있는 오늘을 충실히 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KBS 3부작 다큐멘터리 , 살 수 있는 시간이 48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가정 아래에서 행하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tvN의 웰 다잉(Well Dying) 리얼리티 프로그램 ,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tvN의 힐링 프로그램 , 혼자서도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노하우를 전달하는 스카이트래블의 등 욜로 트렌드와 관련된 방송 프로그램들이 늘어나고 있다. 방송뿐만 아니라 소설, 에세이,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일상의 즉시적 행복과 소소한 기쁨을 강조하는 콘텐츠가 대중들과 만나면서 욜로를 더욱 강력한 트렌드로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욜로 트렌드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욜로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와 함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같은 충동적이고 소비지향적인 삶은 문제가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욜로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힘든 현실을 참고 견디면 미래에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고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7년 정유년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떠오른 욜로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무조건 희생하는 삶의 스타일이 지배적인 대한민국 사회에 적지 않은 긍정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 때문일까. 영국 시인 로버트 헤릭의 시 ‘To the Virgins, to Make Much of Time(아가씨들이여, 시간을 잘 활용하라)’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 Old time is still a-flying:/ And this same flower that smiles today/ Tomorrow will be dying…(너희들이 할 수 있는 동안/ 장미 봉오리를 모아라/ 늙은 시간은 끊임없이 날아가며/ 오늘 미소 짓는 바로 이 꽃도 내일이면 죽으리라…)’ 또한 시인 윤동주의 ‘내일은 없다’라는 시에 눈길을 주는 사람도 늘었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2017-01-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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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thout you~
- 감미롭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한 멜로디가 귓가에 맴돈다. ‘캔 리브~~리빙 이스 위다웃 유~’ 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애절하고도 달콤한 노래로 젊었을 때 팝송에 빠져있던 필자가 좋아한 노래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가수로‘ 해리 닐슨’이 이 노래로 4주 연속 빌보드차트 1위를 장식했었으니 큰 성공으로 사랑받는 노래임이 틀림없겠다. 그 외에도 ‘머라이어 캐리’ ‘에어 서플라이’ 등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널리 알려졌다. 느린 템포에 조용하고 그윽한 선율, 슬픔을 참으려는 내면적 고통이 아름답게 표현된 사랑의 상실에 대한 황폐한 고독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알고 보니 참으로 쓸쓸하고 슬픈 이면이 있었다. 이 곡은 ‘배드 핑거’라는 4인조 록 그룹의 멤버 두 명이 서로의 곡을 접목해 완성한 곡이다. 필자는 젊었을 때 여러 장르의 수많은 음악을 즐겼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비틀즈’다. ‘배드 핑거’라는 그룹은 그리 유명하진 않았어도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매우 불운했다. 음악성도 좋고 노래도 괜찮았지만 ‘비틀즈’의 그늘에 가려 ‘비틀즈’의 아류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비틀즈’처럼 4명으로 결성된 ‘배드 핑거’는 그들 나름대로 음악을 펼쳤지만, 사람들은 ‘비틀즈’의 짝퉁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사실 제작자도 ‘비틀즈’를 표방해 이 그룹을 만들었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비틀즈’가 어느 날 해체를 선언했다. 수많은 열혈 팬들은 절망감과 함께 분노까지 느꼈다. 그래서 ‘배드 핑거’가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비틀즈’의 짝퉁 노래는 듣지 않겠다며 야유하고 거부했다고 한다. 훌륭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시기를 잘 못 만났으니 안타까운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 ‘배드핑거’ 멤버 두 명이 합작해 만든 곡 ‘without you'를 앨범에 수록했으나 팬들은 들으려 하지 않아 사장될 위기에 닥쳤는데 이 곡을 들은 ’해리 닐슨‘이 그들에게 그 곡을 사겠다고 제안을 했다. 앨범에 수록되었지만, 대중이 들어주지 않으니 그들은 ‘해리 닐슨’에게 헐값으로 노래를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1972년 ‘해리 닐슨’이 이 곡을 편곡해 발표하자 빌보드 차트에 4주나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며 사랑받기 시작했다. 발라드에 강한 비트가 들어간 당시로써는 차별화된 멋진 음악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만들었음에도 대중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싼 가격으로 팔아넘겼는데 그 곡이 명곡이 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니 ‘배드 핑거’는 상대적 박탈감을 이기지 못한 듯하다. 1975년 이 곡을 만든 ‘배드 핑거’의 ‘피터 햄’은 스튜디오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8년 후 1983년에는 공동작곡자인 ‘토마스 에반스’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배드 핑거’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일까? 생각해 보면 매우 아깝고 안타깝기만 하다. ‘비틀즈’에 열광했고 지금도 그들의 수많은 명곡을 기억하며 멤버 하나하나 다 좋아하고 있지만 그렇게 유명한 그룹에 가려져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져 간 ‘배드 핑거’가 애틋하다. 그저 나의 좁은 소견으로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곡을 만들고 꾸준히 활동했더라면 언젠가는 음악성을 인정받고 훌륭한 록 그룹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 한 감미로운 노래에 이런 사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 2017-01-1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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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시니어들의 ‘한 달’ 별장 만들기 좋은 도시들❶
- 이유 없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곳에는 으레 세계적인 부호나 유명한 배우들이 별장을 짓고 살지만 그 도시가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반 여행자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그 도시에서 한 달 정도만 살면 별장과 다를 바 없다. 이번 호부터 아름답고 특별한 별장을 꿈꾸는 시니어들을 위해 유럽의 멋진 도시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한다. 글·사진 이신화( 저자, www.sinhwada.com) 고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소도시 얼마 전 “폴란드에서 사는 것은 어때?”라고 필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지인이 있다. 평생 ‘일이 내 삶의 전부’라며 살아온 그도 ‘딴 나라’에서 살 생각은 가끔 하나보다. “폴란드는 아닌 것 같아. 체코의 남모라비아 쪽이 더 나아”라고 답변했더니 귓등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던 그가 TV의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야 활짝 웃었다. 술 좋아하는 그가 체코 모라비아 지방의 인심 좋은 포도 축제에 홀딱 반한 것이다. 지인이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어떠리. 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의 질 차이는 엄청나게 크니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인이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가 결정됐을 때 필자가 나서주면 될 일이다. 지인이 홀딱 반한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추천하고 싶은 도시는 ‘텔츠(Telc)’다. 필자에게 “체코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텔츠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의 느낌은 비슷하기 마련이다. 체코의 대표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도 자신의 책 에서 “우리나라에서 텔츠보다 아름다운 광장을 가진 도시는 없다”고 말했다. 체코 관광청도 “텔츠는 예술가들과 몽상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랑스럽고 연약한 분위기를 내는 도시다”라고 소개한다. 텔츠는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매력이 있는 도시다. 특히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대도시 프라하보다 물가가 50% 싼 모라비아 지역 모라비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텔츠는 프라하에서 150km, 브르노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관광객이 90%나 되는 복잡한 대도시 ‘프라하’를 벗어나 모라비아의 가장 큰 도시 ‘브르노’에 도착했을 때 체감하는 것은 ‘물가’다. 과장 없이 50% 정도 물가가 싸다. 쉽게 예를 들면 커피 값이나 와인 한 잔 값이 1유로를 조금 웃돈다. 브르노를 떠나 텔츠 역에 도착해 10여 분 정도 걸어 호르니브라나 문을 들어서면 올드 타운의 자하리아스(Zacharias) 광장이다. 광장 주변에는 엇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텔츠는 12세기에 로마네스크 교회의 은신처로 언덕 위(해발 522m)의 늪지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목조 가옥이었으나 1530년에 큰 화재가 났고 당시의 시장이었던 자하리아스 폰 노이하우스의 통치 아래 대대적인 재건축에 들어갔다. 가옥들은 르네상스식 석조물로 바뀌었고 타운을 에워싼 성벽과 인공 연못도 요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또 한 번 화재가 일어났는데 그때도 같은 방식으로 재건축을 했다. 시장이 사망한 뒤 이 도시는 더 이상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덕분에 유서 깊은 마을(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될 수 있었다. 텔츠에는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85개의 구조물이 있다. 바로크, 로코코 건물이 길게 이어진 유네스코 도시 광장 옆으로는 긴 회랑처럼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건축물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한 몸이지만 제각각 모양새와 색깔을 달리한다. 건물의 정면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분홍색, 하늘색, 노란색, 흰색 등으로 칠해져 있다. 뷔르게하우스(Burgerhaus Nr.15)는 다른 집과 달리 건물에 장식물이 달려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또 한 곳은 미하일 베커 시장의 집인 61호 저택이다. 미하엘 베커는 빵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훗날 텔츠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의 집은 스그라피토(sgraffito) 장식으로 1555년에 개축했다. 스그라피토는 텔츠 성에서 일하던 조각가가 개발한 공법으로 ‘긁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석회 반죽을 이용한 작품이나 도자기 제작에 많이 응용된다. 이외 59호, 520호, 522호 저택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광장에는 페스트 종식 기념탑인 성모 마리아의 기둥이 있다. 조각가 다비드 리파트에 의해 1718년에 제작된, 이른바 구름 형식의 바로크 탑. 마리아의 탑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6각형 못이 있다. 13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립된 후 15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개조됐다는 성령성당도 있다. 영화 등 로케이션 현장 ‘텔츠 성’과 종탑 광장 북쪽으로 가면 텔츠 성과 정원이 있다. 고딕 양식의 성은 여느 지역과 달리 소박하다. 14세기, 자하리아스에 의해 지어진 이 성에서는 스그라피토 장식의 벽면과 홀 내의 격자무늬 천장,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1945년까지 리히텐슈타인 포드슈타트슈키 백작이 살았던 이 성이 몰수되자 백작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현재 성의 예배당에는 자하리아스와 그의 아내, 여러 성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때때로 음악회가 개최되는 텔츠 성은 영화 촬영지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성 살인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성 뒤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성 야곱성당의 종탑(60m)이 있다. 종탑은 멋진 ‘뷰포인트’다. 종탑에 오르면 바로크 양식의 쌍 탑이 두드러진 건물이 눈길을 끈다. 1651~1669년에 제수이트회가 세운 예수회 성당과 대학으로 텔츠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텔츠의 백미는 올드타운을 양 안으로 감싸 안고 있는 울리츠키와 슈테프니츠키 인공 연못. 도시를 복원하면서 만들어진 ‘물의 요새’는 텔츠를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연못 속으로 유영하는 텔츠의 가옥들을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여행정보 교통 정보 프라하 플로렌츠 역에서 매일 2회(13:55, 16:15) 직행버스가 운행된다. 총 2시간 40분 소요. 브루노를 기점으로 찾으면 편하다. 브루노에서는 기차와 버스가 운행된다. 버스는 완행버스처럼 여러 마을에 정차하므로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여행 포인트 텔츠 성에서는 각종 이벤트가 펼쳐진다. 다양한 레저도 즐길 수 있다. 정원이나 숲길을 따라 트레킹, 하이킹도 할 수 있다.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산악 바이크, 보트놀이를 할 수 있고 낚시도 가능하다. 기타 정보 메인 광장 주변에 호텔은 물론 펜션 등 숙박업소들이 있다. 직접 만든 수제 와인이 유명하다. 토굴 형태의 와이너리도 방문할 수 있다. 인포메이션 직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주변 여행지 브루노, 올로모우츠를 비롯해서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의 여행이 쉽다. 알폰스 뮤샤(Alfons Mucha, 1860~1939)의 개막식에서 만난, 체코 문화원에 있는 미하엘라는 미쿨로브스키를 적극 추천한다. 이곳은 알폰스가 오스트리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다 발길을 멈춘 도시다. 텔츠 안내 사이트 www.telc.eu/, www.discoverczech.com/telc/index.php4
- 2017-01-1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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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인물] 제로캠프 최불암 이사장
- “우리의 영혼은 빈곤합니다.” 한 아이가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열 명이 겨우 설 수 있는 작은 무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객석과 몇 명 되지 않는 관객. 그러나 이 외침은 초로를 지난 대배우의 가슴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국민 배우’라 부를 수 있는 최불암(崔佛岩). 교실에 있어야 할 나이의 이 아이들은 쫓기듯 학교를 나와 이 대배우와 인연을 맺었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박규민 실장(스튜디오 봄) parkkyumin@gmail.com 그는 이 아이들을 ‘학교 밖 아이들’이라고 정의했다. 성인도 아닌, 그렇다고 학생도 아닌 불안정한 신분 위에 선 아이들. 몇 명이나 되겠나 싶지만, 교육부 자료를 찾아보니 2010년에서 2014년까지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누적 학생 수는 36만 명에 달한다. 2016년 초 진주시가 발표한 주민등록상 인구 수가 36만 명이었으니, 한 도시 전체 인구가 전국으로 흩어져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이 아이들에게 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지원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제로캠프다. 제로캠프는 문화 중심지 홍대에서 청소년들이 문화예술을 통해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는 단체. “요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더욱 발전하면서 스승은 필요 없다고 선언해버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학교에서 잠만 자거나 아예 학교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이죠. 제로캠프는 그 아이들이 문화예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쉽지 않죠. 많은 아이들이 찾아오지만 그중 선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장 최불암’과 만난 날은 이렇게 찾아온 아이들이 10주 동안 노래와 춤, 연기, 영화 제작 등의 실무를 교육받고 그 결과를 객석의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객석 구석에서 그는 이사장으로, 스승으로 혹은 대선배로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TV에서 수십 년간 봐왔던 예의 따스한 눈빛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학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걸까. 그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잖아요. 욕망을 따르는 체제. 욕망에 얽혀 있는 사회에서 그 욕구를 제대로 해결 못한 채 살아가려 하니까, 자살률도 높고 아이들도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은 이런 욕구를 해소시키는 좋은 방안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위험 수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고, 재능에 따라 교육을 지원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많은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데, 아이들 이름은 기본이고 어떤 아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누구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다 꿰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더 해줄 수 없는 한계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여기서 10명 중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데뷔가) 되어야 하는데, 뽑히는 것이 쉽지 않아요. 소속사라도 있어야 기대라도 할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은 기특하죠. 예술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또 그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수단을 갖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죠.” 그는 이 아이들의 무대를 어떻게 봤을까? 극중 연출가와 배우가 다투는 장면은 마치 ‘연출가 최불암’이 배우를 다그치다 참지 못해 직접 연기를 하게 된 에피소드를 보는 듯했다. 실제로 ‘청년 최불암’은 연극 연출가로 나섰다가 배우의 노인 연기가 마뜩치 않아 직접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현했다고 평가해요. 가식이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들의 마음을 읽어주길 바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들 꿈이 소극장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아마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바로 이 극장에 모여 앉아 노래하고, 연습하며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스승이자 대선배로, 그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한 아이는 무대에서 “배우란 남에게 보여주려고 있는 것”이라고 당차게 소리쳤는데, 혹시 눈앞의 스승에게 대선배에게 전한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란 사회, 사람의 반향판이에요. 관객이 그 배우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순화시키는 거죠. 중국에서는 희곡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에서 연기자라고 불렀죠. 우리 조상들은 광대(廣大)라고도 했어요. 넓게 포용한다는, 지금으로 치면 매스미디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임금에게 국민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잖아요. 그런 의미를 안고 성장하면 좋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 2017-01-0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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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경북 예천군 풍양면 시골에 사는 전용숙씨 부부
- 글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귀촌을 하자고, 시골의 자연 속에서 노후의 안락을 삼삼하게 구가하자고, 흔히 남편 쪽에서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발칙한 발상이라 규탄당하기 십상이다. 아내에 의해서 말이다. 무릇 여자란 명민하게 머리를 쓰는 버릇이 있는 종족이다. 감관이 발달한 이 고등한 생물체는 도시의 아파트라는 쾌적한 온실과 결별하고 시골이라는 야생으로 이주하는 ‘거사’에 따라붙을 온갖 불편과 고생을 미리 훤히 내다본다. 일테면, 시골엔 손쉽게 쇼핑을 즐길 마트나 백화점이 없으며, 우아한 사교를 즐길 문화공간도 열악하고, 자칫 고독을 벗 삼아야 할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 풀이나 해충에게 시달릴 일이 정말이지 몸서리치게 싫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대뜸 반기를 들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귀촌을 선창한 남편은 머리칼을 득득 쥐어뜯으며 부르짖는다. “아아, 괴롭고 괴롭도다. 마누라는 어쩌면 그토록 나와 취향과 이상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무슨 잔인한 운명의 농간이란 말이냐!” 소나기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비감에 젖어 속으로 악을 쓰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불운을 타박하며 귀촌의 꿈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귀촌생활에의 도도한 로망과 세찬 영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편들의 경우엔, 불굴의 의지를 발동해 아내를 기차게 구워삶을 정교한 방책을 새삼 모색한다. 당나귀처럼 드센 고집으로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한, 자못 그럴싸한 유인책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청사진을 개발할 경우, 그는 비로소 성공을 거둔다. 나는 지금 경북 예천 풍양면의 시골마을에 있는, 정진성(69)씨 내외가 사는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정씨의 귀촌은 순탄한 과정을 밟았다. 상당수의 귀촌 부부들이 난해하고도 예리한 충돌과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귀촌에 이르지만, 그는 아내의 갈채와 자비에 힘입어 쾌조의 시발을 했다는 게 아닌가. 부부가 의기투합한 귀촌 서울에서 살았던 정씨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색적인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걸 알아차렸다. 서울을 냅다 걷어차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초저녁별처럼 영롱하게 들솟았던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들끓고, 소음과 미세먼지가 난무하고, 계산과 꿍꿍이가 창궐하는 대도시, 그 머리 아픈 정글을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이 심상치 않은 기분은 점점 자라 확고한 신념으로 비약했다. 이후 그는 드디어 아내에게 귀촌을 제안했다. 아내 전용숙(64)씨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선선히 동의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진성씨는 귀촌을 둘러싼 아내와의 논쟁이나 힘겨루기를 일거에 면제받은 셈이다. 그렇게 단숨에 의기투합해서 부부가 시골에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 아내 전용숙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통은 여자들이 귀촌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시골로 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어요. 남편이나 저나 서울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제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을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요. 귀촌을 하면 실컷 꽃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어요.” “꽃의 그 무엇을 매우 좋아하죠?” “음.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이나 향기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같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피어난다는 게 참 좋아요. 크거나 작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든 초목마다 제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우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남편께서 귀촌을 발상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생활이 주는 피로감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남편은 토목 기술자로 평생 공사 현장에서 뛰었어요. 대림산업 부장으로 재직했던 1996년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로 토목 현장을 누빈 사람이었죠. IMF 직후엔 심각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엔지니어에겐 정년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이 가능하죠. 그러나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신에 공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비즈니스상의 술자리가 잦아 더 이상 일을 계속하다간 몸부터 무너질 거라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즈음 귀촌을 착상했는데, 다행히 남편의 고향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10년째 비어 있는 집이 있어 결정과 실행이 빨랐어요. 그러고 보면 저희는 귀촌이자 귀향을 한 경우라 봐야겠죠.” “예수조차 고향에선 배척당했다고 해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쏠렸을 이웃들의 각별한 관심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텃세랄까, 그런 거 말이죠? 처음 그런 문제에 염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워낙 인심 좋고, 반듯한 풍속이 정착된 시골이라서 오히려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융화가 쉬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우리 마을의 노인회장이에요.” 전용숙씨 내외가 사는 집의 풍색은 소탈하다. 시부모님들이 살았던 당시의 구색을 가급적 그대로 놓아두거나 살려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약간의 손질과 약간의 단장을 했을 뿐이다. 인간이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집이라는 사물 역시 결국은 자연으로 귀환하는 법이니 굳이 거창한 인위를 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햇볕이 물살처럼 찰랑이며 들이쳐 화단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 이미 만족스럽고, 대기의 입자를 흔들며 불어오는 솔바람, 강바람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유리창이 있기에 더욱 흡족하다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시골살이 3년을 통해 배우거나 얻은 것 중에 최상의 것은 무욕(無慾)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라지. 시골생활이 부여하는 절호의 기회들 집 뒤편으로는 제법 너른 텃밭이 딸려 있다. 12월의 텃밭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하지만 온기라 할 만한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서울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키워 자연과 땅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웠던 전씨에게 시골 텃밭은 숫제 낙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녀는 갖가지 작물을 심어 기른다. 풀을 뽑아내는 일이 고역스럽다기보다는 미안스러워 내심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보낸다. 텃밭이니 가혹할 정도의 노동은 필요치 않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기에 소출에 욕심을 낼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비지땀을 흘려 공을 들이는 건 작물들이 갓 태어난 손주나 노랑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애틋한 생명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텃밭 농사를 서정적으로 즐긴다. 도시의 여자들이 찜질방에서 즐기듯이, 찻집에 둘러앉아 애먼 남편들의 흉을 푸짐하게 늘어놓으며 수다를 즐기듯이, 그녀는 텃밭에서 유유하게 노닌다. 텃밭보다 더 오래, 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꽃밭에서 구현한다. 그녀는 해마다 30여 종의 화초를 가꾼다. 꽃철이면 울안에도 울밖에도 온통 꽃이다. 경북대 농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꽃은 만고에 친애할 만한 동무다. 유심한 눈길로 꽃을 바라봐 꽃과 바람이, 꽃잎과 햇살이 어떻게 속삭이는지를 재빨리 간파한다. 폭풍에 찢긴 꽃대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 만개한 꽃들의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에 기쁨을 담뿍 담는다. 그렇기에 시골의 나날은 태반이 꽃날이렷다. 이런 자각을 할 때면, 그녀는 서둘러 일찌감치 귀촌을 하지 않은 것을 살짝 아쉬워한다. “서울에 살 때 실내원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실내조경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화센터 원예 강좌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어요. 꽃을 즐기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원예치료사 자격증도 있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치료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일상 안에 꽃 사랑이 들어와 있을 경우, 한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 같아요.” “꽃을 너무 편애하는 건 아네요? 사람도 꽃 아닌가(웃음)?” “맞아요. 사람과 꽃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시골에 살며 더 실감해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요즘의 시골 인심도 도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보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래요. 뭐든 나누고 돕는 풍속이 여전하거든요. 귀촌한 뒤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죠? 그건 시골의 바탕에 깔린 나눔의 정서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라 봐요. 무조건 나누고 베풀어야 해요. 그런 처신이 손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득을 얻는 현명함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시골생활이란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절호의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가 저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상은 이웃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 바로 그런 것이에요. 나만을 중심에 놓는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남들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건 참 잘 사는 인생이지 않겠어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평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할 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망둥이는 자주 길길이 날뛰어 소란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마음의 동향을 주시해서 단속할 수 있는 기회를 시시때때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게 귀촌생활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시골생활을 무난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의 스케일을 확대해야 한다. 마을 전체를 나의 집으로, 마을 사람 전부를 내 가족으로 바라보는 광폭의 마음, 그리고 소소한 풀꽃에까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까지 가세한다면 귀촌의 나날들은 안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시골에 살며 저는 많은 걸 얻었어요. 서울에 살 때엔 부부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기 내려온 뒤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렇다 해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미스터리이지만, 남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기할 건 딱 포기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서울에서 지출했던 생활비의 절반쯤이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매력적이죠. 천성이 게으른 사람들에겐 오직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갖가지 노동도 운동이나 춤처럼 즐길 줄 아는 힘이 생겼고요,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어요. 남모를 애환? 숨기고 싶은 고민? 그런 게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사실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인 존재잖아요? 마음에 소용돌이가 칠 때면 강변을 산책해 속을 비워냅니다. 우리 마을의 멋진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함께 걸어보실래요(웃음)?” 전씨 내외가 앞장서 강변으로 향한다. 첼로의 저음처럼 깊어가는 12월의 강변 오솔길. 강가에 늘어선, 잎 떨군 나무들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모습으로 비쳐서. 사람이 어떻게 저 겨울 나목의 허심(虛心)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마는, 가급적 비우고 또 비우라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전용숙씨가 누리는 소박한 시골생활의 즐거운 지향도 비우기에 있다는 것이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1-0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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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의 그림 이야기] 초상화에서 다모증(多毛症)을 보다
- 병원 진료실을 찾는 환자나 그 가족이 전해주는 사연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희귀한 피부 질환을 앓는 환자를 만나면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임상 진료 분야와 달리 피부 질환의 특성상 다른 사람 눈에 쉽게 노출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안면에 나타난다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고(故)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이 편찬한 귀중한 화보 (탐구당, 1972)을 살펴보다가 유복명(柳復明, 1685~1760)의 초상화를 만났다. 얼굴색이 좀 어둡게 그려져 있기에 휴대용 단안확대경으로 피사체의 안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이 온통 털로 뒤덮여 있었다(그림). 즉 초상화 주인공의 코에서는 여드름 자국이 보였고, 안면은 다모증(多毛症, hypertrichosis)이라는 희귀 피부 질환을 앓고 있음이 확인됐다. 남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다모증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된다. 수염이나 눈썹 등에 유난히 많은 털은 고민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미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androgen)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위에서 체모(體毛)가 두드러지게 많이 난다면 상황은 다르다. 온몸 또는 얼굴이 털로 뒤덮인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수년 전 해외 가십으로 소개된 ‘원숭이 인간’이 그 한 예다. 초상화 주인공인 유복명의 경우 안면 다모증이 보이지만, 다행히 털의 밀도가 아주 높지는 않다. 눈 밑 부위까지 난 안면 전체 체모의 올이 머리털처럼 굵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의 손등에도 굵은 털이 났으리라 짐작된다. 피사체인 주인공이 유·청소년기에 ‘털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하니 필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초상화를 보면서 한 환자가 떠올랐다. 임상에서 눈썹이 없어 진료실을 찾는 무모증(無毛症, atrichosis) 환자를 만나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지만, 다모증 환자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다. 어느 날 여성 한 분이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필자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차분히 앉는 여성의 얼굴 표정을 보며 왜 눈길을 피하며 이야기하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참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는 여성에게 나타나는 다모증의 일종인 조모증(粗毛症, hirsutism)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환자는 중학교 선생이었는데, 입 주변과 윗입술 그리고 턱 부위가 옅은 잔털로 덮여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검게 보였다. 국소 다모증이었다. 사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임상적으로는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환자는 철없는 학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임상적 원인 분석을 떠나 미용 차원의 교정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피부 치료용 레이저광 치료 기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다양한 레이저 치료 기기가 개발되어 많은 환자가 큰 도움을 받고 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제모(除毛)용 레이저 기기는 가장 뛰어난 임상 효과를 보인다. 필자는 1980년대에 진료실을 찾아왔던 그 여선생도 레이저 치료를 받고 밝은 얼굴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유복명 귀인에게 막연하게나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7-01-02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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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 정유년, 닭띠 연예인과 이들의 새해 포부는?
- 글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2017년 정유년(丁酉年)의 새해가 밝았다. 힘찬 닭 울음소리로 새해를 희망차게 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닭띠 연예인들이다. 닭띠생은 지능과 지모에 뛰어나고 앞을 내다보는 예견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날카롭고 단정하며 체계적이고 결단력도 있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이 때문에 연예인 스타 중에는 닭띠가 유독 많다. 정유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겠다는 닭띠 연예인은 누구일까. 대중과 만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2005년생 12세 아역 스타 김유빈에서부터 1933년생 84세 원로가수 명국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예인이 닭띠다. 가장 어린 2005년생 12세 닭띠 연예인에는 아역 스타 김유빈, 김지영, 홍화리와 리틀 싸이 황민우 등이 있다. 1993년생 24세 닭띠 연예인은 드라마 , 으로 스타덤에 오른 박보검, 가수와 연기자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이유·정은지, 국민 남동생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펼치고 있는 유승호가 있다. 이 밖에 1993년생 닭띠 연예인에는 힙합 스타 비와이, 최고 아이돌 그룹 엑소의 디오,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로이킴과 백아연 등이 있다. 1981년생 36세 닭띠 연예인 중에는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톱스타들이 아주 많다. 요즘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는 드라마 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나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최고 인기를 얻고 있는 톱스타 전지현, 등 수많은 영화에서 강력한 흥행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최고 미남 스타 강동원,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여성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조인성이 대표적인 36세 닭띠 연예인이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을 받으며 드라마 OST 여왕으로 등극한 거미와 린,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목소리 하나로 대중을 감동시킨 9연승에 빛나는 록밴드 국카스텐의 하현우, 매력적인 목소리로 여성 팬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박효신과 케이윌, 여자 힙합 뮤지션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윤미래, god 출신으로 시원한 가창력이 강점인 김태우 등이 36세 닭띠 가수들이다. 원조 걸그룹 SES의 요정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유진, 드라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유진, 예능과 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하는 송지효, 강렬한 연기로 존재감이 확실한 김래원, 부드러운 감성을 드러내는 이상윤, 훈남 이미지의 이동욱은 36세 닭띠 연기자이고 개그맨 허경환도 1981년생 닭띠 연예인이다. 1969년 48세 중년의 나이에도 대중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닭띠 연예인도 적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코믹 연기는 물론 중후한 연기까지 해내며 다양한 캐릭터 연기를 소화하고 있는 김승우, 작곡가·가수·예능 프로그램 MC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윤종신과 주영훈,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선도하는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 모델 출신 연예인 이소라, 높은 인기를 누리며 연기자로 맹활약하고 있는 하희라, 신애라, 윤유선이 48세 닭띠 연예인이다. 신세대 스타를 능가하며 전방위 활동을 펼치고 있는 1957년생 60세 닭띠 연예인도 많다. 최근에도 신곡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노사연과 최진희, 이용, 김수철, 팔색조 연기로 시청자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송승환, 김갑수, 강석우, 김보연 등이 대표적인 60세 닭띠 연예인이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무대 등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1954년생 72세 닭띠 연예인은 조영남, 임현식, 선우용녀, 현철, 이상해, 박인환, 박인희, 박일남, 장용, 최주봉, 김도향, 서유석 등이고 84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여전히 무대에 서는 원로가수 명국환,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 등은 1933년생 닭띠 연예인이다. 2017년 정유년, 자신의 해를 맞은 닭띠 연예인들의 새해 포부는 무엇일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대와 방송에 계속 출연하겠다. 84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가수로서 열정과 노래에 대한 애정, 그리고 팬이 존재하는 한 노래를 부르겠다. 2017년에는 닭띠 해인 만큼 더 많이 활동하겠다.” 원로가수 명국환의 새해 포부다. 조연 연기자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며 수많은 드라마에서 감초 연기로 빛을 발하고 있는 중견 스타 임현식은 “1969년 MBC 공채 1기로 연기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연기를 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지난 48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와 관객들을 만난 것처럼 올해도 드라마 등을 통해 시청자와 만나고 싶다. 특히 올해는 노년의 사랑을 멋지게 소화하는 멜로 연기에 도전하고 싶다”며 새해 바람을 피력했다. 여전히 청춘스타의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60세의 강석우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생활이 불규칙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올해는 라디오 DJ와 드라마 활동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이 갖고 싶다. 연예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소박한 소망을 밝혔다. 세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48세의 신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히즈 유니버시티에서 밟고 있는 기독교 교육학 박사과정을 충실하게 공부하고 싶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미국에서 부모를 잃는 한인 청소년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한인들이 입양해서 맡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올해 더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의 많은 한인들이 부모가 없는 한인 청소년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새해 목표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왕성하게 펼쳤던 사랑 나눔을 미국에서도 여전히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2월 출산해 아이 엄마가 됐지만, 여전히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36세의 전지현은 “현재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새해 목표다”라고 말했고 여성 팬뿐만 아니라 남성 팬도 많은 조인성은 “올해는 이전과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나 작품을 선택해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많은 중년 여성 팬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남동생 박보검은 “새해에도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국내외 팬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닭띠의 해인 2017년 정유년의 가장 큰 목표다”라며 원칙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바람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해를 맞은 수많은 닭띠 연예인들이 2017년 정유년에 어떤 활동을 펼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 2016-12-2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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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스키장
- 한 때 겨울의 꽃이라는 스키에 열광한 적이 있다. 가까운 곳은 양지스키장부터 천마산, 베어스타운으로 갔고 좀 멀리로는 강원도의 아주 예뻐서 인상적이었던 알프스스키장과 용평스키장을 다녔다. 백설의 슬로프를 멋진 11자 포즈로 스키 폴 대를 짚어가며 질주해 내려오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만 그건 잘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나는 A자형으로 간신히 타는 수준으로 시작했다. 나는 참 용감한 편이었나보다. 특별한 강습도 받지 않고 처음부터 무식하게 리프트를 타고 중급자 코스로 올라갔다. 남편과 아들의 도움으로 벌벌 떨면서도 슬로프를 다 내려왔을 때의 그 기분이 생생하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들 중간 슬로프쯤에 있는 간이 쉼터에서 커피와 스낵을 즐길 때도 나는 열심히 이, 삼십 분 씩 줄을 서서 리프트를 기다렸다가 올라가서는 5 분 만에 미끄러져 내려와 또 줄을 서길 반복하며 정말 열심히 탔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멋지게 활강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활기찬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고 나도 저렇게 탈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었다. 스키장 가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몸이 스키에 적응 돼가는 느낌이 들었다. A자로 스키를 벌리고 타는 것에서 약간 다리를 붙일 수 있었으며 언제인가는 모굴 이라고 하는 울퉁불퉁한 눈길도 리듬 있게 즐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또 재미있는 건 처음부터 스키를 식구대로 준비하고 스키복도 갖추었다는 점이다. 미국에 사는 시누이 가족이 방학이라 한국에 왔다. 큰집 작은집이랑 시누이 가족 모두 용평으로 스키 여행을 가기로 했다. 다들 모였을 때 시누이가 어쩌면 하나같이 스키복을 차려입었냐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외국에서는 청바지 차림으로 타는 게 보통이라면서. 세련된 시누이 눈으로 볼 때 울긋불긋 차려입은 우리가 좀 우습게 보인 듯했다. 이제 좀 리듬 있게 탈 수 있겠다고 즐거워하던 어느 날 사고를 당했다. 스키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내 무릎 위로 어떤 아가씨가 엉덩이로 누르며 덧 넘어진 것이다. 순간 나는 찌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냥 느낌인데 그런 소리가 난 것처럼 생각된 것 같다. 미안해요, 하고 그 아가씨는 내려가 버렸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구조 요원이 와서 인대가 늘어 난 것 같다며 나를 들것에 눕게 하고 모포로 얼굴까지 덮어주며 스키를 타고 나를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워서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모포를 살짝 내리고 옆의 풍경을 보았는데 너무 재밌고 신났다. 참 철없었던 시절이다. 그 후 두 달 동안 깁스를 해야 했지만, 스키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겨울철만 되면 스키를 즐겼는데 아이가 성인이 되니 자기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스키장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지금도 집 구석에 스키가 장식품처럼 세워져 있다. 안탄지 오래 되었지만, 추억을 생각하니 버릴 수가 없어서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다시 스키를 타라면 못 탈 것 같다. 이 나이에 넘어져서 어디 한군데 부러지기라도 하면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 슬프다. 겨울이면 하얀 눈밭에서 멋지게 스키나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냥 나도 한 때 다 해 보았다고 만족을 하며 외면하련다.
- 2016-12-22 16:07